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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울산·경남의 추억 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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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부산 이야기 스크랩 외부글 문현동 공동묘지와 내 삶의 흔적
ㅅㅁㅅㅁ72 추천 2 조회 1,806 18.04.28 01:36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설 연휴 마지막날 어머니가 점심을 같이 먹자는 전화가 있어 본가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 시야도 선명했다. 

 본가로 가는 길은 통일동산 서북쪽 사면 가장자리 숲과 주거지 경계부에 텃밭과 조림지를 경유한다.  

 지난 2005년에서 2006년 남구청은 일대 2,576m²  에 벗나무를 식재하고 '꿈을 키워 가는 동산'이라 이름 붙였다. 단지 안에는 200m² 의 자연체험학습장도 만들었다 되어 있는데, 대상지를 알 수 없고 체험학습이 이루어진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그 보다는 일대에 공동주택단지가 들어 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미 계획에 따른 승인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실이라면  거부한다.  일대에 섬처럼 존재하는 통일동산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산이다. 나아가 산책과 도시 생태차원에서도 더이상의 훼손은 없어야 할 곳이다,  그리고 '꿈을 키워 가는 동산'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지 않았든가. 재고되어야 한다.    

 옹벽이 끝나는 지점에   연립주택이 통일동산 북쪽 사면과 연해 있다.  거기서 건너편 활령산 쪽을 바라본 장면이다.  

 지난해 마을터줏대감 2차 조사에서 새롭게 등재한 과수원 안의 팽나무와 종가시나무 그리고  당산 상수리나무를 줌을 이용해서 앞 당겨 보았다.  정말 보물같은 곳이다.  안타깝게도 행정에서는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조만간 발행될 노거수 지도를 접하게 된다면 관할 남구청과 주민센터에서 새로이 관심과 후속 조치를 가지지라. 염려컨데 혹이라도 알게되더라도 제발 그대로 두기를 희망한다.  

 문현동에서 오래된 집들 중에 한 곳인 진남로 198번길 6-15 번 집  

 예전에 이 집 위로는  집에 거의 없었다. 죄다 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들이 들어 서기 시작한 때는 70년대 말과 80년대 부터였고 아버지가 이 도시 이 마을을 전전하다 안착한 곳도 이 지역이다.  그 최초의 집은 건너편에 있었다. 

 현재의 집은 2002년 무렵 이주하였다.

 

이사

 

타향살이 40

비로소 아버지 문패 번듯한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해묵은 살림살이

시절 지난 옷가지에서

비닐봉투까지 하나도 버릴 것 없다

단호한 어머니

구질구질 잡동사니

, 며느리 기겁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

우리시대 최고의 환경운동가입니다.(2004)

 

 70년대 이 골짝에는 계류를 막아 만든 작은 보가 있었다.   여름이면 애들이 물놀이를 하러  이곳까지 찾아 왔었다.  워낙에 많은 애들이 찾다보니 물은 흙탕물이었다.  그럼에도 계곡에는 가재가 득실거렸다.  한마디로 놀이터였다.  그랬던 계곡의 기억은 어느 순간 지워지고 없어졌다.

 바람고개로 오른 길에 만난 청딱다구리

 40여년 전  황령산 허리에서 바라 보던 스카이라인은 단조롭고 미끈했다.

 이곳 임도는 그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폭은 지금보다 좁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코굴을 비롯하여 산자락 곳곳에 무당의 기도처가 많았다. 

대숲의 면적은  3,100㎡ 정도 약 1000평 남짓한 넓이다.   일대의 대숲은  인공식재한 것으로 그 시기는 과수원의 등장과 비슷한 일제시대 가 유력하다,

대숲 가장자리에는 팽나무를 비롯하여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등이  대숲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숲 안의 소나무 몇 그루는 그 줄기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거기 상수리 나무 중 딱다구리가 흔적을 남겼다.    

황령산 일원에 서식하는 딱다구리는 3종이다. 이중  출현빈도가 가장 높은 것이 쇠딱다구리이며 큰오색딱다구리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큰오색딱다구리의 경우 나무 쪼는 소리가 제일 크게나서 굳이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나무쪼는 소리가 인근 절에서  두드리는 목탁소리처럼 청아하고 경쾌하다.

  찍어둔 사진이 있을 텐데 찾기가  귀찮아  다른 블로그를 이용했다.  사진은   큰오색딱다구리:http://blog.naver.com/cardory1107/220563902467

쇠딱다구리: http://blog.daum.net/kapoad/1960   청딱다구리 http://blog.naver.com/sallynice/110130007171  에서 가져 왔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공동묘지가 나온다.  사실 이날 산책은 혹시나 못본 노거수가 있나 싶어 본가에 들렸다 산으로 올라 임도를 따라 마냥 걸었던 것이다.  

 예정에 없던 걸음이었지만 공동묘지를 둘러 보았다. 방황하던 20대의 흔적이 이곳에 베어 있다. 특히 재수시절 자주 찾았던 곳이다. 

 밤나무가 제법 자랐다.

 문현동 골동묘지는 제법 역사가 오래된다.  기록에 의하면 개설은 1898년(출처: 1971 부산도시계획백서 )으로 나와 있다. 이웃한 전포동 골동묘지는 1953년 개설되었는데 그 경계가 모호하다. 본격적 매장은 1920년대부터 이루어 졌는데 1914년 부산부에서는 기존의 매장문화를 뒤바꿔 놓는 조선총독부령'묘지규칙'이란 것이 만들어 졌다.  '공동묘지'란 용어도 이때 처음 사용되었다.  관련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14)을 쓴 이근영의 '20세기 묘지법제와 부산 공동묘지의 변화양상'에 따르면  

공동묘지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은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시신을 매장하는 곳으로 무주공산, 북망산 등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주로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객사(客死)한 사람들이 묻히는 장소였는데, 일제가 그런 구분을 무시한채 일괄 강요함으로써 저항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정부는 공동묘지 대신 공원묘지제도를 도입 하고 장려하였다.  부산의 경우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난민과 이주민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대도시화 되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영역에 고유공간에 대한 인식이 와해되는 특수한 곳으로 기록되었다.  예컨데 주거와 마찮가지로 매장문화 역시 접근하기 쉬은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고 그 대상지는 산지가 많은 지역 특성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공동묘지는 집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주거지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또는 도시계획 차원에서 기존 공동묘지를 개발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1973년 작성된 부산시 공동묘지현황카드에 의하면 문현동(산20번지>산23번지 )과 전포동(산55 번지 > 산 50-1, 3,4)의 공동묘지는 전포동과 문형동의 경계 고개에서 진남로를 기준으로 황령산 서사면에서 돌산공원과 벽화마을 전체로 확대되었다.  부산시는 공동묘지를 세번에 걸쳐 조사했다. 1968년, 1973년이었으며 가장 최근은 2006년 조사였고, 모두 44곳을 확인하고 전산화 시켰다.  묘지행정은 일제시대 묘지규칙 공포 시행에 이어 1966년 '부산시공원묘지설치조례제정' 1995년 '부산광역시 영락공원및 고원묘지 사용조례'를 거치며 장사문화를 변화시켰다.  

 묘지를 돌아보며 비석을 확인한 결과

 확인 가능한 비문으로 1950년대 매장이 많았다. 

 후손이 돌보는 무덤과 주인없는 무덤의 외형상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원래 비석이 없었다 최근 후손들이 비석을 세운 곳도 더러 있다.

사실 공원묘지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세수의 확보에 더하여 산림녹화와도 깊은 연관을 지닌다.  관련하여 1973년 경향신문 2월9일자 에는 지방순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의 부산방문을 1면에 실었다. 결론적으로 이날 순시는  오늘날 부산지역 공동묘지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예컨데 이날 박대통령은 수영비행장 도착 후 당시 김대만 부산시장과 같이 차를 타고 남천> 문현> 초량을 거쳐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있던 부산시청에서 시정보고 후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지시를 내린다.  도시과밀화 해소책으로 시민세의 부과와 무허가 건물의 벌금부과, 시 중앙부에 자리잡은 산지에 대해 녹화를 하도록 한 것이다.  박통이 수영비행장에서 내려 시청으로 가는 구간 그의 눈에 비친 부산의 산자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계절적으로 2월 초순의 황량함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거기다 산동네가 유난히 많은데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헐벗은 산이 대부분이었다. 

살기 위해 도시로 내몰린 영세민들이 산자락에 허술한 집을 지어 살다 죽어 인근 공동묘지에 묻힌 사연을 그는 헤아렸을까. 덕분에 부산의 산지가 오늘날 녹화되어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긴 하다만 

 임도의 개설로 무덤의 일부는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위에 텃밭을 가꾸기도 했다.  나아가 마을이 들어서기도 했다.

 벽화마을에서 풍물소리가 들려 지나는 길에 구경하였다.  좀 이른 풍경이다,  통상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이루어지는 지신밟기 풍물놀이인데 ...

 벽화마을은 무덤위에, 또 무덤 속에 들어선 마을이다. 그 특이성이 다른 묘지마을과 차별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 마을의 운명도 불투명하다. 

 명절 끝이라 곳곳에 술판이었다

 개인적으로 일대의 묘지 정리는 추가적으로 없었으면 한다.  생태적으로 햇빛에 노출되는 초지로서 공동묘지는 특별한 생태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현재 문현동 벽화마을은 250채 320녀 세대 950여 명이 거주한다. 거주자들은 그야말로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만든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이래저래 끼워 마춰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지만 불법건축과 철거의 반복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형태가 이루어진 것은 80년대 중반쯤이다. 전기가 들어 온 것은 1996년, 상수도 시설은 2002년 설치되었다.  마을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는 2008년 벽화그리기와  2010년 새롭게 정비 단장한 돌산공원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사진 부산일보 김경현 기자 view@ / 최원준 시인

 

마을에는 아직도 80여기의 무덤이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무덤과 주거가 공존하고 있다. 드문 사례다.

참전 美軍 Kenneth H. Lehr씨가 1952년에 찍은 일대의 사진이다.  좌측 상단 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안창이다.  문현현대2차 아파트가 입지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남구 문현양묘장 입구에도 무덤이 제법 있다. 추정컨테 돌산공원을 비롯하여 양묘장과 연이어 있는 부성고 자리 역시 공동묘지 터였다.

http://blog.daum.net/bgtkfem/58 

참전 美軍 Kenneth H. Lehr가 찍었던 장면과 대비시켜 비슷한 지점에서 찍어 보았다. 얼핏 영도와 문현4동과 대연동의 경계 우룡산 능선만  비교 가능한 선으로 남았을 뿐  너무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 졌다. 돌무덤은 어린아이들을 주로 묻었던 흔적이다. 애장터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동안 눈여겨 보지 못했던 곳에 팽나무 한그루 홀로 컸다.

부성고 담장 옆 무덤 1기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일대의 공동묘지 면적울 다시금 가늠해 보았다.  앞서 언급했던 연구자가 제대로 짚었는지, 하긴 그가 추적했던 논문의 목표는  문현동 공동묘지가 아니었다.

문현1동에 거처가 있던  시절 이 언덕을 얼마나  오르내렸든가 . 차비가 없어 서면서 전포동을 걸어 이 언덕을 넘나들던  가난한 청년에게 이 길은  많은 삶의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구하던 시절이었다.  고백하건데 이 마을을 지나며 어느 집 담벼락  운동화를 훔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5년 7월5일 산사태가  일어났다.  36명이 죽었다. 1959년 사라호때도 10여명이 목숨울 잃었다. 주민들의 탄원이 있었지만 무시당했다. 얼추 30년 전이다. 그 시절의 아픔 간데 없고 아파트 공사가 옹벽아래 진행중이다. 그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문현동 안동네 안창, 그 위에 우뚝한 황령산 자락,   소나무들의 서식 범위를 짚어 보았다. 이 무렵 산지의 목본류의 분포대를 조사 할 수있는 적기다.

능선이 이어진 바람고개와 갈미봉 자락 역시 소나무의 서식 범위는 해갈 갈 수록 줄어 둘고 있다.

대신 봄날 이산 곳곳에 식제된 벗나무의 세력은 계속적인 확대가 이루어 지고 있다. 인공조림지와 2차 천이지역의 임상이 확연하다. 그러고 보니 송충이 잡고 소나무 심으러 다녔던 시절도 떠올랐다.

건너다 본 통일동산 또한 큰 변화가 앖다

전체 면적 97,690m² 약 29,500평으로 얼추 3만평이 통일동산의 면적이다. 

북 사면과 북서사면의 숲 형태다.

앞서 언급했듯 대성아파트 우측으로 아파트 건설 소문이 들리고 있다.

 한맥 현대아파트에서 메가마트 문현점까지 문현로 66번길이 소방도로 형태로 변하면서 일대의 변화를 견인할 것이다. 탐탁치 않지만 아버지의 친구가 도로개설에 따른 토지 보상문제를 의논해 온 적이 있어 도로계획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후 그 양반의 집은 헐리웠다. 그리고 그만큼 길이 뚫렸다.   

6층 높이의 마마아파트 높이를 히말라야시다가  키를 세웠다.  아파트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개잎갈나무처럼 스스로 키를 키워 숲을 만들지는 못한다.

예전에 살았던 고동골로 47번 길,   이 길을 따라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길에서 만난 튤립나무  두 그루.  골목하나 사이에 두고 그  대접이 달랐다.   

어쨌거나 ....문현동에 대해 이것 저것 추적하고 알고자 함은 또  사람살이의 흔적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어 함은 내 삶의 터전이고 역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파편들이다. 언젠가는 모자이크가 완성되리라 보지만

건너편 마을은 조만간 그 형체가 사라질 것이다. 철거가 임박했다.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록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버지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힘든 시절이 이 골목에 스며 있다. 전세집을 전전하다 아버지는 지금의 고동골 안창 후미진 쪽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한창 타오르던 20대 중반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념적으로도 반목했다.   아버지도 나도 힘든 때였다.

 

냉 전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와 나는 KBS 9시 뉴스를 본다

심각한 학원 문제 이대로 좋은가

아나운스의 짧은 코멘트에 이어

오늘 시위전모가 보도되고

아버지와 나는 덩달아 흥분한다

화면은 투석과 최루탄으로 범벅된

데모현장으로 바뀌고

아버지와 나는 텔레비젼 속 노려보고 섰다

이놈 새끼 너도 빨갱이지

아버지, 제발

(......)

진실은 끝내 조작과 편협으로 매도되고

나는 눈물을 삼키며 퇴장한다

다시 밥상을 사이 아버지와 아들

더 이상 말이 없다

 

 

바람 85-8

어머니 빈 들을 지나는 바람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앞선 아들이 언제나 재촉하지만

돌아서 보면 언제나 제자리

어느새 어머니 삼단같은 머리 눈이내리고

타향살이 수십 년 가난한 삶터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의 몸짓은

오늘 비가 되어 내리는데

문현동 산 72번지 슬레이트 집

빗물받이 고무 다라이에 고이는 낙수물 아련히

낡은 사진첩을 더듬는 어머니

당인의 거친 손끝은

비탈진 빗속을 가는 바람이다

 

 

그 행로는 고동골로 69번길  > 고동골로 69번길 19-3 > 고동골로 59번길 20 > 진남로 189번길 52-39 으로 바뀌었다.

 

파지(破紙)

산빛이 푸를수록 주문은 늘고

자욱한 먼지 한낮의 형광등 아래 졸고 선

월 십만원 나의 작업은 더디다

끊임없이 발 등에 쌓이는 휴지조각은 한숨으로 쌓이고

무겁다 휴지 한 장이 너무 무겁다

온종일 선채 물레질 절단을 하고 포장하기를

수천 수백 번 반복하지만

나의 작업은 의미가 없다

팔리지 않는 하루는 힘겹게 저물고

청소 시간 파지를 밟고 선 나의

표정은 납작하게 뭉게진 쓰레기

어디 가서 풀어 볼까나

퇴근길 천근같은 다리는 소주에 더욱 휘청이고

서러움인지 취흥인지 불러보는 유행가 몇 가락

아 대한민국 살기 좋은 나라

쑥꾹새 우는 산동네 어두운 골목길 돌고 돌아

쓸어질 듯 잠들면 이름도 없는 까마득한 절벽

스물다섯 나의 봄은 그렇게 지고 있었다.

나선 걸음에 문현여중 앞을 돌아 집으로 오면서  옛 친구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현재 어느 고등학교 교사로 있다.  참교육을 부르짓으며 학교교문을 붙들고  절망하던 모습이 새삼스러운데 하마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도 나도 이제 50 중반 60을 바라보는 세월을 살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실까.  그가 살았던 집터도 조만간 사라질 것인데 ....그 친구는 이 사실을 알련가  


The Outlaws-Ghost Riders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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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8.04.28 01:36

    첫댓글 2016년 문현동 안동네와 관련된 글입니다.
    카페 회원이신 녹나무님 블로그에서 스크랩한 것입니다.
    개인적 추억이 바탕이지만 사회적 무게감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 18.05.01 21:49

    좋은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 18.07.06 11:27

    저도 곧 사진을 찍어서 문현동을 기억할 예정입니다
    본문 사진들 모두 애틋한 사진들입니다
    곧 어머님을 뵈러 가야하는데 가는길에 곳곳을 담아놓을려고 합니다
    좋은 사진 너무 감사합니다

  • 18.11.20 22:13

    문현여중으로 가는 길이랑 문현 안동네 삼성 아파트? 래미안?이 보이네요

  • 20.03.30 08:06

    문현1동 현대 1차 아파트, 그녀를 보러 가던 그때가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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