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다드의 서, 제29장 샤마담이 동행자들을 자기 편으로 삼으려고 애쓰다.
겨울이 찾아왔다. 깊이 쌓인 눈은 하얗게 빛났으며, 추위는 살을 엘 정도였다.
눈 덮인 산들은 소리 없이, 숨조차 쉬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래쪽은 계곡만이 여기저기 빛 바랜 초록빛으로 변한 부분과 함께 꼬불꼬불 바다로 향하는 은빛 물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곱 사람은 번갈아가며 찾아오는 희망과 물결과 의심의 물결에 희롱당하고 있었다. 미카욘, 미카스터, 자모라는 스승이 약속대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에 마음이 기울었다. 벤눈, 힘발, 아비말은 스승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두려움과 지독한 허무감을 느꼈다.
방주는 춥고 우울했으며 마음까지 황량하게 했다. 서리 같은 침묵이 방주의 벽에 걸려 있었다. 샤마담은 방주에 생기와 따뜻함을 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헛수고였다. 미르다드가 끌려간 뒤, 샤마담은 우리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우리에게 최고급의 음식과 술을 제공했으나, 음식은 살로 가지 않았고 술도 활기를 주지 못했다. 장작과 석탄을 많이 땠으나, 그 불도 따뜻함을 주지 못했다. 외관상으로 그는 지극히 예의 바르고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그의 예의와 애정은 점점 더 그를 우리한테서 멀어지게 했다.
오랫동안 샤마담은 미르다드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마음을 열고 말했다.
“내가 미르다드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동행자들이여, 그건 오해다. 오히려 나는 온 마음을 기울여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미르다드는 사악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공상가다. 이 엄연한 사실과 실천의 세계에서 그가 가르치는 교의는 전혀 실제적이 못 되는 거짓이다. 미르다드와 그의 신봉자들은 가혹한 현실과의 첫 충돌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마련이다. 이 일에 대해서 나는 완전히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파국으로부터 나의 동행자들을 구해내고 싶었다.
미르다드는 젊기 때문에 대담하고 활력 넘치는 능숙한 말솜씨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맹목적이고 완고하며 신앙심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참된 신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경험으로 걸러진 내 판단에는 무게와 권위가 갖춰져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말고 누가 방주를 이토록 풍요롭게 운영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나는 그대들의 형이자 아버지 아니던가? 우리의 정신은 평화의 축복을 받고, 우리의 손은 엄청난 풍요의 축복을 받지 않았던가? 어째서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쌓아올린 것을 이방인이 파괴하게 하고, 신뢰가 이끌던 곳에 불신을 심고, 평화가 지배하던 곳에 투쟁을 심는단 말인가?
나의 동행자들이여, 나무에 앉은 열 마리 새 때문에 손 안에 있는 한 마리 새를 놓는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다. 미르다드는 그대들에게 이 방주를 놓아 버리도록 만들 것이다. 방주는 오랜 세월을 걸쳐 잠자리를 제공하고, 신을 우리 가까이 있게하고, 인간이 바라는 것을 주고, 세상의 고민과 소란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우리를 숨겨 주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마음의 고통과 빈곤, 좌절과 낙담, 게다가 끝날 줄 모르는 투쟁..... .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것을 그대들에게 약속한다.
그가 약속하는 것은 공중의 방주, 광대한 무(無) 속의 방주. 이것은 미친 자의 꿈이고 어린애 같은 공상이다. 기분은 좋으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만에 하나 최초에 방주를 만든 조상 노아보다도 현명하겠는가? 그대들이 그의 실없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상기한다면 나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다.
내가 벗인 베타르 왕자의 거대한 힘에 미르다드를 고발했을 때, 나는 방주의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 죄를 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깊이 마음을 쓴 것은 그대들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내가 범한 죄를 정당화해 준다. 내 소망은, 더 늦기 전에 그대들과 방주를 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나와 함께 있기에 나는 그대들을 구했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 동행자들이여, 방주의 파멸을 죄 많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커다란 치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주께 감사하라. 나 역시 그 중 한 명으로 그런 치욕을 겪으면서 계속 살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삼 다시 노아의 신과 방주에 대한 봉사, 그리고 그대들에 대한 봉사에 나 자신을 바칠 작정이다. 사랑하는 나의 동행자들이여, 그대들을 나처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대들 속에서 나의 행복이 완성될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하면서 샤마담은 울었다. 그 눈물은 너무도 고독한 그였기에 애절해 보였다. 우리들 어느 누구의 마음에서도, 어느 누구의 눈에서도 벗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울한 날씨가 오랫동안 계속된 뒤, 오랜만에 햇빛이 산을 비추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자모라는 하프를 들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하프의
동상 걸린 입술이 부르는 노래는 얼어붙고,
내 하프의
얼음에 갇힌 마음으로는 얼음에 갇힌 꿈을 꾸네.
네 노래를 녹여 버리는 숨결은 어디에 있는가.
오, 나의 하프여.
네 꿈을 구원하는 손은 어디에 있는가.
오, 나의 하프여.
---베타르의 지하감옥 속에 있다오.
구걸하는 바람이여,
가서 노래를 구걸해 오렴.
베타르의 지하감옥에 있는
쇠사슬의 노래를.
교활한 햇빛이여,
가서 꿈을 훔쳐다 주렴.
베타르의 지하감옥에 있는
쇠사슬한테서.
내 독수리의 날개가 넓은 하늘에 활짝 펴졌을 때,
그 하늘 아래서 나는 왕이었지.
그러나 이제 난 천하의 떠돌이자 외톨이일 뿐,
나의 하늘은 올빼미가 지배한다.
내 독수리는 둥지에서 날아가
멀리 베타르의 지하감옥으로 갔기 때문에.
눈물이 자모라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의 손은 힘없이 축 늘어졌으며, 고개는 하프 위로 푹 숙여졌다. 그의 눈물은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우리의 슬품이 빠져날 곳을 마련해 주었고, 우리들 눈은 물줄기를 열어 주었다.
미카욘이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숨이 막힌다!’고 소리쳤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모라와 미카스터와 나는 그를 따라 뜰 안을 가로질러 거대한 포위벽(包圍壁)에 달린 문에까지 이르렀다. 거기서부터는 동행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미카욘은 무거운 빗장을 단숨에 휙 당겨 황폐해진 문을 열어 젖히고, 마치 우리에게 풀려난 호랑이처럼 달려 나갔다. 우리 세 사람은 미카욘을 따랐다.
태양은 따뜻하고 밝았다. 햇빛은 얼어붙은 눈에 반사되어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우리 앞에는 눈 덮인 민둥산들이 넘실넘실 물결치고 있었다. 모두가 빛의 환상적인 색조 탓으로 활활 타는 듯이 보였다. 주변 일대는 아주 고요했다. 귀를 곡혹스럽게 할 만큼 완전한 정적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발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공기는 비록 살을 찌를 듯이 차가웠지만 우리들의 폐를 애무하듯이 다가와 우리는 그 공기를 지극히 달게 받아들였다.
미카욘의 기분도 바뀌었다. 그는 멈춰 서서 소리를 질렀다.
“숨쉰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다. 아아, 단지 숨쉬는 것만으로도!”
정말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유히 숨쉬는 기쁨을 느꼈으며, 처음으로 숨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얼마 동안 걸은 뒤, 미카스터가 멀리 높은 재대에서 시커먼 것을 발견했다. 어떤 이는 그 물체를 고독한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바람에 눈이 씻겨 내린 바위라고 생각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물체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듯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쪽을 향해 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 물체는 인간의 모습을 띠었다. 미카욘이 앞으로 펄쩍 뛰어 나갔다. 뛰어 나가면서 그는 소리쳤다.
“스승이다! 스승이다!”
정말 그 물체는 스승이었다. 스승의 부드러운 걸음걸이, 그 당당한 거동, 기품있는 얼굴. 짖궂은 바람이 스승의 펄럭이는 옷저고리와 숨바꼭질하고, 스승의 길고 검은 머리를 장난치듯 흩날리게 했다. 태양은 스승의 얼굴을 호박빛이 감도는 갈색으로 밝게 물들였다. 그러나 꿈꾸는 듯한 검은 눈동자는 예전처럼 불꽃을 튀기며 확신에 찬 평온함과 당당한 사랑의 물결을 보내고 있었다. 가죽끈으로 묵은 나무 신발을 신은 부드러운 발은 서리에 젖어 밝은 장밋빛을 띠고 있었다.
미카욘이 맨 먼저 스승에게 도착했다. 미카욘은 스승의 발 아래 엎드려 울다 웃다 하면서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제야 제 영혼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세 사람도 미카욘처럼 행동했다. 스승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한없이 다정하게 포옹했다. 그는 우리를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념의 입맞춤을 받아들여라. 이제부터 그대들은 신뢰 속에서 잠들고, 신뢰 속에서 깨어날 것이다. 의심이 베갯머리에 둥지를 틀지 않고, 망설임이 발걸음을 마비시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방주에 남아 있던 네 사람은 문 앞에서 스승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유령이라 생각해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스승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하자, 그들은 목소리를 알아듣고 스승의 발 아래 엎드렸다. 오직 샤마담만이 자기 의자에 기댄 채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스승은 앞의 네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세사람을 포옹하면서 똑같이 말을 했다.
샤마담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으며, 얼굴은 죽은 자처럼 창백했으며, 입술은 경련으로 떨었으며, 손은 어디를 둘지 몰라 허리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납죽 엎드려서 스승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 팔은 스승의 발 곁에 두고, 얼굴은 마루에 댄 채 몸을 벌벌 떨면서 “나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스승은 그도 일으켜 세웠지만 입을 맞추지는 않고 이렇게 말했다.
“샤마담의 건장한 몸을 떨게 하고, ‘나도 믿습니다’라고 말하게 한 것은 공포이다. 샤마담은 미르다드를 ‘검은 구덩이’와 베타르의 지하감옥으로부터 구출한 그 마술에 떨고 있는 것이며 마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샤마담은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다. 그리고 마음을 ‘참된 신념’ 쪽으로 돌리라.
공포의 물결 위에서 생긴 신념은 공포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신념은 공포와 함께 떠올랐다가 공포와 함께 가라앉는다. 참된 신념은 ‘사랑’의 줄기 외에서는 어디서도 꽃피지 않는다. 그 열매는 ‘이해’다. 만약 그대가 신을 두려워한다면 신을 믿지 말라.“
샤마담은 눈을 내리깔고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샤마담은 자신의 집에서 추방된 가엾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오늘만은 당신을 섬기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누가 식사와 따뜻한 옷을 갖고 오겠습니까. 오랜 여행 뒤에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을 당신에게.”
미르다드가 말했다.
“내겐 부엌에서는 알지 못하는 음식과, 양의 털이나 불의 혀에서 빌려오지 않은 따뜻함이 있다. 샤마담이 내가 가진 음식과 따뜻함을 많이 비축해 두고, 다른 음식이나 땔감은 적게 비축헤 두었으면 좋으련만.
보라, 바다는 겨울에는 산마루로 다가온다. 그리고 산마루는 얼어붙은 바다를 외투로 걸치는 것을 기뻐한다. 산마루에겐 바다의 외투가 따뜻하다.
바다 역시 산마루에서 잠시 동안 아주 조용하면서도 황홀하게 누워 있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분간이다. 봄이 오면, 바다는 겨울잠을 자던 뱀처럼 몸을 사리면서 일시적으로 저당잡혔던 자유를 회복한다. 그리고 바다는 다시 해안에서 해안으로 질주한다. 또 바다는 대기 속으로 올라 하늘을 떠돌다가, 어디든 내리고 싶은 곳에 자신을 흩뿌린다.
그러나 그 중에는 샤마담, 그대와 같은 인간도 있다. 그런 인간의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이며, 깨어날 줄 모르는 겨울잠이다.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어떠한 봄도 징조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보라, 미르다드는 봄의 징조. 미르다드는 생명의 조짐이지 조종(弔鐘)이 아니다. 이 이상 얼마나 그대는 동면하고 싶은건가?
믿어라. 샤마담이여, 인간의 삶과 죽음은 동면에 불과하다. 내가 온 것은 인간을 잠에서 흔들어 깨워, 그 소굴에서 불러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자유한테로 데려가기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를 위해 나를 믿으라.“
샤마담은 내내 서 있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벤눈은 나에게 스승이 어떻게 베타르의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는지 들어 보자고 속삭였다. 그러나 내 혀로는 그것을 여쭤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스승은 즉각 벤눈의 질문을 알아차렸다.
“베타르의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다. 그곳은 신전이 되었다. 베타르 왕자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니다. 이제 그는 그대들과 똑같이 갈망하고 희구하는 순례자다.
벤눈이여, 음울한 지하감옥조차 찬란한 등대가 될 수 있다. 오만한 왕자조차 진실의 왕관 앞에서 자신의 왕관을 버리도록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 그리고 절거덕거리는 족쇄조차도 천상의 음악을 낳을 수 있다. ‘성스러운 이해’에겐 그 어떤 것도 기적이 아니다. ‘성스러운 이해’ 만이 유일한 기적이다.“
베타르 왕자의 퇴위에 관한 스승의 말씀은 한 줄기 천둥처럼 샤마담을 때렸다. 더욱이 샤마담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경련은 너무나 기괴하고 격렬했기 때문에 정말로 그의 목숨을 염려할 정도였다. 마침내 그는 실신했으며, 우리가 오랫동안 간호하자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