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흥 14회, 참 소중한 우리들의 추억 줍기
아! 옛날이여
제2호
2015년 8월
건흥초등학교 14회 동기회
차 례
★ 우리들의 졸업사진-------------------------------------------3
1. 우리들의 추억 이야기----------------------------------------4
(1) 고구마 도둑 이야기(신경이)--------------------------------4
(2) 나는 고무줄 끊기의 달인(박운수)---------------------------5
(3) 입학식 이야기(김형진)-----------------------------------6
(4) 나의 추억 두 가지(김경순)----------------------------------7
(5) 철부지들의 싸움(김영식)-----------------------------------9
(6) 나랑 이름이 같은 어른 때문에(김종만)----------------------------10
(7) 함께 다니다가 떠난 친구들(최광호)---------------------------10
(8) 링이 없어서 그렇지(정종철) ----------------------------------11
(9) 어머니께 배운 노래(채경모)-----------------------------------13
(10) 다리도 뿌질라 보고(박금석)------------------------------------13
(11) 강아지가 물고 간 내 운동화(육현주)---------------------------15
(12) 마음 편하지 못했던 내 초등학교 시절(채임자)------------------16
(13) 우리 동네 조폭놀이(문성호)---------------------------------17
(14) 억울한 매만 맞은 이야기(박모선)----------------------------18
(15) 어떤 학교 선생님이(박도순)---------------------------------19
2. 친구들 주소록----------------------------------------------21
3. 우리 이웃 동명 학구의 마을별 유래---------------------------------22
(1) 중항리---------------------------------------------------22
(2) 환덕리---------------------------------------------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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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성호 | 정 종철 | 김 영식 | 강 열규 | 신 형철 | 김 규섭 | 김 성기 | 강 명갑 | 김 형진 | 최 봉영 | 문 병호 | 강 유구 | 강 우구 |
정 찬인 | 황 삼용 | 강 희권 | 신 남식 | 김 경호 | 박 운수 | 이 행구 | 박 금석 | 김 종만 | 정 영환 | 채 경모 | 권 정효 | 황 갑천 | 최 광호 |
강 순남 | 김 경순 | 이 경애 | 문 순자 | 이 향연 | 오 춘자 | 강 우임 | 정 갑련 | 김 윤남 | 정 도연 | 박 모선 | 하 남연 | 이 성주 |
신 일아 | 김 선임 | 정 숙자 | 고 행선 | 김 둘순 | 윤 도선 | 이 춘선 | 박 연자 | 김 향련 | 이 순도 | 이 향숙 | 박 선애 | 신 경이 | 김 정애 |
안 정희 | 강부연 선생님 | 이진식 선생님 | 황갑도 선생님 | 이석희 교장선생님 | 고수태 선생님 | 하우근 선생님 | 이강인 선생님 | 윤임조 님 |
최 형순 | 문 맹달 | 문 순달 | 박 도순 | 김 금자 | 채 임자 | 신 명자 | 육 현주 | 윤 판임 | 신 덕조 | 윤 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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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추억 이야기
□ 고구마 도둑 이야기(신경이 편)
이제는 아득한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나간 일들이 추억이 되었을 때 자꾸만 그것이 그리워지는 법인 것 같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나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한창 자랄 때라서 그랬는지 늘상 배가 고팠던 것 같다.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은 도시락을 싸 가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배가 고팠고 먹을 것이 그리웠던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오늘 하려고 하는 <고구마 도둑 이야기>이다. 따지고 보면 나만 배가 고팠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꼭 ‘도둑’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좀 뭣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는 상당히 큰 내 재산을 도둑이라도 맞은 느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남들이 보나 안 보나를 확실하게 망 보아가면서 진달빗 산 아래 신작로를 걷다가 당시의 가로수인 제법 굵은 버드나무에다가 길을 걸으면서는 보이지 않을 방향에다 집에서 고이 싸 갖고 온 고구마를 매달아 놓고 학교에 갔다.
물론 하교 길에 거기쯤 오면 늘 배가 고팠기 때문에 허기를 좀 달랠 계획으로 그렇게 했고, 딴에는 걷던 길을 좀 되돌아와서 다시 걸으면서 고구마 매단 것이 보이는지 제법 자세히 살펴보아 가면서----.
학교에서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가끔씩 매달아 놓고 온 고구마를 생각하며 혼자 미소도 지어보곤 했다. 학교 수업과 청소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학교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고구마의 안부가 궁금하여 걸음을 빨리하곤 했다.
<맛있어 보이는 삶은 고구마> <귀하게 볼 수 있는 고구마 꽃>
그런데 부푼 기대도 설레는 마음도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도 애지중지 매달아 놓은 고구마가 없어진 것이다. 그 때의 내 심정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실망과 함께 배는 더 고파오는 것을 가져가 버린 그 도둑(?)은 알기라도 했을까?
그 후에도 가끔 다른 나무에 매달기도 하고 전혀 다른 장소에다 고이 숨겨 놓기도 해 봤는데 무사히 나를 기다려 주는 고구마가 반갑기 짝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도둑(?)의 손을 탄 날에는 상심을 하며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다녔던 기억이 있다.
이 일은 2014년 8월 동기회 모임에서 그 도둑이 밝혀졌다. 짐작이야 했지만 그는 한 동네에 사는 동기 머스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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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버려서 공소시효마저 지났으니 그 친구를 원망하거나 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아득한 어린 시절의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의 한토막으로 삼을 뿐이다.
□ 나는 고무줄 끊기의 달인(박운수 편)
아득한 우리 초등학교 시절은 지금에 와서는 생각만 해도 즐겁고 웃음이 나는 추억들로 가득하다. 눈을 감고 세월을 헤아려 보니 벌써 오십 하고도 삼년이 지났다. 정말로 오래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 시절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어떤 일들을 하고 살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종이 쳐서 교실에 모여 앉아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공부했던 일들은 저만치 밀어 두고 악동 닮은 행동을 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그 당시에 나 혼자만 그런 짓(?)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면에 그 이름들을 열거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아마 말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다 알 것이다. ○○, ☆☆, ◇◇, □□ 외에도 더 있지 싶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여학생들의 고무줄 놀이 모습> <고무줄 놀이를 하는 인형들>
당시 우리들의 놀이 활동은 학교 공부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도착해서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 집에 보내 주었는데도 집에는 가지 않고 운동장이나 학교 뒤편에서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일이 자주 있었던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놀이 시간이 공부시간보다 훨씬 즐겁고 재미있고 그랬던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은 주로 구슬치기, 굴밤치기, 제기차기, 딱지(때기)치기, 못 치기 등을 많이 하고 놀았는데 그 놀이들은 계절마다 조금씩은 달랐었다.
그리고, 여자 친구들은 고무줄놀이와 공놀이, 패차기 놀이를 가장 많이 하고 놀았던 것 같다. 고무줄놀이랑 공놀이, 패차기 놀이 말고는 여자 아이들이 즐겨 했던 놀이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 여 공통으로 즐겨 했던 놀이로는 숨바꼭질, 잡기놀이, 땅 따먹기, 삼팔선, 간이 야구(하루) 등등의 놀이판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한 겨울에도 벌어져서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신나게들 놀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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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대부분 남들이 즐겁게 노는 놀이판에 방해 놓는 것을 참 즐겨 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그런 악동의 기질을 마치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인 양 까불고 다녔던 기억이다.
특히 별로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고무줄 끊기의 달인이었다. 고무줄놀이는 주로 여학생들만이 즐기는 놀이였는데 연필 깎는데 쓰려고 산 날카로운 칼을 숨겨가지고 다니다가 아주 잽싸게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어쩌면 참 못된 짓을 많이도 했던 것 같다.
아닌 척 하고 슬그머니 다가가서 신나게 노는 여자 친구들의 고무줄을 잽싸게 끊고 도망가는 내가 얼마나 미웠겠는가? 여자 친구들이 내뱉는 욕설 섞인 말대로 되었으면 나는 아마 그 당시에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여자 친구들은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고무줄을 사려서 끊는 것을 막았을 정도였으니까.
‘움디 자석’, 떼리 지기삘끼다.‘, ’칵 고마 디저삐라.‘ ’뭐 저런 기 다 있노?.‘
요새 생각을 해보면 참 쓸 데 없는 짓을 많이도 했던 것 같아 여자 동기들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 입학식 이야기(김형진 편)
1957년의 내 입학식을 회상하면 오늘날과 비교하여 참 많이도 달랐음을 실감하게 하는 일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입학식에 자녀들을 데리고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었다. 가능하면 형, 누나, 오빠, 언니나 이웃집의 상급생더러 좀 데려가라는 등 흡사 장날 장에 가서 뭣 좀 사 오라는 식의 장거리 부치기와 다를 바 없이 아이를 혼자 보내는 경우가 참 많았었다.
실제로 나도 당시 5학년이던 형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것으로 입학식에 임한 셈이다. 나만 그러지는 않았고, 다른 많은 친구들이 나처럼 부모님이 직접 오시지 않은 경우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왼 쪽 가슴에는 대문짝만한 이름표를 만들어서 손수건 접은 것 위에다가 달도록 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단 이름표가 통일이 될 리 없었고, 예쁘게 만들기는 사치에 지나지 않았고 오직 큼직하게 쓴 이름 석 자 만이 중요시 되는 상황이었다.
<옛날 입학식 장면> <내가 근무한 정동초등 입학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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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손수건 접은 것을 이름표와 함께 가슴에 달고 오는 것은 당시 영양실조에 가깝도록 어렵게 자라 허약한 시골 아이들이 너 나 없이 코를 흘리는 바람에 그런 상황에 간단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었다.
입학식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을 소개할 때 제법 무섭게 생기셨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기억한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어려워서 알아듣지도 못할 내용을 어찌 그리 길게도 하시는지, 나중에는 지루하다가 못해 진저리가 날 지경이 되기도 했었다. 식이 끝나자 박정애 담임선생님께서는 화장실, 우물, 교실 등을 돌면서 자세한 설명을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받은 1972년에는 앞에 이야기했던 사항들이 조금은 깔끔해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달라진 부분은 이름표가 가게에서 파는 상품들이라서 어느 정도는 규격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입학식이 끝나면 학년별로 부여받는 색깔에 맞게 국기사에 일괄 주문을 하고 비교적 깔끔하게 만들어진 명찰을 달았다.
요즈음은 어떤가?
컴퓨터 워드 작업으로 반마다 다른 색깔의 이름표를 만들어서 입학식장 앞에 걸어두면 신입생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들어서면서 자기 것을 찾아서 가슴에 달고 기다리도록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안내가 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장선생님의 ‘입학 허가 선언’, ‘신입생 재학생 교례’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학교장이 입학허가 선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건 한사람이건 입학이 보류되거나 안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학 허가 선언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사안이라 여겨진다.
해서 내가 교장이 되고난 후에는 ‘입학 허가 선언’을 ‘입학 환영’으로 바꾸어서 시행을 하였었다.
입학식의 모습만 바뀐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키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크고 영양상태도 전과는 대조적일만치 양호한 편이어서 무방비 상태로 코를 흘려서 훌쩍이는 아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얘기가 타당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전과 비교하여 예쁜 얼굴들임도 사실이다. 어렵던 시절에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의 정도가 그만큼 차이 났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 나의 추억 두 가지(김경순 편)
<그 하나 – 죄 없이 벌 서기>
4학년 때의 일이다. 조용의 선생님이 우리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어느 날 우리 학급에서 돈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생겼다. 돈은 누군가가 슬쩍 가져갔는지 아니면 단순히 돈 주인이 잘 못 생각하여 없어지지도 않은 것을 허위신고를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큰 사고가 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 눈을 감으라 해 놓고 담임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들 중에 젤 기억에 남는 말은 다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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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정직해야 된다.’
우리 어린 것들을 바르게 교육시켜 보시려고 들려주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뭔가 씁쓸하다. 우리가 모두 도둑놈인가?, 우리는 아무도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머리가 많이 어지러웠다.
그 날 우리는 걸상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한참동안 괴로운 고통을 참아야 했고, 그러고도 결국은 도둑(?)을 잡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세월이 60년 가까이 흘러서 이제는 그 시절 일들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된 지금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이야기 하고 웃을 수 있으니 그점이 그저 좋기만 하다.
<그 두울 – 곰보야 쥐 잡아라.>
나는 가산에서 곤양 쪽으로 다리를 건너 바닷가 좀 높은 곳에 외딴 집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그 곳에서 다녔다. 제일 가까운 이웃이 머은게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는 우리 한 해 선배인 손××선배가 있어서 함께 학교로 가는 날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 학교까지 가기 전에 김○○라는 봉사(장님을 그 때는 그렇게 불렀었다.)가 도로 한 가운데 서서 평소 그가 짚고 다니는 막대기를 휘저어서 학교 가는 길을 막곤 했다. 하도 거칠게 휘젓는 바람에 우리는 소리를 죽여 가며 길 아래로 우회하여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손××선배랑 둘이서 내 뱉는 합창이 있었으니,
‘곰보야 쥐 잡아라. 새끼새끼 나온다.’
<벌서고 있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오습> <경순이 잡으러 오는 아줌마?>
그 소리에 화가 난 김○○라는 봉사는 다음 날 아침이면 도로를 점거하고 제 눈 역할을 하는 막대기를 휘두르게 되고, 우리는 벗어나는 순간 ‘곰보야 쥐 잡아라’를 합창하는 일이 계속 반복이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김○○라는 봉사 어머니가 학교에까지 찾아오셔서,
“몬뙨 가시나들이 앞도 못 보는 불쌍한 우리 아들을 아침마다 놀린다.”
하시면서 패악을 하심으로써 우리는 자초지종 설명도 못하고 선생님께 혼만 나곤 했다. 그 일도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만 나오는 추억이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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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부지들의 싸움(김영식 편)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내 키가 상당히 작은 편에 속했다. 지금이사 우리 동기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크다고 해도 아무도 아니라고 우길 사람이 없을 만큼 크지만 아무튼 초등학교 다닐 때는 그랬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웃 동네 신◇◇이가 어느 날 집에 가는 길에 내게 싸움을 걸어왔다. 실은 그게 조폭들 사회에서는 도전장을 내민 것과 같은 일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왜냐 하면 신◇◇이 그 친구는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그 친구와의 일대일 싸움쯤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왜 감히 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을까? 뒤에 안 일이지만 그건 같은 반 친구 정○○이가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그 때 당시에 나는 정○○한테는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싸우다가 밀리면 자기가 도와서라도 이기도록 해 준다고 싸움을 권한 것이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 친구는 자기 고무신 가득 자갈을 넣어서 나중에 사태가 진행되어 필요할 때면 자갈을 넣어 무거워진 신발로 나를 짓밟아버리겠다는 맹랑한 계획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싸움은 시작되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신◇◇이는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정○○이만 믿고 가상하게도 용기를 내어 내게 전에 없던 파이팅을 보였던 기억이다. 치고받고 밀고 당기고가 한참 계속되다가 드디어 전세는 내가 우세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 때 미리 자기들 두 놈이 약속한대로 자갈을 넣은 고무신으로 나를 밟으려고 정○○이가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그건 계산 착오였다. 자갈 때문에 발이 많이 아팠던 정○○이는 그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지가 먼저 도망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분만 더 앵기들몬 지기삐끼다.”
도망치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기고만장하여 소리쳤었다.
<시골 마을의 모습> <아이들의 싸움 장면>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그 때의 일이 결코 내가 잘한 일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 두 녀석이나 나나 자라는 아이들답게, 싸웠다고 그들과 원수진 일도 없었고, 지금도 그 일로 서먹서먹한 알도 없다.
다만 철 모르고 커가던 어린 시절에 했던 행동들 하나하나는 그게 모두 아름다운 추억인 것 같아서 한 번 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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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랑 이름이 같은 어른 때문에 (김종만 편)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자주 학교에서 보내는 안내장을 학부모나 아니면 동네 유지들에게 전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기성회, 사친회 같은 학교와 관련되어 지역 학교의 발전을 위해 어른들이 모여서 의논들을 하는 단체의 회의를 소집하는 안내장이나, 운동회 안내장 등속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담임선생님께서 교실로 갖고 오셔서 하교하기 직전에 꼭 잊지 말고 전하라는 신신 당부를 하시고는 한 장 한 장 나누어 주시곤 했다.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 날도 선생님께서는 여러 장의 안내장을 봉투에 각각 넣어서 교실로 가지고 오셔서는 봉투에 적힌 이름과 동네를 불러주시면서 전해줄 마땅한 사람을 찾아서 나누어 주셨다.
반 정도 나누어주신 뒤였던가? 선생님께서,
“김종만.”
하고 부르시기에 무의식중에 대답을 하고 앞으로 나가서 봉투를 받고 내 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나누어 주시는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선생님께서는 다시 한 번
‘꼭 전해야 된다.’
‘잊어먹으면 큰 일 난다.’
하시면서 확인을 시작하셨다. 다 잘 전달 되도록 아이들 손에 전해졌는데 가화 동네인가 김종만 씨 것은 아무도 받은 사람이 없다. 우리 동기 김정애 친구가 받아 가야 맞는데 정애는 안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건 내가 받아 가지고 있는데 그게 그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사 그걸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생님! 그것 제가 갖고 있습니다.”
하면서 갖다 드렸다.
교실은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고, 선생님께서도 웃으시면서 돌려 받으셔서는 정애한테 전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내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때는 어려서인지 스스로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되어 혼자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 함께 다니다가 떠난 친구들 (최광호 편)
우리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당시에는 적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김규섭, 강명갑, 강우구, 김성기 등 친구들은 나이가 훨씬 많았다. 여학생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어서 몇 몇은 한 학년씩 올라가서 우리보다 한 해 선배로 졸업을 한 경우다.
함께 입학을 했거나, 전학을 와서 함께 공부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졸업까지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이게 기록을 해 두었던 일이 아니라서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의존하고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 주고받는 동안 알게 된 내용들을 토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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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해 볼까 한다.
☆한 학년 올라간 친구들
오말남, 김둘자, 조희선 – 세 사람은 우리보다 한 해 선배인 13회 졸업생 명단에 있다. 자기들 나이에 비해서 입학은 좀 늦게 우리랑 같이 했지만 졸업은 일찍 해야 하는 당시의 사정과 맞물린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특히 오말남 친구는 조카 오춘자랑 함께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고, 김둘자 역시 동생 둘순이랑 함께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한 학년 내려간 친구들
채갑래 – 우리 동기 채임자 친구의 친 동생, 1학년 때 질병으로 오랫동안 아픈 바람에 할 수 없이 한 학년 내려가서 15회로 졸업까지를 한 셈이다.
강도생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함께 다니다가 4학년에서 5학년 올라갈 때쯤에 한 학년 내려가서 15회 명단에서 찾을 수 있다.
☆다니다가 전학을 간 친구들
정선이 – 우리가 1학년일 때 담임선생님이신 박정애 선생님의 딸이다. 어머니가 부산 남천초등학교로 전근 되어 가시는 바람에 함께 전학을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김종삼 – 전학 와서 함께 다니다가 또 전학을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전학을 간 학교는 가화초등학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마지막으로 그가 전학을 가서 졸업을 한 학교는 알 수가 없다.
박순옥 – 박효륜 교장선생님의 큰 딸이다. 5학년으로 올라갈 때 아버지가 산청 오부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전근 되시는 바람에 함께 전근을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영혜 – 아버지가 풍금을 잘 타시는 김태진 선생님이셨는데 역시 우리랑 같이 다니다가 3학년 때 쯤 아버지의 전근 때문에 인근 가화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박운용 – 우리 친구 박운수와는 사촌지간인데 어려서 큰집에 함께 살면서 우리와 함께 입학을 했다. 좀 다니다가 충무에 있는 자기 중부님 댁에서 다니기도 하다가 다시 전학을 와서 함께 다니기도 했는데 결국 졸업은 함께 하지 못했다.
김봉구 – 봉구라는 친구는 입학은 우리랑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친구가 살던 곳은 동천 부락의 회사와 새땀 마을 사이에 있는 궤설이라는 곳(김금자 친구의 집 뒤)에 살았었다.
☆다니다가 그만둔 친구
이덕수 – 중간에 몸이 많이 아파서 여러번 학교에 오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살던 마을은 검정 중에서도 아방 쪽이었다.
박연자 – 유일하게 재학 중에 세상을 뜬 것으로 기억한다.
□ 링이 없어서 그렇지 – 허락 받은 싸움 (정종철 편)
우리가 5학년 때의 일이었던가? 지금 생각해도 웃음만 나오는 일이 있었다. 안동징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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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사는 행구하고 사소한 말다툼 끝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막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담임선생님께 들키고 만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정정당당히 싸워서 이기든 지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부터는 사이좋게 지낸다는 약속을 받으시고 공개적으로 싸움을 붙이셨던 것이다.
수업이 모두 끝이 나고 교실 뒤편에 책 걸상을 앞으로 치워 복싱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심판은 우리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기로 하고,
‘시-----작!’
하는 선생님의 신호를 시작으로 싸움은 시작 되었다. 한참을 치고받다가 선생님께서,
‘그만----!’
하시면 싸움을 중지하고 쉬고,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 나도 행구 그 친구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만 졌다고 포기하고 말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위 촌놈들에게만 있던 깡다구를 발휘하여 싸움은 계속되었다.
한참 후 땀과 눈물이 함께 범벅이 되어 코도 풀고 땀도 씻어가며 참고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스스로 다그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너무 힘들어서 내가 그만 포기하려는 그 순간 행구 그 친구가 그만 울면서 가방을 들고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구경하던 친구들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팽팽하던 싸움이 그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때 선생님께서는 밖으로 도망간 행구를 다시 데리고 오셔서, 다시는 싸움질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둘을 악수 시키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겨운 우리들의 교실 모습>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싸움>
세월이 흘러 나는 1970년도에 김형진이 친구랑 진주교대에 우리 적령보다 한 해 늦게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여 나는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동과 김해에서 좀 하다가 교직을 떠났다.
내가 교사가 된 후에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해 보니 역시 웃음만 나오는 일이었다. 요새 그런 선생님이 있다면 학부모들의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현실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우리 순수한 시골 아이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신 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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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께 배운 노래(채경모편)
『집에서 쪄 보낸 보리개떡을 / 일선에서 갖다 먹다가 / 괴뢰군의 총공격에 폭격을 당했네-----』
어릴 적에 얻어 듣거나, 애써서 외운 일들은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거라고 옛날 5,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황갑도 선생님께서 말씀 하신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4학년 때 쯤에 부르던 노래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노래는 어머니로부터 배워서 학교에 와서는 친구들 앞에서 불렀던 노래이다. 가사 내용이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당시의 우리들한테는 왠지 그리 낯설지 않았었다.
아마 6.25사변이 일어난 지도 10년 남짓 밖에 안 되는 그런 시기여서 더 그런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 노래를 더러 불렀었고, 나는 그 밖에도 몇 가지 노래들을 배워 와서는 친구들 앞에서 부르곤 했는데 모두 어머니께 배웠던 노래였다.
<말이 보리개떡이지 별미에 속하는 떡의 모습들이다.>
어머니의 친정 즉, 내 외가는 서포면 자혜리 문화류씨 집성촌이었는데 아마 내 어머니께서는 그런 전래동요 비슷한 것을 많이 알고 계셨던, 그래서 요즈음으로 치면 무형문화재에 가까운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요즈음 생각해도 나는 초등학교 다니던 그 시절에 체구도 작은 편이었지만 다른 친구들이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 일에 오직 어머니 덕분으로 노래도 배우고 각 노래들마다 따르게 되는 간단한 동작들을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발표도 하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삼 어머니와 외가가 그리워지곤 한다.
□ 다리도 뿌질라 보고(박금석편)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그 당시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구체적으로 다른 점들을 나열하려고 하면 끝이 없겠지만 우선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간답시고 나서서 학교에 등교하는 그림부터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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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이사 도시 학교에서는 교문에 학생이 들어서면 ‘학교 안심 알림이’라는 전자 기기가 학부모의 휴대폰에 음향으로 전달되어 학부모가 집에서도 아이의 등교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시골도 비록 마을에서부터 함께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도록 되어 있지만 ‘학교 안심 알림이’는 가동이 된다고 한다. 아마 하도 등교 도중에 유괴 사건들이 터져서 사회 문제화 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여 그걸 막자는 차원이 아닌가 생각되는 일이다.
그런데 당시의 우리 건흥 같은 시골에서는 학생들이 아침밥을 먹고 나서 학교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여유로웠던 것 같다. 농촌인 탓에 일 년 내내 아침 일찍 먹고 들에 농사일 하러 가야 하는 부모님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침 시간이 무척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방 마을인 우리 동네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공터에 모여서 진 뺏기 놀이를 실컷 하다가 학교에 늦겠다 싶은 시간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학교 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4학년 때였던가?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공터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아이들이 모여 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늘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 성기 친구랑 학년이 같다는 이유로 짝이 되어서 편을 나누어 서로 늘 적군이 되어야 했다.
성기랑 나랑은 학년만 같을 뿐이지 실은 천하장사 씨름으로 치자면 내가 금강급 쯤 된다면 성기는 말 할 필요도 없는 백두급에 속하는데 같은 레벨로 놓고 편을 가르니 내가 속하게 되는 편은 늘 불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성기 그 친구가 속하는 팀은 좋아서 환성을 지르는 상황이었다.
한참 신나게 놀이를 하다가 마칠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에 사고가 나고 말았다. 자그마한 내 체구에 황소 같은 체구를 가졌던 성기 친구가 타고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내 다리뼈가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 모습> <다쳐서 부은 다리의 모습>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했던 탓일까? 상급생들이라는 분들이 다리가 부러진 나를 업고 황급히 간 곳은 집도 병원도 아닌 학교였다. 아마 집으로 가려니 부모님들 앞에서 혼 날 걱정이 앞섰을 테고, 병원으로 가자니 사천읍까지 갈 방법이 막막하여 그랬으리라 집작은 가지만 어쨌든 그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후 상당기간 학교를 결석을 해야 했고, 집에서 갑갑한 마음으로 다리 낫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몸을 크게 다쳐보고 그걸 참고 이겨내는 경험을 비교적 일찍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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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조금쯤은 내 삶에 도움이 된 부분도 있으리란 생각을 가끔은 해 본다.
□ 강아지가 물고 간 내 운동화 (육현주 편)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자고 다음날은 바로 학교로 등교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어른들의 허락을 미리 받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생각해 보면 그저 그런 사이로 지내는 그런 친구네 집에는 처음부터 갈 생각을 하지도 않았었고, 상당히 친한 사이여야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또, 친구가 함께 와서 자고 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어느 정도는 사는 집이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초대를 받아서 갔으면 그걸 갚는다는 의미로 나도 상대 친구를 초대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일은 아마 그리 흔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4학년때 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 김향련이네 집에 놀러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학교로 바로 갔던 기억이 있다. 향련이네 집은 동천 마을 탱주나무거리에서 작은 논둑을 건너 대밭 속에 있었다.
<추억의 운동화> <예쁜 강아지 두 마리>
상당히 너른 대밭 속에 집이 두 채가 있었는데 하나는 김향련이네 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반 친구 김형진이네 집이었다.
어쨌거나 친구네 집에서 이야기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제를 포함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늦어 늦게사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서 세수하러 내려가려다 보니 내 운동화 한 짝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향련이네 강아지가 물고 대밭 안으로 들어가서 못쓰게 물어뜯어 놓은 것을 어른들이 발견하여 난색을 표했다.
그 날은 할 수 없이 내 발에 맞지도 않는 헌 신 한 컬레를 신고 불편한 가운데 학교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장날 친구 어머니께서 장에 가셔서 새 운동화 한컬레를 사 오셔서는 친구 편에 보내주셨다.
이제 55년쯤 되는 많은 세월이 흘러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일이지만 개가 신을 물어다가 뜯어 놓는 바람에 어린 마음에 크게 난감했던 그 때의 기억이 정말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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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편하지 못했던 내 초등학교 시절(채임자 편)
나는 어린 시절이 남들보다는 좀 불우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들먹이는 일조차 싫고 부담스럽다. 친척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가 아닌 친척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를 경험도 하지 않은 사람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꼭 나만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니지만 전쟁으로 부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 시절이 마음 저려 오는 그런 처지에서 학교도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어린 동생뻘 되는 친구들과 함께 다녀야 했다.
실제로 동생이랑 함께 입학을 하게 되었으니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은 학교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동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었다가 다음 해에 새로 입학을 하는 바람에 한 해 차이로 나는 14회, 동생은 15회로 졸업을 했다.
당시의 우리는 다들 비슷한 처지였겠지만 대부분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요즘 아이들처럼 학원에 가는 것이 아니고 농사일에 일꾼으로 참가해야 했다. 나는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부엌일에 직접 투입되었으니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빨래하기, 물 길어 오기, 밥하기 등 어른들이 주로 하는 일을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간혹 다른 친구들이 소 먹이러 여럿이 가서 소는 풀이나 뜯어 먹게 산에다 쳐놓고 자기들끼리 고누도 두고, 숨바꼭질을 하는 등 나보다 수월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을 보면서 서럽던 기억이 새롭다.
일단 학교에 가기만 하면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 등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즐길 수는 있었지만 하교 하면 나는 혼나는 것이 두려워서 바쁜 걸음으로 집으로 가야 했다.
<물 긷는 아가씨> <옛날 부엌 모습>
그래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어렵고 마음 편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한다면 아마 맞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즐거웠던 기억은 아무래도 찾기가 어려운 내 어린 시절이었음이 몹시 아쉬울 뿐이다.
그 당시 내가 사는 집은 한길 가에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버스나 트럭, 군용차들이 다니면서 먼지를 일으키고, 집이 주막이어서 늘상 손님들로 왁자한 속에서 시간이 난다 해도 공부에 열중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기억도 몹시 아쉽다.
꼭 기억나는 일을 꼽는다면 양철로 된 필통을 하나 사서 책 보퉁이에 넣고 허리에 차고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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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서 등하교를 하다 보면 어느 새 애 써 깎은 연필심이 부러져 있는 바람에 어린 마음에도 아까워서 울고 싶었던 때가 자주 있었던 기억이다.
어렵기만 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생각하면 쓴 웃음으로 추억하는 도리 밖에 더 있겠는가? 칠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 우리 동네 조폭 놀이(문성호 편)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요새도 쑥스러운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철이 없어도 한참 없었던 탓이기는 하지만 친구들에게 그토록 미안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우리 동네는 동천부락인데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먼 거리에 속한다. 제일 먼저 장포다리라는 곳에 다다르면 선임이, 금자, 운수가 회사 마을을 향해 가게 되어있고, 좀 더 가서 탱주나무거리라는 곳에 다다르면 순달이와 임자는 길 가 집에 들어가고, 맴달이, 병호, 형진이, 향련이가 대밭 사잇길로 내려가서 집으로 가게 되어있다.
그러고 나면 동천부락 아이들은 나와 경모, 행구, 행연이, 행숙이, 복남이가 남는데 본격적인 조폭놀이는 이때부터 시작이 된다. 나는 대장이고, 부대장은 경모, 행동대장은 행구가 맡았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참 못된 짓만 골라서 한 셈인데, 예를 들면 대장인 내가 행동대장(행구)을 보고 명령을 하면 행동대장 행구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
“행연이 유행가 한 곡 시켜!”
이러면 행연이는 유행가를 불러야 했다. 간혹 얼른 실천에 옮기지 않고 있으면 행구는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안 그러면 자기가 대장한테 당해야 하니까. 문제는 행연이는 행구 사촌 누난데 내 체벌이 두려워서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에게 미안함이 더한 것이다.
<물동이 이고 가는 여자친구> <골목대장들의 웃기는 표정들>
간혹 내린 명령 중에는 실천이 어려운 일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젤 어려운 명령이 아
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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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 이고 가는 여자 친구 가슴 만져!”
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사건으로 깜짝 놀란 나머지 옹기로 된 물동이를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나는 사건이었다. 전혀 예상도 못하고 조심스레 물을 이고 가는 여자 친구의 가슴을 갑자기 만지려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또 집에 가서는 못된 짓을 한 우리들의 비리를 고대로 어른들께 말씀 드리지는 못했을 테니 비싼 물동이를 조심하지 않고 실수 하여 깨었다고 또 얼마나 꾸지람을 들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당시의 친구들에게 사죄한다.
“친구들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 억울한 매만 맞은 이야기(박모선 편)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고 추억거리를 내라는 주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너무 오래된 일들이라서 기억 자체가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깊이 생각해 보니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있었던 얘기가 대단히 고맙게도 생각이 난다.
어느 해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날 보름밥을 얻으러 온 검정서 오신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다. 자세히 설명하면 대개 알만 한 사람인데 그건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니까 아무래도 덮어 두는 것이 옳지 싶어서다.
아다시피 당시에는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보름밥을 얻으러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 되도록 여러 집 밥을 얻어다가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름밥 얻으러 다니는 것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는 갑사동인데 검정서 제법 먼 거리인 우리동네까지 밥을 얻으러 온 것이다. 그 아주머니의 당시 옷차림을 떠올려 보건대 아마 좀 가난하여서 일부러 먼 곳까지 밥을 얻으러 오지 않았나 싶다.
<정월 대보름의 강강술래 장면> <이게 보름 밥이다.>
밥을 상당히 많이 얻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 아주머니를 우리 동네 아이들이 장난삼아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리 동기 종철이 친구의 누나가 제일 심하게 괴롭혔는데 결국은 얻어 가던 귀한 보름 밥을 쏟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밥통까지 부서지고 말았다.
화가 잔뜩 난 그 아주머니는 우리를 잡으러 쫓아왔다. 결국은 다 도망쳐버리고 나는 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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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도망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걸음이 느렸던 나만 붙잡히어 실컷 얻어맞았다.
우리가 저지른 행동으로 볼 때 맞아도 싼 일이기는 했지만 나만 얻어맞은 것은 50년이 훨씬 넘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바보같이 혼자만 잡혀서 맞고 왔다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또 한 번 실컷 얻어맞은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일들이 모두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일이니까 떠올리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 어떤 학교 선생님이(박도순 편)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시간 말고는 거의 대부분 놀이 하느라고 시간 다 보낸 것 같다. 고무줄놀이는 특히 우리들 여학생들만 하는 놀이였다. 머스매들은 고무줄 놀이를 하면 놀림감 대상이 되었을 시기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고무줄 놀이는 신체 부위의 낮은 부분부터 점점 단계적으로 높아 갔는데, 얘를 들면 발목, 정강이, 무릎, 엉덩이, 배꼽, 목, 입, 머리 등 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고무줄 놀이는 흥겨운 노래가 늘 함께 했는데 여러 가지 노래들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고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불렀던 노래가 있었다.
‘어떤 학교 선생님이 자기부모 없는 아이 손을 들어라. 삼백 많은 그 가운데 ㅇㅇㅇ하나가 손을 들었다.’
<추억의 고무줄 놀이> <비석치기, 패차기라고 했던 추억의 놀이>
왠지 그 가사가 마음에도 들었고 좋았는데 그래선지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여학생들이 주로 했던 다른 놀이로는 패차기, 숨박꼭질 등이 있었다. 패차기는 넓적한 돌을 패로 하여 정해진 규칙에 따라 던지기도 하고, 무릎 사이, 배, 가슴, 이마 등 신체부위에 패를 얹어서 조심조심 다가가서 목표물을 쓰러뜨리면 성공이고, 그러지 못하면 실패하는 그런 놀이였다.
남학생들이 하는 놀이는 딱지치기, 못 치기, 구슬치기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도둑 심보가 있었는지, 노름꾼 심보가 있었는지 남의 것 따먹기를 좋아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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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늦은 가을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힘이 많이 들고 운동이 많이 되는 술래잡기, 삼팔선, 고상놀이 등이 있었다. 대개 이런 놀이들은 그 추운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는 놀이들이었다.
간혹 심술 많은 남자 친구들이 여학생들 고무줄놀이 하는 곳에 살금살금 다가와서 칼로 재빨리 끊어버리고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그래선지 여학생들의 놀이용 고무줄은 여러 가닥이 이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못된 자석들이 연필 깎으라고 만들어 놓은 연필 칼을 갖고 남의 아끼는 고무줄이나 끊고------. 탁 쎄리 지기삤시모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었다.)
이제 우리 나이 60 중반을 넘어선 지금이지만 아마 여자 친구들은 그 고무줄놀이를 아직 잊지 않고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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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들 주소록
건흥초등학교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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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명초등학교 학구 내 마을 이름과 유래
1. 중항리(中項里)
◆본래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도(鞍島), 점복(鮎鰒), 눈티(와티)를 병합하여 중항리라 해서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됨. 와티(臥峙), 점복, 안도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었다.
◆까막고랑 : 안도 저수지 남쪽에 있는 마을.
◆노디게 : 안도 남쪽에 있는 들. 지금은 간사지가 되었음.
◆눈티, 와티 : 마을의 모습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누운티라고도 한다. 늙은 암소가 꾀를 부리면서 질매멍에를 질매섬에 벗어 던지고, 사남면의 초전 풀밭으로 가려고 하나 사천만 앞을 막고 있어 앞으로 가지는 못하고, 누운티에 누워 초전의 풀밭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전설을 음미하여 보면 아마 사남이 누운티 보다 먼저 발전한 것 같다.
◆대밭골 : 중항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대엠바구 : 염밭들 북쪽에 있는 바위.
◆뒤밭골 : 눈티 북쪽에 있는 마을.
◆띠섬 : 모도(茅島)라고도 함. 안도 서쪽에 있는 섬. 육지에서 400m 떨어진 섬인데 한 가구가 산다.
◆미너리 : 안도 서쪽에 있는 산.
◆사공등 : 점복 동쪽에 있는 등성이. 사공이 배에 타고 있는 형국이라 함.
◆삼부락재 : 노디개 북쪽에 있는 고개. ◆새싱이등 : 안도 남서족에 있는 진펄.
◆수은새미 : 매엉 바구 옆에 있는 우물.
◆안도(鞍島) : 마을은 소의 질매모양이라고 하여 안도 또는 질매섬이라고 한다. 다르게 전하여지는 이야기들로 다음의 것들이 있다. 현재 초등학교 옆 사거리 한 가운데에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새마을사업 때 필요 없다고 메워 버렸다. 그 깊은 우물은 물을 길어 먹었다는 실용성 외에 수맥을 통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엄얼등 : 중항 앞 바다에 있는 바위.
◆염밭등 : 중항 북서쪽에 있는 들. 조선시대에 염전이 있었다 함.
◆오리밧골 : 안도 서쪽에 있는 산.
◆점복 : 안도 북쪽에 있는 마을. 뒷산이 점복처럼 생겼다 함. 점복개라고도 함.
◆지비설 : 중항리 동쪽에 있는 산. 제비의 형국이라 함.
◆질매섬 : 안도. ◆큰골재 : 노디개 북쪽에 있는 고개.
◆통싯개 : 까막 고랑 남쪽에 있는 마을.
2. 환덕리(還德里)
◆본래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으로서 환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촌동을 병합하여 환덕리라 해서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음. 자연마을로는 환덕, 본촌, 고동포 3개 마을이다.
◆가리(加利) : 본촌의 본래의 지명이며 지금도 가리본촌이라 한다. 지형이 닭을 가두어 기르는 가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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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서당 : 가리에 있는 밭. 서당에 편입됨.
◆가마골 : 고동포 마을에서 북쪽으로 한 등을 넘으면 있는 골짜기. 산골 형태가 큰가마솥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
◆고개넘어재 : 벌점골 위에 있는 고개. ◆고동개 : 본촌 남쪽에 있는 마을. 고동포(古洞浦).
◆고동포(古洞浦) : 도선국사(詵國師)가 곤양에도 다녀간 것 같다. 명당자리를 잡아 음택발복(陰宅發福) 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자 소박한 소망인데 이것을 노리면서 다양한 잡술가들이 쓰잘데 없는 술수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도선국사는 그런 개인적이고 이기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 땅의 길흉을 내다보면서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우리나라 산천을 두루 섭렵하면서 비보(裨補)의 방책들을 힘써 세워두곤 하였다. 이 도선국사가 성지목에 서서 보니 우리나라의 산천을 휘둘러 흘러온 정기가 맺혀야 할 곳에 맺히지 않고 샘이궁으로 빠져 든 것을 보고 울었다고 한다. 샘이궁이란 깊은 물속에 있는 궁(宮)이란 뜻이며 이름으로 보아 아마 산천의 정기가 바다 밑에 맺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지목은 성인(도선국사)이 목 놓아 울었다는 뜻인지 성인이 성지를 알고 바라본 목(장소)이라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동포에 커다란 시가지가 형성 될 것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고무실 : 환덕 동쪽에 있는 골짜기. ◆꽃밭재 : 본촌 서쪽에 있는 고개.
◆너린빌 : 가리(본촌) 남쪽에 있는 바위. ◆다래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래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달등이산 : 환덕 동북쪽에 있는 산.
◆덕진개 : 범동골 아래쪽에 있는 둑. 이유생(李由生)이 사재를 들여쌓았음.
◆물붙이산(水潤山) : 옛날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으며 이 산 주봉(130m)에서 동으로 뻗은 능선 밑에 환덕 마을이었다. ◆방아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범등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본촌 : 본촌이라는 말을 대개 그 마을이 시작되었거나 그 지역의 지기(地氣)를 복돋워 주는 장소를 말한다고 한다. 암탉이 알을 낳는 마을의 형상이며, 닭이 매일 알을 낳은 덕으로 날로날로 이익이 더하여진다는 뜻으로 가리(加利)라고도 한다.
◆삼밭골(麻田谷) : 환덕 서쪽에 있는 말. 삼밭이 많았다 함.
◆성지목 : 다래골과 통대바우골을 성지목이라 부르고 있으며, 1950년대까지 질매섬(중항), 점복개, 고등개 사람들이 곤양시장이나 면사무소에 볼 일 있으면 이 고개를 넘나들어야 하며 이 성지목에는 단 한 가구 살았는데 1930년대 까지도 천도교 신도들의 교당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 그 집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으며 그 옆에 콘 정자나무 한 그루만이 옛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정자나무는 약 400년된 포구나무다.
◆안산 : 환덕 마을의 안산. ◆앵이 바지재 : 본촌 서쪽에서 고동개로 넘어가는 고개.
◆오봉산 : 환덕 동남쪽에 있는 산. ◆왕우바지 : 큰 고동골의 먼당언덕 바지.
◆작은 고동골 : 오봉산 남쪽 등 너머 있는 골짜기.
◆큰 고동골 : 작은 고동골에서 남으로 한등 너머 있는 골짜기.
◆통대바우 : 왕우바지에서 동남쪽으로 한등 너머 골짜기. 산의 생김새가 삼배나 무명배를 메는 골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 ◆화정재, 환덕재 : 환덕에 있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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