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2023.12.3. 15기 글쓰기 합평 박은희
집에서 학교까지 15Km. 거의 3차선 도로에 신호등이 20개도 넘는다. 어떤 날은 거의 파란불이다. 어떤 날은 거의 빨간불이다. 초반에 빨간불이면 중반에 파란불이 되고, 중반에 빨간불이면 후반에 파란불이 된다. 1차선이 막혀 2차선으로 가면 1차선이 뚫린다. 2차선이 막혀 3차선으로 가면 2차선 차들이 쑥쑥 지나간다. 어떤 날은 막힘없이 달려 30분 거리를 20분 만에 가기도 한다.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토요일.
길고 오래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오년 만에 워킹여행클럽에 갔다. 서해랑 길 11코스. 진도 22.5Km. 7시간 4만보 걸었다. 키 큰 사람은 3만보 나오는데 나는 다리가 짧아 4만보가 찍혔다. 걷다보니 알게 된 사실이다. 신장 크기에 따라 걸음수가 다르다는 것을. 다음날 허벅지가 약간 뻐근할 뿐 하루만 지나면 다리가 가뿐하다.
인솔자 포함 15명이 25인승 차를 타고 갔다. 새벽 3시 50분에 출발했다. 2시에 알람을 하고 일어났지만 갈까 말까 망설였다. 이틀 동안 안팎으로 힘든 일이 있기도 했다. 차타는 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하는데 무서웠다. 택시가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콜택시를 불렀는데 왔다. 차분한 아저씨 목소리에 안심을 했다.
일찍 도착해서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편의점을 들렀다. 골목길을 가야하는데 살짝 긴장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길에 두 명의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긴 머리 여자 둘이 킥보드를 타고 지나갔다. 이 새벽에 어디를 가는 걸까?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 호기심도 생겼다.
정해진 시간보다 차가 일찍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나이 많은 여자 분이 앉아 있었다. 인솔자의 설명을 듣고 출발했다. 모두 잠이 들었다. 휴게소에 한 번 들르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차안은 고요했다.
도착 30분전에 부스스 모두 일어났다. 인솔자가 빵과 달걀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진도 가치 버스정류장에 가면 컵라면을 먹고 걷기 시작한다고 안내했다. 3시에 쉬미항에 도착하면 차를 타고 점심 먹으러 간다고도 했다. 옆자리 여자 분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테레사예요. 별칭이?”
“네 언덕이에요.”
“처음 오세요?”
“아뇨, 5년 전에 왔다가 오랜만에 나왔어요.”
“그렇구나,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6월까지 못 와요.”
“아, 네.”
그리고 침묵. 7시 30분 목적지에 도착해 여럿이 모여 물을 끓이고 컵라면을 먹었다. 각자 준비한 커피와 사과, 귤을 나눠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예전부터 서해랑길을 함께 다녀온 분위기다.
먹은 것을 정리하고 화장실 들렀다가 출발했다. 둘이 이야기 나누면서 가기도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부부가 손잡고 가기도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빨리 가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 반 배려 반으로 말을 걸어왔다.
“처음이세요?”
“아니요, 5년 전에 몇 번 다니다가 이제 다시 걸으려고 나왔어요.”
“다음엔 친구와 같이 와요.”
“네, 여기 저기 소문내서 다음에는 같이 오려고 해요.”
“이제 자주 나와요.”
“네 일정이 되는대로 나오려고 해요.”
“어디 살아요?”
“목천에 살아요.”
“아이고 그곳에서 오려면 어려웠겠네요. 어떻게 왔어요?”
“다행히 택시가 있어서 잘 왔어요.”
“목천에 동생이 사는데 지난번에 동생이랑 같이 걸었어요.”
“네.”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심리적 거리를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혼자 걷게 두기도하고 함께 걷기를 반복했다. 쉬는 구간마다 각자 준비해온 간식도 나눠먹었다. 조리퐁. 빅파이, 찰떡파이, 고량주, 돼지 껍데기 등. 나도 편의점에서 산 귤을 나눠주었다. 점심이 늦었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긴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왼쪽에 다양한 모양의 섬들이 있었다. 손가락 섬, 발가락 섬, 강아지 모양 등. 바다가 보이다가 논이 보이고 밭이 보였다. 진도 대파가 유명하다고 온통 투명하면서 진한 초록색구간도 있고, 아직 뽑지 않은 배추도 싱그러웠다. 갈대와 억새가 뒤섞여 다채로웠다. 양쪽 길 따라 쭉 이어져있는 갓들은 달큼 쌉싸름한 향기를 내뿜었다. 날씨도 좋았다. 맑은 하늘색에 흰 구름도 아름다웠다. 밭에 앉아 파를 다듬던 할머니가 어디서 왔느냐 물어보기도 하고 파를 나눠주기도 했다.
뉴스만 보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닌데, 이 날은 더 없이 평화로웠다.
길가에 세워진 푯말은 위로가 되었다.
‘여까지 오느라 욕봤소.’
진짜 욕봤다. 애썼다.
금요일.
엄마에게 20만원 용돈을 보냈다. 전화가 왔다.
“20만원은 부족해. 10만원만 더 줘.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단 말야. 사람들도 만나야 하는데 맨날 얻어먹을 수 없잖아.”
벽돌이 가슴에 박히는 것 같다.
“없어, 끊어.”
언제는 20만원만 달라고 하더니.
카톡이 왔다.
‘침대 언제 사줄 거야. 등이 배겨서 이제 땅에서 못자겠어. 이불을 넣었다 꺼냈다 하니 허리도 아프고.’
답장하지 않았다.
가슴에 박힌 벽돌 위에 다른 벽돌이 날아와 쌓였다.
30년 동안 대출해서 준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저렇게 당당하지?
2년 전까지는 엄마와 매일 통화했다. 엄마가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해줬다.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봐 두려웠다. 나와 동생 몰래 차용증을 쓰고 돈 빌린 사실을 알고 난후부터 1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초반에 몇 번 전화 하더니 엄마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통화하던 동생과 자주 전화를 했다.
돈 빌려준 사람이 엄마와 나와 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동생과 소통하면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재판을 했다. 1년이 걸렸다. 다행히 나와 동생 책임은 없다고 판결이 나왔다. 상대방이 속인 면도 있고,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갚기도 하면서 꾸준히 이자를 준 증거가 있어 엄마도 배상하지 않는 걸로 결정되었다. 동생의 노력으로 엄마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부족해서 동생과 내가 용돈을 주기로 했다.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엄마의 요구는 끝이 없다.
‘눈약이 떨어졌어.’
‘이가탄이 필요해.’
‘홍삼 먹으니 기운이 나더라. 또 없니?’
‘그거 있잖아, 락토 뭐더라. 그것도 떨어졌는데. 화장실 잘 가는 가루약.’
‘너 안 입는 옷 없으면 주라. 옷이 왜 이렇게 비싸.’
‘검은콩 필요한데 언제 사줄 거야.’
‘산악회 가야하는데 아줌마들 줄 과자 같은 거 없어? 있으면 보내줘.’
예전엔 요구 할 때 마다 으르렁 거렸다. 가슴에 박힌 벽돌을 두드리면서 창과 화살을 엄마에게 쏘아 보냈다. 다음날 미안하다고 하면서 요구한 것을 들어주었다.
이제는 무응답이다. 답이 없으면 엄마가 카톡을 보낸다.
‘침대 사주기 싫으면 말아.’
‘오늘 엄청 춥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밤늦게 다니지 마. 운전 조심하고.’
‘은영아, 돈 조금만 보내줘. 살 거 많아서 그래 미안.’
‘은영아, 다음부터는 니 형편대로 해주면 고맙겠어.’
엄마는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갑자기 엄마의 삶이 궁금해졌다. 분명 좋을 때도 있었을 텐데. 가슴에 박힌 벽돌이 작아졌다.
목요일.
마지막 교사-학부모 연석회의를 했다. 학교교육과정 관련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자리다. 일 년에 3번 운영한다. 따뜻한 만남으로 유쾌하고 재미있게 시작했다. 4개의 안건 중에 3개는 별 무리 없이 지나갔다. 마지막 안건을 협의할 때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원래 안건 내용이 아닌 다른 내용으로 변경되었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교사들이 반발 했다. 담당자는 뚜렷하게 변경된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급기야 모든 교사들이 회의장을 나갔다. 원래 내용은 전교직원 회의에서 협의를 하고 정리된 내용이었다. 변경된 내용은 교장 선생님의 지시에 의해 정해진 내용이었다. 안건 담당자가 변경이 되었으면 다시 협의를 하거나 알려야 하는데 그냥 올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일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감사 마무리를 급하게 간신히 하고 회의를 마쳤다. 학부모들은 어리둥절하면서 귀가했다.
연석회의가 끝나고 교사들끼리 모여서 큰소리가 오고갔다.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냈다. 밤 12시가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3월부터 좋았던 분위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교장이 시킨다고 그대로 합니까?”
“우리가 협의한 것은 뭡니까?”
“왜 회의를 합니까?”
“학부모들 앞에서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모르는 내용이 갑자기 나와서 결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교장이 결재권자니 무조건 하라고 하는데 어쩌라구요.”
“최소한 우리하고 이야기는 했어야지요.”
“사실 교장이 말한 내용이나 우리가 결정한 내용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가 팀이라고 하면서 이게 팀입니까?”
다음 날 다시 모였다. 감정적으로 말한 것에 대해 서로 사과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모두 편해진 것은 아니다.
“전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하면 뭐해요. 교장이 반대하면 못하는데.”
“교장선생님 혼자 다 결정하라고 해요. 우리야 편하죠 뭐.”
“아니, 교장 선생님도 회의에 참여하면 되는데 왜 오지 않을까요? 오라고 하세요.”
“이제 회의도 하지 마요. 뭐 좋다고 합니까? 힘들게.”
“이미 다 끝난 일도 다시 하라고 하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보통 9월에 발령 나면 6개월은 지켜보는데 이 교장은 오자마자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사사건건 트집 잡고 태클을 거니 원.”
“우리 모두 교장실 찾아갑시다.”
“그럽시다. 언제 갈까요?”
“다음 주 월요일에 가요.”
“좋아요. 모두 그날 찾아가서 담판을 지읍시다.”
교장은 도대체 왜 그럴까? 궁금해졌다. 단체로 월요일에 가기 전 교장을 먼저 만났다. 다른 교사들이 배신자라고 화를 낼까봐 망설여지고 두려웠지만. 교사들 모두 업무를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극단적인 상황은 막고 싶었다. 5년 동안 몸담은 학교를 떠나기 전 마무리를 잘하고 싶기도 했다.
“교장 선생님 왜 그러셨어요?”
“아이고 선배님, 민주적인 학교라고 하는데 저는 1/N 아니라 0/N입니다. 아무도 저에게 오지 않아요. 다른 학교는 모든 교사들이 교장 입만 쳐다봐서 대상포진 걸렸다는데 우리는 아무도 안와요. 물론 선생님들이 알아서 일하는 것은 좋지요. 저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명색이 교장인데 제 의견도 있는데 물어보지도 않아요. 공유폴더 찾아보라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다 찾아봅니까. 심지어 학사일정은 교육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데 결정이 났다는 것만 들었지, 어떻게 정해졌는지 몰라요. 교장이 학사일정을 몰라서 되겠습니까? 젊은 교사들이 과정과 절차를 몰라서 알려주는 건데 듣기 싫다고 하네요. 회의에서 결정되었으니 할 수 없다고 해요. 제가 모든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도 의견이 있는데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 어쩌겠어요. 저도 감정적으로 나갈 수밖에. 어쨌든 모든 책임은 교장에게 있으니 저에게 물어보면 좋잖아요.”
“많이 서운하셨나 봐요.”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 교장 발령 첫날 재량휴업일 때문에 교사들이 때로 몰려와서 따지고 소리 지르며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아서 많이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오래 담아 두지는 않아요. 애기 선생님들인데 제가 이해해야죠.”
“이제 이해가 되네요. 업무 담당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 하면 교장 선생님은 도움을 주고 싶은 거지요?”
“맞아요.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하지, 방해를 하겠습니까? 교육청에 아는 사람도 있고 하니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지요.”
“학교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 싶은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다만 일반학교에서는 교장 교감 선생님과 담당자들끼리 모여서 협의하고 결정을 했다면, 혁신하교다 보니 회의 절차도 있고, 교직원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변경되는 것에 민감하다보니 서로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담당자들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구조이기도 하구요. 교장 선생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가 선생님들한테 잘 전달하도록 할게요. 교장 선생님도 이번 한번만 양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년에는 꼭 시행하도록 인수인계도 잘하고 교장 선생님의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 이야기 할게요. 이 모든 일이 제가 잘못했네요. 선배로서 잘했어야 하는데.”
“그럼요, 제가 뭐 꼭 그렇게 하자는 것은 아니에요. 올해도 한 달 남았는데 잘 마무리하고 내년부터 해도 되지요.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지요.”
후배들을 한 명 한 명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다. 학년말이다 보니 모두가 예민해지기도 했고 지치기도 한 것 같다.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기도 하고.
학사일정 담당 후배와 함께 교장실에 갔다. 교장 선생님과 갈등이 제일 많이 있었던 후배다. 후배는 교장 선생님에게 소리 지르고, 교장은 징계 내리겠다고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다행히 후배는 화내지 않고 교장 선생님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교장 의견도 반영해서 평가회 때 협의하기로 했다. 교장도 징계 내리겠다고 말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후배가 죄송하고 고맙다고 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교장실은 가지 않기로 했다.
삶은 사랑하다 죽는 것.
말은 쉽고 문장은 짧지만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종점까지 가면서 계속 사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