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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도병으로 해병대에 지원
서귀포시 하효동에서 태어난 현종헌 용사는 서귀 농업중학교 제4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때 나이 만 17세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불볕 쏟아지는 더위 속에 줄곧 모교에서 배속교관에 의해 군사 훈련을 받다가 보니, 북한군은 벌써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거의 전국토가 인공기 아래 신음하였고 대한민국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대에 피 끓는 소년 현종헌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학업도 나라가 있은 후에 있지 않은가! 라는 거룩한 생각으로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제4기생으로 입대하였다. 이제는 어엿한 견습 수병이 되어 9월 1일 제주항을 떠나 진해를 경유 부산항 제1부두에 이르렀다. 이 때 현종헌 수병은 해병 제1대대 제2중대 화기소대 경기관총 분대에 배치되었다. 현역군이란 총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동래사격장에서 MI소총으로 8발을 쏘아보았고, 제1부두에서 MI소총을 수령하여 분해결합을 해보았다. 그리고 경기관총 부사수가 되었으므로 그 조작법을 함상에서 선배들로부터 더 배워나갔다. 그것이 군 입대 후 훈련의 전부였다.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군에 적응해 나가야 했다.
□ 인천상륙군에 편성되어 수도서울로
부산항에서 미 해군 상륙함인 피카웨이 호에 승선하여 9월 12일 출항하였다. 빌딩처럼 높고 넓은 상륙함의 갑판에서도 연일 교육이었고 선임 병으로부터 구타로 곤혹스런 선상생활을 겪었다. 9월 15일 저녁 인천에 적전상륙했고, 현수병이 속한 제1대대는 경인가도를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9월 21일 새벽에는 행주산성이 바라보이는 한강변에 도달하였다. 제1대대가 집결한 한강의 나루터에는 언제 실려 왔는지 미 해병대의 수륙 양용차(LVT)들이 즐비하게 물가에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해병은 그 미국의 편리한 병기를 타보고 모두 다 놀랐다. 얼마 없어 행주나루에 도착하여21일 오전8시에는 제대별로 속속 집결완료 하였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해병 제1대대는 남가좌동에 솟아있는 104고지를 공격키로 하였다. 현수병은 이 때 화기소대의 경기관총 부사수였다. 따라서 무장은 카빈소총이었으나 MI소총의 4배나 되는 경기몸통을 매고 다녀야하니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104고지는 북한군 제25여단 및 제78연대 소속 4천여 명이 120밀리 박격포 등 중화기로 무장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 간부들은 중공팔로군에서 실제 경험을 쌓은 사람이 많이 포진되어 있어, 난공불락을 호언하고 있었다. 해병 제1대대는 소수병력이었지만 김성은 부대 소속으로 진동리 지구 및 통영지구전투에서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이 건재해 있어서 과감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현수병도 남가좌동을 출발하여 경기관총 몸통을 매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기어 올라가 아군을 엄호하였다. 드디어 오후6시30분 가을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아군은 104고지를 점령하였다. 그야말로 서울 첫 전투에서 얻은 쾌거였다. 어느새 달려온 내외신 기자들이 도착하여 열심히 승전보를 세계만방에 전하고 있었다.
□ 104고지에서 연희고지로
9월 22일 해병 제1대대는 104고지 남쪽에 솟은 연희동 고지를 점령키로 했다. 원래 연희고지는 적이 서울 방어에 최종 외곽방어선이었다. 연희고지가 뚫리면 아군은 당장 마포나 서대문 중심지로 진출이 가능했다. 그래서 적은 잔여병력을 1만6천여명 끌어 모아 2개 혼성여단을 편성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120밀리 박격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거치하였다. 이런 적의 진지를 향해, 해병 제1대대는 9월 22일 오전 7시에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적의 반격은 너무나 집요했다. 제2중대가 104고지 능선에서 내려와 폭이 2m나 되는 수로를 넘을 때 50여 미터 전방에서 적이 요란한 따발총소리가 들렸다. 그 때 수로를 넘던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2리 김대욱 수병 등 8명이 전사했다. 특히 김대욱 수병은 현수병과 같은 서귀 농업중학교 동창이고, 이웃마을이라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애도할 여유도 없었다. 적은 연희고지 밑 능선에 있는 공동묘지에 수많은 산병호를 구축하고 그 속에 있었다. 그런 후 아군의 수로를 넘어 시원하게 트인 논밭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맹렬히 저격하고 있었다. 결국 아군은 많은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정면공격을 중단하고 동북방을 우회하여 제2중대일부는 간신히 연희고지 능선일각에 들어섰다.
연희고지 밑에서 엎드린 자세로 신나게 기관총을 쏘던 정모삼등병조가 고향인 서울에 오자 너무나 감격했던 모양이다. 그는 총을 쏘다말고 갑자기 일어서더니 남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저 기와집이 우리 집이다. 바로 우리 집이야! 어머니~”하고 환성을 지를 때 어디선가 총성이 들리더니, 정분대장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그 옆에 엎드려 있던 현수병은 “분대장님! 정신 차리십시오.”하고 흔들었으나 그는 머리에 관통상을 당하여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는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총을 쏘다말고 내려다보던 정든 고향집을 눈앞에 둔 채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를 본 현수병은 분대장이 잡았던 경기관총을 잡고 적진을 향해 방아쇠를 계속 잡아당겼다. 250발이 든 탄창하나를 어느새 다 쏘아버렸다. 그러나 적의 반격은 너무도 완강하여 애석하게도 해병 제1대대는 연희고지 점령을 중단하고 일단 104고지로 철수해야 했다. 해병의 승전보를 마음 졸이며 애타게 기다리던 손원일 해군총참모장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은 너무 안타까워했다. 그 후 연희고지는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제2대대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결국 탈환했다.
□ 북진작전
해병 제1대대는 수도탈환 후 1950년 10월 18일 LST에 승선하여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9월 15일 인천상륙을 감행한 후 환희에 넘치는 경인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34일 만에 인천항을 떠나게 되었다. 자신들이 탄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병사들을 태운 그 수송선은 한반도를 돌아서 10월 23일 묵호에 상륙하였다. 그 후 줄곧 강원도에서 적의 패잔병을 소탕하다가, 원산을 방어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11월 29일 원산의 동해중학교에 이르렀다. 이틀 밤을 보내고 12월 1일 오전 9시 현수병이 속한 제1대대 제2중대는 미 해병대 GMC트럭을 타고 출발하였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낙목한천에 해병대를 태운 트럭은 전속력으로 원산시내를 빠져나와 서쪽으로 질주했다. 그 트럭행렬은 24km를 달려 문천군 풍상면 마전리에 주둔한 미해병 제1사단 제1연대 제3대대 주둔지에 잠시 정차했다.
이제는 산과 산 사이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통하여 산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계곡밑은 너무 깊은 낭떠러지라 아찔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마전리에서 10km를 달려 평안남도와 경계선인 문천군 풍상면 용포리 산 정상에 올랐다. 바라보니 평안남도와 함경남도가 시야에 다 들어오고, 이어진 산맥들은 모두 다 험산준령이었다. 서쪽은 평안남도 양덕군인제, 그곳 동양면 지구에 해병 제3대대가 진출하고 있었다. 이 포대는 바로 감제고지에 있었고, 미 해병 제3대대와 한국해병 제3대대를 엄호하기 위한 포대였다. 이곳에 올라온 현수병은 조망이 용이한 곳에 경기관총을 설치하고 실탄을 부근에 쌓아 놓으며, 적이 나타났을 때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현수병은 이제는 경기관총사수가 되어 일약 큰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그렇게 진지를 구축하며 경계를 하는데, 한국해병 제1대대 김종식 부대대장이 일단의 박격포반과 중기관총 반을 직접 인솔하여 트럭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해병대 창설초기에는 정보 및 방첩대장을 거쳤고 고길훈, 김성은 부대 때는 수색대장 등을 역임한 용맹스러운 장교로 지금은 대위로 승진하여 부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 한국해병 제3대대는 11월 17일 평남 양덕군 동양면에 진출하였는데 눈보라 속에 북한군으로부터 도로는 전부 차단되어 보급은 끊기고 중공군이 불원 엄습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제3대대는 12월 2일 새벽 5시에 탈출을 개시했고, 도로를 피하여 설산인 아호비령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추위, 졸음, 배고픔에 시달리며 꼬박 하루를 걸어서 대대장이하 전 대원이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제2중대가 엄호하는 용포리에 이르렀다. 한미해병이 이들을 마중 나와 “제3대대! 만세~ 만세~”하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 미군 포대에는 야전식사인 시레이션과 포탄들이 이곳저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미 해병대가 여러 대의 트럭으로 운송해 온 것 같았다. 이 시레이션을 먹고 싶은 대로 갖다 먹으라고 하여 금방 설산에서 기아에 허덕이던 제3대대는 물론 제1대대 제2중대 병사들이 시레이션을 배낭에 가득히 집어넣고 우선 배가 고프니 하나를 까서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소시지, 삶은 콩, 옥수수, 미역줄기 등이 입에만 넣어도 솔솔 녹아내렸다. 그 외에도 건빵, 담배, 사탕, 껌 등 기호식품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미군들은 이런 맛있고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고 전쟁하고, 한국군은 주먹밥이나 겨우 먹으면서 싸움을 하고 있으니 그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현수병은 오랜만에 럭키스트라익 양담배를 까서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그 연기를 공중에 내뿜었다. 그윽한 향기가 공중에 퍼질 때면, 전투에서 사라진 전우의 얼굴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친구여! 부디 전쟁 없는 세상에서 편안히 잠들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게 잠시 휴식시간을 보내고, 곧 아군에게는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 원산철수
그 철수 순위는 미해병, 한국해병 제3대대 그 다음 맨 후미가 한국해병 제1대대 제2중대였다. 해병 제3대대는 험한 설산 위를 걸어서 기진맥진해서 들어왔으니, 우선 차량 편으로 철수해야했고 제1대대 제2중대는 엄호부대이니 뒤에서 엄호하며 차를 타던 걸어서든 원산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런 철수작전은 지휘통솔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지만 차량이 부족하여 배차가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용포리 포대에는 군수물자가 여러 트럭분이나 산적해 있었다. 가히 1개 연대 병력에게 줄 수 있는 식량과 탄약이었다. 그러나 미군에서는 그 물자를 폭파시켜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물자결핍에 시달리던 한국군 입장에서는 아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운송수단도 없으니 이송할 대책도 없었다. 그래서 시레이션과 실탄 등 짊어질 수 있는 분량은 최대로 휴대하고 나머지는 수발의 수류탄을 그곳으로 던졌다. 그러자 불길은 야포탄의 화약에 인화되어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며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이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김종식 부대대장이 얼굴에는 무언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용력이 출중한 무관도 이 엄청난 재화의 손실에 대해서는 애석함이 마음속에 박혔으리라. 이렇게 하여 한국해병 제1대대 제2중대에도 용포리 포대에서 철수하게 되었도 현수병도 시레이션 두 박스를 등에 지고 원산으로 돌아왔다.
□ 모항 진해로
며칠 지나지 않아 제1대대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12월 9일 원산의 명사십리에서 LST898호에 승선하여 모항인 진해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12월 20일 바라던 해병 제1연대가 편성되고 그 한 많은 1950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전쟁은 종결될 기미가 없이 계속 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해병 제1연대는 미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태백산맥으로 남하는 적을 소탕하러 영덕방면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월 24일 엄동설한에 현수병은 다른 수병들과 함께 완전무장을 하고 쓸쓸한 통제부 거리를 걸어 나갔다. 즉시 부두에 대기 중인 LST에 승선하여 멀어져가는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의 찬바람은 갑판위에 불어와 전신에 쌀쌀함이 느껴졌다. 동료들과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잡담을 나누었다. 문득 고향생각,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때 같은 중대 이웃마을 출신, 동창인 김두익 수병이 어깨를 쳤다. 반가운 친구였다. 옆을 보니, 같은 동네 동창생인 송봉국 수병도 있었다. 그 혹독한 군기 속, 수송선에서도 같은 또래 친구들이 있어서 손잡고 웃어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 전투가 없었지만 고참 병사들이 밤마다 휘두르는 빳다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전방에도 그 고약한 행태가 없지 않았지만 전투 시에는 그럴 새가 없어서, 졸병들은 죽어도 전방에 나가는 게 오히려 바람이고 소원이었다. 이렇게 함상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하루가 지난 1월 25일 포항 북쪽에 있는 영덕군의 강구항에 닻을 내렸다. 이곳을 바라보니 포구가 넓게 전개되어 그야말로 천연의 양항이었다.
□ 이성을 마비시킨 배고픔
3일을 굶으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목구멍이 바로 포도청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굶다가 보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온통 음식밖에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투 때 보급품이 떨어지면 살기 위해 스스로 식량이 되는 것을 찾아 나서고 그것으로라도 연명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제1대대는 2월 21일 영월군 영월면 거운리 부근에 이르러 신병산과 팔운산을 공격키로 하였다. 이때 1m이상 눈이 쌓여 있는데다 때 아닌 폭우가 쏟아져 현수병은 다른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벌벌 떨었다. 더구나 눈과 비로 보급도 차단되어 굶게 되었다. 산중에 띄엄띄엄 지어진 초라한 화전민들의 가옥이 보였다. 전란중이라 젊은이는 없고, 초라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살고 있었다.
현수병 등은 “배가 너무 고프니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하고는 다짜고짜 집안으로 들어가 옥수수, 콩을 포켓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생콩을 그대로 입에 넣어 씹어보았다. 날콩이지만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아마도 기아가 미각을 마비시켜 버린 듯했다. 그 집에서 콩과 옥수수를 몇 줌씩 병사들이 가지고 나오자 어느덧 동이 나버렸다. 현수병은 쉬는 시간에 콩을 볶아서 정신없이 먹던 중에, 문득 그 어르신의 멍한 눈매가 떠올랐다. 총이 무서워 아무 말도 못하고, 식량과 종자를 다 빼앗긴 그 어르신들이 어떻게 춘궁기를 연명하고, 씨앗들이 없으니, 파종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강도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을 깨달으니 후회가 구름처럼 몰려왔다. 배고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질렀다지만 자신의 배고픔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후안무치한 철부지 짓이었다. 그때 아무 말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원망하시던 5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회한의 아픔으로 남아 자책하며, 마음속으로나마 그 할아버지, 할머니께 잘못을 빌고 있다.
□ 경기관총사수가 소총수가 되다
해병 제1연대는 수도서울을 기키기 위해 1952년 3월 17일 강원도 양구에서 서부전선인 장단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대치하고 있는 적은 중공군 제115사단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감제고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 즉시 해병연대는 진지보강을 서둘렀고 연대OP를 임진강서안인 도라산에 두었으며 사천강 동쪽에는 북으로부터 67고지, 36고지, 87고지에 전초진지를 두었다. 이 67고지와 36고지는 제1대대, 87고지는 제3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이러다가 1952년 10월 2일 추석전날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동북쪽 판문점 부근에 설치된 중공군의 포대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일더니 3개 전초 진지에 소나기 퍼붓듯이 포탄이 날아왔다. 그와 더불어 중공군은 서쪽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와 3개 전초지지는 실함되었다. 그러자 10월 4일 해병 제1대대는 도라산 부근에 있던 제2중대보병들을 출동시켰으나 중공군의 소나기 포탄으로 아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낼뿐 67고지 탈환에 실패하였다.
그래도 무적해병이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67고지 공격을 재개했다. 10월 5일 제1대대의 보병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지라 박격포와 경기관총의 사수, 부사수, 탄약수 등과 행정병을 쓸어 모아 70여명으로 1개 중대를 편성하여 67고지를 탈환키로 하였다. 이 때 현종헌 경기관총사수도 기관총을 반납하고 M1소총을 지급받아 소총분대장이 되었다. 이 엉성한 중대는 제3중대장이었던 고문갑 중위가 지휘하여 678고지 가까운 집결지로 이동하여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배후에서 적의 포탄이 마구 떨어져 이곳저곳에서 작렬했고 병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포탄에 산산조각이 나기도 하였다. 이때 지휘를 맡은 고문갑 중위가 돌격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현분대장은 67고지를 향해 중공군의 포탄을 피하며 돌진하였는데, 뛰다보니 맨 선두에 서 있었다. 다행히 뒤에도 병사들이 따라오고 있어 살기 아니면 죽기로 정상으로 치달았다. 고지 위에는 수많은 아군시체가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이를 보며 현 분대장은 적개심에 불타올라 대검을 빼들고 적을 찌르고 또 찔러댔다.
그렇게 정상을 일단 정복하였으나 동북쪽에서 중공군포탄이 수없이 날아오고 서북쪽에서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려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남아있는 아군은 현 분대장 등 5명뿐이었다. 이 때 철수명령이 내려 물러나려는 찰나에 포탄 한발이 지근탄으로 떨어져 그 파편이 현 분대장의 양쪽다리에 여러 개 박혔다. 어느새 다리는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중공군이 지척에서 붙잡으려하자 현 분대장은 고지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내렸다. 그렇게 평지에 이르렀더니 그곳에도 방망이 수류탄을 가진 중공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생각하다가 중공군이 총이 없는 것을 알고는 온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다 보니 적의 사정권을 벗어났고, 후퇴하는 아군을 만날 수가 있었다. 다행이 현 분대장은 그들의 부축을 받아 집결지에 이르렀다. 그 즉시 현 분대장은 차량 편으로 미 야전병원에 긴급히 옮겨져 양다리 수술을 받고 며칠 후 인천항에 정박한 병원선에 옮겨 2차 수술을 받았다. 그 후 진해해군병원, 제주 제3해군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현 분대장은 이 때 공로로 1952년 12월 12일 충무무공훈장을 수상하였고 상이 6급 판정을 받았으나 의병제대를 원치 않았고 다시 해병대 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 그리운 고향으로
현종헌 이등병조는 1955년 12월 7일 만기제대를 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부산부두에 이르렀으나 배표를 살 돈이 없어 처량한 모습으로 방황하였다. 마침 동기생 오창주도 제대하여 배를 타러 왔다. 반갑게 안부를 묻고 선비를 그에게 빌려서 제주까지 왔다. 그리하여 고향땅을 밟으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집 떠난 지 손꼽아 세어보니 5년 3개월, 그동안 누볐던 인천, 서울, 강원도, 함경도, 경기도 전선에서 포성의 메아리가 지금도 다시 들리는 듯 했다.
현종헌 용사는 이제 백발이 드리운 노인이 되었으나 아직도 파편이 몇 개가 다리근육에 박혀 있다. 그 후유증으로 여름철에도 양말을 신고 살아야 할 정도이며 그 후 10년 이상 척추협착증을 앓다가 2004년 수술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뇌졸중까지 발병하여 2006년에 또 수술을 받았으나 양쪽 귀마저 잘 들리지 않는 상태로 있다. 그러나 그 빛바랜 훈장과 빨간 명찰을 바라보노라면 불현 듯이 해병의 긍지가 되살아나곤 한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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