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신 하느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지난주에 지낸 성령강림으로 우리 교회는 성삼위의 신비와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느님,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위로자요 보호자로 우리곁에 항상 함께하시는 성령님. 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고백.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교 237항) 하느님이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시면 알 수 없는 신비.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과 이성으론 온전히 알기 힘든 신비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성인, 교회의 대학자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신비,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지만 그 신비에 대해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가득한 맘으로 성인은 잠들게 됩니다. 꿈에서 성인은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바다였지요. 그 곳에서 한 꼬마아이가 작은 웅덩이를 파고 조개 껍대기로 바닷물을 떠 와서 그 웅덩이로 넣고 있더랍니다. (중략) 아저씨, 저 바다보다 큰 하느님의 세계를. 조개 껍데기보다 작은 아저씨의 생각으로, 모래구덩이 만한 아저씨의 머릿속에 담는 일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아저씨의 인생이 저물고 있어요. 아저씨가 하느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통해 자기의 보잘것 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거룩한 신비를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중 - 이렇듯 거룩한 신비여서 하느님이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작은 이성으론 절대 알 수 없는 신비이기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의 신비를 보여주길 청하는 것이 첫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최재도 바오로입니다. 천곡동 본당의 신부입니다. 동시에 제 부모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 동료들에게는 편안한 친구이니다. 저는 하나이지만 이렇듯 세 가지 고유의 역할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느님도 창조하신 하느님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영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셋이라 부르지 않고 온전히 하나이신 하느님,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1독서 말씀으로 잠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처음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함께하셨던 일치의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잠언 8장) 삼위일체의 관계가 저 때문에 딱딱해지셨다면 오늘 1독서의 잠언 말씀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늘 함께하셨고 공원에서 아이가 부모님 앞에서 뛰놀 듯 그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삼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성삼위는 이렇듯 사랑의 일치,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만 봐도 행복한 부모의 모습처럼, 부모님만 눈에 보이면 안심하고 뛰노는 아이들처럼 그런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일치, 사랑의 온전한 모범이 성삼위의 일치인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삼위일체의 신비에 관한 묵상을 나눠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 하느님은 홀로 전능하신데 왜 공동체의 모습을 취하실까요? 이것은 단순히 당신 존재 양식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까지 당신의 그 사랑의 역동성 안으로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세상 모든 이가 기쁨을 나누는 더 큰 공동체, 하느님 나라를 주님은 꿈꾸십니다.” (서춘배 신부) 굳이 공동체를 이루신 하느님, 하느님의 이 계획은 온전히 우리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고 밖에 표현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굳이 그렇게 세 위격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으신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들 서로가 너무나 다르지만 각자의 그 다름으로 인해 공동체가 더 살아있고 풍요로워 지는 것입니다. 성삼위의 일치 안으로, 그 사랑의 일치 안으로 우리는 초대 되었습니다.
첫댓글 유튜브 '어안채' 에서 곽진상 젤마노 총장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삼위일체적 친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우리 삶 안에 녹아들어 살아왔던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