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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소리 시끄러워도 즐거움 넘친 3년
<사천 동성국민학교 : 86.03.01-89.02.28>
◎ 부임 첫 날 본 살벌(殺伐)
서포에서의 5년은 스스로 성장이 컸던 시기였다는 생각을 해 본다. 비록 만기가 되어 떠나기는 했지만 함께 했던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학생들 모두 기꺼운 사이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서포를 떠나 옮겨온 곳은 사천 읍에 소재한 동성국민학교, 동성국민학교는 진삼선(晋三線)의 대로변에 위치한 학교이다. 17년 가까운 교직생활을 통해서 가장 도회지 학교에 근무하게 된 셈이다. 크기로는 서포 다음의 크기였다. 진주에서는 교통이 가장 좋은 사천지역의 학교로 꼽히는 소위 경합지구 중의 경합지구였다.
당시 진주에서 출퇴근을 하던 나로서는 출퇴근도 그만큼 용이해졌고, 서부지역의 끝인 서포에서 근무할 때와 비교해서 각종 정보도 빠르게 입수할 수 있었다. 교무실 분위기 자체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동감과 함께 약간은 살벌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부임 첫 날인 3월 2일 아침 직원 조회 석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로서는 당시 이해를 하는데 상당 기간이 걸렸음을 미리 밝혀 둔다.
담임 발표가 있었다. 발표의 내용은 나에 관한 것, 그리고 동 학년에 관한 것 말고는 내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었다. 나에게는 6학년 2반 담임에 생활지도와 문예가 맡겨졌다. 담임과 사무분장의 발표는 그날도 문서로 배부되고 교감선생님께서 설명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조회는 학교장 말씀으로 끝이 나고 학년도 첫 날의 일과는 그렇게 열어져 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아니, 나로서는 전혀 예상도, 짐작도 하지 않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최○○선생님이 일어서며 상당히 격앙(激昻)된 어조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교장 선생님의 현명하신 판단으로 이루어진 조각이겠지만 불만이 많습니다. 나 자신 능력 없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과학주임을 반납하겠습니다.”
어떤 순리에 의한 정상적인 조회의 진행은 일단 아닌 듯 했다. 어쨌거나 이쯤 되면 당연히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의 해명이나 설명이 있어야 옳을 것 같은데 미처 교장선생님의 그러한 변명(?) 한마디도 나오기 전에 이어서 한○○선생님이 일어서서 연설이 시작되었다.
“존경하는 하○○(당시의 교장 선생님 존함)씨! 이제 일주일 이내에 당신의 비리를 일간지마다 공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선생님! 교감 빨리 되십시오. 그 밑에 교사로 근무하러 가겠습니다.”
그로서도 끝은 나지 않았다. 송○○선생님도 일어서서 포문을 열었다.
“어느 나라 법이라도 이렇게 맹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체육주임 나도 능력 없어서 못하겠으니 반납 합니다. 그리고, 지금 교육청으로 가겠습니다.”
두 말 할 여지도 없이 이건 내가 볼 때 살벌(殺伐) 그 자체였다.
그리고는 조회가 끝도 없이 끝났고, 반발(?) 했던 교사 3명을 제외하고는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운동장에서 전입교사와 아동간의 대면 인사가 이루어졌고, 담임 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는 학년별로 새로 반 편성 작업을 했다. 그 작업이래야 명단을 보고 자기 반 아동들을 불러서 데려가는 것이지만…….
다행히 반란자(?)들 중에는 내가 속한 6학년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다음 일이 쉽사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동들을 일찍 귀가시키고 우리는 교무실에서 생활기록부와 건강기록부를 다시 분류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때 술이 거나해진 최○○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내 책상을 발로 찼다. 그러고는 하시는 말씀이 걸작(傑作)이었다.
“일 열심히 하는 거넌 아무 소용 움따. 정치로 잘 해야제.”
그 때는 대략이나마 이유를 들은 뒤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근무시간 중에 저렇게 술이 취한 상태로 설쳐서는 약점이나 잡히지 않을까 우려될 뿐이었다. 그건 후배교사로서 보다는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일었던 걱정이었다.
반란(?)의 이유인즉 동성국민학교에는 소위 미감아 반이라는 것이 있는데 담임을 하게 되면 월정액의 수당 외에 승진에 필요한 부가점이 얼마간 부여되는 것이었다. 수당은 고사하고 점수만이라도 욕심을 내는 사람이 많은 관계로 그 경합은 상당히 치열했던 것이다.
짧은 소견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만인이 수긍할 내규라도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 규정에 의거하여 담임을 배정했다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당시는 담임을 배정하는 것은 오로지 학교장의 고유권한이다 보니 당시의 하○○ 교장선생님의 일종의 직권남용이 있었던 것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비록 고유권한이라 해도 특정인을 위한 편파적인 인사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피해로 안겨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까.
전기한 최○○ 교사는 5년 만기이고 미감아 담임을 두 번째로 바라고 있었고, 한○○ 교사도 똑 같은 입장이었으며, 송○○교사는 3년째이고 본교 만기의 입장으로 처음으로 미감아 반을 맡아보려는 희망에 불타고 있다가 실패한 울분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을 한다. 더구나 2년째인 김○○, 장○○교사가 받았으니 그들의 주장대로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과격한 표현이 일리 있는 표현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다만 ‘전에 없던 여교사(조○○)가 받았음’도 이유가 된 부분은 이해 안가는 일이었다. 여교사 중에도 승진의 꿈을 이루고자 애쓰는 선생님들이 있던 시기였고 문제의 조○○ 선생님은 일찍이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애쓰고 있었으니까.
이 일은 급기야 두 명의 담임이 이틀도 되기 전에 교체되고 일단락이 되었지만 그 후유증이 어느 정도나마 가라앉은 것은 한 달 이상이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은 오늘날도 법적으로는 담임 배정이 학교장의 고유권한이다. 그렇지만 조각의 과정이 이제는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교감이 위원장이 되는 인사위원회를 조직하여 담임과 사무 배정 작업이 끝나면 학교장은 내용을 살펴본 다음 최종 결재를 하여 확정을 짓는 것으로 되어있다.
시일이 좀 지나 주임교사 자리를 내어 놓겠다던 선배님들의 말씀이 모두 식언이 되고 만 어느 날 주석에서 막내인 내가 이런 얘기를 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선배님들이 주임 자리 내어 놓는다기에 나는 속으로 나도 한 자리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 한 사람도 안 내 놓데요.”
◎ 날개를 단 글짓기 지도
동성초등학교는 내가 그 때 까지 근무한 어느 학교보다도 도회지 학교였다. 도회지 학교와 시골학교의 여러 가지 다른 점 중에서 도회지 아동들이 환경적인 요인으로 견문이 좀 넓고, 독서량이 좀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글짓기 지도를 하는데 눈에 띄게 기초가 튼튼한 아이들이 많았다. 시골 아이들과는 달리 하고자 하는 의욕도 분명 돋보이고들 있었다. 그건 아마도 아이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은연중에 경쟁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도회지 특유의 환경 탓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게 한다.
대회마다 참가를 시키면 제법 큰상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국규모의 경우 대부분 잡지사에서 있었던 대회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4학년 어린이를 데리고 참가했던, 창녕군 영산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국군의 날 기념 호국백일장 대회였다.
관내의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 대절한 버스로 창녕까지 가는 동안에 차안에서 어떤 방향으로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는 도중의 느낌 등을 메모하도록 지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무술 시범, 군악대 시범, 부대견학 등 계획되어 있는 행사 등을 관람하는 동안에도 메모를 수시로 하도록 지도를 하였다.
일박을 하는 동안 저녁에 잠시 만나서 글을 구성할 방향을 들어보고 수정의 의견을 나누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4학년 어린이가 도 규모의 공모전이 아닌 백일장 행사에서의 대상은 정녕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돌아오니 교장, 교감선생님의 반김도 대단하셨고, 학부모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학교 홍보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했었다. 당시 보도된 지방지 기사도 스크랩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했었는데, 당시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교육활동을 전개하는 데는 도회지 근무가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교육이란 도․농을 구분 지울 수 없게 지역마다의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고, 교육의 진정한 성과는 대회에서 상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님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는 이야기이다.-
그 해 말 교육장님의 표창장을 받았다. 명목은 교육시책 구현 우수교사. 조금은 씁쓰레한 기분으로 받기는 했지만, ‘찬물도 상’이라는 말처럼 전혀 기분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음도 사실 이었다.
그렇지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놈이 번다.’는 말이 늘 나의 뇌리를 따라다니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더 자세한 설명도 필요 없는 일이겠지만 분명 글짓기는 아동이 하는 것이고 그날의 컨디션도 아동의 것에 좌우되는 일이란 신념에는 변함이 없기에. 그 상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교사가 덩달아서 받게 됨은 뭔가 찜찜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나는 지도 잘 했다고 주는 상 보다는 낙방 아동 지도의 책임을 지도교사에게 둘러씌워 은근히 기죽이는 관리자들의 횡포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절실했다.
◎ 군인가족에 관한 이야기들
○ 지가 고참이던가?
군인가족들이 많은 학교, 동성국민학교는 학구 내에 규모가 상당히 큰 공군부대가 있기에 아동들 중에는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인 아이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 아이들 수만큼이나 군인가족들에 얽힌 얘깃거리도 많은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웃학급에 군인가족 하나가 전학을 왔다. 남학생인데 아버지의 계급이 중령이었다. 영관급 장교이면 학부모들 중에서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전학을 온 첫 날 조금 으쓱거리다가 같은 반 군인가족인 어느 여학생한테 호되게 터지고 말았다.
그 여학생은 체구도 큰 편이었고, 따라서 힘도 센 편이었는데 아버지가 공군 상사였다. 싸움의 이유는 이제 전학을 온 아이답지 않게 까분다는 것이 전부였다. 쉬는 시간에 같은 반의 군인자녀들이 그 아이를 불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아빠들의 계급이 소개되다 보니 전학을 온 아이 아빠의 계급이 단연 높았다고 한다. 가해자(?)의 얘기에 의하면 그 순간부터 녀석의 태도가 확 바뀌더라는 것이었다. 해서 힘으로 응징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신고를 받은 나의 출현에 싸움은 그쳤지만 왜 싸웠는지를 묻는 내 게 그 때까지 씩씩거리며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자식이 즈그 아빠가 고참이모 고참이제 지가 고참 행사로 할라 안쿱니꺼?”
이게 2학년짜리 여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그 여학생은 요즈음 시집갈 나이도 넘긴 채 부모님께 효도하느라고 바쁘다고 그 애 어머니의 전언을 듣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2학년짜리 여학생이 다음 글 ‘선생님은 군기 못 잡아 예’의 주인공 박영각 군의 동생이라는 점이다.
○ 선생님은 군기 못 잡아 예
동성 국민학교에 부임한 첫 해에 6학년을 맡았는데 내가 맡은 6학년 2반 아이들과는 이내 친해질 수 있었다. 이유인즉, 교감선생님이 학급 순회를 하시면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시조시인이고 쓴 책도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이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만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고, 겨우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자기 반 담임이었으니 딴엔 조금은 위대하게 보였는가보다. 학급을 경영하는데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부모들도 담임을 참으로 대단한 교사로 오인(?)을 해 주었고, 덕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연 돋보이는 학급이 될 수 있었다.
당시 6학년이 되면 중학교 진학을 진주시내로 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진주시내 학교로 전학을 갔다. 특히나 군인 자녀들은 6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까지 전원이 전학을 가는 추세였었다. 실제로 옆 반에서는 많은 아동들이 전학을 갔는데 우리 학급은 자랑스럽게도 단 한 명의 군인 자녀도 전학을 가지 않았었다.
오히려 우리 반의 박영각 군은 2학기 전교 어린이회장에 출마하여 당선이 됨으로써 군인가족에 관련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박 군이 하는 말 중 참으로 웃지 못 할 한마디가 있었다. 녀석의 말인즉,
“선생님은 너무 성질이 좋아서 아이들 군기 잡을 줄을 몰라요.”
녀석의 아버지는 당시 공군 상사였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정녕 웃지 않을 수 없는 한마디 말이었다.
박영각 군은 훗날(2005년 초봄) 그가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 다 제쳐 두고 6학년 때 담임인 내게 주례를 부탁해 옴으로써 나로 하여금 멀리 대전까지 가서 주례의 데뷔를 하게 해 주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첫 애기가 태어났을 때도 내게 초대장을 보내와서 손자 돌잔치에 참석 하는 할아버지의 심정으로 즐거운 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 세 바가지 이야기
역시 첫 해의 이야기이다. 내가 담임한 6학년 2반에는 세 명의 박가 성을 가진 어린이가 있었다. 혹여 성희롱(性戱弄)이 아닌 성희롱(姓戱弄)으로 몰릴까 걱정도 되지만 양해를 바라면서 꺼낸 이야기이니 끝까지 해 볼까 한다.
박영각이란 어린이는 군인 자녀로 아버지가 공군 상사였고, 박정원이란 어린이는 부모가 중등의 부부교사였으며, 박강원이라는 어린이는 아버지가 고등학교 교련교사였었다.
세 아이는 학급 내에서 소위 공부도 잘하고, 지도력도 갖춘 모범생들이었다. 공부시간에도 제법 열띤 토론을 전개하는데 주도적인 인물들이었다. 해서 모든 어린이들에게 공정하게 대해야 할 담임이 애들 눈에 비칠 정도로 편애(?)를 했었나보다. 가끔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어도 아이들을 위축시킬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덮어두었었다.
문제는 다른 아이들이 그런 사실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로 인해 약간의 불만을 갖는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난 어느 수업시간에,
‘요 녀석들을 적당히 기를 죽여 놓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영각이, 강원이, 정원이는 자주 뭉쳐서 수업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 앞으로 세 바가지는 좀 정신을 차리도록.”
처음에는 세 바가지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던 녀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나의 보충설명을 듣고는 배를 잡고 웃고들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세 녀석은 더욱 단단한 작당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무리를 ‘세 바가지’라고 하고 다녔다.
이 세 바가지 무리 중 박정원이의 아버지 박영길 선생님은 내 중학교 대 선배님이셨는데, 2004년도 내가 곤양초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여 기관 인사를 다니다가 곤양중학교 교감선생님으로 근무하고 계셔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 보선이의 모자(帽子)
부임 첫 해 봄 소풍날이었다.
요즈음이야 소풍이란 연중행사를 열린 교육의 차원에서 현장 체험학습이니, 야외학습이니 하는 이름으로 버스를 대절하여 제법 먼 곳을 다녀오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럼으로써 아이들의 견문 넓히기와 호연지기 기르기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지만, 당시는 소풍이면 무조건 아이들이 걷기에 적당한 거리를 목적지로 정하여 걷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소풍이란 말이 생기기 전에는 똑같은 행사를 두고 원족(遠足)이라고 했을까?
아무튼 그날 아침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즐거운 소풍 길에 올랐다. 학교를 나서서 좀 걷다가 큰 길을 건널 즈음 아이들이,
“선생님, 강보가 없어졌십니더.”
하고 신고를 해 왔다. 강보는 원래 강보선이라는 어린이의 별명이었는데, 정말로 큰 일이 났다. 시작부터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소풍이고 뭐고 당장 아이들을 제 자리에 세워 길의 한쪽으로 비키게 하고는 수사(?)를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학교에 오기는 분명히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인원 파악을 할 때 결석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이들 말에 의하면 출발을 할 때까지는 분명히 함께 있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멈춰선 자리까지는 고작 1㎞ 남짓한데 그 사이에 어디로 행방불명이 되었단 말인가? 얼마 되지 않은 교직생활이기는 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라서 걱정은 정말로 대단하였다.
한 5분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에 보선이가 나타났다. 손에는 빨간 모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소풍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던 시각에 6학년의 다른 반 선생님들의 멋진 모자에 비하여 내가 쓰고 있던, 전임지 ‘서포’의 이름이 선명한 모자가 아무래도 초라하게 보였던가보다. 보선이는 그 길로 앞, 뒤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자기 집으로 뛰어갔다고 했다. 그리고는, 매장에 걸려 있던 성인용 모자 중에서 제 눈에 멋지게 보이는 것 하나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얼떨결에 모자를 받아쓰니 보선이는 내 헌 모자를 빼앗듯이 받아서 제 가방에 얌전하게 넣는 어른스런 면까지 보였다.
보선이네 집은 「신우 체육사」라고 읍내에서는 제일 큰 체육복을 비롯한 스포츠 용품 대리점을 운영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의 발로로 인한 행동이었기에 무단이탈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나무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모르지만 언제나 친구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보기 좋던 보선이는 틀림없이 그런 정으로 자녀들을 잘 키우고 있으리라 믿는다.
◎ 장학지도 이야기(2) - 000의 명을 받고
장학지도가 끝나고 나면 대개 그간 준비과정에서 애쓴 노고를 위로하는 뜻으로 장학사를 모시고 교장, 교감, 교무, 연구 등 몇이서 회식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간혹 참석자가 더 많아지는 경우도 있는데 어쨌든 장학사는 조금 일찍 모심을 당하여 자리를 뜨는 것이 또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어느 해 장학지도를 마치고 마련된 회식자리에 장학사가 가고나니 교장선생님이 격앙(激昻)된 목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건방진 놈---------.”
나는 사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다음날 교무선생님께 그 얘기를 여쭈었더니 씨익 웃으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이었다.
“새까만 후배 장학사인데 교육장의 명을 받고 왔으니 현황 설명을 기어이 교장선생님더러 하시라고 했기 때문이지.”
사실 나는 그 때 교장선생님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황 설명을 하시면 될 일을 잘난 그것을 갖고 화를 왜 낼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의아해 하는 모습을 눈치 채셨는지 교무선생님께서는,
“김 선생,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네, 세월이 좀 흐르면 김 선생도 지금의 우리 교장선생님 심정을 이해할 날이 올 걸세”
이제 그 답은 2001년 양산 천성초등학교 교감이 되어서야 터득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도 이홍식 교장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교육장의 명을 받고 장학지도를 나왔으면 ‘교육장의 입장이 되어 장학지도를 경상도 말로 단디 하고 오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교육장의 명을 받았으니 ‘네가 나가서 교직 선후배간의 위계를 무너뜨리고라도 교육장 행세를 단디 하고 오라’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교직은, 교육이라는 일은 그렇듯 정나미 떨어지게 원칙주의가 아니라 언제라도 훈훈한 인정과 여유의 속에서 더욱 바람직하게 성과가 얻어질 수 있다고 보기에 설득력이 있건 없건 적어도 나는 고집스럽게 알고 있는 일이요 생각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현직이나 전직 장학사들은 대개 아무 대답이 없다. 어떤 장학사 출신은 ‘행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행정의 길을 걸은 것은 참으로 일천한데도----.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대개 내 주장이 맞다고 맞장구를 쳐 준다.
◎ 군인가족들의 잦은 교실 방문
동성에서의 이야기를 하자면 저절로 군인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그건 학구 내에 원 스타 장군이 책임을 맡고 있는 대규모 공군부대인 비행단이 주둔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대개 부대 내에 마련된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낮 동안은 그 가족들이 가사 이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자주 군인가족 학부모들의 교실 방문이 있었다. 그들은 오면서 거의 반드시 커피를 넣은 보온병을 들고 왔다. 담임교사가 한잔을 마시고 나면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나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상례였는데 담임교사의 입장에서는 그게 좋을 때도 있었지만 싫을 때가 더 많았었다.
좋을 때란 바쁜 업무도 없고, 아동들도 모두 하교한 다음 약간은 무료한 오후를 보내야 할 때였다. 그럴 때면 학부모들의 방문이 솔직히 반갑기도 했다. 아무래도 대화는 그들 중심이 아닌 담임이 중심이 되니 더욱 그랬나보다.
싫을 때는 언젠가 하면 성적을 처리한다든가 하는 학급 업무들이 산적해 있는 시간에 갑작스레 방문을 한 경우이다. 물론 그들은 의례적인 인사로,
“선생님 바쁘신 데 우리가 온 것 아닙니까?”
하는 인사는 한다. 그러면, 나는 또 나의 입장만을 내세우지 못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닙니다. 바쁜 일은 없습니다.”
그래 놓고 별로 깊이도 없는 얘기 나누다 보면 지나가던 다른 반 동료들도 하나 둘 들르게 되고 그렇게 되는 날은 한나절을 완전히 공치고 급한 일은 밤에야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보다는 후자 즉, 수월한 날보다는 일이 많은 날이 더 많았으니 지내 놓고 생각하니 모두 내 불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쁘다고 분명하게 물리치지 못한 것이 말이다. 한 편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런 상황이 되면 성격상 매정하게 끊어서 돌려 보내버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 전언통신문 우스개
전언통신문(傳言通信文)이란 그야말로 말로 전해서 바쁜 업무를 전달하는 분명한 공문서였는데, 그야말로 전화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말로 내용을 읽어주고 받아 적어야 하며 내용 중에 대부분 있게 마련인 서식이 복잡하기라도 하면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전언통신문은 그 이름이 길어 학교마다 ‘전통’으로 줄여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혹 전통 내용을 전해 주는 상대방 학교나, 내가 전해주어야 하는 학교의 숙직자가 기능직 아저씨일 경우 문제가 참 많았다. 오늘날은 기능직을 모집하면 대졸자(大卒者)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당시는 국문을 겨우 해득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던 것이다.
몇 군데 전화로 연락이 되는 동안에 낱말들은 전혀 엉뚱한 것으로 바뀌어 앞 뒤 해석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간혹 근무 중에는 술 마시면 안 된다고 교육은 분명 받았으면서 식사 중에 한 잔 걸친 경우 보내다가 중단이 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물론 받다가 중단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업무 중에 그냥 잠이 들었다는 얘긴데 그런 난감지사는 그래도 그리 자주 겪는 일은 솔직히 아니었었다.
1980년대 초반에 8비트 컴퓨터가 학교마다 보급되고, 보조기억장치로 처음에는 녹음테이프처럼 생긴 것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오늘날은 사용조차 안한지 꽤 오래 되어 역사 속으로 묻어버린 얇은 플로피 디스켓이 나왔는데 만사가 그렇듯 처음으로 나오다 보니 용어마저도 생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웃고 만 사건이 하나 있었다.
어느 가을날 아침에 주번교사라서 좀 일찍 출근을 하여 숙직실에 들르니 기능직 M 주사가 느닷없이 오늘은 교육청에 가서 공문서와 책은 물론이고 ‘비스켓’ 다섯 박스를 받아와야 하니 두 사람이 출장을 가야할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얘긴가 하고 물으니 어젯밤에 그런 전통을 받았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져 전통부를 들추어 보니 인수 물품명은 분명 ‘비스켓’이라고 되어 있고, 수량은 다섯 박스로 되어 있었다. 내용 전체를 다시 읽어도 알 길이 없어 맨 처음 전통을 보낸 문선초등학교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두 번째 학교부터 모두 컴퓨터 보조기억장치로 새로 나온 ‘디스켓’을 ‘비스켓’으로 적었고, 그 부피도 실은 크지 않은 것이라서 가방 안에 다른 공문서와 함께 넣어도 충분하다는 설명을 듣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전통부 자체도 없어졌다. 이건 모사전송(FAX)이 일반화되면서 전혀 무용지물이 되고만 것이다. 사실 더 옛날 오지학교에 전화도 없던 시절에 급한 전통이 있으면 앞 학교에서 베껴 써서는(복사기도 없기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서 직접 가져다주도록 제도화 되어 있었다.
컴퓨터 보조기억장치는 녹음테이프에서 플로피 디스켓으로, 점점 발전이 되다가 디스켓은 용량도 커지고 가격도 저렴하게 변하여 지금은 USB가 실용화 되어 있고 간혹 가정에서 작성한 문서들을 실어 나르기도 했는데 그것마저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가정에서 작성한 문서는 이제 자기 메일로 전송하여두고 사무실에 출근하여 불러내어 쓰면 디스켓이나 USB를 휴대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86.03.01/하영청(교장선생님), 김은수(교감선생님), 장갑규, 하도섭, 김강렬, 이영건, 이정모, 정평만, 최진기, 김대홍, 송영태, 최권경, 한일선, 문채순, 최복자, 김도수, 조창숙, 진재분, 강수점, 임정숙(큰), 임정숙(작은), 전명옥, 임현자(양호), 명영만(기능직), 김한근(기능직), 강선옥(기능직) 1987.03.01/이현철, 박영생, 김종원, 신경숙, 하미숙, 최미경(과학보조) 1987.09.01/최병권(교장선생님) 1988.03.01/김기현, 손용원, 김용길, 화성인, 이연순, 김옥선, 이영형, 배말자(서무), 김계석(기능)
옥녀봉 아래 엔젤호 닿던 곳
<통영 사량국민학교 : 89.03.01-92.02.29>
◎ 사량도라는 섬
삼천포 항과 충무 항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은 사량도(蛇梁島)는 그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뱀과 관련이 있는 섬으로, 실제로 면 소재지인 금평 마을에서는 내가 근무하던 시기에 해마다 2,3명이 독사에 물려 죽거나 급히 응급치료를 받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지는 사례를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뱀이 많이 서식을 한다는 얘기이다. 여러 종류의 뱀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독사가 많다고 했다.
무슨 연유로 뱀이 많을까? 체계적인 연구는 한 적이 없지만, 섬에서 살아보니 뱀의 먹이가 몹시 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교 근처에 논이 조금 있었는데 봄이면 정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밤새도록 개구리가 울어댔다. 그리고, 산골짜기를 따라 상당히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면 몸의 앞쪽은 벌겋고, 등 쪽은 녹색인 개구리가 수도 없이 서식하고 있었다.
또,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가 마치 형제처럼 정답게 마주보고 있고, 흡사 뱀을 연상케 하는 형상으로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태풍에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섬이었다.
교통편은 삼천포 쪽으로 도선 규모의 정기 여객선 일신1호와 일신2호가 하루 두 차례 운항을 하고, 충무 쪽으로는 고려호라는 여객선이 역시 하루 두 차례 운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쾌속정 엔젤호가 하절기에는 네 차례, 동절기에는 세 차례 삼천포 - 사량도 - 충무간을 운항하고 있었다. 삼천포에서 사량도까지 일신호는 두 시간, 엔젤호는 25분이 걸렸다.
1989년 당시 사량도 내에는 상도 진촌 마을에 사량중학교와 사량국민학교가 있었고, 돈지 마을에는 돈지국민학교가, 내지 마을에는 내지국민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하도에는 읍덕 마을에 읍덕국민학교가, 양지마을에 양지국민학교가 있었고, 따로 떨어져 있는 수우도에는 수우도 분교(돈지국민학교 분교)가 있었다.
지금의 사량도는 어떤가? 고성군 하이면과 통영시 사량면 소재지 진촌 마을을 오가는 대형 객선이 차량과 사람을 한꺼번에 실어 나르고 있다. 통영시 도산면과도 차량과 사람을 한꺼번에 실어 나르는 객선이 다니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상하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도 거진 구체화 되고 있고, 섬 내에도 일주도로가 깔끔하게 개통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초등학교는 사량초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분교장으로 격하된 상태이고, 중학교도 교감 배치가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의 학교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 벽지 근무를 시작하다.
1989년 3월 1일자로 통영 사량 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이 것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일대 사건이 되기도 했다. 먼저, 창원 이창에서 그리던 고향 행을 했을 때와는 정 반대의 입장이 되는 셈이었고, 결혼 후 가정을 떠나서 혼자 생활을 하는 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국민가수 이미자씨의 구성진 가락이 생각나는 섬 마을 선생님이 된 것이다. 비록 순정을 바칠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큰 일이 날, 총각도 아닌 40대 아저씨 선생님이었지만 섬 마을이라는 정서는, 설레는 마음은 연령을 초월하는 것임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었다.
사량도는 정확히 22년 전(1967년)에 가 본 곳이었다. 그 땐 형님이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곳이었기에 가 볼 기회가 있었었다. 부임길에 들어선 교문은 그 당시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교실 건물들도 전혀 아니었다. 모두 새로 고쳤거나 옮겼고, 새로 지은 것이었다.
아무튼 도서벽지 진흥법에 의한 벽지점수의 비중이 커지기 바로 전 해에 훗날 생각해 보면 매우 영광스럽게도 어렵디 어려운 도서벽지학교로의 전입이 가능하게된 것이다.
벽지학교 근무를 희망하게 된 이유는 당시의 내게 오직 하나 하루 빨리 진주시로의 입성만이 목적이었다. 벽지점수를 확보하여 장차 승진을 꿈꾸는 그런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테고, 어쨌거나 그런 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벽지학교로의 전출을 희망했고 뜻대로 성취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게는 신이나 다름없는 주위사람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던 것을 확신한다.
◎ 기적에 의한 전입
1989년 2월 26일, 당시 충무시 교육청에 들러 전입신고를 하고 류재식 학무과장님으로부터 사령장을 받았다. 류 과장님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터라 사전에 사량 국민학교 발령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드렸었다. 그러나, 그 때 류 과장님은 분명하게 잘라서 말씀을 하셨었다.
“아무리 김선생이 부탁을 해도 한자리밖에 없는 사량에 관내에서 누가 희망을 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100% 지당하신 말씀이라서 더 이상의 말씀은 나도 드리지 않았었다. 거기서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린다면 그건 순전히 억지에 불과한 이야기가 됨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과장님 말씀대로 사량은 그 해에 한자리밖에 비는 자리가 없었고, 경합지 임에 틀림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관내의 다른 벽지학교에 비해 여건이 무척 좋았다. 여건이래야 고작 교통사정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되는데, 육지와 떨어진 거리가 가깝고, 쾌속선 엔젤호가 취항한다는 점이 호조건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타군에서 단번에 사량 국민학교로 전입이 가능했다. 그 이유를 알고 나니 아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1. 벽지 선호도가 가장 낮은 해였다. - 도서벽지 진흥법에 의한 벽지 점수의 대폭 상향이 있기 전 해이다.
2. 아무도 사량에 희망을 하지 않았다. - 정보가 이상하게 전달이 되어 사량에는 비는 자리가 없다고 헛소문이 나버렸었다.
3. 류 과장님의 배려의 힘이었다. - 다른 학교에서 나를 데려가려는 공작을 했었지만 (공작자는 동성에서 동 학년을 했던 이영건 선생님이었다.) 류 과장님은 나의 부탁 말씀을 의견이라 여기시고 끝까지 허락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위의 2,3번 함목을 자세히 확인하는 순간 아찔함을 느꼈었다.
◎ 학급 전체 아동에게 동 시조 창작지도 시작
시조 쓰기의 지도는 교직을 시작했던 1972년부터 실시해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클럽활동이거나, 대회 출전을 앞두고 우수아동을 선발하여 실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도 방법상으로도 평시조의 형식을 바로 적용하는 지도로 정말 우수아동이 아니면 짧은 기간 동안에 형식 맞추는데 급급한 나머지 싯적인 언어의 구사는 바랄 수도 없었다.
혹 우수아동이라고 해도 지도 기간이 길지 않으니 정녕 ‘아니 감만 못한’ 시작으로 아쉬움만 남기곤 했었다. 그런 식의 문예 지도를 계속하면서 늘 생각해온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조의 창작지도를 일부 우수아동 대상이 아닌 학급의 모든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지도를 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합한 지도의 프로그램이 있어야 함을 알기에 몇 년에 걸쳐서 그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었고 마침 사량에 전입해서 6학년을 맡았을 때에는 그게 거진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때마침 맡은 학년이 6학년이니 실험적 정신으로 시도 해 보고 싶었다.
절장시조와 양장시조, 그리고 평시조의 길이에 의한 차이로 적절히 단계를 구성하고 모두 35시간 분량의 지도계획을 마련, 주당 2시간가량의 특설시간을 확보하여 지도에 들어갔다.
첫 시간의 지도를 하면서 아동들의 반응을 정말로 면밀히 살폈다. 나름대로 성공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좋아하고들 있었던 것이다. 이후 신통하게도 짜증을 내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시조공부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를 보였다.
절장시조 공부가 끝나고 나서는 다섯 편씩의 습작품들을 골라서 문집을 만들어 나눠 가졌다. 일종의 성취감을 갖게 해 주기 위한 작은 배려로 애당초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스스로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였다.
양장시조도, 평시조도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2학기 중간쯤에 완전히 섭렵 할 수 있었다. 47명의 아동 중 끝까지 따라 오지 못하는 아동은 없었다. 내가 계획한 지도 프로그램에 의한 시조 쓰기 공부는 한글만 알면 다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상당기간의 준비를 거쳐서 완성한 시조 쓰기 지도 프로그램은 점차 보완해 가면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날 이때껏 내가 담임을 맡았을 때는 물론, 교감이 되어서도, 교장이 되어서도 지도는 계속해 오고 있다.
분만 아니라 이 내용들이 수정 보완되어 논문으로 제출한 ‘단계적 형식접근방식에 의한 동시조 창작지도’가 입상함으로써 연구점수 보태는데도 기여했고 지금까지 지도에 활용되고 있음은 결코 일회성 연구물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좋다.
◎ 참으로 보람 있었던 6학년
사량에서의 체류기간은 3년, 그 중에서도 내게는 두 번째 해에 맡았던 6학년이 교직 생애에 있어서 가장 보람 있었고 뜻 깊은 해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때까지 해마다 학생들을 담임했지만 여러 모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해였다.
47명,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또한 마음을 맞추면 인원이 많은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한 해 이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참으로 복이 많은 아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1학년과 2학년에 걸쳐 그리기와 경필 지도에 탁월한 소질을 지닌 김경숙 선생님이 아이들의 기초를 매우 튼튼하게 하는 한 편 회화(繪畵) 실력을 크게 튼튼하게 해 놓았고, 3학년 때에는 어느 선생님이 발표력 신장에 개인 연구를 적용시키는 바람에 정말 섬 아이들답지 않은 조리 있고 또렷한 발표력을 지닐 수 있었다.
이어서 4,5학년 때에는 강삼수 선생님이 자신의 특기인 서예지도와 리코더 연주 지도를 함으로써 어린이들의 실력이 참으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서예는 기본적인 점획 쓰기가 익숙해져 상당한 경지의 아동이 있었음은 물론 평균적으로 수준이 높아 있었고, 리코더 연주는 삼중주가 가능하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6학년 때에는 내가 담임을 함으로써 1명을 제외한 모든 어린이들이 우리민족의 순수 문학인 시조를 감상함은 물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복 많은 아이들이란 표현에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훗날 그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그 결과를 관심 깊게 체크했는데, 섬 지역 특유의 사정으로 많은 학생들이 진학을 하지는 못했지만 서울대 법대 1명, 이화여대 1명이 진학함으로써 섬의 경사로 치부되었고, 멀리서나마 그들의 전도를 축복할 수 있었다.
그 법대 진학한 김상민군은 사법고시 합격의 영광을 안았고, 이화여대로 진학한 장은경이는 특수교육을 전공하여 서울에서 특수아동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있다.
◎ 뱀에 대한 견해 차이
사량 체류 마지막 3학년을 담임했던 해였던가? 어느 이른 봄날 아침 약수터에 다녀오는 길에 큰 뱀을 만났다. 머리끝이 서는 간담 서늘한 체험에 바짝 긴장을 하고 뱀을 쫓아 길 밖으로 내 몰 궁리를 했다. 막대기를 주워서 겨우 쫓아버리는데 성공했다. 녀석도 때 이른 나들이라 낮은 기온 때문에 기력이 없었던지 움직임이 매우 느렸다.
학교에 돌아와서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해 주었다. 딴엔 실감나게 얘기한다고 했는데 당연히 소름끼쳐하며 놀라야 할 아이들이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신기한 듯 듣고 있던 녀석들이 되려 내게 질문을 해 대었다.
크기는 어느 정도였는지? 색깔은 어떠했는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더니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깜짝 놀랄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얘기인즉,
“에이, 선생님, 그거로 와 안 잡고 아깝고로 살리 보냈십니꺼?”
× × ×
같은 해 봄날, 학교에서는 자연보호 활동을 한다고 학년별로 구역을 나누어 겨울동안 더럽혀진 학교 주변을 청소하게 되었다. 학년을 고려하여 우리 3학년에게 맡겨진 구역은 학교 울타리 청소였다. 울타리에는 비닐 조각을 비롯한 종이조각 등 수많은 오물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수거 작업을 벌였고 수거된 오물들은 현장에서 소각을 하였다.
반쯤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맨 앞에서 작업을 하던 내 앞으로 뱀 한 마리가 스르륵 소리를 내며 기어가더니 돌담 틈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어른답지 않은 소란에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하더니 설명을 듣고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맑은 눈들을 빛내며 호기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간담으로는 도저히 남은 작업을 계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상황을 교장선생님께 설명 드리고 작업을 중단하였다. 아이들을 귀가시키고 그 때까지도 마음이 덜 안정된 기분으로 현관에 나서서 보니 문제의 그 현장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재를 두려워하는 기분으로 현장에 가보니 정말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학년 꼬맹이 몇 명이 아까 자취를 감춘 뱀을 잡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돌담 틈으로 책을 꺼내어 부채로 삼아 연기를 부쳐 넣고 있지 않는가?
호통을 쳐서 보내고 교무실에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기능직 차광주 씨의 말이 걸작이다.
“선생님이 몰라서 글체 가아덜 뱀 올매던지 잡십니더. 그리고, 한 마리 갖고 가모 천 오백원씩에 사넌 사람이 있거덩요.”
-이건 뱀에 대한 나와 아이들의 견해 차이를 심각하게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뱀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함이 없다. 쉽사리 뱀을 잡는다거나 친근감을 느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뱀의 목 부분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꽉 잡으면 꼼짝을 못하는 것이 뱀의 생태라는 설명은 들었어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뱀을 잡아볼 용기는 갖지 못했었다.
◎ 약수터에서 맞는 아침
사량 국민학교와 면사무소 등 사량면의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 금평리 뒷산을 넘어 작은 오솔길을 따라 30분가량을 가면 약수터가 하나 있다. 작게 형성된 골짜기의 아래쪽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한 이 약수터는 자그마한 물줄기가 흘러 내려 새벽녘 날이 채 밝기 전에 다다르면 참으로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과 함께 객지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완전히 잊게 만든다.
한 모금 약수를 마시고 머리를 감고 나면 바로 앞에 찰싹이는 파도와 함께 그만 신선이라도 된 듯한 무아경에 빠지게 된다. 가끔씩 방목중인 흑염소의 울음소리와 고기잡이 가는 어선들의 기관 음이 들릴 뿐 참으로 한적한 약수터의 아침은 기껍기만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기밥솥에 밥을 앉혀 스위치를 눌러 두고 약수터에 다녀오면 밥은 먹기 좋게 되어 있었다. 세수하고, 머리 감고 정신을 맑게 수습했기에 참으로 기꺼운 아침을 맞을 수 있었으니, 아침 약수터 가는 일은 매일 계속했다. 비가 오는 날이거나, 전날 못 먹는 술을 과하게 마셔 늦잠을 자지 않는 한 그 일은 결코 거르지 않았다.
다만, 겨울에는 날이 채 새기도 전에 갔었고, 여름에는 날이 완전히 밝은 다음에 갔다. 그 이유는 겨울을 제외하면 가는 길에 수시로 뱀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어두울 때는 피하는 도리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약수터에 다니면서 한 편의 시조를 쓸 수 있었으니 그 또한 내게는 정녕 큰 수확이었다.
새벽 약수터
일상을 열어 내는
시작의 시간에
마지막 어둠이
안개 속에 스러지면
여명은
동을 터놓고
새 역사를 기다리고
산 길 가득 이슬 헤쳐
돌아든 골짜기에
끝없는 물줄기가
세상을 씻어 가고
받아 든
한 모금 약수
폐부 속을 씻는다
◎ 옥녀봉 전설에 대한 소견
사량도라는 섬을 대표할만한 몇 가지가 있으니 그 중 제일로 꼽을 것이 옥녀봉일 것이다.사량도 옥녀봉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의 내용을 뼈대만 추려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통영 사량도 어느 마을 외딴 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옥녀가 있었다.
혼기가 되었지만 마을에 총각이 없어 시집을 못가는 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아버지가 어느 날 욕정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딸을 범하려 했다.
옥녀는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와서 옥녀봉 꼭대기로 올라갔다. 인간이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 ‘기어이 생각이 변하지 않으시거든 소의 탈이라도 쓰고 오라’는 말씀을 드리고------.
그러나 옥녀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린 아버지가 끝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그만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옥녀가 떨어져 죽은 곳은 아직 핏자국이 선명하며 비 내리는 날은 바위에서 빨간 핏물이 흘러내린다고 한다.>
이처럼 전설의 내용이 지극히 슬프고 추악한 면만을 담고 있다. 대개 전설이란 슬픔으로 끝나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담아 권선징악의 멧세지로 전해지는 법인데 사량도 옥녀봉의 전설은 그렇지를 못하다. 아마도 무슨 깊은 뜻이 숨었음직한데------.
나도 직접 확인한 일이지만 옥녀가 피를 흘렸다는 지점에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불그스름한 잔디가 자라고 있어 주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구식결혼식에서는 대례를 치르지 않고 가마는 옥녀봉의 밑을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민들은 조금은 신성시하여 지켜오고 있었다. 해서 딴에는 그 전설을 깊이 생각하며 뭔가 깊은 의미가 숨었을 터이니 내가 찾아보리라 궁리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그렇지만 옥녀 아비가 제 맨 정신으로 그랬을까? 아마도 만취상태나 환각으로 정신을 놓았을 지경에 어미를 쏙 빼 닮은 옥녀를 죽은 부인으로 착각을 했었을 거다.’
그래서 그 내용을 시조 형식을 빌어 작품으로 쓰기에 이르렀다. 그 작품을 소개하면,
玉女峰
슬프디 슬픈 寃魂
안개 속을 서성이고
흩어 늘인 散髮이
幻像으로 오가는데
이제는 설은 事緣만
傳說 되어 傳한다
아내 잃은 아비의
깊디깊던 사랑이
어미 닮은 玉女향해
幻覺으로 덧씌워져
방석 쓴 소의 모습에
문득 부른 不幸이여
하늘 땅 水平線이
어우린 原色으로
鮮明한 輪廓들이
빚어내는 絶景인데
서럽던 玉女의 넋은
冤魂으로 떠도는가
또렷했을 핏자국이
歲月에 씻기우고
생각의 굴레들이
닳고 닳아 벗어지면
來日은 崇高한 사랑
昇華되어 傳해질까
그런데 1967년 초임지가 사량국민학교였던 내 형님이 1995년에 낸 수필집 『자연산 이야기』116-118쪽에 실린 「옥녀봉」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중간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어 소개한다. 아마 내 형님도 옥녀봉의 전설에 대해 그 숨은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셨던 모양이다.
<------삶의 근거지를 바꾸지 않는 그들이기에 인척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웬만한 사람들끼리는 사돈의 팔촌이라도 연줄이 닿는 곳으로, 근친상간의 위험성은 상존하고 있었기에 종교와 같은 계시적인 내용인 옥녀의 전설로, 생각을 바르게 갖는 방법을 썼으리라.------>
◎ 참 희한한 손님 모시기
인간사는 대부분 세월과 함께 변하게 되어 있다. 삼라만상이 변하는데 초등학교의 운동회 종목이라고 변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운동회 종목 중에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으니, 소위 지구 공굴리기, 사다리 빠져나가기, 손님 모시기 등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나이 드신 분들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등 참으로 좋은 면이 있었다.
여기서는 손님 모시기에 관한 참으로 기발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사량 국민학교 근무 당시 기능직 아저씨 중에 C씨는 어쩌면 기인(?)에 가깝다 할만큼 엉뚱하다거나 기발한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1990년의 가을 운동회 연습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술자리에서 우연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 선생님, 내너요 운동회 때 손님 모시기 경주마 하모 절대로 일등을 뺏기지 않십니더.”
“아니 우째서 그런거로 그리 장담을 할 수 있단 말이요?”
“두고 보모 압니더, 안중언 아무도 내 비법을 모리낍니더.”
하도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운동회 당일 유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손님 모시기 경주는 그 성질상 연습 때는 제대로 해 볼 수가 없는 거니까 운동회 당일에야 지켜볼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운동회 당일 손님 모시기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에 꼭 지켜볼 작정을 단단히 한 나는 배탈을 핑계로 손님(?)에서 제외토록 하고 카드를 엎어놓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유심히 지켰다. 문제의 C주사는 카드를 엎어놓느라고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데, 각 조마다 카드를 엎으면서 어떤 손님들인지를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자신(C주사)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엎을 차례가 되었는가? 트랙 라인의 안쪽에 엎어놓더니 아이들이 달려오는 쪽으로 10m 가량을 바삐 갔다. 그러더니 맨 앞에 오는 아이에게 조그마한 소리로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었다.
“길동아, 젤 안쭉애 있넌 거로 주우 갖고 내 손얼 잡아라이.”
그래 놓고는 한 술 더 떠서 외려 자기가 그 카드 집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는 것이다.
정녕 기막힌 착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오는 아이가 손님이 누구인지 알고 일사불란하게 빠르게 달리는데 그 뒤를 따라 오던, 상대적으로 느린 다른 아이들이 카드보고 손님 부르고 하는 사이에 거진 결승선에 다 가 있는 C주사를 보고는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의 비법에 탄복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쯤 되면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손님 모시기」가 아니라 「손님이 아이 찾기」쯤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옳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내가 남해 남명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2007년도에 진주교대 총동창회지에 실어 몇 몇 동문님들의 전화를 받고 함께 웃었던 내용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C주사도 퇴직을 했으니 아마도 그 비법은 활용할 기회가 없어졌을 테지만 그게 지금까지도 기발해 보이는 착상이고 무릎 쳐질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우한 아동이거나 운동회 달리기 상에 목말라 하는 아이가 있다면 정책적으로 한 번 활용해 볼 가치가 있는 방법일거란 생각도 해 본다.
◎ 백일장에 다녀와서
시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이듬해 가을철에는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애당초 시작은 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었다. 정말 전 학급 아동들이 모두 시조 쓰기를 할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아이들의 육지 나들이를 주선하고자 하는 의도로 두 명의 참가 신청을 했다.
진주 교육대학교 신문사가 주최하는 경남 아동 백일장에 참가를 했다. 1991년 10월 24일 두 명의 어린이를 데리고 객선에 올라, 삼천포까지 가는 동안 아이들에게 백일장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목을 받으면 깊이 생각을 해 보고 썼다고 끝낼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고쳐도 보고 다시 써 보는 것이 백일장 참가 요령임을 일러 준 것이다.
사실 처음 참가하는 일이라 지도교사인 나도 그네들의 실력을 타 지역 어린이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가늠하기 어려웠고, 아이들 역시 대처에서의 백일장 참가는 처음 하는 일이라서 걱정들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섬 아이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파악한 뒤의 일이라 그들이 어떤 일에 걱정을 하는지 모를 리는 없었고 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조언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어진 제목은 정말 엉뚱하게도 『걸레』였다.
저학년부에 참가한 장민경(4학년), 고학년부에 참가한 박서영(5학년) 두 어린이는 시제가 발표되고 2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에 구내매점에 있는 내게 왔다.
“왜 쓰지 않고 왔느냐?”
는 나의 걱정 어린 물음에 둘 다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했다. 그것도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다 써서 내고 왔어 예.”
깊이 생각해라. 여러 번에 걸쳐 고쳐 보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보나마나 학교에서 연습하던 그런 기분으로 단번에 써서 내어놓고 왔으리란 생각을 했다. 백일장 장소에 갔다. 교대학생들이 앉아 있기에 작품이 좀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시조부에 두 학생만 제출했다고 한다.
그 아이들 지도교사인데 작품 한 번 볼 수 없느냐고 했더니, 선뜻 보여 주는데 대충 보니 틀린 글자는 없었고, 제법 잘 쓴 작품으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작품을 도로 내고 일어서려니까 교대생들이 자기들은 시조를 잘 모르지만 잘 쓴 것 같은데 사량 국민학교가 어디쯤 있는지를 물어왔다. 대충 대답을 해 주고 학교를 벗어나서 시내 관광과 점심식사를 시켜 주었다.
아이들은 삼천포로 해서 보내고, 진주교육대학교에 다시 와서 발표를 보았다.
결과는 장민경 차상, 박서영 차하였다. 섬 어린들 치고, 첫 출전 치고 상당히 잘한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나의 지도 프로그램이 나쁘거나 쓸 모 없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학교도, 마을도 잠시 난리가 났을 정도였음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밝혀 둔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89.03.01/이태석(교장선생님), 강종환(교감선생님), 김태호, 강삼수, 이정화, 우형우, 김경숙, 이영옥(유치원 선생님), 박수석(진흥회장), 김정도(기능), 차광주(기능), 차근호(기능) ,박금자(어머니회장) 1990.03.01/정규호(교감선생님), 김남용, 정진권, 배차련(유치원), 이규열(진흥회장) 1991.03.01/윤병오(교감선생님), 이영건, 류춘선, 한영구, 김회영(유치원), 조성립(어머니회장) 1991.09.01/김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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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들 했던가요.
사람들의 추억은 혹독한 시련도 시간이 가면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고들 하였듯이
나이 들어 많이 웃는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에 많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배님이 정년으로 교직생활을 떠나시면서 글로서 옮겨놓으신 그때의 추억들을 마음 한 켠에서 꺼내 보실 때면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지 않을까 싶어
선배님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