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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의 기적이 반가운 대신 웃긴 사람>의 줄거리 :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마음의 할례를 통해 시청후미촉 오감을 잘라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만을 마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삶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나 세상적으로 좋은 일에 대해서 보이는 태도입니다. 이들은 이런 기적이나 세상적 좋음의 일들이 반가운 대신에 웃깁니다. 비웃음이 아니라 웃음꽃이 핀다는 뜻입니다. 왜 삶의 기적 앞에서 웃음이 나올까요?
삶의 기적이 반가운 대신 웃긴 사람
(창세기 17:15~27)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우리가 읽지 않은 23~27절까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말씀 중심으로 ‘삶의 기적이 반가운 대신 웃긴 사람’이라는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삶의 기적이란 나에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사명을 수행하던 중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내 삶에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반갑지 않습니다. 웃깁니다. 여기서 웃긴다는 것은 비웃음이나 조롱의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는 의미입니다. 제목을 다시 말해보자면 ‘삶의 기적이 반가운 대신 웃음꽃이 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에서는 사래를 사라로 바꿔주십니다. 자손 번성에 대한 언약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가실 단계를 이름을 바꿔주심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이름대로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만을 붙잡는 존귀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열국의 백성이 나오게 됩니다. 한편 사래는 ‘여주인’ 혹은 ‘나의 공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라는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시점에서 아브라함은 구십구 세였고 사라는 팔십구 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이고 사라가 구십 세일 때 이삭을 낳는 것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삭을 낳기 1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브라함 태도는 우리를 또 다시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불신앙처럼 보이는 말과 태도를 보입니다. 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브라함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하나님! 정말입니까? 드디어 아이를 주시는군요. 이제 곧 저는 백 세가 되고 제 아내는 구십 세가 됩니다. 단산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못 하실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하신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나왔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무척 편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에 찌들어 사탄의 언어체계를 갖고 있는 우리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백 세든 구십 세든 아들을 낳는 것이 좋다는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이 반가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반드시 붙잡고 포획하듯이 내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전제는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에서 무엇이 상대자로 나타나고 포착되든지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일등으로 보여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봄이란 곧 하나님을 첫 번째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첫 번째로 의식하는 사람의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계속해서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와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르며 그 간격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나중 문제입니다. 일단 아브라함이 삶의 현장에서 보이는 태도가 어떤 믿음에서 나타난 것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 속에 도대체 어떤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반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제 자손의 약속이 이루어질 순간이 임박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하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우리는 이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 기준에서 보자면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뻐하고 펄쩍펄쩍 뛸 정도로 반가워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일부러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무척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태도는 마치 ‘하나님! 저는 이제 곧 백 세가 되고 아내는 구십 세가 됩니다. 이 노인 부부가 아기를 잉태하여 낳는 이상한 일을 하시려고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불필요한 일을 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왕 태어나 잘 자라고 있는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상식적으로 당연한 길을 놔두고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억지로 행하려고 하시는지 묻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던 시절에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신과 사라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가워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 전은 물론이고, 칠십오 세에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 아들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아브라함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다고 하면 무조건 반갑고 펄쩍펄쩍 뛰게 좋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베푸신다는 기적에 대해 간절히 바란 적도 없고 기다려 본 적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 기적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만족과 기쁨의 문제는 영광의 하나님 한 분으로 끝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드디어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잘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시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찌’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볼 때 그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세상의 주권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찌’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아브라함이 살던 상황 속에서 백 세의 할아버지와 구십 세의 할머니가 아들을 낳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우를 왜 억지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더군다나 아내가 구십 세가 되어 단산하여 아이를 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신 일이 아닙니까? 이제까지 주권적으로 아이를 주시지 않으셨다가 굳이 이스마엘을 놔두고 어떤 상황에서도 볼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경우를 억지로 부자연스럽게 만드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셈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어찌’라고 물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관심사는 영광의 하나님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에게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도 가질 수 없었던 근본적 이유는 마음의 만족과 기쁨의 문제를 영광의 하나님으로 끝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으로 마음의 만족과 기쁨의 문제를 끝냈습니다. 그러자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도 갖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의 일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간절히 바란 적도 없고 기다린 적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지금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같은 이유에서 웃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이 반갑고 기뻐서 웃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반가움이 없었습니다.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아들은 필요 없었고 지금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기뻐서 웃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의 문제를 끝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과 기쁨의 문제를 끝내야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기쁨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기쁨이고 반가움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웃음 속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너의 삶에서 긍정적인 방향의 기적이나 형통 혹은 성공이 반갑고 좋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는 아직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본문 전체가 할례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지라도 기다린 적도 없고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반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영광의 하나님만을 보고 있을 뿐이기에 그 일이 마음에 좋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십 세 아내가 아기를 갖게 되는 것을 바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는 그 순간에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웃길 뿐입니다. 그런데 이 웃음은 조롱의 웃음이나 비웃음이 아닙니다. 그저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말 공부를 못하던 아이를 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는 몰라도 기적적으로 서울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에 바빠서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일을 바란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녀를 대할 때 영광의 하나님 보기를 지키기 위하여 애쓰며 말하고 행동하며 관계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서 버렸던 아이가 서울대에 들어갔다니 그냥 웃음이 나옵니다. ‘하나님! 굳이 서울대학을 가게 하십니까? 가고 싶어 하는 애들이나 가게 하시지 굳이 우리 집 아이를 보내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몸에 불치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느라 몸에 대해 바람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느라 불치병에 대해서는 관계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적은 반갑거나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좋음일 뿐입니다. 병이 낫는 것이 좋음이 아닙니다. 병이 나아서 좋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낫는 것은 바란 적이 없고 영광의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애썼을 뿐인데 병이 낫자 웃음이 나옵니다. 나는 지금도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내가 바란 적도 없는 일을 하시는 과정에서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그냥 일찍 데려가시면 될 것을 굳이 낫게 하시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옵니다.
재정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지리도 돈을 못 벌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기적같이 돈을 잘 벌어옵니다. 그런데 남편이 돈을 못 벌 때도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했습니다. 예수님 따라 하늘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직면하여 영광의 하나님을 내 몫의 기업으로 가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따라서 영광의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하나님으로 부자 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는 중에 남편이 돈을 뭉텅이로 벌어오자 웃습니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기적 같은 일어난 것이 반갑고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자손의 기준을 여기서 잡을 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간격으로부터 완전한 여유로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병으로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살고 있는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으로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의 여유로움이 생겼습니다. 이 여유로움은 간격에서 생깁니다.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으로 만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바람이 없습니다. 여유가 생기고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소원할 뿐입니다. 세상과 마음의 간격이 생긴 상태에서 시청후미촉으로 만나는 세상일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도 웃길 뿐입니다. 이 여유로움에서 웃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브라함의 웃음을 체험적으로 느껴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군대 제대 후 늦깎이 신입생으로 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학년 때 결혼을 했습니다. 신학교 3학년 시절에는 교수님을 도와서 독일어 책의 각주 다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독일 유학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함께 별의별 궁리를 다해보다가 유학 기간에 필요한 재정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에 들어갔고 연예인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들어갔고, 3년이 지나서 전임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임전도사가 된 해의 1월에 서울에서 극장을 하시던 장로님의 사무실로 호출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장로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 매달 극장 수입의 일정 몫을 떼어서 경비로 지원해 주시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은 아니고 독일로 가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는 승낙을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집사람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 상황이 웃깁니다. 저는 이미 독일 유학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후였습니다. 기다리지도 않고 바란 적도 없습니다. 교육전도사로서 열심히 전도사 일을 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이렇게 일을 하시나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음에서 어떤 일에 대해 간절함이 식으면 다시 열정을 갖는 데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저는 독일 유학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기에 갑작스러운 유학 제안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서도 ‘하나님께서 굳이 이렇게 하시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학에 대해서는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완전히 죽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괜찮았던 이유는 영광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었기에,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기뻐하고 만족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마음의 만족과 기쁨은 아들이 아닌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상황이 웃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좋고 재미있고 웃깁니다.
이 세상적으로는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내 마음에는 간절한 바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일을 굳이 행하시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만족과 기쁨을 영광의 하나님께 묶어 놓은 상태의 아브라함 자손들은 웃습니다. 그런데 반가워하고 기뻐해서 웃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적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셨을 때 감사하고자 합니다만 그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자들은 세상 기준에서 바람직하게 보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압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압니다. 감사는 그 주권에 대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바람직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자체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구십구 세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상태를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고 있는데 백 세에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말씀을 받자 웃음이 나옵니다. 웃음꽃이 피는 것입니다. 백 세에 아들을 낳는 것은 아브라함의 만족과 기쁨에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아들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기다린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과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께 근거해야 됩니다. 하나님 부자 됨을 기다리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부자 되어서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 것은 점점 더 필요 없게 되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잘 풀리는 것을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많이 가질 때 나타나는 증거는 세상 것이 점점 필요 없어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는 세상 것이 점점 필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것이 나의 만족과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일이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나는 필요 없는데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시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이 세상 기준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어난다고 해서 기뻐하거나 반가워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좋아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자손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백 세의 아브라함과 구십 세의 사라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도 웃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자신과 구십 세 된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하나님만을 좋아해서 아들에 대해 전혀 바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좋게 여기시며 같이 웃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이유 없이 웃게 될 때가 있습니다. 웃음이 전염되듯이 아브라함의 웃음에 하나님도 웃으십니다. ‘네가 자꾸 웃으니 나도 웃게 되는구나. 그럼 너의 아들 이름은 웃음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입니다. 세 개의 웃음꽃이 핍니다. 아브라함의 웃음꽃이 피고, 하나님의 웃음꽃이 피고, 기적적으로 태어날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라는 이삭으로 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실 때 그것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이미 그렇게 이루셨을 수 있습니다. 또는 내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죽을 때까지 연금이 나오는 상황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 연금을 마음에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연금이 없다고 해서 아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도록 정하신 때까지는 어떻게든 먹이고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길 정도로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에서 연금을 본다면 웃기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내가 웃고, 또 나의 웃음을 보며 하나님의 웃음이 하나로 뭉쳐지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이러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웃습니다. 바란 적이 없고 지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굳이 이 세상 가치를 우격다짐처럼 삶에 쑤셔 넣으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나님으로 인해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웃는 아브라함을 보시며 하나님도 웃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웃음을 이삭을 통해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진 나의 웃음, 나의 웃음을 보시며 전염된 하나님의 웃음,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행하시는 나에 대한 모든 일은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모두 여러분의 웃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염된 하나님의 웃음에서 나오는 또 다른 웃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여러분에게는 이삭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웃음꽃이 만발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을 마음에서 잘라내게 하시며, 영광된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의 문제를 끝내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일을 이루어 가시든지 내게 웃음꽃이 피게 하시고, 나의 웃음꽃이 하나님께 웃음꽃으로 전염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웃으시는 중에 끝없이 내게서 원하시는 뜻을 이삭으로 이루어 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