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雲住寺)>
사찰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을 준다. 사하촌, 진입로, 일주문, 천왕문, 사천왕상 그리고 대웅전, 옆의 부속건물들마저 그 크기나 위치가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운주사는 한눈에 이렇게 다른 사찰도 있구나, 놀라는 곳이다. 높고 딱딱한 형식은 다 분해하였지만, 낮고 부드러운 전통은 이곳저곳에 다 남아 낯선 절이 편안하다. 마치 전생 어디에선가 본 것같이.
특히 영주 부석사와 비교하면 나로부터 높고 낮은 것, 가깝고 먼 것으로 구분되는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수직의 부석사와 수평의 운주사는 절의 끝과 끝일 거다. 그 한끝 운주사에 수평으로 펼쳐진 불교의 세계가 우리 마음의 세계일 듯하다.
1. 대강
명칭 : 운주사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도암면 천태로 91-44(대초리 21)
전화 : 061-374-0660
방문일 : 2021.6.16.
*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麻姑)할미가 세웠다는 설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 중 도선창건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영암 출신인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곳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도력(道力)으로 조성하여 놓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절에서 멀지 않은 춘양면에는 돛대봉이 있다. 돛대봉에 돛을 달고 절에서 노를 젓는 형세라 한다. 또 절을 지을 때 신들이 회의를 열었다는 중장(衆場)터(일설에는 승려들이 장터를 이룰 만큼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함.)가 멀지 않고, 신들이 해를 묶어놓고 작업하였다는 일봉암(日封巖)도 가까이에 솟아 있다.
절의 이름을 운주사(運舟寺)라 한 것은 풍수상 움직이는 배 모양의 땅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법당을 비롯한 석불과 석탑이 크게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18세기에 자우(自優)가 불상과 불탑을 수리하고 약사전을 중건하였다. 당시는 약사사(藥師寺)라고 불렀음을 각안(覺岸)이 지은 「능주운주동(綾州雲住洞)」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921년에 간행한 『도암면지』를 보면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김여수(金汝水) 등 16명이 시주하여 중건하였음이 나와 있고, 최근에도 중창불사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한편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승 혜명(惠明)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을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1495년(연산군 1)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89년 4차례에 걸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 결과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초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백과 전재)
2. 둘러보기
일주문. 영구산운주사
들어가면 왼쪽으로 멀리 석불 무더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대웅전에 봉안되어도 손색이 없을 부처가 우리 보통사람들처럼 그냥 길에 나앉아 있다.
주변에 91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이 흩어져 있다. 석불은 파손된 것도 많은데, 완형은 50구다. (석불의 수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난가. 자료 조사 시기에 따른 차이가 아닌가 한다.
알 만한 부처님을 만나셨는가.
구층석탑. 보물 796호다. 고려조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운주사지에는 석탑 2개와 석조불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층상응회암. 앞에 역시 석불이 있다.
운주사 칠층석탑
광배석불좌상
*석조불감 앞 칠층석탑
*운주사석조불감. 보물 제797호
감실 안에는 2구의 석불이 가운데 세워진 1매의 판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맞대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에 보이는 "雲住寺在千佛山……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
북향한 불상도 같은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두 손은 옷 속에 감싸여 있어 정확한 수인(手印)을 알 수 없다. 특히 옷주름이 어깨 위에서 내려오면서 가슴 앞의 손 부근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매우 도식적이다. 이 불상들은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표현이나 밋밋한 체구, 도식화된 옷주름 및 치졸한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보여준다.
석조불감 역시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결구방식이 세련되지 못한 점 등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석재로 만든 거대한 크기의 불감이라는 점이나 감실 안에 2구의 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는 보기 드문 예라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백과)
운주사 원형다층석탑. 보물 제 798호.
높이 571cm. 2단의 지대석 위에 단층의 기단이 놓여진 석탑으로 지대석·기단부·탑신부가 모두 원형으로 되어 있다. 현재 탑신부가 6층까지 남아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그 위에 몇 층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원형으로 된 형태와 구성 등이 모두 일반적인 석탑형식에서 벗어나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한 이형석탑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다음백과)
원형다층석탑, 석조불감, 7층석탑 순으로 나란히 서있다.
*범종각
중생 대신 벼락맞은 탑?
대웅전
대웅전 내부
지장전
지장전 내부
원구형 석탑
산신각
산신각과 내부
미륵전과 내부
발형다층석탑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
시위불?
와형석조여래불
*칠성바위
여기까지 올라와서 보고, 이제 하산 길로 접어든다.
3. 관람후 : 고귀한 극락과 비천한 인간세는 하나
다시 일주문을 만나 뒤로 하고 속세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기저기 수없이 늘어져 있는 부처들 마냥 나도 부처세계에 오니 그 하나가 된 거 같다. 인간세 수많은 인간의 하나로 돌아간다. 엄숙하기보다 편안하고 존귀하다기보다 소탈한 부처의 모습은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거 같다. 부처 세계, 욕망을 내려놓은 부처의 세상이니 극락 아니겠는가. 부처세계에도 대웅전의 석가보니, 지장전의 지장보살 등 이름난 부처님이 계시겠지만, 평온한 미소를 짓는 온전한 불상 가운데는 심지어 깨지거나 마멸되어 원래 모습이 훼손된 부처도 있고, 어떤 부처는 아마 훼손되기 전에도 별로 화려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은 듯한 부처도 계시다. 잘난 인간, 못난 인간 있는 인간세와 그리 다르지 않은 거 같다.
어쩌면 부처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고, 인간의 세계가 부처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존귀하기만 한 사람 없고, 비천하기만 사람 없다. 운주사의 부처는 인간세의 너무 수직적인 차등 관념을 부숴주기 위해 몸소 부처의 모습으로 화해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너무 존숭하지 말 것, 인간을 너무 비하하지 말것, 자신을 너무 추켜세우지도 낮추지도 말 것, 모두 소중한 사람이니 서로 소중하게 여기며 살 것,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면 너무 교훈적인 관람인가.
운주사의 모든 석탑과 불상은 조각수법이 비슷하여 이름없는 석공이 평생 만들어 놓은 것일 수 있다고도 한다. 한갖 이름없는 석공의 손에서 나온 고매한 세상, 고매한 부처는 이름없는 석공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이름없는 비천한 석공이 이런 고귀한 세상을 만들어냈다. 고귀한 세상이 비천한 석공이고, 비천한 석공이 고귀한 존재이다. 나 자신을 비하도 말고, 자만도 말자.
#화순가볼만한곳 #화순운주사 #천불천탑 #운주사구층석탑 #운주사석조불감
*관람일과 탑재일이 너무 먼 점,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