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속환(贖還)되었던
환향녀(還鄕女)들은 생환의 기쁨도 잠시,
이혼 문제에 부딪혀 가정 파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정묘호란에 이어 터진 병자호란의 대 폭풍우가 몰아친
조선의 현실은 처참한 몰골로 다가왔다.
이정구(李廷龜)는 정묘 이듬해
“쇄환하는 문제는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다”고 상소하였고,
1637년 우의정 최명길(崔鳴吉)은 “속환하는 일은 오늘날의 급한 일입니다”하여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 해 11월 최명길은 사은사가 되어 병중에도
속환인 7백 80명을 귀국시키는 등 총력을 기우렸다.
또한 국가적 혼란을 우려, 이혼에 적극 반대 의사를 펼쳤다.
인조는 여론이 비등하자 최명길의 건의를 받아들여
홍제천에서 목욕재개하고 몸과 마음을 씻으면 행적을 묻어버리고
그들의 정조를 거론 못하도록 하는 영을 내렸다.
이후 귀국하는 환향녀가 많아지자 청천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 등
각 도마다 강을 정해 입욕토록 하여 그 행적을 용인하였다.
이처럼 국가 대 환란 중임에도 이듬해 장유(張維 1587-1638)는
“외아들 장선징(張善?)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贖還)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예조에 청하였다.
국가의 혼란을 막고자 왕명으로 지시한 이혼 불허에 대해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장유, 그는 누구인가?.
이정구 신흠 이식과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불리우는
4대 문장가의 한사람으로 일찍이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녹훈된 바 있다.
효종(인선왕후)의 장인이며,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다.
서인의 영수 격이었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그 위상을 세상에 떨치고 있었다.
율곡 이이로부터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 계열의 유학자 장유의 반론은
임금의 입장에서 가장 껄끄럽고,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가족질서를 중요시 여기는 유교의 가르침에 대해
그 질서의 파괴인 며느리를 내치는 상황을 당상과 사관은 오히려 비호하고 당연시했다.
후일 노론파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고
또 한 번 그의 위상을 드높인 바 있다.
인조는 사회적 파장을 우려했음인가, 이혼을 불허했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 서있던 장유의 이혼소는 후 폭풍을 몰아왔다.
그가 죽은 2년 후 그 부인이 다시 며누리에 대해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하여
다시 이혼소를 올렸고,
인조는 ‘훈신(勳臣)의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특별히 그의 소청을 윤허한다’고 이혼을 승낙했다.
부모에게 불순한 것도 칠거지악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을 편
우의정 강석기의 지론에 손을 들어 준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는 명분을 쌓기 위한 수순임이 드러난다.
"항상 덕스럽고 정숙한 것이 부인의 길상이다."라는
주역의 한 부분을 시의 적절하게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인조는 “이 일로 관례를 삼지 말라.”라는 애매한 말로 덮었다.
그러나 이 후 사대부집 자제들은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어
장유의 이혼소가 빌미가 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장선징)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고 원통함을 호소하였던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의 주청은 유교적 사상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일 효종)의 어머니인 인열왕후(仁烈王后)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며, 한이겸과는 4촌으로 조카 딸이 된다.
겹사돈간의 비애이다.
최명길이 이혼을 반대하는 주장을 한데 대해 사관은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라 하여 국속(國俗)을 해하는 자로
격렬히 비판하여 거들었으니, 권력의 비호 또한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반정의 토대 위에서 어부지리로 왕위에 오른 인조,
국사를 회롱하는 권문세가들의 입장에서
임금은 그저 한낱 어릿광대일 수밖에 없었음이다.
장유는 일찍이 인조반정이 끝났던 1625년 소장을 올려 “큰 난을 겪은 뒤를 이어받았으므로
모든 것이 정도에 어긋나고 온갖 일들이 질서를 잃었습니다.(중략)
성명께서는 마음을 고요한 물처럼 가지시어 허명하게 사물을 비추어 보시고
선입견으로 사람들의 실정을 헤아려 결단하지 마소서.
그리고 오직 당연한 법칙만을 지키시어 온갖 일을 공평하게 헤아림으로써
치우침도 없고 붕당도 없게 할 것은 물론 도의(道義)를 준행하여
정직(正直)으로 귀결되게 하소서.”라 하여 왕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진언을 한 바 있다.
실록에 남아 거울로 비쳐진 대필(大筆)의
이 기록 앞에 장유는 부끄럽지 않을 것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의(義)의 싹’이라 말한
맹자의 가르침은 구태(舊苔 이끼)가 되고 말았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두려워함이 있으니,
’천명을 두려워하며 대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라고 했다.
이 말은 논어의 한 구절이다.
대 문장가로 한 세상을 풍미했으나, 유학의 근본은 스스로 저버린 꼴이 되었다.
유학은 공리나 실용보다는 의리(義理)를 숭상하고,
자율성이 존중되는 향촌 질서와 가족 질서의 수립에 관심을 크게 두었으며,
백성을 존중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의 발전을 꾀함이 그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가 권력욕이라 했던가.
유학이 종교화되고 지배계급 층의 권력 욕구가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파당을 형성하고, 이상사회와 민본사상은 사리사욕과
서민들에 대한 억압수단이 되어 골이 깊어 갔다.
사대부들은 권문세가의 권위를 지키고자 환향녀인 자식 이름자를
족보에서 영구히 지워 버렸다.
권력 앞에서 세상은 언제나 썩기 마련인 것을 역사를 통해 다시 배운다.
그 것이 사리사욕에 취했을 때 그 악취가 더 심하다는 것을.
한문수 2010. 7. 8. 1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