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뻔한 한국 최초 서양화가의 옛 집, 고희동 가옥
써니21 ? 2016. 3. 30.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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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동에서 보이는 창덕궁의 멋들어진 회화나무 / 이하 ⓒ 김종성
각박한 대도시를 못느끼게 하는 동네, 원서동
햇살좋은 날 창덕궁 산책에 나섰다가 꼭 들리는 곳이 서울 종로구 원서동이다. 창덕궁과 옆구리를 맞대고서 궁궐 돌담을 따라 난 아담한 동네. ‘럭키 전파사’ 등 향수를 부르는 정겨운 가게간판에서 한국미술박물관, 궁궐의 궁인과 일반인들이 함께 썼다는 옛 빨래터(아직도 물이 풍성하게 흐른다)가 있는 등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흔히 서울을 일컬는 '각박한 대도시'라는 말을 잠시 잊게 하는 동네다. 서울이 운치있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궁궐 옆 동네라서 그런지 한옥들이 많은 데, 정다운 한옥 집 가운데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春谷) 고희동의 거처였던 옛 집이 있다.
이름 앞에 지은 호가 촌스러우면서도 따스한 봄을 연상케해 좋다. 그의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당대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한 공간이다. 또한, 한식과 일본식 그리고 서양식 주거문화의 특징이 고루 녹아 있는 등 역사적 가치로 근대 문화유산(등록문화제 제 84호)이 된 곳이다. 1909년~1918년 십 년간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에서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춘곡이 직접 설계해 지은 후, 4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살았던 오래된 가옥보다 최초의 서양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한 마음을 품고 원서동을 찾았다.
버스 정류장, 노인정도 모두 궁궐과 맞닿아 있는 동네.
새롭고 새삼스러운 원서동 동네풍경
한옥들이 많아 북촌8경 한옥마을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북촌 2경답다. 주거지외에도 사무실, 미술관, 카페 등이 한옥집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원서동은 옛날 조선왕실을 돌보던 나인과 중·하인이 모여 살던 동네였단다. 궁중 여인들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골목 안에 남아 있는 건 그런 연유가 있었다. 창덕궁 후원의 서쪽에 있다는 위치에 따라 원서정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된 원서동은 창덕궁의 뒤안길로 조용하고 고즈넉한 한옥 골목길이다.
한옥마을이다보니 당연히 조선 시대 건물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현재 북촌 일대의 한옥집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인이 경성(서울)에 일본식 가옥을 올리며 하루가 다르게 마을풍경을 점령해 나갈 때 나타난 사람이 '건양사'라는 건설개발회사를 운영했던 정세권 선생이다. 한옥 마을 전부를 이분이 만들었다. 1930년 대 선생은 조선인들의 실제 주거를 목적으로 한 새로 지은 집들이 지어져 서로서로 지붕을 맞대는 지금의 모습이 탄생했다. 크기는 작지만 편한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한 것이다. 구한말의 '보급형 한옥'인 셈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현재의 한옥마을은 큰 적산 주택 단지가 됐을 것이다.
그는 국민들이 비상식적인 집값으로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수익만을 좇는 요즘의 건설업체들과 다른 건설업자였다. 사업해서 번 돈은 경제 독립을 주장하는 물산장려회에, 문자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어학회 등 독립운동에 시멘트 붓듯 쏟아부었다. 일제 강점기 최대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의 경성지부 재무부원이었다. 북촌8경을 이루는 한옥마을의 장관 앞에 감탄하는 모든 사람이 선생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의미있는 일을 해낸 애국자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의 아까운 많은 사람들처럼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는 이유여서다. 지금 북촌 어디에도 '정세권' 선생의 이름 석자를 찾을 수 없다.
열린 대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자박자박’ 경쾌한 발소리가 나고, 목련나무가 순백의 옷을 차려 입고 손님을 먼저 맞이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한옥 집 나무 바닥은 참 부드럽고 폭신해 인상에 남았다. 좁고 긴 복도와 유리문, 실내로 들어온 툇마루와 대청, 개량 화장실 등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한국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한옥 집이 더욱 특별한 것은 1965년 춘곡이 세상을 뜬 뒤 소유주가 바뀌면서 한때 헐릴 뻔했는데, 시민들의 노력으로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2008년 종로구청이 사들여 보수공사를 한 후, 2012년 전시회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이 열리면서 일반 공개가 됐다. 이제는 시민 누구나 한옥 집 안으로 들어가 춘곡의 작품과 자취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 지긋한 문화 해설사 한 분이 가옥 안에서 근무하며 춘곡의 삶과 작품들을 설명 해주셨다.
원서동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옛 빨래터
좁은 복도, 유리문, 실내로 들어온 툇마루 등 근대 한옥집을 특징을 볼 수 있는 고희동 가옥
구한말 역관(통역관)이자 개화 지식인이었던 고영철의 아들 고희동은 십 대 시절 프랑스 선교사가 건립한 학교(한성법어학교)를 다니면서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궁내부 주사로 취직해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번역일을 하게 된다. 이 때 외국인들과 접촉하면서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뺏앗은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관리생활을 버리고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화단은 중국의 화보(그림畵, 계보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춘곡은 1909년 한국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일찍이 에도시대(1603~1867)에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일본 고유의 미술로 정착한 우키요에(사람들의 일상생활, 풍경, 풍물을 그려낸 풍속화로 서양의 인상파 화가에게 영감을 준다)를 떠올려보면 조선시대 자생적 미술사조가 움트지 못한 것이 자못 아쉽다.
가옥 안 작은 방들에 전시된 그의 작품을 보니 예상과 달리 전통적인 동양화 혹은 수묵화에 서양화 기법과 색채를 결합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런 그림을 ‘수묵 채색화’라고 한단다. 고려청자가 떠오르는 청자색 등 보기 드문 색채로 물든 수묵화가 무척 이색적이었다. 주요 작품들은 보호를 위해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는데, 오히려 카메라 렌즈가 아닌 눈으로 찬찬히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귀국 후인 1920년 대 중반 서양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시대 상황에 한계를 느끼고 한국화로 전향했다고 한다.
몇 점 안되는 유화 작품 가운데 현재 일본에 있다는 동경미술학교 양화과 졸업작품집에 있는 자화상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도포를 입고 큰 갓을 쓴 춘곡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식민지 시절이다 보니 그런 겉표지가 그려진 졸업작품집이 나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식민지 학생의 신분이지만 예술가만의 자존심과 고집이 느껴졌다.
춘곡의 자화상 그림
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 - 위키피디아 사진
그의 삶과 그림을 보다보니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서양 미술을 공부한 화가 임용련 선생(1901~?)이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 때 임용련은 배재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쫓겨 조선을 탈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미술대학과 예일대학교를 졸업했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정말 흔치 않은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이후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예일대의 지원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견문을 쌓을 수 있었고, 프랑스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프랑스에 미술 유학을 와 있던 백남순을 만나 그곳에서 결혼했다. 부인 백남순 또한 일본 동경 여자미술대학교에 유학을 하며 나혜석에 뒤이은 두번째 여성 서양화가로 촉망받던 젊은 화가였다. 임용련, 백남순 부부는 프랑스 화단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파리의 살롱 도톤느에 출품하여 나란히 입선할 정도였다.
1931년 두 사람은 귀국한 뒤 평안북도 정주(지금의 의주지역)에 위치한 식민지하 민족 교육의 산실 오산학교의 미술교사 겸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되고 그곳에서 화가 이중섭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화가 임용련이 잘 알려지지 않은 건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그 후 생사를 알 수 없어서다. 홀로 남은 부인 백남순 또한 화가생활을 중단하고 홀로 어린 아들딸을 보살피다가 1964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춘곡의 삶과 작품을 잘 설명해 주신 문화해설사 아저씨
춘곡의 작업실
고희동은 이 집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해방 이후에도 문화예술인과 교류하고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면서 휘문, 중앙고보 등에서 미술교사를 했다. 대한민국 미술협회장, 예술원장 등을 맡으며 미술 행정가를 하기도 했다. 다만, 1940년 조선남화연맹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해 벌어들인 판매 수익금 전액을 일제에 헌납한 일로 해방 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춘곡 고희동 가옥, 최순우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등은 등록 문화재이면서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으로 시민문화유산이 된 좋은 사례다.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이란 ‘지켜내고, 살리고, 이어나가기’를 모토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과 기증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지키고 나누는 활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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