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제 1장 화산지사(華山之事)
좌충우돌.
미친 듯이 사방을 휩쓸고 다니던 흑요는 문득 솟아나듯 눈앞에 나타난 고대릉을 보고는 일순 온몸의 긴장과 힘이 빠져 일시 신형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그러한 일시적인 허탈과 탈진이 고대릉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품속에 혼절한 듯 안겨 있는 석여령 때문이었는지는 흑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고대릉은 잠시 흑요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흑요, 수고 많았다."
고대릉의 나직한 그 한마디에 흑요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동시에 그녀의 표정으로 찰나적인 여러 가지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씁쓸함과 서운함, 그리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러나 흑요의 얼굴에는 이내 담담해 보이는 미소가 서렸다.
고대릉은 흑요에게 석여령을 넘겨주었다.
그녀를 받아 들면서 흑요의 얼굴에는 비로소 진한 안도의 기색이 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석여령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흑요는 그만 설핏 묘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후후후! 어쨌든 여령 언니가 이처럼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약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나는 가주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십여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사상자 수가 전체 탕마단의 절반 정도에 이르렀으니, 탕마단이 입은 피해는 막대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참혹하였다.
한편 오십 여의 사망자 중 대부분은 이전까지 전투 경험이 전무하였던 기존 비룡단 자삼대 출신의 젊은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애써 갈고닦은 무공과 포부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암중에 난무하는 칼날과 암기에 억울하게 당해 버린 것이다.
난세의 강호가 바로 그런 곳이라는 것을 그들은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의 공포 앞에서야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비록 삼십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잠룡단으로서는 그나마 최소한의 희생으로 대단한 전과를 거둔 셈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그들이 절치부심 키워온 역량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상자들이 악 다문 이빨 사이로 어쩔 수 없이 흘려내는 고통의 신음 소리 속에서도 잠룡단의 사기는 그야말로 충천하여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것은 거칠 것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뿌듯하기 그지없는 자부심이었다.
이번 전투를 통하여 잠룡단은 이제 소규모 핵심 전투조직으로서 한층 더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독고자강은 이번 전투에서 유난히 많은 일들을 겪었다.
특히 그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던 무적제왕공에 대해서는 가히 기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성취를 얻었다.
하지만 석여령에게 발생하였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일련의 복잡한 생각과 갈등들에 부딪쳤고, 그것은 그동안 그가 애써 마음 깊숙한 곳으로 미루어두고 눌러두었던 일단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다시 표면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독고자강이 스스로를 잠룡단 소속이라고 정의한 것이 딱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그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하간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잠룡단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분명하였다.
혼란은 고대릉 때문이었다.
바로 그와 자신의 관계 때문이었다.
고대릉은 여전히 그의 의제였다.
그것은 사내들끼리 맺은 의리였기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명백히 배신하기 전까지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그러한 의리에 대해서 독고자강은 결코 먼저 배신을 범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고대릉 역시 결코 먼저는 의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란 것에 대해 독고자강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그런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애초에 고대릉과 의형제 관계를 맺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릉과 자신이 의형제라는 것이 그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고대릉이 독고자강 그가 속한 조직의 수장이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다.
언젠가 허종이 그에게 호통을 친 일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와 고대릉 간의 사적인 관계와 조직에서의 상하의 관계는 분명히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독고자강 그가 잠룡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고대릉은 당연히 주군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독고자강은 이미 스스로를 잠룡단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당연히 고대릉과의 상하 관계 또한 수긍하고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다만 지금까지의 그러한 관계는 간접적이고 은근한 관계로서만 존재하였고, 겉으로 표시 내어 드러나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겪었던 것처럼 조직의 체계와 명령에 생사를 맡겨야 하는 상황을 앞으로 보다 자주 겪게 될 것인데, 조직 전체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은 자신과 고대릉 간의 관계에서 그런 애매함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그를 지금의 난세를 헤쳐 갈 한 사람의 영웅으로 인정한 바 있고, 또한 그 훨씬 이전부터 그러한 영웅이 출현하기를 고대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그를 주군으로 대하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망설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언젠가 난세가 평정되었을 때, 그때 그는 다시 나의 의제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에 가서 그가 그 어떤 위치나 신분이 되어 있더라도, 그 스스로가 나와의 의형제 사이를 부정만 하지 않는다면......'
뚜렷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잠룡단은 오히려 원망과 질시를 받는 입장이 되어 있는 듯했다.
탕마단의 수뇌부에서는 전쟁의 공과(功過)를 다만 각 조직별로 그 피해가 얼마나 컸나 하는 것으로, 피해가 막심할수록 전투에서 그만큼 적극적이고도 치열하게 임하였다는 잣대로 평가하려 하였다.
그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사망자가 단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은 잠룡단이 전투에서 가장 소극적이었다고 평가받는 것은 일면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적을 물리치긴 하였으나 그 전과를 따지기에 앞서 입은 피해가 처참할 정도였으니 그런 평가 기준이 나올 법도 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평가는 대세가 되었고, 곧바로 이어진 조직 간의 새로운 임무 할당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우선은 연화봉 주변 일대에 대한 경계를 맡으라는 임무가 잠룡단에게 떨어졌다.
탕마단은 사망자의 장례와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며칠간은 화산에 더 머물러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간 적의 재침이 우려
되니 그래도 가용 전투력이 가장 많은 잠룡단에서 그 임무를 맡아 달라는 요구였다.
언뜻 듣기에도 참으로 애매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어쨌거나 이곳이 화산파의 본산임을 생각한다면 자파가 아닌 다른 세력에게 주변 경계를 맡긴다는 것은 어쩌면 대화산파의 위신과도 관계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애매함은 화산파 장문인의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 표명으로 간단히 해결이 되었다.
화산파 장문인 진령(秦寧)이 사뭇 대범(?)하게 표명한 입장인즉, 이번 전투에서 화산파가 입은 피해 또한 작지 않고, 또한 적의 규모가 대단하니만큼, 당분간은 이런저런 명분이나 체면을 따지기보다는 공동으로 위험에 대처한다는 측면으로 모두에게 가장 효율적인 대응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일파의 장문으로서 그러한 입장을 그처럼 대범하게 표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령은 참으로 현실적이고도 실리적인 면을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탕마단 수뇌부의 요구에 대한 어떤 반발이나 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의외로 잠룡단에서 그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전투에서의 혁혁하다고 할 수 있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등평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커다란 실책을 범하였다고 자책하는 바가 있었다.
그의 실책은 바로 적의 동향에 대한 주의를 태만히 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적의 야습 직전에 백마갱주를 통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었기에 그나마 무난히 대처를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한 조직의 군사 역할을 맡은 자가 그런 정도로 조직의 생사가 걸린 정보를 남에게, 그것도 우연히 주워들었다는 것에 대해 등평은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등평은 그 한 번의 실책을 곧 교훈으로 삼을 줄 아는 현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나름의 정보망을 가동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화산을 기점으로 최소한 백 리 이내에는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보고를 근거로 등평은 탕마단의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 적의 재침 기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질시의 시선을 받으며, 그들 가운데에서 지내는 불편함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벗어나 맘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으리라. 적에 대한 경계야 흉내만 내면 되는 일이고, 휴식을 취하기에 화산의 자연 풍광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석여령은 고대릉에게서 자신에 대한 거리감이 여전히 존재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의 아예 무덤덤해 하던 것에 비한다면 다소간 변화가 있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고대릉은 여전히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구함을 받으며 잠시나마 그와의 관계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젖었던 석여령은 다시금 상심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것이라는 결심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조급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때때로는 자신이 지나치게 고대릉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쩔 수 없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사실 석여령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자신이 보통의 여인과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보통의 여인들처럼 사내와의 정해(情海)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더구나 젊은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성에 대해 애정을 느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애정을 느낀다면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국 조급해지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지금 석여령이 느끼는 애틋하고도 애절한 마음 역시 바로 그러한 조급함일 것이었다. 특히나 사내와 여인이 다른 점이 있다면, 여인의 경우에 처음에는 정해에 빠져 드는 속도가 사내에 비해 느리나, 일단 한 번 정해에 빠져버린 다음에는 오로지 정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경향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일가인 석여령.
그녀는 다른 모든 것에서는 세상의 보통 여인들과 다를지 몰라도, 일단 정해에 빠져 버린 다음에는 결국 보통의 한 여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고대릉의 작은 표정 변화 한 번에도 애틋한 마음이 되고 마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자신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그녀의 머리와 이성을 한참이나 앞서서 막무가내로 이끌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어느덧 일가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숙한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석여령은 흑요와 나란히 연화봉의 산상(山上)을 거닐고 있었다.
그녀들의 멀찌감치 뒤쪽에서는 이미 한 번 단단히 데인 바 있는 독고자강이, 시선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그녀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석여령은 봉우리 아래로 보이는 화산의 절경에 무심히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러나 흑요는 그녀의 애틋하고도 안타까운 심정이 그대로 자신에게로 전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흑요는 석여령의 그러한 갈등과 아픔마저도 부럽기만 하였다.
비록 석여령은 고대릉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으로 여겨 상심하고 있지만, 고대릉이 여전히 그녀를 깊이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흑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흑요는 이미 그들 두 남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할 각오를 하였기에, 오히려 두 사람의 내면세계를 보다 객관적이고도 맑은 눈길로 지켜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석여령의 주변에는 늘 따르는 눈길들이 많았다.
지금은 화산의 젊은 무인들이 그 눈길들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하긴 먼발치로나마 강호제일의 기녀(奇女)인 일가인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것은 젊은 청년들로서 당연한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먼발치에서 뒤따르고 있는 독고자강이야 예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위지호준이나 공손도중과 같은 세상에 드문 절세기재들의 관심 또한 늘 그녀를 향해 따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석여령과는 질긴 인연의 끈이 매어져 있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과거와는 다른 애매한 사정들 때문에 서로 간의 거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석여령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식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거센 연모의 정과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다고 해야 했다.
위지호준은 비록 지금은 그녀와 불편한 관계이나, 시간이 흘러 무림의 정세가 안정되고 나면, 다시 떳떳하게 석여령의 앞에 나설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 공손도중은 석여령을 자신의 여인이라고 생각한 지 이미 오래였다.
특히나 최근에 다분히 충동적이고 급해진 자신의 성정에 대해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에, 공손도중은 차라리 그녀에게 접근하는 자가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내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참아낼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그가 가장 신경 거슬려 하는 고대릉이 사뭇 냉랭하게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공손도중에게는 참으로 다행하면서도 흐뭇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비록 독고자강이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내로서가 아닌 다만 보호자의 입장에서라는 것을 공손도중도 모르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뜻밖의 작은 말썽이 하나 생겼다.
그 말썽은 바로 석여령으로 인해, 보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명성과 자태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젊은 사내들이 미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해 보고픈 욕구가 있다
는 것은 어쩌면 본능과도 같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본능적인 욕구라고 하더라도 그 욕구의 대상이 되는 이가 일가인 정도 되는 여인이라면,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말 일이었다.
다만 소수의 진정으로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있는 사내들은 적극적으로 미인을 취하고자 한다.
배경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모두 자신이 있는 사내들, 예컨대 강호오공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하는 것이지만, 객관적으로는 능력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광대의 호기를 부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계황(桂愰)이었다.
무공만으로 보자면 그는 화산에서 후기지수 소리를 듣기에는 다소 모자람이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산의 젊은 제자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바로 그가 당금 최고의 권력기관인 동창(東廠)의 제독 계중업(桂重業)의 독자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화산 장문인의 직계 제자의 신분이었다.
물론 화산파에서도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 받아들인 제자였으니 만큼, 장문인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문파의 진산절기까지는 전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계황이 문무에서 소위 준재라고 불릴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가 화산파에 머무는 시간이라야 일 년에 고작 이삼 개월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또한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무공에 대한 열의로 보자면, 설혹 그에게 화산파의 무공 정수를 전수한다고 해도 그가 제대로 익혀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몇 가지의 배경이 있었기에 계황은 지금과 같은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이리라.
다만 그를 제외한 다름 사람들 모두는 계황의 그 대단한 권력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자존광대 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정작으로 그와 동문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산의 제자들까지도 말이다.
계황은 이전부터 강호 일가인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그다지 대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원래 무공을 익힌 강호의 여인들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그의 기준에서 진정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황가(皇家)와 전통명가(傳統名家) 출신의 빼어난 재녀가인(才女佳人)들을 이미 많이 접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준에서 볼 때 사내들에게 흠모 받을 수 있는 여인이란, 우선은 좋은 가문과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고고한 기품과 귀한 재지(才智)를 지녀야 했다.
거기에다 시화(詩畵)와 가무(歌舞)에까지 능하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었다.
그런 기준을 가진 그가, 사내들에게나 어울릴 칼과 창을 배워 강하고 거칠어진 강호의 여인들에 대해, 기껏 그 미모 하나가 뛰어나다고 해서 안중에 들어 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하긴 무공 자체에 대한 그의 생각 또한, 다만 향후 조정에서 큰일을 하려면 무림과의 교분을 맺어 두어 나쁠 것이 없다는 부친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와 젊은 시절 한때의 풍류와 멋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사실 그가 지금 일가인에게 접근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일가인에게 어떤 연모의 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 기회에 화산의 동문들에게 그들과는 분명히 다른 자신의 존재를 새삼 한번 부각시켜 보고자 하는 자기과시의 의미가 강하였다.
그리고 화산의 뭇 청년 제자들이 먼발치에서만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을 뿐, 감히 누구도 일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 한마디 붙여보려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없다는 데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또한 화산의 젊은이들을 대표하여 자존심을 지킨다는 일종의 묘한 의무감과 책임감까지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뭇 자신만만하고도 당당한 걸음걸이였지만, 일가인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계황의 가슴은 점점 더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아! 강호제일기녀라고 하더니......!'
그녀의 자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서면서 계황은 강호일가인이라는 그녀의 명성에 대해서 지극히 공감하는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황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 것은 그녀의 절세미모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기품이었다.
석여령의 정갈하고도 고고한 기품이야말로 그녀를 천하삼미 위에 강호일가인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던 진정한 요인이었다.
지금까지 강호도상의 무수한 청년 협사들이 그녀의 그러한 기품에 매료가 되었었다.
계황의 걸음걸이가 힘겨워 보였다.
그는 지금 처음에 가졌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던 마음 대신에 점점 더 주눅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야말로 천하의 그 어떤 사내에 비하더라도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다는 반발심과 오기로 끝까지 그녀에게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일가인의 일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 계황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험! 이 보시오, 소저! 소생은 계황이라는 사람인데......"
그러나 계황은 속으로 생각해 두었던 말을 한 번에 다 하지는 못하였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려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번듯한 귀공자의 테가 나는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다가와서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자부심은 있으되 오만하기를 늘 경계하는 석여령이었으니, 평상시 같았으면 건성으로나마 말을 받아주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어쨌든 그들이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화산의 제자임에 분명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석여령의 지금 심정은 낯모르는 청년과 말을 나눌 만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비록 그녀의 의식은 깨어 있었으나, 한편으로 그녀의 모든 사고는 스스로의 의식 속으로 깊이 침잠되어 있는 중이었다.
그런 중에도 석여령은 상대방의 청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한 걸음을 옆으로 비켜서며 그를 지나쳐 가려고 하였다.
그때 석여령의 옆에 서 있던 흑요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지만, 석여령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던 계황은 흑요의 존재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흑요의 날카로운 눈길, 그것은 곧 계황에 대한 경고였다.
사실 흑요의 평상시 성격 같았으면 눈빛만의 경고가 아니라 벌써 무슨 행동을 취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번거로움을 피하려는 석여령의 의중을 짐작하기에 다만 경고만으로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사실 계황은 그때라도 그만 뒤로 물러났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기왕에 내친걸음이라는 오기를 부리고 말았다.
'지금 그만둔다면 망신을 자초하게 된다. 간단하게 한두 마디 인사라도 주고받아야, 그나마 최소한의 체면은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계황이 그런 생각으로 막 지나쳐 가는 석여령을 급하게 따라잡는다는 것이, 그만 마음이 앞서 그녀의 앞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격이 되고 말았다.
마음이 급하니 목소리마저도 커졌다.
"이보시오, 소저!"
그 같은 계황의 조급한 행동과 말이 결국 화를 불렀다.
계황이 보기에 일가인 석여령이 단지 미모와 기품을 갖춘 여인으로만 보일지 모르나, 기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기 이전에 정통의 무예를 수련한 무인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누군가 무단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곧 무례한 도전이고, 시비였다.
당장에 석여령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석여령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이미 참지 못하게 된 흑요의 손속이 먼저 뻗어나갔다.
턱!
흑요의 우장(右掌)은 가볍게 뻗어나가서 슬쩍 계황의 어깨를 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가벼운 손길에 계황은 속수무책으로 크게 두 걸음이나 비칠거리면서 밀려나야만 했다.
비록 흉내이든 말든 그래도 십 수 년간 무공을 익혀왔고 화산의 절기까지도 사사받은 계황이었다.
한데 흑요의 그 가벼운 손짓에 그 지경을 당하고 보니, 그야말로 개망신이었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더구나 비록 당찬 몸매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기는 했어도, 기껏해야 몸종 정도로나 보이는 계집이 아닌가?
당장에 계황의 입에서 대갈일성 호통이 터져 나왔다.
"못된 계집! 무례하기가 짝이 없구나. 본 공자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그러나 그는 하던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죽고 싶으냐?"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차분하고도 나직한 그 한마디에서 계황은 난생처음으로 얼굴과 목 줄기의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처절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은 사실이지만, 살갗을 따끔거리게 하는 것은 단순히 무형의 살기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목에는 한 자루의 요염하고도 부드러운, 그러나 지독히도 시린 예기를 그대로 풍겨 내는 검이 어느 틈엔지도 모르게 대어져 있었던 것이다.
"으으......!"
계황이 입에서 절로 얼빠진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지독한 공포였다. 바로 죽음의 공포.
계황의 사색이 된 눈빛이 본능적이다시피 급하게 굴러 사방을 살폈다.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갈구하는 눈길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은 다만 잠깐이 갈등하는 기색들만 보였을 뿐, 막상 누구도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물론 일가인과 관련이 되는 일인데다 먼저 무례를 범한 것 또한 분명 계황 쪽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제반의 상황과 명분을 따지기 이전에 동문 간의 의리로 보아서도 그들이 지금과 같이 그렇게 갈등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었다.
달리 말해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자가 계황이 아니라 화산파의 다른 제자였다면, 그래도 그들이 지금처럼 상황과 명분을 따지면서 갈등이나 하고 있었을까?
결국은 평상시 그들이 계황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멈추시오!"
"멈춰라!"
거의 동시이다시피 두 마디의 호통이 터져 나오며 십여 장 바깥에서 두 줄기의 신형이 날아왔다.
한 사람은 독고자강이었고, 또 한 사람은 거구에다 얼굴 전체를 뒤덮다시피 무성하게 자란 검은 수염으로 인해 사뭇 위맹한 인상으로 보이는 도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흑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는 외려 금방이라도 계황의 목에 대어져 있는 혈요를 그어버리고 말겠다는 매정한 기세가 더욱 등등하였다.
만약 그때 석여령이 가만히 흑요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어쩌면 계황은 정말로 다음날 아침에 뜨는 해를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여령의 만류에 마지못해 혈요를 거둔 흑요가 한 걸음을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계황은 여전히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목에서는 혈요가 남긴 제법 깊은 자상으로 인해 몇 줄기의 붉은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헐! 너는 물러가 있거라."
검은 수염의 도사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가볍게 소맷자락을 내치자, 계황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오르며 간단히 이 장여를 훌쩍 날아가는 것이었다.
가히 놀라운 격공전력(隔空傳力)이 수법이었다.
지켜보던 독고자강과 흑요의 눈빛으로 한 가닥씩의 이채가 스쳐 갔다.
비록 도사 복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면으로도 전혀 도사다워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 검은 수염의 도사는, 바로 지난 전투에서 종횡무진으로 적진을 누비며 활약을 한 바 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 악청(岳靑)이었다.
화산이 최고 배분으로 현 장문인 진령(秦寧)의 사숙이 되니, 단순히 배분으로만 따지자면 허종보다도 오히려 반 배분쯤 위의 인물이었다.
악청은 화산파의 전전대 매화검수였던 인물로 원래대로라면 화산파의 장문인이 됐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화산이 배출한 백 년 만의 최고 기재라 불리던 악청은 그 성격과 행사(行事)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였던 탓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국 장문인 직을 자신의 사제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그 사제가 바로 화산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임성(林盛)이다.
임성이 십 년 전에 귀천하면서 그의 제자였던 진령이 장문인 직을 계승하였다.
"손님된 입장에서 집주인의 목에 칼을 겨누다니, 이 무슨 몰염치한 경우인가?"
악청이 흑요를 향해 나직이 호통을 치는 소리였다.
그런 악청의 모습에는 은은한 노기가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악청이 비록 자질구레한 세사(世事)에는 체질적으로 외면을 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가 이미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구십여 성상(星霜)에 이르는데 어찌 상황을 보는 눈치까지 없으랴.
'이 뺀질뺀질한 계황이란 놈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질렀음에 분명하구나.'
보통 때 같았으면 급한 그의 성격에 당장 계황부터 족쳐 놓고 나서 일의 앞뒤 정황을 따져 물을 일이었다.
물론 그의 사질이자 현 장문인인 진령이 계황을 통해 얻고 있는, 또한 앞으로도 얻고자 하는 실리(實利)가 당장의 화산파의 운영과 향후의 영달을 위해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님을 악청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정이 아무리 어렵기로서니 대화산파가 그런 따위의 세속적인 실리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 악청에게 마땅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아무리 그러한 실리의 근원이자 끈이 되는 계황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는 화산파의 제자였다.
그러니 그가 대화산파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문규(門規)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였다면, 문파의 존장으로서 훈계를 하여야 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편으로 계황이 화산파의 제자라는 그 분명한 사실은, 더구나 그가 지금 외부의 인물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은, 오히려 악청으로 하여금 앞뒤 모든 정황을 제쳐 놓고서 일단은 그를 감싸는 일부터 우선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못난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화산파의 제자가 외인에게 수모와 핍박을 당하게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놈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그에 대한 징계는 마땅히 화산이 직접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악청이 다짜고짜 계황을 감싸고 나서게 된 이유의 전부였다.
독고자강이 문득 앞으로 나서며 은연중에 악청과 대치하는 듯한 형세를 만들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독고자강 스스로에게도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상황이었다.
원래 독고자강은 악청이 흑요에 대해 보이는 노기에 대해 우려하는 심정이 들어 앞으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 우려는 흑요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흑요가 충동적으로 악청과 부딪치게 되는 경우에 일이 크게 번지고 말리라는 데에 대한 우려였다.
그런데 막상 악청과 마주서는 순간, 독고자강은 악청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한 가닥 무거운 기세에 그대로 끌려들고 말았다.
악청의 그 기세는 독고자강을 한순간에 매료시켜 버렸다.
가히 그의 무혼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독고자강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악청의 기세에 대응하는 데만 집중하게 되었다.
기이하게도 그런 모습은 악청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리하여 그들 두 노소(老少)는 어느 순간부터 주위의 시선에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에게만 빠져드는 기이한 대치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독고자강과 악청 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심상치 않게 변해 버리자, 석여령이 급히 나서려고 하였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건의 당사자로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중재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곁에 와서 선 허종이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허종의 그런 모습에서 석여령은 그가 이미 악청과 독고자강의 대치를 무인들끼리의 승부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석여령 또한 한 사람의 무인일진대 무인 간의 승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독고자강의 승부 상대가 바로 화산제일검 악청이라는데 대해서 석여령은 불안하고 다급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석여령이 급히 주위를 돌아보니, 언제들 온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좌룡과 우룡, 그리고 등평의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석여령의 불안감과 다급함에 대해 제대로 공감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좌룡 같은 이는 아예 입가에도 노골적인 호기심과 느긋한 미소까지 떠올려 놓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이제부터 벌어질 한판의 싸움을 제대로 구경해 보겠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휴우! 사내들이란 그저......!'
그렇게 이윽고는 석여령도 스스로의 불안과 다급함을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허종과 좌룡, 그리고 우룡에다 등평까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이상, 막상 승부가 벌어진다 해도 무슨 극단의 사태까지로 진전이야 되겠는가 하는 안심의 구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허종이나 등평의 태연자약한 기색들에서, 석여령은, 그들에게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어떤 요량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독고자강과 악청의 승부를 안심하고 구경해도 좋을 어떤 요량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석여령의 입가에는 언뜻 한 가닥의 미소가 생겨났다. 수줍은 듯 살포시 피어오르는 엷은 미소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심중의 불안과 다급함을 완전히 털어내는 안도의 미소였다.
석여령의 시선이 가 닿은 곳에 고대릉이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곳에 없었는데, 어느 순간 장내의 사람들 중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서 악청과 독고자강의 대치에 담담한 눈길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거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는가 하는 따위에 관한 것은 지금 석여령에게 조금도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더구나 중요한 일이 될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이었다.
물론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그녀로 인해 불거진 말썽 때문인지, 아니면 독고자강과 악청의 대결에 관심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것 또한 그녀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독고자강과 악청이 대치하고 있는 주변으로는 어느새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캉!
그들의 첫 격돌은 그렇게 주변의 대기를 은은하게 울리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 손을 쓴 것인지는 애매하였다. 사실 그들은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끌리듯 거의 동시에 손을 썼으니까.
그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바로 그들의 격돌이 검 대 검의 격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처럼 둔중한 소리가 났는가 하는 데 있었다.
"자하신공이다!"
사람들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누구가 감탄하며 흘린 소리였다.
그 소리에 문득 사람들은 악청의 검에 은은하게 서린 자색의 광채를 알아보게 되었다.
바로 화산파의 지존시공(至尊神功)으로 대대로 장문인 일인에게만 전수된다는 바로 그 자하신공이었다.
경지에 이르도록 연성하면 도검과 장권 모두에 응용이 가능하며, 특히 검에 운용하여 검기를 발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검으로는 능히 천하제일을 다툴 만하고, 만약 검강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면 가히 검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바로 그 자하신공이었다.
캉!
카앙!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느릿하게 한 번씩의 공수를 주고 받고 있었다.
만약 부딪칠 때마다 울려 나오는 그 묵직한 충돌음만 없었더라면, 모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격돌을 이제 막 검에 입문하는 수련자들의 약속 대련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검식 자체에 어떤 특별한 벼화도 없었거니와 또한 두 사람 중 누구도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부딪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다소간 고집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는 해도 그 누구도 감히 실제로 웃을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한 사람은 화산 최고의 고수인 화산제일검이고, 또 한 사람은 비록 화산제일검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나 강호의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강호오공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검초가 그토록 고집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면, 그것에는 분명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조금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금 아무런 격식도 없는 듯이 펼쳐 내고 있는 검식이 바로 화산파의 화산태을검(華山太乙劍)과 무황성의 제왕만상검결(帝王萬像劍訣) 중의 초식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검법이 다, 검법에 막 입문하는 사람들이 익히기에 알맞다 할 만큼 기초적이고도 단순한 변화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강호에서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지금 두 사람의 검초는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느릿느릿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두 사람이 결코 초식의 변화와 정묘함으로 승부를 가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요컨대, 지금 그들 두 사람이 몰입해 있는 관점은 바로 힘 대 힘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는 바로 강기 대 강기의 대결이었다.
악청은 일평생을 온전히 다 무공의 연마에만 바쳐 온 사람이었다.
오죽하였으면 당연히 그의 것이 되었을 대화산파의 장문인 자리까지 포기하였겠는가.
특히 그는 검과 자하신공의 완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왔었다.
악청은 어느 순간 독고자강에게서 어떤 경지를 느꼈었다.
그 경지라는 것은 악청이 자신의 자하신공에 대응하여 독고자강이 반사적으로 반응해 낸 한 가닥의 경기로부터 유추해 낸 경지였다.
그것은 바로 강기였다.
놀랍게도 이제 겨우 이십대의 청년인 상대는 외력에 대해 반사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반응을 해내는 정도의 경지에 이른 강기 무공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손자뻘이나 될 독고자강과 지금 이렇듯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흔쾌히 승부를 겨루게 된 이유의 전부였다.
아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그와 충분히 무공을 겨뤄볼 만한 상대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그가 평생에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는 그런 맞수였고, 그는 오늘 정말 천행으로 맞수를 만난 것이었다.
눈앞의 청년이 강기 무공 이외의 다른 무공이 어떤 수준에 올라 있든, 혹은 다른 어떤 재주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전혀 악청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청년의 강기 무공이 자신이 판단한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청년은 이미 초절정의 무공경지에 올라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악청은 시종 화산태을검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때 화산의 매화검수였으며, 이후로 일 갑자 이상을 검에만 매진해 온 그가 평생 이루어낸 검이 어찌 화산태을검 하나뿐일까.
화산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검에 입문하여 배우는 화산태을검이었지만, 그 화산태을검은 지금 자하신공의 최고경지인 자하강기로 검강을 구현해 내고 있었다.
오로지 제왕만상검결의 초식만 전개하고 있는 독고자강의 검에도 역시 엷은 황금색의 기류가 서려 있었다.
바로 무적제왕공이었다.
독고자강은 무황으로부터 무적제왕공을 물려받는 그 순간부터, 무적제왕공을 일생의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지난 전투에서 이윽고 미완성의 무공으로서, 그리고 강기 무공으로서의 제왕무적공의 진가에 눈을 뜬 바 있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지금 이렇게 승부를 벌이게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각자가 일생을 두고 지향하는 무공의 목표가 유사하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처럼 단 한 순간에 사정없이 서로에게 이끌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연륜의 차이와 신분과 배분의 차이조차도 완전히 무시하고서 말이다.
검 대 검이었다.
그러나 검식 대 검식의 대결이 아니라, 신공 대 신공의 대결이었다.
무적제왕공과 자하신공의 대결.
바로 강기 대 강기의 대결이었다.
쾅!
콰앙!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거센 폭음과 함께 그 충돌의 여파로 땅이 깊게 패였다. 주변의 작은 돌들이 부서져 가루로 날리고, 어른 팔목 굵기의 나무들이 마치 태풍에 휩쓸리듯 부러져 나갔다.
만약 이 자리에 강호의 호사가들이 있었다면, 두 사람의 그 엄청난 대결 장면을 두고 가히 개세의 대결이라고 평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부는 차라리 엄숙하였다.
승부를 겨루는 두 사람에게도,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독고자강과 악청, 두 사람 다 승부가 이어지는 내내 말이 없었다.
간단하게 주고받는 입담이나, 그 흔한 기합 소리조차 없었다.
독고자강이야 본래 말이 없는 편이라지만, 악청은 지난 전투에서 연신 광소를 터뜨려 내고 걸진 입담을 과시하였었는데, 그런 그가 오늘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시종 진중하기만 하였다.
쾅!
콰르릉!
격돌의 기세는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악청의 입가에는 언제부터인가 의미 모를 미소가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대해 답례라도 하듯 독고자강의 입가에도 담담한 미소가 따라서 번져 갈 때, 악청은 문득 검을 거두어들이고 크게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독고자강 역시 검을 거두면서, 악청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헐헐헐! 속인들이 강호오공자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기에 그저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인사들이 한낱 치기 어린 아해들을 부추겨 뭔가 일을 꾸미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중에 자네같이 제법 괜찮은 물건이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군."
악청의 그 말은 다소 묘하게 뒤틀린 듯하였지만, 어쨌든 독고자강에 대한 칭찬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에 대해 독고자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에 엷은 홍조까지 그려낼 정도로 수줍어(?)하였다.
그가 다시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겸사(兼辭)했다.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그러자 악청은 곧바로 콧방귀를 뀌면서 심통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흥! 그런 소리 말게. 노부는 남이 듣기 좋은 말이나 지껄이는 그런 실없는 늙은이가 아닐세. 내가 그렇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런 것일세."
그러자 독고자강은 한층 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예? 예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같은 기색이 되어버린 독고자강은 그가 과연 좀 전까지만 해도 화산제일검 악청과 당당히 승부를 겨루던 바로 그 청년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승부를 겨루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으랴.
승부를 겨루는 것이라면 무공의 고하에 관계없이 천하의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독고자강이었지만, 이제 무림의 최고배분을 지닌 데다 다분히 기인의 소리를 듣고도 남을 악청의 종잡기 어려운 태도와 궤변에 대해서는 도무지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악청은 마치 오랜만에 좋은 소일거리라도 발견한 뒷방 늙은이와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가 묘한 눈빛으로 곤란한 기색이 되어 잇는 독고자강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별안간 대소를 터뜨려 내었다.
"으하하하하하!"
이어 얼떨떨한 표정이 된 독고자강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악청이 짐짓 정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반갑네, 소형제! 노부는 화산의 악청이라는 늙은이일세."
그가 화산제일검 악청이라는 사실이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그 한마디 '소형제' 라는 소리는 독고자강으로 하여금 다시금 깊은 당황에 빠지도록 만드는 말이었다.
독고자강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말학후진(末學後進) 독고자강이 화산제일검 악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악청은 지극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허! 소형제는 보기와는 또 다른 면이 있네그려. 말학후진이니, 노선배님이니 하는 그딴 거는 다 때려치우고... 이제부터 자네는 노부와 그냥 편하게 호형호제 하도록 하세."
그 노골적인 파격에 독고자강은 일시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되고 말았다.
"그, 그건......?"
"왜? 아무래도 소형제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그러는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독고자강은 그예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독고자강의 그러한 당황이 바로 자신의 파격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청은 나름으로 진지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허허허! 이 우형이 그래도 화산파의 수석장로일세. 뭐 사실 알고 보면 별 볼일 없는 자리이긴 하지만...... 아, 이 사람아!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도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세. 이 늙은이가 이 정도로 정성과 성의를 보였으면, 그냥 못 이기는 체 따라주는 맛도 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악청의 고집이 그러한 데까지 이르자, 독고자강으로서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내놓을 것이 없게 되었다.
급기야 독고자강은 그저 망연한 기색으로 악청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악 대협!"
독고자강의 곤란을 구원해 주기라도 하듯이 슬그머니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든 이는 바로 허종이었다.
한데 허종의 인사를 받는 악청의 인상은 별로 좋아 보이지를 않았다.
적어도 방금 전 사뭇 다정하게 독고자강을 대하던 그 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대협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대협!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크지 못했으니, 굳이 무슨 협자(俠字)를 붙이려거든 차라리 소협(少俠)이나 중협(中俠) 정도로 부르든지......?"
여지없는 핀잔에다, 대충 말끝을 흐리기는 하지만 은근한 하대였다.
일순 허종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그가 누구이던가?
이대무존인 위지천이나 공손무랑조차도 속으로는 몰라도 면전에 대놓고는 함부로 하대를 하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어쩌랴?
일단 무림의 배분으로 따진다면 악청은 이대무존이나 허종 자신보다도 최소한 반 배분은 위의 인물임에 분명하였고, 무엇보다도 악청이라는 인물이 그런 저런 앞뒤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누구를 대할 사람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주관대로만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 것을.
그런 이상 지금 허종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악청의 주관을 인정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그나마 두루뭉술하게 가져가든지, 그렇지 않다면 따끔하게 경우를 따져서 그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되는 것을 불사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허종 역시도 그렇게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악청과 비슷한 개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허종이 슬며시 미간을 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렇군요. 그러나 소협이나 중협 소리를 들을 만큼 젊지도 않으시니, 그냥 악 노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다소 뜻밖이라는 듯 힐끗 허종을 쳐다보고 난 다음에, 악청이 곧 얼굴에 빙그레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받았다.
"흠! 나쁘지 않지! 암! 나쁘지 않고말고!"
그에 허종이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짐짓 정중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생 율사극(律士極), 오늘 강호에 명망이 드높으신 화산제일검 악청 노형을 뵙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치켜 올린 허종의 그 말은, 한편으로 은근한 농(弄)과 놀림의 의도로 오해받을 만한 소지조차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악청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이 흔쾌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헐헐헐! 강호일절 환보(幻步)이 주인인 허종의 원래 성명이 율사극이었군. 흐흠! 반갑네, 율 노제!"
너무나 태연하면서도 거침없는 하대였다.
허종의 얼굴로 다시 한줄기 당혹의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악청이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노회한 허종으로서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악청을 노형이라 부른 것이 다분히 허례를 갖추고자 한 의도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한데 악청은 지금 마치 두 사람이 의형제의 관계라도 맺은 것처럼 까놓고 허종을 동생으로 대해 버린 것이 아닌가.
'허허허!'
허종으로서는 어이없음에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실 두 사람 간에 배분의 차이가 다소 있다고는 하나, 무림에서의 명성으로 보자면 허종 역시 악청에 비해 그리 못할 것이 없는 입장이 아닌가.
그러니 허종으로서는 예기치 못하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종은 곧 표정을 풀며 독고자강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이고 나서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독고 소협! 여기 악 노형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좀 괴팍해서 그렇지, 그래도 화산제일검의 명성이나, 일신의 무공 실력으로는 강호 어디에 내놔도 조금도 빠지지 않을 분이시네. 하니 악 노형께서도 이미 말씀하신 바 있듯이, 이 거래는 자네에게 결코 손해가 되는 장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비록 여전히 짓궂은 농이 비치는 말이었으나, 허종의 그 말은 악청과 독고자강 사이의 현안 문제(?)에 대해 그런 대로 적절한 해결점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독고자강은 마지못한 듯 악청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그에 대해 악청은 연신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악청의 그런 모습이 천진하게까지 보이는지라 허종 역시도 그만 빙그레 미소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허종의 내심에서는 한 가닥의 생각이 흐뭇하게 흐르고 있었다.
'독고자강이 오늘 큰 인연을 얻었구나. 악청이 비록 화산파 내에서는 다소간 경원시 되고 있는 처지인지는 모르겠으나, 강호무림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가히 화산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니, 언젠가 독고자강에게 큰 힘이 될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두 사람 간의 이번 인연은 독고자강 개인을 위해서나, 그리고 무황성과 강호무림의 미래를 위해서도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으로 한낮의 그 한바탕 작은 말썽은 잘 무마가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정작으로 더 큰 말썽이 생긴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사태는 등평이 매듭을 확실하게 짓고자 좀 전의 일에 대해서 그 특유의 차분한 말솜씨를 발휘하여 악청에게 조근조근 진상을 말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등평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악청의 신형이 번뜩하면서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통렬한 타격음과 함께 숨넘어가는 비명 소리가 마구잡이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퍽!
퍼억!
"큭!"
"쿠액!"
누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벌어진 순식간이 일이었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악청이 계황을 패는 모양새는 한마디로 복날 개 패듯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런 처지에 처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무차별적으로 구타를 당한 계황은 우박처럼 떨어지는 악청의 주먹과 발길질에 대해 제대로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서 이내 온몸을 늘어뜨리고 흐느적거렸다.
지켜보던 허종이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어허! 저 노친네, 저러다 큰일 치르겠네."
허종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막상 그 일방적인 구타에 관여할까 말까를 두고는 내심 갈등하는 기색이 뚜렷하였다.
물론 악청이 지금 내력까지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일평생 무공으로 단련된 주먹과 발길질에 저렇게 일방적으로 맞는다면 아무리 젊은 몸이라도 견뎌내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보기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사문의 존장으로서 문파의 제자를 징계하는 자리인데, 외부인의 입장으로서 함부로 말리고 나서기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언뜻 주위를 둘러보던 허종의 표정이 일시 묘하게 찡그려졌다.
주변에 몰려들어 있는 화산파의 제자들이 적어도 수십은 되어 보였는데, 그들 중에서 누구 하나 나서서 악청을 말릴 기색을 보이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의 표정 중에서는 허종이 염려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악청이 드디어 큰 사고를 치고야 만다는 조바심을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허종이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한 번 웃은 다음에, 악청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허, 악 노형! 우리의 입장을 봐서라도 이제는 좀 그만 하시오!"
일부러 약간의 내력을 실어 외친 허종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악청이 씩씩거리며 겨우 손을 멈추었으나, 그는 여전히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계황의 목덜미를 낚아채어는 홱 하고 집어던지고 말았다.
삼 장여나 허공을 날아간 계황의 몸뚱이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철퍼덕!
그러나 계황은 이미 혼절한 듯 그대로 사지를 늘어뜨리며 바닥에 널브러지는 것이었다.
악청이 그제야 약간이나마 걱정이 되었던지,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화산제자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뭣들 하고 서 있는 게냐? 어서 저놈을 약전(藥殿)으로 옮기지 않고서......?"
그러자 그때까지는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화산 제자들 중 서너 명이 급하게 달려 나와 계황을 들쳐 업고서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몇몇은 사방으로 신형을 날려갔다.
아마도 이 사태를 제 각기의 소속으로 알리러 가는 것일 터였다.
지금의 이 사태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들 또한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들이 계황에 대해 그다지 살뜰한 동문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계황이 화산파에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도 소중한 인물인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화산 장문인 진령(秦寧)은 내심의 화를 삭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심기가 깊고 처신에 능한 그가 이처럼 스스로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일어나는 경험을 해보기는 참으로 드문 경우였다.
바로 계황의 일 때문이었다.
계황은 중상을 입고 약전에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무인에게 있어 내상도 아니고 기껏 전신에 멍이 드는 정도의 타박상을 좀 입었다고 해서 중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손을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악청이었으니,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았어도, 실은 내상 하나 없이, 그리고 뼈 하나 부러진 데 없이 철저히 겉으로만 멍이 들게 손을 써 놓았다.
넉넉잡아 한 열흘 정도 푹 쉬고 나면 멀쩡하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외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바로 계황이라는 데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언제 누구에게 뺨이라도 한 번 맞아본 적이 있었겠는가?
진령이 잠깐 만나본 계황은 아직도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허어!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사백(師伯)도 참! 굳이 패려거든 차라리 표시나 나지 않게 패든지......!'
아무리 답답하기로 진령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계황을 꼭 그렇게 개 패듯 패야 할 상황이었다면 그처럼 표시나게 외상(外傷)을 만들 것이 아니라 차라리 겉으로는 표시 나지 않고 내부로만 타격을 받도록 했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 편이 훨씬 더 엄중한 상처이겠지만, 그것이야 무인에게 있어 그렇다는 얘기이고, 계황이야 어차피 평생 동안 크게 힘쓸 일도 없이 권력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인물인데,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수명이야 좀... 상당히 짧아지겠지만, 그건 또 아주 나중의 일이고 당장의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런 저런 백 가지의 생각들이 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불과하였다.
문제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 난감한 사태를 여하히 무마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과 등을 돌리게 되면 지금껏 초석을 닦아온 화산의 백년대계에 막대한 차질이 미치게 된다.'
고민 끝에 진령이 얻은 결론은 바로 흑요였다.
직접적으로 계황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악청이나, 애초에 일의 원인을 제공한 석여령과 흑요가 아닌가.
하면 이번 사태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책임은 바로 그녀들에게 있다고 할 것이었다.
물론 석여령보다는 흑요가 만만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진령은 이미 탕마단과 잠룡단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하게 파악을 해 둔 상태였다.
'흑요라는 여아에게 어떤 상징직인 문책을 한다고 해도, 탕마단의 수뇌부에서는 차라리 내심으로 환영을 하면 했지, 결코 반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진령에게는 그러한 확신이 있었다.
더구나 상징적인 문책이라는 것이 당장에 어떤 심한 처벌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해두자는 것이니 더욱이 크게 반발을 살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즉, 진령이 생각하는 것은 흑요에 대해 화산파의 이름으로 당장에 처벌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계황이나 그의 아비 계중업을 위해 나중에 그들이 시원하게 분풀이를 할 대상을 명확히 해두자는 데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령의 그 같은 지극히 타당하고도 합당한 심계는 뜻밖으로, 그리고 어이없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진령이 내심의 노화를 삭이지 못해 애를 끓이고 있는 이유였다.
진령에게 있어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 참으로 뜻밖의 반발이었다.
진령이 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자파의 제자에 대해 생명의 위협을 가한 흑요에 대해 문책을 요구하였던 바, 탕마단주 위지호준은 일고(一考)의 여지도 없다는 듯 즉시로 강한 거부의 뜻을 표명한 것이었다.
진령에게 그것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그의 요구에 대한 위지호준의 그 같은 명백한 거부는 차라리 면박이라고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대무존가의 후계자 신분이라고는 하나 이제 겨우 스물 댓 살에 불과한 애송이가 감히 본좌에게 이 같이 무례하다니? 이대무존이 직접 이 자리에 왔다고 하더라도, 본 장문인에 대해 감히 이렇게까지는 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진령은 결코 감정적인 인물이 되지는 못하였다.
탕마단의 기라성 같은 원로거두들이 탕마단주로서의 위지호준의 권위에 대해 그처럼 적극적이고도 명백하게 뒷받침을 하고 있는데, 그의 노화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대놓고 위지호준과 부딪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 그러한 일은 자칫 무황성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로 비치기 십상일 테니까 말이다.
사실 진령은 탕마단과 잠룡단의 알력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확하게 파악을 하였지만, 그 안쪽 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하나의 본질에 대해서는 미처 알아채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바로 석여령에 대한 위지호준의 마음에 관한 것이었다.
진령이 희생양으로 삼고자 한 흑요의 일은 곧 석여령의 일이라고 할 수 이었으니, 위지호준으로서는 진령에게 지금보다 더한 무례를 범하는 한이 있더라도, 석여령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누가 되는 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진령이 지금도 여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흑요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함부로 희생양으로 내세울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위지호준이 진령의 요구에 대해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하고, 그래서 화산파가 비록 가볍고 상징적일지라도 흑요에게 어떤 문책을 하려고 하였다면, 그로 인해 화산파는 또 어떤 상상치 못한 호된 몸살을 앓아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만약에 그런 상황이 되었다면, 화산파가 감당했어야 하는 것이 결코 흑요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잠룡단 전체가 흑요에 대한 화산파의 그 같은 부당한 대우를 그냥 보고 있지 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진령은 자신의 심계가 빗나간 덕분으로 비록 향후에 동창제독 계중업으로부터는 어떤 후환과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되, 대신 당장의 큰 재앙을 면하게 된 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진령 본인은 그런 깊은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출발을 해주었으면 하오."
계황의 일로 인해 약간은 불편한 관계가 되어 있는 와중에 나온 화산파 장문인 진령의 그 같은 요구는, 탕마단의 수뇌부에게는 사뭇 껄끄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요구에 대해 달리 이의를 제기할 명분이 있을 리는 없었다.
벌써 닷새째였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화산파가 탕마단에 지원할 사항은, 하룻밤 정도를 머물 수 있도록 하고 행로에 필요한 간단한 물자를 제공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사망자의 장례 절차와 부상자의 치료에 따른 인적 물적 수고를 뺀다고 하더라도, 삼백 오십여 대병력을 먹이고 재우는 데 들어가는 물자와 비용이 어찌 만만하랴?
아무리 화산파가 구파일방에 속하는 대문파라고는 하나 자파의 인력을 통틀어도 삼백이 채 안 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탕마단과 같은 대규모의 외부 인력을 그같이 여러 날 동안이나 거두고 있었으니, 이미 상당히 무리한 부담이 되고 있는 중일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또한 탕마단의 입장으로서도, 그들은 지금 무황성의 전위대로서 탕마의 기치를 내걸고 사천으로 가는 길인데,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강호의 이목들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행로를 지연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부상자들이 아직까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 하든 다시 행장을 꾸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중상자들은 본 파에 남겨 계속적인 치료를 받게 하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위지호준이 부탁하려고 했던 사항에 대해서도 진령은 한 발 앞서 배려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진령의 말은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본래 본 파에서는 작은 숫자라도 귀 단의 탕마행에 동참을 하려 했었소.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적의 침습(侵襲)으로 가볍지 않은 피해를 입는 바람에 원래 계획했던 대로는 어려워졌으나, 그래도 본 파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다는 의미에서 본 파를 대표할 수 있는 한 분을 파견하기로 했소. 바로 본 파의 최고 어른이시며, 또한 명호(名呼) 그대로 화산제일검이신 악청 사백이시오."
그 뜻밖의 제안에 대해 위지호준은 우선 곤란한 기색부터 보였다.
언뜻 공손도중을 보니 그는 별 의견이 없다는 듯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때 위지호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위지연(慰志硏)이 짐짓 위엄을 갖추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무림평화를 위한 고심에 대해서는 새삼 고개가 숙여지는 바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번 본 탕마단의 행로는 워낙 중대하고도 위험한 것이라, 조직의 군기와 기강이 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만약 악청 대협께서 본 단에 동참을 하신다면, 비록 그분께서 무림의 큰 어른이시긴 해도 어쩔 수 없이 본 탕마단의 지휘 체계를 따라야만 할 것인데, 그리 되면 악청 대협 본인은 물론 본 단의 지휘부로서도 사뭇 곤란한 입장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말을 돌려서 하긴 했으나, 위지연의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한 것이었다. 아무리 화산파 제일의 배분이라 하더라도, 일단 탕마단에 동참하려고 한다면 탕마단의 지휘 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겠다는 심사인 것이다.
진령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위지 대협의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그대로 지금 우리 모두는 무림의 평화를 위해 천마궁의 잔당들을 비롯한 사마외도의 무리들과 또 한 번의 정마대전을 앞두고 있는 처지입니다. 하니 아무리 악청 사백께서 본 파의 최고 어른이시라 하더라도, 일단 공식적으로 파견이 된 연후에 탕마단의 지휘 체계에 따라야 하는 것은 분명하고도 당여한 일입니다. 또한 그것은 화산 문하로서 본 파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리해야 하는 일이니 위지 대협께서는 그 같은 염려를 거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위지연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장문인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해주시니, 저의 우려는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다면......!"
그리고 위지연은 문득 위지호준을 바라보았다.
걸림돌을 제거하였으니, 이제 단주로서 결정을 내리라는 의미였다.
이윽고 위지호준이 흔쾌한 기색으로 진령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본 탕마단은 장문인과 화산파의 높은 뜻을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진령 역시도 포권으로 답례를 하며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실 악청이 화산파 제일의 고수이긴 하지만, 막상 화산파 내에서 지금까지 그가 중요하게 소용된 바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장문인인 진령의 입장에서는 사백의 신분인데다 천방지축 제멋대로 행동하는 악청은 부담스럽고 성가시기만 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를 하산시키는 것이 조금도 싫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더하여 만약에 악청이 탕마단과 함께 행동하면서 그 대단한 무위로 큰 공이라도 세운다면, 화산파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악청의 하산에 부여하는 정작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바로 계황의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악청과 또한 그가 당분간이나마 새롭게 소속될 탕마단이 함께 떠안고서 화산파를 떠난다는 의미였다.
그럼으로써 화산파는 크게 명분을 취하는 동시에, 무거운 짐 하나를 화산파 바깥으로 덜어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에는 뛰어난 자가 의외로 많은 법이다.
탕마단 내에서도 진령의 속셈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비슷하게 추측을 하고 있는 사람이 최소한 두 사람은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로 공손도중이었다.
그는 능히 진령의 속셈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내내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등평이었다.
등평은 물론 진령의 속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지만, 진령의 그 같은 제안에 대해 듣고 난 다음에 그에게서는 오히려 반기는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탕마단은 아침 일찍 화산파를 출발했다.
기동이 어려운 중상자를 남기고 나서는 길이라, 그들의 대열은 이제 삼백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무황성을 나선 지 겨우 며칠 만에 백여 명이 준 것이다.
대열의 선두는 역시 잠룡단이었다.
누가 굳이 그들을 선봉에 서라고 한 바는 없었지만, 잠룡단은 자연스럽게 선봉으로 나섰다.
등평이 생각하기에 이미 적의 공격을 한 번 받은 바 있는 이상, 이제 선두에 선다고 해서 더 위험하고, 후미에 선다고 해서 덜 위험할 이유는 딱히 없는 것이었다.
또한 잠룡단의 본성 내지는 특성상, 다른 무리들의 뒤꽁무니나 따라
가는 것이 성질에 맞지 않는 바가 있기도 하였다.
잠룡단이 선두를 서는 것에 대해서는 탕마단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위험을 앞서 맞겠다는 그들을 말릴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양측 수뇌부들끼리 의사 교환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잠룡단 측에서는 허종이 대표자로 나섰다.
그러고 보면 무황성을 나서면서부터 탕마단의 수뇌부를 대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항상 허종이 잠룡단의 대변인 격으로 나서곤 했었다.
사실 그것은 등평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잠룡단이 환골탈태하였다고 하더라도 위지호준과 공손도중에 대한 고대릉의 입장, 그리고 무황성의 원로고수들에 대한 잠룡단의 입장 등, 그 모든 관계를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잠룡단 중에서는 그래도 유일하게 탕마단의 그 누구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허종을 내세움으로써,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관계와 위상을 정립하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그런 등평의 의도는 이미 상당 부분 효과를 거두어가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에는 고대릉 스스로의 일신된 면모가 작용한 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탕마단의 그 누구도, 적어도 고대릉에 대해서만큼은 감히 함부로 하대하거나 무례를 범하려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대릉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잠룡단 전체의 위상도 따라서 높아지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의 특기 사항이 있다면, 바로 화산제일검 악청이 잠룡단으로 배속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리 장문인의 공식 명령을 받아 탕마단에 합류를 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악청의 성품으로 보아 그가 쉽사리 누구의 지시에 따라 어디에 배속이 되고 말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스스로의 발로 잠룡단의 대열 속으로 끼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차지한 것은 당연히 독고자강의 옆자리였다.
그에 대해 좌룡이 잠깐 동안 입 안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로 뭐라고 투덜거리는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괜히 해보는 소리였다는 것은 그가 금방 허종 등과 어울려 악청과 시시덕거리는 모습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악청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나이나 배분 등은 조금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었고, 다만 성격과 기분만 맞는다면 어느 누구와도 금방 시시덕거릴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런 성격은 사실 잠룡단 사람들의 원래 본성과도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허종과는 은근히 투닥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쉽게 이해하는, 사뭇 묘한 관계로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 덕분으로 허종이 얼굴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자주 싱글거리는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허종은 지금까지 잠룡단의 사실상의 최고 웃어른으로서의 무게를 지켜왔는데, 악청과 어울리면서부터 은연중에 그 본래의 해학적인 가벼움을 많이 되찾는 느낌이었다.
다소 특히나 또 한 가지의 사실은 웬일로 등평 또한 그들과 자주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하긴 등평만큼 여러 가지의 모습을 지니고, 또 그 각각의 모습에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또 있겠는가.
평범한 촌부에서 신기묘계(神奇妙計)의 책사, 또 때로는 박학다식에 고매한 경륜을 갖춘 대학자로서의 모습까지.
필요하다면 그 어떤 모습이라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등평이었다.
등평은 자유 분방한 화술로 금방 허종과 악청 등의 시시덕거림(?)에 어울렸다.
등평의 목적하는 바가 따로 있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밝혀졌다. 어느 정도 친하게 된 다음에 등평은 악청에게 한 가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등평의 그 제안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허종과 고대릉에 불과했던 듯,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등평의 제안에 대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악청을 잠룡단이 명예장로로 선임하겠다는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잠룡단에 장로 직이 신설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당혹스러워한 것은 역시 제안을 받은 악청 본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거리끼는 바가 없는 성품이었지만, 등평의 그 같은 제안에 대해서만큼은 당장에 곤란하다는 기색이 역력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비록 명예직이란 단서가 달리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그가 잠룡단과 명분화된 어떤 공식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가 지금 탕마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탕마단의 경우에는 비록 무황성에 소속된 하나의 조직이기는 하지만, 본래 무황성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등 정파세력을 망라하여 대표하는 성격을 지니는데다, 더욱이 지금은 천하맹주령의 발동으로 모든 정파세력들이 탕마단을 필두로 이차 정마대전의 태세를 갖추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탕마단은 정파무림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면서, 또한 한시적인 임시 조직의 성격이 있는 것이니, 탕마단에 속했다고 해서 굳이 어떤 조직에 소속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더구나 악청이 탕마단에 합류하게 된것은 어디까지나 자파 장문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니 그로서는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잠룡단이라면 얘기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악청이 지나치다 할 만큼 자유로운 성정이기는 하나, 또한 그 연륜 만큼의 눈치가 없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지난 며칠 동안 가만히 보니 잠룡단은 탕마단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별개의 조직이었다.
그런데 그 별개의 조직이라는 것이 딱히 무황성 계보의 조직도 아닌 것이, 어지 보면 허종 등 몇몇이 만든, 그 추구하는 목적마저도 불분명한 소위 사조직이라 할 만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청이 잠룡단에 대해 딱히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가 진정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독고자강이 잠룡단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눈치라, 그저 친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친하게 어울리는 것하고 막상 그 조직의 일원으로 소속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는 근본적으로 화산파의 제자였고, 더구나 화산 최고의 배분으로서 탕마단과 같이 공공의 성격이 있는 단체가 아니라면 적(籍)을 둘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만약 다른 조직에 적을 두려 한다면, 그것은 바로 화산파에 대한 배신이었고, 기사멸조의 대배덕(大背德)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명예장로라 함은 엄격히 말해 본 잠룡단에 정식의 적(籍)을 두지 않아도 되는 직위입니다."
이미 악청의 속을 환히 알고 있다는 듯 등평이 함축적인 한마디를 했다.
악청이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진중한 기색이 되어 물었다.
"허허! 등... 군사는 한 조직의 군사로서 말을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오. 천하의 그 어떤 조직에서 적을 두지 않는 장로라는 직책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나무라는 투이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위치를 존중해 주는 악청의 말에 대해, 등평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바로 본 무적잠룡단입니다. 본 단은 구속적이기보다는 자유로운 가운데 서로 간의 신뢰와 유대감을 바탕으로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에, 만약 소속 구성원 중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언제라도 자유로이 조직을 탈퇴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본 단의 단주로부터 말단의 각 개인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율법입니다."
악청이 곧바로 탄식을 흘렸다.
"허?"
그 탄식의 의미는 곧 '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다 들어본다' 는 정도의 것이리라.
그러나 이어 흘깃 눈길을 돌려 허종과 좌룡, 그리고 고대릉 등의 기색을 살펴본 악청이 표정은 이내 살짝 굳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태연스럽고도 담담한 기색에서 어쩌면 등평이 말하는 것이 단순히 지어낸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불쑥 떠오른 때문이었다.
이윽고 악청의 시선이 독고자강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독고자강이 진지한 기색으로 자신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윽고 악청은 다시금 긴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허어......!"
그의 탄식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등평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선배님께서 본 단의 명예장로 직을 맡으신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본 단에 얽매이거나 어떤 책무를 지게 되는 일은 일절 없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분명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악청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다 지우지 못한 채, 그러나 한결 차분한 기색이 되어 물었다.
"허허허! 적을 두지 않아도 되고, 책무를 지니는 것도 없다면, 굳이 명예장로 직을 맡고 말고 할 필요는 또 어디에 있겠소?"
어떻게 듣자면 명백한 거절의 의사로 들리는 말이었는데, 등평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보다 큰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보다 큰 조직이라......?"
"그렇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가장 큰 조직을 만들기 위한 초석을 노선배님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악청의 눈매가 설핏 날카로워졌다.
"자네의 그 말은 마치 천하의 패권이라도 한번 도모해 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악청의 사뭇 날카로워진 안색에는 노기와 함께,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에 대한 어이없음이 함께 녹아 있었다.
그러나 등평은 진지한 기색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다.
"무적잠룡단은 그 규모에 있어서 앞으로도 지금의 인원인 백 명을 크게 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노선배님께서는 겨우 백 명의 조직으로 천하의 패권을 도모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으음!"
"저희들은 천하를 도모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천하 그 자체인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등평의 그 말에 대해 악청은 잠시 생각을 하는 모습이다가, 문득 노화 섞인 어조로 말을 뱉어냈다.
"자네는 지금 교묘한 언변을 빌어 노부를 희롱하고 있는 것인가?"
등평이 짐짓 급하게 대답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자네의 말이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말한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어디 납득이 가능한 소리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등평은 문득 악청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난 다음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소생에게 분명히 잘못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 명예장로 직에 관한 내용은 본 단에서도 단주님과 태상호법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기에 이 기회를 빌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설명을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핵심만을 말씀드리도록 할 터이니, 부디 화를 푸시기 바랍니다."
등평이 그렇게까지 숙이고 나오는 터라 악청은 짐짓 딴청을 부리는 듯이 헛기침을 흘렸다.
"흠!"
그러나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어느새 진한 호기심이 서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등평이 지금까지 말을 돌려 하는 와중에 악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에 가졌던 거부감과 어이없음을 상당 부분 희석시키고 있던 셈이었다.
등평의 말은 이제 기이한 열기마저 띠어가고 있었다.
"무릇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장애는, 바로 조직을 구성하는 인원들 간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상충되게 된다는 문제일 것입니다. 예컨대 각 개인마다의 가문과 사승 관계 등은 사실상 조직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어서, 결코 완전히는 조직의 틀 안으로 융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등평이 숨을 돌리며 잠시 말을 멈추자 악청이 짧게 동감을 표했다.
"흐음."
등평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형태와 방법이 있어서, 그 같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조직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조직이야말로 과연 천하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본 단에서는 바로 그러한 조직을 목표로 하여 명예장로원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청이 문득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허허허! 언뜻 듣기에 자네의 말은 제법 그럴 듯하네만... 결국은 노부와 같은 퇴물들을 모으겠다는 말인데, 퇴물들을 일일이 모으는 일 자체도 쉽지 않으려니와 설령 상당수의 퇴물들을 모았다고 하세.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개인적인 욕심을 다 버리다고 하세. 그러나 그들에게 새삼 무슨 열정이 있어서 자네가 바라는 그 어떤 힘이나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겠는가?"
등평이 조금도 흔들림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강호의 고인들이 욕심을 버리고 함께 모여 다만 명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바로 힘이요, 위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허허허! 참으로 엉뚱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로다. 만약 자네의 뜻대로 되어서 천하의 퇴물들이 두루 모여서 종국에는 그 인원수나 영향력에 있어서 기껏 백 명밖에 안 되는 자네들 잠룡단보다도 수 배, 나아가 수십 배 더 큰 규모로 되었다고 하세. 하면 그때에 자네들이 실질적으로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하하! 본 단은 다만 천하에서 가장 명예로운 조직의 모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의 고인들이 모두 모인 명예장로원이 있는 한, 그 어떤 강대한 세력도 감히 본 무적잠룡단을 넘보지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득 악청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어 내놓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 들뜬 듯 들렸다.
"과연 그것뿐이란 말인가? 기껏 보호막으로서의 덕을 보려고, 그같이 엄청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등평이 악청의 정광 가득한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찌 본 단의 보호막일 뿐이겠습니까? 명예장로원... 아니, 그 이름이 무엇이 되었든, 그리고 그 자체로는 어떠한 구속력도 없으며, 또한 구체적인 조직의 틀을 갖추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만 천하에 그 같은 모임이 존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 그 어떤 세력이든, 그것이 천마궁이 되었든, 혹은 그 어떤 새로운 세력이 되었든, 감히 쉽게는 천하의 패권을 노리고 지금과 같은 난세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면 또한 무황성과 같은 조직도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겠지요? 굳이 그러한 정파연맹체가 없더라도 천하에서 뭇 패권세력들을 억제시키는 보이지 않는 하늘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등평의 눈빛에서는 악청의 정광을 능가하는 정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내공에서 나오는 정광이 아니라 바로 확고한 신념과 열정에서 나오는 정광이었다.
"노선배님께서 용단을 내려주신다면, 비록 이제 시작을 하려는 것이지만 본 단의 명예장로원은 머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그와 같은 무림의 보이지 않는 하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악청은 한참 동안이나 등평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문득 본래의 그다운 천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허허허! 한참 듣다 보니 뭔 소린 지 당최 헷갈려서... 하여튼 노부는 등 군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저히 모르겠소."
거기까지 말한 악청은 흘깃 독고자강과 눈을 맞추고 난 다음에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노부는 아무래도 제대로 코가 꿰인 것 같군. 노부가 일언지하로 거절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여기 독고 소형제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악청이 잠시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가 이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마저 뱉었다.
"하여간 일단은 등 군사의 말을 따라보도록 하겠소. 하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명심해 두시오. 노부는 본래가 지극히 변덕스러운 늙은이라 언제라도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오."
그 말에 독고자강이 얼굴에 언뜻 엷은 감격을 비쳤고, 등평은 얼른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악 장로님!"
등평의 그 말은 악청이 말한 바, 그의 변덕을 염려하기라도 하듯 아예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악청은 그만 너털웃음을 흘릴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허허허허!"
일행들은 새삼스럽게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똑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들 간에는 새로운 관계가 설정이 된 것이다.
비록 명예장로의 직위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위엄도 정해진 바가 없지만, 그 첫 번째 명예장로가 바로 화산제일검 악청이라는 사실 자체로 이미 잠룡단의 명예장로가 가지는 위엄은 저절로 정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그 무형의 위엄이라는 것은, 결코 태상호법인 허종의 아래가 아니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고대릉을 대하는 악청의 태도는 이전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져서 은연중에 언행을 삼가는 기색이 뚜렷하였다.
탕마단이 사천으로 가는 표면적인 이유는, 무황성과 천하정도세력의 전위대로서 청성과 점창의 멸문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천마궁 잔당들의 흔적을 추적 및 경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내밀(內密)한 이유는 바로 천마궁의 잔당들을 사천으로 결집시키는 촉매로서의 역할, 즉 미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마궁의 발원지는 청해(靑海)의 청해호(靑海湖) 부근인데, 이후 천여 년에 걸쳐 맥을 이어오면서 그 주요 근거지를 청해와 감숙, 사천 등지로 하여 왔었다.
무황성의 수뇌부에서는 천마궁이 지난 이십 년 동안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해왔다고 하더라도, 그동안의 무림이 무황성을 중심으로 하여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감숙과 사천의 경계를 벗어나서까지 거점 세력을 구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바 있었다.
물론 진주언가의 멸문 사건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무림에 혼란을 주기 위한 일종의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일 뿐, 적의 주력은 여전히 사천, 청해, 감숙, 삼 개 성(省)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탕마단이 공개적으로 사천에 입성함으로써 적을 사천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고, 만약 일이 실제로 그리된다면 단 한 번의 대회전(大會戰)으로 강호의 난세를 종식시킬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계획을 세웠던 것이었다.
탕마단이 사천을 향해 가는 동안 무황성은 적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동시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주력을 사천 지역으로 투입할 만반의 태세를 은밀히 갖추고 있었다.
사실 사천성으로부터의 떨어진 거리에 따라 상당수의 정파 정예들이 이미 순차적으로 사천성을 향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탕마단이 택한 행로(行路)와 적의 공격에 대한 대응에서 보여준 몇 가지의 미숙함과 의혹 등도 바로 그러한 대국적인 전략과 연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를 테면, 지나번 적의 야습 시에 탕마단 최고의 고수들인 원로급 고수들이 적극적으로 적을 맞아 부딪치기보다는, 차라리 위지호준의 경호에 더욱 역점을 두는 듯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또한 부류,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막강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천강과 열 구의 금강시들이 공손도중과 언검룡의 주변에서만 맴돌았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 안에는 또 다른 어떤 숨겨진 저의와 복선이 있는 것일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