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천하의 후견인(後見人), 그는!-2
"한 마디 물을 것이 있소이다."
그의 어조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거나 너
무 냉막해 천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안다!"
경극제는 용후(龍吼)로 이야기했다. 그는 제왕의 면모를 여실히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짐이 어이해 천승검후에게 유혹당한 양 행세했는가를 알고 싶을
것이다. 허헛, 그것은 하나의 대계략(大計略)일 뿐이었다. 허헛,
짐은 아직도 간신배들 사이에 있는 듯 알려지고 있다."
"……."
"어전내시들도 그것을 모르고, 짐의 장중주(掌中珠)인 불영 공주
도 그 사실만은 모른다."
"흠!"
"짐은 공성계(空城界)를 썼던 것이다. 훗훗,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천하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것,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
"대(大)를 위해서 소(小)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천하라는
거대한 바퀴를 굴리는 데에는 시시한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이다. 보라, 대살수! 짐이 의도한 바대로 되지 않았는가? 간신배
들은 짐이 바보인 줄 알고 멋대로 행세하고 있고, 강호의 마도
세력은 서로 견제하고 있는 가운데 혈전을 금하고 있네. 강호는
정말 평화로운 듯 보이네. 훗훗, 오십 년 간 짐의 정병은 세력을
길렀으니 훗훗, 이제는 태풍이 되어 마의 뿌리를 모조리 잘라 버
리는 일만이 남은 것이네!"
천하라는 거대한 수레! 천자 경극제의 비유는 정말 뛰어난 비유였
다.
그는 매사를 길(路)에 비유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남
의 손을 빌어 길을 닦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변황의 세력은 역설적으로 말해 중원 백도가 단합을 하는데 큰 도
움이 되었다.
물론 얼마간의 희생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항력의 일이었
다. 경극제가 위대한 제왕의 대망(大望)을 감추기 위해 눈물을 흘
리며 결행해야 했던 몇 가지의 일들, 그것은 대부분이 황성에서의
일이었다.
강호에서의 일은 오십 년 전 태자였을 당시, 백도의 거두들이었던
무림오성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마무
리 지어졌다.
무림오성은 패기만만한 태자가 장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는 계
략을 내세우자, 그의 뜻에 적극 동조했던 것이다.
지옥마도(地獄魔道). 그곳은 사실 황궁의 장인(匠人)들에 의해 이
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리웅이 연공관(練功關) 안에서
취했던 영단(靈丹)들. 그것은 황궁비고(皇宮秘庫)에서 가져온 것
들이었다.
오십 년 동안 강호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일들은 모두 경극제의
손에 의해 조종된 것이다. 그리고 천승검후를 죽이게 한 자도 바
로 경극제였다. 그야말로 병법에 정통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이었다.
경극제는 백리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제왕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무릎을 꿇으리라!'
그는 백리웅이 절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웅은 끝내
절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외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흠, 그럼 짐에게서 알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경극제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팔 년 전, 백리세가(百里勢家)가 금부고수(禁府高手)들에 의해
멸족당한 일에 대해 알고 싶소!"
"백리광(百里曠)의 죽음 말인가?"
"그렇소이다."
"그것은… 짐의 진면목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
네."
"……."
"짐은 천승검후에게 유혹당한 척 해야 했네. 이유는 간단하네. 유
혹당한 듯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짐에게 독을 썼을 테니까!"
"으으…음."
"짐은 그네들에게 유혹당한 척 해야 했고, 그네들은… 짐이 아끼
던 백리광을 금부사람들을 시켜 살해했던 게지. 짐은 몹시 마음이
아팠으나… 대(大)를 위해서는 소(小)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기에
……."
경극제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훗훗, 그럼 백리광의 가문은… 수레에 깔려 죽은 벌레로군?"
백리웅은 차갑게 냉소했다. 그는 바로 백리광의 아들이었다.
- 복수하지 마라!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그런 유언을 남겼다. 상대가 천자이기에…
….
백리웅은 주먹을 거머쥐며 아주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가 뒤돌
아 서자, 모든 사람이 넋을 잃었다.
"아…아니, 감히 돌아서다니!"
"대살수! 어이해 뒤돌아서는가?"
천자 이하 사람이 놀랄 때 백리웅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지금 나를 막는 자,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는 차게 말하며 검을 끄집어냈다.
스르르-릉-, 혈흔마검이 뽑히며 허공에 천여 개의 검화가 피어
났다.
그와 함께 츠츳-츳-, 대리석 바닥 깊이 글이 새겨졌다.
<대살수는 천자의 부하가 아니라, 영주와의 거래에 의해 활약한
강호인이었다.
영주와의 거래가 마무리지어진 이상, 그 누구도 대살수에게 하명
(下命)하지 못하리라.>
파팟-팟! 검무가 펼쳐지며 글은 계속 새겨졌다.
<천자를 위해 검을 잡지는 않았다. 천자를 위해 살인하지도 않았
다.>
파팟! 뽀얗게 피는 돌모래. 중인의 얼굴은 백지보다 하얘졌다.
<그리고 대살수는 천자를 위해 강호라는 수레를 밀 사람도 아니
다.
대살수는… 혼자 행동한다!
이 순간 이후 누구라도 대살수를 막는다면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
가 비록 천자라 해도!>
파팟-팟! 뽀얗게 흙모래가 피어나는 가운데 휙-! 백리웅은 한
줄기 청선(靑線)을 그으며 훌훌 날아올랐다.
"잡아라!"
"척살하라!"
스슷-슷-, 황제가 비밀리에 기른 북천성부의 고수들이 몸을 날
려 백리웅을 뒤쫓았다. 그러나 백리웅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하
나도 없었다.
백리웅은 몸을 금무(金霧)로 뒤덮으며 멀리 멀리 사라졌다.
북천성부는 무덤마냥 조용해졌다. 감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떠
나 버린 대살수!
중인은 천자의 표정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천자는 노여워하리라.
대살수를 잡아 죽이라는 명을 내리리라!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렇지 않았다.
"푸핫핫, 오늘부터 짐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으리라!"
경극제는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렸다.
웃다니? 발을 구르고 진노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푸핫핫, 정녕 한 마리 용이로다. 용은 자유로워야 조화를 부리는
법. 푸핫핫, 잡아 가두려 했던 짐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대살수는
짐의 시위대장이나 할 사람이 아니다. 푸핫핫, 대살수는 천하에서
가장 빼어난 대장부. 짐은 그를 부마(駙馬)로 맞이하리라!"
백리웅은 가문의 원한으로 인해 경극제를 배척했다. 즉 그의 원대
한 패도(覇道)에 반감을 느끼고 돌아선 것인데, 경극제는 천자답
게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을 높이 산 것이다.
"대살수는 짐의 부마(駙馬)다. 이후 그가 명하는 것은 곧 짐의 명
령이니,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
경극제의 말은 곧 천명(天命)이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천자 만세! 만만세!"
부천성부의 무사들은 이마를 돌바닥에 대고 절을 했다.
저 높은 하늘 위, 그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는 교교한 편월(片
月) 하나가 구름을 비집고 나와 자신의 늘씬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벌써 밤이 된 것이다.
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 천하 각지에서 괴이한 사건이 연이어 벌
어졌다. 실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滅
門之禍)를 당하는 방파가 늘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오랫동안 중원을 노리고 있던 변황의 무리들이 서서히 중원천하를
향해 피의 손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인가?
제남부(齊南府). 그곳의 철기표행(鐵騎 行)은 산동성(山東省)에
서 신용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인심대인(仁心大人)이라는 사람으로 수하(手下)들
을 잘 다루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표사( 士)들의 수는 칠십여 명에 달했고, 철
기표행에 속한 마부의 수는 삼백여 명이 넘었다.
그 중 남기(藍奇). 그는 나이 서른다섯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원
래 술을 좋아하고 농담도 잘하는 호탕한 성격으로 혼기가 지나도
록 장가도 가지 않은 채 노모 한 분을 모시고 사는 소문난 효자였
다.
하오, 마부 남기(藍奇)는 망가진 마차바퀴를 고치느라 주위에 누
가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땅-땅-땅!
남기는 망치로 바퀴의 테가 되는 쇠를 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등판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네는 여전히 눈썰미가 없구먼. 그렇게 하자면 시간도 많이 걸
리고 노력도 많이 드네!"
그의 등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조금 바랜 청삼을 걸친 미청년 하나가 토담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누구시요?"
남기는 미청년을 한참 바라보았다. 허드렛일을 하기에는 너무도
고결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여인처럼 섬세한 생김새 가운데, 가을 서리처럼 싸늘한 구석을 갖
고 있는 백면(白面)의 미서생.
"나를 모르겠는가, 뚱보?"
그의 흰 이빨이 아름답게 드러났다.
"그…그대는 나를 아는 듯하나, 나는 그대를 모르오. 뚱보라는 별
명은 나의 절친한 벗이 나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인데, 어떻게 그대
가 나를 뚱보라고 부르시오?"
남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깐, 그의 얼굴이 아주 괴이
하게 일그러졌다.
"이…이게 누군가?"
그는 그제야 청삼서생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듯했다.
"아니, 죽었다고 알려진 호호마부(好好馬夫)가 아닌가?"
남기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호호마부! 과거 뜨내기 마부 노릇을 하면서 부평초처럼 살아가던
청년이었고, 언제부터인가 바람처럼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
던 사람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싸구려 주가(酒家).
남기는 호호마부와 마주앉아 커다란 그릇에 값은 싸지만 주기(酒
氣)가 강한 소홍주(燒紅酒)를 가득 붓고 있었다.
주향(酒香)은 계집의 치맛자락과 같다. 그것을 느끼게 되면 마음
이 싱숭생숭해지니까.
"그래, 여태 어디서 굴러먹었는가?"
남기는 벌써 술을 다섯 잔째 거듭 비우고 있었다.
"후훗, 서기(書記) 노릇을 했었다네!"
"그럴 줄 알았네. 과거보다 몸이 많이 수척해진 것을 보고 짐작했
지. 제길, 호호마부가 서생 나부랭이의 붓이나 물어다 주는 개로
전락할 줄이야!"
남기는 계속 욕을 해댔다.
대작(對酌)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얼마 뒤, 남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나를 찾은 용건이 뭔가?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던 자네가
나를 찾은 것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닌 듯한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 그는 바로 백리웅이었다. 그가 과
거의 나날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그는 쓴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말했다.
"나는 한 사람의 행방을 찾고 있네. 한데, 그는 거처를 다른 곳으
로 옮겨 찾을 수가 없네!"
"누구를 찾는가?"
"피진노의(避塵老醫)!"
"허헛, 백골에 살을 붙이는 재간을 지녔다는 신의말인가? 태산석
의(太山石醫)의 사숙(師叔)이 되시는 그분?"
"그렇네.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아는가?"
"흠, 그분의 행방이라면 내가 알고 있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사
실 그분과 나는 먼 친척뻘 되는 사이라네."
남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럽네, 조그마한 자랑거리 갖고도 이렇듯 어깨를 으쓱거릴 수
있는 자네가!'
백리웅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술잔에 담긴 독주(毒酒)의 짙은 주향(酒香)처럼 쓰기만 한 웃음이
나,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다.
새롭게 화신(化身)한 백리웅!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
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