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양절(구월 구구절), 칠월 칠석, 오월 단오, 삼월 삼짇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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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월 3일(음력)삼짇날 .
☛삼사일(三巳日)·중삼(重三)이라고도 한다.
☛음력 3월 3일을 가리키는 말.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의 하나였다. 이날을 ‘강남갔던제비오는날’이라고도 하며, 삼질(삼짇날의 준말), 삼샛날 또는 여자의 날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삼중일(三重日), 삼진일(三辰日), 상사일(上巳日), 상제(上除), 원사일(元巳日), 중삼일(重三日), 답청절(踏靑節), 계음일(禊飮日) 같은 이칭이 있다. 양의 수가 겹치는 삼짇날은 파릇파릇한 풀이 돋고 꽃들이 피어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래서 이날은 봄에 걸맞는 모든 놀이와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이날은 9월 9일에 강남 갔던 제비가 옛집을 찾아와서 추녀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며, 나비도 날아든다. 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산과 들에 푸르고 붉은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삼짇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놀러 가는데, 이를 화류놀이라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화전놀이, 꽃놀이 또는 꽃다림이라고 하며, 대개 늙은이는 늙은이들끼리,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부인들은 부인들끼리 무리를 지어 가서 화전을 비롯한 음식들을 먹고 하루를 즐긴다. 고시조에 “낙양 삼월시에 곳곳이 화류로다. 만성춘광이 그림에 들었세라. 아마도 당우세계(唐虞世界)를 다시 본 듯 하여라.”라고 읊은 것이 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날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기도 한다. 3월을 노래한 사친가(思親歌)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연자(燕子)는 날아들어 옛집을 찾아오고 호접(胡蝶)은 분분하여 구색을 자랑한다. 백마금편(白馬金鞭) 소년들은 화류춘풍(花柳春風)흥을 겨워 쌍을 지어 노닐 적에 산화작작(山花灼灼)난만개(爛漫開)라.
슬프도다 세월이여 애오생지(哀吾生之) 가린하나 탄광음지(嘆光陰之) 여류로다.
슬프도다 우리 부모 답청절(踏靑節)을 모르시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면, 조선 중엽 이후에는 많은 유생들이 삼월 삼짇날에 시제(時祭)를 지냈다고 한다.
☛강남에 간 제비가 돌아와 추녀 밑에 집을 짓는다는 때이다. 삼짇날 무렵이면 날씨도 온화하고 산과 들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쌀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 지지는 꽃전[花煎],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다음 가늘게 썰어 꿀을 타고 잣을 넣어서 먹는 화면(花麵)을 즐긴다.
☛또 꽃을 따라 날아드는 나비를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소원이 이루어질 길조라 하고, 흰나비를 먼저 보면 부모의 상을 당할 흉조라고 한다. 삼짇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물이 흐르듯 소담하고 아름답다 하여 부녀자들은 다투어 머리를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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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단오
☸ 5월 5일은 1년 중에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 우리나라의 명절. 수릿날· 천중절. 이라고 한다.
☛수릿날[戌衣日·水瀨日]·중오절(重午節)·천중절(天中節)·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처음 곧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자는 오(五), 곧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初五日]’라는 뜻이 된다.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여겨왔다.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 때부터이다.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뒤 해마다 굴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이날 밥을 수뢰(水瀨)주 01)에 던져 굴원을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으므로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산에서 자라는 수리치[狗舌草]라는 나물을 뜯어 떡을 한다. 또, 쑥으로도 떡을 해서 먹는데 떡의 둥그런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서 수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수리란, 우리말의 수레[車]인데 높다[高], 위[上], 또는 신(神)이라는 뜻도 있어서 ‘높은 날’, ‘신을 모시는 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창포에 머리감기, 쑥과 익모초 뜯기, 부적 만들어 붙이기,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단오 비녀꽂기 등의 풍속과 함께 그네뛰기·씨름·석전(石戰)·활쏘기 등과 같은 민속놀이도 행해졌다.
☛또한, 궁중에서는 이날 제호탕(醍醐湯)·옥추단(玉樞丹)·애호(艾虎)주 02)·단오부채 등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집단적인 민간행사로는 단오제·단오굿을 하기도 하였다.민간에서는 이날 음식을 장만하여 창포가 무성한 못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이 놀이를 하며, 창포이슬을 받아 화장수로도 사용하고, 창포를 삶아 창포탕(菖蒲湯)을 만들어 그 물로 머리를 감기도 한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윤기가 있으며,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몸에 이롭다 하여 창포 삶은 물을 먹기도 하였다.또한,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를 삼아 머리에 꽂기도 하였으며, 양쪽에 붉게 연지를 바르거나 비녀에 壽(수)·福(복)자를 써서 복을 빌기도 하였다. 붉은 색은 양기를 상징해서 악귀를 쫓는 기능이 있다고 믿어 연지 칠을 하는 것이다. 단오 때가 되면 거리에서 창포를 파는데, 이는 창포탕과 비녀를 만드는 데 소용이 되기 때문이다.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인 단옷날 중에서도 오시(午時)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이므로, 단옷날 오시를 기해서 농가에서는 익모초와 쑥을 뜯는다. 여름철 식욕이 없을 때 익모초 즙은 식욕을 왕성하게 하고 몸을 보호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쑥은 뜯어서 떡을 하기도 하고 또 창포탕에 함께 넣어 삶기도 하는데, 벽사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농가에서는 약쑥을 뜯어 말렸다가 홰를 만들어 들에서 일을 할 때 불을 붙여놓고 담뱃불을 당기는 데 사용하였다.
☛이 때의 약쑥홰는 약쑥 대여섯 개를 한 묶음으로 짚으로 친친 감아 연이어 길이를 2m쯤 되게 만든다. 긴 것은 불을 붙이면 하루 종일 타게 된다. 또, 농가에서는 오시를 기해서 뜯은 약쑥을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재액을 물리치고 벽사에 효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풍으로는 가수(嫁樹)가 있다. 가수는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많은 열매가 열리도록 비는 ‘나무 시집보내기’ 풍습으로 정월 대보름에도 한다. 특히, 단오 무렵이면 대추가 막 열기 시작하는 계절이기에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대추풍년을 기원하니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민속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 등이 있다. 외출이 뜻대로 못하였던 부녀자들이 이날만은 밖에서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되었다.
☛『동국세시기』에는 “항간에서는 남녀들이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 하여 그네가 여성들만의 놀이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또한, 『동국세시기』에 김해풍속에 “청년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석전(石戰)을 하였다.”고도 하며, 금산 직지사(直指寺)에 모여서 하는 씨름이나 남산(南山)·북악산(北嶽山)의 각력(角力)주 03)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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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칠석날
☸ 3. 7월7일은 곧 나반이 천하를 건넌 날이다
☛음력 7월 7일 칠석날은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은하수를 건너 서로 만나는 뜻깊은 날로 기억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칠월칠석을 성스러운 날로 여겼다.
☛도가에서도 역시나 전통적으로 칠석날을 매우 중시여기고 있다
☛칠월칠석의 가장 오래된 근원적인 유래는 무엇일까?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보면 인류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나반'이 '아만'을 만나기 위하여 하늘의 강, 즉 은하수를 건너는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人類之祖 曰那般 初與阿曼 相遇之處 曰阿耳斯庀 夢得天神之敎 而自成婚禮 則九桓之族 皆其後也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시다. 나반께서 아만과 처음 만나신 곳은 아이사비다. 두분이 꿈에 천신(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니 구환족의 모든 족속이 그 후손이다 (삼성기 하)
人類之祖 曰那般 初與阿曼 相偶之處 曰阿耳斯庀 亦稱斯庀麗阿也 日 夢得神啓 而自成婚禮 明水告天而環飮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시다. 나반께서 아만과 처음 만나신 곳을 아이사비라 부르고 또 사비려야라 부르기도 한다. 하루는 꿈에 천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고, 청수를 떠놓고 하늘에 고하신 다음 돌려가며 드셨다. (태백일사 삼신제오본기)
☛7월7일은 곧 나반이 천하를 건넌 날이다, 이 날 천신께서 용왕에게 명하여 하백을 용궁으로 불러 그로 하여금 사해의 모든 신을 주재하게 하셨다. 천하는 일설에 천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북해이다. (태백일사 삼신제오본기)
☛후손들이 그 날을 기려 기념일로 정하여 축제를 하다보니 후대로 오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로 변해간 것이다. 음력 7월 7일이 되면 견우와 직녀의 만남, 나반와 아만이 천하강(은하수)을 건너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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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을 가리키는 날로 날짜와 달의 숫자가 같은 중일(重日) 명절(名節)의 하나. 중일 명절은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같이 홀수 곧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에만 해당하므로 이날들이 모두 중양(重陽)이지만 특히 9월 9일을 가리켜 중양이라고 하며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또 ‘귈’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음력 삼월 삼짇날 강남에서 온 제비가 이때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가을 하늘 높이 떠나가는 철새를 보며 한해의 수확을 마무리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중양절은 중국에서 유래한 명절로, 그곳에서도 매년 음력 9월 9일에 행하는 한족의 전통 절일이다. 중양절은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당송(唐宋) 대에는 추석보다 더 큰 명절로 지켜졌다.
등고회(登高會)는 중양절의 중요한 행사인데 이날 우산(牛山)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제나라 경공(景公)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내려오는 전설에 동한(東漢) 때 앞날을 잘 맞추는 비장방(費長房)이라는 도인(道人)이 어느 날 학생인 항경[恒景, 桓景]에게 “자네 집은 9월 9일에 큰 난리를 만나게 될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들과 함께 수유(茱萸)를 담은 배낭을 메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면 재난을 면할 수 있네.”라고 하였다. 항경이 이날 그가 시킨 대로 가족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집에 돌아오자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고 한다. 중양절에 수유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는 등고 풍속은 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유 주머니를 차는 것은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국화주를 마시는 것은 노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기능적인 해석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이날 행해졌으며, 특히 고려 때는 국가적인 향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중삼 곧 3월 3일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고 중구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 늙은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추석에서 중구로 옮겼으며, 또 중양절에 특별히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이날을 기리기도 하였다.
☛중양절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지는데, 국가에서는 고려 이래로 정조(正朝),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임금이 참석하는 제사를 올렸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省墓)를 하였다. 또 양(陽)이 가득한 날이라고 하여 수유 주머니를 차고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등고의 풍속이 있었고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장수(長壽)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거나 혹은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 또는 황화범주(黃花泛酒),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시주(詩酒)의 행사를 가졌다. 서울 사람들은 이날 남산과 북악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등고하는 풍습을 따른 것이다.
중양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 성묘, 등고 또는 각종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관리들에게 하루의 휴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였지만 또한 명절이었으므로 이날은 형(刑) 집행을 금하는 금형(禁刑)의 날이기도 하였다.
한편 중양절은 농촌이 한창 바빠지는 때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그해 논농사를 결산하는 추수를 하고, 여자들은 마늘을 심거나 고구마를 수확한다. 퇴비만들기, 논물 빼기, 논 피사리 등은 남녀 공동작업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목화도 따야 하고, 또 콩, 팥, 조, 수수, 무, 배추 같은 밭작물의 파종과 수확이 겹친다. 그러므로 농촌에서는 중양절이라고 하여 특별한 행사를 벌이기보다는 평상 때와 똑같이 보내는 곳이 더 많다.
그러나 양수가 겹친 길일(吉日)이므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는 이날을 즐겼다. 등고 풍속이 그러하고 국화잎을 따서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국화전을 만들어 먹는 것도 그 예가 된다.
추석 때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집안에서는 뒤늦게 조상에게 천신(薦新)을 한다. 떡을 하고 집안의 으뜸신인 성주신에게 밥을 올려 차례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전남 고흥의 한 지역에서는 이때 시제(時祭)를 지내는데, 이를 ‘귈제’라고 한다.
과거에는 각 마을마다 또는 두세 개 마을에 한 명씩 동네 단골무당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연말에 이장에게 이세(里稅)를 내듯이 중양절이 되면 이들에게 시주를 하는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 탈이 있을 때 단골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중양절이 되면 나라에서 태학(太學)의 학생들에게 겨울옷을 하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중양절 무렵이 겨울을 준비하는 적절한 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구절의 국화술은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이날 국화밭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흰옷을 정갈하게 입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도연명의 친구가 보낸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연명은 국화꽃과 함께 온종일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도 중양절에 술을 마시며 도연명의 운치를 깨달았는지 “우연히 울 밑의 국화를 대하니 낯이 붉어지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쏘아보는구나.”라는 글귀를 남겼다. 두목(杜牧)이 남긴 취미(翠微)의 시구에도 이날 좋은 안주와 술을 마련해놓고 친구들을 불러서 실솔시(蟋蟀詩)를 노래하고 무황계(無荒戒)를 익혔다고 한다.
의례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날 중구연(重九宴) 또는 중양연(重陽宴)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다. 국가가 규례를 정하여 내외의 신하들과 송나라, 탐라(耽羅), 흑수(黑水)의 외객들까지 축하연에 초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임금이 사신(使臣)들에게 특별히 주연을 베풀었다. 또 탁주(濁酒)와 풍악을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에게 내리고 보제원(普濟院)에 모여서 연회하게 하였다.
선조(宣祖) 때 예조에서 제향 절차에 대해 아뢰면서 중양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속절(俗節)로 열거되어 있지 않지만, 이날 시식(時食)으로써 천신하는 것이 고례(古禮)이므로 속절에 해당하는 제사가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은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정조, 한식, 단오, 중추와 함께 중양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에 들러 천식(薦食)하고 이어 묘 앞에서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사가(私家)에서는 중양절은 등고 외에 간혹 간단한 천주과지례(薦酒果之禮) 곧 천신례가 있을 뿐 묘제를 행하는 한식에 비하면 속절로서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 삼짇날과 중양일이 함께 또는 둘 중의 하나가 원래 중월(仲月)에 복일(卜日)하여 행하던 사시제(四時祭)의 한 축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조선 전기까지는 시제(時祭)보다 기제(忌祭)를 중요하게 여기다가 중엽에 이르러 사대부들이 시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일년 4회의 시제가 부담되었으므로 이를 춘추(春秋) 2회로 줄여 봄에는 삼짇날에, 가을에는 중양절에 지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중양절의 시제는 조선 후기 이후 특히 영남지방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신 집안들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 유교 제례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4대가 지나면 사당에 모시던 신주를 묘에 묻게 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부조(不祧), 즉 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있어야 사당에 신주를 두고 계속 기제사로 모실 수 있다. 이 부조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각별히 중일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이나 구월 중양절에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중양 때가 되어야 햇곡을 마련할 수 있었으므로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드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영남지방에는 중양절에 불천위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집안들이 간혹 있지만 날이 갈수록 더 귀해지고 있다.
절식
중양절은 국화가 만발할 때이므로 국화주, 국화전을 만들어 먹는다. 국화주는 꽃을 따서 술 한 말에 꽃 두 되 꼴로 베주머니에 넣어 술독에 담아 뚜껑을 덮어둔다. 약주에 국화꽃을 띄워 국화주를 즐길 수도 있다. 화전, 화채, 술에 모두 쓰이는 국화는 재래종인 감국(甘鞠)이어야 향기도 좋고 오랫동안 싱싱하다.
국화전은 노란 국화꽃잎을 따서 국화 찹쌀떡을 만드는데, 그 방법은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으며, 이름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봄의 진달래 화전은 율무를 많이 쓰는 반면 가을의 국화전은 찹쌀가루를 많이 쓴다. 중국 양나라 사람 오균(吳均)이 지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 “한나라 무제(武帝) 때 궁녀 가패란(賈佩蘭)이 9일에 이(餌) 떡을 먹었다.”라고 했는데, 이(餌)란 경단[餻]을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도시 사람들이 중구(重九)에 가루로 떡을 쪄서 서로 선물한다.”라고 했다. 잘게 썬 배와 유자(柚子)와 석류(石榴)와 잣 등을 꿀물에 탄 것을 화채(花菜)라고 하는데, 이것들도 모두 중양절 음식으로 제사에 쓴다.
☛추석이 햇곡으로 제사 지내기 이른 계절이 되어감에 따라 추수가 마무리되는 중양절에 중구차례를 지내는 등 논농사의 발전에 따라 조상을 위하는 날의 의미를 더해갔다. 조선시대에 이날 기로연을 베풀었다는 사실은 장수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는 물론 민간에서도 이날을 경로(敬老)의 날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張籌根. 韓國의 歲時風俗. 螢雪出版社, 1984년
鄭勝謨. 歲時關聯 記錄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歲時風俗의 變化, 2001년
高占祥 主編. 中國民族節日大全. 知識出版社, 1993년
擊蒙要訣, 京都雜志, 高麗史, 國朝五禮儀, 東京夢華錄, 東國歲時記, 黙齋日記, 奉先雜儀, 西京雜記, 宣祖實錄, 成宗實錄, 世祖實錄, 世宗實錄, 洌陽歲時記朝鮮常識-風俗 編,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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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조상은 나반이라 한다.
☸☛太白逸史·제1 : 삼신오제 본기
人類之祖 曰那般. 初與阿曼 相遇之處 曰阿耳斯它. 亦稱 斯它麗阿也. 夢得信啓 而 自成婚禮 明水告天 而 環飮 山南朱雀來喜 水北神龜呈瑞 谷西白虎守嵎 溪東蒼龍升空 中有黃熊居之. 天海 金岳 三危 太白 本屬九桓 而 蓋九皇 六十四民 皆其後也. 然一山一水 各爲一國 群女群男 亦相分境 終境 而 殊國. 別積久 創世條序 後無得究也. 久而後 有帝桓因者出 爲國人 所愛戴 曰安巴堅 亦稱 居發桓也. 蓋所謂 安巴堅 乃繼天 立父之名也. 所謂 居發桓 天地人 定一之號也. 自是 桓因兄弟九人 分國而治 是爲九皇 六十四民也. 竊想 三神生天造物 桓因敎人立義 自是 子孫相傳 玄妙得道 光明理世 旣有 天地人 三極 大圓日之爲 庶物原 天下九桓之禮樂 豈不在於三神 古祭之俗乎.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라 한다. 아만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 한다. 또는 사타려아 라고도 한다.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성혼의 예를 행할 적에 井華水를 떠놓고 하늘에 고하였으며 돌려가며 술을 마셨는데 산남의 주작이 날아와 기뻐하였고 산북의 신구가 상서로운 것을 나타내었고 곡서의 백호가 산모퉁이를 지켰고 계동의 창룡이 하늘로 승천하였고 가운데 황웅이 나타나 살았다. 천해와 금악과 삼위와 태백은 본시 구한에 속하였으니 대개 9황의 64민은 모두가 그 후예이다.
그러나 산과 물을 끼고 각각 나라 하나씩을 이루었으니 남녀의 무리 또한 서로 경계를 나누어 국경을 따라 다른 나라가 되었다. 달라진 세월이 오래 쌓이니 창세 때의 줄기와 길은 뒤에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인이 나타나 다스렸는데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추대되었으니 안파견이라고 하며 또는 거발한이라고도 하였다. 대개 이른바 안파견은 곧 하늘을 계승하여 세움 받은 아버지란 뜻의 이름이다. 이른바 거발한은 천·지·인을 하나로 묶어 정하였다는 뜻의 이름이다. 이때로부터 한인의 형제 아홉 명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분들이 9황 64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삼신은 하늘에서 태어나 만물을 창조하셨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쳐 의를 바로세우셨으니 이때로부터 자손은 서로 전하여 이어졌고 현묘한 도를 깨달아 빛처럼 밝게 세상을 다스렸다. 이미 천·지·인의 3극이 있었고 대원일은 만물의 근원이 되었으니 천하 9한의 예악이 어찌 삼신과 고제의 풍속에 들어있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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