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들과 제도들(Instincts et institutions, 1953)” 입문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Hachette, 1953, pp. vii-xi.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Etranger 144: 280-281 (1954)
Instincts & Institutions. Gilles Deleuze - 1967 - Hachette. [초, 1953, 1955]
* 유기체가 자연에서 만족의 요소들을 끌어내는 데 비해, 인간이란 주체는 스스로 제도화하여, 인위적이고 기술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만족을 확장한다. 그런데 그 만족이 계속적인 만족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의 욕망 또는 열망을 항상 이 만족을 넘어서지 않았던가. 그러면 본능은 그대로 일까? 유기체도 자기 활동(행위)을 탈영토화한다. 그러하듯이 제도도 생산관계를 넘어서 새로이 탈 위상화하는 방식으로 가지 않을까? 그 탈 위상화의 방향이 아직은 공상이고 상상이지만, 그래도 공산사회의 건설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자연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은 본성(자연)을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자기방향 속에서 자기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 각자가 자기완성 또는 욕망의 자족으로 가는 것이 또한 인격성의 완성이 아니겠는가 한다. (52MKF)
*« 입문: Introduction »*************1953
본능이라 불리는 것, 제도라 불리는 것,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만족이라는 진전 상황들(des procédés)을 지칭한다. 때로는 외적 자극들에 자연적으로(par nature) 반작용하면서, 유기체는 외적 세계로부터 자기 경향성들과 자기 요구들(ses besoins)에 대한 만족의 요소들을 끌어낸다: 이 요소들은 여러 다른 동물들에서는 특별한 세계들을 형성한다. 때로는 이 경향성들과 외적 환경들 사이에서 독창적인 세계를 제도화하면서, 주체는 인공적 만족의 수단들을 공들여 만든다. 이 수단들은 유기체를 다른 사물[제도]에 종속시키면서, 유기체를 자연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그리고 유기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 도입시키면서 경향 자체를 변형시기도 한다. [그런데] 돈은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조건에서, 배고품[기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결혼은 다른 임무들에 복종하면서, 짝을 찾는 탐색[수고]을 절약하게 한다. 말하자면 모든 개별적 경험은, 마치 하나의 선천성인 것처럼(comme un a priori), 경험이 이미 지도[통제]하는 환경(un milieu)의 선현존을, 즉 종적인 환경 또는 제도적인 환경의 선현존을 가정한다. 본능과 제도는 그 환경 하나의 가능한 만족이 조직화된 두 형식들이다.
경향이 제도 속에서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애정관심의 결혼에서든, 탐욕의 소유에서든 말이다. 사람들은, 마치 국가처럼, 경향이 전혀 상응하지 않는 제도들 중의 그 표본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들이 이미 제도화된 행동들을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 제도들이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파생된 유용성을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제도들이 보조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 유용성이 최종심급으로 원리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유용성은 사회와 경향성들 사이의 연관[관련] 속에서 그 원리로부터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제도는 수단들로 조직화된 하나의 체계처럼 스스로 나타난다. 게다가 바로 거기에 제도와 법률 사이에 차이가 있다. 법은 행동들의 제한이고, 행동의 긍정적 표본이다. 사회적인 것 바깥에 긍정적인 것(자연권들)을 두는, 그리고 부정적인 것 속에 긍정적인 것(계약적 제한, 임시적 제한)을 두는 법의 이론들에 반대하여, 제도의 이론은 사회를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처럼 또 발명적인 것처럼(만족의 독창적인 수단들) 제시하기 위하여, 사회적인 바깥에 부정적인 것(필요들)을 둔다. 결국 그러한 [제도의] 이론은 우리에게 정치적 기준들을 줄 것이다: 참주제는 법(률)이 많고 제도는 거의 없는 정치체제이며, 민주제는 제도는 많은 데 법은 거의 없는 정치체제이다. 억압이 드러나는 경우는, 법률들이 직접적으로 인간들에 근거하는[지탱하는] 때이지, 인간들을 보증하는 앞선 제도들 쪽으로 근거하는 때가 아니다.
그러나 경향이 제도 속에서 자족하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제도는 경향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동일한 성적인 필요들(les mêmes besoins sexuels)도 결혼이라는 가능한한 다양한 형식들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일반적인 것이 특수적인 것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식욕을 당기게 하는 욕망”은 식전에 마시는 술(l’apéritif)을 설명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식욕이 당기게 하는 수천 가지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난폭성이 전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난폭성에서 전쟁의 최고의 수단을 발견한다. 자, 이제 사회성의 파라독스사 있다: 즉 우리가 제도들에 대해 말하는 경우, 우리는 스스로를 만족시키고 있는 중인 경향성이 촉발하지도 못하고 규정하지도 못하는 만족의 절차들 앞에 있게 될 때이며, - 더욱이 종의 형질들이 그 절차들을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경향성은 이 경향들에 의존하지 않는 수단들에 의해 만족된다. 또한 경향성은 강요됨(contrainte) 또는 골탕 먹음과 동시에 변형되고 승화됨이 없이는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신경증이 가능하다. 게다가 필요가 아주 간접적이고 “삐딱한(oblique)” 만족만을 제도 속에서 발견한다면, “제도가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제도가 누구에게 유용한지를 물어야만 하고, 제도를 필요로하는 모든 자들에게, 또는 어떤 몇 사람들(특권 계급)에게, 심지어는 단지 제도를 실행하는 자들(관료제)에게 유용한지도 물어야만 한다. 따라서 가장 깊은 사회학적 문제는, 경향성들의 만족에 대한 사회적 형식들이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이 다른 심급이 어떤 것인지를 찾는 데 있다. 문명의 전례[의례]들이며, 생산 수단들은? 그것이[문제가] 무엇이라 할지라도, 인간적 유용성은 항상 하나의 유용성과 다른 것이다. 제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그리고 경향성또는 유용성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표본들[모델들]로 구성되는 사회적 활동성으로 우리를 귀착시킨다[되돌려보낸다]. 왜냐하면 이 유용성은, 인간의 유용성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반대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직자는, 즉 전례[의례]를 집전하는 사람은 항상 이용자의 무의식이다.
[유용성은] 본능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거기에서 유용성을 넘어설 것은 미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다. 경향성은 제도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만족되며, 그 경향성은 본능에 의해 직접적으로 만족된다. 금지들도 없고 본능적 강제도 없다. 본능적인 혐오들만이 있다. 이번에는, 자격 있는 행동을 촉발하는 것은, 내적 심리학적 요인(un facteur)의 형식 아래서, 경향성 자체이다. 의심할바 없이 이 내적 요인은, 심지어 자기 자신과 동일한 그 요인은 다른 종들 속에서 다른 행동들을 촉발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말하자면, 본능은, 개체적 생리학적 요소들의 인과성과 종 자체의 인과성 – 즉 호르몬과 종의 특수성 - 이라는 이중 인과성의 교차점에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능이 어느 정도로 개인의 단순한 이익에 이끌려질 수 있는지 만을 자문하게 될 것이다: 즉 이런 경우에 [극한의] 한계에서 본능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아야 하며, 그러나 반사에 대해, 주향성(un tropisme)에 대해, 습관에 대해, 지성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또는 본능이, 종의 유용성, 종의 선(善), 생물학적 제일 목적성 등의 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가? “이것은 무엇에 유용한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이 여기서 재발견하지만, 오히려 그 의미는 변했다. 본능의 이중적 측면에서, 본능은 마치 한 유기체 속에서 종적인 반작용들에 던져진 경향성처럼 소개[제시]되었다.
본능과 제도에 공통적인 문제는 항상 다음과 같다: 어떻게 경향과 경향을 만족하게 하는 대상의 종합이 이루어지는가? 내가 마시는 물[水(수)]은 사실상 나의 유기체에서 모자라는 수화물(水化物)들과 닮지 않았다. 본능이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하면 완전 할수록, 더욱더 본능은 종에 속하며, 더욱더 환원할 수 없고 독창적인 종합의 권능을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본능이 더욱더 개선될(perfectible) 수 있으며 따라서 불완전하면 할수록, 더욱더 본능은 변이(la variation)에, 우유부단(l’indécision)에 종속될 것이며, 더욱더 내적 개체적 요인들과 외적 상황들의 유일한 놀이(게임)으로 환원되도록 내버려 둘 것이고, - 더욱더 본능은 지성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런데 [극한의] 한계에서, 경향성에 맞는 하나의 대상을 그 경향성에게 부여하는 그러한 종합이 어떻게 지성적일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이 살아 있지 않는 어떤 시기에 이루어지기[만들어지기] 위하여, 그 종합은 시험들을 포함한다고 할 때인데, 그 개인은 이런 시험들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지성이 개인적이라기보다 더 사회적인 것이라는 관념[생각]을, 그리고 지성이 사회적인 것 속에서 매개적인 공간을 즉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제3의 공간을 발견한다는 생각을 곧바로 되찾아야 한다. 경향성들과 연관하여 사회적인 것의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예상참여 체계 속에서 상황들과 종을 대체하면서 요인들의 출현을 규제하는 체계에서 내적 요인들을 통합하는 것(intégrer), 이것이 바로 제도의 경우이다. 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식사한다]먹는다: 왜냐하면 정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향성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경향들을 만족하게 하는 사회적 수단들, 즉 독창적 수단들이다: 왜냐하면, 수단들이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제도 전체가 우리 신체에게 – 심지어 우리 신체의 비의지적 구조들 속에서 조차 – 일련의 표본[모델]들을 부과한다. 그리고 제도는 우리들의 지성에게 지식을, 마치 기획과 같은 예견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재발견한다: 인간은 본능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인간은 제도들을 만든다. 인간의 종에서 탈피하는 중에 있는 동물이다. 또한 본능은 동물의 응급처치[위급함]들을 번역하고 제도는 인간의 요청들을 번역하리라. 기아의 응급처치[위급]는 인간에게서 빵을 가질 청원이 된다. 마지막으로 본능과 제도의 문제는, 가장 첨예한 문제점에서는, 동물들의 “사회들”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과 인간의 연관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인간의 요구들은 동물에 근거하며, 이 동물을 제도들 속에 통합하면서(토테미즘과 가축화), 동물의 위급함들은 인간과 만날 때인데, 인간에서 도망가든지 인간을 공격하든지, 또 그 인간의 영양분이 되든지 인간의 보호를 받든지 하는 경우이다.
- 들뢰즈(G. Deleuze)
(4:18, 입문전체 52MKF)
# 본능과 제도 Instincts & Institutions, Gilles Deleuze
« Introduction »
Ce qu’on appelle un instinct, ce qu’on appelle une institution, désignent essentiellement des procédés de satisfaction. Tantôt en réagissant par nature à des stimuli externes, l’organisme tire du monde extérieur les éléments d’une satisfaction de ses tendances et de ses besoins ; ces éléments forment, pour les différents animaux, des mondes spécifiques. Tantôt en instituant un monde original entre ses tendances et le milieu extérieur, le sujet élabore des moyens de satisfaction artificiels, qui libèrent l’organisme de la nature en le soumettant à autre chose, et qui transforment la tendance elle-même en l’introduisant dans un milieu nouveau ; il est vrai que l’argent libère de la faim, à condition d’en avoir, et que le mariage épargne la recherche d’un partenaire, en soumettant à d’autres tâches. C’est dire que toute expérience individuelle suppose, comme un a priori, la préexistence d’un milieu dans lequel est menée l’expérience, milieu spécifique ou milieu institutionnel. L’instinct et l’institution sont les deux formes organisées d’une satisfaction possible.
Que dans l’institution la tendance se satisfasse, n’est pas douteux : dans le mariage la sexualité, dans la propriété l’avidité. On objectera l’exemple d’institutions comme l’Etat, auxquelles ne correspond nulle tendance. Mais il est clair que de telles institutions sont secondaires, qu’elles supposent déjà des comportements institutionnalisés, qu’elles invoquent une utilité dérivée proprement sociale, laquelle trouve en dernière instance le principe dont elle dérive dans le rapport du social avec les tendances. L’institution se présente toujours comme un système organisé de moyens. C’est bien là, d’ailleurs, la différence d’ailleurs entre l’institution et la loi : celle-ci est une limitation des actions, celle-là, un modèle positif d’action. Contrairement aux théories de la loi qui mettent le positif hors du social (droits naturels), et le social dans le négatif (limitation contractuelle), la théorie de l’institution met le négatif hors du social (besoins), pour présenter la société comme essentiellement positive, inventive (moyens originaux de satisfaction). Une telle théorie nous donnera enfin des critères politiques : la tyrannie est un régime où il y a beaucoup de lois et peu d’institutions, la démocratie, un régime où il y a beaucoup d’institutions, très peu de lois. L’oppression se montre quand les lois portent directement sur les hommes, et non sur des institutions préalables qui garantissent les hommes.
Mais s’il est vrai que la tendance se satisfait dans l’institution, l’institution ne s’explique pas par la tendance. Les mêmes besoins sexuels n’expliqueront jamais les multiples formes possibles du mariage. Ni le négatif n’explique le positif, ni le général, le particulier. Le « désir de s’ouvrir l’appétit » n’explique pas l’apéritif, parce qu’il y a mille autres façons de s’ouvrir l’appétit. La brutalité n’explique en rien la guerre ; pourtant, elle y trouve son meilleur moyen. Voilà le paradoxe de la société : nous parlons d’institutions, quand nous nous trouvons devant des processus de satisfaction que ne déclenche ni ne détermine la tendance en train de se satisfaire – pas plus que ne les expliquent les caractères de l’espèce. La tendance est satisfaite par des moyens qui ne dépendent pas d’elle. Aussi, ne l’est-elle jamais sans être en même temps contrainte ou brimée, et transformée, sublimée. Si bien que la névrose est possible. Bien plus, si le besoin ne trouve dans l’institution qu’une satisfaction tout indirecte, « oblique », il ne suffit pas de dire « l’institution est utile », encore faut-il demander : à qui est-elle utile ? A tous ceux qui en ont besoin ? Ou bien à quelques-uns (classe privilégiée), ou seulement même à ceux qui font marcher l’institution (bureaucratie) ? Le problème sociologique le plus profond consiste donc à chercher quelle est cette autre instance dont dépendent directement les formes sociales de la satisfaction des tendances. Rites d’une civilisation ; moyens de production ? Quoiqu’il en soit, l’utilité humaine est toujours autre chose qu’une utilité. L’institution nous renvoie à une activité sociale constitutive de modèles, dont nous ne sommes pas conscients, et qui ne s’explique pas par la tendance ou par l’utilité, puisque cette dernière, comme utilité humaine, la suppose au contraire. En ce sens, le prêtre, l’homme du rituel, est toujours l’inconscient de l’usager.
Quelle différence avec l’instinct ? Là rien ne dépasse l’utilité, sauf la beauté. La tendance était satisfaite indirectement par l’institution, elle l’est directement par l’instinct. Il n’y a pas d’interdictions, de coercitions instinctives, il n’y a d’instinctives que des répugnances. Cette fois, c’est la tendance elle-même, sous forme d’un facteur physiologique interne, qui déclenche un comportement qualifié. Et sans doute, le facteur interne n’expliquera pas que, même identique à soi, il déclenche pourtant des comportements différents dans les différentes espèces. Mais c’est dire que l’instinct se trouve à la croisée d’une double causalité, celle des facteurs physiologiques individuels et celle de l’espèce elle-même – hormone et spécificité. Donc, on se demandera seulement dans quelle mesure l’instinct peut se ramener au simple intérêt de l’individu : auquel cas, à la limite, il ne faudrait plus parler d’instinct, mais de réflexe, de tropisme, d’habitude et d’intelligence. Ou bien l’instinct ne peut-il se comprendre que dans le cadre d’une utilité de l’espèce, d’un bien de l’espèce, d’une finalité biologique première ? « A qui est-ce utile ? » est une question qu’on retrouve ici, mais son sens a changé. Sous son double aspect, l’instinct se présente comme une tendance lancée dans un organisme aux réactions spécifiques.
Le problème commun à l’instinct et à l’institution, est toujours celui-ci : comment se fait la synthèse de la tendance et de l’objet qui la satisfait ? L’eau que je bois, en effet, ne ressemble pas aux hydrates dont mon organisme manque. Plus l’instinct est parfait dans son domaine, plus il appartient à l’espèce, plus il semble constituer une puissance de synthèse originale, irréductible. Mais plus il est perfectible, et donc imparfait, plus il est soumis à la variation, à l’indécision, plus il se laisse réduire au seul jeu des facteurs individuels internes et des circonstances extérieures, – plus il fait place à l’intelligence. Or, à la limite, comment une telle synthèse donnant à la tendance un objet qui lui convient pourrait-elle être intelligente, alors qu’elle implique pour être faite un temps que l’individu ne vit pas, des essais auxquels il ne survivrait pas ?
Il faut bien retrouver l’idée que l’intelligence est chose sociale plus qu’individuelle, et qu’elle trouve dans le social le milieu intermédiaire, le tiers milieu qui la rend possible. Quel est le sens du social par rapport aux tendances ? Intégrer les circonstances dans un système d’anticipation, et les facteurs internes, dans un système qui règle leur apparition, remplaçant l’espèce. C’est bien le cas de l’institution. Il fait nuit parce qu’on se couche ; on mange parce qu’il est midi. Il n’y a pas de tendances sociales, mais seulement des moyens sociaux de satisfaire les tendances, moyens qui sont originaux parce qu’ils sont sociaux. Toute institution impose à notre corps, même dans ses structures involontaires, une série de modèles, et donne à notre intelligence un savoir, une possibilité de prévision comme de projet. Nous retrouvons la conclusion suivante : L’homme n’a pas d’instincts, il fait des institutions. L’homme est un animal en train de dépouiller l’espèce. Aussi, l’instinct traduirait-il les urgences de l’animal, et l’institution, les exigences de l’homme : l’urgence de la faim devient chez l’homme revendication d’avoir du pain. Finalement, le problème de l’instinct et de l’institution sera saisi, à son point le plus aigu, non pas dans les « sociétés » animales, mais dans les rapports de l’animal et de l’homme, quand les exigences de l’homme portent sur l’animal en intégrant celui-ci dans des institutions (totémisme et domestication), quand les urgences de l’animal rencontrent l’homme, soit pour le fuir ou l’attaquer, soit pour en attendre nourriture et protection.
« Introduction » dans G. Deleuze, Instincts et institutions, Paris, Hachette,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