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이 멀어도 좋을만한 부신 봄 햇살 아래서 한 줄의 편지를 쓰고싶다.
푸른 하늘과 흰구름의 조화로운 상생, 파릇파릇 돋는 새싹과 꽃말의 의미,
남도로부터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이 전하는 말을 한 장의 화선지에
고이 접어 날리고 싶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찬란한 계절의 성찬 앞에서 수신인 없는 편지인들
또 어떤가, 이 환희와 절망의 생성과 소멸이 다만 자연의 이치와 순환질서에
감읍할 수 있는 윤회였으면 싶다.
그리하여 먼 훗날, 천상병 시인의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과도 같이
피안의 저 세상에서 물음표로 갈무리 될 내 인생의 이력서를 당당하게
펼쳐 보이고 싶다.
모든 것들은 경험과 반복에 의해 단련되어지는 법인데 유독 죽음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경영하면서 파도타기와도 같은 고난과 시련에
직면하고 이를 헤쳐나가면서 지혜와 슬기로 난관을 극복해가며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꿈꾼다.
하지만 죽음은 내세와의 단절이요 마침표인 까닭에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만 윤회를 전제로 할 때 결별과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란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일이다.
적어도 필자에겐 지난 보름의 시간이 삶과 죽음을 넘나든 칙칙하고도 어두운
기나긴 나날이었다.
가치관과 소신, 인생관과 철학, 내 유일한 삶의 의지마저도 감금당한 채
핵폭풍의 미립자가 되어 부유하거나 혹은 나락의 그 깊은 늪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혹독한 표현을 하자면 예비 인생 하직서에 위임 날인을 했다 고나 할까,
인간은, 이 땅의 평범한 소시민은 대체 어떠한 신념과 의지로 삶을
갈무리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인생 이력서에 매끈한 족적 하나 남길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며 애원하는 한 사람을 애써 외면한 채 땅에 묻었다.
아니 살아남은 자들의 죄스런 허물까지도 훌훌 털어 함께 묻었다.
23년 여 종가 집 종손부로 온갖 시름 껴안으며 말보다 행동으로 묵묵히
사랑을 배풀고 삶의 아픈 구석까지도 쓰다듬던 그를 우리 모두는 소리 없는
눈물로, 피끓는 절규로 보냈다.
'좋아질 것이다'는 의사의 말로 시작해서 '운명하셨습니다'라는
흰 가운의 사망선언에 폐부를 찌르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정말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기구한 한 목숨이
시들고 있는 저편에서 목련은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가랑비만 짓궂게
발등을 적셨다.
의료사고, 정말이지 필자와 무관한 일로만 생각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가설로 단정했다.
굳이 히포크라테스를, 슈바이처를, 허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의술은 인술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했다.
인격과 양심을 바탕으로 한 최선을 다한 진료와 처방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할지라도 의료인으로서 사명과 본분을 다한 행위는
분명 아름다울 수 있다.
문제는 그 이면에 감추어진 방관과 유기, 비도덕과 비윤리다.
웅덩이를 향해 던지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이를 가볍게 여기고
방치하는 눈가림 식 행위가 수많은 생명체들의 생사여탈과 직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의술인의 존립가치가 있다.
이젠 용서하기로 했다.
분명히 말하자면 고인을 대신해서 용서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다만 살아남아 무력한 자의 양심으로 미움과 증오 일랑 송두리째
긁어모아 흐르는 강물에 부리기로 작정했다.
미움은 아픔의 불씨를 낳고 증오는 또 다른 죽음을 담보로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기에, 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을
가슴에 묻고 신뢰를 상실한 아픈 상처를 회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고통을 필요로 할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죽음은 결코 단련되어지지 않는다.
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사랑하는 한 사람을 천상으로 날려보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앞으로도 이 삶과 죽음의 공간에서 나의 딜레마는 계속 될 게고
나는 또 수신인 없는 편지 한 장을 움켜쥐고 구차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해 나갈 것이다.
다시 일어서기 위한 쓰러짐의 미학을 창출해가며 옥죄어오는
야누스적 이중구조의 모멸감에서 탈출하는 그날,
나 역시 한 줄기 바람으로 천상에 오르리라.
필자의 비보에 아픔을 함께 하고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해준
선데이뉴스 임직원 및 최광림 팬-클럽 [시원] 가족,
나아가 모든 분들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choikwanglim@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