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는 병리학이 정신적 질병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질병의 치료술이 종교의식과 결부되어 환자들은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이나, 사원, 토템, 샤머니즘적 성소를 찾았다. 오늘날도 그런 유형의 질병치료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또는 그런 시간에 기도를 드리면 실제에서건 상상에서건 병에 차도가 있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낫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좀더 엄밀히 말해 인간이 계몽되면서 해부학적 지식과 과학적 증거의 도움으로 인해 정신의 힘에 대한 신뢰는 많이 떨어지고, 실증적이고 국부적인 힘에 대한 신뢰가 지배적으로 남게 되자 정신적 효능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부분으로 축소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을 대하고 있는 우리는 사실 어떤 패러독스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을 비의적이고 마법적인 정신영역에 적용시킨다는 이 논문의 의도가 완전한 패러독스일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패러독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손치더라도 그 패러독스를 인식하는 것 자체만도 하나의 정신적인 영역을 인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카타르시스의 개념부터 살펴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문학에서 중심개념이 되어온 예술/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점차 축소되는 것 같다. 문학이 종교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퇴색하면 할수록, 현대 사회에서 종교나 그것의 후기 문화적 기능인 예술이 퇴색하면 할수록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문학이 가졌던 기능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원시제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술이 원시제의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험적으로 많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지만 고전적으로 받아들여왔던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살펴보는 것이 논의의 전개상 바람직하다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종교적 제의가 곧 비극이었다. 비극, 즉 trag-odia (영어 tragedy 독일어 Tragödie)는 숫염소 또는 산양(trag)과 노래(odia)가 합성된 말로 숫염소를 잡아놓고 노래를 한다, 즉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에서 아름다움(美)의 근원을 제물인 양(美=羊+大)의 크기에 둔 것과 유사한 제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빌어 논의하겠다. 다만 제의(비극)에서는 어떤 탄원이 있었고, 그 탄원이 곧 카타르시스의 실체였다는 사실에는 개연성이 있다. 이런 현상은 샤머니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무당은 조상신을 불러오고 그 조상이 願을 이루게 함으로써 (내 묘지를 잘 써달라던가, 누구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던가, 어떤 怨을 풀어달라던가) 굿을 청한 사람의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주술의 과정을 실천한다. 플라톤이 예술가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바 있고, 국가론을 쓴 동기를 찾은 것도 이런 주술적 상황을 어떻게 합리적인 상황으로 이행시킬 것인가 하는 데서 출발했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비극은 샤머니즘과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영지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정신현상을 되도록 이성적인 범위에 축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문학의 종교적 기능을 축소함으로써 문학의 영역을 가능하게 했다(poietike란 말이 시작법 또는 시학이라는 뜻에서도 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만든 장본인이다. 『시학』의 제6장에 보면 카타르시스에 대한 간결한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물론 천병희의 번역에는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만 번역자 또한 이를 의식해서 “학자들간에 ‘감정의 정화’를 의미하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하는 의학적 견해가 있다”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a)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이들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
b)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
c)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묘사를 통해서 이러한 사건의 명징화를 성취한다.
이 세 가지 해석은 물론 그리스어를 번역한 데서 오는 문제이긴 하지만 카타르시스 개념과 문학/예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a)의 번역문에 나오는 ‘이들 감정’이란 불쌍하다, 끔찍하다는 뜻의 연민과 공포를 말하고, b)의 번역문에 나오는 ‘이러한 감정’은 연민이나 공포 자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화되지 못한 억압된 감정영역 전반을 뜻한다. 그래서 a)의 해석은 정화이론(淨化理論) purgation으로 b)의 해석은 조정이론(調整理論) purification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들 해석 모두가 비슷하고 영역한 언어도 비슷해서 그 자체로는 변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들을 원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정화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음악의 카타르시스를 다루고 있는 『정치학』의 대목을 원용한다. 정화이론은 카타르시스를 재귀적 과정으로 보고 있다. 즉,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킨 뒤에 관객 자신의 연민과 공포를 다시 몰아낸다는 뜻이다. 플라톤은 비극이 연민을 환기하여 관객들을 겁쟁이로 만든다고 『국가론』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나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플라톤의 생각을 반박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a)의 해석에는 몰아내고 정화하기 위해서 격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 들어 있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도 무시무시한 모습(그로테스크)이나 일그러진 얼굴, 정신 분열적인 현실묘사가 예술에서 가능한 것은 역으로 이러한 예술의 정화기능을 이용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고트프리트 벤의 ⌈아름다운 청춘 Schöne Jugend⌋같은 시에 나오는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은 독자/환자에게 현재 나의 일그러진 모습이 저것보다는 낫구나 하는 안도감을 몰고 올 수 있다. 즉,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이 독자의 추하고 일그러진 의식을 몰아냈다는 뜻이다. 이런 정화라는 개념은 이미 고대의학에서 쓴 동류요법(同類療法)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의사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열병은 열기로 다스리고, 한기는 한기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의 요법이다. 프로이트 또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였다. 즉, 그는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최면 하에 회상함으로써 신경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 요법을 “정화요법”이라 부른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류요법에 의거한 정화이론에 대한 b)의 반대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치게 플라톤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 비판적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 감정과 격정이 위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감정이 이성 못지 않게 인간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그 자체로서 해로운 것이 아니며, 다만 적절히 제어되지 못하였을 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이나 격정은 적절히 통제되고 조정되어야 (즉, 배설돼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조정이론이다. 그래서 문제의 대목을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연민과 공포가 적절히 조정되지 않았을 때 해로울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의 장점은 감정을 몰아내는 것보다는 적절한 연민과 적절한 공포가 유익하다고 본 점이라 할 수 있다. 정화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근거한다면, 이 조정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미덕 Tugend⌋ 제7장에서 열거한 다양한 미덕들의 중용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격분과 무감각 사이의 적절한 감정이 ‘건강한 감정’이라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카타르시스란 일종의 정신적 길들이기가 될 수 있다. b)의 이론을 정리하면, 비극을 관람하면서 관람객은 ‘연민과 공포’같은 감정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정화이론이나 조정이론이나 플라톤에 대한 대답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정화이론이 플라톤이 싫어한 (동시에 인정한) 플라톤적 감정관에 의존하고 있음에 반해서 조정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감정관에 의존하고 있다. 오늘날 치료에서 감정치료와 인지치료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화이론과 조정이론이라는 두 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오늘날 의학이나 분석과학에서 사용하는 치료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라 할 수 있다.
c)의 이론은 치료의 관점에서는 중요하지 않지만 문학 이론적으로 우리의 논의에 필수적인 만큼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훈적 문학일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이론과는 상반되는데 바로크 시대나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듯이 이 이론은 문학을 배설이나 카타르시스로 보지 않는다. 요컨데 이 이론은 문학을 통해 악인들의 참혹한 운명으로부터 그들이 보여주는 악을 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공자나 주자의 가르침과도 매우 흡사하며 이것은 예술과 문학의 종교적 기원보다는 합리적 기원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기실 우리 동양에서는 카타르시스 기능이 비극적인 면에서보다는 희극적인 면에서 더욱 강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유교와 불교가 공존했던 것을 보면 어떤 특정한 문학 형식만이 유일한 치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는 문학의 종교적 기원을 강조하고, 인간정신에서 그런 종교적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병을 치유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식은 가시적이고 선형적이지만, 삶은 마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c)와 같은 제3의 해석이 오늘날 문학이론이나 예술이론에서 상론되고 있는 바, 그것을 우리는 명징이론(明澄理論) clarification이라 칭한다. 이 이론은 앞의 두 이론이 모두 관중심리학 내지는 독자심리학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시에 대해 거론했지, 심리학에 대한 사변을 펼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문제의 해석을 시/문학이론으로 파악하려 한다는 점은 오늘 우리가 대하는 문예학의 행위와 같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 번역은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사건의 카타르시스를 주장하고 있어 도전적 해석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경험을 일종의 통찰 경험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즉, 비극/문학/예술 경험은 실생활에서 경험했다면 고통스러웠을 터이나 연극/문학/예술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이 즐거움은 깨달음, 즉 인식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인식은 사건진행과 구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발견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비극의 기능은 명징화를 뜻하고 이것이 카타르시스, 즉 명징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현대의 미학/문학이론을 그대로 고전에 소급해서 적용시켰다는 혐의가 짙다. 사실 이런 이론은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보다는 아이스테시스 aisthesis 기능을 강조하고, 또한 현대로 오면서 예술/문학이 점점 더 성찰의 성격을 띠면서 생긴 견해라 보면 옳을 것이다. 독서치료를 인식의 구조를 바꾸어 재인식시킴으로써 감정의 평정을 얻게 하는 방편으로 본다면 실제로 이 이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을 감정/성찰이라는 이분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이들 이론들은 독자/관람자/청자/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이것이 어떤 문학/예술 수단을 독자/환자에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임상학적 관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다만 현대의 문학이론이나 문학은 그런 기능을 점차 포기하고 메타적 영역으로 넘어 갔기 때문에 조형적인 tektonisch 문학연구에는 실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문학치료의 과정을 통해 문학이 과연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문학치료 |
문학치료 영역은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영역이다. 심리학에서 문학을 치료나 환자의 회복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시도한 경우는 있으나 아직 체계적인 성과는 없는 실정이다. 음악이나 미술치료의 영역이 국내에서 시도되고 있기는 하나 문학치료를 포함한 예술치료의 이론적 토대 및 임상연구 결과는 전무한 편이다. 더욱이 문학영역에 있어서도 구체적인 경험의 양태를 토대로 연구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아마 문학이란 이론적, 학문적 영역과 심리치료라는 실증적이며 실제적인 의학영역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말에 들어서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 실용성과 기능성을 겨냥한 움직임으로 인해 이 연구분야가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학이 구체적 귀결을 남기지 않는다는 (물론 부분적으로 귀결을 남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문학의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특히 치료적 관점에서 볼 때 약점이기도 하다. 기존의 많은 문학연구가 (특히나 외국문학 연구에서) 구체적인 심리적, 사회적 바탕 없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구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문학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감정이나 인지를 연구함으로써 문학연구에 실용적인 전환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1. 개념정의
문학의 기능은 카타르시스와 아이스테시스란 개념으로 집약할 수 있는 바, 이미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관으로까지 소급해 간다는 점을 앞에서 밝혀 보았다. 이것을 통해 현대로 오면서 ― 문학이 자율성을 얻으면서 ―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약화되고 아이스테시스 기능이 강화된다는 점 또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기능이 문학치료에 어떻게 응용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문학치료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독서치료 Bibliotherapie(Biblion = 서적, 문학 therapeia=치료, 이 외에도 독일어권에서는 Behandlung, Pflege라는 뜻도 포함함)와 글쓰기치료 Poesietherapie (poiesis〉poietike 만들다, 글짓다)이다. 환언하면 문학치료는 문학, 즉 읽기와 쓰기를 통한 치료라고 말할 수 있다.
독서치료Bibliotherapie: 책읽기 (문학적 소재, 인생경험담, 유사한 경험) 글쓰기치료Poesietherapie: 텍스트 만들기(시, 산문, 일기, 편지, 고백록 등등)
문학치료는 협의의 의미에서의 심리치료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키틀러와 문첼의 정의를 따르면 의학이나 정신과 및 심리치료적 진료에 수반되는 대안으로 이용될 수 있다. 광의의 의미에 있어서 문학치료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거나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삶의 대체물로 이해할 수 있다.
치료는 이런 광의의 측면에서 이해할 경우 전문 과학으로 좁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심리위생학적인 조치로서, 구체적 처방으로서, 선택한 문학을 수단으로 하여 삶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성을 함양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문첼이 책읽기 자체만으로도 문학치료가 될 수 있다고 본 반면, 코르넷Cornett 은 독서치료의 개념을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해하고 있다.
독서치료는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정립된 분명한 목표를 지닌 계획적인 조정이다. 환언하면 필요성이 인식되고 이 필요에 대해 특수한 책이 선택되고 경우에 따라 특수한 사람이 있어야 하고, 시범과 계획이 고안되고 수단이 마련되어야 독서치료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코르넷이 의미한 독서치료는 계획된, 환자의 일정한 문제를 겨냥한, 그야말로 목적의식을 갖고 전개되는 치료를 말한다. 교사나 교수, 상담자, 심리치료사가 추천해준 책들은 일반적으로 사보는 책과 같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그가 문제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병이나 병적 소인으로는 1. 사회적 불안, 시험에 대한 불안 2. 우울증 3. 분노, 공격성 4. 성적 장애 5. 심리장애적 심장병 6. 자기불신 7. 술, 담배, 마약중독 8. 이성문제 9. 언어장애 10. 부적응아 등이다. 그러나 나는 확대된 의미의 독서치료를 의미할 뿐 아니라 독서의 영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구체적 병인에 대한 치료는 이차적 관심일 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점 모두가 문학의 일반적 특성인 1.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I hear you) 2. 너와 함께 하겠다(I am with you) 3. 너를 이해할 수 있다(I understand you) 4. 너를 도와주겠다(I care you)는 심리치료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치유의 영역에서는 1. 문제를 통찰하게 하고 2. 긴장을 완화시키고 현재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며 3. 자기의 문제를 끄집어내어 토론하게 하고 4. 주의를 돌려 외부로 향하게 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2. 문학치료의 이론적 배경
문학치료의 이론적 토대는 아직까지 그렇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국제적으로 약물치료 분야에서 선구자로 이미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예술치료 측면에서도 전문가인 페촐트 Petzold는 현상학적, 심리분석적인 입장이 문학치료의 이론적 영역의 명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페촐트와 오르트 1985). 그는 메를로-퐁티 Merleau-Ponty의 프랑스 현상학파와, 라캉 Lacan의 심리분석의 초안에 연구방향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치료효과들에 대한 원리는 모든 심리치료 이론과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론적 계획에 대한 임상심리학에서의 포괄적이고 모델 이론적인 방향제시는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다.
쓰기 혹은 읽기가 지속적으로 심리적인 효과 면에서 실효를 거두게 된다고 가정할 경우 “평정”, “확신”, “안정”, “긴장완화”와 같은 것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텍스트에서 감명을 받게 하고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어떤 동기를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가 수용-인지 영역에서 흥미를 일깨우고 새로운 “인식들”이 자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문학치료는 최소한 이원적 형식, 즉 감정과 인지의 형식에서 모두 가능하다. 이런 설명에 따라 심리적 기능에 관한 모델과 심리학적 연구가 구별된다(습득이론, 인지심리학, 심층심리학 등등). 최근 독일에서는 특히 치옴피 Ciompi(1985)가 그의 “감정 논리 Affektlogik”이란 개념으로 정신분열증의 심리병리학 이해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였다. 그는 논문에서 심리적, 심리 분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지론적, 심리적 측면 또한 설득력 있게 통합시키고 있다. 그가 제시한 이론의 구조는 자기(자기대리자 Selbstrepräsentanzen)와 주변(대상대리자 Objektrepräsentanzen)으로 구성되어 있고, 긍정적 (재미있는), 부정적 (혐오적인, 공격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즉, 감정적 융합은 자신과 환경을 구별하는 것과 동시에 발생한다. 감정적 융합과 인지적 구별의 과정이 불균등하게 발전할 때 심리병리학적으로 중요한 “상처” 개념을 형성한다. 이 상처들이 발전과정에서 겪게 되는 극단적 부담 하에서 경직되고 병적인 소질(소인)이나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치료란 결국 이런 여러 요소들로 구성된 요인들을 재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서 우선 병리학적인 특성을 지닌 에너지(氣)를 방출하거나(Katharsis) 인지적 양상을 강화하면서(통찰) 구조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등 다양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치료적 효과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인지, 생각, 기억, 느낌, 욕구, 행위 등은 심리적 과정이자 심리적 상황이다. 이런 과정과 상황은 심리모형의 구조적 특성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부정적 自己像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부정적 인식 내지는 부정적 생각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문학치료의 목표는 자기 자신에게서 긍정적인 것들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들은 언어와 연결되어 진행된다. 그러나 그것은 습득된 이차적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일 뿐 아니라 일차적 기호체계로서의 그림언어를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음악치료나 미술치료에서는 문학치료와는 달리 일차적 기호체계를 특수하게 사용하여 영상의 영역이 활성화된다. 이에 반해 문학치료는 이런 예술수단의 치료보다는 간접적이고 이차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역으로 예술이론에서 차지하는 문학이론의 차별성에 적용시킬 수 있다. 물론 심리치료에서 분석적-과학적 방법이 창조적 치료 영역에서 그 효과가 의문시되고 요가나 주술 같은 동양적, 정신적 방법을 더 나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여기에 문학과 문학수용의 형이상학적이고 불투명한 생각들이 아직도 그 절대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숨어있다. 그러나 문학의 기능이 그렇게 단순하고 막연한 영역만은 아니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심리학과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심리치료의 현장 사이의 복잡 미묘한 긴장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이런 문학치료의 다양한 방법에서 어떤 새로운 방법을 상호 주관적 측면에서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과 학문이 동시에 가지는 (즉 어떤 처방으로서의 치료와 이론적 바탕으로서의 치료가) 딜레마 또한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병력은 사실이어야 하고 또한 있는 그대로 서술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의 텍스트는 신빙성이 있어야 하는데 문학텍스트가 현실적으로 신빙성 있는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치료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인식할 수 있다.
1) 우선 음악치료나 미술치료는 단순히 듣거나 봄으로써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훨씬 접근하기 쉬운 반면, 문학치료에서의 독서나 글쓰기는 비교적 수동적인 수용자세를 지향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글쓰기가 고통스럽고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2) 허구적 상황들이 들어있는 문학텍스트는 ― 체험적인 글에 비해 ― 현실거부감을 가지게 하고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3) 문학텍스트에 나타나는 어려운 상황이나 탈출구 없는 상황은 때로는 우울증이나 좌절감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
4) 문학치료의 실례들을 살펴보면 어떤 문학텍스트는 환자에게 잘못된 인생목표를 설정시켜 그 환자를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할 수 있다.
3. 독서치료의 과정
문학치료 중에서 글쓰기 치료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우리는 독서치료를 다루어 보되 어떤 수단/책들이 사용될 수 있는가 알아보아야 한다. 책을 먼저 다음과 같이 간단히 구분해본다.
A) 문학성 있는 작품들 시, 꽁트, 단편소설, 장편소설 B) 개인적인 글 위기극복이나 체험이 든 수기, 드라마 C) 교육목적으로 쓴 극복방법에 관한 책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구체적 사례를 제시한 책들 암투병기, 술・담배끊기, 마약 극복 등
협의의 의미에 있어서 독서 치료는 C-B-A 순이다. 그것은 곧 당해 글이 지니는 문학성, 즉 문학의 완성도와 비례한다. 그러나 독서 전략적인 차원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B항과 C항의 책을 읽는 사람이 A항의 책도 읽는다는 점과 A항의 책을 읽는 자는 B항과 C항의 글이 지니는 상황을 표상하지 않고는 A항의 글들이 심미적 성찰로 ―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에서 주장하듯이 ―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면 독서치료의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
1) 상담자가 책/글의 내용 환자의 병의 상태(정신적, 육체적, 감정적 상태)를 알아야 한다. 상담자는 환자와 유대관계가 잘 형성되어야 하고 신뢰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비밀을 잘 지킬 수 있어야 한다. 2) 독서치료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환자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 3) 상담자는 선택한 책/글의 수준을 환자와 맞추어야 한다. 4) 억압이 아닌 상태에서 환자가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상태로 가기 위해 다른 수단(영화나 다른 사람의 조언 등)을 사용할 수 있다. 5) 환자의 욕구나 능력과 그가 가진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치료할 것이며, 어떤 상태까지 진행되어야 할지를 규정한다.
이런 전제조건은 결국 문학 이론이 충족해야 할 내포독자와 깊은 관계에 있다. 2)번의 경우, 독자 분포도(베스트 셀러, 문학창작의 지표 등)와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문학을 매개로 한 철학이나 사회학적 인식을 조정할 수 있거나 새로운 문학 담당층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3)번의 경우도 사회적, 문화적, 계층적 독자의 전제 없이는 문학의 이해가 공허해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교육에서 정전이 마련되듯이 Kanonbildung 문학치료 또한 일정한 패턴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 그런 패턴은 심리법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점이 충족될 경우, 문학치료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진행될 수 있다.
1) 상담단계 이 단계에서는 우선 책을 읽게 하거나, 글을 쓰게 하고(시, 산문, 일기, 수필 등의 형식으로) 일주일쯤 후 개별면담이나 그룹별로 읽고 쓴 것을 이야기하게 한다. 상응하는 텍스트를 고를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텍스트는 치료에 대한 비현실적인 공포를 조장하여 내담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내면적 고백 같은 경우에도 공공연하게 적시하여 명예감을 손상하거나 글쓰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상세한 문헌이나 문학서적, 글쓰기의 실례, 또는 목록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전형적인 문학을 이용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
2) 해소단계 증상이나 질병에 상응하는 문학을 읽어준다. 그 다음에 내용 가운데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는지를 물어 본다. 이와 함께 문제성을 상담자와 내담자가 같이 인식한다. 즉 문학의 주인공이나 현재 글쓰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가 바로 능동적인 해소 단계의 일환이다. 만약 이러한 것이 큰 효과를 못 볼 경우, 어떤 다른 수단을 동원해도 무관하다. 예를 들면 영화가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술꾼 시인(천상병이나 보들레르, 요세프 로트의 삶에서와 같은)이나 마약중독 시인(트라클), 정신분열증의 작가들(니체, 횔덜린) 같이 병력이 있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주의력을 환기시킬 수 있다.
3) 치료단계 실제 병원에서는 이 단계에서 다양한 독서를 권장하고 그것을 환자에게 과제로 부여한다. 이를테면 자기의 최초의 인식과 독서 후의 인식이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지 왜 그렇게 바꾸었는지를 말하거나 기술해보게 한다. 이것은 라캉이나 야우스가 말하듯이 인식 connaissance 또는 오인 méconnaissance을 재인식 reconnaissance 으로 바꾸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상태가 양호한 내담자에게는 이런 다양한 인식을 권장하고 독서의 결과를 평가할 수 있다.
4) 재활단계 이 단계에서는 특수한 문학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문학을 사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콜 중독자일 경우에도 자폐증에 관한 서적을 읽을 수도 있다. 그 이외에도 인생의 위기, 가정파탄, 고통 등을 이야기하거나 써보는 것 모두 가치가 있다. 문학적 용어로 類比推理 현상 analogia entis 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특정한 문학목록은 아직 없다.
4.글쓰기 치료의 실례
여기서는 코트먼 T. Kottman과 셰퍼 C. Schaefer가 실시한 예를 들어 글쓰기 치료의 사례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홉 살의 로레인은 한때 가정과 학교에서 폭군이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도록 할 때마다 감정 발작을 일으켰다. 치료자는 그녀에게 발단, 전개 그리고 결말이 있는 이야기를 해주도록 요청했다. 다음은 로레인이 해 준 이야기이다.
옛날 밀림에 코끼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코끼리는 큰 나무 꼭대기의 나뭇잎 먹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는 나뭇잎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코끼리는 나뭇잎을 구하기 위해 밀림 속의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먹고 싶은 나뭇잎이 있는 바로 그 나무를 찾을 때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드디어 한 나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그 나무에 원숭이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들은 코끼리가 나뭇잎을 모두 먹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원숭이들은 코끼리에게 가라고 말했지만 코끼리는 가지 않았습니다. 코끼리는 그의 코로 나무를 둘러싸고 원숭이들이 떨어질 때가지 나무를 흔들어댔습니다. 분노한 원숭이들은 다시 나무 위로 오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코끼리가 계속 나무를 흔들어대는 데도 원숭이들은 여전히 나무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코끼리는 소리를 지르면서 만일 원숭이들이 이 나무를 자기에게 주지 않는다면 모두 발로 밟아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원숭이들은 코끼리에게 나무를 내어주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치료자는 코끼리가 로레인을 가리키고 원숭이들은 로레인의 가족과 학교의 다른 친구들을 가리킨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치료자는 로레인의 전체적인 감정상태가 정상을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코끼리는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는 과정이 즐거움이나 축하, 타인의 인정이 들어 있지 않은 사실을 알았다. 로레인의 이야기는 결국 이 아이가 힘 있고 권위적이며,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협을 하여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고야마는 유아독존적 관점에 의해 구현되고 있다. 이것이 로레인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치료자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관점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들을 제시하는 과정을 거쳐 차츰 차츰 다른 인식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즉, 코트먼/셰퍼는 몇 가지 협상과 사회적 관심을 들어 다음과 같이 재인식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옛날, 밀림에 코끼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코끼리는 큰 나무 꼭대기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는 나뭇잎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약간의 나뭇잎이라도 구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밀림 속의 다른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걷고 또 걷다보니 그는 정말로 피곤해졌으며 좀 짜증이 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먹고 싶은 나뭇잎이 있는 나무를 찾았습니다. 문제는 그 나무에 원숭이 가족이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숭이들은 코끼리가 자기네들 나무에 있는 나뭇잎을 모두 먹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그에게 가라고 말했지만 그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가 고팠고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 나뭇잎을 먹고 싶었습니다. “만약 너희들이 내가 나뭇잎을 먹도록 해 주지 않으면 나는 너희들의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게 할거야” 라고 코끼리가 말했습니다. “이봐, 잠깐만 기다려. 아마 우리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오늘 너에게 나뭇잎 얼마를 나누어주는 게 싫지는 않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 나무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네가 나뭇잎을 전부 먹어치우면 어떻게 되겠어” 라고 원숭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난 피곤해, 그래서 이젠 나뭇잎을 찾아 더 이상 멀리 가고 싶지 않아” 라고 코끼리가 말했습니다. 원숭이들은 “일단 오늘은 나뭇잎을 나누어줄게. 그리고 오늘밤 여기에서 자도 좋아. 그리고 내일은 네가 이런 종류의 나뭇잎이 있는 곳을 찾도록 도와줄게. 우린 널 도와주는 일이라면 나무에서 나무로 점프도 할 수 있거든”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코끼리가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왜 남의 일인데 도와주려고 하니?” 그러자 원숭이들은 “오늘은 네가 조금 피곤해서 기분이 언짢을 뿐이지 좋은 친구 같아. 그래서 우리는 널 돕고 싶어. 너의 친구가 되고 싶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코끼리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친구가 없었지만 이제 몇이라도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원숭이들은 그의 인생에 좋은 출발점을 마련해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개작되어 나가면서 상담자는 아동이 그의 반사회적 생활방식에 대해 통찰을 얻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제한된 환경 안에서 어떠한 변화를 원하는지 실험해 볼 수 있다. 동시에 상담자는 이런 관찰을 하는데 독서요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결국 많은 부분 상담자의 치료목표나 방법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 만큼 이것은 독서행위에도 적용되는데 나이브한 독자일수록 독서의 내용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해 나갈 것인가 하는 교수/사회적 방향설정이 더욱 중요하다. 거꾸로 독서치료에서도 서양의 사례를 분별 없이 끌어와서는 의미나 효과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5. 독서치료의 장점
문첼에 의하면 병상에서 읽는 책은 자기의 상황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생각을 유도하는 기능 ablenkende und zum anderen hinlenkende Funktion”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 점은 문학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과 유사하다. 잊어버리는 기능은 환자에게 안도감을 주고, 긴장을 완화시키며 즐겁게 만든다.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기능은 교화하고, 감동시키고, 동요시키며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을 말한다.
사실 어떤 긍정적인 문학작품은 몸에 치료약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게 하며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장기간 병상에 누워 있는 생의 공백기를 메워 준다. 이것은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치료의 구체적인 효과를 아펠 Appell의 견해에 따라 다음 여섯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환자로 하여금 인간 행위의 심리학과 생리학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게 한다. 2)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한다. 3) 관심을 넓혀 주변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4) 무의식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 5)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통해 보상을 체험하게 한다. 6)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다.
독서치료가 우선 환자에게 자기의 병으로부터, 즉 현실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할 수 있고, 심리적 보상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은 바로 문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것이 내가 보건대 문학의 일차적 경험에 속하며, 6)번은 이미 자신에 대해 인식한 경우이기 때문에 이차적, 즉 성찰적 단계라 말할 수 있다. 만약 페터 뷔르거가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종교가 ‘망상적 행복’의 경험을 허락하면서 비참한 현실 속의 존재를 쉽게 인도 하지만, 다른 한편 ‘현실적 행복’의 성취를 방해한다고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의 일차적 경험은 무시하고 진술한 것이다. 이제 Bryan은 독서의 결과로 생긴 효과를 통해 환자가
1) 이 문제를 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2) 그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방도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3)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다 그가 처해 있는 상황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4) 이런 경험은 돈 주고도 못살 인생에 값진 교훈이라는 점 5)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6)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으로 계획하고 실천할 용기를 얻게 한다
고 독서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가능하지만 5)번의 경우는 독서치료에 있어서 상담자의 역할이지 독서 자체의 역할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약간 다르지만 루빈 또한 다른 여러 가지 이점을 제시하고 있다.
1) 환자에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유도한다. 이렇게 되면 그는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떨칠 수 있다 2) 환자가 과거에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혹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숨겼던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고도 기탄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3) 환자가 자기의 입장과 태도를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자기의 갈등과 좌절에 대해 보인 정신적, 감정적 반응을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 4) 독서치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것을 해결하는 길이 자신이 어떻게 문제를 보느냐에 달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5)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준다 6)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였다는 사실은 곧 갈등을 줄이는 쪽으로 가도록 한다 7)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문제와 비교하게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달리 보아왔던 고독이나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8) 자신과 타인의 공통적인 심리적 동인과 상이한 심리적 동인을 발견하게 해 준다 9) 상상력을 자극하여 관심을 확대하고 간접체험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직접경험이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다 10) 행동에 대한 방향을 설정해 주며 도덕적 가치기준을 제시해 준다 11) 물질적 관심을 넘어 인간적, 정신적 가치를 인식시켜 준다 12) 치료계획에 맞는 계획으로 자기 상황을 잘 인식하게 하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건설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물론 치료의 관점에서 주장한 진술이긴 하지만 독서의 영향과 상담자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독서를 통해 인간은 더욱 좌절할 수 있다는 점을 1)과 2)항은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6)항에서의 진술은 어떤 책의 독서를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위 독서치료의 과정 항에서 제시한 B)와 C)항의 글들일 것이다. 독서치료가 응용과학으로서 그 확실한 준거를 필요로 하는 만큼 한국 사회에 이 독서치료를 적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환자들의 인식능력, 사회적 소망, 경험의 정도에 맞춘 독서의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며, 서구 사회의 일방적인(종교, 사회, 가치관 등에서) 기준으로 마련된 독서치료의 준거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야에서 우리 사회의 준거가 없기 때문에 계속 서구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클레버가 제시한 독서치료의 목표를 살펴보겠다.
1) 문제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태도 변화를 유발한다 2) 감동을 시켜 인격을 조정하고 변화시킨다 3) 감정과 체험의 결과를 표현하게 유도한다 4) 자신의 특성과 행동양식을 인식시킨다 5)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6) 인성을 강화하거나 제한한다 7)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원활히 한다 8) 사회적 문화적 행동양식을 제공한다 9) 대리만족의 기회를 제공한다 10) 사회적응력을 키워준다.
2)번의 경우 감동을 받는 것은 독서로 가능하나 인격을 조정하고 바꾸는 것은 상담자의 역할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행위의 이론이 갖고 있는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즉, 그것은 일반적 독자를 위한 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문학 자체보다도 어떤 사람(사건)이 이런 문학을 읽게 하는지, 어떻게 읽도록 하는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상으로 만난 사건을 현실적 행복에 어떻게 피드 백 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볼 때, 문학텍스트를 고를 때는 내담자/환자의 언어, 인지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문학수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학이론에서 일반화하는 경향에 따라 문학을 긍정과 부정, 고상한 문학과 통속문학으로 분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다양한 계층, 상황에 따라 치료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내담자가 통속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순수문학이나 고상한 문학에, 즉 문제성을 제시하는 문학에 접근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알려진 문학을 주제별로 분류해 두는 것이 매우 용이하다. 위에서 제시한 4단계 쪽으로 이행해 나가기 위해서 일반적인 독서지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인생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문헌이나 문학, 글쓰기의 구체적인 사례를 만들 때 판단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책과 수많은 가치관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의 성향, 문체, 작가의 취향, 주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옳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다. 또한 상담자의 입장(행동치료사, 심리분석가, 대화심리 치료사, 게슈탈트 심리치료사, 의미치료사)에 따라 질병의 유형이 다른 관점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아직까지는 체계적인 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그런 병의 메커니즘이 여러 단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더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문예학적 측면에서 몇 가지 준거를 보충한다면, 서술형식(일인칭 화자, 혼합 인칭화자), 텍스트 구조, 글의 길이, 사건의 순서 등 일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문학치료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서는 문예학적 인식을 주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문학치료의 체계만을 만드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문학이 중독환자 등의 심리치료에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살펴보면서 문학의 기능을 살펴보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동시에 그래서 아직까지 전무한 읽기와 쓰기를 통한 문학치료의 가능성과 문학의 일차적 기능, 문학교육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제공하고 그 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3) 문학적 경험에 관한 이론적 토대 |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를 전체적이고 유기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능이 호메오스타시스 Homöostasis (동적 평형상태) 기능이다. 문학이론에서 다루는 화해의 이론이나 보상의 이론이 바로 이 유기체적 기능과 결부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호메오스타시스란 모든 생리적/심리적 행위가 유기체로서 항상 평형을 유지하여 환경이 바뀌어도 건강을 유지하는 과정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 과정을 유기체가 일종의 욕구충족을 해 나가는 과정이다.만약 인체에서 혈당량이 일정한 한도 이하로 떨어졌을 때는 부신선이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분비된 아드레날린은 간장에 축적되어진 중성지방인 글리코겐을 당질로 바꾸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 당질이 혈액 중에 보내어져서 한도 이하로 떨어진 혈당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거꾸로 혈액 속의 혈당이 과잉되었을 때에는 췌장(이자)이 인슐린을 분비하여 혈액중의 당분을 제거한다. 이런 호메오스타시스가 무너지면 그것이 당뇨병이 되고 치료를 위해 인위적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이다. 이렇게 생리적인 평형이 무너졌을 때 느끼는 생리적 욕구와 같이 심리 또한 그 평형이 무너졌을 때 접촉 욕구를 지닌다. 문학사를 살펴보아도 계몽주의 이후에 낭만주의, 인상주의 이후에 표현주의와 같이 평형을 이루려는 부산한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세헤라자드가 술탄 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천일야화를 왕에게 들려주는 것은 단순한 이야기 본능이 아니라 심리적 평형유지의 욕구이다.
문학이 단순히 리비도적 충동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본능과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혼동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스스로도 후기에는 리비도적 충동이 성적 충동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했듯이, 리비도 충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충동들은 서로 어떤 연관을 맺으면서 심리적 인력에 따라 전면에 부상했다가 다시 배면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일차적 경험의 수단을 단순히 욕구충족으로 보기보다는 호메오스타시스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학치료는 이미 걸린 당뇨병을 치료해서 자율적으로 평형상태를 유지하도록, 즉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 전체가 호메오스타시스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 수단은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영탄, 기쁨(웃음), 슬픔(울음), 우정, 사랑, 희망, 실망, 비꼼, 야유, 반어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조건에 대한 호메오스타시스의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일차적 기능은 우선 보상의 메카니즘이다. 그 다양한 보상의 메커니즘의 양상에 대해서는 이미 노르드롭 프라이의 원형비판을 토대로 야우스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야우스는 그런 일차적 경험의 구조를 그의 『심미적 경험과 문학해석학』에서 ‘주인공과의 동일시’로 유형화하면서 그 세목을 다음 5가지 유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a)친화적 assoziativ b)찬양적 admirativ c)동정적 sympathetisch d)승화적 kathartisch e)반어적 ironisch 동일시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준거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띤다기보다는 그때 그때마다의 구체적 사회적/역사적/문화적 상황 변화에 따른 상수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는 “진정한 비극은 기독교 문화의 바탕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는데 비극이 어느 정도는 시대와 연계해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근대 이후에 서구문화가 유입된 이후에서야 비극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거나,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서 더욱 완전하게 이해 가능하게 된다. 카타르시스적 동일시를 비극적 카타르시스와 희극적 카타르시스로 나눈다면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에 있어서 한국 문화는 희극적 카타르시스 수용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독일문학 수업에서 얻은 체험이지만 한국의 동시대 학생들에게 레싱의 『민나 폰 바른헬름』에 나오는 텔하임 Tellheim은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인간의 표상으로 비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텍스트를 문학 수업에 임하는 교수나, 치료할 때의 상담자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어야 하지만, 어떤 텍스트를 특정한 이론에 따라 당해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 밖에 낼 수 없다. 이 말은 문학은 그저 형식일 뿐 그 진리내용조차도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심급이 될 뿐이다. 문학은 독자에게 타자로서 기능한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독서 행위가 미정성과 부정성으로 가득 찬 문학을 독자가 항상 표상과 이미지로 구체화하고 현재화함으로써 완성된다는 뜻이다.
독서치료의 관점에서 일례로 d)의 카타르시스적 동일시를 응용해 보자. 독자/관객은 비극적/희극적 주인공과 감정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억압된 욕구를 끄집어내고 동시에 관객/독자로서의 내담자는 정열로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낯선 역할을 하는 것이 치료의 과정이 될 것이다.
일등육을 남긴 소를 나는 안다 그는 틀림없이 1등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1등 목장에서 1등 축우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1등 사료를 먹고 빈둥거리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들보다 빨리 120킬로가 되자 재깍 도축장에 끌려와 살이 찢기고 뼈가 쪼개졌다 그때 1등소는 이런 소리를 들으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1등육이다! -박의상 ⌈일등육⌋ 전문
형식적으로 1등 또는 일등이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써 이미 화자가 편집증을 겨냥하고 있다/편집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금/작금의 한국 사회가 1등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 또한 가시적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 기의가 전혀 다른 1등육과 일등육 간의 차이를 시인은 간과하지 않는다. 1등이 목표하는 바가 일등 밖에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패러디를 읽고 적어도 심리적으로 1등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학생이나, 또 1등에 고착되어 있는 사회/개인은 이 시에서 다른 인식을 얻을 것이다. 이런 재인식을 통해서 의식과 (1등을 하고 싶다는/해야한다는) 무의식과의 불균형이 해소된다. 그러나 만약 아도르노의 이론대로 (또는 위에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동정과 연민’에서의 c)의 번역대로) 한다면 사회적 부정, 지배체제의 부정과 같은 인식을 얻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일차적 (20세기말의 특정한 사회적) 경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작가가 가장 의식적일 때도 무의식적이고, 비평가/학자는 가장 무의식적일 때도 의식적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학 치료에서든, 즐거운 독서행위에서든, 문학적 인식은 심리적 해방, 유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이 점은 문학이라는 수단이 종교로서의 역할, 치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 Adler는 이미 오래 전에 문학치료/독서치료를 그의 심리치료 요법으로 도입하였는데, 그는 내담자/환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가능하면 기승전결로), 그 내담자의 글에서 심리상태, 즉 내담자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내담자의 사회적 상황은 어떤지 등을 판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난 뒤, 이 내용을 거의 비슷한 상황으로 바꾸어가며 내담자가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내적인 병인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이 시에서 보는 웃음은 관객/독자/내담자/환자로 하여금 우월한 허위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을 파괴하면서 느낀 자기만족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친화적 assoziativ이라 말할 수 있다. 허두에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의 a)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야우스의 분류로는 a)와 d)에 해당된다.
그러면 e)의 반어적 동일시를 예로 들어보자. 이 과정에는 허구의 전제조건을 의식시키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즉 내담자에게 놀이규칙을 알려주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단계는 이미 이차적 경험에 속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반어를 통하여 독자/내담자의 심미적 자세를 부정적으로 또는 도덕적 유발을 통해 의문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상담자는 환자의 상태를 적확하게 판단한 후에 그를 치료목표로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laß das komm sofort her brung das hin kannst du nicht hören hol das sofort her kannst du nicht verstehen sei ruhig faß das nicht an sitz ruhig nimm das nicht in den Mund schrei nicht stell das sofort wieder weg [...]
wer nicht hören will muß fühlen Erziehung von Uwe Timm
일상의 언어에서 수집된 언어의 배열을 통해 단순한 듯 하면서도 아주 좋은 시가 되었다. kannst du... 로 시작하는 의문문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지시와 억압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은 그저 복종만 해야 할 뿐이다. 동물을 조련하는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텍스트를 억압으로 고립된 환자나 강박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할 때는 전제조건을 미리 말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 시가 야우스의 분류대로 하면 c)와 e)의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환자/내담자에게 변형시키면서 치료할 수도 있다. 환자/내담자의 경험 영역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글을 만들게 하되 차츰 차츰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적응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아리스트텔레스 해석의 b), 즉 조정이론과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a), b), c), d) 의 1차적 경험들은 비교적 선험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세계문학, 시대적으로 소격한 독자와 문학 어디에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일차적 경험을 중심으로 문학을 살펴보면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심미적 경험이 단순히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 Verstehen der Intention des Werkes’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해석학적으로 볼 때 문학적 경험은 두 가지 층으로 구별되는데, 그것은 곧 일차적 경험과 이차적 경험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성찰 영역, 곧 이차적 경험을 말한다. 이차적 경험을 할 때 독자는 성찰을 통해 판단하면서 일차적 경험, 즉 원초적 감성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일차적인, 성찰 이전의 문학적 경험은 상상하는 의식에 대해 의사소통적 실행 틀을 형성해 준다. 이유는 문학에 묘사된 사건이나 상황 속의 인물과 감정적인 동일시(무의식)가 먼저 오고, 그에 대한 인지적 구조(의식)가 오기 때문이다. 일차적 경험 또한 상대적이다. 다시 말해 시대적 억압, 모순에 대해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준거가 될 뿐이다. 우리는 그 평형을 유지하는 방법이 또한 다양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서 살펴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카타르시스 내지는 “승화의 이상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자] 염두에 두고 있는 관객의 본능과 욕구의 육체적인 충족대신 대리 만족으로서의 미적 가상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과제를 예술에 부여하며, 이러한 점에서 지배자적 관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즉 카타르시스는 억압과의 공모 하에 감정에 반대하는 일종의 순화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예술 신화의 일부로서 낡은 것이며 또한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진술은 비극의 효과가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현대 예술에 와서야 심미적 경험의 특수한 기능이 실현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지나치게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패러다임 속에서만 생각을 함으로써 의사 소통적 범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의사 소통적이라 함은 우리가 말하는 문학의 일차적 기능으로서의 동일시를 말한다. 즉, 화자나 주인공과 동일시함으로써 정서적 해방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 속에는 독일의 독자가 처한 독일 사회의 합리적 측면이 농후하게 배어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심리적 측면도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런 문학이론이 부적절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4) 나가면서 |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題銘이 걸려 있었다 한다. 미지의 심적 세계가 융이 설명하듯이 집단적 무의식의 세계이든, 프로이트가 설명하듯 원초 자아의 세계이든 문학을 통해 우리는 그 심적 요소를 탐색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심리치료에서는 무의식의 그림자와 자기와의 균형이 깨진 상태를 병리적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는 부조화에서 비롯된 내면의 그림자를 재인식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문학(독서와 글쓰기)은 진단적 용도와 치료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문학을 통해 치료자/상담자는 환자/내담자가 어떤 심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갈등을 가지고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다. 독서의 내용을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으며, 어느 부분을 망각하고, 어떻게 변화시키고, 얼마만큼 추가하는지를 관찰하면서 환자의 심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또한 글을 쓸 때도 (위의 코끼리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어떤 부분은 사소하게 다루며, 어떤 (무의식적) 주제를 부각시키는지를 통해서 고착된 심리, 퇴행된 심리를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독서나 글쓰기를 통해서 투사한 이미지와 심리 역동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환자/내담자/독자는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 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이것이 치료적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의 해석이 리쾨어의 말을 빌면, “그 해석자 자신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제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문학 이론적 가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텍스트가 호소구조이며, 미정성과 부정성에 근거한 표현인 반면, 독자/화자는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그 표현을 자신의 의식 속에 표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또한 문학은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구분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시민적 일상을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소외되고 고통을 얻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 문학은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학치료의 효과에 대한 임상결과에서(파르덱에 따르면 문학 치료가 자기확신, 태도변화, 자기성취, 감정결손 환자의 치료에는 긍정적 효과가, 학습효과, 부부/성 관계, 불안해소 등에는 부정적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보듯이 (비록 국부적이고 특수한 경우라고 치부하더라도) 문학의 효과가 어느 일정한 면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문학의 치료 기능이, 나아가 문학의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문학의 존재이유를 말해주기도 하는 바, 문학의 실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문학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적합하지 않고 (아마 음악과 같은 다른 예술수단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인 문제(고독, 중독, 자기확신 등)와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이론이 - 그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 체계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문학의 언향적 행위 perlokutionäer Akt를 무시하고 그저 사회적 준거라는 담론적 diskursiv 형식(아도르노, 뷔르거, 루만, 골드만 등)에 머물거나, 내재적 준거라는 현시적 präsentativ 형식(프라이, 야우스, 슈타이거, 카이저 등)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문학은 이제 19세기 정신과학의 유산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변했다.
정리하자면 메타이론에 대해서 우리는 심미적 경험이 우위라는 것과, 심미적 경험은 일차적 경험의 허와 실이 분명해지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 이 일차적 경험을 우리는 때로 감성적 경험이라고도 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심미적 성찰을 주장하는 문학이론에서 자칫 수준 낮은 교과서적 해석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쉬운 대목이다(이것 때문에 참여문학의 나이브한 면이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모든 성찰을 통한 학문이 물 떠난 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