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無에 이르는 시간들
- 이제는 그(김용배)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1986년 4월 23일 새벽 2시경에 서울 강남구 삼성동112-2번지에 있는 무형문화제 전수회관 1층
'사단법인 남사당'사무실에 김용배가 남기수를 찾아왔다.
평상시에 남기수가 이곳에서 숙식을 하기때문이다. 그가와서 "누구가 나를 죽일 것 같은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국립국악원에 오래 머루를 생각은 없다.","나의 예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기수 너밖에 없다",
"기수야, 사람 탈을 쓴 동물들이 괴롭혀 잠이 오지 않는다."등의 말을 하면서 오전 10시까지 사무실에 있었다고 한다.
이때에 무속가락을 가르쳐 준 스승 고 지영희가 죽기 직전 녹음해 두었다는 테이프를 남기수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해서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민속예능인들에게 하나의 불문률이 존재한다. 제자에게 결코 주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숨이 넘어가기 전에 남긴다는 것이다.
지영희가 김용배에게 넘긴 것이라든지, 김용배가 남기수에게 이것을 넘긴 것이라든지 하는 장면은
곧 죽음을 예고하는 상징적 의미를 남긴다.
또 반 병쯤 남은 소주를 마시면서 푸념도 늘어놓았다고 한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을 자꾸만 요구하지만 우리 민속가락의 복원이 앞서야 한다.",
"혼이 깃들인 민속악을 콩나물대가리로 표현하려면 이론하는 사람들이 먼저 실기를 익혀야 한다."
"한가락에서 다음 가락으로 넘어가려면 어는 정도 시간이 걸려야 하는뎅 3분만에 혹은 5분만에 사물놀이를 끝내라는 주문은 역겹다"
"내가 없어야 국립국악원에서도 아쉬운 줄을 알 거다","기수야 네가 마지막 대물림이니 네가 꼭 할 일이 있을 것이다"등의 말을 느릿하고 어눌한 어조로 했다는 것이다.
오전 10시쯤 남사당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김용배는 국립 국악원에 전화를 걸어 '병가'를 신청했다.
1986년 4월 23일 10시경에 오후 1시까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남기수는 인천 인하대 농악반 지도 때문에
인천으로, 김용배는 개포동 자기 집으로 간다며 서로 헤어졌다.
그날 오후 3시경 인천에서 돌아온 남기수는 김용배가 남기문과 일본에서 유학온 여성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발견했다.
김용배는 무척 화가 나 일그러진 표정이었고, '술을 먹고 싶다'면서 패스포드를 사오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남기수는 2홉짜리 길벗올드를 사왔다. 그리고 잔이나 안주도 없이 병째로 돌려가며 마셨다고 한다.
이때에 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기수가 전수회관 강습 때문에 자기를 뜨자 다같이 일어섰고, 남은 술 5분1정도를 김용배가 가져가면서,
"강습 마치고 빨리 내 아파트로 와라, 기수야"하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남기수는 사정이 있어서 못가고 대신 일본인 여성을 보냈다.
그녀는 안에 서 인기척이 있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오후6시쯤 남기수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러나 공무원 독신자 아파트에서 출입이 까다롭고 남기수 또한 바빠서 가지 못했다.
1986년 4월 24일 '송탄추앙제'추진관계로 함태온,남기수,남사당 사무실 보조원 미스봉, 송탄미술협회 지부장 김영대등 4명이 개포동 아파트에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있고 경비실에세 비상열쇠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남기수는 우편함에 "궁금하다.
기수한테 연락해 달라"라는 사연은 남기고 돌아왔다.
그 이후에는 심신이 피로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났을 것으로 보아 그냥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일이 너무 지체되고 마침 '송탄추앙제'행사 진행위원들이 궁금히 여겨 서울에 올라와 당일 프로그램 확답을 듣고자
아파트 경비실 비상열쇠를 가까스로 얻어내 들어갔다. 1986년 5월1일 오후 8시 45경이었다.
남기수가 문을 열자, 악취가 심하게 났고, 싱크대 옆의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으며,
붙막이옷장 옆에 넥타이로 목을 매단 김용배의 목은 심하게 부패한 채 발견되었다.
방 안에는 이불이 네모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고, 그 옆에 베개가 있었다.
김용배는 맞은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무(無)'자 15개가 주먹만한 크기로 점차 작게 쓴액자 한 폰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베란다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꽹과리가 깨어져 있었다.
이 꽹과리는 김용배가 국립국악원에서 행한 신춘국악대전 지방 공연 때에 늘상 정성스럽게 광약으로 담아두었던 것이였다.
- 김용배의 삶과 예술 - 김헌선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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