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이쯤 인생은 낡은 여행 가방 같지, 가방 밖은 지나 온 항구나
공항의 바코드들이 영광과 추억의 이름표로 닥지닥지 붙어 있고, 가
방 안은 여기저기 녹슬거나 부서져버린 우리 몸의 현주소 같지.
처음 짐을 싸던 단단한 사각 여행가방을 기억해, 그때 여행가방을 꾸
리는 일은 기대보다 두려움이 컸었지, 그 두려움에 가방이 폭발해버
린 듯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아 무심히 몇 개의 일상을
챙겨 갔다가 지쳐서 돌아오지
여행 가방을 가득 채우던 젊은 욕심에서 미련 없이 비우는 지천명의
이 허허로움까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아날로그로 잰 거리겠지, 돌
아오기 위해 여행가방 싸던 세월 역시 오래된 관습으로 낡아버렸으니
다시 여행가방을 꾸린다면, 그땐 인생이라는 낡은 여행가방 하나로
행복할 거야
그 낡은 가방 속 옛 상처 탈탈 털어 비우고, 작은 진공관 라디오, 공책
과 연필, 편지와 그 편지를 닿을 주소
참, 자네에게 줄 시집 한 권 그것만으로 만족하리,
나는 그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시애틀행 비행기에 오르겠네.
그렇다고 서둘러 기다리지 말게, 푸른 지구별의 아름다운 여행자처럼
느릿느릿 즐거워진 나는 스타벅 1호점에 앉아 캡틴 에이허브의 안부
를 묻다가, 잊지 않고 그대에게 카페 아메리카노 한 잔 어떠냐고 전화
할 것이니, 우리 또 그렇게 유쾌하게 조우할 것이니.
<소금 성자>산지니,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