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행복하십니까? / 마 5:1-12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가 제1차 유대와 로마 전쟁입니다. 66년에서 70년까지 5년 동안의 전쟁으로, 유대인의 숫자는 반토막 납니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되고 함락 직전에 놓였습니다. 성안에서는 로마에 항복하자는 측과 다 죽더라도 끝까지 저항하자는 측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 성안에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협상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꾸미고 관 안에 숨어, 성에서 나와 로마군 사령관을 찾아갑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한 가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항복하고 성문을 열어 당신들에게 투항할 것이오. 그 대가로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십시오. 지중해 해변의 작은 마을 야브네(얌니아)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곳에 작은 방 한 칸의 교실이라도 좋으니, 학교 하나만 그곳에 지어 주십시오.” 장군은 랍비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전쟁이 아직 끝나기 전에, 네로 황제가 죽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아들 티투스에게 랍비와의 약속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티투스에 의하여 70년 예루살렘은 무너졌지만, 그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랍비 벤 자카이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야브네로 가서 작은 학교를 세웁니다. 황제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들 티투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작은 학교 설립을 돕습니다. 이 학교는 백성을 가르치는 랍비를 길러내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도 사라졌지만, 말씀을 가르침이 계속되어 1,900년이 지나서 꽃을 피웠습니다. 랍비 벤 자카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나라가 없어도, 심지어 보이는 성전이 없어도, 말씀이 유지되면 나라도 신앙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교육이 우리의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예배당에 모일 수 없거나 모이는 인원에 제한을 받아도 다음세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마태복음을 설교하면서 순서에 의해 산상설교를 살펴보는데요,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이 ‘어떻게 이걸 다 지키며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높은 수준의 윤리는 거의 우리 죄인들이 지키며 살기에 불가능해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도 산상설교를 실제로 다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 그래서 우리가 도저히 그 수준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인지를 상기키시켜 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산상설교를 그저 읽고 이해하기만 할 뿐, 굳이 힘들게 지키려고 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면 마음은 훨씬 가벼워집니다만, 정말 그런 용도로 이 긴 설교문을 마태복음은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산상설교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산상설교는 율법해석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의 종노릇하던 히브리인들을 구출해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기 전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명령이 곧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그들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알려 줍니다. 이 율법을 받고 지킴으로써 이 히브리인들은 더 이상 남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는 마치 학생이 되면 학칙을 지치고, 군인이 되면 군법을 지키고, 한국시민이 되면 한국법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지키는 법이 곧 그가 어디에 속한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종은 지킬 법 따위는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종입니다. 배만 부르고 생존만 하면 될 뿐, 스스로 결단하고 지켜야 할 법 따위는 없는 것이 종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그가 속한 나라, 단체, 조직의 법을 지킴으로써 그 공동체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이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시작하면서,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둘째로율법은 그들이 살게 될 가나안 땅에서 복지를 보장합니다. 교통법규를 지켜야 안전하고 편안한 운전이 되고, 한국법을 잘 지켜야 한국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듯,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 1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15:4-5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산의 율법을 제자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설교의 장소를 시내산을 상기시키는 팔복산으로 정하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윤리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지침입니다. 우리가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지킬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국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이 드러납니다. 마 5: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박제된 동물머리처럼, 또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유물처럼 우리의 실생활과는 상관없는, 죽어있는 옛교훈이라고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진정한 천국백성인지 아닌지를 드러내어주는 기준입니다. 이 법을 지키며 이 윤리를 따라 살지 않으면, 교회를 다니든 말든, 얼마나 오래 다녔든 상관없이, 천국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살므로 천국백성임을 확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행복을 누립니다. 산상설교의 높은 수준의 윤리가 부담이요, 짐이고, 못 이룰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테니스가 처음 들어온 것이 1880년대라고 합니다. 1880년대 중반 영국군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해서 만든 테니스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입니다. 그후에 서울 정동 분수대 자리에, 당시 서양선교사들이 테니스장을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고종이 대신들과 함께 와서 테니스를 구경했다고 합니다. 더운 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치는 선교사들을 보고, 고종이 말하기를 ‘저 힘든 일을 왜 아랫 것들 안 시키고 저리 고생하누?’했답니다. 그러자 대신들 역시 맞장구를 치기를 ‘역시 오랑캐는 어리석습니다. 아랫 것들 뒀다 뭐하고, 저리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 구한말 귀족들은 테니스의 행복을 모릅니까? 그들은 육체를 쓰지 않는 것이 행복이고, 땀을 흘리는 것은 천한 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그릇된 가르침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관이 잘못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을 느끼려면 먼저 바른 행복관을 가져야 합니다. 산상설교는 우리의 그릇된 행복관을 바로 잡아줍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팔복이라는 행복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행복을 누리기 위해 따라야하는 원리를 설명해 줍니다. 그 원리가 바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팔복을 통해 행복관을 교정하고 율법의 바른 해석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고 순종하면 우리는 천국백성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여기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큰 무리가 당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는 뉘앙스가 짙습니다. 왜냐하면 1절 하반절에 곧 이어지는 말씀이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이처럼 ‘무리’와 ‘제자’를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장면이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앉으시니”라는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주로 학생들이 자리에 앉고, 선생이나 교수가 단 위에 서서 가르치지만, 당시의 관례는 그와 정반대로 스승은 자리에 앉아서 가르쳤고, 제자들은 서서 배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의 “제자들”을 꼭 ‘열두 제자’라고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산상수훈이 ‘일반 대중에게 한 설교’라기보다는 ‘제자 교육을 위한 특별한 교훈’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경우입니다. 이미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를 세우는 것은 조금 후의 일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는 무리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무리가 다 제자는 아닙니다. 오늘날도 진짜 성도는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진짜 성도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에 다니며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되어 갈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오늘 말씀 5장에서 시작하여 6장을 거쳐 7장 끝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 1절에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하였는데, 7장이 끝나고 8:1절에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합니다. 그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최상의 복 여덟 가지를 한 가지씩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여덟 가지 복이 아니라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한 가지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시민의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여덟 가지 삶의 태도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10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러분은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마태복음 기자의 진술에 동의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십니까?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각각의 문장은 ‘마카리오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마카리오이는 “행복할 것입니다.”라거나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표시가 안 되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시처럼 운율이 있는 문장으로 표현되었습니다.
11-12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11절도 ‘마카리오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렇게 보면 전체가 여덟 개의 복이 아니라 아홉 개의 복입니다. 다만 11절은 2-10절의 삼인칭과 달리 2인칭이라서 신학자들이 이를 따로 구별합니다. 11절은 앞에 나오는 여덟 개 복이 제자들의 실제 삶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그 마음이 겸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무능을 절감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지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많은 물질을 가져야 평안을 누릴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나 깨나 돈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를 가지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5: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마음 상태가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므로, 결코 천국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성도들은, 물질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통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극한 슬픔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같이 슬퍼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 자신의 죄와 부족함으로 인해 슬퍼해야 합니다.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반면에, 자기 죄와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애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도 받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애통하는 자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서 슬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웃이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서 슬퍼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사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삶을 파괴당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을 보고서 애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당할 인생들로 인해 애통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엡 4:31-32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것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남의 불행을 애통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셋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으나, 이 말씀이 실현된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든 재력을 가진 소수가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가진 자들은 금력을 이용해서 권력을 손에 넣고, 법과 제도를 유리하게 만들어 더 많은 부를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부자들 가운데는 온유한 자가 그리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런가하면 온유한 사람들은 양심적이고, 욕심이 적고 악착같지 못하고, 동정을 잘하므로 부자가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언급한 ‘땅’은 지상의 토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성도들이 들어가 살게 될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말해 줍니다.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될 사람들이 바로 온유한 자들인 것을 믿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물이 흔해서 목말라 죽는 일을 볼 수 없습니다마는, 이스라엘 땅은 우리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곳의 여름철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로서, 평균 기온이 섭씨 40가 넘습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서는 50도까지도 올라갑니다. 그런 날씨에 물을 준비하지 않고, 외딴 지역을 여행하다가는 오래지 않아 탈진하여 쓰러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물을 갈망하듯이, 그와 같은 간절함으로 의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란 인간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사람의 의로움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의란 다 더러운 옷과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의를 소유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갈구함으로, 영적 갈급함을 해소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긴다 함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우리는 끔직한 뉴스들을 너무 자주 대합니다. 어린 자녀를 학대하거나 살인하는 부모들을 보면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중병 아버지를 굶겨 죽이거나, 죽은 아이를 방에 방치하고 나가 놀았다는 부모 등,이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우리 모두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뿐 아니라, 어느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들을 착취한 사건, 또는 음식점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행패를 부리거나, 별점 테러를 한다는 등 우리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약 2: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남들을 긍휼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천국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여섯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천국인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인데,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계 21:3절을 보면, 장차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간 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인 것을 입증합니다. 한편,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육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나, 마음이 청결할 때 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통해 청결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마음눈이 밝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일곱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이란 평화와 같은 말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를 영어 표현으로는 ‘피스 메이커’라고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미워하게 하고, 싸우고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마귀가 원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불화와 다툼을 조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들과의 불화를 청산하시고, 화해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불화한 인생들과 화해하신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언제나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화평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가정 역시 화평해야 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가족이 화평하다면, 그 가정은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로, 천국을 누리려면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악하고 불의한 행위를 해서 고난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의를 위해서라면 박해 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박해나 고난이나 불이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딤후 1: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한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으니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만은, 앞의 경우와 달리 훨씬 더 길게 부연설명을 해 주시는 것을 보면, 이것이 사실은 가장 큰 복, 진짜 복 중의 복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박해”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의를 위하여”라는 조건부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도덕적 의’나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 오직 ‘영적 의’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11절에 예수님께서 그 “의를 위하여”라는 말씀의 의미를 “나로 말미암아”라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오직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지사충성의 삶 때문에, 불신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온갖 박해가 여기서 말씀하는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인 것입니다.
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바로 앞에 나왔던 ‘화평하게 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그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성도가 노력한다 해도, 현실은 완전히 평화로운 사회나 완벽하게 화평한 인간관계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과 악의 투쟁, 진리와 거짓 사이의 적대관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는 화평을 원하더라도 사탄은 오히려 ‘자기 때가 가까운 줄을 잘 아는’까닭에, 최후의 순간까지 더욱 발악하면서 성도를 집어삼키려고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참된 성도라면 반드시 ‘박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하는”일반적인 박해로부터 시작하여, 최악의 경우에는 ‘순교를 당하는 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이처럼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온갖 박해를 당하는 것은 “선지자들”부터 시작해서 ‘사도들’및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8복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덟 개의 복을 보십시오. 여덟 개 문장에서 각각 한 단어씩 추리겠습니다. 가난, 애통, 온유, 의, 긍휼, 마음 청결, 화평, 박해입니다. 한 눈으로 볼 때 가난과 애통, 그리고 마지막 박해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곧 온유와 의와 긍휼과 마음 청결과 화평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필요한 좋은 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들도 우리가 피하고 싶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는 온유한 사람이 살아가기 힘듭니다. 의에 목마르다는 말은 그가 지금 불의에 시달린다는 뜻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도 경쟁 만능의 시대에는 살아남기 힘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전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미움의 대상입니다. 한 마디로 팔복에 열거된 이들은 하나님 외에는 희망을 걸 대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팔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합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또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꼭 그럴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봐서는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가난 문제는 사회 구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 역학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한 인간을 평가할 때 경쟁력만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머리가 뛰어나지 않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고, 연봉 높은 대기업에 들어갈 수 없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값이 오를 아파트를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장애인들을 경쟁력의 관점에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인간이기를, 특히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포기한 겁니다. 정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힘이 없는 그들의 노력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여덟 가지 어려움에 떨어진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곧 그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예수의 말은 옳은가요? 값싸고 막연한 종교적인 위로에 불과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팔복의 가르침을 대할 때, 그 같은 가치관을 갖고, 어떻게 이처럼 생존경쟁이 심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단 말이냐고 의아해 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아도 부족한 터에 너무나 순진하고 무기력한 태도라고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인들에게 순진하게 성경적으로 살지 말고,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터득하라고 시험합니다. 그러나 팔복의 가르침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 55:8-9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러므로 팔복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감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천국의 능력과 부요와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섬기려고 작정하고 있는 성도에게, 그 섬김을 위해 필요한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채워 주옵소서.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주객전도의 신앙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절로 따라오게 되는 영혼의 복과 육신의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약속해 주시는 이 진짜 복을, 금세와 내세에서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사람들 / 마 5:13-20
최근 코로나팬데믹으로 어쩔 수 없이 대면과 온라인을 병행하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마땅히 예배는 자기교회의 예배당에서 드려야 하지만,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일정기간 동안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인 면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교회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우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도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다음은 부정적인 면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자기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온라인 예배 방법이 기독교TV, 유튜브, 인터넷TV, 밴드 등 다양합니다. 유튜브를 보면 가장 조회수가 많은 사람들을 ‘인플루언서’라고 하는데, 당연히 목회자들 가운데도 인플루언서가 나타났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다보면 추천영상으로 이런 인플루언서가 소개됩니다. 교인들이 흥미로 한 번씩 들어가 봅니다. 자기교회와 비교하면서 아예 온라인 예배를 그 교회로 들어가서 드리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팬데믹 이후입니다. 한 목회연구기관에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니까 코로나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예배당에 가서 현장예배를 드리지 않고, 계속 온라인예배를 드리겠다고 답한 사람이 약 20%나 된다고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마치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율법계명들 가운데,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선택했던 것처럼,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 가운데 예정된 교회로 보내셔서, 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대면예배냐 온라인 예배냐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팬데믹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팬데믹이 끝나면 당연히 대면예배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제자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충실하게 따르려면 자기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믿으려면,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냐,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아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알면 분수를 잃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이 처음에는 1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니까, 호텔 식사가 아니면 안 넘어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 했습니다. 나도 전에 1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 잘 안 넘어갔는데, 요즘에는 몇 만원을 넘기는 것도, 별 부담 없이 잘 먹어 그렇습니다. 초심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람이 왜 초심을 잃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초심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자기를 성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성찰이 소홀해지면,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다른 사람은 보는데, 자기는 못 봅니다. 다른 사람은 걱정하는데, 자기는 괜찮다고 합니다. 당연히 선한 영향력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됩니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소금과 빛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소금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돌아가신 뒤에 알고, 소금의 가치는 없어진 후에 안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원시시대의 소금은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소금을 얻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고, 소금을 해외에 내다팔기 위해 길을 냈는데, 그걸 ‘소금길’이라고 했습니다. 옛사람들에게 소금은 금 못지않은 가치를 가졌습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소금의 가치가 크게 하락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소금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금이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장병 등 소금 섭취를 자제해야 하는 질환을 지닌 환자들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일체 소금섭취를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생리적으로 소금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소금의 한 성분인 나트륨 이온을 조금이나마 필요로 하고, 혈액과 근육은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더구나 아무리 소금을 먹지 않아도, 소변, 땀 등으로 잃는 소금의 양이 하루에 1그램은 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는 소금을 섭취하여야 합니다.
고대에는 소금을 월급으로 주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월급쟁이를 셀러리맨(salary man)이라고 하는데, 영어에서 온 말이 아니라, 영어를 일본식으로 말하다보니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굳이 영어로 말하면 ‘salaried’라고 할 것입니다. 이 ‘셀러리’라는 말은 라틴어의 소금(salt)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화폐경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로마제국에서는 군인들에게 봉급 대신에 소금을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소금을 월급으로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이만큼 소금은 곧 돈이었고,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가면 ‘잘츠부르크’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활동한 곳으로 음악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소금을 salt라고 하는데, 독일어는 salz라고 합니다. 잘츠부르크라는 곳은 독일어로 소금광산이라는 말로 이곳은 내륙이지만, 옛날에는 바다였기에 소금이 많이 나는데, 암염입니다. 소금광산으로 널리 알려지고 부유한 도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소금이 안 쓰이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소금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습니다. 단맛을 주는 설탕 대체물은 여러 가지가 시중에 팔리고 있으나, 소금 대체물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소금입니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서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곧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아닌,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었는 핵심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 기능을 합니다. 물론 짠 맛을 냅니다. 그런데 짠맛만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맛을 더 진하게 내줍니다. 옥수수를 삶을 때, 물에 설탕과 함께 소금을 넣으면 단맛이 더 강해집니다. 토마토나 삶을 감자를 먹을 때, 소금을 찍어 먹으면 달고 맛이 더 있습니다. 보리차를 끓일 때도 소금을 조금 넣으면, 향이 더 좋아집니다. 커피 마실 때도 소금을 조금 넣으면, 향도 좋아지고 정력증진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맛을 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내 색깔을 내는 것과 함께, 다른 사람의 색깔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색깔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가 그 사람의 보색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소금은 썩지 않습니다. 소금이 썩었다는 말을 들어봤습니까? 소금은 자신이 썩지 않을뿐더러, 다른 것을 썩지 않게 돕습니다. 야채, 생선, 육류 등 다양한 식품을 소금에 절이면, 미생물의 번식을 막아 이들을 장시간 보존할 수 있게 합니다. 껍질을 벗긴 과일을 소금물에 담궜다가 꺼내면, 오래 두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소금으로서 내가 썩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썩지 않아야, 세상의 방부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소금은 씻을 때도 사용됩니다. 논에서 우렁이를 잡았다 하면, 소금물로 씻습니다. 추어탕을 하기 위해 미꾸라지를 잡았다 하면, 소금으로 씻습니다. 전주에서 유명한 닭내장탕도 소금으로 씻습니다. 바다조개를 잡았을 때도, 소금물에 담궈 놓으면, 흙이나 모래를 토해냅니다. 옷에 피가 묻었을 때도, 소금물에 담궈 핏물이 빠지면, 비벼서 빨면 됩니다. 심지어 건어물의 짠맛이 너무 강할 때도, 소금물에 담궈 두면, 주변의 소금물과 같은 염분 농도가 되기 위해서, 건어물 속의 소금이 용해되어 나옵니다. 오늘날의 소금은 치약, 화장품, 약품, 화학품 등 활용도가 보다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소금을 얻는 것이 예전보다는 쉬워졌지만, 그래도 소금을 얻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소금을 만드는 데는 수고가 따릅니다. 주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습니까? 피 흘리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금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소금이 아닌, 세상의 소금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란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유익을 주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건 녹을 때 가능합니다. 녹아서 소금의 형체마저 없어질 때 가능합니다. 소금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기능도 못합니다. 녹아야 맛을 내고, 녹아야 기능을 발휘합니다. 소금이 녹는 것은 다른 말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생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큰맘 먹고 희생을 해도, 세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알아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운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소금된 우리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데....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다음은 빛입니다. 소금이 자기를 숨기고 희생해야 한다면, 빛은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소금은 소멸되면 기능이 발휘되고, 빛은 나타나야 기능이 발휘됩니다. 빛은 숨으면 안 됩니다. 빛이 숨으면 주위를 비추지 못합니다. 빛은 자신을 숨길 수도 없고, 다른 것도 숨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이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현실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과 섞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은 무엇으로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어떤 무력으로도 어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 이름으로 어둠은 떠나가라고 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빛이면 가능합니다. 태양빛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호롱불도 어둠 앞에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어둠은 불같지도 않은 반딧불조차도 이겨내지 못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은, 세상이 어둡다는 전제를 한 것입니다. 정오에 무슨 빛이 필요하겠습니까? 태양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다면, 어떤 빛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필요합니다. 어둠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눈감고 잠자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주님이 보신 세상은 어둠입니다. 그것도 빛을 환영하지 않는 어두운 세상입니다. 사실 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의 속성상 빛을 거부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얼마나 죄악과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한지, 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 3: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어둠에 만족한 세상은 빛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빛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빛으로서 세상에 나갈 때,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빛 그 자체이신 예수님도 배척받으셨다면, 우리가 빛으로서 배척받는다면 영광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제대로 된 빛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닌 반사체입니다. 태양이 아닌 달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반사하는 것입니다. 달이 밝아봤자 태양처럼은 아닙니다. 그래도 보름달 같은 경우, 사람들이 활동하기에 큰 제약이 없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태양처럼 밝게 비출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보름달이면 족합니다. 전등불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 보름달도 밝은 편입니다.
원래 달은 둥그렇습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달’그런데 보면 반달도 있고, 눈썹달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가려서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 눈에는 달의 밝은 면만 보입니다. 원래는 둥근달인데, 보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보름달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로 충만하면, 세상을 보름달로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승달, 그믐달처럼 희미하게 비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달이란 이름은 가졌지만, 빛으로서 별 영향력이 없습니다. 또 반달로 비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노래는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반달은 반쪽짜리 달이지, 온 달이 아닙니다. 비추는 기능을 50%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반쪽 달입니다. 나는 ‘반달’보다 ‘둥근달’이란 노래를 좋아합니다. ‘보름달 둥근달 동산위로 떠올라 어둡던 마을이 대낮처럼 환해요 초가집 지붕에 새하얀 박꽃이 활짝들 피어서 달구경 하지요’ 가사가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작사자인 윤석중 씨가 기독교인인지는 모르지만, 내용만 놓고 보면 꽤 복음적입니다. 자신을 달에 비유했을 때, 어떤 달인지 진단해 보세요. 초승달이나 그믐달로 희미한 빛은 아닙니까? 혹 반달로 반쪽짜리 빛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산위에 떠오른 보름달처럼, 어둡던 마을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빛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면, 우리에게 시선이 모아집니다.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영광이라도, 내가 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가운데 우뚝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면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들, 얼마나 높아지겠습니까? 요셉이 스스로 높아지고 했다면, 말단 공무원도 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높여주니까, 단숨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계산 잘 해야 합니다.
어느 날 제가 커피숖에서 앉아 목사님들을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제가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하도 큰소리로 수다를 떨어 그냥 자동적으로 들린 겁니다. 그런데 그분들 수다의 주제가 놀랍게도 자기네 동네에 있는 교회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옆에 앉은 제가 목사인지 몰라서 그런 얘기를 했겠지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거, 왜 우리 동네 ○○교회 있잖아? 그 교회 목사가 글쎄 ‘사고’를 쳐서(무슨 사고인지는 저도 몰라요)나가라고 난리인데, 못 나간다고 버텨서 싸움이 났다네. 일요일에 그 교회 앞에 지나가면서 보니까, 소리 지르고 멱살 잡고 끌어내고, 정말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야.”괜히 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아주머니가 한 한 마디가 망치처럼 제 뒤통수를 ‘꽝’하고 치는 겁니다. “내가 교회는 안 다니지만...”그 다음에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 교회는 교회도 아니야!”아!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정말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불신자들도 그들 나름대로 “이런 게 진짜 교회다.”라는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요.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때 “뭐 교회도 안 다니는 불신자들 말에 신경 써?”하고 무시해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그 불신자 아줌마의 말이,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의 말이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교회면 교회라는 이름값을 하든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던지!”나아가 우리 성도들을 향한 그들의 말이, 그들의 지적과 손가락질이 이런 의미로 들릴 수도 있겠지요? “성도면 성도라는 이름값을 하든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던지!”그들은 대체 우리의 무엇을 보는 것일까요? 우리 교단의 헌법을 보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교리를 보겠습니까? 예배를 잘 드리나 선교나 전도를 잘 하나 보겠습니까? 오직 그들이 보는 것은 하나, 우리의 행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우리 교회가 하는 모습, 우리 성도들이 하는 행실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어떻게 반응한다는 겁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행실이 ‘착하지’못하고, 본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면, 그들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 영광에 먹칠을 하게 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조롱까지 할 것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했던 맥스웰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힘썼던 사람입니다. 한번은 힌두교도인 인도인에게 그 지방 말을 배우고 싶어서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정중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제가 기독교인이 될 것 같아서 거절하는 것입니다.”맥스웰 선교사가 “제가 절대로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 안할 테니까 말만 가르쳐 주십시오.”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맥스웰 선교사의 삶 자체가 예수님을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증거입니다.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에 이어, 자신이 왜 왔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가, 반율법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정상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자기들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민중들이 예수님께 열광한 이유 중에 하나도, 종교 귀족층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가르치는 율법 교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율법 교훈을 따르면 자기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자기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에게서 말씀의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말씀 한 마디에 귀신이 떠나가고,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메시야나 할 수 있는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서는, 율법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에 대해 자기들과 다른 해석을 하는 예수님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율법 완성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율법 폐기자가 아닌 율법 완성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기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는데, 왜 안 드리고 있습니까? 그들은 안 드린다기보다 못 드리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성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서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이슬람교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제사를 어떻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구약에 나온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 이유가 유대인들과 다릅니다. 제사를 정한 율법이 폐기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율법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죄를 위한 희생 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사죄를 완성하셨습니다. 히 9:12-14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율법도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는 이루어진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법이 대표적입니다. 계속 지켜야 할 것도 있는데,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윤리법입니다.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는 교훈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윤리법은 교훈을 받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주님의 율법 해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법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읽어야 합니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계명을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중요한 계명, 덜 중요한 계명, 큰 계명, 작은 계명 등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계명은 중요하니까 꼭 지켜야 하고, 이 계명은 덜 중요하니까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크고 작음을 말했지만, 주님은 천국에서 크고 작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친다고 천국에서 제하여 지옥에 보낸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천국도 모두에게 같은 천국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등급이 있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이 땅에서 차별 대우 받는 것도 서러운데, 천국에 가서까지 차별 대우 받는다면, 얼마나 서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서야 기꺼해봤자 몇 십년이지만, 천국은 영원합니다. 영원히 다른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여, 내세의 면류관과 함께, 이 땅에서 100배의 복을 받기 바랍니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의 수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높게 책정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준수에 엄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수입의 십일조를 드렸고, 안식일을 칼 같이 지켰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보다 우선순위는 없었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의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낫다고 보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됩니다. 교회 규모가 클수록 그 %는 더 떨어질 것입니다. 주일성수는 또 어떤가요? 예전엔 주일 새벽기도회부터 저녁예배까지 드렸습니다. 잠깐 집에 갔다 오는 거고, 종일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일예배 한 번 드리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52주를 본 교회에서 예배드린 사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우리가 외적인 면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열정이, 그들보다 확연히 앞설까요? 주일성수와 예배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클까요? 물질을 대하는 태도가,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를까요? 무엇 하나 그들보다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겸비해야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못한 “내 의”를 내세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으로서 세상에 녹아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으로서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자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감으로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가정과 일터와 사회가 살맛이 나고, 행복이 느껴지고, 삶의 보람도 느껴지는 큰 변화의 주역이 되게 하옵소서. 착한 일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성도로 인정받게 하옵소서. 천국에서 큰 자들은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들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아가려고 힘쓰는 중에, 천국에서 가장 큰 자로 일컬음을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 마 5:21-37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아니 혼자 살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 2: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요즘은 나홀로 족이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체 가구의 1/4이 1인 가구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냥 혼자 사는 것이 아닌, 혼자서도 잘 놀고 즐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혼놀족’을 위한 공간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남자들의 생활이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MBC의 ‘나혼자 산다’는 프로그램입니다. 채널을 돌리다 한 두 번 봤는데, 시답잖은 내용이긴 했지만, 시대의 문화코드를 읽는 셈치고 봤습니다. 그들은 모임 이름을 무지개로 정하고, 서로를 회원님이라고 부릅니다. 회원들은 혼자 살면서 느끼는 불편함과 고민을 함께 나눕니다. 이들은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싸와서 같이 나눠 먹기도 하고, 새로 영입하고 싶은 회원을 물색하기도 했습니다. 또 앞으로 알고 있는 살림정보를 나누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안 쓰는 물건은 벼룩시장을 열어서 교환하자며 의기투합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역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전엔 배가 고파도 혼자서는 식당에 가지 못했는데, 요즘엔 혼자서도 밥을 먹는 ‘혼밥족’을 종종 봅니다. 아예 1인용 칸막이 식당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일본에 그런 식당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 대학가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모양입니다.
그래도 혼자 하면 이상한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노래방 가는 것입니다. 노래방이 어떤 곳입니까? 주로 모임의 식사나 술자리 후, 함께 여흥을 즐기러 가는 곳 아닙니까? 하지만 대학가엔, ‘혼놀족’을 겨냥한 ‘동전 노래방’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습니다. 소파와 테이블 대신 노래방 기계 하나만 달랑 있는, 1평 크기의 노래방입니다. 보통 500원에 노래 2곡을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혼자 오는 손님이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종업원 없이 운영되는 ‘무인 노래방’도 등장했다고 합니다. 또 영화관입니다. 영화관은 대표적인 데이트 장소였고, 누군가와 함께 관람해야 제맛이 나는 곳입니다. 영화 매니아여서 혼자 영화를 즐긴다면, 집에서 DVD를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닙니다. ‘최근 함께 영화 본 사람이 누구냐?’는 설문지 문항에, ‘혼자’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2013년에 8.2%에 불과했는데, 2016년엔 44.5%를 차지했습니다. 최근엔 50%를 넘었습니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 다니는 최모 군은 매달 1~2차례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데, 혼자 가는 이유로 어차피 영화를 보며 대화를 할 것도 아닌데, 굳이 친구와 함께 볼 필요가 있냐고 했습니다. 치맥은 들어봤을 거고, 그럼 ‘책맥’이라고 들어봤습니까? 싱글족들의 대표적인 취미인 독서와 2·30대들이 많이 찾는 맥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책맥’카페도 등장했습니다. 손님들은 맥주를 주문한 후, 자연스럽게 1인용 소파나 바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취한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게 가능할까 궁금해서 기자가 물었는데, 책바를 경영하는 사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전문 서적은 들여놓지 않아요. 반대로 소설이나 시는 오히려 좀 취해야 더 몰입할 수 있지 않나요?”
오늘 살펴볼 말씀은 혼자 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것들입니다. 율법이나 계명은 공동체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면 율법도 계명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지금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게 쉽습니다. ‘너 알아서 살아라’하면 어렵습니다. 어떤 식당에 갔더니 이런 메뉴가 있습니다. ‘아무거나’식당에 들어와 메뉴를 정하는데 “뭐 먹을 거냐?”고 물으면 “아무거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계발한 메뉴가 ‘아무거나’입니다. 말 그대로 식당 주인이 알아서 아무거나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네가 알아서 살아라’하면 힘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절하게 구체적으로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웃은 이렇게 대하라, 종은 이렇게 대하라, 물질은 이렇게 대하라, 가축은 이렇게 대하라 등. 오늘 말씀은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게 해석상의 차이가 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본 뜻은 그게 아닌데, 율법학자들이 잘못 해석을 함으로 예수님이 그 본 뜻을 바로 잡아 준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데,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지나치게 의역을 해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묵시가 나오는 에스겔이나 다니엘, 요한계시록 등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필요하고 성서학자가 필요합니다.
이단도 성경을 말합니다. 아니 어쩌면 더 성경에 집착합니다. 자기들만이 가장 성경적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기존 교회는 비성경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왜 그들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분명히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데 왜 잘못됐습니까? 성경 해석을 자의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과 의역을 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에 성경을 짜 맞춥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나는 성경을 복음서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신서를 복음서의 관점으로 보고(바울서신을 예수의 눈으로 해석하고), 구약도 복음서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왜 복음서의 관점입니까? 복음서는 예수님이 직접 육성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경전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앞뒤 짝이 맞고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구성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책간의 충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은 물론이고 서신서간에도, 수신자의 상황에 따라 말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걸 복음서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계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1.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1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서 옛사람은 모세를 가리킵니다. 사실 계명은 단순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거기다 주님이 살을 붙이셨습니다. 물론 율법에 살인자를 심판에 처했음을 감안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율법을 들었습니다. 율법교육은 어려서부터 필수입니다. 현용수 교수에 의하면, 유대인은 자녀가 세 살만 되면 율법을 줄기차게 가르칩니다. 유대인은 조기교육으로도 유명한데, 조기 교육에 ‘세 살 신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살이 넘으면 이미 늦다는 얘기입니다. 유치원에서는 안식일에 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연습시키고, 학교에서는 아침 7시부터 1시간 동안 기도를 드린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오전 내내 종교교육만 해도, 수많은 수재가 배출됩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길은, 세상 학문에 있지 않고, 지혜와 슈르드(삶의 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머리를 비울 틈을 주지 않습니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여유마저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중심이 아니라 세상중심인 가정은 중3이 되면, 교회학교 학생회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하면 잘해야 학생회 다시 나오고, 아니면 교회 졸업을 합니다. 고3되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이 세상 학문에 있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1등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학 진학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지 않습니까? 2020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학진학률이 OECD 국가 중 최고였습니다. 대학진학률이 72.5%이고, 대학교육 이수율이 66%였고, 고교 이수율은 98%였습니다.
현용수 교수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율법은 곧 선악을 구별하는 가치 기준이다. 세상의 법은 현행법만 있으나, 유대인의 법에는 종교법, 양심법, 윤리와 도덕법, 현행법 및 생활하고 생각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법은 그들의 인성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결국 인성이란 말입니다. 인성을 무시한 지성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성과 인성, 인성과 지성을 겸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런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합니다.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겸비할 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말과 자기 성질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 잘못하여 일을 망치곤 합니다. 성질 한 번 잘못 부려 판이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불어 살면서 “살인하지 말라”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율법이 여러 가지로 말했지만, 그것들은 살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타인을 실제로 살해하는 경우만 살인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해석하셨습니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에서 “노”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함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입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에서 “라가”라는 말은 아람어로 ‘텅 빈 머리, 멍텅구리, 바보’라는 뜻입니다. 곧 ‘야 이 돌대가리야, 야 이 멍청한 놈아, 아이고, 이 꼴통!’등의 의미입니다. 나아가서 이 말은 사람을 사물이나 동물에 비교하여 비하시켜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말들은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련함’을 ‘지혜의 반대’로 여기고 ‘미련하면 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미련한 놈”이라는 말은 ‘인생 종친 사람, 볼 짱 다 본 사람, 곧 죽을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곧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불경한, 불신앙적인’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참 신앙 하나도 없네! 어찌 예수를 믿어도 그것밖에 안 되나! 믿을려면 쫌 제대로 믿어라!’등의 표현과 같다는 말입니다. 곧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한 재판관이 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도,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다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과는 해석을 달리한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것과 공회에 잡혀가는 것,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그건 살인자가 받는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노하는 것과 욕설하는 것과 미련한 놈이라 하는 것을, 사실상 살인에 견준 것입니다. 인격적인 살인까지도 살인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노한 것과 살인은 엄연히 다릅니다. 욕설한 것과 살인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미련한 놈이라고 한 것은 살인과 차원이 다릅니다. 다만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며,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명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목회하면서도 가장 힘든 사람이 ‘자기 의’가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고생합니다. ‘자기 의’가 깨질 때까지 고생을 겪습니다. ‘자기 의’가 깨져야 ‘그리스도의 의’가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좀 더 높은 차원의 말씀을 하십니다.
23-26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예배에 적용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멀쩡하게 제사 드립니다. 거룩하고 엄숙한 의식을 따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맘속에 있습니다. 그리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제사를 드립니다. 이게 우리 이야기가 아니면 좋겠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예배드릴 사람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요? 예배 인도자인 나부터도 아내나 자식들한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없지 않을 거 같습니다. 예배를 수직적인 관계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함께 예배하는 형제와의 관계에 이상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떠날 수 없고, 목회자 얼굴은 보기 싫고, 그래서 교회 기둥 뒤에 숨어서 예배하는 것은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저 사람 꼴보기 싫어서 교회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자기는 천사처럼 예배한다면 그것 역시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예배의 열납 여부는 어쩌면 교회당에 오기 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한 주간의 삶에서 형제와 화목하게 살았으면, 그 형제와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더 없이 좋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즐거운 축제입니다. 나 먹고 살기 바빠서 한 주간 내내, 형제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급히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한 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한 동안 못 만났지 서머서먹 이상했었지’그러니 예배에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형제 간에 얼굴보기가 서먹서먹한데, 아버지 얼굴이 친근하겠습니까? 예배는 아버지도 만나지만, 한 주간 동안 흩어져 지내던 형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형제가 많아야 축제가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 왁자지껄해야 축제 같습니다. 우리교회가 매주 예배의 감격이 넘치면 좋겠습니다.
2.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7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혼자 산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십계명 중 인간과 관련된 5-10계명을 보면,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10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정글이 되고 맙니다. 정글이 어떤 곳입니까? 양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입니다. 거기선 힘센 놈이 대장입니다. 진리도 없고 논리도 없고,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공동체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필요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여러 계명을 주셨습니다. 간음이란 부정한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성은 거룩하지도 그렇다고 세속적이지도 않습니다. 부부 간의 성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관계는 거룩하기까지 합니다. 성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말은, 잘못 되면 그만큼 추해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백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순백의 순결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또 냄새는 얼마나 그윽한가요? 하지만 시들면 더없이 추해 보입니다. 냄새까지도 악취가 납니다. 지혜자는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잠 5:15-18절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은은한 성교육인 것 같습니다. 자기 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안의 샘물이 집 밖으로 넘쳐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간음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가 3가지 있습니다. 식욕, 성욕, 명예욕입니다. 이 세 가지 욕구는 발전적인데, 그 중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성욕입니다. 이 성적 욕구는 매우 자극적이고 무서운 독을 품고 있으며 파괴적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세기 이전 시대에는 성적 욕구를 통제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로부터 개방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에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되었고, 2015년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남녀 간에 이뤄지는 애정에 관한 일들에 대하여 정부가 간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관리하고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TV 토론 프로에서 발표한 설문 조사에서 대학생의 67%가 혼전 동거를 찬성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것은 그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학교 보건교과서에 콘돔 사용법과 각종 피임법을 수록하고 가르치는 학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대단히 긍정적이고, 심지어 초등학생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녀 간의 관계를 넘어서 동성애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2000년도에 처음으로 네덜란드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되었습니다. 그후 유럽 국가들이 합법화 과정을 거쳤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대만이 2019년 동성애 합법화를 선언하였습니다. 성 자유화, 성 개방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고 일축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간음죄에 대한 의미를 더욱 확장하셨습니다.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종교지도자들은 간음을 육체적인 성관계로만 이해했습니다.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아무리 음욕을 품어도, 육체적인 관계만 맺지 않으면 깨끗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해석하셨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봐도,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인 간음과 마음의 간음은 같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다고 보면 큰 일 납니다. 그거야말로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간음은 회개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면 그만입니다. 자기가 음욕을 품었던 여자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에게 음욕을 품었는데 용서해 주세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결혼 전의 과거도 밝혀서 좋을 게 없습니다. 굳이 신혼 첫날밤에 “사실 당신이 내 첫 남자가 아닙니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과거가 있다고 지금 와서 어떻게 할 건가요?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과거가 깨끗하고 순결을 유지했으면 뭐합니까? 지금이 깨끗하지 않다면 소용없습니다. 마음의 간음은 해결을 자기 선에서 끝낼 수 있습니다. 남한테 피해준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간음은 다릅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죽을 거 같은 고통을 줍니다. 상대 배우자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자녀가 있다면 자녀에게 부끄러움을 줍니다. 자기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벗기가 힘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가정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의 울타리도 모호해졌습니다. 간통은 더 이상 죄로 처벌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성생활을 서로의 사생활로 존중해줍니다. 그런데 그게 진짜 존중일까 싶습니다. 성문제는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복잡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이 노골적이 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체면도 가리지 않습니다. 주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오늘날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우리 시대 지도자들이 그 정도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9-30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주님은 성적인 죄에 대해 엄격하셨습니다. 그만큼 생채기가 크게 나기 때문입니다. 물건은 가져왔으면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되고, 원 주인한테 돌려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에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간음한 본인도 그렇고, 그 사람의 배우자도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적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보다 단호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단호함이 없이는, 누구도 성적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 유혹을 이기는 방법을, 요셉이 잘 보여줬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처럼 붙들고 늘어지는데, 어떻게 싸워서 이기겠습니까? 피하고 도망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은 간음과 이혼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간음과 이혼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간음으로 인해 배우자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셨기에, 배우자의 간음으로 인한 이혼만은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배우자가 간음했다고, 무조건 이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배우자의 간음이 이혼의 정당성을 제시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도 그 정도면 이혼하는 걸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너무 쉽게 이혼하고 재혼하고 또 이혼하고 합니다. 바꿔봤자 사실은 그게 그건데 말입니다. 집안에 이런 표어를 붙여놓으면 좋겠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살자.” “바꿔봤자 그게 그거다.”재혼한 가정에 이런 표어를 붙여놓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 바꿀 것은 아니다.”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가정을 지상의 천국으로 가꾸어가기를 바랍니다.
3.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3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맹세는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맹세를 잘 했습니다. 자신의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에서 맹세는 효과적입니다. 우리 어릴 때도 “너 맹세할 수 있어?”하고 물으면, “그럼 맹세할 수 있지”했습니다. 사실은 맹세가 필요 없는 공동체가 건강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보호본능이 있습니다. 자기보호를 위해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모른다고 하거나 자기한테 유리하게 증언합니다. 그건 3-4살 정도만 돼도 그럽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그런 것이 아닌 보호본능입니다. 자기 애가 거짓말을 하면, “우리 애가 원래 안 그랬는데 어린이집 가서 배웠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애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때 애한테 눈을 부릅뜨고, “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어?” “너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그렇게 닦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 지옥 보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맹세는 그와 다릅니다.
34-36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걸고도, 땅을 걸고도, 예루살렘을 걸고도, 심지어 자기 머리를 걸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세 안 해도 갚을 사람은 갚습니다. 맹세 안 해도 정직한 사람은 믿을 수 있습니다. 말끝마다 “이건 진짜야.” “진짜 그렇다니까”하면, 왠지 말의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이것만은 내가 맹세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마저 믿음이 덜 갑니다. 예를 들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데, “아, 정말요?”하면, 처음 한 두 번은 괜찮겠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면 기분이 살짝 나빠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말이 많으면 건질 말이 별로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말실수가 잦아집니다. 특히 그 말이 맹세라면 더 그렇습니다. 자기가 한 맹세에 자기가 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자기가 풀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풀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로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맹세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뭘 무서워하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피하여, 교묘히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등.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잔머리 쓰는 사람 보면 틀림없이 고생합니다. 말의 무게는 맹세에 있지 않습니다. 말의 능력은 얼마나 큰 대상으로 맹세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평소 삶에 있습니다. 평소 말 습관에 있습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맹세를 안 해도 믿음이 가는, 말의 신뢰도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결론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내 속에 미움이라는 칼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고 너의 예물이 받으신바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과 언어와 생활에서, 자신과 이웃의 순결을 보존하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냉혹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또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우리가 성전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맹세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말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므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가정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가족과 이웃의 영혼과 생명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항상 하나님께 예라고 순종하여 살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림으로,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옵소서. 항상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우뚝 서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도 온전하라! / 마 5:38-48
5년 전 KBS 아침마당에 “교회 나오지 말라는 괴짜 목사”라는 타이틀로 조정민 목사가 나왔습니다. 조정민 목사는 MBC 앵커 출신입니다. 25년간 기자생활과 앵커로 활약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가 좀 독특합니다. 아내는 모태신앙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자기는 불교 모태신앙입니다. 아내를 교회에 못 가게 13년간 박해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잡으러 갔다가, 자기가 예수님께 잡혔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간다는 아내가 다른데 가는 것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확인 차 뒤따라 갔습니다. 교회에 가 보니 시끄러웠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방언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방언기도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라, 가짜구나 생각하고 집 앞에 이런 이단 교회가 있다니 생각하고, 카메라 출동으로 고발하려고 일주일간 취재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나흘 만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길을 바꿔, 진짜 알아보자, 아내가 그토록 빠져있는 신앙이 뭔지, 기자로서 취재하는 느낌으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사흘만의 경험이란, 기자가 원래 잘 울지 않는데, 찬송가를 듣는 순간 마음이 풀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마음이 풀리고 울면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바로 성경을 5독했습니다. 읽을수록 성경은 너무나 옳았습니다. 기독교는 너무나 옳은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옳지 않은 일이 많으며, 성도들도 목회자들도 옳지 않은 일이 많음을 보면서, 더 확실하게 배우고 알기 위하여,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47살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여, 50세가 넘어서 미국에 있는 고든코넬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25년간 뉴스를 진행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졌습니다. 기자의 시각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봐야 했습니다. 미담으로는 뉴스 시청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좀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에 귀를 기울입니다. 예수를 모를 때는 괜찮았지만, 예수를 알고부터는 계속해서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생명의 뉴스,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상이 온통 모순되고 부조리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살만한 세상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모순되기도 하고 부조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살만한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의 시각이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니까, 이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전에 자기가 기자로 있을 때의 세상이 아닙니다. 너무 세상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악한 사람들 좋아할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분노한다고 세상이 바뀔 거 같으면 분노해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 대항하고 항거하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사명과 열정과 은사가 있어, 그렇게 하는 사람을 존중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는 면이 있습니다.
요즘 증오범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드에서 오마르 마틴이라는 젊은이가, 총기를 난사하여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민자이며, IS에 충성을 맹세한 바 있고, 동성애자를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그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지만, 뭉뚱그려서 한 마디로 증오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오범죄란 특정 인종이나 민족, 특정 종교나 성의 사람, 특정 계급이나 지역의 사람, 특정 이데올로기나 신념의 소유자, 동성애, 장애인, 노인 등을 향한 혐오와 분노의 감정으로 저지르는 범죄를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나와 상관없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내가 특정인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특정인이 아닌데, 그 사람이 나를 특정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용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피하면 됩니다. 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원수라는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 받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악인보다 좀 나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보다는 착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식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율법을 압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율법을 배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서툰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닙니다.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율법을 스스로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은 그게 잘 지키는 게 아니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고깝게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율법을 정식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홈스쿨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홈스쿨이 아직도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 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칭 종교 엘리트들을 까칠하게 대하셨습니다. 자신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이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하면 들을 귀가 없는데 가르친들 듣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사모하는 무리에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셨습니다. 그들의 절박한 필요인 각종 질병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사람이 몰린다는 말은, 민심이 한 쪽으로 쏠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도자들은 긴장합니다. 그런 그림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꼬투리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채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에 대해, 그들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모세에 대해 말을 꺼냈습니다.
지난 주 살인의 문제, 간음의 문제, 맹세의 문제에 이어, 오늘은 악한 자를 대하는 문제, 원수를 대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별로 예민한 문제는 아닙니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율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고민이 생깁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게 자기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을 깨우쳐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달리 해석이 필요없습니다. 그대로 지키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십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율법교사로서 기분 나쁜 얘기입니다. 위로 위로 올라가면 모세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인데 기분이 나쁜 경우 있잖아요? 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감정이 그랬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백 번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 싫습니다. 이게 죄인의 심리입니다. 그럼 그게 남의 얘기인가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달가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아멘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 우리 얘기입니다. 성경을 우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안 됩니다. 그러면 성경과 내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3인칭이 되면 안 됩니다. 내가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어보기도 하고, 제자가 되어 보기도 하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되어 보기도 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이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제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감정이입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이 은혜가 됩니다. 성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이게 형벌인가요? 복음인가요? 그 중간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입니다. ‘동해보복법’이라고 부르는데, 동일한 상해나 배상 원칙을 적용한 일종의 처벌법입니다. 그 법의 제정된 목적은, 범법자 규제를 통해 사회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 억울한 피해를 예방하는 데 있었습니다. 동해보복을 해야지, 두 배 보복을 했다, 그럼 상대도 두 배 보복을 할 것입니다.그럼 원래 사건에서 4배가 커진 것입니다. 이는 개수라도 많지만, 눈은 두 개밖에 안 됩니다. 동해보복이 아니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당해서도 안 됩니다. 율법은 공평을 말합니다. 법에 있어 공정성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법 집행을 공정하게 한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공정한 법 집행에서 신뢰가 나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 집행을 하면서 믿어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공평에 사랑을 더하셨습니다. 공평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공정한 보복이 아닌 사랑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대적하지 말라’는 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복수는 물론 법정에서의 공방까지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에 대하여 위해를 가한 비열한 상대에 대하여 그 어떠한 복수도 삼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피해자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피해 보상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동해보복법을 절대 진리로 알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독을 당하면 이중 삼중의 모독으로 복수하는 세상입니다.
어느날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술에 취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에스토 부인이 “선생님, 주정뱅이군요!”라고 하니까 처칠은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귀부인, 추녀이시군요. 그런데 저는 내일이면 술이 깰 겁니다. (부인은 계속 추녀로 남아있겠군요).”우리는 이런 식의 인격 모독에 대한 복수에 능숙한 농담으로 복수하기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앙심을 품거나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하네요.”거절당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집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하는데 아들은 거칠게 항의합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그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아,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그러나 거절당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라는 깨끗한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범사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증오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미운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복수의 칼을 내려놓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자 아니고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들로서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악을 조장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악을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보복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수하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우리에게는 날마다 순간마다 솟구치는 은총을 체험하게 하는 복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대적하지 말라’는 실례를 들었습니다.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그가 오른손잡이라고 볼 때,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치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손바닥으로 뺨을 치면 손등으로 치는 것보다 소리는 큽니다. 그러나 아프기는 손등이 더 아픕니다. 그런데 그건 아프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손등을 사용하면 맞는 사람이 더 모욕을 느낍니다. 지금은 부모도 자식의 뺨을 때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뺨 맞는 게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왜 그리 때렸는지 모릅니다. 맞았던 기억을 살려봐도, 손등으로도 맞을 때가 더 기분이 나빴습니다. 물론 자로도 맞고, 몽둥이로도 맞고, 심지어 슬리퍼로 맞기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난리날 일인데, 그때는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른편 뺨을 맞아 더 모욕감이 들어도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오른쪽 뺨 맞은 것도 화가 나는데 왼쪽 뺨까지 돌려대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실제로 어쩌다 한 쪽 뺨을 맞았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다른 쪽 뺨을 돌려대면 어떻게 될까요? “오, 예수님의 제자가 맞네”할까요? “야, 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구나”할까요? 그건 매를 버는 것입니다. 약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감정이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한 대 맞고 말 것을, 두 대 세 대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신병자나 중독자가 오른편 뺨을 때려도 왼편을 돌려대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그 자리를 피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오른쪽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상대방이 내 오른편 뺨을 친다, 그럼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맞고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예를 든다면 같이 때릴 것입니다. 그건 힘이 비슷할 때 가능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강하면, 한 대 맞고 돌아섭니다. 잘못하면 몇 대 더 맞을 수도 있으니, 속에서는 천불이 나도 참습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약하면, 내가 두 대 세 대 때립니다. 오른쪽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의 예를 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롬 12: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 때 참을 수 있습니다. 내 뺨을 때린 사람을, 두 세대 때리고 나면, 속이 잠깐은 후련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복수의 칼을 갈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내 손에서 끊어야 합니다. 내가 손을 대면 부작용이 많습니다. 자식 대까지 물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손대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동굴에서 만났으나,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처리하십니다. 우리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든 말씀마다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속옷 가지려고 나를 고발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건데 고민스럽습니다. 일단 재판의 자리로 가지 않아야 합니다. 고소를 당하지도, 고소를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법적으로 하는 것은 최후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너무 쉽게 고소고발은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교회 내 송사 문제를 다뤘습니다. 고전 6:6절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왜 소송을 합니까? 이기기 위해서 합니다. 지기 위해서 소송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40절은 내 권리에 대한 것입니다. 형제가 권리를 주장하니까 권리 주장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아주 작은 권리라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권리를 침해당하면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분명히 내 속옷입니다. 그런데 소송을 걸어 내 속옷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럼 겉옷까지 줘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 주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 속옷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하면 둘 다 피곤해집니다. 시간과 돈은 물론이고 신경쓰고 머리 아픕니다. 상대가 걸어온 소송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해야겠지만, 먼저 소송을 거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리포기는 개인적인 문제로 제한됩니다. 공공의 문제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공장에서 폐수를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비올 때를 날 잡아서 그렇게 하곤 했습니다. 그걸 보고 눈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공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땐 사정 당국에 알려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악한 자’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에게 관용을 베풀어 사랑으로 그들을 감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예수 당시 로마 수비대의 권리 가운데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 곧 ‘5리’를 운반하게 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 경우입니다. 이처럼 강제로 징용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적극 도움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41절은 억지로 뭘 하게 했을 때의 문제입니다. 억지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아이들이 자려고 잠옷으로 다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심부름을 시킨다면 어떨가요? 좋은 인상이 아니지요? 인상이 잔뜩 흐려져서 찌뿌등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시키니 마지못해 갔다 오긴 했습니다. 심부름을 갔다 오면 “아휴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달랩니다. 잠시 후 엄마가 와서, “형오면 치킨 먹게 치킨 사러 가자”하니까, 군말 없이 따라갔습니다. 들어올 때 얼굴은 싱글벙글입니다. 왜 그럴가요? 형 때문에 자기도 치킨 먹게 생겼으니까 그런 거지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까? 억지로 해야 할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해야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 리를 가게 할 때, 십 리를 동행해 주는 게, 의무감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기쁨이 없이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공부는 목표는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는 과정입니다. 과정이니까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정은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하다가 수지맞을 수도 있습니다.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단순하게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경우가 있고, 필요해서 꾸어달라고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단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주는 것과 꾸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주는 것은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도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못 받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꾸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말 그대로 꾸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통장에서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출을 해서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서, 믿고 꾸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배우자 몰래 꾸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줄 때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가진 자로서 거만한 태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나한테 있는 재물이, 영구히 내 곁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언제 남의 손으로 옮겨갈지 모릅니다. 언제 남에게 손을 내밀게 될지 모릅니다. 꾸어달라고 한다고, 다 꾸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꾸어줄 사람도 분별해야 합니다. 사기꾼, 노름꾼, 마약중독자...등등. 이자 많이 준다는 말에 꾸어주면, 원금도 날릴 수 있습니다. 또 꾸어준 것은 받아야 합니다. 꾸어주고 못 받을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그냥 주는 게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속 끓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돈 거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 문제가 불거지면, 교회 내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돈 잃고 사람 잃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꾸었으면, 빨리 갚아야 합니다. 돈을 꾸고 갚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오직 답답하겠는가마는, 갚으려는 최선의 의지가 보여야 합니다. 꾸어준 사람으로부터 “천천히 갚으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레 19:18절을 보면,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레 19: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아마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의 분위기를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나요? 자기조차 꿈도 꿀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친히 원수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분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린 손양원 목사님조차 힘들어 했습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두 아들을 잃고도 보통 때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 양아들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잠든 깊은 밤에 혼자 일어나,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원수 사랑은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라.’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원수를 사랑하려는 것은, 교만 중의 교만입니다. 말도 안 되는 무모한 도전입니다. 원수 사랑은 놔두고, 가족 사랑도 기도 없이는 안 됩니다. 아내 사랑도 자녀 사랑도, 기도해야 가능합니다. 한 목사님이 결혼 40주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분에게 “결혼 30주년은 넘었어요?”하니까, 펄쩍 뛰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10년을 깎느냐.”해서 웃음이 뻥 터졌습니다.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도 없이 힘듭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 사람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할 사람의 범위를 넓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게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것 아닐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46-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세리는 돈을 따르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없이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그런 이들에게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형제에게만 친절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고 형제가 아닌 자는 배제함으로써, 나의 생존과 안녕과 풍요를 지켜야 합니다. 그들처럼 사는 삶에서는 용서란 불가능한 선택입니다. 이건 마치 산에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산정상의 생명나무 열매를 따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 나무로부터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생각된다면, 우리는 세리와 이방인의 삶, 곧 욕망의 골짜기로 달려가는 썰매에 이미 올라타서 신나게 미끄러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용서가 가능한 이들은 어떤 삶을 삽니까?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세리와 이방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구하는 삶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욕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시선은 돈과 성공과 쾌락이 아닌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면 닮게 됩니다. 부부가 닮는 이유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는 이유입니다. 좋아하는 우상을 닮는 이유입니다. 청소년들이 바른 삶과 신앙의 모델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닮아갑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긍휼의 하나님처럼, 원수와 박해자들에게조차도 긍휼을 품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들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처럼 온전한 존재입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제자의 이상은 돈 벌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신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온전해지는 이들에게 원수사랑과 용서와 축복은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특권이 됩니다. 떠오르는 열기구처럼 점점 산정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곳에 가보니 생명나무열매가 열려있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것은 산에 오른 이들만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 경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경험하고 누리는 자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원수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하나님을 힘써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릅니다. 모르니 사랑하지 못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니 닮아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지 않으니 온전함은 꿈도 못 꾸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원수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기적은 감히 상상도 못 합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태도가 아니라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분노를 버리고 평화를 택하는 태도 변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에 신물이 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택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마인트컨트롤, 정신승리로 잠시 누리는 위로요, 임시방편이요, 병든 세상을 치유하지 못 합니다. 성경은 존재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죄인으로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의인으로 부활한 거듭난 새생명이 되라고 하십니다. 욕망을 구하는 삶을 떠나 하나님을 구하는 삶으로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야만 원수와 박해자마저도 자연스럽게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게 됩니다. 자연인에게 용서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기적입니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그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코로나를 이기고, 다시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달라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세리들도 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닮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시선을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거룩하신 그리스도께 향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되 지극히 작은 자들까지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큰 기쁨을 안겨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원수까지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나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는,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사랑에 있어 당신 수준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