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명훈이 객원지휘자로 지휘를 맡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고 왔다.
전반부에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고, 인터미션 후에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연주했다.
피아노 협주곡은 큰 기대 없이 들었는데, 박재홍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압권이었다.
몇 달 전 반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한 임윤찬과 마찬가지로 한예종을 다니는 완전 국내파 피아니스트인데, 연주가 너무 좋아서 프로필을 살펴보니, 역시나 국제 콩쿨 수상 경력이 화려했다.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되고 있는 도중에 연신 눈물을 닦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마음에 뭉쳐 있는 무언가를 피아노 협주곡의 선율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런 때는 모른 척 해주는 게 최고의 배려임을 알기에 끝까지 모른 척 했지만,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인터미션 때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함께 나왔는데, 남편이 먼저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고..."라며 말을 꺼냈다.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남편의 등을 쓸어주었다.
어떤 마음은 말로 담아내기가 참 어렵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기다렸던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연주되었다.
이 때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내가 자꾸 눈물이 났다.
차이콥스키도 이 곡을 만들고, 자신의 지휘로 초연을 하고 나서 9일만에 급사하였다. 콜레라 균에 오염된 물을 마신 것이 원인이었으나,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대해 자살이라는 루머가 떠돌았다.
동성연애자였던 차이콥스키의 삶의 무게는, 스스로 삶을 내려놓아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무거웠던 모양이다.
사실 이 곡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동성 애인이었던 디비도프에게 헌정한 것이었고, 헌정할 당시에는 제목을 정하지 않고 그냥 <프로그램 심포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림으로 치면 <무제>라는 제목과 같은 것이니, 아마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이 곡에 담은 어떤 것을 언어로 고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창>이라는 제목은, 차이콥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가 이 곡의 초연을 보고 나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파데티체스카야'를 이 곡의 부제로 하면 어떻겠냐고 형에게 제안을 했는데, 차이콥스키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 이 곡의 출판을 맡은 출판업자 위르겐슨이 타이틀 페이지에 프랑스어로 'pathetique'라는 단어를 넣었고, 이것을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비창>이라는 제목이 되었다.
아마 차이콥스키가 이 곡을 초연하고 9일만에 죽지 않았다면, 이 곡은 <프로젝트 심포니>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곡은 세상이 차이콥스키의 일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아 <비창>이 되었다.
세상이 바라보는 그 사람의 삶과 실제로 당사자가 겪어왔던 삶은 다를 수도 있다.
한 생을 살다가 죽은 뒤에, 나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 되고 음악이 되어서 제목이 붙게 된다면, 어떤 제목이 적당할지 생각해 본다.
나는 차이콥스키가 원했던 <무제>에서 더 나아가 <삭제>가 되고 싶다.
죽음과 동시에 살아있으면서 남겼던 물리적인 모든 흔적들이 사라지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완전히 삭제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삶도, 나의 죽음도, 아무에게도,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그런 <삭제>가 되고 싶다.
<비창> 3악장의 격렬한 연주가 끝나고, 마지막 4악장의 끄트머리,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악기들이 하나씩 잦아들면서, 종국에는 고요함만 남았다.
연주가 끝났지만,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한동안 마지막 포즈에서 멈춘 채 정적을 지휘하고 있었고, 청중들도 숨을 멈추고 '극심한 고통'의 끝에 찾아온 고요함이 주는 '비창'을 온 몸으로 느꼈다.
앞자리에 앉아 계신 노신사 분이 연신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또 비슷한 아픔과 고통 속에 있음을 이런 순간에 느끼게 된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이번에는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쓸어주었다.
우리는 모두 <무제>이고, 시간이 흐르면 <삭제>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비창>을 위로하며 삶의 한 가운데에 살아있음을,
그래서 <무제>가 되고 <삭제>가 되어도 괜찮은 일생임을,
이렇게 가끔 한번씩 그것을 확인하며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내공을 키우게 되는 것 같다.
<비창>의 여운이 오늘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