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李恒老) 신도비 최익현(崔益鉉)
이항로(李恒老) 신도비 최익현(崔益鉉) 1792(정조 16)∼1868(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회장(李晦章)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의집(義集)의 딸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 한성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었다. 25∼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해 쌍계사·고달사 등 사찰을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그 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년(고종 1) 당시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으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와 만동묘(萬東廟)재건 상소 등으로 인해 대원군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그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중국의 나흠순(羅欽順) 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여 이·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화서(華西) 이 선생(李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선사(先師) 화서 이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1년이 되는 무술년(1898, 광무 2)에 문인 월성(月城) 최익현(崔益鉉)은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이 지은 행장(行狀)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서 선생의 증손 이승조(李承祖)에게 주어 돌에 새기게 한다. 아, 하늘이 이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평화와 혼란이 없을 수 없는데, 혼란하면 하늘은 반드시 한 사람의 대인군자(大人君子)를 내어 시대를 참작하여 혼란을 중지하는 기본을 마련하게 하였다. 주(周)의 말기에 공자가 출생하고, 송(宋)ㆍ명(明)의 말기에 주자(朱子)와 송자(宋子 송시열을 말함)가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징험이다. 그후 서교(西敎 천주교)가 횡행하여 천하가 번복되고 생민(生民)이 어육(魚肉)이 되는 재화가 있게 되니, 하늘은 우리 선생을 동쪽 지방에 탄생시켜 저들을 물리치는 일을 맡아 만세에 일치(一治)의 기초가 되게 하였으니, 아,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선생의 휘(諱)는 항로(恒老)이고 초휘(初諱)는 광로(光老)였는데, 철종(哲宗)의 사친(私親)과 혐명(嫌名)이 된다 하여 고친 것이며, 자는 이술(而述)이다. 대대로 양근(楊根) 벽계리(蘗溪里)에 살았는데, 마을이 청화산(靑華山) 서쪽에 있는 까닭에 학자들이 화서(華西) 선생이라고 불렀다. 시조 총언(忩言)은 고려 태조를 도와서 개국한 공훈으로 벽진장군(碧津將軍)에 봉해졌으므로 자손들이 벽진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는데, 대대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난 이가 있었다. 본조 성종조에 이르러서 휘(諱) 약동(約東)은, 경행(經行)이 있고 청백(淸白)하였으며 문무를 겸전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를 평정(平靖)이라 하였으니 바로 선생의 10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태형(泰亨)으로 지중추부사며, 조(祖)의 휘는 성복(聖復)으로 증 이조 참의이며, 아버지의 휘는 회장(晦章), 호는 우록헌(友鹿軒)으로 증 이조 참판인데, 양대(兩代)가 증직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妣)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휘 의집(義集)의 딸이니, 정조 임자년(1792, 정조16) 2월 13일에 선생을 낳았다. 조모 신부인(申夫人)은 본디 안목이 있었는데 선생을 어루만지면서,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집을 번창하게 할 것이니 잘 가르쳐야 한다.” 하였다. 선생이 조금 자라면서 스스로 학문할 줄을 아니, 우록공(友鹿公)은 원대한 재기(才器)가 있음을 알고 손수 백록동 강규(白鹿洞講規)를 써서 주었다. 9세 때에는 한 노인이 말하기를, “천지 사이에는 하나의 기(氣)가 있을 뿐이다.” 하자, 선생은 문득, “아마도 하나의 이(理)가 있는 듯합니다.” 하여, 만좌한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어려서 과거 공부를 하여 반시(泮試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해서 명예를 크게 떨치니, 그 당시 재상이 사람을 시켜 선생 보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은 달갑게 여기지 않아 그날로 집에 돌아왔다. 선생은 관례(冠禮)를 마치고 지평(砥平)에 들어가 죽촌(竹村) 이우신(李友信) 선생을 뵈었다. 죽촌은 선생의 공부를 시험해 보고는 말하기를, “나의 외우(畏友)이다.” 하고 논설을 다하니, 선생은 이로부터 의리의 중요함을 더욱 터득하게 되었다. 순조 병자년(1816, 순조16) 이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했다. 복을 벗고는 속학(俗學)을 모두 버리고 인(仁)을 찾는 자신을 위하는 공부에만 힘을 썼다. 그러자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선생을 존모하여 책을 지고 오는 이가 날마다 문하에 가득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30이 가까웠지만 더욱 수렴(收斂)하고서 나타내지를 않고,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의 서쪽으로 한 걸음도 나아간 일이 없었다. 척신(戚臣)이 선생을 이끌어다가 자기의 소용을 만들려 하자 엄한 말로 물리치니,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헌종 경자년(1840, 헌종6)에 나라에서 경행(經行) 있는 선비를 특별히 천거하라 하는데, 전조(銓曹)에서 선생을 제1위로 천거하여 휘경원 참봉(徽慶園參奉 정조 후궁 유비(綏妃) 박씨의 무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경서와 예문을 강론하고 복습하였고, 일찍이 학규(學規)를 정하였으니, 주자가 글 읽던 차례에 의거하여 과정을 엄밀히 세워 매월 한 차례씩 모였는데, 늘 1백여 명이나 모였다. 선생이 생도들과 강설을 할 때는 신색이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의리가 중요한 부분에 이르면 딴 일을 끌어다가 비유하여 분석하였는데 통쾌하기가 생동하는 용과 뛰는 범 같았다. 이러므로 비록 몽매하고 노둔한 자라도 모두 정신이 상쾌하여 깨치는 바가 있었다. 또 강계(講戒) 하나를 지어 매양 강의가 끝나면 잘 읽는 자로 하여금 한 차례 외게 하였는데 그 조목은 대체로 10여 가지였다. 그 내용은 북쪽의 오랑캐(청(淸) 나라)가 의관(衣冠 예의)을 파괴하고 서쪽의 천주교가 우리 마음을 좀먹으니, 남보다 앞장서서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서, 성현의 가르침과 부조(父祖)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말자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임술년 역옥(逆獄)에 선생의 이름이 난초(亂招 죄인들이 엉뚱하게 꾸며 댄 초사(招辭))에 나오니, 선생은 사당에 하직도 하지 못하고 옥에 갇혔는데, 공초(供招)의 대답이 명백하고 언사가 자연스러웠는데, 얼마 후에 풀려나게 되었다.갑자년(1864, 고종1) 금상이 즉위하니 대신들이 경연에서 선생의 행의(行義)를 아뢰어,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었다가 전라도 도사(都事)로 전직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ㆍ장령을 제수받았다. 지평이 되었을 때, 선생께서 여러 번 은명을 입었는데 끝내 말 한마디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였다. 곧 상소문을 지어 사적(仕籍)에서 삭제해 줄 것을 빌며 심학설(心學說)을 덧붙였으니, 이는 등극한 초기에 천명을 다지라는 내용이었는데, 바로 직책이 경질되었으므로 올리지 않았다. 병인년에 서양의 도적 떼가 강도(江都)를 함락하니, 유수(留守) 이인기(李寅虁)는 왕성한 적세를 겁내어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때는 태평세월이 오래 지속되어서 전쟁을 알지 못하니, 백성들은 조수(鳥獸)처럼 흩어졌고, 사대부들은 화친(和親)을 빌자고 하거나 서울을 떠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묘당(廟堂)의 논의가 선생을 불러오기를 주청하니, 즉시 동부승지에 제수하고 특지를 내려 빨리 오도록 하였다. 선생은 이미 달려가서 그 일을 물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명을 듣고는 곧 대궐 밖에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하며 덧붙여서 마음속의 생각을 아뢰었으니, 양적(洋賊)과는 싸워야 하고 화친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전투를 하여 지키는 것은 일상적인 방법이고 서울을 떠나는 것은 통달한 권도(權道)이니, 일상적인 방법은 누구나가 다 지킬 수 있지만 통달한 권도는 성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니 빨리 애통한 하교를 내려서 사방 백성의 감정을 고무시키라고 하였다. 이어서 대신을 공경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주며, 재능 있는 이를 임용하고 사특한 이를 멀리하며 토목공사를 정지하고 사치를 버리는 일들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양적도 물리칠 수 있고 국가도 보전할 수 있어 멸망하는 위험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 상은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패초(牌招)를 그치지 않았다. 선생은 사은숙배하고 등대(登對)하였는데, 소매에 넣고 간 간단한 차자(箚子)를 상께 올렸으니, 학문을 힘쓰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큰 근본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장수를 절제하는 조정의 잘못을 말하였다. 얼마 후 선생은 공조 참판에 승진되고 정부 당상(政府堂上)에 임명되어 부총관(副總管)을 겸직하게 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때에 상이 선생의 말을 채택하여 중외(中外)에 포고하고 전투를 하여 지키는 것을 정론(正論)으로 삼았다. 선생은 그에 덧붙여 아뢰기를, “인언(仁言)은 인성(仁聲)만큼 사람들에게 깊숙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세금을 많이 징수하는 것을 금지하며, 충간(忠諫)을 따르고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이 인성입니다.” 하였다. 또 전번 상소에서 아뢴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다시 들어서 이익을 생각하고 의리를 망각하거나 살기 위해서 구차하게 화를 모면하려는 자를 벌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때에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이인기(李寅蘷)를 벌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으므로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다시 아뢰기를, “서양 오랑캐의 화는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와 같으므로 만일 뿌리채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정치가가 나온다 하여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복식(服食)이나 기용(器用) 중에 하나라도 서양 물건이 섞여 있으면 모두 색출해서 대궐 뜰에 모아 불살라 호오(好惡)의 소재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또 이로써 궁위(宮闈)ㆍ종척(宗戚)ㆍ조정ㆍ백성들을 경동시켜 모두 상의 뜻을 따르게 되면, 몸이 닦아지고 가정이 다스려지고 국가가 바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서양의 물건을 교역하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교역이 끊어지면 저들의 기묘한 기교(技巧)가 팔리지 않을 것입니다. 기묘한 기교가 팔리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목적하는 바가 없어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저들을 체포하여 벌을 주고 정벌(征伐)하는 일과 서로 본말(本末)이 되는 것이니,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은 의례적인 비답을 내릴 뿐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말이 시행되지 않음을 보고는 곧 네 번째 소를 올려 병을 아뢰어 체직(遞職)되었다. 바로 동지의금부사를 제수하니, 드디어 병의 증상을 말하면서 부역과 세금의 징수가 그치지 않는 것과, 상벌의 마땅하지 못한 것과 서양 물건의 유통을 금절해야 한다고 거듭 아뢰었으나, 역시 상은 의례적인 비답을 내릴 뿐이었다. 그러자 선비들은 혹 선생이 경솔하게 관직에 나갔을뿐더러, 말이 쓰여지지 않는데도 곧바로 물러나지 않아 조정에서 어진 이를 가볍게 보도록 하였다고 탓하였다. 선생은 이에 답하기를, “국가가 위급할 적에는 달려가서 묻는 의리가 있는 것이다. 자사(子思)가 ‘내가 만일 떠나게 되면 임금은 누구와 함께 나라를 지킬 것이냐?’고 한 말이나, 맹자(孟子)가 ‘군사를 출동한다는 명령이 있어서 물러나기를 청할 수 없었다.’고 한 말로 볼 때, 외적을 물리치기 전에 물러나기를 고하는 것은 끝내 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이윽고 문인 양헌수(梁憲洙)가 순무 천총(巡撫千摠)으로 적을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격퇴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선생은 상소를 남겼으니, 징계하고 삼가야 할 요점을 아뢰고, 이어 만동묘(萬東廟)를 복원할 것을 청한 뒤에 새벽에 동문을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떠나간 뒤에 백성들은 모두 한탄하였는데, 전 헌납 박주운(朴周雲), 부호군 박규서(朴奎瑞) 같은 이는 소를 올려 다시 예를 갖추어 맞아 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 정묘년(1867, 고종4)에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의 임명이 있었다. 다음해 무진년 3월 18일 유시(酉時)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시각에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이변이 있었다. 아, 철인이 돌아가는 것이 어찌 작은 변이겠는가. 부음(訃音)이 들리자 부의와 치제(致祭)를 전례대로 하였다. 그후 윤4월 21일(무진)에 벽계(蘗溪) 남쪽, 정보(鼎寶)의 서산(西山) 손좌원(巽坐原)에 안장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이 천하의 백성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인인 효자(仁人孝子)가 부자 형제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궤자(荷簣者)는 잔인한 사람임을 알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인은 천하에 한 사람이라도 덕화를 입지 못하거나 한 물건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신의 몸 한 부분이 아파서 당기고 찌르는 통증을 느끼듯이 한다.” 하였다. 이에 선생은 주(周)의 제도를 자세히 연구하여 당시의 급선무를 환히 알았다. 비록 초야에서 곤궁하게 살았지만 생민을 위하는 생각은 항상 간절하여, 언제나 흉년으로 떠돌아다니는 백성의 참상을 말할 적에는 눈물을 흘렸으며, 출입할 때 쉬는 곳마다 반드시 주민들의 생활을 묻고 병폐를 들으면 탄식하며 떠나지 못하였다. 일찍이 선생은 마을에 양식이 없어서 농사를 그르치는 것을 근심하여 사창(社倉)을 만들어 구제하였고, 또 요역(繇役)이 매우 자주 있어서 유리하는 호구(戶口)가 있으면 돈을 동리에 희사하여 대신 바치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맹자(孟子)의 가슴에는 언제나 ‘백성’ 두 자를 잊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 강령이 없기 때문에 성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 전제(田制)를 시행했으나 근고(近古)에 와서는 한정된 민전(民田)과 명전(名田)만이 있었을 뿐이니, 고려 시대와 같이 전답을 모두 관에 소속하게 하니, 폐단이 마침내 전호(佃戶)에 이르게 되었다. 국조(國朝 이조를 가리킴)에는 일체를 백성에게 소속하게 하니, 말류의 폐단이 또 겸병(兼倂)하는데 이르렀다. 지금에 이것을 개혁하려면 공전(公田)의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하였다. 다시 이르기를, “많이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것은 사창(社倉)보다 좋은 것이 없고,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루는 것은 향약(鄕約)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병농(兵農)을 하나로 하는 것은 부병(府兵)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국토를 수비하는 정책은 보루를 쌓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데, 우리나라 해읍(海邑)은 더욱 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의 정치론은 언제나 어진 이를 임용하고 재능 있는 자를 부리는 것을 선무로 삼았으며, 인재를 배양하는 방법은 사부(詞賦)로써 선출하지 말고 옛날의 빈흥(賓興) 제도를 회복하자고 하였다. 만약 근본을 말한다면 착한 것은 아뢰고 사특한 것은 막아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깊은 식견과 경륜이 강설(講說)에 나타난 것이니, 모두 간곡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은 재덕(才德)이 이미 넉넉하였고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스승도 없이 도에 나아가기를 용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한창 도에 마음과 뜻을 쏟을 적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도 잊은 채 몰두하여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혜가 나라를 다스릴 만하고 인(仁)으로 지켰으며 근본이 확립되어 덕이 온전하였다. 효제(孝悌)는 천륜(天倫)을 다했고 충신(忠信)은 도를 다했으며, 부귀와 빈천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사생(死生)ㆍ화복(禍福)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은 나이가 더욱 많아지면서 내면에 쌓인 것도 더욱 성하였으니, 자연스럽고 너그러워 서툴게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없었고 높고 깊으며 넓고 넓어서 그 언덕 끝을 볼 수 없었다. 선생은 몸이 점점 쇠하고 병드는데도 ‘도리는 한계가 없으며 기욕(氣欲)은 타기 쉽고 본심(本心)은 보전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쓰기를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였고, 겸손하기를 얻지 못할 것처럼 하였으며, 두려워하기를 하루아침에 죽을 것같이 하였다. 그가 이룩한 것은 대개 안존(安存)하고 완성하였지만 그의 마음을 헤아리건대 끝이 없다 하겠다. 대개 선생의 학문은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로 근본을 삼고,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으로 주(主)를 삼았다. 그런 다음 경사(經史)에 미처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으며, 주자를 공자 후의 일인자라고 여겨 경서의 전주(箋註 주석)를 위시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까지 부모처럼 사랑하고 신명처럼 공경하였다. 이어 《송자대전(宋子大全)》을 읽었는데, 정주(程朱)의 전체와 춘추(春秋)의 대용(大用)이 이 책에 있음을 보고는 시조리(始條理)와 종조리(終條理)가 참으로 주자 이후의 정종(正宗)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존숭하고 심복하기를 주자에 다음가게 하였다. 그 문로(門路)의 정대함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지행(知行) 공부가 경(敬)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니, 시대는 주자ㆍ송자와 다르지만 사실은 서로 부합하는 것이다. 그 심(心)과 명덕(明德)을 논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정자(程子)의 ‘명명덕(明明德)은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한 것과 ‘심(心)ㆍ성(性)ㆍ천(天)은 모두 한 이(理)다.’라고 한 말과, 《계몽(啓蒙)》의 ‘심(心)은 태극(太極)이다.’와 《통서(通書)》의 ‘인심(人心)은 태극(太極)의 지령(至靈)이다.’고 해석한 말로써 정론을 삼아 한 말로 단정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易)이란 것은 도(道)와 형기(形器)를 합하여 이름한 것이므로, 도의 일변(一邊)만을 가리키면 태극이라 말하고, 심(心)이란 것은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이름한 것이므로, 이의 일변만을 가리키면 본심(本心)이라 한다. 도심(道心)ㆍ주재(主宰)ㆍ천군(天君)ㆍ기수(氣師)ㆍ명덕(明德)ㆍ본원(本源)ㆍ본체(本體)ㆍ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는 것들은 모두 이(理)의 일변만을 말한 것이다. 만일에 기(氣)의 일본(一本)으로서 담일청명(湛一淸明)한 것을 본연지심(本然之心)에 해당시켜 명덕(明德)의 뜻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태극(太極)의 동정(動靜)을 논하여, “주자(朱子)는 분명히 말하기를 ‘태극은 동(動)하여 양(陽)을 생하고 정(靜)하여 음(陰)을 생한다. 만일 태극이 동정함이 없어 동정을 전적으로 기기(氣機)에만 의존한다면, 태극은 공적(空寂)에 빠지고 기기(氣機)가 멋대로 하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지의 사이에 기기만 있으면 족하지 태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시를 읊기를, 내려왔다 올라갔다 풍판이 작동하니 / 一低一昻鼓風板 기아가 풍판에 있다고들 하네 / 爭道機牙在板身 이 물건 누가 주장하느냐 물으면 / 若問主張斯物者 이 위에 밟는 이가 있다고 하오 / 上頭元有踏機人 하였다. 그리고 사칠론(四七論)ㆍ성정중화설(性情中和說)ㆍ인물성동이변(人物性同異辨)에 대해서는 모두 선배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었는데 선생이 모두 한 말로 분석하여 동이(同異)ㆍ득실(得失)을 그 극치까지 밝혔으며, 제왕(帝王)의 소목(昭穆)의 차서를 논함에는 승통(承統)을 중시하고 사속(私屬 생가를 가리킴)은 끊었으며, 《춘추》의 존양지의(尊攘之義)를 논함에는 오랑캐와 중화를 구별하고 향배(嚮背)를 밝혔는데, 때로는 전현(前賢)들이 다하지 못한 뜻을 밝혔으니 문집에서 충분히 상고할 만하다. 《주역》에 대해서는 《전의동이석의(傳義同異釋義)》를 지었고, 주자의 글에 있어서는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와 《집차(集箚)》를 지었으며, 정자(程子)의 글에 있어서는 《집의(集疑)》가 있다. 또 나정암(羅整菴 명(明) 나라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취하여 하나하나 그 잘못을 지적하고 변증하였는데 《곤지기기의(困知記記疑)》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이르기를, “원(元) 나라가 오랑캐로 중국을 더럽혔는데도 《속강목(續綱目)》에는 그를 크게 써서 황제라 칭하여 정통을 주었으니 이후 만세에 오랑캐를 엄하게 방어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문인 유중교(柳重敎)를 시켜 《송원사강목(宋元史綱目)》을 편찬하였는데, 원(元)의 왕통을 삭제하여 참칭(僭稱)한 나라의 예에 의하게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고려 때부터 점점 오랑캐에서 중화로 변한 사실이 있으며, 중국이 멸망되고 서양 오랑캐가 혼잡을 피우는 이때에 있어서는 그 위치가 마치 《주역》 박괘(剝卦) 상구효(上九爻)의 일양(一陽)과 같으니, 마땅히 서두(書頭)에 그를 표하여 써서 백대에 밝게 알리어 사방의 오랑캐들에게 법을 보여야 한다.” 하고, 매년 기원(紀元) 아래에 고려 연대(年代)를 두 줄로 쓰고 우리 역사를 간략하게 기재하도록 하고는 총괄하여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김평묵(金平默)에게 명하여 함께 그 서법을 정리하고 취지를 밝히도록 하였으니, 이 몇 가지 일은 모두 천고의 큰 업적이었다. ‘중국의 도가 망하면 이적(夷狄)과 금수(禽獸)가 이르게 된다. 북쪽의 오랑캐는 이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서양 금수는 말할 것조차 없다.’ 생각하여 이에 생명을 걸고서 그들을 공격하였으며, 앞으로 그 화가 만연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양의 역법(曆法)ㆍ산수(算數)ㆍ의약(醫藥)ㆍ기물(器物) 등의 교묘한 것은 중국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자, 선생은 변론하기를, “이들의 장점은 벌레나 물고기의 편벽된 지식과 왜곡된 식견에 불과한 것이다. 꿀벌은 꿀을 만들지만 역아(易牙 제 환공(齊桓公)의 환관(宦官)으로 음식 요리를 잘함)는 꿀을 만들지 못하고, 교어(鮫魚 고기처럼 물속에 사는 인어(人魚)로 비단을 잘 짠다고 함)는 비단을 짜지만 노반(魯般 노 애공(魯哀公) 때의 교장(巧匠)은 비단을 짜지 못하니, 이것은 어찌 그 지혜가 꿀벌과 교어보다 부족해서겠는가. 벌레나 물고기는 어디까지나 벌레와 물고기요, 인류(人類)는 어디까지나 인류인 것이니 혼합하여 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하였다. 그리고 또 이르기를, “서양 오랑캐가 반드시 그 술책을 전파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켜 널리 내응(內應)을 맺어서,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할 것이다. 지금 천하는 서양에 중독된 지가 오래여서 의복ㆍ음식ㆍ성악ㆍ기물들이 모두 섞이어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몇 해 못 되어 어육(魚肉)의 참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당시는 식자층도 지나친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얼마 후 천하의 화가 과연 이와 같이 말할 수 없게 되니, 사람들은 모두 그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상수(象數)ㆍ율려(律呂) 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연구를 거듭하여 홀로 대의를 깨우쳤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문인들이 그 유고를 수집하여 문집 수십 권을 만들고, 다시 대체(大體)에 큰 관계가 있고 인용에 절실한 것을 골라 《화서선생아언(華西先生雅言)》이라 이름하였는데, 대개 12권 36편이었다. 선생은 고령 박씨(高靈朴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의 아버지는 박최환(朴最煥)으로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용담 현령(龍潭縣令) 박세호(朴世豪)의 후손이다. 선생의 벼슬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는데, 정숙하고 유순하여 내조(內助)에 결함이 없었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맏아들 이준(李埈)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문장과 학식이 사류(士類)에 우뚝하였고, 차남 이박(李墣)은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감역을 지냈고 3남 이소(李塐)이며, 딸들은 장회진(張會鎭)ㆍ김재룡(金在龍)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손자 이종억(李鍾億)은 이소(李塐)의 아들인데 과방(過房 조카가 양자로 들어가는 것)하여 이준(李埈)의 아들이 되었으며, 이종설(李鍾卨)은 이박(李墣)의 정실 아들이며, 이종순(李鍾順)ㆍ이종현(李鍾顯)과 김의현(金儀鉉)의 처는 첩의 소생이다 이소(李塐)는 족자(族子) 이종직(李鍾直)을 양자로 삼았으며 이승조(李承祖)는 종억의 아들이다. 내외(內外)의 증손ㆍ현손(玄孫)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 대체로 인류가 세상에 있은 후부터 도가 천하에 의탁된 것이 3단계를 겪었다. 1단계는 상고 시대이니, 도가 위로 임금에게 있어 선정(善政)을 하였으니, 이는 복희씨(伏羲氏)로부터 주공(周公)까지이다. 2단계는 중고(中古) 시대로, 도가 아래로 신하에게 있어 진유(眞儒)가 나왔으니, 이는 공맹(孔孟)ㆍ정주(程朱)들이다. 3단계는 근대이니, 위로 임금이나 아래로 신하에게 도가 없고, 도가 외국(중국을 주로 삼아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에 있었으니, 송자(宋子 송시열을 가리킴)가 바로 그분이다. 송자의 학문은 율곡[石潭]을 할아버지로 하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를 아버지로 하여, 주자의 체용(體用) 전부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훌륭한 광렬(光烈)이 옛 성인과 나란히 짝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문헌(文獻)이 떨어지지 않았고 백여 년 후에 다시 선생이 나와 그 체용의 전체를 인하여 아주 정미한 데까지 연구하여, 학문은 이(理)를 주로 하는 것으로써 종지(宗旨)를 삼았고, 사업은 서양을 배척하는 것으로 대의(大義)를 삼았다. 그리하여 근본이 성대하였으므로 발현이 무궁하였다. 그 정신과 기백의 품부받은 것이나, 그 정사와 예의를 마땅하게 행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선생은 세대에 드문 진유요 사문(斯文)의 정종(正宗)이지, 결코 작은 나라의 일시적인 유현(儒賢)이 아닌 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당시 식자들은 혹 선생을 ‘천민(天民 천리(天理)를 온전하게 다한 사람)이요 왕좌(王佐)이다.’라고 일컬었다. 이어 생각건대, 익현(益鉉)이 선생의 문하에서 교화를 받은 것이 오래지 않고 또 재질도 가장 용렬하여 선생의 성덕을 형용할 수 없는데, 지금 길이 전할 신도비 건립에 외람되게도 비문의 위촉을 받았다. 그러나 끝내 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삼가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비문을 엮었다. 그러나 선생의 덕행이나 사업에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 이어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시어 / 天眷我東 정도를 창성시켰네 / 正道以昌 율곡의 경과 우암의 직은 / 潭敬巴直 사실은 주자를 계승하였네 / 實纘紫陽 진실로 선생께서는 / 允矣先生 몇 세대 만에 나시었도다 / 間世而作 뛰어난 호걸의 자질로 / 挺豪傑姿 성현의 학문을 체득하였네 / 躬聖賢學 경을 주로 하고 이를 밝히며 / 主敬明理 도로써 물을 다스리어 / 以道宰物 체용이 서로 틈이 없고 / 體用相㴠 현미가 오직 하나이었네 / 顯微惟一 마음에는 도기가 있으니 / 心有道器 비유하면 장수와 역도 같고 / 譬如帥役 기에서 이, 욕이 나누어지니 / 幾分理欲 비유하면 아들과 도적 같네 / 譬如子賊 존비의 위치를 바로잡고 / 尊卑正位 명토함이 어긋나지 않았네 / 命討靡忒 이 법칙 아니었다면 / 有不斯程 천지는 번복되었으리 / 天地變易 지가 미치고 인으로 지켜 / 知及仁守 투철하고도 소상하였네 / 透徹融貫 그 입을 누가 막으랴 / 誰髠其口 나는 힐난할 수 없네 / 莫我能難 동쪽 언덕을 배회하면서 / 婆娑東崗 몰라주는 것 후회 않았네 / 不悔不知 벼슬 내리면 사양을 하니 / 一命而傴 숨어 살기를 더욱 깊이 하였지만 / 其遯益肥 근심하는 바 있었으니 / 所憂則有 자나 깨나 백성이었네 / 寤寐斯民 주관이 아무리 옛것이나 / 周官雖古 지금에 시행할 수 있다고 / 謂今可新 전제설(田制說)과 / 田制之說 여족도(閭族圖)를 / 閭族之圖 찬란하게 윤색하여 / 玲瓏潤色 정사에 베풀 만하였네 / 可以措諸 금상이 등극한 처음에 / 際上初服 추천되어 나라의 은총 입었네 / 薦被龍光 드러난 용이 밭에 있으니 / 見龍在田 조야는 눈을 씻고 기대하였네 / 朝野拭望 문석에서 옷차림 바르게 하고 / 文石攝齊 한 말씀 뜻이 깊었네 / 旨哉維言 백성들은 두 손 모아 축원하고 / 民皆手攢 적은 듣고 간담이 서늘하였네 / 賊聞膽寒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니 / 謝疾東還 그 경륜 쓰여지지 못하였네 / 其蘘遂括 한가로이 살다 여생을 마치니 / 寬樂令終 해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하네 / 日光玉潔 다행히 이 도를 보존하여 / 幸玆道存 백세 후 성인을 기다리네 / 百世可竢 성리의 본말 / 性理源委 학문의 주지 / 學問主旨 한ㆍ식ㆍ존ㆍ양 등 / 閑息尊攘 대의 수십 가지이네 / 大義數十 그 책이 집에 가득하니 / 其書滿家 남긴 빛 찬란하여라 / 遺光燁燁 공맹의 도를 전수하고 / 尼輿傳授 주송의 학을 넓혔네 / 朱宋張皇 시대가 더욱 어려웠으니 / 時則尤難 그 공로 잊을 수 있으랴 / 功何可忘 천민이요 왕좌라 / 天民王佐 식자들은 모두 칭찬하네 / 有識公譽 후세에 현인이 나오더라도 / 後賢有作 내 말을 아첨이라 하지 않으리 / 庶曰匪諛 華西李先生神道碑銘 幷序 先師華西李先生易簀之粤三十一年戊戌。門人月城崔益鉉。以重菴金公平默狀。爲牲石之文。授先生曾孫承祖而刻之曰。嗚呼。天之憂患斯世。可謂至矣。夫世不能無治亂。而其亂也則必生一大人君子。而擬其時以爲已亂之本。周衰生孔子。宋明之末。生朱宋兩夫子。是其驗也。及夫西邪橫行。將有翻覆天下。魚肉生民之。則必生我先生於海外東偏之邦。俾任攘斥之功。而爲萬世一治之基。嗚呼。是豈偶然而已哉。先生諱恒老。初諱光老。避哲廟私親嫌名而改之。字而述。世居楊根之蘗溪里。里在靑華山西。故學者稱華西先生。鼻祖曰忩言。佐高麗太祖。以開國勳。封碧珍將軍。子孫因籍碧珍。世有顯人。至我成廟之世。有諱約東。以經行淸白。文武全材。仕至知中樞。謚曰平靖。於先生爲十世祖也。曾祖諱泰亨。知中樞府事。祖諱聖復。贈吏曹參議。考諱晦章。號友鹿軒。贈吏曹參判。兩世榮貤。以先生貴也。妣全義李氏。諱義集之女。以健陵壬子二月十三日生。先生祖妣申夫人。素有識鑑。撫曰此兒必大吾家。可善敎之。稍長。自能知學。友鹿公知爲遠器。手書白鹿洞講䂓而與之。九歲。有一長老言。天地間。只有一箇氣。先生遽曰。恐只是一箇理。滿座大驚。幼治擧業。赴泮試。聲譽大振。有時宰。使人相要。先生不悅。卽日東還。旣勝冠。入砥平。拜竹村李先生友信。竹村叩其所學。曰。吾畏友也。遂傾倒論說。先生自此。益聞義理之要。純廟丙子以後。連遭內外艱。服闋。盡棄俗學。專用力於求仁爲己之工。遠近聞風。翕然尊之。負笈而至者。日盈其門。時先生年將三十矣。益收斂不形。足不出洌水以西一步地。戚臣有欲引爲己用者。嚴辭斥之。遂不敢復言。憲廟庚子。別薦經行之士。銓曹以先生爲首。授徽慶園參奉。不就。日與學者。講服經禮。嘗定學䂓。用朱子讀書次第。排課嚴密。每月一會。會者常百餘人。先生與諸生講說。神采動人。遇義理肯綮處。輒攬物取譬。剖析痛快。如生龍活虎。以故雖蒙學鈍根。莫不聳然神爽。有所感悟。又著講戒一通。每講訖。令善讀者。抗誦一遍。戒凡十數條。其卒以北虜毁裂衣冠。西鬼蠱惑心術。當挺身立脚。明心張目。不墜聖贒之敎。父祖之業。惓惓而提諭之。壬戌逆獄。先生名出亂招。先生不辭廟而就囚。供對明白。言辭從容。事尋已。甲子。今上卽位。大臣筵白行義。由掌苑署別提。轉全羅道都事。連授司憲府持平掌令。其爲持平也。先生以屢叨恩命。不可泯默無一言之辭。卽治一䟽。乞刊仕籍。附陳心學說。以爲初服貽命之地。旣而徑遞不果上。丙寅洋寇。陷江都。留守李寅夔。張皇賊勢。棄城而遁。時恬嬉日久。不識兵革。百姓皆鳥獸散。士大夫有或言乞和。又或言去豳者。廟議請召先生。卽除同副承旨。有旨促召。先生業欲奔問。及聞命。卽到闕外。上䟽辭職。附陳所懷。言洋賊可攻不可和。又言戰守常經也。去豳達權也。常經人皆可守。達權非聖人不能。仍請亟下哀痛之敎。以鼓發四方之情。繼言敬大臣。開言路。任贒能。遠庸邪。停土木。去奢侈等事。以爲如此然後。洋賊可逐。國家可保。無土崩瓦解之勢矣。上優批。牌招不止。先生乃肅謝登對。袖進小箚。請上勉學正心。建立大本。仍論節制將帥之非。尋陞工曹參判。差政府堂上兼副摠管。三上䟽辭。時上用先生言。誕告中外。以戰守爲正論。先生附陳曰。仁言。不如仁聲之入人深。如罷土木。禁聚斂。從諫用贒。此所謂仁聲也。又因前䟽信賞必罰之說。以爲懷利忘義。偸生苟免者。不可以不誅。時大臣三司。請誅寅夔。上皆不從。故䟽中及之。又言洋夷之。如洪水猛獸。若不拔本塞源。雖有善者。亦無如之何矣。凡服食器用。一有洋物。介於其間。則悉行搜出。聚燒闕庭。昭示好惡之有在。又以是警動於宮闈宗戚朝廷百姓而莫不從志。則身修家齊國正而交易之事絶矣。交易之事絶。則彼之奇技淫巧。不得售矣。奇技淫巧不得售。則彼必無所爲而不來矣。此與誅捕征伐。本末相資。不可不加之意也。上例批。先生見言不蒙施。卽上四䟽陳病。旣遞。旋除同知義禁府事。遂䟽陳病狀。申言役斂不息。賞罰失宜。禁絶洋物等事。亦賜例批。於是士類。或咎先生輕身而出。言不用又不卽退。使朝廷益輕賢者。先生曰。國家危難。有奔問之義。而以子思如某去。君誰與守。孟子有師命。不可以請之義觀之。則冦退之前。遽爾告歸。終有所未敢也。旣而門人梁憲洙。以廵撫千揔。擊賊於鼎足山城却之。報至。先生留䟽。陳懲毖之要。繼請復萬東廟。晨出東門遽還。先生旣去。國人莫不慨惋。前獻納朴周雲。副護軍朴奎瑞。皆上䟽。請復備禮延致。上不能用。丁卯。有經筵特進之命。戊辰三月十八日酉時。考終于正寢。是刻。有星隕地震之異。嗚呼。哲人之萎。豈小變哉。訃聞。賻祭如例。閏四月戊辰。塟于溪南鼎寶之西山巽坐原。先生嘗曰聖人不忍恝然於天下之民。如仁人孝子。不忍恝然於父子兄弟之親。以此知荷簣者。爲忍人也。又曰。聖人在天下。一人不服其化。一物不得其所。如四肢百骸。有一處窒塞。便覺刺楚牽痛。於是究觀成周之制。鍊達當世之務。雖窮居草澤。而惓惓以生民爲念。每說㐫荒流轉之慘。至於泫然流涕。出入所憇。必詢居民生理。聞有弊瘼。咨嗟不能去。嘗患鄕閭。糧絶失農。爲設社倉以賑之。又以繇役甚繁。戶有流亡。捐錢付本里。以資應給。謂孟子胷中。動不動不忘百姓二字。惟是無此本領。所以不能進於聖贒耳。又謂三代之後田制之近古。惟有限民名田。如麗朝之制田。皆屬公而其弊至於佃戶。至國朝。一切屬民。則其流又至兼幷。今欲更張。當用公田之法。又謂廣儲備荒。莫善於社倉。範民正俗。莫善於鄕約。兵農合一。莫善於府兵。又謂守望之政。築堡最善。我國海邑。尤不可緩。其論爲政。未始不以任贒使能爲先務。而培養人材之道。則在於罷詞賦之選。復賓興之舊。若言其大根本。則又在陳善閉邪。以正人主之心。此等蘊抱。見於講說之間者。莫不致懇惻焉。先生才德旣優。而少絶功令之累。不由師承。進道勇敢。方其專心致志也。窮晝夜忘寢食。俛焉孜孜。不知老之將至。然後知及而仁守。本立而德全。孝悌盡倫。忠信盡道。富貴貧賤。不能易其守。死生福。不能動其心。及夫年齡益卲。而充積益盛。則從容舒泰。而不見其生受。崇深廣博。而不見其涯涘。猶以衰疾有加而道理無限。氣欲易乘。而本心難保。亹亹乎如不及。謙謙乎如無得。惕惕乎沒齒如一日。觀其所至。盖亦安且成者。而測其心則可謂無窮已矣。蓋其爲學以小學家禮爲本。以大學語孟中庸爲主而後及於經史。循循有序。以爲朱子孔子後一人也。故自經書箋註。以至大全語類。愛之如父母。敬之如神明。繼得宋子大全而讀之。又見其洛閩全體。春秋大用。始終條理。實朱子後正宗。欽崇服習。亞於朱子。其門路之正如此。故其所以致知力行。而貫之以敬者。實異世而同符也。其論心明德。則常以程子明明德。明此理也。及心也性也天也一理之訓。啓蒙心爲太極。通書解人心太極之至靈等語。爲定論。乃一言以斷之曰。易者。合道與器而立名也。單指道一邊。則曰太極也。心者。合理與氣而立名也。單指理一邊。則曰本心也。曰道心。曰主宰。曰天君。曰氣帥。曰明德。曰本源。曰本體。曰天地之心之類。皆指理一邊而言也。若以氣之一本。湛一淸明者。當本然之心。而釋明德之義則失之矣。論太極動靜曰。朱子分明言太極便會動而生陽。靜而生陰。若太極無動靜。而動靜專仰於氣機。則太極淪於空寂。而氣機疑於專擅矣。然則天地間。只有氣機足矣。尙何待於太極乎。仍有詩曰。一低一昂鼓風板。爭道機牙在板身。若問主張斯物者。上頭元有踏機人。至於四七之論。性情中和之說。人物性同異之辨。皆前輩未决之案。而先生皆一言辨析。使同異得失。各極其趣。論帝王昭穆之序。則重承統而絶私屬。論春秋尊攘之義。則辨夷夏而明嚮背。往往有前哲未罄之旨。而散見於文集者。班班可攷矣。於易。著傳義同異釋義。於朱子書。有箚疑輯補及集箚。於程子書。有集疑。又因羅整菴困知記。條辨其謬。所謂困知記記疑者。是也。謂胡元穢華。續綱目大書稱帝而予之。非所以嚴萬世之防也。命門人柳重敎。修宋元史綱目。削元統。依僭國之例。因言我東。自高麗漸有變夷之實。而其在神州陸沉。西洋昏墊之時。正如剝上一陽。又當表章於始。以昭布百代。示法四裔也。令每歲紀元之下。分注高麗之年。而附載國史之略。總名曰宋元華東史合編綱目。又命金平默共之。整其書法。發其指趣。是數者。皆千古之大業也。謂中國之道亡。則夷狄禽獸至。北虜夷狄也。猶可言也。西洋禽獸也。不可言也。於是捨性命而討之。極言來頭害之蔓延。或謂曆筭醫藥器物之精巧。非中國之所及者。先生辨之曰。此其所長不過蟲魚之偏智曲見。如蜜子造甘。非易牙所及。鮫魚織錦。非魯般所能。豈其智不若耶。蟲魚自蟲魚。人類自人類。不可合而同之也。又曰。洋夷之必欲傳播其術。將以誑惑愚氓。廣結內應。以恣行其所欲耳。今天下中毒已久。如衣服飮食聲樂器玩。皆泯然相雜。而不之悟。不幾年。將見魚肉之慘矣。當是時。雖識者。亦以爲過憂。已而天下之果至。不可勝言。然後皆服其先見焉。至於天文地理象數律呂。皆反復推究。而獨得其大義矣。盖先生旣沒。而門人裒集其遺書。爲文集數十餘卷。又採其關於大體而切於日用者。名曰華西先生雅言。凡十二卷三十六篇。先生娶高靈朴氏。考最煥。己卯名贒籠潭世豪之後。從封貞夫人。貞淑柔嘉。內政無缺。生三男二女。男埈。成均生員。文章學識。冠絶士類。墣。薦學行。爲監役。塐。女適張會鎭,金在龍。孫男鍾億。塐出。過房爲埈後。鍾卨。墣出。鍾順,鍾顯,金儀,鉉婦。其側出也。塐取族子鍾直。爲後。而承祖。卽鍾億出也。內外曾玄。多不能盡記。嗚呼。盖自生民以來。道之託於天下。有三截焉。上古道在於上。而善治興焉。自庖犠。至周公。是也。中古道在於下。而眞儒作焉。自孔孟。至程朱。是也。下代上下無道。而道在於外國。則宋子其人也。宋子之學。祖乎石潭。禰乎沙溪。而得朱子體用之全。故耿光大烈。配古聖哲。自是厥後。文獻不墜。百餘年之下。又得先生。因其體用之全。而究其精微之蘊。學問則以主理爲宗旨。事功則以斥洋爲大義。是以根本盛大。而其出無窮。其或精神氣魄之禀。涖莊動禮之懿。雖未知竟如何。而要亦爲曠世之眞儒。斯文之正宗。非直褊邦一代之儒賢也審矣。故當時有識。或稱之以天民王佐。蓋亦庶幾焉。仍念益鉉在門下。薰德未久。且最庸下。旣不足以形容盛德。而今於墓道萬年之役。猥承見託。有所不敢終辭者。謹就原狀。節次爲文。然於先生之德行事功。盖萬不及擧一云。銘曰。 天眷我東。正道以昌。潭敬巴直。實纘紫陽。允矣先生。間世而作。挺豪傑姿。躬聖贒學。主敬明理。以道宰物。體用相涵。顯微惟一。心有道器。譬如帥役。幾分理欲。譬如子賊。尊卑正位。命討靡忒。有不斯程。天地變易。知及仁守。透徹融貫。誰髡其口。莫我能難。婆娑東崗。不悔不知。一命而傴。其遯益肥。所憂則有。寤寐斯民。周官雖古。謂今可新。田制之說。閭族之圖。玲瓏潤色。可以措諸。際上初服。薦被龍光。見龍在田。朝野拭望。攝齊文石。旨哉維言。民皆手攢。賊聞膽寒。謝疾東還。其囊遂括。寬樂令終。日光王潔。幸玆道存。百世可竢。性理源委。學問主旨。閑息尊攘。大義數十。其書滿家。遺光燁燁。尼輿傳授。朱宋張皇。時則尤難。功何可忘。天民王佐。有識公譽。後贒有作。庶曰匪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