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손견이 옥새를 얻은 경위를 지켜본 군사들 가운데
원소와 같은 고향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손견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기화로 자기를 높이고 싶었다.
어둠을 틈타 손견의 진채를 빠져 나온 뒤 똑바로 원소의 군막을 찾았다.
손견의 군사 하나가 한밤중에 자기를 찾아와 얘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원소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졸개임을 꺼리지 않고 자기의 군막으로 들이도록 했다.
"너는 손문대의 수하로서 이 깊은 밤에 어찌 나를 찾았느냐?"
그 군사가 불려오자 원소가 은근하게 물었다.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맹주께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 이렇게 감히 찾아뵈었습니다."
"날이 밝은 뒤 손문대를 통해서는 안될 말이냐?"
"그렇습니다. 바로 손장군에게 관계된 일인즉 그랬다간 제 목숨이 남아나지 못합니다."
그제야 원소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그토록 엄중하냐?"
"실은 손장군께서 조금 전 전국 옥새를 얻으셨습니다."
"뭐? 옥새를?"
원소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옥새가 없어진 일은 십상시의 난 때
가장 중요한 몫을 했던 원소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손견의 군사는 한층 신이나 주워섬긴다.
"네. 건장전 우물 속에서 죽은 궁녀의 시체를 건져내니 그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손장군께서는 그 옥새를 깊이 감추시고,
저희들에게는 만약 그 일을 입밖에 내면 목을 베리라 엄포를 놓았습니다."
"뭐라고? 손견, 그자가?"
"뿐만이 아닙니다. 내일이면 반드시
맹주님을 찾아와 병을 핑계로 강동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전국 옥새에 기대어 참람된 뜻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듣고 보니 큰일이었다.
이에 원소는 그 군사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몰래 자기의 진채에 숨겨 놓은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과연 손견은 날이 새기 무섭게 찾아와 불쑥 돌아갈 뜻을 표했다.
"이 견에게 병이 있어 잠시 장사로 돌아갈까 합니다.
병을 다스린 뒤에 다시 돌아와 근왕의 대의를 받들기로 하고
이제 특히 맹주인 공께 작별을 고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평소의 당당하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리는 듯 했다.
☆☆☆
원소가 빙긋이 웃으며 그런 손견의 말을 받았다.
"내가 알기로 공의 병은 전국 옥새를 얻어서 생긴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 말에 손견은 일시 안색까지 변했다.
그러나 이내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씀이십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지금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해로운 것들을 없애고자 함이 아니오?
그런데 공은 어찌 사사로이 딴뜻을 품으시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옥새는 나라의 보물이오. 공이 그 옥새를 얻었으면
마땅히 여러 제후에게 보인 뒤 맹주인 내게 맡겨야할 것이오.
그리하여 동탁을 주멸한 뒤 조종에 돌려줘야 할 것인데,
이제 공이 숨겨 가지고 떠나려 하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 말을 듣자 손견은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한 이상 끝까지 그대로 밀고
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못 불쾌한 투로 원소에게 되물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실로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째서 그 옥새가 제게 있단 말씀입니까?"
"그럼 건장전 우물에서 꺼낸 그 물건은 지금 어디 있소?"
원소가 한층 빈정대는 얼굴로 손견을 다그쳤다.
그에 비해서 손견의 부인도 더욱 완강해졌다.
"모르는 일이오. 본래 내게 없는 것을 어찌 이렇게 억지로 내 놓으라 하시오?"
"닥치시오. 빨리 내놓는다면 스스로 화를 만드는 일은 면할 것이오."
그러자 손견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소리쳤다.
"내가 만약 그 보물을 얻었고, 또 사사로이 그걸 감추고 있다면
제 명에 곱게 죽지 못하고 칼과 화살 아래 목숨을 잃을 것이오!"
손견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아직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제후들은 손견의 편이 되었다.
오히려 원소를 말려 두 사람의 다툼을 끝내려 들었다.
"손문대가 저렇게까지 맹세하니 틀림없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합니다.
맹주께서 잘못 아신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증거를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소."
원소는 제후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좌우를 시켜 간밤의 그 군사를 데려오게 했다.
"이 사람을 보시오 우물에서 옥새를 건져낼 때 이 사람이 있었소 없었소?"
손견이 보니 지난밤
건장전 우물에서 궁녀의 시체를 건져낼 대 함께 있었던 자기의 군사였다.
그러나 당황함에서 노기부터 치솟았다.
"이놈이 헛소리로 맹주와 나를 이간시키려 드는구나.
주인을 저버리고 도망친 죄만도 큰데 이제 제후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까지 했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는 놈이겠느냐?"
손견은 그렇게 꾸짖은 다음 칼을 뽑아 그 군사를 죽이려 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원소가 아니었다.
참고 있던 노기를 터뜨리며
마찬가지로 칼을 뽑아 손견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네가 이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것은 바로 그렇게 입을 막아 나를 속이려는 수작이다.
굳이 이 군졸을 베려면 내 검부터 꺾고 가거라."
이때는 원소의 상장인 안량과 문추가 당도한 뒤였다.
주인이 노하여 칼을 뽑는 걸 보자 그들도 각기 칼을 빼들고
원소를 감싸며 손견을 노려보았다.
그걸 본 정보와 황개 한당 등 손견의 장수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각기 칼을 빼들며 손견의 좌우로 몰려왔다.
자칫하면 동탁을 치기에 앞서
집안 싸움부터 먼저 치를 판이었다.
기주의 용장들과 강동의 맹장들이 칼을 맞겨루고 있으니
어느 쪽이 이길지 실로 짐작조차 어려웠다.
영문도 모르고 그들의 다툼을 보고 있던 제후들은 크게 놀랐다.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들로서는 큰 손실이요,
가만히 있는 동탁만 이롭게 할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는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제히 싸움 가운데 뛰어들어 말리는데,
우선은 손견한테 자기의 진채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아직 자기들이 본 것만으로는 어느 쪽의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어
쉬운 대로 두 사람을 떼어놓는다는 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제후들이 나서서 말리자 손견은 은근히 반가웠으나
더욱 성난 기색을 짓고 한동안을 버티다가 마침내 마지못한 듯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진채로 돌아오기 무섭게 명을 내렸다.
"모두 진채를 뜯고 강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
명을 받은 손견의 군사들은 지체없이 진채를 뜯었다.
손견은 그들을 이끌고
그날로 낙양을 떠나 자기의 근거지인 강동으로 향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가까운 곳에 진채를 벌이고 있던 제후들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한편 손견이 군사들을 이끌고 자기의 근거지로 돌아가 버렸다는 말을 듣자
원소는 크게 노했다.
손견에게 옥새를 주어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급히 사람을 뽑아 형주자사 유표에게 한 통의 글을 보냈다.
<지금 강동의 손견이 참람된 뜻을 품고 전국 옥새를 감추어 제 근거지로 돌아가고 있소이다.
공께서는 그 길목을 막으시어 반드시 나라의 막중한 보물을 되찾도록 하십시오...>
동탁을 찾아간 조조가 형양에서 싸워 크게 졌다는 소식이 원소에게 전 해진 것은
바로 손견이 떠난 다음날이었다.
그가 옥새를 가진 줄 뻔히 알면서도
손견을 놓아 보낸 일로 심사가 한껏 뒤틀려 있던 원소였으나
역시 맹주로서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노여움에서이건 부러워서이건
조조가 낙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멀리 하내에 둔병 한 것을 알자
곧 사람을 보내 조조 자신의 진채로 청해 들였다.
조조가 마지못해 가서 보니
원소는 제후들과 함께 크게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의 정분 때문인지, 아니면 충분히 뒤를 밀어 주지 못해
조조의 패배를 더욱 참담하게 만든 데 대한 맹주로서의 책임 때문인지
조조가 당도한 뒤에도 위로하는 태도가 자못 은근했다.
다른 제후들도 어딘가 무안해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 때문에 조조는 오히려 격앙되었다.
몇 순배 술이 돌자 일어나 큰소리로 개탄했다.
"내가 처음 대의로 일어나 나라를 위해 역적 동탁을 없애고자 할 때
여기 계신 공들 또한 의를 짚어 호응해 오셨소이다.
그 동안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겪었으나 마침내 낙양에 이르렀소.
그런데 뜻밖에도 동탁은 천자를 끼고 장안으로 달아났지만,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소이다.
처음 이 조조의 뜻은 이러하였소.
먼저 맹주인 원본초께서는 하내의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맹진과 산조땅에 머무르시어 역적 동탁이 있는 장안의 동쪽 날갯죽지를 자르는 것이오.
그 밖에 나머지 제후들도 그 근거지에 따라 한 곳을 맡되,
성과 땅을 굳게 지키고, 오창산에 근거를 마련하여
환원, 대욕 두관을 막아 그 험한 요지를 제압해야 할 것이오.
그 다음은 원공로가 남양의 군사를 이끌고
단절 땅을 거쳐 무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장안은 사방에서 외로워지고, 장안 동쪽을 지키는 경조윤과
장릉 북쪽을 지키는 좌풍익과 위성 서쪽을 지키는 우부풍 등 삼보가 아울러 놀라 떨게 될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각기 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할 뿐
굳이 적과 싸울 필요가 없소.
거짓으로 나날이 군사가 느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천하의 형세가 우리를 따르고 역적을 주살 하려는 쪽으로 기운 듯 꾸미면,
모든 일은 절로 이루어진다 생각했소.
그런데 이제 이곳에 지체하여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천하의 여망을 크게 잃고 있으니. 어찌 한탄할 일이 아니겠소?
이 조조 실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원소 이하 모든 제후들이 곰곰 생각해 보니
그 같은 조조의 말에 한치의 그릇됨도 없었다.
그러나 또한 조조가 작은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예기만 꺾이고.
강동의 호랑이 손견마져 떠나 버린 그 마당에서는 이미 소용없게 된 계책이었다.
다시 힘을 모은댔자
이미 충분한 시간을 번 동탁이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이에 아무도 조조의 말에 웅대하지 못하고 어색한 가운데 술자리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 조조의 참뜻은
지난 허물을 들춰 제후들을 원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후들을 격동시켜 늦은 대로 다시 한번 그들을 분기시키고자 한 것이었건만,
아무도 따라주지 않으니 생각을 바꾸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자들은 모두 딴뜻을 품은 야심가의 무리거나
내 북소리에 놀라 달려나온 어중이떠중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과 무슨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랴!)
조조는 그렇게 단정하고
남은 자기의 군사들을 수습해 양주를 바라고 떠나갔다.
손견에 이어 조조까지 떠나가는 걸보고
공손찬도 유비와 관우 장비를 불러 말했다.
"원소가 무능한 위인이라 제후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네.
오래잖아 반드시 제후들 간에 변고가 있을 것이네. 우리들도 이만 떠나세."
그리고 진채를 뽑아 자신의 근거지인 북평으로 돌아가 버렸다.
유비 또한 눈 귀가 있으니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투덜대는 관 장 두 아우와 원래 이끌고 온 5천 군마를 수습해 평원현으로 되돌아갔다.
조정에서 받은 현령자리인 만큼
그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동탁에 항거하여
군사를 일으킨 이상 그대로 유지될 리 없지만,
이미 그 부근은
동탁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돌아갈 수가 있었다.
거기다가 그런 유비의 뒤에는
공손찬이란 강력한 후원자까지 버티고 있으니 누가 감히 평원을 넘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