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해설 성서의 현재와 미래적 과제
민영진*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경우는 본래 자음으로만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두점도 장․절의 구분도 없었다. 그리스어 신약성서 사본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띄어쓰기도 구두점도 억양 부호도 없었다. 다만 본문 내용을 훤히 알고 있거나 암기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보조장치(mnemotechnical) 정도의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사본들은 고대로 올라 갈수록, 전문가 혹은 이미 내용을 암기하고 있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것, 내용을 모르면 읽기가 무척 힘든 것, 모호한 곳들(ambiguities)이 많은 것, “달리 읽거나 달리 이해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다.
성서가 기록으로 옮겨지고 얼마 안 있어, 독자의 독서를 돕는 장치가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구약성서의 경우, 기원 후 5-7세기 경에, 마소라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본문의 안과 바깥에 여러 가지 장치를 고안하여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 본문 안에 붙인 것은 자음 본문에다가 그것의 발음을 알리는 모음 기호를 붙인 것, 그리고 어조나 운율을 알리는 억양부호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본문 바깥 난외에는 소(小)마소라와 대(大)마소라와 권말(卷末) 마소라를 붙인 것이다. 어떤 특수 낱말의 빈도수와 그 출처를 밝히는 소마소라와 대마소라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주와 성구어구사전, 그리고 해설 성서1)의 효시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주석성서”라는 말도 가끔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주석성서”의 한 표본으로서는 유대교의 ꡔ미크라오트 그돌로트ꡕ2)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마소라 본문과 아람어역 타르굼이 대조되어 있고, 라쉬, 이븐 에즈라, 라쉬밤 등, 유대교 랍비들의 정평 있는 주석들이 함께 본문 밑에 제시되어 있다.
루터가 히브리어 구약과 그리스어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성서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사람들에게 그들이 쓰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계기를 만들었다. 성서가 여러 나랏말로 번역됨으로써 언어를 달리하는 세계의 여러 어족의 사람들에게 그만큼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언어로 성서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므로 그들의 성서 읽기를 크게 도운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개신교 일부에서는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고 하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적 입장이 확대 해석되어, 성서에는 본문 이외에 어느 것을 첨가하는 것을 삼가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성서 자체가 성서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서라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가톨릭 쪽에서는 일찍부터 “해설을 단 성서 (annotated edition of the Bible)”가 발전되었다. 성서 본문에는, 본문 이외에 아무 것도 첨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철저히 지키게 되면,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본문 형성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장 절 구분 표시는 물론이려니와 모음 기호마저도 없애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성서는, 구약은 물론이려니와 신약도, 그 출생이 먼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고대의 문헌이다. 이제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본다면, 성서야말로 “낡은 (out of date)” 책일 수밖에 없다. 이미,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대화(행 8:26-40)에서 우리는 이런 현상을 확인한다. 내시는 이사야서 58:7-8절을 읽고 있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을 당했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빌립이 다가가서 묻는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그러니까 내시가 대답한다.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빌립이 묻는다. “예언자가 여기에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그러면서, 빌립은 이 구약 본문에서 출발하여 예수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아마도 해설 성서의 한 표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독자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독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해설 성서의 중요한 기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열거하는 해설 성서는 대한성서공회의 성서학문헌정보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해설 성서가 다 열거되지는 않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거의 망라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목록에 열거된 해설 성서는 주로 ꡔ성경전서 개역 한글판ꡕ(대한성서공회, 1961)을 기본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고, 국제가톨릭성서공회에서 나온 것은 ꡔ공동번역 성서ꡕ(대한성서공회, 1977)를, 그리고 서강대학신학연구소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나온 것은 새로 번역된 본문에 해설을 단 것이다. 가톨릭 쪽에서 낱권으로 나온 것과 개신교 쪽에서 신약이나 구약 혹은 성경전서로 나온 것을, 출판 연도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5
장시화 편, ꡔ백과 신약전서ꡕ (서울: 세계복음화운동본부출판부, 1965)3). 관주, 약주, 부표, 대의, 장명, 삽화, 연대, 서언이 제시되어 있고, 부록에는 총론, 사전, 지리, 성구, 목록, 지도, 화보, 도표 등이 제시되어 있다.
1977
서인석 역주, ꡔ호세아 미카ꡕ (서울: 서강대학교신학연구소, 1977)4). 역자의 사역을 제시하고, 예언서 각 권의 서론에서 그 책의 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고, 각주에서는 번역상의 문제, 본문비평과 관련된 문제, 본문의 편집과 관련된 문제, 해당 본문과 관련된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 등을 밝힌다.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수용하는 점에 있어서 개신교 계통에서 나온 해설 성서와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런 현상은 비단 200주년 성서 총서뿐 아니라, 가톨릭 계통에서 나온 해설 성서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서인석 역주, ꡔ스파니아 나훔 하바꾹 오바디아 요나ꡕ (서울: 서강대학교신학연구소, 1977)5)
1979
서인석 역주, ꡔ요엘 아모스 하깨 말라기ꡕ (서울: 서강대학교신학연구소, 1979)6)
1981
장엘마로 역주, ꡔ사목서간: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ꡕ (서울: 서강대학교신학연구소, 1981)
정양모 역주, ꡔ마르코 복음서ꡕ (왜관: 분도출판사, 1981)7). 해제에서 저자는 마르코 복음서의 필자, 독자, 집필 장소와 연대 및 범위, 전승과 양식, 편집 사상, 의의와 현실성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문 해설은 단순히 독자의 독서행위를 돕는 스터디 노트 정도가 아니고 완전한 주석이다. 주석 성서의 경지를 보여주는 표본을 제시하고 있다.
진토마스 역주, ꡔ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ꡕ (왜관: 분도출판사, 1981)8). 주석으로서의 성격은 정양모 교수의 ꡔ마르코 복음서ꡕ (1981), 그의 ꡔ루가복음서ꡕ(1983) 등과 같다.
장엘마로 역주, ꡔ디모테오 전후서, 디도서ꡕ (왜관: 분도출판사, 1981)9).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총서 중에 하나인 이것 역시 그 성격이 위에서 언급한 다른 총서의 경우와 같다.
1982
장시화 편, ꡔ백과 구약전서ꡕ (서울: 세계복음화운동본부출판부, 1982). 1965년에 나온 ꡔ백과신약전서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관주, 약주, 부표, 대의, 장명, 삽화, 연대, 서언 등을 제시하고, 부록에서는 총론, 사전, 지리, 성구, 목록, 지도, 화보, 도표 등을 제시하고 있다.
신성종 편, ꡔ엠마오 주석 구약성경ꡕ (서울: 정음출판사, 1982)
1983
정양모 역주, ꡔ루가복음서ꡕ (분도출판사, 1983)10). 이것은 단순한 해설 성서라기보다는 주석에 가까운 책이다. 서론 격인 “루가복음서 해제”는 필자, 독자, 집필장소와 연대 및 동기, 사료, 편집 사상 등을 상세하게 다룬다. 이미 위에서, 그의 ꡔ마르코복음서ꡕ(1981) 소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석 성서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신성종 편, ꡔ엠마오 주석성경ꡕ (서울: 정음출판사, 1983). 성경전서 66권 각권 서론과 개요, 및 주요 낱말에 대한 해설을 제시하고 있다.
1984
진토마스, 장엘마로 역주, ꡔ야고보의 편지, 베드로의 첫째 둘째 편지 유다의 편지ꡕ (왜관: 분도출판사, 1984)11)
1985
뉴톰슨관주주석성경편찬위원회 편, ꡔ뉴톰슨 관주 주석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5)12). 머리말에서 이것이 The Thompson Chain-Reference Bible (B. B. Kirkbride Bible Co., Inc. Zondervan Bible Publishers, 1983)의 각색(脚色, adapt)임을 밝히고 있다. 영어 표제지가 밝히듯이, 이 책은 각권의 서론과 내용개요, 도표, 지도 등을 제시한다. 뉴톰슨을 각색함에 있어서 ꡔ오픈성서ꡕ13)를 주요 대본으로 함께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한 해설 성서 이외에도 국내의 것으로서 박윤선, ꡔ성경주석ꡕ (영음사, 1984), 이상근 편, ꡔ이상근 신약주해ꡕ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4), 신성종 편, ꡔ엠마오 주석성경ꡕ (엠마오, 1982), ꡔ아가페주제별관주성경ꡕ (아가페출판사, 1984), ꡔ톰슨관주성경ꡕ (기독지혜사, 1984) 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1986
이상근 편, ꡔ이상근 주해성경ꡕ (서울: 기독교문사, 1986). 성경전서 개론, 성경 전체 개요, 성경 연대표, 66권 각권의 서론과 내용분해, 주요 어구 해설 등을 제시한다.
1987
NIV주석성경편찬위원회 편, ꡔNIV 주석성경ꡕ (서울: 엠마오, 1987)
1988
톰슨성경편찬위원회 편, ꡔ톰슨 II 주석성경ꡕ (서울: 기독지혜사, 1988)14). “정통 복음 개혁주의”라고 하는 신학적 노선이 천명되어 있다. 그런 만큼 진화론 비판은 당연히 기대되는 것이지만, 현대과학이 밝힌 우주와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한 성서적 조명이나 대화는 전무하여 오늘날의 독자에게 성서와 과학을 대립적 구도로 설정할 위험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특히, 성서의 진술이 과학적 사실과 다른 경우에 (왕상 7:23; 마 13:32; 요 12:24; 약 5:3) 거기에 대한 해명이 전혀 없는 것도 독자의 궁금증을 그대로 지나쳐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9
오픈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오픈성경ꡕ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8). 각 권마다 서론이 있고, 주석에 가까운 분량의 상세한 주석이 있으며, 주제별 성경사전이 부록으로 첨가되어 있다. 지도, 도표, 사진 등도 제시되어 있다.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ꡔ오픈성경ꡕ은 최근까지의 구미의 고전적인 주석류, 성경 및 신학 사전, 그 이외의 다양한 자료에 근거하여, 아가페출판사의 성경편찬위원회에 의해서 편집 및 집필되었다. 그리고 성경 해석상의 오류를 없애기 위하여, 박형용(신약학), 유재원(구약학), 윤영탁(구약학) 세 분에 의하여 감수되었다.” 이처럼 방대하고 철저하게 기획되고 편집된 해설 성서에서 집필자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상의한 주요 참고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이 작품의 출처와 질을 의심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마스터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마스터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9)
김장환 목사 해설, ꡔ표준 관주 해설 성경ꡕ (서울: 도서출판 여운사, 1989)
톰슨성경 라이프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라이프성경ꡕ (기독지혜사, 1989)15).
성경전서 각권의 메시지와 중심 사상과 교훈을 요약한 서론, 내용 개요, 문단 별 내용 요약, 주요 낱말 해설에서는 우리말 음역과 함께 제시된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어, 영어 번역(들)에 제시된 대응어, 우리말 번역 등이 병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90
랍비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랍비성경ꡕ (서울: 영광, 1990)
열린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열린성경ꡕ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16). 성경 강해, 특주, 주제별 관주, 66권 각 권 서론, 도표, 그림, 지도 등을 제시한다.
완벽큐티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완벽큐티성경ꡕ (서울: 아가페문화사, 1990)17). 이름 자체만 보면 순수한 Q. T. 성서처럼 보이지만, 66권 각 권 서론을 비롯하여, 관주, 문단별 소제목, 일정한 문학 단위의 개관과 심층 연구는 해설 성서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고 있다. 부록에는 신구약 중간사, 연대기 대조표, 예수의 교훈, 예수의 이적, 예수의 비유 대조표, 바울의 전도여행 경로, 히브리 절기, 히브리 제사, 유대월력, 도량형 등에 관한 자료가 제공되어 있다.
셀프성경편찬위원회 편, ꡔ셀프성경ꡕ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18). 각권의 서론, 내용 분해, 단락별 소제목, 그 단락의 배경이 되는 연대, 주요 낱말 풀이, 지도, 본문에 따른 묵상 등이 제시되어 있다. 부록에는 성경 중요 용어 사전, 주제별 인명 지명 사전, 각종 도표 등이 있다.
해설몰간성경편찬위원회 편, ꡔ해설 몰간성경ꡕ (서울: 풍만, 1990)
1991
ꡔ200주년 신약성서ꡕ (분도출판사, 1991)19). 난외의 주는, 주로, 관련 구절, 의역된 번역문의 경우 그 원문이 지닌 문자적 의미, 모호한 본문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한 설명, 특수 용어에 대한 간략한 해설,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배경 등을 제시하고 있다.
ꡔ그랜드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1)20). 편찬 대표 위원으로는 윤주봉(수표교교회 목사, D. Min), 이호열(구로문교회 목사 Th. M.). 각 권 서론, 문맥의 흐름을 제시하고 문단을 요약하는 문단 강해, 성서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한 본문 명상, 주요 어구 주석, 원어 각주, 지도, 도표 등을 제시한다.
그랜드 제자성경 편찬위원회, ꡔ그랜드 제자성경ꡕ (서울: 영광, 1991)21). 해설 성서라기보다는 제목 그대로 제자훈련 과정을 이수하기 위한 편집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자도 자가 진단표, 성서를 한 해에 한 번 읽도록 배려하는 읽기 안내, 명상 자료, 암송 성구 표시, 관련 찬송가 등이 제시되어 있다. 집필자나 번역 대본이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자문위원명단은 밝혀져 있다. 김경행 (용산교회당회장), 김준철 (구세군사관학교교장), 박수암 (장신대신학대학원원장), 박인병 (전 피어선신학대학학장), 배순조 (성일교회당회장), 서공섭 (양문교회당회장), 신동혁 (동래중앙교회당회장), 신세원 (창신교회당회장), 유인식 (예장합동총회장), 이복희 (인천내리교회당회장), 이인구 (독립교회협의회회장), 정필도 (수영로교회당회장), 최복규 (예장대신총회장), 최훈 (동도교회당회장), 피종진 (남서울중앙교회당회장).
ꡔ키성경 KEY BIBLE (찬송가)ꡕ (서울: 영광, 1990)22). 집필자나 번역 대본이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자문위원명단은 밝혀져 있다. 김경행 (용산교회당회장), 김준철 (구세군사관학교교장), 박수암 (장신대신학대학원원장), 박인병 (전 피어선신학대학학장), 배순조 (성일교회당회장), 서공섭 (양문교회당회장), 신동혁 (동래중앙교회당회장), 신세원 (창신교회당회장), 유인식 (예장합동총회장), 이복희 (인천내리교회당회장), 이인구 (독립교회협의회회장), 정필도 (수영로교회당회장), 최복규 (예장대신총회장), 최훈 (동도교회당회장), 피종진 (남서울중앙교회당회장).
ꡔ리빙성경ꡕ (서울: 언약, 1991)23). 복합적인 책이다. 각 권의 서론, 주요 낱말 해설, 성구 명상을 위한 질문(Q.T.), 신학소사전, 성경시대의 삶의 모습 등이 제시되어 있다.
아멘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아멘성경ꡕ (서울: 반석문화사, 1991)24). 우리말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것 역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책이다. 주석성경, 해설성경, 원어성경, 성경사전, 성구사전, 특주, 낱말풀이 등이 복합되어 있다. 참고한 것으로서는 ꡔNIV 연구용 성서(The NIV Study Bible)ꡕ와 ꡔ제자 연구용 성서(Disciple's Study Bible)ꡕ이 “일러두기”에 명기되어 있다.
유재원 편저, ꡔ원어번역주석성경(오경편)ꡕ (서울: 도서출판 양문, 1991). ꡔ성경전서 개역한글판ꡕ (대한성서공회, 1961)을 기본 본문으로 사용하면서 편저자의 수정 본문을 적색으로 표기하였고, 난외에는 해설이 첨가되어 있는 학문적 노작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성서공회의 판권을 허락 없이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문을 허락 없이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으로서, 판권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L. A. 국제성서신학대학출판부 편, ꡔ한영해설성경ꡕ (용인: 국제성서출판사, 1992
제자원 편, ꡔ데일리 가정성경ꡕ (서울: 연합선교회, 1992)
제자원 편, ꡔ유니온 관주성경ꡕ (서울: 제자원, 1992)25). 편찬대표위원으로는 문흥지 (송정교회목사, D. Min.), 박승은 (동승교회 목사, D. Min.), 두 사람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주(貫珠)”라고 하면, 전후참조 구절(reference)이 표시되어 있는 성서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관주 이외에도 묵상 자료라든가 해설 성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성서 66권 각권의 서론이라든가 문단 별 강해, 문단 별 소제목의 표시 등이 그러하다.
번역위원회 역, ꡔ디사이플 주석성경ꡕ (서울: 요단출판사, 1992)
목자성경편찬위원회 편, ꡔ목자성경ꡕ (서울: 영광, 1992)26). “정통 개혁 보수주의 입장에 굳게 서서 말씀이 주고자 하는 의미를 바르게 나타내고자 최선을 다해 집필하였다.” 국내 필진이 집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대신 자문위원이 밝혀져 있다. 김경행 (용산교회당회장), 김준철 (구세군사관학교교장), 박수암 (장신대신학대학원원장), 박인병 (전 피어선신학대학학장), 배순조 (성일교회당회장), 서공섭 (양문교회당회장), 신동혁 (동래중앙교회당회장), 신세원 (창신교회당회장), 유인식 (예장합동총회장), 이복희 (인천내리교회당회장), 이인구 (독립교회협의회회장), 정필도 (수영로교회당회장), 최복규 (예장대신총회장), 최 훈 (동도교회당회장), 피종진 (남서울중앙교회당회장). 결국,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것은 바로 한 해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ꡔ키성경ꡕ이 이름을 달리하여 나온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같은 책을 구입할 수도 있다. 판권지에나 표지에나 간행사 어디에도 이것이 ꡔ키성경ꡕ과 같은 책이라는 언급이 없다.
어린이성경편찬위원회 편, ꡔ어린이 성경ꡕ (서울: 도서출판 영광, 1992)27). 어린이를 위한 해설 성서라는 점에서 기존의 다른 해설 성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린이에게 어려운 한자어나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가 제시되어 있다. 본문 편집에서는 단락 소제목이 붙어 있다. 그러나, 다른 대다수의 해설 성서와 같이, 단락은 무시되고, 매 절마다 독립되어 편집되어 있다. 천연색 성경 그림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
임승필 역, ꡔ욥기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임승필 역, ꡔ시편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임승필 역, ꡔ잠언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1993
국제 사랑의 성경 보내기 선교본부 편, ꡔ사랑의 성경ꡕ (서울: 바라, 1993)28). 기존의 해설 성서와 차별성을 말하는 간행사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 “본서는 지금까지의 스터디 바이블의 일관된 편집 체제를 과감히 탈피하여, 창세기에서부터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성경의 사건과 성경의 인물 및 교훈적인 성경의 맥을 그 자체의 편집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어법에 틀린 곳은 없으나 전달되는 내용은 없다. 이 해설 성서가 기존의 해설 성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려고 하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다. 기존 해설 성서의 “일관된 편집 체제”가 편집의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극복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답습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해설 성서가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는 일관된 편집 체제에 있다기 보다는 일관된 내용에 있다. 그러나 산문과 운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시 형태로 편집한 것은 이 책의 특징일 수 있으나, 산문을 시 형태로 편집한 것이라든가, 문맥을 무시한 독립된 절 편집은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성재 편찬 책임, ꡔ은혜성경ꡕ (서울: 창조서원, 1993)29). 간행사에서 자체의 성격을 “연구용 성경(Study Bible)”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편찬책임자 이성재 목사에 대한 약력이 판권지 위 부분에 표시되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대학원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 대학원(M.A.), 동대학원 박사 과정 졸업(Ed. D.)”
국제가톨릭성서공회 편찬, ꡔ해설판 공동번역 신약성서ꡕ (서울: 일과놀이, 1993)30)
임승필 번역, ꡔ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델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이종성 (편찬대표) 편, ꡔ통독용 큰 글자 만나성경/ 해설찬송가ꡕ (성서교재간행사, 1993)31).
1994
신현학 편찬책임, ꡔ아가페 큰글성경ꡕ (서울: 아가페, 1994)32). 이것은 일종의 주석성경이다. 주석 편찬위원으로는 강원용, 강현중, 구대일, 장귀복, 김덕신, 윤용진, 조두석의 이름이 나오고, 편집장에는 신현학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주석감수위원으로는 유재원(구약, 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 철학박사), 권성수(신약, 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 신학박사)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책의 해설 부분은, “일러두기에 밝혀져 있듯이, 이미 나온 ꡔ셀프성경ꡕ의 해설 내용과 동일하다. 이 책을 만드는데 참고한 문헌 중에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수용한 것들이 있어서33), 아가페 출판사의 신학적 개방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복음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주해 복음성경ꡕ (서울: 성서진리연구사, 1994)34). 속 표제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해, 주석, 성서 각 권 서론, 지도, 신구약 중간사, 지도 및 도표와 부록 등이 있다. ꡔ성경전서 개역 한글판ꡕ(1961)을 기초 본문으로 사용하였으나 “세례”는 모두 “침례”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주석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주석과 엘렌 지 화잇 저서를 주요 기본 도서로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 주해에서는 안식일교회의 독특한 신학을 보여 준다.
통독성경 편찬위원회 편, ꡔ큰글자 통독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4)
신현학 편찬 책임, ꡔ파트너성경ꡕ 전 12권 (서울: 아가페서원, 1994)35)
1995
이종성 편, ꡔ베스트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5)36). 표지에 표시된 편자는 이종성 박사이다. 뒤 간기 위에는 이종성 박사의 약력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철학박사, 동경신학대학 (D. D.), 미국 훌러 (M. Div.), 및 루이빌(Th. M.),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Th. D.) 졸업.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독일 본 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 연세대학교 신과 대학 교수, 학생처장, 교목실장. 장로회 신학대학 교수, 학감, 학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동북아신학교협의회 회장, 한국신학교육원, 한구신학연구소 이사장.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등 역임. 현 한국기독교 학술원장. 저서: ꡔ평신도와 신학ꡕ ꡔ칼빈 그의 생애와 사상ꡕ ꡔ성령론ꡕ ꡔ교회론ꡕ 등 30여종. 역서: 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ꡕ ꡔ현대인의 인간이해ꡕ ꡔ칼빈의 신학ꡕ ꡔ비교교회론ꡕ 등 10여종.”
임승필 역, ꡔ창세기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임승필 역, ꡔ이사야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이동원, 하용조 목사 편찬, ꡔ묵상성경ꡕ (서울: 두란노, 1995)
신현학 편찬책임, ꡔ뉴셀프성경ꡕ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5)37). 1990년에 츨판되었던 ꡔ셀프성경ꡕ의 글자를 키워서 읽기에 편하게 하고, 두께를 얇게 하여 가지고 다니기 쉽게 한 것이 중요한 변화라고 간행사에서 밝힌다.
국제가톨릭성서공회 편찬, ꡔ해설판 공동번역성서ꡕ (서울: 일과놀이, 1995)38)
ꡔ연대기성경ꡕ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5)39)
1996
임승필 역, ꡔ예레미야 바룩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임승필 역, ꡔ탈출기 레위기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도서출판 제자원 편, ꡔ에이스 성경: 해설찬송가ꡕ (서울: 종로출판, 1996)40)
신현학 편찬책임, ꡔ디럭스 컬러성경ꡕ (서울: 아가페서원, 1996)41). 편찬 책임자는 신현학, 집필위원은 김태곤, 김인배, 백광현, 편집위원은 이수진임을 밝혔다. 그러나 집필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을 담당하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아니하다.
이종성 편찬책임, ꡔCLS 주석성경ꡕ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42). 편찬책임자인 이종성 박사의 약력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전 장로회신학대학교수 및 학장/ 현한국기독교학술원원장; 편찬위원: 이성재 -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 졸업(Ed. D.)/ 현 웨스터민스터 신학원 교수; 김수학 - 전 대구신학교교수 및 학장; 전호진 - 현 아시아 연합신학대학원 원장; 정성구 - 전 총신대학 교수 및 학장/ 현 총신대학교수 및 목회신학원원장. 이것은 이성재 편찬책임, ꡔ은혜성경ꡕ(창조서원, 1993)과 동일한 내용이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대한기독교서회의 공신력에 문제가 될 뿐 아니라, 한국교계에서 존경받는 인물들로 구성된 편찬위원들의 참여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흔적이 주석 전반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같은 내용이 다른 편집자의 이름으로, 책명을 달리하여 나왔다고 할 때, 해설 성서의 편집과 출판과 보급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의 결여는, 이 사실도 모르고 독자들이 같은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하용조 편찬, ꡔ두란노 성경ꡕ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6)43)
1997
임승필 역, ꡔ사무엘상하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임승필 역, ꡔ에제키엘ꡕ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김의환 편찬대표, ꡔBig Bible 큰성경 해설 찬송가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7)44). 편찬대표는 김의환, 편찬위원은 김성영, 김시열, 이정범, 한성천 등으로 밝혀져 있다. 해설 내용에 문제가 있을 때 편찬대표가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는지 궁금하다.
김의환(편찬대표), ꡔ포켓성경ꡕ 전 12권(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7)45)
이종성 편집, ꡔNew 베스트 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7). 편자 이종성 박사의 약력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철학박사, 동경신학대학(D.D.), 미국 훌러(M. Div.) 및 루이빌(Th. M.), 샌프란시스코 신학교(Ph. D.) 졸업.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독일 본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 연세대학교신과대학 교수, 학생처장, 교목실장. 장로회신학대학교수, 학감, 학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동북아신학교협의회회장, 한국신학교육원 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 등 역임. 현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해설 성서는, 아래에서 비평적으로 지적될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다. 다음과 같이 열 분야에서 그 공헌을 평가해 본다.
1) 교인들의 관심을 “성서를 연구하는(Bible STUDY)” 것에서 “연구하는 성서(Study BIBLE)”로 돌렸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사경회의 오랜 전통 때문에 “성경공부”가 다른 어느 나라 교회에 비해 활발하게 발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성서 연구” 혹은 “성경 공부”에서는 “성경”이나 “성서”는 “공부”나 “연구”를 수식하는 구실밖에 못했다. 공부나 연구가 더 중요하게 의식되는 틀 속에서 우리는 성경 “공부”나 성서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해설 성서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영어 제목이 주로 Study Bible로 소개되면서, “공부”나 “연구”가 “성경”이나 “성서”를 수식하는 기능을 가지게 되고, 성서 자체가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성서 연구 교재보다는 성서 자체가 우리의 관심이 되도록 의식을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스터디 바이블이 이룩한 공헌을 인정하고 싶다.
2) 다양한 해설 성서의 출판은, 교인들에게, 성서는 해설과 주석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3) 다양한 해설 성서의 출현은 평신도의 성서 연구를 자극하였다. 성서 해설이나 주석이 목회자나 신학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평신도들은 이제 자신들 스스로도 이런 종류의 해설 성서나 주석 성서의 도움을 받아 성서를 독자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4) 목회자의 자질 향상에도 한 몫을 하였다. 일반 평신도의 성서 연구 수준의 향상은 그들에게, 목회자의 설교와 성서연구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안목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이러한 상황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더욱 심도 있는 성서 연구를 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5) 성서학 발전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해설 성서의 제작은 성서학계가 주선한 것이 아니고, 일반 상업적인 출판사가 주도하면서 성서학자들을 집필자로 번역자로 감수위원으로 또는 편찬위원으로 초청하기에 이른 것이었으므로, 해설 성서 출판의 활성화는 성서학자들에게도 성서해설이나 주석을 쓰게 하는 자극제와 계기가 되었다.
6) 지난 20여년 동안 여러 형태의 해설 성서를 출판한 우리나라 출판계가, 그 기간 동안에, 외국의 유명한 해설 성서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한 것도 큰 소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46).
7) 성서 본문 이해를 위한 각종 도표와 도량형 비교표 및 성서 지도를 제작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 Q.T.와 성서의 연결은 양자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었다. 성서를 떠난 Q.T.의 위험성과 명상과 반성과 실천이 없는 성서 연구는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7:21-23; 요 8:51).
9) 관주와 소제목을 발전시켰다.
10) 국내 굴지의 기독교 출판사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더 좋은 해설 성서를 만들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였다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 전체의 지적 재산이라고 볼 수 있기에 이 경험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연구용 성서(study Bible)” 혹은 “주석 성서(Commentary Bible)”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 곧 성서 자체 내의 상충되는 내용,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본문, 문장 구실을 못하는 비문(非文), 난해한 한문투의 본문 등에 대해서는 대답을 시도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말 해설 성서의 대다수는, 정작 독자들이 물어오는 본문,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본문, 우리말로 말도 되지 않는 본문 등은 모두 피해가고 있다. 도대체 해설 성서가 일반 독자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오히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각 문단의 요약은 사실상 본문 이해를 위해서 그렇게 필요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의 기존의 해설 성서들은 모두 주석적 전통을 따라 성서에서 출발하여 독자에게 성서의 내용을 주입시킨다. 그러나 해설 성서의 발생은 성서 독자의 독서 행위를 돕는 것이었다. 독자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성서의 진리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 그 본래 기능이다.
(1)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신 날은 언제인가? “여섯째 날” (창 1:1-31), “일곱째 날” (히브리어 본문 창 2:2),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창 2:2) 등으로 나온다. “일곱째 날”과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는, 시간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2)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는 날에는 먹은 사람이 죽는다고 했는데 (창 2:17), 아담과 이브는 그 과일을 먹었는데도 죽지 않았고 (창 3:7), 오히려, 아담의 경우는 930세까지 살다가 죽는다 (창 5:5).
(3) 레위인 남자의 수는 모두 몇 명이었는가? “22,300 명”이라고도 하고 (민 3:21-37의 합계), “22,000 명”이라고도 한다 (민 3:39).
(4) 다윗이 거느린 마병의 수는? “1,700”으로 나오기도 하고 (삼하 8:4), “7,000”이라고도 한다 (대상 18:4).
(5) 다윗이 무찌른 아람 군대의 병거 수가 “700”으로 나오기도 하고 (삼하 10:18), “7,000”으로 나오기도 한다 (대상 19:18).
(6)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부추긴 이가 “여호와”로 나오는가 하면 (삼하 24:1), “사단”으로 나오기도 한다 (대상 21:1).
(7) 군인의 수와 유다 사람의 수가 한 곳에서는 “80만 군인에 50만 유다인”이라고 나오고 (삼하 24:9), 다른 한 곳에서는 “110만 군인, 47만 유다인”이라고도 나온다 (대상 21:5).
(8) 솔로몬의 외양간 수가 “4,000”이라고 보도되기도 하고 (대하 9:25), 무려 10배가 되는 “40,000”이라고 보도되기도 한다 (왕상 4:26).
(9) 같은 대상의 계수가 에스라(2:3-64)와 느헤미야(7:8-66)에서 서로 달리 나온다. 괄호 바깥의 숫자는 에스라, 괄호 안의 숫자는 느헤미야에 기록된 것이다. 아라 자손: 775 (652), 바핫모압 자손 2,812 (2,818), 삿두 자손 945 (845), 바니 자손 642 (648), 브배 자손 623 (628), 아스갓 자손 1,222 (2,322), 아도니감 자손 666 (667), 비그왜 자손 2,056 (2067), 아딘 자손 454 (655), 베새 자손 323 (324), .....
(10) 야이로의 딸이 한 곳에서는 완전히 “죽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마 9:18), 다른 한 곳에서는 거의 “죽게 되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막 5:23; 눅 8:42).
(11)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고치신 맹인이 한 곳에서는 “둘”이고 (마 20:29-31), 다른 곳에서는 “하나”이다 (막 10:46-47; 눅 13:35-38).
(12) 맹인을 고쳐주신 것도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였다고 하는가 하면 (막 10:46-47; 눅 13:35-38), 또 달리 “떠날 때”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마 20: 29-31).
(13) 마가 1:1-3에서 인용된 구약 본문의 출처가 마가복음서 자체에서는 “이사야” (막 1:2)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은 “말라기” 안에 들어 있다 (말 3:1).
(14) 스가랴의 아버지가 한 곳에서는 “바라갸” (마 23:35), 다른 한 곳에서는 “여호야다”이다 (대하 24:20-21).
(15)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을 때의 제사장이 한 곳에서는 “아비아달” (마 2:25-26)이고 다른 한 곳에서는 “아비멜렉”이다 (삼상 21:1-2, 6).
(16)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간 사람의 수가 신약에서는 “75명인데” (행 7:14), 구약에서는 “70 명이다” (출 1:5).
(17) 세겜에 있는 땅은 “야곱”이 산 것이라고도 하고 (수 24:32; 창 23:2-20), “아브라함”이 산 것이라고도 한다 (행 7:16).
(19) 염병(染病)으로 죽은 자의 수가 한 곳에서는 “24,000명”이고 (민 25:9), 다른 곳에서는 “약 3,000명”이고 (출 32:28), 또 다른 곳에서는 “23,000 명”이다 (고전 10:8).
(20) 구약에서 실제로 스가랴가 한 말(슥 11:13)인데, 신약에 인용될 때에는 그것이 예레미야가 한 말로 되어 있다 (마 27:9-10).
(1)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16:5)
(2)“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23편 1-6절의 전체 내용은 잘 이해가 될 뿐 아니라 은혜스럽기까지 하여 암송하다시피 하는데,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구절은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일수다. 정작 그 뜻을 물어 보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엉뚱하게 오해하고 있기가 예사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는 것을 원수들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밥상(床)을 차려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랑프리 상(賞)이라도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한글 세대의 한계라고 치더라도,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이 시를 쓴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주심을 감사하는 것이라는 쪽으로 상상을 확대해 나가는 독자도 있다. 그러나 왕이나 메시아를 세울 때 기름을 붓는 것은 히브리어 “마샥흐” 동사이고, 여기 우리 본문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다샨” 동사로서 “아무개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뜻이다.
(3)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시 60:7-8)
(4)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 84:5-6)
(5)“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25:21-22)
이 구절을 읽는 기독교 독자들은 21절을 읽으면서는 이 내용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한 예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2절에 와서 당황한다. 곤경에 처한 원수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마치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라고 했으니, 결국은 그러한 원수 사랑은 원수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핀 숯을 사람 머리 위에 놓아 그 사람으로 화상을 입게 하거나, 핀 숯의 화력 정도에 따라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는데, 그러한 일을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을 주신다고 하니, 독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핀 숯을 아무개의 머리 위에 놓는다는 것은 “얼굴을 뜨겁게 한다” “부끄럽게 한다”라는 뜻이다.
(6)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호 1:4)
(7)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호 4:8)
(8)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와지게 하고”(암 6:3)
(9)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욘 1:14)
(10)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 13:1).
사람의 피를 제물에 섞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 오는 독자들이 더러 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물어오는 이들 나름대로 각자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물어 보면서, 그들의 오해를 확인하곤 한다. 독자들의 생각을 들어 보면, 일반적으로는 독자들이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희생제물에다가 사람의 피를 혼합해 넣는 것으로 이해한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에게서 피를 채혈(採血)하여, 그들이 바치는 희생제물에다 그 피를 섞어 넣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의 희생제물에 사람의 피를 섞으므로써, 제물과 제사행위 자체를 모독한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11)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 (히 11:13)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장이다. 믿음의 조상들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그 삶의 특징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는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라는 말에서 보듯이 “약속을 받고” 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1장 13절에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라는 진술이 있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두 가지 점에 의문을 갖게 된다. 하나는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과연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약속”도 받은 바가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으며, 그들은 “약속은 받았지만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4.3. 다른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본문47)
(1)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할 것이 이것이니”(고전 9:3). “발명(發明)하다”는 옛말에서는 “변명(辨明)하다”를 뜻했지만 지금은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다”를 뜻한다.
(2)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출 12:37). “발행(發行)하다”는 옛말에서는 “출발(出發)하다”를 뜻했지만 지금은 “출판(出版)하다”를 뜻한다.
(3) “그 형들이 ...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不平)하였더라”(창 37:4). “불평(不平)하다”는 옛말에서는 “평화(平和)롭지 못하다”를 뜻했지만, 현대어에서는 “불만(不滿)을 말하다”를 뜻한다.
(4) “개동시 (開東時)에 사람들과 나귀를 보내니라”(창44:3)
(5)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가 반일경지단(半日耕地段) 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인 가량이라”(삼상14:14)
(1)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암5:20)
(2)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5)
4.5. 사실과 다른 진술 (예1)48)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롬 11:17-18).
바울이 말한 이 비유는 원예 기술상으로 불가능한 진술이다. 도시 출신인 바울이 원예(horticulture)의 한 방법인 접붙이기(grafting)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지식은 없었던 것 같다. 주석들마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이해하고 그 의도를 설명하기는 하면서도, 바울의 이 비유가 원예 기술상으로는 불가능한 비유임을 지적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접붙임에 관한 비유는 이미 오리겐 때부터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서로 다른 두 나무를 접붙이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정반대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농촌 출신이 아니고 도시 출신이므로 이런 원예 기술을 비유로 사용하다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49)
로마서 11장 11-24절을 보면, 바울이 이방 사람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면서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참감람나무가 된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찍이 선택하셨던 이스라엘은 참감람나무이고, 선택에서 제외된 이방 사람은 돌감람나무인데,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어 참감람나무가 될 때, 그 접붙은 돌감람나무 가지가 본래부터 참감람나무이었던 가지들을 보고 우쭐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가 되었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본래의 참감람나무 가지를 잘라내시고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이신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그 접붙인 교만한 돌감람나무 가지를 다시 잘라내 버리실 수도 있다고, 바울은 경고한다. 비록 지금은, 참감람나무 가지였던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얼마가 이 본래의 제 나무에서 잘리어 있지만, 전혀 다른 나무였던 돌감람나무 가지도 제 본성에 거슬러 참감람나무에 접붙을 수 있었는데, 하물며 그 잘려나간 본래의 가지들이 회개할 때 제 본래의 참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돌감람나무의 경우보다 훨신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기란, 일반 독자들에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접붙이는 것에 관한 일반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이 비유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접붙이는 것에 관한 상식에 배치되는 이런 응용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접을 붙인다고 할 때에는,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좋은 나무에 나쁜 가지를 접붙여 그 나쁜 가지가 좋은 가지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정반대로, 나쁜 나무에 좋은 가지를 접붙이면 그 좋은 가지에서 좋은 열매가 맺는다고 한다.
우리말에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자질구레한 것이 많아도 큰 것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일찍부터 농부들을 고욤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여, 고욤나무에서 감이 열리게 하는 일을 해 왔던 것이다. 감나무에 고욤나무를 접붙여 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감나무에 고욤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비록 그 가지는 감나무 뿌리에서 같은 양분을 빨아들여도, 여전히 고욤을 맺지 감을 맺지는 않는다고 한다. 고욤나무에 감나무가지를 접붙여 좋은 감을 얻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서 본다면,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인다고 해서 그 가지가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 가지가 붙어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는 것이므로, 참이스라엘이 이방 사람에게 접붙어 이방을 참이스라엘 되게 했다고 한다면, 모를까.
4.6. 오해하고 있는 본문50)
우리말 ꡔ개역ꡕ 마태복음 5장 37절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하고 권면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이 본문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불행하게도 이 본문을 끝까지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함이 없이 서둘러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 이 본문을 읽는 이들은 이 본문을 몇 가지로 오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를 긍정할 때는 꼭 옳다는 사실을 두 번 반복하여 “옳다 옳다 (Yes, yes)” 하고 말하고, 무엇인가를 부정할 때도 역시 아니라는 것을 두 번 반복하여 “아니라 아니라(No, no)” 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하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옳다”는 말이나 “아니라”는 말은 꼭 두 번만 말하고 세 번이나 그 이상은 하지 말라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옳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하라 그 이외의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차라리 이 본문이 이러한 뜻이었어도,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는 참으로 좋은 경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호한 번역문을 독자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에서 지나는 것”도 “그 이외의 것”으로 해석해 버린다. 곧,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고 해야지,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양비론(兩非論)이나 양시론(兩是論)을 말하는 것은 다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기에서는 흑백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오해보다는 좀 더 고상하지만 본문의 뜻은 이것이 아니다.
이 본문을, 매사에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두 번째 오해가 윤리적 결단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세 번째 오해는, 의사 결정에 참여를 요청 받는 경우와 관련되어 있다. 기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면 가, 부면 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기권과 같은 행위는 “이에서 지나는 것”에 속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겉으로는 옳다고 하거나, 반대로 속으로는 기면서도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곧 “예”와 “아니오”를 올바른 의미로 쓰지 않고, 반대 의미로 쓰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외교관의 “예스”는 때로는 진정한 의미의 “예스”가 아니라,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노”를 말하기 위한 예비적 대답일 경우가 많다는 외교계의 말버릇을 염두에 두는 이들도 있다.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예 예 하고서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 ”(ꡔ개역ꡕ 고후 1:17-19) 하고 한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예스와 노에 관하여 말한 것일 수 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예”나 “아니오”를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본문은, 그러한 경우에는, 사람이 “예”나 “아니오”를 말하되, 맹세하는 말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신 말씀 속에 들어 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각자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길 경우에는 다만 “예”라고만 하면 충분하고, 아닐 경우에는 다만 “아니라”고만 말하면 충분하다. 말하자면, “예, 그렇고 말고요. 만일 아니라면 내 목이라도 내놓겠소” 하고 말한다던가, “아닙니다. 길 경우라면 내가 성을 갈아요” 하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우라면, “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맹세코 그렇습니다” 하고 말한다던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합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하고 맹세하는 경우일 것이다. 최근의 새로운 번역들을 참고해 보면 그 뜻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중에 우리를 해방시키는 말씀이 있다. 마태 복음 6장 25-33절에 나오는 것으로서 도대체 걱정이란 것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에서 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의식주와 관련된 걱정거리인데, 예수께서는 일찍이, 사람의 의식주와 관련된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시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이므로,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 곧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ꡔ개역ꡕ 마태 6:34) 하고 하신 말씀은, 우리더러 그날 그날의 걱정은 하라는 것이어서, 도대체 걱정이라고는 아예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는 앞뒤가 맞지 아니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말은 곧, 오늘은 오늘 걱정만 하고, 내일은 또 내일에 할 걱정이 있는 것이니까, 내일 할 걱정까지 오늘부터 미리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내일 걱정은 내일 가서 해도 된다는 것이어서, 전혀 걱정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앞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 문맥을 고려함이 없이 마지막 한 구절만 똑 따서 본다면, 이 마지막 결론적인 구절도 만사를 지레 걱정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으로서 어떤 교훈적 의미를 충분히 가질 수도 있다. 하루하루 살면서 그 날 그 날 걱정을 하기에도 벅찬 세상에서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까지 걱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미래 학자들이나 환경학자들이 지구의 온실화라든가 대기권의 오염이라든가 오존층의 파괴를 걱정하면, 그것은 내일 할 걱정을 미리 끌어당겨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걱정을 낮게 평가하거나 무시할 때 이 성경 구절은 좋은 구실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도대체 걱정이라는 것은, 오늘은 물론이려니와 내일도 하지를 말라는 것이다.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들에서 피고 지는 들풀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기르시듯이 그렇게 사람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걱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키 작은 사람이 키가 작다고 걱정을 태산 같이 한다고 해서 그의 작은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여러 새로운 번역들은 결론적인 말씀 34절을, 달리 번역한다. “그러므로 내일 걱정을 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위에서 이미 한 번 언급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신 날은 언제인가? 고대역과 사마리아 오경에 나오는 것처럼 “여섯째 날” (창 1:1-31)인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일곱째 날”(히브리어 본문 창 2:2)인가, 우리말 ꡔ개역ꡕ에 반영된 것처럼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창 2:2)인가?
1) 대다수의 경우 책임 집필자(들)이 명확하지 않다. 집필자들이 나와 있는 경우에도 어느 집필자가 어느 부분을 집필하였는지 밝히지를 아니한다. 이것은 과연 그들이 진정한 집필자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집필자나 해당 집필 부분을 못 밝힐 책이라면, 그 책의 출생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다른 출판사의 지적 재산권을 도용하는 경우이거나, 그와 유사한 경우라면, 이것은 성서에 대한 오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편집의 경우, “편찬책임”이라는 용어를 쓴 해설 성서들도 있는데, 그것이 흔히 말하는 편집책임자, 혹은 주 편집자(editor in chief)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편집위원회와 편집위원회의 의견을 실천에 옮기는 편집 실무진이 있을 것이며, 편집을 한다고 할 때에는 이미 쓰여진 재료와 그 필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쓰여진 재료도, 그 재료의 집필자도 다 감추고, 번역인 경우, 번역자와 번역의 대본도 밝히지 아니한 경우가 허다하다. 출판사들이 아무리 학문적 정직성을 주장한다고 하여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설득력을 상실하고 만다. 싸구려 소설이나 주간지에 실리는 잡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감히 해설 성서의 경우에, 책임을 질 집필자나 번역자에 대한 공개나, 번역의 경우에, 번역 원본에 대한 자료 공개를 기피할 수 있는가? 그리고 편찬 위원 명단에 올라 있는 이들의 이름을 보면 그러한 해설 성서 편찬에 도저히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이들도 있어서 과연 그들이 그 편찬 과정에 구체적으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의심하게 한다. 예를 들어본다. “이종성”이라는 이름의 해설 성서가, 필자가 조사한 대로는 네 권이 있다. ꡔ통독용 큰 글자 만나성경ꡕ (성서교재간행사, 1993), 이종성 편, ꡔ베스트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5), ꡔCLS 주석성경ꡕ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ꡔNew 베스트 성경ꡕ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7) 등이다. 그가 만사를 제쳐놓고 해설 성서 편집에만 몰두한다면, 이 정도의 일을 못할 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대한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이 일을 맡아서 할 필자의 선정과 편집 활동과 집필의 시간 등을 고려하자면 각 권이 최소한도 10년 씩은 걸려야 하는 것들이다. 이 정도의 해설 성서라 하더라도 한 편집책임자가 평생에 한 두 권을 할까 말까 하는 것이 정직한 경험이다. 어떻게 매년 한 권씩 이런 방대한 해설 성서를 편집하여 출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이미 ꡔCLS 주석성경ꡕ(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은 다른 이의 편집으로 다른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책이름과 편집자의 이름을 바꾸어 마치 다른 책인 것처럼 나왔으니, 이런 현실을 보는 독자들이 해설 성서 전반에 관하여 가지는 불신은 독자의 책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3) 번역이나 번안의 경우 그 기초 자료의 사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말하자면 수 십종의 연구용 성서나 주석을 열거하면서, 그것들을 참고하여 편찬위원회가 편찬을 했다고 한다. 그 참고서를 보면 학문적인 것과 교조주의적인 것이 동시에 병렬되어 있는 것을 보는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가? 항간에서 들리는 말로는, 판권 사용 허락을 받는 경우, 외국 출판사의 요구가 힘에 겹다고 한다. 그들이 그만한 해설 성서를 만드는데 있어서, 한 두 해에 만든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든 것인데다가, 우리나라의 출판사들처럼 매년 새로운 해설 성서를 계속하여 내는 그런 능력도 없는 출판사이고 보면, 해설 성서 제작에 비용도 많이 들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지적 재산을 사용한다고 할 때에 그만한 요구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4) 본문 내용 자체가 제기하는 문제 중에 상당수가 다루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예를 든 것으로서, 성서 안에서 서로 상충하는 내용, 사실과 다른 진술 등에 대해서는 일반 독자들이나 성서학도들이 수 없이 물어 오는 것들이다. 성서를 건성으로 읽지 아니하고 진지하게 읽으면 어느 누구나 당면하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해설 성서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독자들의 질문은 외면한 채 집필자나 어느 교단의 교조적 교훈만을 주입하려는 데 주력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5) 우리말 번역 자체가 제기하는 문제 역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본문이라든가, 비문에 속하는 본문이라든가, 오해받고 있는 본문들은 거의가 다 번역과정에서 생긴 것들이므로 해설 과정에서 해명되거나 바로잡아져야 한다.
6) 문단 단위 편집을 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해설 성서들이 문맥의 흐름을 중요하게 여기어서 문단을 요약하고, 문단 별 강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 편집에 있어서는 하나같이 문단을 무시하고 각 절을 독립시켜 편집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전혀 문단 자체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변명을 들어 보면, 절을 찾기 쉽게 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한국교회 신도들의 성서 이해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성서 본문을 읽을 때 문맥을 무시하고 읽으므로써 성서 본문에서 엉뚱한 뜻을 읽어낸다는 것이다.51) 우리나라 성서 독자들을 오도한 배후에는 이러한 문단 파괴 편집이 크게 일조를 했다는 비평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7) ꡔ개역ꡕ과 페이지를 맞춘다는 것은 무리이다. 해설 내용이 매 페이지마다 동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이 유지되고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해설할 내용이 많은 페이지도 있고, 해설할 내용이 적은 페이지도 있기 마련이다. ꡔ개역ꡕ 성서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대한성서공회가 매 페이지 1/3 분량에 해설을 넣기를 요구하고 있는 그 요구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일반 출판사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요구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아는 출판사들은 그런 요구가 나오게 된 원인을 제거한다면, 현명한 타결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성서 각 권별로 볼 때, 주석 성서의 경우는 해설 분량이 성서본문보다 두 배나 세 배 정도 많을 수 있다. 해설 성서일 경우에는 성서 본문과 해설 본문의 분량이 거의 같게 조정될 수도 있다. Q.T.의 경우는, 성격상 그 분량이 성서 본문의 분량보다 많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8) 번역본들 사이의 서로 다른 번역에 대한 설명이 없다. 우리 번역만 하더라도 ꡔ개역ꡕ ꡔ공동번역ꡕ ꡔ표준새번역ꡕ 등 여러 번역이 있고, 오늘날 신도들 중에는 영 독 불 등 외국어 번역을 읽는 이들도 많은데, 이들 번역들 사이의 차이점들 중에는 번역 기술에 근거한 것도 있지만 서로 다른 본문, 혹은 서로 다른 본문비평의 결과에 기인된 것도 있는데, 이것 역시 해설 성서에서 제한적으로라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9) 성서 독자의 독서를 돕는 해설 성서 본연의 분야가 흐려지고 있다. 해설 성서와 주석 성서는 분리되어 발전되어야 한다. 주석 성서는 성서학자들이 성서의 메시지와 핵심을 말해 주는 쪽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해설 성서는 성서 독자로 하여금 성서 본문을 읽고 이해하도록 돕고, 읽으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시도하는 쪽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Q.T.는 독자적으로 발전해야 할 제 3의 분야이다.
10) 대다수의 일반 출판사들이 거의 유사한 성격의 해설 성서를 제작하였다. 이제는 개성 있는 해설 성서, 여러 층의 독자에게 개별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해설 성서가 필요하다. 어린이를 위한 해설 성서, 중학생을 위한, 고등학생을 위한, 대학생을 위한, 젊은이를 위한, 여성을 위한, 장년을 위한, 노인을 위한 해설 성서 등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1) 독자 중심의 해설 성서를 만들자. 우리나라 신도들이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무엇을 이해 못하는지, 무엇이 어렵다고 묻는지, 어떤 본문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지를, 독자들에게 먼저 물어서 독자들이 모르겠다고 하는 문제를 다루는 그런 해설 성서를 만들어 보기를 바란다. 약 만 여 명으로부터,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물어 오는 본문을 수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어려운 본문일 것이다. 바로 그런 본문을 해설해 주는 성서가 필요하다. 신도들의 질문은 신학적으로나 성서학적으로 때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들의 문제에 대답해 주어야 한다.
(2) 우리의 목회자를 필자로 하여 해설 성서를 만들자. 해설 성서는 성서학자나 되어야 쓸 수 있는 그런 학문적 서적일 필요는 없다. 일반 교인들과 늘 가까이에 서 있는 이들이 바로 교인들의 질문 현장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목회자들이다. 지금까지도 그들이 늘 일반 신도들의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 왔다. 목회자들은 해설 성서를 쓸 수 있는 집필자들이다. 성서 주석은, 성서 학자들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마당이지만, 해설 성서는,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모르겠다고 물어 오는 질문에 대답을 시도하는 마당이다.
(3) 믿지 않는 이가 쉽게 읽을 수 있는 해설 성서를 만들자. 이제 성서는 보급될 만큼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883년이래 2001년 상반기까지, ꡔ성경전서ꡕ는 2천 8백 80여 만 권이 보급되었고, ꡔ신약전서ꡕ는 5천 7백 50여만 권이 보급되었고, 단편은 7천 3백 90여 만 권이 보급되었고, 점자성서는 14만 9천여 권이 보급되었고, 성경 본문이 들어가 있는 전도지는 10억 5천 6백 60만 여권이 반포되었다. 지난 2001년 5월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52), 성서 보급은 약 12억 1,700 여권에 이른다. 전도지 10억 5천 6백 60만여 권을 뺀다해도, 성경 보급은 1억 6천 40만여 권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기독교 인구와 불교 인구의 분포가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인구는 남한의 경우 약 4천만 명이다. 그 가운데에서 종교 인구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2천만 명이고, 2천만 명 중에서는 그 절반이 불교인이고 나머지 절반이 기독교인이다. 이 통계는, 우리 인구 중에 3/4에 해당하는 3천만 명이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모르거나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우리 인구의 3/4은 우리 교회가 현재 형태의 선교 방식으로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하거나 기독교를 이해하게 하거나 혹은 기독교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에는 어떤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들은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가 있어도 안 읽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성서를 접근시키는 길은 비기독교인을 위한 해설 성서를 연구하고 만드는 일이다. 남한만이 아니다. 이제 곧 통일을 대비하여, 유물론과 무신론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북한의 지식인을 위한 해설 성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4) 타종교인이 기독교의 경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설 성서를 만들자. 베드로 사도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교회의 신도들에게 한 편지의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전혀 종교를 갖지 아니한 이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내용과 이유를 물어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는 거기에 적절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타종교와 불필요한 갈등을 조성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평화와 정의와 창조세계의 보전을 함께 이루어 나갈 때, 타종교를 믿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 내용에 관해 기독교인들의 희망에 관해 물어 올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우리 신앙의 내용과 이유를 그들에게 말해주어야 할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은 더 높아져 가고 있다. 우리 인구의 3/4중에서 누군가가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기독교의 신앙 내용과 이유에 대하여 물어 올 수 있다는 것이다(벧전 3:15).
(5) 호화장정을 피하고 싼 값으로 보급하자. 검은 소가죽 책표지에 금박 글씨, 세 면으로 돌아가며 금박으로 입히고, 본문과 해설을 여러 가지 색도(色度)로 분장을 시키는 호화장정은, 우선 세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로는 성서를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성서가 천박하게 보이게 한다. 둘째로는, 그러한 인쇄와 제본이 심각한 공해 사업이라고 하는 점이다. 셋째로는, 스터디 바이블 본래의 정신에 어긋난다. 공부하는 이들이 보는 교재나 참고서가 그처럼 호화스럽게 장정을 하고 나오는 것은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넷째로는, 실수요자인 성서학도에게는 비싼 성서가 되고,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선물로나 주고받는 상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렇게 하여, 다시 첫 번 째 문제로 되돌아가 건전하지 못한 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존경받는 자신의 이름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아무개” 하면, 다 아는 이름일수록 허명(虛名)으로 이용될 기회가 많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그 이름이 늘 존경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필자 한 사람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편집 책임자나 편집위원이라는 직책을 맡기로 하였으면, 그 이름에 마땅한 임무를 다 하는 것이 이름을 존귀하게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감수자가 되었으면, 어떤 부분을 어떻게 감수하여 그 결과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그 감수 결과를 서문에서 밝히면 독자들은 그만큼 더 안심하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집필자가 집필 실명제를 스스로 지킬 때 독자들도 그의 이름을 지켜줄 것이다.
출생이 불분명한 해설 성서는 훔친 물건과 같은 것이므로 구입하지 않아야 한다. 한 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을, 다른 출판사가, 바로 그 같은 해설 성서에다가 다른 이름을 붙이고 다른 편집자가 편집한 것처럼 편집자를 바꾸어 출판하는 경우에, 혹은 같은 출판사라 하더라도 같은 출판물을 책이름을 바꾸고 편집자를 바꾸어 버젓이 상품으로 내놓을 때에, 독자는 자신이 우롱을 당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편집 책임자나 편집위원이나 집필위원이 허명일 것이라는 의심이 생길 때에는 해당 출판사나,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에게나 전문 기관에 문의하여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1) 대한성서공회와 같이 성서를 번역하는 기관은, 판권 사용을 허락 받은 다른 출판사들이 본문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늘 관찰해야 할 것이다. 판권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지적 재산권의 소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본문의 변경을 막고 본문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도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권 사용을 허락 받은 출판사들이 본문에 어떤 편집상의 변경을 가하거나 단락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제시해 올 때에는 쌍방 간에 충분한 연구와 토의가 이루어져서 합의에 이르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2) 한 권의 해설 성서가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 일반 출판사에서 판권 사용 신청을 해 올 경우에는 그 계획서를 정확하게 검토하고, 판권을 사용할 수 있게 한 다음에는, 작품 완성 기간까지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