종교개혁자 루터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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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1)루터의 생애

 

  마틴 루터는 1483년 동부 독일의 작센주의 아이스레벤에서 하층민인 가난한 鑛夫의 아들로 태어 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강건함을 지닌 광부였고 어머니는 신앙이 절실한 분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루터의 고향 아이스레벤은 남부 독일과 라인강 연안 지역에 인접해 있던 관계로 당시의 거대한 흐름인 知的 混亂과 經濟的 混亂에서 약간 비껴날 수 있었다.

  루터는 만스펠드 등지의 市立學校(Stadtschule)를 거쳐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Magister artium까지 수학을 하였으며  그 이후 法學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일련의 사건(그의 바로 옆에 떨어진 벼락에서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다음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을 겪은 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서의 자기 행로를 변형하여 그의 나이 22세인 1505년에 수도자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속세를 완전히 떠난 모범적인 수도자로서 수도원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무척 힘겨워하며 성직자의 길을 가게되었고 그 이후 비텐베르크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곳에서 신학부 교수로 재직을 하며 지도자 계급까지

올라가게 된다.

  루터는 선행을 강조하여 이신득의를 주장했으며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이루는 근간을 이룬다. 그 당시는 교회의 걸립을 위해 교회의 신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하는 일이 성행하였는데 그 와중에 심한 모순을 느꼈으며 이에 내걸었던“95개 조항”으로 인하여 문책과 함께 도망자의 길을 걷게 된다.

  루터는 1520년 10월 10일에 그해 6월 15일에 교황 레오 10세에게서 “EXURGE, DOMINE”라는 특별교서(마틴 루터로 하여금 60일 이내에 그의 모든 견해를 공식으로 취소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단자로 판정할 것이다.)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의 破門書를 공공장소에서 불태우며 더더욱 그의 투지를 강하게 보였다. 또한 그에 관한 문제의 그 위협 校書뿐만이 아니라 교회법령집, 기타 교황권을 지지하는 책과 문서들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1521년 1월 3일 루터에 대한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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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본인

문과 출교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1517년 10월말에 한 무명의 수도사에 의해 비교적 조용히 시작된 한 사건이 그 3년 후에 걷잡을 수 없는 대 사건으로 진전됨 셈이 되었다.

  1525-34년 사이 Warburgfh 도피하여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옮겨 적었다. 한편 이시기의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25년 결혼을 금기했던 성직자의 특권을 깬 카타리나 수녀와의 결혼은 성직자로서의 특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자체에도 개혁을 이루었으며  카타리나 수녀와의 사이에 2남 2녀의 자제를 두었다. 루터는 2중 적 성직자의 생활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모순을 극복하며 건강한 기독교적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이에 대한 많은 언급을 하였다. “만인 제사장”을 부르짖어 누구 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가정을 가지면 가정을 이끄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1532년 “뉘른베르그 평화협정”, 1536년 “비텐베르그 협약”의 성립은 프로테스탄트의 개신교회의 존립을 가능케 하였다. 구교에 의해 신교의 승인을 그의 생전에 보게되었으며 혁명적인 교육의 실천가였으나 개신교의 승인 뒤 그의 보수적인 성향의 성격을 보였다 한다.

  당시는 시대사적으로 르네상스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神本主義를 비난하던 인본주의 자들(에라스무스, 토마스아퀴나스)를 비난하며 신중심의 사고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는 신본주의에서 人本主義와 성경중심으로 변하여 르네상스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인본주의는 인간은 누구나가 이성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개발하여야하고인간의“완전성”(Perfektilitt) 에의 도달가능성과 “가소성”(Bildsam-keit)을 인정하고 모든 이는 신 앞에 동등하다는 平等性을 강조하여 동등한 權利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2)루터의 교육사상

 

  루터는 인간이 이해에 있어 救援論的 입장에서 아직까지 기독교적, 중세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하에 결국은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원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존재이며, 이때 구원은 전위적인 역사로서의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으며 인간은 구원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 인간은 “영의 나라”와 “세상나라”에 동시에 속하면서 그 곳에서 신의 질서가 지배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신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하나님께 봉사 Gottes Dienst)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교육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선한행위”(Gutes Werk)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율법(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하는일)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하나 복음(인간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일-구원)에 있어 구원을 받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다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보이고 있다.

  루터는 그의 교육사상에서 “두 왕국 설”(Zwei-Regimenten-Lehre)- “영혼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모두 신의 질서에 의해지배되어야 하며, 바로 이 두 나라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는“세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깨끗한 직업을 위한 직업교육을 통해 깨끗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내세를 강조로 현세를 중시하지 않았으나 루터에 의해 현실적 세계 또한 강조 되었다.

  “영혼의 나라”를 위한 교육이란- 목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복음선포를 위한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복음”,즉 성서 원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古典語 敎育(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을 해야한다.

  “세상의 나라”를 위한 교육이란- 세상 안에서의 질서를“지혜(Weisheit)”,“이성(Vernunft)”을 통해 유지하기 위한 능력의 배양을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예술”과 “언어”- 7自由敎科(septem artes liberales)와 모국어 교육을 통하여 완성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왕국 설” 은 모두 교육에 있어 언어의 중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Maxweber는 기독교 숭배의 나라들이 자본주의가 발달하였으며 개신교의 영향은 서구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훨씬 더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다 라 하였다.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은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니다라는“ 만인 제사장설”(Des allgemeine Priestertum)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문맹퇴치와 연결이 된다.

  교육은 성서에 제시된바 “신의 명령”(Gottes Gebot), 그것도 최고의 명령(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라는...) 이라 하였고, 교육은 자연의 법칙이 제시한 바 “인간의 책임”(인간은 先天的으로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고 양육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라 하였다.

 

2.루터 신학의 특징

 

 1) 호두의 핵을 탐구하는 신학

 

  루터는 신학의 과제에 대하여 초기에 이미 1500년대에 대표적이었던 생각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스콜라적 경향이나 또는 인문주의적인 경향과는 대립되는 것이라 할 수 는 없다. 루터는 가브리엘 빌(G. Biel)의 저서와 같은 많은 많은 스콜라 문헌들을 감명깊게 읽었으며, 수도원적이고 스콜라적인 신학의 새로운 경향들이 지닌 차이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신학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이해가 곧 전통과의 완전한 결렬의 의미는 아니며 루터의 신학적 주제들이 전통이 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겠다.

  루터의 신학적 문제의 모든면은 인간의 구원 문제였다. 구원(Heil)의 문제와 그 확신을 주는 진리(Wahrheit)의 문제는 정말로 신학의 중심이어야만 한다라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신학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친밀한 관계였던 아이제나흐 사제인 요한네스 브라운(Johannes Braun)에게 보내었던 1509년 3월 17일자 편지에는 “나는 처음으로 철학을 신학으로, 즉 호두의 핵을, 밀의 내부를, 그리고 골수를 연구하는 신학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항상 자기 판단 속에서 스스로 속는다. 우리는 언제나 자상하게 인도하시는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렇게 쓰여있다.

  루터는 1509년 3월 9일에 성서학사 학위(Baccalaureus bibicus)를 취득하였다. 그는 성서를 면밀히 주석 했으며 이때부터 철학과 신학에 눈이 떴을 거라는 걸 앞에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2)십자가 신학

 

  종교개혁에 있어 루터가 사용한 가장 유명한 용어는‘십자가 신학’이라는 개념으로 이 용어는 1518년에 창안하여 여러 군데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십자가 신학’이라는 용어는 스콜라철학과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어거스틴을 추구하는 새로운 신학적 노력과 스콜라신학에 대한 반대 및 성서 연구를 장려했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517년 9월 4일자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논제’와 관련해 1517년 11월 3일 루터에게 쓴 편지에서 셰울은 루터가 옳은 교리를 수호하고 있다 하여 그를 칭송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의 중요 내용은 反 스콜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창조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비 가시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아는 자가 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세상을 향하신 그의 뜻이 고난과 십자가에 표현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자가 참된 신학자이다.”

  영광의 신학자(Der Theologe der Herrlichkeit)는 惡을 善하다고 칭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칭한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자는 사안을 바로 직시한다. 하나님의 비가시적 존재를 행위에서 인지하고  보는 그러한 지혜는 부풀려진 것이며, 완전히 눈멀게 하는 것이고 완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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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파의 예배장면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의 날카로운 대립은 모든 스콜라 신학과 루터가 에어푸르트에서 알게된 스콜라적인 경향과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당시 이미 시작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신 인식에 대한 많은 견해들을 罪論과 恩寵論에서 처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하나의 論爭 形式(Kampfformel)이다.

 

 

 

 

  루터는 신 인식의 문제를 가지고 철학과 신학의 귀속문제(das Problem der Zuordnung)를 이해하고 있다.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창조를 근거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나 십자가 신학은 창조

로부터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영광의 신학)를 죄와 하나님의 심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동시에 또한 자신을 계시하시는 십자가만을 오로지 중요하게 여기고 영광의 신학 및 십자가 신학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구원의 문제를 신학의 중심 테마가 되게 했다. 하나님의 比可視的 및 그의 可視的 존재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질서를 통한 능력이라는 오캄의 구별과 유사하게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구분은 구원의 문제를 고려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 인하여 철학적으로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는 날카로운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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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하임 제단화

법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논할 때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완전히 새로운 진술을 이끌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CRUX sola nostra theologia) 라는 표현이며, ‘Crux probat omnia’는 십자가가 모든 것을 시험하듯 ‘십자가가 모든 것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오로지 십자가만이 심판자요 진리의 증인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첨예한 진술들은 논쟁의 와중에 생겨났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3) 하나님과 인간의 인식

 

  1532년 시편 51편 2절에 대한 강의에서 루터는“하나님과 인간을 인식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이며 본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신학적이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학의 대상은 곧 죄인이며 잃어 버린 인간인 동시에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시다.”라고   이전 생각의 연속과 종교개혁적인 새로운 성찰이 예리하게 표현된 신학의 정의를 하고 있다.

  신학에 대한 루터의 정의는 어거스틴 계열의 신학자와 연계되어 있으며 그의 정의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자신의 독특성을 갖게 되었고 시편 강의에서 벌써부터 “먼저 겸손하지 않고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낮아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다. 왜내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하며 하나님 인식의 문제를 오로지 지성(intellectus)에서부터 시작하려는 시도를 루터는 거부 하였다.

  루터는 1532년 신학의 대상에 대한 정의에 이전의 규명과 함께 완전히 獨自的인 방식으로 傳統을 재수용 하였는데 그에게 있어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인식과 자신의 인식으로 하나님 인식과 자신의 인식은 오로지 창의론 과 연관하여 고찰 될 수 있으며 이식문제의 논의에 있어서 처음부터 창의론 을 연구해야만 하며, 창의론 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 그 타당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고 하고 있다. 이는 즉 하나님의 인식과 동시에 자신의 인식은 참 자기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며 그곳에 하나님 인식이 동시에 있다는 이치와 같다라고 보는 것이다.   

 

3.루터신학의 역사적 발전

  

 1)루터파의 宣傳과 轉派

 

  루터가 신약성서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옮기면서 바르트부르크에 은거해 있는 동안 그의 사상은 정열적인 제자들의 노력과 여러 가지 선전 방법 덕분에 계속하여 퍼져나갔으며 인쇄술(1519년 111권의 신간이 독일어로 출판, 1523년에는 약 500종의 도서 출판)의 발명 또한 그의 사상이 전파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던 걸로 보여진다.

  루터는 신앙의 전파에 책을 읽을 수 없었던 일반인들을 위하여 음악과 상징적인 그림들이 쓰여졌다. 1523년부터 루터는 독일어로 찬송가를 작곡해 낱장으로 인쇄하여 마을마다 부를 수 있게 하는 등 쉽고 이해가 빠른 루터의 홍보 물은 여러 사람의 몫을 대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루터에 대한 인기는 과히 신앙적인 것이 되었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제국회의와 의회는 福音主義 운동을 막는데 우유부단함과 무능을 드러냈고, 독일은 점차 宗敎改革의 열기에 휩싸였다. 1522-1524년의 세 차례의 뉘른베르그 의회의 소집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체 공 의회에 일임이 되었고 더군다나 xzhstmxkscm 시 당국은 루터의 정 죄 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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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 작품

름스 칙령의 시행을 거부했고 에르푸르트, 마그데부르크, 브레멘,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들도 콘스탄츠의 예를 따랐다. 그러나 루터의 승리는 점진적으로 이루어 졌다.

  인쇄물과 강론과 미사에 나타난 주요한 변화들- 설교의 중요성 강조, 라틴어 사용중지, 미사의 희생제적인 의미 제거-로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구교 의식의 분명한 폐지와 새로운 공식 예배순서의 설정으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구교와 최종결별이 이루어지기까지는 10년이나 걸리게 되었다.

  1521년, 루터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메라히톤은 자신의 저서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에서 루터 신학을 처음으로 체계적인 설명을 하였다.

  루터는 구교의 미사를 대체하는 의식을 확정한 후(1526, 1529)에 완성한 두 개의 기본 개념을 이 논문을 통해 교리로 정착시키려 하였으며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의 점차적인 중단과 세 가지 형식 즉, 첫째-신자들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복음 강론 같은 형식을 부분적으로 포함한 설교, 둘째-찬송가( 36개의 루터 작곡)과 셋째-성찬식(빵과 포도주의 성찬의식)등의 형식에 맞춰 예배의식을 진행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구원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켜주며 수많은 중보자 들을 없애고 의식을 더욱 분명히 만든 루터 주의는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와 내밀한 개인적인 신앙심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루터는 ‘머리 수만큼이나 많은 교파와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성직자에 대한 규율을 정하는 것이나 검증되지 않은 집단의 발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치적인 힘에 의지 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작센의 선제 후에게 요청해 이 지역에서 신학자와 법리학자들이 소 교구들에 대해 정기적인 감사를 요청했으며 이들은 감사를 통해 교회의 재산을 조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說敎者를 감사하는 한편, 폐습을 억제하는 일을 했다.

  이 조직은 교구를 관할하는 行政監督의 지명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곧 루터파에 속하는 지역들이 이를 모방하여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제후들이 성직자의 재산을 회수 할 수 있게 되고 宗敎的인 査案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자 종교개혁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확산되어진 종교개혁은 영주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改宗과 함께 그들의 영지에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황제는 종교개혁의 중단의 명령과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명령하자 제국의 도시 3분의 2가 로마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14개 도시와 여섯 제후가 과감히 이 경전에 반기를 들었다.

  1525년 종교개혁의 탄압으로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으며 1521년 5월 추기경 울지는 루터의 서적을 불태우도록 지시하였고 국왕 헨리 8세는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을 비판하는 저서를 펴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북부유럽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는데 1544년에 스웨덴의 공식종교로 루터파가 인정되어지고 이시기에 등장한 칼뱅주의는 새로운 활기를 띠게 한다.  

 

 2)신앙과 그리스도의 따름

 

  신앙에 대한 부분에서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상호 병존하고 있었다. 루터는 무조건 따르고 믿어야만 하는 3가지 신앙의 기본 진리(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는 보응자(remunerator)라는 것, 그리고 그는 拘束者(redemptor)라는 것)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루터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의 인성에 대한 언급으로 새로운 강조를 보이고 있다. 루터는 하나의 간주행위인 당시의 신앙이해를 극복하고 있으며 신앙은 오히려 지금 現在에 救援과 生命을 일으키는 것, 인간 되심이 우리의 구원이며,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 하셨다. 라 말하였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과 신앙을 서로 긴밀히 연결시키며 롬바르두스의 여백주기에서 볼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예고하고 있다.

  초기 여백 주기는 신학과 교회이 倫理的 形態와 방향에 대해 엄청난 批判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루터 신학이 가진 새로운 점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며, 루터는 당시에 성행하던 신학을 무작정 추종하지 안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의 신학과 교회의 영역을 그의 비판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이 절대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자체가 아닌 신학에 미치는 그 영향을 비판하였다. 또한 철학은 루터에 의하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지만, 그로 인하여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도 초래하였다.“숱한 철학자는 새로운 개념 외에는 어떠한 것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 어거스틴의 언급은 루터로 하여금 그 시대의 철학에 대하여 비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였다.

  루터의 신학은 하늘이요, 인간의 땅이며 그리고 인간의 思索이란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루터가 강조하듯이 삼위일체와 같은 神學的 陳述은 이성을 통해서는 결코 증명 될 수 없고 오로지 성령이 말하기 때문에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우둔한 자를 통해 믿는 자를 기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라는 이러한 언급들은 루터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에 미친 그의 영향 및, 哲學과 神學의 혼합에 대해 비판했던 오캄주의적 전통에 그 출처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루터의 비판은 더 급진적일 뿐만이 아이라 성서적 근거와 사고로 귀착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캄주의의 비판과는 구별이 된다.

   전체적으로 초기 루터의 신학적 입장에 관해 관련된 본문을 자체 해석하되, 그것이 후기의 宗敎改革 神學을 예시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으며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宗敎改革적인 創意論이 없으나 다른 한편 여러 가지 중요한 점에서 중세 후기의 오캄주의적인 신학적 틀을 탈피한 것만은 분명하며 특히 罪論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과 신학에 대한 오캄주의적 규명과는 달리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한편으로는 어거스틴을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를 의지하고 있다. 그 자신이 여전히 수도사로서 살아가면서 교회와 신학의 특정측면에 대해 방대한 비판을 했다는 것도 중요하나 아직은 이러한 비판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은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다.

 

 3)루터의 면죄부 비판

 

  1517년 가을부터 시작된 면죄부 논쟁은 우선 다른 논쟁의 연장이거나 혹은 다른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생긴 새로운 국면으로 보일 수 있었다. 새로운 갈등의 소지들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주제들이 급진적인 단면을 지니고 있음은 1518년에야 비로소 명백해졌으며 16세기초에 人文主義者들과 스콜라 학자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의 공적인 대표자들 사이에 벌어진 많은 논쟁들이 루터로 하여금 그에 대해 입장을 표명토록 원인을 제공했다.

  1516년 시작된 비텐베르그 대학 개혁 움직임들은 비록 당시 루터가 에라스무스에 대하여 신중한 留保的 態度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윤리적인 인문주의자들과 상당히 근접할 정도로 밀착시켜 주었다.

  1516년 이후 루터는 새로운 신학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타났다.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얻은 통찰을 더 이상 강의실의 학생들이 아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학문적인 대중에게 제시하였으며 이에 대한 동기는 그 자신만이 아닌 학생들에게서 起因 되었다. 그들은 루터의 로마서 강의에서 들은 것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으나 이러한 노력의 일차적인 정신적 주창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루터 였음을 알 수 있다.

  1518년에 완성된 면죄부의 출판은 루터와 로마의 갈등을 여러 차원에서 발생시켰으며 95개의 논제 및 면죄부 논제해설을 통해 제기된 문제들은 많은 글을 통해 계속 취급되었고 그로 인하여 양측의 입장이 더욱 명쾌하고 정확하게 되었다. 그 후 루터에 대한 교회 소송 준비가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루터의 주장뿐만이 아니라 글을 통한 갈등에 대해서도 반응이 생겨났다.

  1518년 여름 이후 세속정부의 루터 문제에 대한 개입은 1518년 8월 5일 교황에게 루터로 인하여 신앙의 일치가 끝나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하여 서신을 띄웠고 독일 제국 회의가 루터를 처벌할 교회의 대책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돕고자 했다.

  1518년 8월 7일 로마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그는 반박의 글을 썼으며 여기에서 루터는 노골적으로 교황과 공의회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피력했으나 루터는 로마 교회가 지금까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며, 참된 신앙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교황에 대한 판단은 루터에게 더욱 예리해져 갔다. 1518년 말 루터는 처음으로 교황이 아마도 적 그리스도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4)로마교회의 개선점에 대한 논제

 

  루터는 로마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의 개선점을 제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이와 같이 무서운 정황 가운데 어떤 개선을 가져올 만한 제안을 하기에는 너무나 변변찮은 존재이나 여전히 바보스런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으며 또한 할 수 있는 한 세속적인 당국자나 일반 공의회를 통하여 무엇을 할 수 잇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개선점-루터는 모든 제후와 귀족과 도시는 그들의 예하 사람들이 로마에 첫 수입세를 지불하는 것을 담대하게 금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교황은 계약을 어기고 첫 수입세를 강탈하여 전 독일 국민에게 손상과 모욕을 끼쳤다 하여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두넙째 개선점- 로마의 임명권 금지로 교황은 로마의 책략 곧 위탁제도, 보좌제도, 보류, 양도예약, 교황의 달, 통합, 연합, 팔리아, 상서원의 규칙 및, 악행 등으로 아무 권리와 권리도 없이 독일의 모든 재단들을 강탈하고, 또 재단들을 독일을 위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로마의 외국인들에게 주고 매각한다. 하여 교황은 개교회 당국자에게서 그들의 권한을 빼앗고 주교들을 바보와 명목상의 지도자에 지나지 않게 하며, 그 자신의 교회 법규와 본성과 이성에 거슬러 행동한다.

  세 번째 개선점-사도들의 통치와 교황의 통치를 벗어난 개교회의 權利回復으로 고위성직자의 권한 박탈과 그 예하 인들의 권위회복을 통한 자유보장을 찾자는 취지가 강하게 베어 있다.

  네 번째 개선점-주교의 법정에서 세속적인 문제의 배제하자 라 하여 주교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난폭한 착취의 금지를 말하며, 그들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만 관여하며 돈, 재산, 생명, 명예 등에 관한 문제들은 세속적인 재판관들에게 맡겨야 한다. 영적인 재물은 돈이나 육신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앙과 선행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개선점-독일 교회의 조직으로 로마 교황청의 관장 하에서가 아니라  독일 교회가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의 최종적인 공소원이 되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독일 교회의 조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개선점-보류제도의 폐지

  일곱 번째 개선점- 보류사항의 폐기

  여덟 번째 개선점-교황 가족의 축소, 즉 교황의 가족들은 교황 자신의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하며 교황 궁정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에 있어 모든 제왕의 궁정보다 사치스러워서는 안된다. 이는 로마교도들의 가지고 있는 재물과 허영이 적다면 더 잘 기도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며 저 옛날처럼 신앙문제를 다룰 자격과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홉 번째 개선점- 주교의 서약에 있어 엄격하고 두려운 서약은 폐지되어야 한다.

  열 번째 개선점-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있어 교황을 황제의 즉위 시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우는 일 외에는 어떠한 간섭도 황제에게 할 수 없다.

  열 한 번째 개선점- 솟권과 나폴리 왕국, 교황은 스스로를 억제하여 손을 떼고 또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하여 아무 칭호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열 두 번째 개선점- 교회 국가들, 볼로그나, 이몰라, 비쎈짜, 라베나., 그리고 안코나 국경과 로마그나 및 다른 이태리 지방에 있는 모든 영토들에 대하여 동일한 생각을 가져야 하며 아무러 소유권도 가져서는 안 된다.

  열 세 번째 개선점- 교회에 대한 경의로 교황의 발에 입을 ?추는 행위는 비 그리스도적 이라 하여 이를 금지 할 것을 요구하며 그이상의 행위들에 대하여도 강력히 반대의 요구를 하였다.

  열 네 번째 개선점- 로마 순례의 폐지, 로 좋은 본을 보지 못하는 무분별한 로마의 순례를 반대하였다.

  열 다섯 번째 개선점- 탁발 수도단의 개혁, 서약은 많이 하나 거의 지키지 않는 무리들에 대한 내용으로 형식위주가 아닌 진실된 행위로의 개선을 말하고 있다.

  열 여섯 번째 개선점- 성직자의 결혼, 성직자의 건강한 가정의 이룸으로 건강한 사고의 신앙으로의 유도를 말하고 있다.

 수도원 가운데서 보류사항의 폐기, 죽은 자의 미사 폐지, 성사금지의 폐기성자의 날 폐기, 사면권의 확대, 순례의 금지, 특권의 금지, 거지 생활의 금지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 무용한 미사 그지, 성우회와 면죄, 보헤미아 사람들의 문제, 대학교, 교회법, 세속법, 신핫, 신학교재, 학생수의 제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경제개혁과 사회개혁, 의복의 사치, 조미료 거래, 연부금, 거래, 과도한 음식, 사회악, 독신생활과 그 폐혜등을 거론하녀 그의 개선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4. 宗敎改革에 미친 여러 사안

 

 1) 宗敎改革의 原因

 

  신의 섭리에 따른 종교개혁은 19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히 중세교회의 악습에서 비롯됐다는 전통적인 학설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학설로 대체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요인은 물론 정치, 경제, 인구통계학적인 원인을 분석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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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판 성경으로 제자들에게 구술하는 루터

  제네바에 있던 칼뱅의 계승자 테오도루 스베자는 종교개혁에 대해 매우 학문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루터의 야심과 17세기의 성직자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改革理念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톨릭 신자들에게도 중세 교회의 敎理와 慣習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인식되어 졌으며 이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신성 로마 제국을 분열시킨 깊은 수렁을 강조하며 그것을 종교개혁의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터와 독일의 상황 때문이라고 보는 프러시아의 역사가 레오폴드 폰 랑케등 19세기 역사가들에 의해 새롭게 설명되어 지고 있으나 마슐레는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의 원인을 찾은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기폭제를 찾아냈으며 배타 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틀 속에서 루터의 혁명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현대의 사료에 있어 루시앙 페부르의 글이 발표된 이래,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의 부패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거나 종교 내부의 문제에만 전적

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간의 단순한 해석에 대하여 현대의 사료는 적절한 지적과 함께 종교적인 목적을 재 확립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시한다.

  신앙적인 문제와 구원의 문제에 민감한 피에르 쇼뉘는 종교 개혁사에서 유럽 라인강 유역의 특수성을 강조하였으며 상업도시의 밀집과 높은 문맹 퇴치율을 자랑하는 이 지역은 새로운 사상과 보급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피에르 쇼뉘는 종교개혁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서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축약될 수 있으며 이들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우며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의 신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고 작센 지방 교회에서 실험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원 증명서의 거부라는 행동과 성서를 통해 확립되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그의 종교개혁이 어떻게 댔을지 알기 어렵다. 교회를 성서의 든든한 중심 위에 다시 세웠다고 하는 종교개혁 과정은 대학의 학문적인 분위기와 비슷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는 인문주의 환경에서 시작되었으며, 한편 츠빙글리에게서 비롯된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은 유럽 중부, 라인강 유역, 알프스 산맥의 문화적인 성과들을 모두 결집해 주었으며 지리적인 主權體로서 하나의 유럽은 다루기 힘든 거대한 덩어리인 사회적인 집단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하나의 신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상, 하느님께서 증거를 요구하실 때 사람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은 무엇을 근거로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서를 강조하고 있다.

  루터주의의 영향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보이며 여러 가지 복음주의적인 기대가 엇갈리며 우유부단하게 진행되었던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전차 칼뱅주의로 정착하였으며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은 제네바를 이상적인 상태로 보게 되었다.

 

 2) 칼뱅과 복음주의 운동

 

  에라스무스와 함께 프랑스 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르페브르 데타플은 사람들에게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인간이 공로, 즉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배격하였다.

  또한 칼뱅은 성인과 성 유골에 대해 경배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으며, 그는 우상숭배의 관습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해가 된다고 보는 우상 파괴주의 자였다.

  종교개혁과 예술에 있어 예술에 대한 종교개혁의 기여도는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츠빙글리와 칼뱅이 성화에 대해 보인 공공연한 적대감은 우상파괴주의 운동과 함께 예술의 창작 정신에 대한 障碍要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개신교의 다양한 사상이 특정한 예술양식에 영감을 주었고, 그에 대한 밝은 미래를 약속하였다.

   모든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음악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은 루터였다. 그는 성화에 있어서도 칼뱅과는 달리 관용적인 입장이었다.

  종교개혁에 있어 수많은 종교전쟁은 그 폭력성 때문에 동 시대 인들에게조차 전대미문의 일로 받아 들여 졌다. 사실상 1560년 이후는 광기에 가까운 신앙과 이단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말세에 대한 불안감이 대 학살극 같은 참혹한 사건들을 불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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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 교인들의 예배

 3)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의 세계화한 종교

 

  루터와 칼뱅의 뛰어난 업적과 영향력 면에서 신중한 비교가 필요하다. 루터가 라틴어의 성서를 모곡어인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독일의 정체성을 확림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칼뱅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국제적인 칼뱅주의’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루터주의는 발생지인 독일과 스칸디아 반도 등지에 한정되어 남아 있게 되었다. 이에 비해 칼뱅주의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네덜란드 교회를 세우고, 영국 교회의 반대파를 형성하고, 마침내 미국의 기독교계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계속 확대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인 팽창을 거듭해 세계를 지배하게된 영국의 그늘 아래에서 도처로 수출된 영국 교회조차도 성직제도나 예배의 형식에서 칼뱅주의와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자체가 칼뱅주의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실제로 칼뱅주위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받으며 칼뱅의 사상적인 영역 안에서 그 틀을 다진 것이었다.

  이처럼 칼뱅주의가 경이적으로 세계화를 이루게 된 진짜 원인은 칼뱅주의자들이 가진 사상 때문이다. 우선 칼뱅주의는 서양세계의 급속한 정치, 경제적인 발전에 발을 ?추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현대적인 입헌정치에 합당한 민주주의적인 원칙들을 보여준 것도 칼뱅주의다.

   더욱이 칼뱅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국가에 대한 개념이 반민주적이며 절대주의여서 저항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복종만 주장하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동업조합에서 비롯된 완고한 조직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루터주의의 보수적인 태도와 칼뱅주의가 구별되는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5.결론

 

  루터의 출현은 종교적인 해방과 민족적인 해방에 대한 이중의 상징으로 전독일인에게 환영을 받았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루터와 함께 독일어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일 민중의 10분의 9는 격심한 소요사태와 휘말리게 되었으며 독일 근대 역사의 중심 드라마는 플랑드르에서 등극한 황제가 로마교회에 충실한 채 남아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였다.

  카를 5세와 개신교 제후들의 대립으로 시작해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이르기까지 300년 이상 독일이 분열되어 골육상쟁을 겪는 동안 독일민중의 공동체 의식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고,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이 그것을 널리 전했다.

  모든 루터파 제후가 진심으로 바라지도 않았지만, 카톨릭 황제에 대한 개신교 신자들의 충성심은 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민족은 프랑스처럼 국가적인 응집력 속에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완전히 대세를 잡지 못한 영방국가적 다양성에서 형성되었다.

  이에 역사가인 요제프 로방은 를 전혀 이루고 있지 못하던 독일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루터가 공헌한 점을 장조 하였다.

  루터주의는 신앙만이 아닌 교육에 있어서도 귀족에게만 국한되었던 점을 탈피한 자국어의 교육(공교육의 강조)으로 문맹퇴치를 선두적으로 이끌며, 인간의 이해에 있어 구원론적인 입장으로 중세적인 사고의 탈피를 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참고문헌-

 ·올리비엥 크리스티 저《종교개혁》

 ·베른하르트 로제 저 《마틴루터의 신학》

 ·브렌다 볼튼 저 《중세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 저 《종교개혁 3大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