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Che’ Guevara: The Economics of Revolution(2009)
헬렌 야페 지음, 류현 옮김, 실천문학 2012.
쿠바와 게바라의 유산
실에 앉아 있던 티르소 사엔스가 자신의 뒤쪽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사진 액자를 가리킨다. 사진 속 게바라는 지붕 위에 올라가 강한 햇살에 실눈을 뜬 채 박공 모양의 콘크리트 슬래브를 나르고 있다. 사엔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발적 노동에 나갔을 때 찍은 사진이란다. 그가 “체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보세요”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 사람이 ‘엘 가토El Gato’입니다. 과테말라 출신인데 체와 멕시코에 같이 있었지요. 과테말라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저는 엘 가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체가 슬피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게바라가 과테말리에서 수행 중이던 게릴라 전투에 여러 가지 조언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죽음이 더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라고 산업부 차관을 역임한 티르소가 말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체는 모든 일에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중남미 곳곳에 게릴라 투쟁을 조직해놓고 자신은 장관이랍시고 의자에 앉아 시가나 피우고 있을 그의 모습이 상상이 가십니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체가 ‘난 관료로 죽지 않을 거야. 산에 들어가 싸우다 죽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495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콩고로 가서 그곳에서 게릴라 전쟁을 지원하던 쿠바 비밀 조직과 합류했다. 게바라가 언제 쿠바를 떠날 결심을 했는지,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산업부에서 그와 가까이 일했던 동료들은 그가 쿠바 혁명 투쟁에 관여할 때부터 혁명이 성공하면 바로 다음 혁명을 위해 떠날 차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가 쿠바를 떠난 것을 애석해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가 실제로 떠났을 때 놀라거나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959년부터 게바라와 줄곧 일한 에디손 벨라스께스가 이렇게 설명했다.496
“체는 혁명 정부가 수립되고 제대로 조직을 갖출 때까지 피델과 함께 일하기 위해 산업부장관직을 수락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훌륭히 해냈고, 그리고 나서 다른 나라로 싸우러 갔습니다. 그의 사명은 그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목격했던 광산 노동자들과 원주민들, 그리고 아프리카 민중의 비참한 상황과 맞서 싸우는 것이었지 이곳에 머물며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는 국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장관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기 위해 혁명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496
1962년 초, 게바라의 전우이자 전직 경호원이었던 후안 알베르토 카스테야노스 비야마르가 그가 게릴라 투쟁에 몸담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게바라에게 찾아가 목적지가 어디든 그와 함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듬해 카스테야노스가 몇몇 쿠바인들과 함께 게바라의 동료이자 저널리스트로 아르헨티나 산악지대에 들어가 군사 작전을 준비 중이던 호르헤 마세티와 합류했다. 이들은 도시 혁명 운동 세력과 결탁해 게릴라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게바라는 게릴라 조직이 완성되고 상황이 무르익으면 그때 합류해 직접 지휘를 맡을 생각이었다.496-497
자신의 조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하고자 했던 게바라의 야망은 여러 예상치 못한 요인들로 인해 무장투쟁이 실패하자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애초 계획이 무산되자 게바라는 2년을 더 쿠바에 머물렀다. 그가 2년을 미루며 쿠바에 머문 것은 해외 게릴라 투쟁의 조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쿠바를 떠난 뒤에도 예산재정시스템이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게바라가 쿠바 정부의 요직을 버리고 무장 투쟁으로 돌아간 것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혁명 정부 지도부의 일원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쿠바에 머물렀다는 사실일 것이다.497
1961년 설립 직후부터 산업부는 거대 조직으로 발전해나갔다. 1964년 12월, 게바라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야기된 문제들과 지난 3년 동안 일어난 외부 자원 수급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고려하면’ 산업부의 발전은 놀라운 것이라고 말했다. 설탕 생산이 혁명 직후 첫 2년 동안 사탕수수 경작지 감소와 노동력 부족, 그리고 심각한 가뭄 때문에 줄어들었다. 하지만 1963년에 그 외 나머지 산업 부문이 6퍼센트나 성장했다고 그는 말했다. 1964년에는 설탕 부문을 제외한 총 산업 생산이 6퍼센트(계획 목표 12퍼센트) 더 성장했고, 산업부의 국가 예산 기여도는 전년 대비 135퍼센트(계획 목표 85퍼센트) 증가했다. 생산은 산업부 산하 연합기업소들의 4분의 3이 증가세를 보였다. 소비재 분야의 수지가 개선됐는데, 이는 기초산업차관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공업차관부가 생산을 더 많이 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생산성이 2퍼센트 증가했다. 반면 건설자재, 석유 및 파생물들, 식료품, 야금 및 기계 같이 생산이 위축된 분야들은 생산성이 5퍼센트나 하락했다. 특히 마지막 두 부문의 생산성이 하락한 것은 새로운 설비 도입이 늦어진데다가 원자재 공급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봉급표, 생산 ‘규범들’, 산업 합리화 계획 − 공장 및 잉여노동자 이전 배치 − 이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실행이 늦어지면서 산업부 전반에 가져온 성과는 별로 크지 않았다. 이들 조치를 시범적으로 도입했던 555개 노동센터들에서 노동자 1인당 생산의 페소화 가치가 21.7퍼센트나 증가했고, 평균 임금도 5.2퍼센트가 상승했다.497-498
비록 연도별 통계 비교가 유용하기는 하지만 통계 수치는 큰 그림의 일부분일 뿐이다. 1960년대 전반기는 국유화, 무역관계 변화, 중앙계획경제 도입, 관리자들과 전문가들의 국외 이주, 미국의 경제봉쇄, 사보타지와 테러리즘, 피그만 침공과 핵전쟁 위협 등 아주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 산업은 게바라의 지도 아래 안정을 되찾고, 산업을 다각화했으며, 성장을 달성했다. 이는 그가 경제 분석, 구조 조정, 자원 동원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쿠바 국민 통계를 연구한 쿠바 경제학자인 알프레도 곤살레스 구티에레스가 이렇게 말했다.
“체의 관리 지도 아래 자본주의적 산업 부문이 사회주의적으로 운영되는 산업 부문으로 이행했습니다. 아주 순탄하게 진행돼 이로 인한 후유증이나 생산성 하락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후유증이 없었다는 것, 또는 새로운 경제 체제에 국민들이 호의적이었던 경우는 역사상 유래가 없습니다. 이것이 체의 중요한 업적입니다.”498
이런 상황에서도 산업 투자가 다른 분야들, 예를 들어 보건, 교육, 건설, 농업 등에서 자원 수요가 크게 늘면서 제약을 받았다. 1965년 초에 게바라가 이렇게 경고했다. “산업에 더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60년대 말 즈음에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쿠바 정부는 서구 나라들로부터 차관을 빌려올 여력이 없었고, 국제금융기구들은 대출을 거부했다. 결국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경제 발전이 뒤진 나라들과의 무역 및 원조에 기대야 했다. 쿠바가 사회주의 블록에 통합되자 일부 비판가들이 쿠바가 달성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는 그저 소비에트의 지원 덕분이라고 깎아내렸다. 미국의 경제학자 앤드류 짐벌리스트는 이런 단순 가정을 거부했다.
“먼저 (중략) 이런 원조의 규모는 잘못된 방법론 때문에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 둘째, 부풀려진 원조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1인당 기준에서 볼 때 쿠바가 경제상호원조회의에서 받은 원조는 다른 중남미 나라들이 서구로부터 받는 원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셋째, 쿠바 경제 성장의 원천을 하나씩 들춰본 뒤 그것을 국내 요인과 국외 요인으로 나눠 살펴보면 그것을 굳이 소련의 원조 효과라고 볼 만한 것이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쿠바 경제에 끼치고 있는 엄청난 손실도 고민해야 한다.499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쿠바 혁명 정부와 쿠바는 새로운 사회관계, 새로운 제도, 새로운 가치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고 엄청 노력했다. 게바라는 단기 성장보다는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했다. “의식 발전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경우 자칫 경제 발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정 기간 동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인간 중심의 발전이 목적이었다고 할 때, 게바라가 이룩한 업적을 양적으로, 즉 결과 중심에 놓고 평가할 경우 그가 혁명 경제학에 기여한 부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할 수 있다.499-500
1963년 11월, 게바라가 산업부를 분할해야 할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너무 비대해진 산업부를 분할 독립시키는 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전문적인 정부 부서들, 예들 들어 광업, 에너지, 전기를 관리 감독할 글로벌 비전을 갖춘 슈퍼부처super-ministry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1964년 6월, 설탕연합기업소가 산업부에서 독립해 설탕부(MiNAZ)로 태어났다. 이후 3년 동안 식료품 분야가 국립농업개혁원으로 관리 권한이 넘어갔고, 경공업차관부가 경공업부가 됐으며, 전기부Ministry of Electricity가 신설됐다. 1967년경, 산업부에 남아 있던 나머지 조직들이 기초산업부로 통폐합됐다. 1959년에서 1964년까지 게바라의 부관이었던 오를란도 보레고에 따르면, 게바라가 다른 정부 부서들이 예산재정시스템을 비록 다른 지도자들이 이 시스템이 쿠바에 적합한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받아들였으면 하고 바랐다고 한다. 설탕부장관으로 예산재정시스템을 도입한 보레고는 “만일 제가 살아 있다면, 산업부에서 분리 독립한 다른 많은 부서들도 예산재정시스템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가 죽으면서 이것을 강력히 지지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산재정시스템이 사회주의로서는 새로운 시도였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습니다. 다소 보수적인 사람들은 유럽의 경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라고 말했다.500
게바라는 쿠바 혁명 투쟁에 가담하면서 새로운 혁명 정부의 주요 성원으로 급진적인 정치경제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드문 기회를 누렸다. 1965년 경, 그는 예산재정시스템이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서 하나의 중요한 발전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쿠바를 떠나면서 뒤에 남겨놓고 간 유산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진한 많은 정책들이 쿠바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더구나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뒤에도 그의 동지들이 오랫동안 관리자의 자리를 지켰고, 그중 일부는 예산재정시스템에서 개발된 프로젝트들과 원리들을 수용했다. 이 덕분에 지난 반세기 동안 게바라가 이론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쿠바에 미친 영향이 더욱 빛을 발휘했다.500-501
무엇보다 게바라의 가장 큰 공헌은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토대로 예산재정시스템이라고 하는 새로운 경제관리시스템을 고안했고, 자신의 사회주의 이행론을 1960년대 쿠바의 현실과 경제 발전 수준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비록 예산재정시스템이 쿠바 혁명 직후의 특수한 상황−이것은 예산재정시스템을 일반화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에 대처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핵심 원리들과 방법론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501
예산재정시스템(BFS)
1. 재정은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기업은 예산을 가지고 운영되지만, 독자적으로 기금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2. 화폐는 계산 수단, 즉 기업 실적을 나타내는 가격으로 기능하지만, 지급 수단이나 재정 압박 형태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신용이나 이자는 없고, 대신 국가 발전 전략에 따라 국가가 관리하는 계획 투자만 있을 뿐이다.
3. 사회주의 경제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과 같다. 국영기업들 간에는 어떠한 금융 거래나 상품 교환도 일어날 수 없다. 이들 사이에 생산물이 이전될 때 소유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4. 교육, 훈련, 임금 구조가 사회적 의무로서 노동 개념을 발전시켰고, 노동과 보상 간의 연관을 끊음으로써 노동을 점진적으로 탈상품화했다. 교육을 생산과 연관 짓고, 자기 향상을 경제 발전과 연관 지어야 한다.
5. 가치법칙과 중앙계획은 사회적 생산과 분배 기구의 모순 및 적대적 관계를 나타낸다. 중앙계획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국민 경제를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이 계획 입안 과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해야 하지만 감독, 조사, 실시간 경제 분석, 재고 관리, 연간보고서를 통해 그것의 완수를 보장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관리통제administrative control’의 요소들로 재정통제financial control를 통해 경제를 관리하고자 했던 자율금융시스템과 대립되는 예산재정시스템만의 주요 특징이다. 이런 ‘관리 통제’ 요소들이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했다.
6. 이윤 동기가 아닌 생산 비용을 낮추는 것이 생산성 증대의 핵심이다. 이것은 품질 관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7. 가장 앞선 기술들과 관리 기법들을 ‘이데올로기 오염’의 두려움 없이 자본주의 기업들에서 들여올 수 있다. 즉,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기술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8. 통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탈중앙집중화할 수 있고, 창의성을 구속하지 않고 중앙집중화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생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창의성에 기대는 것은 실천을 통한 학습, 즉 시행착오를 장려하고, 생산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에 전념하는 것이 혁명적 행동이라는 생각을 장려하는 것이다.
9. 노동자들은 생산 과정을 점유한 상태에서 계획을 입안하고,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자로서 스스로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 이것은 잉여가치(자본주의에서)를 잉여 생산물(사회주의에서)로, 교환을 위한 생산(교환가치)을 사용을 위한 생산(사용가치)으로 바꾸는 데 아주 중요하다.
10.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은 이윤을 위한 경쟁이다. 사회주의는 이윤 동기 없이 과학과 기술을 생산에 접목해나가야 한다. 연구 기관들은 당장의 발전과 미래의 발전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관련 부서들, 기업들, 대학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11. 경제 발전 전략은 원자재에서 전자와 자동화에 이르는 전체적인 생산 사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경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수출에서 부가가치를 얻는 데 아주 중요하다.
12. 의식과 생산 간에는 변증법적인 관계가 있다. 인센티브들이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의 핵심 요소들이다. 물질적 인센티브는 도덕적 인센티브와 사회적 의무로서 노동 개념으로 점차 대체되어야 하고, 생산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와 계급투쟁에서 비롯하는 적대는 통합과 연대로 바뀌어야 한다.
13.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비판과 공개 토론을 위한 포럼이 중요하다. 지도자들은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기술 전문가들을 혁명 과정에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사회주의 생산을 위해 그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501~503)
게바라주의적 추
사회주의 건설의 중심 문제는 의식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이는 것이다. 비록 게바라가 자신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해결discover’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 역시 독창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쿠바는 중남미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였고, 그는 이 문제를 혁명 정부 초기에 국가적 의제로 삼는 데 기여했다. 이런 사실이 역사적으로 비슷한 과제가 등장할 때마다 계속해서 게바라주의적 분석Geuvarista analysis에 의지하는 이유다. 혁명적인 변혁 프로젝트에서 게바라는 하나의 준거와도 같은 존재다. 그는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열악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504
쿠바에서 게바라가 내놓은 제안들 중에 한 번이라도 사회적 합의에 도달한 것은 없었다. 많은 쿠바 지도자들이 이론적으로는 그의 사회주의 건설 방식에 동의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기에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쿠바 인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이들을 대표하는 지도부 안에서도 서로 다른 정치적 경향들이 공존한다는 데서 이것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각 시기별로 도입된 조치들이란 것도 결국은 국민적 합의라기보다는 그냥 대세를 따른 것이고, 그 결과도 주로 국내의 물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504
결론적으로 쿠바 혁명의 경제사는 우연과 필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로 표현할 수 있다. 추의 기준점이 되는 것은 쿠바 혁명의 생명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게바라의 아이디어들이다. 즉, 새로운 정책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그것이 게바라의 분석과 얼마나 근접해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86년에서 1990년까지 진행된 ‘교정계획Rectification of Errors and Negative Tendencies’(*저자주-1980년대 후반 세계경제 위기에 대응해 쿠바가 선택한 일종의 위기 대응 전략으로, 그동안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분권화되어 있는 경제를 다시 중앙집권화했다.)과 2000년에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념투쟁Battle of Ideas’(*저자주-세계화 시대에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쿠바 정부의 통치 논리.) 이 게바라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 저개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의 강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국내외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는 것 − 이 아직도 쿠바에 뿌리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바라주의적 추Guevarista pendulum는 쿠바가 당면한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메커니즘들에 기대지 않고도 나름의 사회주의적 발전을 추구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쿠바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정치적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게바라주의적 추의 다음과 같은 주기를 나타냈다.504-505
1965~1967(멀어짐) : 1965년 4월, 게바라가 쿠바를 떠났을 때 그를 대신한 사람이 산업부 제1차관이었던 아르투로 구스만 파스쿠알이었다. 게바라의 고별 편지를 읽은 피델 카스트로가 1965년 10월에 그가 쿠바를 떠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호엘 도메네치 베니테스를 새 장관으로 임명했다. 도메네치는 산업부의 많은 부서들을 폐지하고 추진 중이던 사업들을 중단시켰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정보과가 ‘너무 많은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는데, 얼마 안 있다가 반관료주의 캠페인의 일환으로 폐지됐다. 이 부서의 책임자였던 마리아 테레사 산체스가 자신의 부서에 컴퓨터가 없었다는 것을 빗대어 이렇게 하소연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종이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종이가 없어 일을 못 할 때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65년, 대논쟁 시기에 게바라가 사회주의의 핵심 금융 기관으로 국립은행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재정부가 결국 해체됐다. 이는 예산재정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을 공개적으로 표시한 거나 다름없었다.505-506
1967년(가까워짐): 하지만 1965년에 쿠바 대통령이자 경제부장관이었던 오스발도 도르티코스가 모든 정부 부서에 경제 관리 차원에서 새로운 등기제도Registry System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시스템은 게바라의 경제 구상과 부합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재정시스템의 핵심 전제들, 즉 경제 분석과 비용 통제를 포기하는 조치였다. 수송부장관 포레 초몬 메디아비아가 등기제도 시행을 지시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모두가 이 제도의 기본 요소들을 어떻게 적용할지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잘못 해석해 비용은 상관하지 않고 생산해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중략) 더구나 우리는 체의 원래 구상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제안한 동지들도 이것을 담당할 생산과 서비스 부문 전문가들을 교육시키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조치로 체의 부재를 절감했습니다.”506
1967년 4월부터 국가 예산이 폐지됐고, 정부 부서들과 기업들 간의 모든 비용 청구와 대금 지급이 중지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제장부economic records’ 시스템으로 대체했다. 1968년에 생산성과에 따른 보상 제도가 폐지됐고, 징세 제도 역시 폐지됐다. 대학에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과 공공회계를 연구하는 것이 금지됐다. 피델 카스트로가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하면서 쿠바에 예산재정시스템이 적합한지 아니면 자율재정시스템이 적합한지 제대로 분석하지 못해 결국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더 진정한 공산주의적 생산 및 분배 방식을 고안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종전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도입했던 올바른 방식들을 기피하고 있었다.” 연간 예산을 감시하거나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통제 메커니즘의 부재가 낳은 한 가지 결과는 1970년에 사탕수수 1,000만 톤 수확 캠페인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면서 산업 인력을 빼갔는데, 이것이 다른 산업 부문들에 미친 부부정적인 영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8년 3월, 대혁명운동Great Revolutionay Offensive을 시작해 당시까지 비농업 부문에 남아 있던 사적 소유 재산을 전면 국유화했다. 5만 8,000개가 넘는 소규모 개인 사업체들이 한 달 만에 국유화됐다. 당시 중앙계획위원회 위원이었던 알프레도 곤살레스 구티에레스가 등기제도를 게바라와 연관 짓는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비용과 효율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체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쿠바인들이 생산과 생산성 하락을 되돌려 놓았고 경제 통제를 재도입했다.507
1970년대(멀어짐) : 점차 가중되던 소비에트 조언자들의 영향력이 게바라가 반대했던 소비에트 계획관리시스템이 도입된 1976년에 정점에 도달했다. 기업들이 재정 자율성을 누렸고, 서로 상업적으로 거래했고, 손익계산에 기초해 작동했고, 자본주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납부했다. 농민들이 사설 시장을 개장했다. 관리자가 의사결정을 지배했고, 물질적 인센티브, 즉 생산 목표를 초과 달성할 경우 보너스를 지급하는 식으로 생산성을 촉진했다. 남다른 혜안이 있었던 피델 카스트로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관료주의, 사기, 거짓의 수렁에 빠져 있었고, 체가 알았다면 경악했을 악의 덩어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만일 체가 언젠가 쿠바에도 이윤을 탐하고 훔쳐가는 기업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관료주의, 지도부와 인민들 간의 괴리, 당면 문제의 해결보다는 ‘이윤value’에 목적을 둔 생산 등 ‘소비에트화’의 부정적 효과들이 1980년대 들어 분명해졌다. 이런 약점들이 전략 수정을 주장하는 게바라주의적 경향에 힘을 실어주었다.507~508
1986년(가까워짐) : 쿠바가 소비에트 모델의 포기를 뜻하는 ‘교정계획’으로 불리는 시기로 들어갔다. 생산이 가치가 아닌 생산량의 측면에서 다시 측정됐다. 관료주의가 비판받았고, 사설 시장들이 폐기됐다. 그리고 비물질적 인센티브들이 재도입됐다. 자발적 노동대가 게바라가 쿠바에 체류하던 시기에 했던 대로 사회주의 건설과 주택 보급 사업을 위해 조직됐다. 게바라 사망 20주기를 맞은 1987년에 피델 카스트로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체의 아이디어를, 체의 혁명적 사상을 완전히 부정했던 지난 시기의 거짓과 위선을 바로잡고 있습니다.”508
1991년(멀어짐) : 교정계획의 성과가 제대로 자리 잡히기도 전에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하면서 쿠바 경제는 기존 무역 거래의 80퍼센트 정도를 잃으면서 ‘특별한 시기Special Period’로 불린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쿠바의 국내 총생산이 35퍼센트까지 추락했다. 이런 수치는 보통 전쟁, 기근, 자연재앙이 일어났을 때나 나올 수 있다. 이런 결과는 미국이 1990년, 1992년, 1996년에 쿠바에 대한 무역봉쇄를 강화하는 응징성 법안들을 제정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이 결과 주요 에너지원인 탄화수소, 비료, 식품, 약품, 부품과 설비 등을 포함해 전 부분에 심각한 물자 부족 문제를 겪었다. 배급이 크게 줄어들었고, 그 결과 식량 소비가 전년 수준 대비 5분의 1로 감소했다. 영양실조가 나타났고, 산업 시설들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치솟았고, 전력과 수도 공급이 자주 끊겼으며, 기초재가 턱없이 부족했다. 쿠바의 수송 체계가 붕괴했다. 원자재 부족으로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됐다. 쿠바인들이 개인적으로서나 사회주의 사회로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해결책을 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509
1990년대 도입된 실용주의적 개혁 정책들은 게바라주의 모델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해외 자본과 합작 투자를 진행하고, 해외에서 세계시장 가격으로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 필요한 현금 확보 차원에서 관광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 개혁 정책의 핵심 골자였다. 미국 달러 유통이 합법화되면서 달러를 받는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농업에서 트랙터가 했던 일을 사람과 동물이 대신했고, 유기 비료와 윤작 기법이 사용됐으며, 도시에 텃밭이 등장했다. 농업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군대를 보내 휴경지를 개간했다. 국영 농장들이 집단농장으로 전환됐고, 사설 농민 시장이 재개장했다. 실업률을 완화하고 국가가 공급할 수 없는 재화를 공급하기 위해 소규모 민간 기업이 합법화됐다.509
1997년, 쿠바공산당은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더 넓힘으로써 투자 효율성을 높였다. 쿠바 기업들이 자기 자금을 관리했고, 자체 보유 현금을 통해 직접 수입품을 구입했다. 이런 조치는, 비록 게바라가 반대하는 관리시스템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국가 무역 독점에 발이 묶여있던 자율재정시스템 기업들보다도 더 큰 재정 자율성을 기업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불평등, 범죄, 퇴폐, 개인주의가 크게 번성했다. 이런 현상을 규제하는 법안이 도입됐다. 예를 들어, 민간 기업에 세금을 부과했고, 내국인들이 외국인들이 묵는 관광호텔에 투숙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유화’ 조치가 경제 위기를 타개하고 정치 봉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용인됐다. 물자 부족에도 쿠바 정부는 학교, 병원, 요양원을 닫거나 사회복지 제도를 폐지하지 않았다. 경제가 안정되고 회복되자 친시장 조치들을 철회하기 시작했다.510
2000년(가까워짐) : 경제가 회복되면서 ‘이념투쟁’이라 알려진 정치 쇄신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외에도 기반시설 투자와 이전 10년 동안 가중된 주변화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을 실시했다. 7년 만에 7,000개가 넘는 프로젝트들, 예를 들어 영양실조 실태조사, 사회복지 시설들에 기본재 보급, 10대들을 지역사회복지사로 양성 배치, 학교 신설을 통한 학급 규모 축소, 다양한 성인 교육 과정 및 기술 훈련 실시, 새로운 의료 및 치료 시설 건립, 비디오 및 컴퓨터 클럽 전국 네트워크 확충, 전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지방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태양 전지패널 설치, 각 학급마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보급 등의 프로젝트들이 실시됐다. 모든 쿠바인들이 이런 시설들과 프로그램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봉급과 연급이 늘어났고, 국가 부문 고용이 증가했다.510
사회주의 원리들을 다시 강화하는 이런 조치는 교육과 문화가 정치적 이념들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다고 하는 게바라의 구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도 인민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이상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생활수준의 향상은 시장 거래 장려나 민간 기업 육성이 아닌 예산 통제, 중앙계획, 기술 훈련 및 교육 투자, 산업 육성, 국내 자원 채취, 농작물 다변화, 산업 생산 및 의료 산업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510-511
2004년, 당시 쿠바 경제부 자문가였던 알프레도 곤잘레스 구티에레스가 이렇게 말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체의 아이디어들 중 일부는 오늘날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태를 바라보는 그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타당하고, 문제의 근원을 파고드는 그의 능력은 당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중략) 저는 체의 아이디어로 다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시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정책결정자 중에 게바라의 급진적인 정치경제학을 되돌아본 사람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에 쿠바 정부가 취한 많은 정치경제적 조치들은 게라바의 예산재정시스템과 견줄 만하다.511
최근의 정치경제적 조치들
사실, 게바라주의적 추는 여기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도식보다 더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따라서 근래 쿠바의 경제 발전, 특히 기업완성시스템(EPS)(*저자주-기업들에게 자기 자금을 허용해 전통적인 국영기업들보다 더 큰 재정 자율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경제관리 시스템.)에서 시작한 경제 발전의 정치적 합의는 단번에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시스템은 라울 카스트로가 이끌던 혁명무장군부가 1987년 교정계획 추진 기간에 최초로 도입했다. 이 때 피델 카스트로가 이렇게 선언했다. “체의 경제 사상을 학습해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백 배 더 바싹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중략) 나는 이런 아이디어들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의 범죄일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기업완성시스템은 ‘자유화’ 조치를 통해 기업들에게 재정 자율성을 부여한 ‘특별한 시기’였던 1998년 8월에 법안으로 확정됐다.511-512
하지만 2003년과 2005년 사이에 제정된 새로운 법안이 국가의 재정 자원을 다시 중앙집중화했다. 금융 및 통화 정책 전반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고, 투자와 사회복지 지출에 상당한 금액을 배정하는 식으로 이 시스템이 지니고 있던 재정 자율성을 제거했다. 2003년, 기업들 사이에 지급 수단으로 사용됐던 달러를 금지하고 쿠바태환페소(CUCs)를 도입했다. 쿠바태환페소는 1993년부터 쿠바국립은행이 발행해온 것이기는 하지만, 화폐 가치는 달러 대비 고정 환율이었다. 기업들이 수입 대금을 지급하려면 태환폐소를 달러로 바꿔야 했기 때문에 결국은 중앙정부가 환전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까지 시중에 유통되던 미국 동전이 쿠바태환폐소 동전으로 대체됐다. 2004년 10월, 쿠바 국내 상업 거래에서 미국 달러가 금지되자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보복 조치로 쿠바가 현금으로 재화를 축적하거나 대외 무역을 하는 것을 차단했다. 대표적으로 달러가 쿠바로 유입·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쿠바자산겨냥그룹Cuban Assets Targeting Group을 설립했다. 사실 쿠바 정부가 달러 유통을 금지시킨 이유는 게바라가 1961년 8월에 새로운 은행권을 발행했던 동기와 비슷했다. 당시 게바라는 반혁명 세력들의 자금줄을 차단하고, 미국이 화폐 공급을 수단 삼아 쿠바 경제를 동요시키는 것을 막는 동시에 경제 발전 전략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화폐를 새로 발행했다. 쿠바 정부는 인민들에게 3주의 시간을 주고 보유하고 있던 미국 달러를 쿠바태환폐소로 교환하도록 했다. 이때 쿠바 은행들에 들어온 달러 총액이 이전 10년 동안 보유하고 있던 총액보다 컸는데, 이 자금이 투자와 사회복지 지출에 상당한 보탬이 됐다.512-513
최종적으로 2005년 1월에 쿠바 기업들(외국과의 합작 기업인 경우 쿠바 지분을 포함해)의 재정 자율성이 완전히 금지됐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쿠바태환폐소도 중앙은행으로 귀속됐다. 이후 쿠바태환폐소 배정과 모든 금융 거래를 전부 쿠바국립은행이 관리 감독했다. 그 결과 게바라의 예산재정시스템 이후 볼 수 없었던 상당한 수준의 재정 중앙집중화를 달성했다. 이런 조치는 쿠바가 베네수엘라(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의 시발점이 됨), 중국, 캐나다와 무역 관계를 트면서 도입됐고, 곧바로 쿠바 유전 발견도 이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이 결과 상당한 해외 투자 자본이 쿠바로 유입되기 시작했다.513
2006년경, 기업완성시스템의 새로운 버전(재정 자율성이 없는 기업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스템이 쿠바 기업들(총 767개)의 3분의 1에 적용됐다. 이 가운데 10퍼센트가 군사 기업들이었다. 2007년 8월, 이 시스템이 경제 전반으로 확대 시행됐다. 기업완성시스템은 20년 넘는 기간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서서히 발전해나왔다. 게바라가 자신의 예산재정시스템을 실험했던 4년이란 기간에 비하면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비록 이것이 게바라주의적 추를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우여곡절 끝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국외 비판가들은 기업완성시스템을 경제 자유화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부분적으로는 이것이 ‘특별한 시기’에 핵심 정책이 된 이유도 있지만, 기업완성시스템에 대한 분석이 너무 추상적인 패러다임들에 국한돼 있고, 또 쿠바를 바라보는 외부의 편향된 시각도 일조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평가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효율성’, ‘이윤’, ‘시장’, ‘가격’ 같은 단어들은 자본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채택한 이런 범주들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큰 관심사 중 하나다.” 현재 사회주의 발전의 특징을 좀 더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용어 개발을 놓고 일부 논쟁이 이뤄지고 있다.513-514
사실상 기업완성시스템은 ‘이윤’이라는 측면에서 생산을 측정한다. 기업완성시스템은 작업장들 간의 재정 관계와 노동자들에 대한 신용 대출, 그리고 집단적인 물질적 인센티브의 사용도 포괄한다. 하지만 최근의 기업완성시스템은 게바라의 예산재정시스템과 유사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경제 분석, 가격 통제, 관리 절차를 도입하고 있다. 예산재정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기업완성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기업 잉여(이윤)가 국가에 귀속된다. 따라서 중앙계획은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두 시스템 모두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집단적인 의사결정, 노동자들의 관리 참여, 기술 개발을 중시한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기여도를 높이기 위해 물질적 인센티브와 도덕적인 인센티브를 동시에 사용한다. 일부 기업들을 생산 부문에 따라 한데 묶고, 예산재정시스템에서처럼 관리자들이 꾸준히 교육 훈련을 받고, 노동조합이 경제 효율성 향상을 책임지며, 기본적으로 생산 활동을 중심으로 노동 인력을 배정한다. 비록 이런 식의 관리 통제가 게바라가 지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지만, 소비에트 재정 자율성이나 경쟁 시스템과도 다르고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중국식의 시장개방과도 다르다.514
쿠바에서 영업하던 혼합 기업들(쿠바 정부와 민간/해외 자본)의 수가 2002년에 403개에서 2006년 236개로 41퍼센트나 줄어들었다. 이들 기업의 고용 비율은 쿠바 전체 고용 인구의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한편, 게바라가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던 광업, 에너지, 원격 통신 같은 전략 부문들의 주요 기반 시설 확충과 개발 프로젝트들에 대한 투자가 크게 증가했다. 이 중 많은 프로젝트들이 베네수엘라나 중국의 국영기업들과의 합작 투자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외국 자본을 통해 유입된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의 작동 영역을 제한해 그것이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쿠바 인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고, 동시에 국가의 경제 자원을 고부가가치 생산 분야들, 특히 니켈과 원유 생산에 투자할 수 있다. 제조업과 식품 가공 분야에 대한 정부 투자로 이 분야의 고용이 크게 증가했고, 운송, 통신, 주택 보급 등 공공 지출 투자 증대로 생활수준 전반이 향상됐다. 하지만 개별 소비 수준은 아직까지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514-515
에너지 혁명의 해Year of the Energy Revolution − 재정 및 투자 효율성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또 다른 조치 − 로 명명된 2006년도에 쿠바는 ‘특별한 시기’ 이후 에너지 자원을 절약하고, 합리화하고,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기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을 공고히 하는 정책들을 폈다. 에너지 효율이 높은 새로운 발전기들이 쿠바 전역에 설치됐고, 오래된 내구재들이 에너지 절약형 장비로 대체돼 전력 발전 용량이 필요량보다 네 배 이상 증가했다. 이 결과, 이전에 연료 보조금으로 지출되던 수백만 페소의 정부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에 따르면, 2006년도에 에너지 소비량을 종전보다 3분의 2정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것을 액수로 환산하면 연간 10억 5,000만 달러를 줄이는 것으로 쿠바 임금 총액의 거의 2배, 쿠바 고등교육시스템에 들어가는 총비용의 4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515
국가 재정의 중앙집중화는 국가 자원이 사적 전유에 의해 잠식당하지 않는 한 중앙계획 투자를 통해 생산성과 수익성 증대에 강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따라서 2005년 11월, 피델 카스트로가 부패, ‘신흥 부자’, 사회를 위해 헌신은 하지 않으면서 무상 복지와 무상 교육의 혜택은 최대한 누리려는 ‘기생충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은 봉급이 낮고 재화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가 자원을 빼돌려도 상관없다는,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벌인 일종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 1964년도에 게바라가 이미 ‘인민들의 의식이 바뀔 때까지 사회주의에서도 오랫동안 절도 행각이 존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예산재정시스템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엄격한 회계 및 재고 관리 절차를 도입했다.516
외무부장관 펠리페 페레스 로께Felipe Pérez Roque가 ‘특별한 시기’ 15년 동안 청소년 또는 성년기에 도달한 300만 명의 쿠바인들이 “이런 악습이 팽배하던 사회에서, 즉 피델 동지가 비난했던 이런 부정적인 경향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중략)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따라 보상받는 나라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실업 위험이 없는 사회주의에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이기주의를 막을 있는 것은 집단의식 고양밖에 없다. 게바라의 예산재정시스템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의식을 키우는 것이 이념투쟁의 핵심 과제다. 이런 맥락에서 전면적인 배급제의 실시가 점차 사회적 의무로서 노동 개념을 확대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배급 물품에 대해 각 가정이 매달 5달러 미만의 비용을 지급하고, 국가가 61달러를 지급한다. 일단 봉급이 생계비와 같아지면, 물론 이것은 충분한 식량 공급을 전제로 하지만, 배급 통장이 불필요해지면서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생산 현장으로 내몬다. 이것은 사회적 생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직접 지원으로 대체될 것이다.516~517
라울 카스트로와 새로운 대논쟁
2007년 7월 26일, 라울 카스트로는 형인 피델 카스트로가 2005년 11월에 제기했던 문제들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낮은 봉급과 높은 식료품 가격의 문제, 생산과 생산성이 높아질 때까지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문제, 수입을 줄일 필요성, 생산을 합리화하는 정책, 계속되는 미국의 경제봉쇄의 문제, 그리고 국가의 역할과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해외 투자를 끌어올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의 연설의 기본 토대가 된 것은 소비자가 아닌 사회에 책임을 지는 시민으로서 쿠바인들이라는 개념이었다. “외부에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는 마당에 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내부의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에 모든 인민들을 참여시켜야 합니다“라며 게바라를 환기시키는 말을 했다. 그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분석을 진행하면서 인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 과정에서 쿠바 정부는 쿠바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대논쟁new Great Debate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인민들이 참여하는 포럼을 열었다. 130만 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익명으로 제출한 고충들과 제안들을 접수하고 분석해 현재 국가가 처해 있는 상황과 이에 대한 국민 의식을 종합적으로 평가했다.517
분석 결과 접수된 고충 가운데 일부는 인민들이 물자 부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개인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내놓은 제안들은 사적 소유 관계와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확대할 위험을 노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자신들 차량이나 주택을 정해진 가격으로, 그것도 국가에만 매각할 수 있다는 규정에 반발했다. 뿐만 아니라 가족 농장이나 집단농장의 생산능력(자본축적)에 제약을 둔 것에 대해서도 반발했다. 이와 같이 중앙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은 국가가 생산과 분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반증했다. 하지만 이런 요구를 들어준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에 물꼬를 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518
라울 카스트로가 쿠바에 이전과는 다른 구조적·개념적 변화가 도입될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국외 비판가들이 이것을 곧장 경제 ‘자유화’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가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보조금 지급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일부 비판가들은 이것을 국유지를 사유지로 전환하는 조치로 받아들였다. 2008년 중반 이후, 유휴지를 인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허용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것은 소유 관계를 바꾸지 않은 채 생산성을 높이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즉, 이 조치의 핵심은 소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생산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화’냐 탈중앙집중화냐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실제로 이 조치를 발표하면서 라울 카스트로가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저는 기업을 찬미할 뿐만 아니라 농업, 공업 가리지 않고 대규모 사회주의 국영 기업들을 옹호합니다.”518
2008년 여름, 생산 목표를 충족하거나 초과 달성한 노동자들에게 준 보너스의 상한선이 폐지되자 전 세계 신문들이 쿠바가 자본주의로 회귀했다며 일제히 1면 톱기사로 내보냈다. 그들은 이것이 체 게바라의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과 ‘평등한 임금 제도’의 조종을 알리는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이 새로운 규정들은 기업완성시스템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 전반에 걸쳐 임금 정책을 표준화하기 위해 도입했다. 상한을 두었든 안 두었든, 재화나 서비스 생산, 즉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 측면에서 국가 계획을 초과 달성한 노동자들에게는 보상 차원에서 계속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다. 국가 계획은 노동자 의회에서 논의되고, 시장의 강제가 아닌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된다. 보너스 지급은 기술관료 엘리트의 출현을 막기 위해 관료들, 기술자들, 경제학자들에 대해서는 30퍼센트로 제한하고 있다.518-519
새로운 임금 인센티브를 추진한 배경은 자본주의로 복귀하려는 것이 아니라 식량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세계 경제 위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쿠바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 도입된 다른 조치들도 그렇지만, 이 조치는 국내 생산과 생산성, 특히 농업과 수출 부문에 생산을 대폭 높이기 위한 것이다. 비록 쿠바 인민들이 국가가 생필품에 지급하는 높은 보조금으로 보호받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부차관 마갈리스 칼보에 따르면, 기초 식료품의 80퍼센트 이상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 식료품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2008년도 식료품 수입 금액이 2007년도 대비 10억 1,000만 달러가 더 지출될 것으로 예상됐다. 한편, 경작지 규모가 1998년과 2007년 사이에 33퍼센트까지 줄어들었고, 설상가상으로 경작지의 50퍼센트 정도가 그대로 묵히거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개혁들은 농업 부문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맞춰져 있다.519
2008년도 개혁 조치들은 쿠바 사회의 구조를 크게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라 기존의 사회복지 제도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 경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조치들은 쿠바 혁명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논쟁이 최근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보여준다. 이 논쟁은 혁명 과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룬다. 저발전국에서 어떻게 하면 경제 성장과 함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평등을 달성할 수 있는가? 외부에서 봉쇄된, 그리고 무역 의존도가 높은 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어떤 전략이 최선인가? 혁명 정부 수립 반세기를 평가해보면, 게바라가 쿠바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열정적이고 혁신적으로 나섰던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519-520
쿠바의 경제 ‘자유화론자들liberalisers’은 사회주의를 저해하지 않고도 사적 소유와 생산을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07년도에 쿠바의 사회경제 문제들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있었을 때, 『아메리카의 집Casa de las Américas』 부편집장 아우렐리오 알론소가 사적인 농업 생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가족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생산 여력을 쏟아 부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이 돈을 벌도록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중략) 시장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쿠바국제경제연구센터Cuba’s Centre for Research into the International Economy의 페드로 몬레알 곤살레스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신용 기관을 설립해 기업인들에게 개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2만 달러의 자본금을 대부해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몬레알이 이렇게 제안했다. “국유지를 민간이나 집단농장에 불하하는 식으로 농업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중략) 시장의 지배를 인정해야 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중국과 베트남이 쿠바가 본받아야 하는 개발 모델이다.520
쿠바 경제의 장래를 놓고 벌어진 이데올로기 논쟁의 중심에는 토지 소유권 문제가 놓여 있다. 오늘날 시장 자유화론자들은 1960년대 초에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등장했던 ‘시장사회주의’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적 소유 관계의 증대가 사회주의를 잠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바라가 경고했듯이, 자유화론자들은 생산과 분배가 가치법칙의 작동에 의해 결정될 때까지 시장의 강제를 계속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520-521
대중 의견 청취는 시기적으로 게바라 사망 40주기 기념식과 때를 같이했다. 2007년 10월 초, 정부 부서와 공공 기관들을 포함해 쿠바의 모든 작업장들, 노동조합들, 연구소들, 민간 기구들이 게바라에 경의를 표했다. 경제부가 주체한 기념행사를 포함해 그의 넋을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그가 생전에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521
그로부터 일주일 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Cháves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해 건설, 에너지, 관광, 석유화학, 수산업, 원거리 통신과 니켈 분야에서 새로 추진할 14개 협력 프로젝트에 서명했는데, 이로써 양국이 사회경제개발 분야들에서 맺은 협력 프로젝트 수가 종전의 28개에서 총 352개로 늘어났다. 협정문에 서명하면서 라울이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을 창설하면서 제창한 공동선언문을 언급했다. “무역과 투자는 목표가 아니라 정당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연안의 진정한 통합이 단지 시장에 맹목적인 아이가 될 수가 없고, 해외 시장을 넓히거나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단순한 전략도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경제 활동의 규제자이자 조정자로 적극 관여해야 합니다.”521
2008년 8월 경, 볼리바리안 대안이 인도적·경제적·사회적 협력 프로젝트들에 기존에 이미 협력 체제를 맺고 있던 나라들 외에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니카라과, 도미니카, 온두라스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볼리바리안 대안에 속한 나라들 간의 교환은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들 나라들은 게바라와 쿠바가 1960년대 초에 봉착했던 것과 같은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즉, 이들은 대규모 부채를 떠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투자 자본을 회수해감으로써 국가 경제를 파산으로 몰아갈 수 있는 국제 금융자본 권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불균형 경제들lopsided economies − 핵심 산업들은 매우 발전했지만 사회 전반은 저발전 상태인− 이다. 쿠바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부, 생산수단, 권력의 대부분을 민간 부문이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곧장 노동자 계급의 수중, 또는 국가로 이전하기 위해 취하는 모든 조치들은 제국주의와 그것의 국내 동맹 세력들의 공격에 봉착할 것이다.521-522
현재 오를란도 보레고 디아스는 수송부장관의 자문을 맡고 있다. 2004년 이후 줄곧 그는 베네수엘라 제헌의회, 베네수엘라 경제학자들, 그리고 그 외 정책입안자들에게 예산재정시스템에 대한 자문을 해주고 있다. 산업부 시절 게바라의 또 다른 측근이었던 안헬 아르코스 베르그네스 역시 베네수엘라와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게바라와 함께 일했던 경험담을 설파하고 있다. 쿠바의 게바라주의자들이 중남미에서 반미, 반제국주의의 선봉에 서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들의 영향력을 가늠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베네수엘라에서 ‘새로운’ 정치경제 조직 형식들이 볼리바리안 혁명Bolivarian Revolution의 기치 아래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국유화, 복지정책, 사회적 생산, 노동자 자주관리 같은 형식들은 원래 사회주의의 중심 교의들이다. 그 외 다른 형식들은 게바라 모델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내재적 발전, 연합기업소, 참여 예산, 사회적 생산을 위해 앞선 자본주의 기술 도입,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잠식하면서 의식 발전을 강조하는 것 등은 애초, 게바라의 구상이었다. 차베스가 이렇게 언급했다. “저는 비판적 사상가로서 체, 경제 시스템 변혁가로서 체, 쿠바 산업화 단계의 체, 체와 그가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 체와 소비에트 모델 및 소비에트 『정치경제학 편람』에 대한 그의 비판을 알고 있습니다. 보레고는 체와 함께 했던 경험에 비춰,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충정에서 이 모든 것을 다른 나라들에 설파하고 있습니다.522-523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라는 문구가 학술 문헌과 대중 강연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가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지, 이것이 종전에 사회주의 기치 아래 채택된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연구하는 사람이 아직 없다. 하지만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의 핵심 주자들이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게바라의 후계자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예를 들어, 차베스는 자신이 주도하는 볼리바리안 혁명에서 국내 자본가 계급을 강화하려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 게바라의 분석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보레고는 차베스와 친사회주의 경향은 “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잘못 이해되고 사용되었던 시장 메커니즘, 즉 자본의 법칙들이 베네수엘라 경제 발전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차베스는 이것들이 동유럽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08년 1월, 새로 설립된 베네수엘라통합사회주의당(PSUV)의 강령 초안은 ‘경제 전반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것을 무력화하는 전략적 목적’을 삽입했다.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그 밖의 지역에서 도입되고 시행된 게바라의 혁명 경제학의 성패가 21세기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가 될 것이다.523
결론
쿠바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은 1963~1965년 대논쟁에서 이미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해소되지 않고 남은 문제들이 교정계획 기간 동안 다시 대두한 것이다. 사회주의 이행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의식적으로 주도해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즉, 그들이 생산성과 의식을 동시에 높이면서 계획과 시장 간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복지제도에서 국가와 개인이 어떻게 책임을 분담할지, 사회적으로 잔존하는 계급 적대를 어떻게 해소할지, 작업장 규율을 어떻게 유지할지, 사회의 부를 어떻게 분배할지, 어느 정도의 통제와 중앙집중화가 적절한지 결정해야 한다.524
정책 수립은 기존의 제약들, 즉 사회복지 제도에 대한 정치적 의지, 계획경제와 국유제도, 그리고 미국의 경제봉쇄, 높은 무역 의존도, 낮은 기술 개발 수준, 차관 도입의 어려움 같은 경제적 구속들에서 자유롭지 않다. 게바라는 이런 제약을 딛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공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쿠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 2009년 후반에 잡혀 있는, 즉 1997년 이후 처음 열리는 제6차 쿠바공산당 대회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질 것이다. 논의의 초점은 당장 시급한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문제를 사회주의의 원대한 과제인 평등, 사회적 소유, 의식의 발전과 어떻게 조화시켜나갈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524
쿠바 혁명 50년, 그리고 게바라 사후 40년이 지난 시점에 이런 의문들은 여전히 미국의 경제봉쇄, 사보타지, 그리고 외부의 공격 위험에 직면한 상황에서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게바라의 분석이 계속해서 쿠바 혁명의 생명력을 측정하는 준거로 작용하고 있다. 보레고는 “우리나라의 의식 수준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 어떤 나라도 물질적 인센티브로는, 비록 국내외 협력 및 우호 관계에 대한 인도주의적 의식은 어떨지 몰라도, 인민들의 혁명 의식을 높일 수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524-525
경제 성장과 사회 정의를 구현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 상태가 지속되는 한 게바라의 이론과 실천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더불어 그가 혁명 경제학에 남긴 발자취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특히 급진적인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대담한 경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중남미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525
<표3.1> 쿠바에서 예산재정시스템과 자율재정시스템 간의 주요 이론 및 조직상의 차이들
[기업]
-예산재정시스템(BFS): 산업 부문에 따라 연합기업소 단위로 묶인 기업들. 중앙 통제를 받는 재정과 관리.
-자율금융시스템(AFS): 작업장마다 법적 독립성을 가짐. 재정 역시 자립적임.
[화폐]
-예산재정시스템(BFS): 계산 단위로, 기업 실적을 나타내는 가격으로 기능하고, 중앙 기구의 분석 수단이 됨. 기업은 자기 기금을 갖지 못하고, 대출을 받거나 줄 수도 없음.
-자율금융시스템(AFS): 계산 단위로서 뿐만 아니라 지급 단위로 기능. 생산 단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통제 수단으로 사용됨. 기업은 은행에 자체 기금을 맡길 수 있고 대출도 받을 수 있음.
[은행]
-예산재정시스템(BFS): 국가생산계획에 따라 기업들이 기금을 예금하고 인출할 수 있는 별도의 계정 보유.
-자율금융시스템(AFS): 기업들과의 관계는 자본주의의 그것과 비슷함. 기업들이 돈을 대출받기 위해 계획을 설명하고 지급 능력을 입증해야 함. 하지만 모든 결정은 국가계획에 종속됨.
[인센티브]
-예산재정시스템(BFS):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물질적 인센티브가 법적으로 용인되지만 보상 방식은 임금이나 보너스 지급으로 한정됨. 그렇다고 이런 인센티브가 생산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되지는 않음. 승진해 높은 봉급을 받으려면 전문가 훈련을 반드시 받아야 함. 도덕적 인센티브가 자발적 노동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사회주의 의식을 고양하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함.
-자율금융시스템(AFS): 물질적 이해관계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생산성 증대를 위한, 즉 사회주의 의식 고취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주요 지렛대임. 물질적 인센티브의 적용은 규범보다는 생산 실적이나 노동성과에 따른 보너스 지급 방식을 위함.
[가치법칙]
-예산재정시스템(BFS): 상품 사회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작동. 하지만 그것의 반테제라고 할 수 있는 계획경제와 새로운 사회관계로 인해 계속 잠식됨. 국영 기업들 간의 교환은 기본적으로 상품 교환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음. 이윤이 아닌 비용 절감이 기업의 성과를 평가하는 주요 잣대.
-자율금융시스템(AFS): 저발전 상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가치법칙의 존재와 ‘효용’을 설명해줌. 가치법칙은 계획경제와 반테제가 아니라 그것의 한 차원으로 간주해야 함. 상품관계가 아직 기업들 간의 교환에 남아 있음. 재정 수익성이 생산을 평가하고 자극하는 핵심 요소.
[가격]
-예산재정시스템(BFS): 모든 수입 원자재의 가격은 세계시장 가격에 기초해 고정되어 있음.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은 이윤이 아닌 비용에 따라 책정되고, 세계 생산성을 나타내는 세계 가격과 비교됨. 소매 가격은 기본 수요에 따라 조정됨.
-자율금융시스템(AFS): 가치법칙에 따라 결정. 소비자 가격은 재화의 수요-공급에 의해 결정.(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