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어스름
이창희
그가 멀어지자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매무새 단장하는 일을 그쳤다
그때 그날의 기억을
한 잎 씩 지운다
꽃 시절에 피었던 흔적이
발그레하게 불거진다
통증은 까맣게 여문다
손을 내밀어보지만
떠나는 사랑은 돌아보지 않는다
바람이 가지를 흔든다
날이 저문다.
너를 살리려고
이창희
네 심장을 살리려고
내가 죽는다
사마귀 한 쌍
짝짓기 사랑은
짝을 살리려고
내가 죽는 것이다
노란 호박꽃이 고개를 꺽는 것은
파릇파릇한 애호박 때문이다
계절은 청둥호박으로 익어가고
가슴 속 씨앗 몇 알
이듬해 봄을 품었다
뱃사공 분도의 아침
이창희
덕판에 갈근거리는 바람이 상쾌하다
푸른 이끼 더듬고 가는
은어 떼 지느러미
깊숙이 삿대 찔러서 그 물길을 앗는다
조약돌 잠 깨우는 물새 한 마리
만 평 모래밭 땀 뜨다 날아가고
간밤, 꿈에 달뜬 갈대 부스스 잠기를 털고 있다
구절초 잎사귀에 베틀을 거는 풀무치랑
딸가닥, 딸가닥
색실을 뜨는 아침햇살
청명한 섬진강에 거룻배가 실린다
건너야 제 꿈 밭을 짓는 사람들
목숨줄 풀면서 건너가고
제 꿈밭을 짓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갖은 색실 끌며 건너오는,
더러는 타지로 나갔던 이웃들이
한숨 끌고 돌아와
바닥이 환한 베틀에
바디실을 뜬다 온갖 모양 물 무늬로
베필이 흘러간다
살고 보면 사는 일이
물소리그 한 필인 것,
이두박근 힘 모아서
뼈의 상앗대 고쳐 잡고 어허야,
오늘도 꿈길을 튼다
쪽 진 낮달이 흐르는 강심에
명주실 목숨을 건다
분계선상을 흐르는 봄
이창희
어느 곳보다 먼저 비무장지대에 봄은 왔다
황사 바람 불어와
인계 철선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검은 땅거죽 뚫고
푸른 촉기들이 준동하곤 했다.
흔들리는 것,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은 모두 적敵이야 가시거리에 일어서 있는 것들은
모조리 태워버려
하명下命 받은 도화선은
불을 물고 군사분계선 기어 들어가
산갈대 밑동까지 핥아 버렸다
사계射界를 터느라 숲을 불태우는
비무장지대 토벌작전. 검은 적막 속에
비로소 실현된 완전한 비무장
집점을 향한 탄착군만 난무하는그 공간에 항복의 푸른 깃발 나부끼며
일어서던 초목들
무엇으로 저것들을 저지 할 수 있을 것인가
촉기를 다투는 잡초들 수런거림을,
앙가슴 빠개젖히고 일어서는
무저항의 손발들을
띠뿌리 끈질긴 힘줄 동이고
움찔 움찔거리는 반도의 허리를,
우리들 새봄은
분계선상으로부터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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