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월 11일, 우리나라 최초의 인명(人名) 기차역인 ‘김유정역’이 있는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그로서는 안타깝게 차남으로 태어난다. 1914년, 유정 일가는 서울 진골(현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저택으로 이사하는데, 셋째 누이 김유경은 이곳을 유정의 출생지로 증언한다. 1915년 어머니가, 2년 뒤인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된다. 9살, 유정은 아직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가장이 된 형 유근은 동생을 돌보는 대신 주색잡기에 빠져 산다. 유정은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 사진을 들여다보곤 하며, 친구들에게 어머니가 미인임을 자랑하기도 하며, 횟배를 자주 앓으며 소년기를 보낸다.
1929년, 한 번의 휴학을 거쳐 휘문보고를 졸업한다. 그동안 형의 금광 사업 실패와 방탕한 생활로 가세는 몰락한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지만 결석으로 인해 곧 제적당한다. 스스로는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고 했지만. 이후 얼마간의 방랑 생활을 거친 후 귀향, 야학당을 여는 한편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를 조직 농촌계몽 활동을 벌인다. 그 와중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악화한다.
1933년, 서울로 돌아온 유정은 누나들 집을 전전하며 폐결핵을 견뎌야 하는 삶을 산다. 그런 유정을 안타까워하던 친구 안회남이 소설 쓰기를 권유, <산골 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를 연이어 발표한다. 그리고 1935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1등과 입선으로 당선, 문단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정식으로 등단한다. 이후 1937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소설 30편, 수필 12편, 그리고 번역 소설 2편을 남긴다.
죽기 한 해 전인 1936년 가을, 이상으로부터 “유정!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라는 동반자살 제의를 받지만,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한다. 하지만 이듬해 3월 29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살을 먼저 제의한 이상보다 19일 먼저. 사인은 둘 모두 폐결핵. 같은 해 5월 15일, 요절한 두 천재의 죽음을 기리는 합동 추도식이 치러진다. 발기인은 이광수, 주요한, 최재서, 정지용, 이태준, 박태원, 그리고 안회남 등 25명. 1938년, 김유정의 첫 책이 삼문사에서 출간된다. 제목은 《동백꽃》.
죽기 열하루 전, 번역으로 “돈 100원을 만들어볼 작정”을 한 유정은 안회남에게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탐정소설 두어 권을 보내줄 것을 편지로 요청한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며. “책상 위에는 ‘겸허(謙虛)’라는 두 글자”를 커다랗게 써 붙여놓은 채. 스물아홉의 피 끓는 삶에의 몸부림과 죽음에 대한 겸허한 자세 사이에서.
조용한 산골에서 주막을 차리고 살고 있는 덕돌 모자의 집에 홀연히 산골 나그네가 찾아온다. 열아홉 나이 과부라는 그녀는 노총각 덕돌과 홀어미에게 너무나 놓치기 아까운 존재였다. 덕돌과 과부는 혼인한다. 덕돌 모자는 행복에 젖는다. 어느 날 밤 덕돌은 자신의 아내가 온데간데없고 혼인 때 장만했던 인조견 새 옷도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모자는 황황히 그녀를 찾아 나서는데...
TV문학관 김유정 원작 산골나그네 시작하는 장면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생각이 떠오르게 하네요. 장님이라는 설정과 세상을 떠돌며 퉁소와 소리를 팔아 먹고사는 대목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서편제가 1993년 영화니까 참고를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장바닥에서 김순철과 정윤희 배우의 모습입니다.
신부지참금을 요구하는 이야기는 하나의 갈등요소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주는 돈이니 신랑지참금이라고 해야 하나요?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있던 풍습을 보여주는데 요새는 여자는 혼수, 남자는 집을 준비하는 것으로, 금액 차이는 많이 나지만 쌍방이 준비하는 형태로 남아있네요.
소설가 김유정이 1908년생이고 스무살 때 정도를 설정하면 1928년 전후한 농촌의 결혼식을 상상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다. 신부 정윤희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족두리를 한 모습이 2021년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낯이 서네요. 입술과 볼에 찍는 붉은 점을 연지라고 하고, 이마에 찍는 붉은 점을 곤지라고 하는데, 신부 주변에 악귀가 오지못하게 하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머리에 쓰는 족두리는 부녀자가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冠)이고 합니다. 족두(蔟兜) 또는 족관(蔟冠)이라고도 한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