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목사 황공 행장(星州牧使黃公行狀)
성주 목사 황공의 이름은 준량(俊良)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평해(平海) 사람이다. 고려 시대에 시중(侍中)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란 이가 그 먼 조상이다. 시중의 손자인 근(瑾)이 공민왕(恭愍王)의 조정에서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과 함께 상소하여 지진의 변고에 대하여 극력 논란하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서 옥천 군수로 좌천되었다. 후에 벼슬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제학이 유정(有定)을 낳으니, 본조(本朝 조선 왕조(朝鮮王朝))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다. 전서가 생원(生員) 연(鋋)을 낳으니, 이가 공의 고조이다. 전서 때부터 영천(榮川)에 우거하였는데, 생원이 또 풍기(豐基)로 옮겨서 드디어 풍기 사람이 되었다. 증조의 이름은 말손(末孫)이니, 사온 주부(司醞主簿)요, 조부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치(觶)인데, 모두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창원(昌原) 황씨(黃氏)니,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딸이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12) 7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특이한 자질을 타고 나서 일찍부터 문자를 알았고, 말을 하면 곧 사람을 놀라게 하여 신동이라 불렸다. 나이 18세에 남성(南省 예조(禮曹))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고시관이 공의 책문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명(文名)이 매우 자자하여 시험을 볼 때마다 언제나 남보다 앞섰다. 정유년(1537)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고, 기해년(1539) 정시(庭試)에서 직부회시(直赴會試) 되었다. 경자년(1540)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었고, 성주(星州)의 훈도로 선발되었다. 임인년(1542)에 들어와 학유가 되었다. 계묘년(1543)에 학록 겸 양현고봉사(學錄兼養賢庫奉事)에 오르고, 갑진년(1544)에 학정(學正)에 올랐다. 을사년(1545, 명종1)에 승문원 전고(承文院殿考)로서 상주 교수(尙州敎授)로 나갔다. 정미년(1547) 가을에 들어와 박사(博士)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전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올랐다. 다음 해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서 부친상을 당하였다.
경술년(1550)에 복을 마치자 전적에서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옮겨, 중종(中宗)ㆍ인종(仁宗) 두 임금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겨울에 병조 좌랑으로 옮겨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신해년(1551) 2월에는, 경상도 감군 어사(慶尙道監軍御史)에 임명되었다가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으로 바꾸어 임명되고, 6월에 추생 어사(推栍御史)가 되었다. 7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는데 나아가지 않았고, 9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당시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자가 언로(言路)에 있었는데, 일찍이 공에게 구하는 것이 있었으나 공이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그의 중상하는 논박을 당하여 체차되었다.
공은 마침내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으로 나아가기를 청해서 신녕 현감(新寧縣監)이 되었다. 병진년(1556) 겨울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이듬해 가을에, 조정에서 단양(丹陽) 고을이 피폐하였으므로 특별히 그 적임자를 뽑게 되었는데, 공을 등용하여 군수로 삼았다.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는 조건으로 부임하여 3년 만에 임기가 차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조와 병조의 정랑(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경신년(1560) 가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4년 후인 계해년(1563) 봄에 병을 얻어 사직하고 돌아오던 중 길에서 병이 더욱 심해졌다. 3월 11일에, 예천(醴泉)에 이르러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7세였다. 공은 사람됨이 총명하고 뛰어나서 범상하지 않았고, 명민(明敏)하고 풍채가 좋았다. 용모가 그림과 같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무슨 일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인데, 고작 주현(州縣)을 다스리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도 관직이 낮고 업무가 번잡하다 불평하지 않고, 문서를 충실히 다루며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였다. 그가 신녕(新寧)에 있을 때 흉년을 만났는데,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자기가 굶주리는 것과 같이 보아 골고루 진휼(賑恤)을 하니 백성이 소생되었다. 전임자 때 진 부채에 대해서는 공이 잘 절약하고 긴축하여 메워 넣었고 원래의 숫자를 채우고는 그 문권을 불살라 버렸다. 특히 학교에 신경을 써서 문묘(文廟)를 증수하여 힘써 교육을 권장하였다.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를 창설하여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을 달고, 서적을 비치하고 전답을 두니, 선비의 마음이 흥기하여 사모하였다. 단양에 부임해서 수레에서 내려 바로 사방을 둘러보니 겨우 수십 호가 남아 있는데 헐어서 쓰러지게 된 지경이었다. 이에 피폐하게 된 까닭을 캐묻고는 개탄하기를,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데, 이런 폐단이 제거되지 않으면 우리 백성이 살 수가 없으니 어찌 관이라 하겠는가.” 하고, 곧 상소하여 힘껏 사정을 설명하였는데 강령은 하나로 운운하였고 조목은 열 가지로 운운하였다. 임금이 비답을 내려 격려하기를, “모두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고는 특명으로 10년간 공납할 20여 가지 조목을 면제했으니, 공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전례 없는 이러한 은전을 얻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단양 백성이 고무(鼓舞)되어 유망했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향교가 계곡물에 가까워 종종 침수될 염려가 있자, 공이 옮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 고을 읍내 동편에 땅을 얻어서 옮겨 세웠는데, 재목이 좋고 시설이 잘 되어 온 고을의 면목이 변모했으니, 재정이 어려워도 풍속 교화의 근원을 뒤로 미루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또 고을의 현인(賢人)인 좨주(祭酒) 우탁(禹倬)은 경학과 충절이 모두 충분히 세상의 사표가 되므로, 문묘 서편에 따로 한 칸 집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성주에 이르니, 그곳은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이름 난 곳이었는데 공은 스스로 어렵다 하지 않고, 그 학문을 번성하게 하는 일에 전의 두 고을보다 더욱 힘쓰기를 지극히 하였다. 이에 앞서 목사(牧使) 노경린(盧慶麟)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옛 벽진(碧珍) 고을 터에 건축하였는데, 공이 그참에 더 꾸며서 아름답게 하고, 또 문묘를 옛 규모로 넓혀 중수하였다. 때마침 사문(斯文) 오건(吳健)이 고을의 교관(敎官)이 되자 서로 뜻이 같고 의논이 맞아 제자 몇 명을 선발하여 네 등급으로 나누어서 오 교관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가르치게 하고, 자신은 그 감독을 맡았다. 매월 한 번씩 모아 강론하되, 생도로 하여금 그 읽은 글을 책을 보지 않고 외우게 하고, 그로 인하여 의심나는 뜻을 논란하게 하였으며,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을 살펴서 차등 있게 상벌을 주었다. 고을 동편에 공곡(孔谷)이라는 땅이 있었는데, 여러 선비가 그곳에서 당을 건립하기를 원하므로, 공이 흔쾌히 집을 지어 공곡서당(孔谷書堂)이란 현판을 달았다. 또 팔거현(八莒縣)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워서 여러 방법으로 훈도하되 각각 그 자질(資質)의 고하(高下)를 따라서 하였으므로 성취한 자가 매우 많았다.
처음에 상산(商山)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가 되었을 때, 공이 후진(後進)으로서 많이 왕복하며 그와 더불어 그 옳고 그름을 논하여 밝혔는데, 논변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미 그가 견식이 밝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서 참맛을 맛보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조정에 있을 때에는 오직 문사(文辭)로서만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그 후 점차 사우(師友)들을 따라서 성리연원(性理淵源)의 설을 듣고, 비로소 이른바 학문이란 것이 전날 말하던 것만이 아닌 줄을 알게 되어 발분해서 이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후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읽게 되었고, 최후에 또 주자서(朱子書)를 읽게 되자 이에 깊이 감득(感得)함이 있어 매우 좋아하였다. 성주에서는 또 벗들과 학문을 연마하는 도움을 얻어 그 뜻이 더욱 간절하여지고 그 공부가 더욱 깊어졌다. 매번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오 교관과 함께 책상을 마주하고 강독하며 밤을 새웠고 침식을 잊고 쉬지 않고 힘썼었다. 사람들이 혹 과로로 인해 병이 날까 염려하면, 대답하기를, “글을 읽고 학문을 함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며 기질을 기르는 것이니, 어찌 독서로 말미암아 병이 생길 리가 있겠는가. 혹 이와 상반됨이 있는 것은 운명이지 책 탓이 아니다.” 하였다. 혼자 거처할 때에는 조용한 방에 성현의 중요한 가르침을 사방 벽에 붙여 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고 ‘정(靜)을 위주로 하고 경(敬)을 견지한다.’는 말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매번 벼슬살이에 뜻을 빼앗기고 공무에 바쁜 것을 깊이 병통으로 여겨서,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떠나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근처로 돌아가서 노년을 보내고자 하여 이미 그곳에 터를 잡아 2칸 집을 짓고 금양정사(錦陽精舍)라 하고는, 서적을 간직하여 도를 강론하는 곳으로 삼았다.
독실히 좋아하는 마음으로 고요히 정양(靜養)하는 공을 닦았다면, 그 소견이 마땅히 진보되었을 것이요, 마땅히 그 소득이 이에만 그치지 않았을 것인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병이 들었으니, 그 애석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공의 이름은 이미 홍문관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선발에 올랐다. 무오년(1558, 명종13) 봄에 공이 단양에 재임 중이었는데, 조정의 신하가 의논하여 아뢰어서, 공을 불러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직에 두고자 하였다. 비록 같이 벼슬하는 자의 중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 당시의 제공(諸公)이 알아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은 그 능하다는 재주에 급급히 더 힘써서 출세하는 이익을 취하지 않고, 도리어 여기에서 생각을 돌려 온 세상이 구하지 않는 것을 구하고, 뭇사람이 맛들이지 않는 것을 맛들여서, 그를 향한 비웃음과 화복(禍福)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서 죽은 후에야 그만두었다. 이에 그가 학술을 택한 것이 올바르고, 도를 향하기를 부지런히 하였으므로 그리된 것이라, 가상한 일이다.
공은 우애가 돈독하여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어머니께 올리고, 자매와 동생과 조카에게 나눠 주고, 자기가 가지는 데는 박하였다. 향당(鄕黨)의 곤궁한 친구들을 구제할 때에도 혹시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같이 하였고, 혹 그 때문에 남에게 비방을 받아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에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베를 꾸어다 염습을 하고, 옷이 관에 차지 못했으니, 그렇게 된 뒤에야 사람들은 또한 그의 청빈함이 이와 같고 자신을 치장하여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무릇 지나는 곳이나 머물렀던 고을에 이름 난 산이나 맑은 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불러 함께 찾았고, 혹 몸을 빼내 홀로 가기도 하였다. 당도하면, 이리저리 거닐며 읊조리면서 저녁이 되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단양의 도담(島潭)이니 구담(龜潭)이니 하는 곳에서 은사(隱士) 이지번(李之蕃)을 주인 삼아 마음껏 놀고 구경하였다. 또 매우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특히 꽁꽁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기를 즐겼다. 어느 겨울 달이 밝고 강에 얼음이 언 때에, 충주에서 강을 따라 썰매를 타고, 사람을 시켜서 끈으로 앞에서 끌게하여 이군(李君) 있는 곳을 방문하고 군(郡)에 도착하여서는 ‘비할 데 없이 상쾌하다.’고 하였으니, 그 운치(韻致)의 소탈함이 이런 유(類)가 많았다. 공의 병이 오래 끌어 날로 쇠잔해졌으나, 정신을 쓰는 데는 틀림이 없었다.
임종 하루 전날, 나에게 글로써 고별하였는데, 말뜻이 또렷하여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임종할 때에도 정신이 또렷하여 흐리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공은 예안 사람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 영(瑛)을 후사로 삼았다. 이듬해 갑자년(1564) 1월에, 고을의 동산 내곡(內谷) 감좌(坎坐)의 언덕인 선영(先瑩) 좌편에 장사 지냈다. 찰방은 즉 농암 선생의 아들이다. 내가 처음 공을 선생의 문하에서 보고 서로 종유(從遊)하면서 가장 오래하며 친밀하게 지냈고, 미련하여 견문이 없는 터에 공을 만나 깨우침을 받아 배운 것이 많았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면 서로 왕래하며 옛정을 다시 나누자고 약속하였고,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들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근심하더니, 어찌 오늘 이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고, 도리어 강건한 나이인 그대에게 곡(哭)할 것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공의 언행은 기록할 것이 많아 감히 다 싣지 못하고, 다만 대강만을 추려서 위와 같이 적었다. 이는 혹 훗날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상고(詳考)하기를 바라서이나, 졸렬한 문장이 이를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였으니, 아아 슬프도다. 공이 지은 문집 2권과 시집 2권이 집에 간직되었다. 가정(嘉靖) 42년 계해(1563) 12월 어느 날 진성 이황은 삼가 짓다.
星州牧使黃公行狀
星州牧黃公諱俊良。字仲擧。平海人。高麗時。有爲侍中者曰裕中。其遠祖也。侍中之孫曰瑾。當恭愍朝。爲左獻納。與正言金續命上疏。極論地震之變。忤旨謫守沃川。後官至寶文閣提學。提學生諱有定。仕本朝爲工曹典書。典書生生員諱鋋。是於公爲高祖。自典書寓居于榮川。生員
又移于豐基。遂爲豐人。曾祖諱末孫。司醞主簿。祖諱孝童。考諱觶。皆隱不仕。妣昌原黃氏。敎授漢弼之女。以正德丁丑七月日生公。公生有異質。夙解文字。出語卽驚人。以奇童稱。年十八。就試南省。考官得公策。擊節稱賞。由是文名藉甚。每試。輒在前列。丁酉。中生員。己亥庭試。直赴會試。庚子。登乙科第二人及第。權知成均館學諭。調星州訓導。壬寅。入學諭。癸卯。陞學錄兼養賢庫奉事。甲辰。陞學正。乙巳。以承文院殿考。出爲尙州敎。丁未秋。入爲博士。其冬。例陞典籍。明
年。以工曹佐郞。丁外艱。庚戌。服闋。自典籍。遷戶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預修中宗,仁宗兩朝實錄。冬。轉兵曹佐郞。進闢佛疏。辛亥二月。命爲慶尙道監軍御史。換差承文院校檢。六月。仍爲抽栍御史。七月。遷禮曹佐郞。不就。九月。拜司憲府持平。時有姓韓人在言路。嘗有求於公。公不應。爲所中論遞。公遂爲親乞外。得新寧縣監。丙辰冬。病解印歸。明年秋。朝廷以丹陽凋敝。特選其任。用公爲守。除挈家。三年而秩滿。去而家居。除禮兵正郞。皆不拜。庚申秋。拜星州
牧使。越四年癸亥春。得疾辭歸。在途彌革。三月十一日。抵于醴泉境。遂卒。享年四十七。公爲人。穎秀不凡。明敏有風標。眉目如畫。才調華贍。將無施不可。旣屈跡于州縣。則又不以職務爲卑宂。抑首文簿。盡心民事。其在新寧。歲値不稔。視民之飢。若己飢之。賑恤得宜。民以蘇息。前政逋負。公能節縮補塡。數充則焚其券。尤留意學校。增新文廟。力加勸導。又就古縣。刱學舍一區。扁爲白鶴書院。藏書置田。士心興慕。丹陽甫下車。考視四境。則僅餘數十戶盡尪悴顚連者。乃詢
究積弊之由。慨然曰。官以民爲本。此弊不除。吾民無生。何以官爲。卽上疏極言之。其綱一云云。其目十云云。御批奬諭曰。無非愛君憂國。予甚嘉焉。特命限十年蠲貢二十餘條。非公誠格于天。何以得振古所無之恩典乎。由是。丹民鼓舞。流亡四集。鄕校瀕於山澗。往往有浸齧之患。公命之移建。得地于郡治之東。材良制美。一邑改觀。其不以財殫而緩風化之原如此。又以郡之前賢禹祭酒倬經學忠節。皆足爲世表。於文廟西偏。別構一間屋以祀之。至於星州。號稱
難治。而公則不自以爲難。其興學一事。視前之兩邑。用力尤爲深至。先是。盧牧使慶麟。建迎鳳書院于古碧珍之墟。公因而增飾致美。又重修文廟。恢拓舊規。會吳斯文健爲州敎官。相與志同議合。揀取弟子若干員。分爲四等。令吳主敎。而己任其檢督。每月一會講。令其背誦所讀書。因爲之論難疑義。考其勤慢。第其賞罰。州東有地曰孔谷。因諸生願立書堂。公欣然營構。扁曰孔谷書堂。又於八莒縣。立鹿峯精舍。訓迪多方。各隨其資之高下。成就者甚多。始商山周侯世
鵬爲豐守。公以後進。多與之往復論辨。其異同從違之間。人已知其見識之明。然而猶未能造其堂而嚌其胾。故其在於朝。惟以文辭名於世。其後稍從師友間。聞性理淵源之說。始知所謂學問者不止於向來所云。而嘐嘐然有意於此學。及得心經,近思錄等諸性理書而讀之。最後。又得朱子書而讀之。於是。深有所感發而大耽樂之。於星又有同人麗澤之助。其志益勵。其功益深。每於公餘。輒與吳對案講讀。夜以繼日。忘寢與食。亹亹不倦。人或以因勞生病爲規者。答
曰。讀書爲學。本以治心養氣。安有因讀書而致生疾之理。其或有反是者。命也。非書之罪也。其處獨也。一室蕭然。帖聖賢要訓於四壁。以自警省。而深有取於主靜持敬之語。然每以仕宦奪志。官事膠擾爲深病。欲一朝飄然脫去。歸老於竹嶺之下。錦溪之上。已占其地。結屋數椽。命曰錦陽精舍。以爲藏書講道之所。夫以篤好之志。加靜養之功。其見當有進。其得當不止此。此志未遂。疾病遽爾乘之。可勝惜哉。雖然。公之名。已登於弘文養才之選。戊午之春。公見任丹陽。而
廷臣有議啓。欲召公處以文翰之職。雖旋以同進者惎間而止。其爲一時諸公賞識。可知矣。而公則不汲汲加意於其所已能之技。以取榮進之利。顧乃回頭轉腦。求一世之所不求。味衆人之所不味。不知非笑之爲非笑。禍福之爲禍福。俛焉日有孶孶。死而後已。玆其擇術之正。嚮道之勤。所以爲可尙也哉。公篤於友愛。凡有物。必先以奉慈堂。分之姊妹弟姪。而薄於自取。其於鄕黨故舊。賙窮濟急。如恐不及。雖或以此得嫌謗於人。不恤也。至其身死之日。衾裯不具。貸
布以斂。而衣不充棺。然後人又知其淸貧如此。而不矯飾以自表於世也。雅好佳山水。凡所過所涖。有一名山韻水。必招人共討。或挺身獨往。至則徘徊嘯詠。竟夕忘歸。若丹之島潭,龜潭。主之以李隱士之蕃。恣意遨賞。亦頗尙奇好事。尤喜爲氷江雪馬之遊。嘗冬月。江氷正合。自中原緣江取路。騎雪馬令人前繩。滑轉以上。過李君而達于郡。自以爲快適無比。其韻致率詣多類此。公病久日澌。神用不爽。其將終前一日。與滉書告訣。辭意淸新。與平日無異。聞其臨死。了了
不亂。亦如是云。公娶禮安人察訪李文樑之女。無子。以弟遂良之子瑛爲嗣。以明年甲子正月日。葬于郡東山內谷坎坐之原先塋之左。察訪卽聾巖先生之胤。某初識公於先生之門。相與游從。最久且密。愚陋無聞。得公以警發者多。公之退歸。實有往來修舊之約。而公常憂我老病難保。豈料今日老病者在世。而反哭君於康彊之年也哉。公之言行可紀者。鄭重而不敢盡。獨撮其大者如右。庶或他日秉筆者有考。而拙訥之文。無所發明。嗚呼悲夫。公所著文集二卷,詩集二卷。藏于家。嘉靖四十二年癸亥十二月日。眞城李滉。謹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