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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독과 저항의 신학자 이신(李信)
{이신의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이은선, 이경 엮음. 종로서적, 1992)은 우리의 아버지요 스승이셨고,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던 한 슐리어리스트 화가로서 그렇게 길지 않았던 생을 사셨던 고 이신(李信) 박사의 유고집이다. 1981년 12월 17일 오산리 순복음기도원의 한 좁고 쓸쓸한 방에서 운명하신 후 벌써 1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여전히 그분을 아프게 기리는 마음에서 이 책을 준비하였다.
그는 1927년 12월 25일 전라남도 돌산에서 아버지 이봉선 씨와 어머니 유금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철저한 유교선비였던 그의 할아버지께서 이미 기독교에 입교하셨다고 하니 2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신 것이다. 그의 어머님, 우리 할머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소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으로 나와서 지금의 부산상고의 전신인 '부산초량상업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살아 생전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이때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당시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부산시립도서관의 미술에 관한 책을 거의 다 읽으셨다고 한다. 해방을 맞던 해에 우리 어머님(정애)과 만나서 혼인을 맺으셨다.
우리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이듬해에 한 커다란 결정을 하였는데, 즉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예술에 대한 탐구에서 얻어진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구는 그를 안정된 은행원의 자리에 묶어 둘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는 가지고 있는 미술 도구를 모두 팔아서 서울로 향하였다고 한다. 1946년 봄 냉천동의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해서 1950년 6.25가 발발되기 직전에 어렵게 졸업할 수가 있었다.
졸업 후 그는 먼저 한국감리교회의 전도사로서 충청도 전의로 첫 부임을 떠났다. 그러나 곧 이은 6.25의 발발로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 시기에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전환이라고 할 한 사건을 겪게 된다. 즉 그는 당시 충청남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뜨거운 성령의 바람으로 전개되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을 접하게 된 것이다. 모든 교파의 분열을 거두고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의 순결과 일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1951년 봄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서 안수를 받게 된 것이다.
1980년 경 {기독교대백과사전} 편집자 측의 청탁에 의해서 쓰여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라는 글에서 보면, 그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발을 한국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출발과 비슷한 것으로 본다. 즉 전자는 후자가 세계 교회사의 유례가 없이 선각자적인 한국 학자들(이 벽 등)의 진리 탐구열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발생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결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닌 바로 한국의 선각자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환원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로서, 1930년대 미국 시카고의 게레트(Garrett Biblical Institute)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고국에서 목회하던 중 다시 미국 순회 여행을 통해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접하게 되어 큰 깨달음으로 한국에서의 환원운동을 시작한 동석기 목사(1881-1972), 일본 관서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목가가 되어 경남 밀양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에 유학하던 중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하게 된 강문석 목사(1897-1944), 그리고 동학당과 구세군에로의 입교를 거쳐 거기서 백인 사관의 인종차별에 항거하여 탈퇴한 후 순수한 '기독교회'의 운동을 하다가 자신의 취지와 비슷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만나게 된 성낙소 목사 등 3인을 들고 있다. 그의 '그리스도의 교회'에로의 환원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즉 모든 인간적인 종파와 교권적 권위를 버리고 본래적이고 순수한 것에로 돌아가자는 그의 순수함과 근원적인 것에로의 열망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열망과 환원은 그 이후로의 그의 삶이 고난과 역경의 삶이 되게 한 주원인이 되었다. 이 환원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종래의 '이만수'(李萬修)에서 '이신'(李信)으로 고쳤다.
이상과 같은 역사를 가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50년대 초 광주 지방에서 김은석(金銀石) 목사 등의 뜨거운 '성경 연구회' 운동을 통해 만나게 된 아버지는 그후 부여로 부임하신다(1955년 경). 그러나 거기서 그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들의 성령 이해와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즉 미국의 환원운동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회복하고 초대교회에로의 환원을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그들이 서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너무 합리적으로 신앙의 영감적인 면이나 성령의 현재적인 역사 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한 성령의 체험을 통해 환원하게 된 그로서는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 오신 후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회장으로 계실 때 선포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에 보면, 이 부여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한국적" 교회, 선교사들의 외국 교회의 전통과 성서해석을 맹종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읽고 깨달은 대로 성서가 정말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신앙과 교회의 원형태를 추구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설립 노력을 뚜렷이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서구의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 물든 미국 그리스도 교회의 개교회주의와 메마른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유기체적 교회론"과 '성령 중심의 신학'을 추구한 그 나름의 기독교의 '한국 토착화'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 이후 잠깐 동안의 '서울 성서 신학교'에서의 활동, 그의 제2의 고향이 된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서의 목회 생활, 부산에서의 방송 선교 활동, 그리고 서울 돈암동에서의 목회와 대전 '한국 성서 신학교'와의 관계 등이 그가 1967년 미국으로 뒤늦은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의 활동이었다.
미국에서는 '네브라스카(Nebraska) 크리스찬 대학'에서 신학사를 다시 취득하셨고, '드레이크'(Drake) 대학원을 거쳐 한국 감리교회와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지도자들이 수학했던 내쉬빌의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원에서 1971년 8월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때 쓰셨던 논문이 "전위 묵시문학 현상 - 묵시문학 해석을 위한 현상학적 고찰"(The Phenomenon of Avant-garde Apocalyptic: Phenomenological Research for the Interpretation of Apocalyptic)로서 바로 자신의 모습과도 닮은 신구약 중간기의 창조적 소수인 '묵시문학자'들에 대한 연구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미국에서의 5년 여간의 시간이 그에게서 제일 안정된 시간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물론 부인과 네 명의 어린 자식들을 고국에 놓아두고 그들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던 고된 시간이었기는 했지만 그는 이 기간 동안에 많은 그림 창작도 할 수 있었고, 여러 번의 개인 전람회를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도 조달하면서 커다란 경제적인 위협없이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때 그린 그림들이 그의 귀국 후의 분실로 오늘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귀국 후 어려운 상황에서 그린 그림들과 도미 이전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
1971년 여름 한국 교회와 가족에 대한 강한 염려와 그리움으로 학위를 끝마치자마자 곧바로 고국으로 향하였지만,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후 10년 뒤 운명하기까지 철저히 겪었던 주변의 몰이해와 배척,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가난과 고독이었다. 처음 한국에 오셔서는 미국 유학시 밴더빌트 대학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화여대 서광선 교수의 주선으로 이화 여자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강의도 하셨고, 중앙신학교, 그리스도 신학대학에도 나가셨다.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인연을 맺었던 해천 윤성범 님의 '한국종교사학회'의 연구위원으로 관계를 갖기도 했고, 또한 그분의 배려로 몇몇 대학에 전임의 가능성이 타진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의 사정도 별로 다르지 않아 위에서 밝힌 한국적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향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는 곧 무산되었고, 귀국한 후 첫 부임한 삼선동의 '서울 그리스도의 교회' 임원들로부터의 철저한 배신, 그리고 1965년부터 관계를 맺어왔던 효창동의 '대한 기독교 신학교'에서는 실질적으로 시간 강사 정도의 대우만 받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재직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 장례식 절차에서 당시 그 학교에서는 그가 정식교수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학교장으로 모시는 것도 거절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1975년 여름 설상가상으로 이제까지 우리와 그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던 명륜동 산동네의 무허가 집이 시(市)에 의해서 철거되자 그와 어머니는 결국 다시 그들 젊은 시절의 개척지였던 충청도 산골의 소수교회로 내려가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고, 집이 철거된 후 비를 피하기 위해 얼기설기 판자를 엮어 묶었던 그 자리에서도 조그만 상을 펴놓고 책을 읽으셨다. 소수로 내려간 후 그는 부산으로 서울로 먼 길을 다니며 강의를 하였고, 그 극심한 수고로 당시 언니와 내가 이화 여자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가르치고 설교를 하셨다. 명륜동 산꼭대기의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을 모아 놓고도, 뒤쳐진 시골 교회의 교역자들과 변방 교단의 신학생들을 불러 모아서도, 또 돌아가시기 전 해에는 안양의 가난한 부녀자들과 노인들을 모아 놓고도 지성을 다해 설교하고 가르치셨다.
시골로 내려가셨다가 3년 여 만에 가까스로 서울 원효로의 고모네집을 거처로 삼아 이사하신 후 돌아가시기까지의 3년 반의 시간은 그에게 무척 소중한 것이었다. 1979년에 그가 참으로 존경하던 러시아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자이예프(N. Berdyeav)의 {노예냐 자유냐}가 '인간사'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1980년에는 그가 60년대 초 부산에서 방송 선교하셨던 원고들이 {산다는 것, 믿는 다는 것}으로 묶여져 나왔으며, 또한 당시 옛 동료였던 '하나님의 성회'의 한 목사님을 통해 '순복음 신학교'와도 인연을 맺어 거기서도 가르치셨으며 그 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에 "카리스마적 신학"이란 제목으로 그분의 일생 동안의 삶과 사고로 영글은 참으로 독창적인 성령의 신학을 그나마 표현할 수 있었다. 1981년 여름방학 동안 20여명의 신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남도 논산군의 산골 독뱅이 마을로 여름캠프를 떠나셨는데, 거기서 자신의 모든 혼을 살라 넣는 것 같은 희랍어 강의와 설교, 그리고 그가 당시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던 베르자이예프의 또 다른 저서 {인간의 운명}의 번역 등으로 열악한 식사와 주거 환경에도 불구하고 강행군을 하여 거기서 병이 발발되었다.
그후 운명하시기까지 4개월동안 YMCA에서의 여러 번의 공개강의, 극동방송에서의 설교, 그리고 그분의 마지막 글들인 "삶과 죽음," "이단이란 무엇인가" 등을 남기셨다. 베르자이예프의 {인간의 운명}은 그후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환 학장님의 수고로 완역되어 '기독교서회'에서 출간되었고, 그는 1981년 12월 17일 너무도 기이하게도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그의 장례날에는 무척 많은 눈이 내렸고 오늘 일산 기독교 공원 묘지에 누워 계신다.
2. 이신(李信)의 '슐리어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신의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이은선, 이경 엮음. 종로서적, 1992)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편의 부록이 첨가되었다. 제1부는 그의 학위 논문, "전위 묵시문학 현상 - 묵시문학 해석을 위한 현상학적 고찰"이 동생 경에 의해서 완역된 것이다. 이 제목이 잘 말하여 주듯이 이 논문은 우리에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종의 비전문학적인 신구약 중간기의 '묵시 또는 계시문학'(The Apocalyptic)의 의식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묵시문학은 모든 기독교신학의 모체였다"라고 한 독일 포스트 불트마니언 신약학자 E. 케제만(E. Kasemann)의 말을 인용하면서 후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거나 단지 주로 '외경'으로 분류되어 비의적인 문서로서 전달되어진 '묵시문학' 안에야 말로 기독교 등장의 열쇠가 담겨져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적 역동성이 여기에서 근원되었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즉 유대 묵시문학이란 바빌론 유수 이후 세계사적인 대변동의 시기였던 B.C 2세기경부터 형성된 것인데, 당시 정치적, 문화 종교적으로 더 이상의 희망을 포기한 소수의 히브리인들이 '에세네 공동체'나 '열심당' 등의 모습으로 섹트화되고 '하시드 운동'이나 '마카비 전쟁' 등에서 자신들의 강한 현실 부정을 나타내면서 그들의 절망적인 역사관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그 역사를 뛰어 넘어 도래할 '전혀 새로운 것' '초역사적인 것'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초의식적 환상을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소수들의 전위 의식과 저항의식 속에 후일 예수의 '인자'의식, '메시아 왕국'의식 등에서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원형과 '원초적인 상'(premodial type)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묵시(계시)문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은 한국 신학계에서 이 논문의 의의는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겠다. 오늘날 특히 종교다원주의의 상황에서 기독교 토착화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는 때에 기독교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유대 묵시문학이 당시 유대의 유일신론, 바빌로니아의 우주론, 인도의 이원론과 헬레니즘, 그리고 특히 영지주의와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 배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의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의 배타적 기독교 이해에 대해 좋은 반증이 된다고 여겨진다. 또한 예수의 의식도 그 독특성과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묵시문학적 환경에서 영글은 것이라는 사실은 좀더 열려진 기독교 이해를 위해 주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와 함께 또한 중요한 의의는 저자가 이 논문의 목적으로 밝혔듯이 오늘날 세속화와 신의 죽음의 시대에 모두 퇴색해 버린 것 같은 '기독교의 역동성'을 그 모체의 탐색을 통해 재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권위와 가치를 의문시하고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이라는 원형적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초월적 환상으로 표현된 묵시문학의 저항정신에서 기독교 예수의 원초적 메시지를 보고 그 지적을 통해 오늘날의 상황에서의 기독교의 동질성 회복을 추구한 것이다.
'슐리어리즘의 신학'(Theology of Surrealism)이라는 제목하에서 엮어진 제2부는 이러한 저자의 기독교 신앙 이해가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또한 확장되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기록들의 모음이다. 위에서 소개한 논문의 후반부가 어떻게 현대의 신학과 문화 현상에서 그 직접적인 연관성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다시 묵시문학의 원형적 모습을 읽을 수 있을까에 대한 탐구일진대, "고독과 저항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연구는 바로 그들을 현대의 묵시문학자로 보려는 것이고, "전위 예술과 신학"은 원래 {기독교사상}지에 1972년 10월부터 5회에 걸쳐 "그림이 있는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인데 현대 전위회화(한국의 이중섭, 서양의 미래파, 초현실주의 등)와 기독교의 전위 의식을 접목시킨 전혀 독특한 작업이다. 1장의 "환상의 신학"은 1973년 9월의 {기독교 사상} 특집 "묵시와 상징"을 위해서 정리한 그의 학위 논문 발췌이다.
그러나 이 2부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글은 그가 "슐리어리즘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써내려 간 마지막의 두 편이다. 첫 번째 것은 저자가 미국에서 귀국한 후 2년여 후인 1974년에 1월 14일의 날짜 표시와 함께 기록된 것이다. 그의 독특한 필체로 백지의 두툼한 노트에 시작한 것을 보면 저자는 이 글을 계속 전개할 의도였던 것 같으나 애석하게도 겨우 시작에 불과한 "의식의 둔화"에 관한 몇 장의 글뿐 남겨져 있지 않다. 이 당시 그의 상황은 '서울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갈등으로 심한 고통의 시간이었으므로 그 전개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저자는 그 몇 년 후 또 한번 이번에는 다른 노트에 같은 제목의 글을 시도한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지만 본인의 생각으로는 70년대 말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분량도 훨씬 더 많이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가 전개하고자 한 '슐리어리즘의 신학'(Theology of Surrealism)이란 어떤 것일까? 그의 두 번째 글 초두에 그는 그것을 한 마디로 '영의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의 말"이고, '영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슐리어리즘의 신학이 이렇게 종전의 신학에서처럼 논리나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언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영의 목소리'를 붙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의 합리적 신학방법으로는 안되고 먼저 회화나 문학에서 그 초현실과 초의식을 표현하려는 한 '슐리어리즘'의 방법론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신학의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슐리어리즘'이란 결코 한 '-주의'(主義, 이즘)이나 '방법론'(methode)으로 이해돼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끊어 버리려는 것인데, 그리하여 그것을 오히려 일찍이 동양의 현자들이 깨달은 "無爲不言無爲無聲의 敎" "不言之敎"의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러나 그것은 동양과 서양, 무와 유의 구별도 초월하자는 것이고, 그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초월적인 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세계, 무의식의 세계라고 할까, 이매지네이션의 영역이라고 할까, 또는 '계시'의 영역인 영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그가 젊었을 때부터 관심하던 현대 회화나 A. 브르통(Andre Breton) 등의 시각을 매개로 하여 구축하려고 한 영과 초현실의 '슐리어리즘의 신학'을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가 세상을 뜬 후 1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서구 현대의 논리주의와 합리주의를 세차게 비판하는 '현대이후주의'(Postmodernism)의 논의가 불붙었고, 전통적 로고스 중심적인 신학에서의 신과 자아, 역사와 논리(책)를 모두 부셔 버리자는 '포스트모던적 반신학'(反神學, A Postmodern Atheology)이 등장한 이 때에 그의 '영의 신학'에로의 추구는 참으로 전위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애석하게도 그러나 그의 이러한 '슐리어리즘의 신학'은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개되고 표현될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책의 제3부에서 '성령의 신학'으로 묶어진 그의 마지막 때의 글들이 남겨졌다는 것이다.
이 3부의 두 번째 글 "카리스마적 신학"은 1980년 6월부터 그분이 돌아가신 1981년 12월까지 당시 '순복음신학교'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된 순복음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지에 연재된 글들이다. 이제까지 신학계에서 유례가 없었던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글이 당시 세인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던 한 이름없는 잡지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는 어쩌면 오늘날에는 이 글의 의미를 더해 주는 것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신의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이은선, 이경 엮음. 종로서적, 1992)을 준비하는 동안에 필자는 이제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이 글들이야말로 그가 시도했던 '슐리어리즘의 신학'의 한 통일된 결정체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조직신학이 아닌 '영의 신학'으로서의 '카리스마적 신학'은 그러나 그 안에 4단계의 구별을 보이는데, 즉 전통신학에서의 인식론에 해당되는 '카리스마적 해석학'의 3편, 그 다음 신론에 해당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의 3편, 이어서 기독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신뢰의 그루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론과 교회론을 읽을 수 있는 '삶과 죽음'의 두 편이다. 이 글들은 또한 당시 의도적으로 띄어쓰기 문법을 거부한 형태로 쓰여졌는데, 이러한 파격에 대한 단순한 몰이해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도를 굽히지 않았고, 그래서 몇 달 동안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돌아가시는 12월에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리게 되었다. 이 3부에서의 세 번째 글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그분의 평생의 작업인 '영의 신학'을 향한 추구가 잘 드러나는 글이라 그 다음에 실었다.
이 3부의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진정으로 평생을 거쳐 추구한 작업은 한 새로운 '영의 신학' '카리스마적 신학'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새롭게 "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이 새 술의 의미를 담기 위해서 새 부대인 '카리스마적 해석학' 즉 그가 "원래 오랜 옛날 동양에서 싹 뜨고 후일에 서양 예술인들에 의해서 재인식되었다"고 파악한 '슐리어리즘'의 방법론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그의 신학이 추구한 '초현실'과 '영'의 세계가 결코 단순히 이 세상 너머의 저 세상이 아니고, 역사를 부정하고 모든 현실의 갈등과 분리를 없는 것으로 해 버리는 유아적이고 퇴폐적인 의식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대 묵시문학 등에서 원형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초월의 선재적 성취를 확연히 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초월과 현실, 초월과 역사의 구분을 문제삼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그 신학이란 바로 그 초월의 현재적 실현,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언어 사건의 더욱 더 지극한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초월이 있기는 있으나 그 전(前)모양으로 먼데 있는 초월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초월이고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는 세계에의 초월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면서도 우리가 의식 못하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 눈 앞에 보고 있는 사물 가운데서 그 절대의 세계를 의식하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는 '너희 안에 천국이 있느니라' 하는 그런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과 실천의 주(主)이신 예수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위 작가들의 '이벤트'(event)로서의 예술 활동이나 '포스트모던니즘'의 평범성, 일상성, 실천성에로의 방향 전환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이러한 '슐리어리즘적 영의 신학'은 그러므로 그 성령 중심적인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순복음교회 등에서 일어났던 성령 운동의 오해와 위험성을 뚜렷이 지적하였고, 그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려는 신학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3부의 첫 번째 글로 실린 "현대신학과 성령론"은 1979년 5월 '순복음신학교 제27회 개교 기념 초청 강연회'에서 행한 연설의 기록인데, 여기서 그는 현대신학의 역사적 탐구를 통해 이제 신학이 과거 서구의 이론적이고 분석적이고 차갑고 정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성령 중심의 신학'(Spirit-oriented Theolog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오늘의 성령 운동이 마치 성령을 한 방법론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의 세속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물 내지는 얄팍한 감정의 자극쯤으로 생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 3부의 마지막 글 "이단이란 무엇인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두 주전의 고통의 상황에서 마련된 것인데, 여기서야말로 바로 그의 이와 같은 '정론'(orthodoxy)의 이론으로서가 아닌 '정행'(orthopraxis)의 가르침으로서의 '영의 신학'의 지향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단의 문제는 바로 '실천의 문제'이며 오늘의 이단이란 예수의 화해 정신과 화해의 사건을 떠나서 분열과 분당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때 그분은 병이 다 나면 판자촌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되뇌어서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가 전지구촌의 화합을 얘기하고 기독교회에서의 에큐메니즘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모든 기존의 갈등과 분리, 교리적인 싸움과 구분 등을 지양하고 우리를 진정으로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교회를 소망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 교회를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가 되지 않겠는가? 단순히 기존하는 교단들 중의 한 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한 원형적 모습으로서의 한국 기독교회, 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그분의 비전이 바로 부록으로 엮어진 두 편의 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문"에 표현되어 있다. 그가 젊은 시절 그 마음속에 품었던 순수함과 본질적인 것에 대한 염원, 그 염원을 따라서 그는 '한국적 교회'를 시도하면서 한국 초유의 포스트모던니스트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조직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성서 원전에의 관심으로 '한국 원전 연구소'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삶과 사상은 한마디로 '고독과 저항'의 그것이었다.
***아래에 추가되는 글은 {그리스도의 교회 회보}(1984년 여름호)와 김홍철 목사의 논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장사,"(1986)을 참고한 것입니다.
이신은 6.25사변 때 고향 돌산에 피신해 있다가 그 이듬해에 광주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김은석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적이며 근본적인 교회임을 깨닫고 환원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환원의 기수가 되었다.
부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여러 동역자들간에 가장 크게 부딪쳤던 문제가 성령론이었다. 이신은 성령의 역사가 단일회적인 사건이라는 전통 교역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오늘날에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로 부여교회를 사임하고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힐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를 도와 일하면서 동역하였다. 충북 괴산에 있는 수리교회로 옮겨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다시 서울 돈암동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도미하여 밴더빌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신은 설교 때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증거하였으며, 종이에 낙서를 해도 항상 "근본"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심취에 있었다고 사모는 회고하였다. 항상 성령의 세례를 주장하면서 창조적인 일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며 바른 신앙을 위해 육신의 고통을 문제시 않고 최선을 다하다가 소천하였다. 이신은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정관을 초안작성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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