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안효관 목사
여러분, '가시고기'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가시고기는 바다에 살다가 이른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서 민물하천으로 올라옵니다. 수컷 가시고기가 민물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안 암컷은 둥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놀기만 합니다.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은 '집이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를 확인하고는 마음에 들면 그곳에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을 낳은 암컷은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을 낳고 도망가버린 암컷을 대신해서 알을 지킵니다. 알을 빼앗아먹기 위해서 모여드는 침입자들로부터 알을 지켜내기 위해서 1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만 8일째 되는 날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합니다. 새끼들이 모두 부화했지만, 수컷은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둥지를 짓기 시작할 때부터 약 15일 동안 수컷 가시고기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새끼만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러고 나면 수컷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주둥이는 다 헐어버리고, 화려했던 몸 색깔은 볼품 없이 퇴색해버립니다. 그리고는 둥지 앞에서 죽고 맙니다. 둥지를 떠났던 새끼들은 죽은 수컷 주위로 몰려들어, 죽은 아비의 살을 파먹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아버지의 사랑을 소설로 그려내서 화제가 된 책이 있습니다. 소설가 조창현씨가 쓴 "가시고기"라는 책입니다.
다움이라는 아이는 백혈병을 앓고 있습니다. 다움이를 낳고 난 후 다른 남자를 만나 프랑스로 떠나버린 아내를 대신해서 아들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은 아빠였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희망을 버리고, 오직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아들의 백혈병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한 아빠는 결국 자기의 신장을 팔기로 합니다. 그러나 신장을 팔기 위해 장기 검사를 하던 중, 아빠가 간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결국 신장을 팔 수 없는 아빠는 자신의 각막을 팔아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간암을 더욱 깊어져 아빠가 죽음을 맞아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빠는 자신의 병과 죽음 때문에 아들이 슬퍼하는 게 싫어서, 아들 다움이를 프랑스에 있는 엄마에게로 보내고, 자신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들을 살려내기 위한 아빠의 희생이 아들은 살렸지만, 자신의 몸은 산산이 부셔져 죽어가야 했던 그 모습은, 새끼를 위해서 자신의 몸뚱이까지 먹이가 된 가시고기를 연상시켜 줍니다. 이게 '가슴 아픈 가시고기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아버지가 계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가시고기의 아픈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을 베푸시는 한 아버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이름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말씀인 이사야 6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우리는 진흙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토기장이이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선한 뜻을 위해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빚으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빚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유난히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보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9: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혹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잊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세상에 무거운 근심과 걱정의 구름이 우리의 인생 위에 가득 드리워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잊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곳에서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도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느 버스기사가 많은 승객을 태운 채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달리던 버스 앞에 한 꼬마가 뛰쳐나왔습니다.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던 버스는 멈춰 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좁다란 길에서 다른 곳으로 피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상황은 단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꼬마를 살리기 위해서 버스 핸들을 꺾어 언덕 아래로 추락하느냐, 아니면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서 꼬마가 있는 쪽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버스 기사는 엄청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버스 기사는 아이 하나를 희생하고 많은 승객을 구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버스는 겨우 브레이크를 밟아 평탄한 지형 위에 멈추었지만, 꼬마 아이는 버스에 치어 죽고 말았습니다.
멈춘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이 아이에게 달려가 보았지만, 아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 앞에 버스기사는 넋을 잃고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버스 기사를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이 꼬마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버스 기사가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꼬마를 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꼬마가 마냥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시체가 되어버린 꼬마 아이를 품에 안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기사의 흐느끼는 울음 앞에서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졌고,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버스 기사를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버스 기사는 흐느껴 울면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이 아이는 귀머거리 제 아들입니다. 제 아들이라구요."
버스 기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킴으로 많은 승객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키고,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을 대신해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당신의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귀한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길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언제나 응답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당신의 독생자를 주고 바꾼 귀한 생명인데, 어찌 우리를 사랑하지 않겠으며, 어찌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그 아버지 앞에 요구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부끄럼 없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뭔가 소원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에 소원을 가지고 가서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게 자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언가 부족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살롬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영육간에 온전한 모습으로, 영육간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신약성경에서 읽은 로마서 8: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독일의 성서신학자인 요하킴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아바"(Abba)라는 호칭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러한 호칭은 옛날 아람 사람의 가정에서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임을 찾아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바"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서먹서먹한 거리감이나 이질감이 없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입니다. 언제든지 아빠의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아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부자관계에서 나온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마치 관복을 차려입지 않으면 알현할 수 없는 왕을 뵈러 가는 것 같은 엄격함과 형식에 가로막혀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전통에 아버지는 항상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은 있지만, 그건 단순히 말뿐입니다.
자식은 아버지 앞에서 엄격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엄격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불효자식이라고 호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지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게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아버지의 권위와 위엄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사고방식 속에 아버지는 그런 엄격함의 모델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그러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친근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군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세요. 군인들이 "어머니"를 부를 때에는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훈련받을 때, 가스실에서 조교들이 시키는 게 있습니다. 가장 먼저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게 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라는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어머니'를 부를 때에는 눈물을 글썽이던 군인들이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을 부르면서는 울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면, 아마 눈물 흘릴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정신이 번쩍 들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인습 속에는 아버지가 그렇게 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엄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뭔가를 주고도 또 주고싶은 어머니와 같은 넓은 마음과 깊은 사랑을 가진 분으로 우리 하나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갖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다가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가까이 다가서는 자녀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64:9절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비록 이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을 따라갔을지라도, 당신의 택하신 백성,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들이기에 분노하지 마시고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고, 용서해 주옵소서' 그런 기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유혹되어 잠시 신앙의 자리를 이탈할 때도 있습니다. 너무 너무 삶이 힘들고 지쳐서 세상의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너무 속이 상해서 술 한 잔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마음, 그런 형편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다 체휼하셔서 우리가 연약할 때에 능히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다시금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와 있습니다. 물려받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이국 땅에 가서 허랑방탕함으로 다 탕진해버린 아들, 이제는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면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해도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된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이 "저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단지 품꾼으로라도 나를 써 주신다면 내가 굶주림이라도 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말하면서 돌아온 탕자를 품에 안고는 입맞춘 그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있을 때에도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신 아버지,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아버지, 우리가 비록 자녀답게 살지 못할지라도 우리를 믿어주시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아버지,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당신의 후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를 후사로 삼아주셔서 당신의 기업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 로마서 8: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맞바꾼 우리를 당신의 양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한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아 양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양자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써 영광의 기업을 얻을 후사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옛 생활은 거지와 같았다 하더라도 이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에 왕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뿐만 아니라, 왕의 후사로서 왕권과 왕위도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가리켜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 20:6)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제 우리는 세상 앞에서 당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할 사람답게, 왕같은 제사장답게 세상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기죽고 맥이 풀린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때 미국 오페라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힐리니 할버튼'이라고 하는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아들이 이웃집 아이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웃 아이가 자기 아들을 보고 "우리 아버지는 시장을 잘 안다"고 자랑을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셔"라고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서재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우리에게 당당함을 줍니까?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을 아는 배경이 우리 어깨에게 더 힘을 실어 줍니까?
아니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자랑이고 힘이 됩니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유난히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심판하시기보다는 용서하기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돌아서기만 하면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애타게 기다리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우리를 후사로 세워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나라를 약속하시고,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도록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시대 속에서 세상을 따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이 경제적인 한파가 다시 불어오는 때에 몸과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굳게 믿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모든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답게, 이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고 아버지를 닮아 가는 거룩한 삶으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