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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서단(해맞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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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소탐방 스크랩 [관광명소] 죽장, 청정 자연 속 전통을 이어가는 참살이의 이상향
曉天 추천 0 조회 131 10.10.10 11: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글을 시작하면서


포항 사람들에게 죽장, 하면 어떤 이미지로 떠오를까? 아마도 죽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죽장에 삿갓 쓰고~"로 시작되는 유행가 속의 대지팡이[竹杖]가 먼저 생각날 거고, 몇 번 가본 사람들이라면 사방이 온통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이 떠오를 거다. 그보다 좀 아는 사람이라면 경상북도수목원과 하옥계곡을 가진 물 좋고 산 좋은 청정 고장, 그리고 고랭지 채소와 약초, 고로쇠 수액을 떠올릴 것이다. 역사와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입암서원(立巖書院)과 유향(儒鄕), 산남의진(山南義陣)과 충렬의 고장, 지게상여놀이와 전통 민속을 연관 지을 것이다.

[사진] 죽장의 상징인 입암

 

죽장은 20세기 들어와 1995년까지 영일군, 그 이후엔 포항시 북구에 속한 1개 면이지만, 그 전엔 영천이나 경주의 관할하에 있었던 곳이다. 신라 때 장진현(長鎭縣)으로 임고군(현 영천)의 영현이었다. 고려 태조 때 죽장이부곡(竹長而部曲)이 되고, 조선 초에 죽장현(竹長縣)으로 승격된 후 경주부의 속해 있었다. 1789년에 15개 리동을 관할하는 죽장면이 되었고, 1906년에 죽남면(면소재지 : 입암리)과 죽북면(면소재지 : 합덕리)으로 갈라져 청하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 영일군에 편입되고, 1934년에 두 면을 통합하여 오늘날의 죽장면(면소재지 : 입암리)이 되었다.

지금은 입암리가 죽장의 중심지이지만, 19세기까지는 현내리가 죽장의 중심이었다. 그러기에 옛날 이 지역을 관할하던 경상도관찰사나 경주부윤 등 지방 관장들의 선정비가 현내리에 있다. 입암리가 번창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권문세가인 안동권씨 일족이 영천에서 이주해 와 집성촌을 이루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같은 당대의 유현(儒賢)들이 입암에 머물면서 유교문화를 일구었고, 자연스레 경제적, 문화적인 중심지가 된 것이다.

죽장은 한 개의 면이지만, 면 치고는 그 면적이 아주 넓다. 236㎢나 되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면적을 지닌 면인지도 모른다. 8개 읍면을 거느린 고령군의 면적이 384㎢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크기가 짐작이 간다. 하지만 2009년 9월말 현재 겨우 2,9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음을 감안하면 땅 크기에 비해 인구밀도는 아주 낮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산이 많아서 그렇다. 사실 죽장은 사방 어디를 봐도 산으로 둘러싸인, 90% 이상이 임야로 된 곳이다.

산간오지라는 점은 예로부터 전란 때 요새지로, 또는 피란처로 주목을 받았음을 말해 주고,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사는 백성들의 삶이 곤궁했으리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외부 문명의 간섭을 덜 받기에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죽장이 갖고 있는 그러한 자연 조건은 오랜 세월 속에서 죽장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생활형편이 나아진 21세기의 죽장은 과거의 '산간오지'라는 단점이 '물 좋고 산 좋은' 시민의 휴식 공간 또는 모두가 꿈꾸는 '웰빙'이라는 이미지로 전환되고 있다. 요즘 기계에서 한팃재를 넘어 죽장에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는 '웰빙 죽장'이란 간판이 이를 대변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 시가문학의 산실, 산남의진의 발상지 등 문학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죽장, 지게상여놀이의 전승지, 가시내솥의 명산지 등에서 풍기는 민속문화적 보고로서의 죽장, '포항시민의 휴식처' 내지 '참살이의 이상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죽장 등 이 지역이 풍기는 다양한 모습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입암28경, 조선 시가문학의 산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이상향으로 친다. 포항에서 가장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죽장이다. 그 중에서도 입암서원 주변이다. 입암서원 일대는 단순히 명승지 차원을 넘어 조선 중기 이후 명사들이 이 곳을 찾아 학문과 문학을 꽃피운 유서 깊은 곳이다.

입암리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들어온 동봉(東峰) 권극립(權克立, 1558-1611)이 솔안마을[松內洞]에 정착하면서 개척한 마을이다. 후에 그의 증손자대에 와서 아래쪽에 큰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 때 개간한 들을 경운야(耕雲野)라 했다. 지금도 주민의 태반이 안동권씨인데 포항의 대표적인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유교적 전통이 강하며, 고색창연한 고택이 상당수 남아 있다.

조선 중엽 이후 입암에는 저명한 문사와 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인조 때의 대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탁립암(卓立岩), 기예암(起豫岩), 피세대(避世台), 초은동(招隱洞), 경심대(鏡心台), 계구대(戒懼台), 수어연(數漁淵), 토월봉(吐月峯), 상두석(象斗石), 답태교(踏苔橋), 세이담(洗耳潭), 화리대(畵裡台), 경운야(耕雲野), 정운령(停雲嶺), 함휘령(含輝嶺), 산지령(産芝嶺), 채약동(採藥洞), 조월탄(釣月灘), 구인봉(九인峯), 욕학담(浴鶴潭), 소로잠(小魯岑), 물멱정(勿冪井), 심진동(尋眞洞), 야연림(惹烟林), 상암대(尙巖台), 향옥교(響玉橋), 합류대(合流臺), 격진령(隔塵嶺) 등 28곳의 승경을 '입암28경'이라 명명하고, 이를 노래한 다양한 시문을 남겼다.

입암28경의 제1경인 탁립암 옆에 입암서원이 있다. 입암서원(立巖書院)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대학자로 만년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장현광 외 지방유림인 권극립(權克立), 정사상(鄭四象), 정사진(鄭四震), 손우남(孫宇男)을 배향하고 있기도 하다.

[사진] 여헌 장현광 선생 

호는 여헌(旅軒),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인 장현광은 효종8년(1595) 보은 현감을 시작으로 20년 남짓 관직생활을 한 후 이조참판, 대사헌, 공조판서, 지중추부사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덕은 도의 최고 가치임을 주장하고,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이이(李珥)의 설에 찬동했는데, 높은 학문의 경지로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등 전국 7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거유(巨儒) 장현광을 비롯한 지방의 명망 있는 유학자, 선생을 따라 이곳에 와 명작을 남긴 당대 최고의 문장가 박인로(朴仁老) 등 쟁쟁한 학자들의 정신이 배어 있는 입암서원은, 그러나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8)에 의해 강당이 훼철되었으며, 1907년 산남의진(山南義陣) 입암전투로 묘우(墓宇)가 불탔다. 6.25전쟁 때는 이 지역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다보니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사진] 입암서원 

현재 경내에는 특이한 양식의 팔작지붕인 강당과 묘우가 있는데, 묘우에는 1633년 김응조(金應祖)가 그린 선생의 영정과 철쭉나무 지팡이, 길이 185cm나 되는 마상도(馬上刀)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입암28경이 문학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92년에 쓴 여헌의 시 <입암십삼영(立巖十三詠)>에서부터다. 여헌은 입암에 들어온 뒤 입암의 풍경을 즐기면서, 각 사물에 대한 이름을 짓고 설명과 감상을 덧붙였는데, 이렇게 명명한 경물들에 대해 다양한 형식의 글로 입암을 노래했다. 그의 산문작품에는 <입암기(立巖記)>와 <입암정사기(立巖精舍記)> 등이 있다.

[사진] 노계시비 

여헌을 만나기 위해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가 이 곳을 자주 드나들었고, 입암의 승경을 소재로 적지 않은 시가를 남겼다. 노계의 시가로는 연시조인 <입암29곡>과 가사인 <입암별곡(立巖別曲)>이 있는데, 시조는 현재 29수가 전해지고 있고, <입암별곡>은 필사본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노계는 무관으로 은퇴한 뒤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와 여헌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입암29곡>의 29수 가운데 입암과 관련된 것이 10수이며, 이 연시조에 등장하는 경치는 28경 가운데 19종이고, 28경 이외에 <정사(精舍)>가 한 수이다. 노계는 이 고장에 머물던 여헌과의 교분이 각별하여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입암의 풍광에 취하여 지은 것이 <입암29곡>이다.


無情히 선는 바회 有情하야 보이나다

最靈한 吾人도 直立不倚 어렵거늘

만고에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나다.


<입암29곡> 중 첫 번째 시조인 이 작품은 입암28경 중 제1경인 탁립암(卓立巖)을 노래한 시다. 탁립암은 입암리 솔안마을[松內洞] 입구 개울가에 서 있는 거대한 바위다. 입암(立巖)은 이 지역 지명의 근원이며 모든 경치의 중심이다. 위치도 이십팔경의 한가운데 있으며, 크기와 빼어남이 독특하여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탁립암은 입암의 특별함을 강조한 명칭이다.

노계는 <입암29곡> 연시조의 10수를 동원하여 이 입암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 “만고애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적이 없다”라든가, “나도 이 바회면 대장부?가노라”라는 표현에서는 입암의 직립불의(直立不倚)함에 대한 찬양을 보여주었다. 또한 노계는 바위에게 묻고 바위가 답하는 형식의 시조를 통해 바위의 교훈적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노계의 태도는 입암을 단순히 바위로 파악하지 않고 성리학적 가치관의 상징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입암서원 앞 개울가에 2001년에 세운 노계 박인로의 시비가 있다.


산남의진(山南義陣) 발상지


죽장은 한말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위기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일제침략자와 맞서 싸운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고장이다. 소위 산남의진발상지(山南義陣發祥地)이다. 입암리 죽장고등학교 뒷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산남의진발상기념비가 역사적 사실을 묵묵히 대변하고 있다.

산남의진이란 영천 자양면 출신의 정용기에 의해 처음 결성된 후 흥해 출신의 최세윤으로 이어지면서 포항, 즉 옛 영일군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던 구한말 제2단계 의병 운동을 대표하는 의병 조직이다. 산남(山南)이라 함은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 지방을 이르고, 의진(義陣)이라 함은 '의병 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기개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은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는 시국상황이 전개되던 무렵에 당시 시찰사 정환직이 고종 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를 아는가?(華泉之水知呼朕望)"라는 밀지(密旨)를 받게 되었다. 이는 제나라 환공(桓公)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사진] 산남의진발상기념비 

이에 정환직은 사직한 후 아들 정용기와 함께 논의한 끝에, 아버지 정환직은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 가산을 정리하여 각종 무기를 마련하고, 특히 인천의 중국 상인들을 통하여 신식무기를 몰래 들여와 이를 석 달 후까지 강릉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아들 정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규합, 강릉으로 북상하되, 대구, 대전을 거치게 되면 반드시 왜병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고, 도중에 이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는 영덕의 신돌석 의진과도 합세하기로 했다.

이런 작전 계획들을 수립한 후 정용기는 즉시 영천으로 내려와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친구인 이한구, 정순기 등과 함께 인근 각처의 선비와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니, 순식간에 3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 무렵이 바로 광무 10년(1906) 2월이었는데, 대장에는 정용기가 추대되고, 군호를 산남의진으로 칭했다.

1907년 8월 영덕군 달산면 팔각산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과 산남의진은 격전이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사흘간 계속하다가 일단 후퇴한 산남의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겨울 채비를 한 후 9월 10일까지 재집결토록 하였다.

마침 영천 수비대 소속의 일본군들이 죽장 창리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용기 대장은 이세기, 우재용, 김일언 등 세 장령에게 각기 군사를 나누어 매복한 후 새벽에 적을 급습키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작전에 옮기기 위해 광천(廣川)으로 가던 이세기의 의병들은 북구 죽장면 입암리 주막에서 소수의 일본군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탐지하고, 일본군이 극소수라는 판단 하에 주막을 덮쳤으나, 주변에 매복해 있던 많은 무리의 적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다른 매복지로 가고 있던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이 지원에 나섰으나 예상외로 많은 일본군 병력과 5시간의 접전 끝에 산남의진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1907년 9월 1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를 위시하여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40여 명의 의병이 일시에 순국하였으니, 이 전투를 산남의진 입암지변(立巖之變)이라 하고, 흔히 임암전투라 부른다. 이 날 전투로 산남의진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의 가옥 수십 동이 불타고 양민 수십 명이 학살당하는 등 패전의 참화가 극심하였다. 죽장에 이 날을 전후하여 제사 든 집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영천시 자양면 검단리 본가에 머물러 있던 정환직이 이튿날 비보를 접하고 입암의 격전지로 달려가 시체들을 수습한 후 의진을 재결성하여 그해 9월 27일 정환직이 2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곳곳에서 일본군의 주둔지를 급습해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니, 포항지역의 모든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산남의진을 크게 두려워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군량미에 날씨마저 추워진데다 산남의진의 기세에 놀란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정환직 대장은 일단 의진을 해산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뒤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청하에 잠입하였다. 하지만 내연산 깊숙한 뿔밭에서 정환직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영천 감옥에 수감된 지 얼마 안 되어 두 부하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사진] 산남의진 대장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묘(영천 충효리) 

2대 정환직 대장의 순국 이후 산남의진의 7백여 병력은 정환직의 조카이자 흥해 사람이었던 정순기의 지휘 아래 청송군 보현산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그 후 정순기는 봄이 오리를 기다렸다가 평소 정환직과 가까이 지내던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 출신 최세윤에게 사람을 보내 산남의진의 지휘를 간곡히 부탁하였고, 최세윤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1908년 3월 5일, 최세윤이 제3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 대장은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게릴라 전술을 감행하여 흥해, 영양, 진보, 안동 등에서 크고 작은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무렵에 와서 포항지역이 산남의진의 주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하지만 1908년 7월, 옛 장기 내남면(현 경주시 양북면)에서 최세윤 대장이 체포된다. 최세윤 대장은 대구로 압송되어 3년에 걸친 고문과 회유를 견뎌내고, 1911년 11월 10년형을 언도받는다. 이후 최세윤 대장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8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16년 8월 9일, 11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최세윤 대장을 잃으면서 산남의진은 구심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 땅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성스러운 뜻을 품은 지 4년여 만인 1909년, 그 의로운 횃불을 민족의 가슴 속에 밝혀 놓은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운구 풍습을 흉내낸 지게상여놀이


죽장은 산간오지인 관계로 외부 문명의 간섭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이 말은 전통문화를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죽장을, 아니 포항을 대표하는 민속놀이인 지게상여놀이가 그러하다.

지게상여놀이란 지게로 상여를 만들어 장례 때의 운구(運柩) 풍습을 흉내내는 놀이를 뜻한다.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원에서 전승돼 온 지게상여놀이는 원래 '지게행상놀이'라 불러 왔으나, 1986년 (구)영일군에서 개최한 일월문화제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행상'이란 말보다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말인 '상여'란 말을 넣어 '지게상여놀이'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 가난한 산간 지방인 이 지역에서는 사람을 산에다 매장할 때 관을 지게로 져서 옮겼다. 그러나 한 사람이 무거운 관을 지고 높은 산에 오른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개의 지게를 얽어매고, 그 위에 관을 얹어 여러 사람이 함께 메고 가는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지게행상'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게행상은 그 후 규격화된 목도행상이 일반화되면서 운구 도구로서의 기능이 소멸하게 되었다.

농번기가 끝나면 풀을 베거나 나무를 하는 일이 하루 일과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이 지역 초동들은, 예로부터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는데, 어느 날은 지게로 상여를 만들어 상여 메는 흉내를 내 보았다. 초상이 나지도 않았는데 산에서 상여소리가 나자, 마을 어른들이 불길하다며 말리기도 하였으나, 초동들은 재미가 있어 계속하게 되었고, 또 이 놀이를 하면서부터 마을이 흥하게 되자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사진] 지게상여놀이 

지게상여놀이는 일제말기에 접어들면서 중단돼 버렸다. 죽장지게상여놀이가 발굴, 복원하게 된 계기는 1986년 10월 영일군에서 개최한 일월문화제 민속경연대회다. 이 대회에서 당시 죽장면 총무계장인 손봉익 씨가 과거 죽장면 산간지방에서 전해져 오던 짱치기, 지게목발노래, 어사령, 지게상여놀이 등을 묶어 ‘지게상여놀이’란 이름으로 출전시켜 장려상을 수상하였고, 이로써 지게상여놀이가 알려지게 되었다.

지게상여놀이가 죽장면 지역에서만 전승돼 온 것은 이 곳이 산간 오지여서 예로부터 지게 문화가 발달돼 있었던 탓도 있지만, 경제적 이유 때문에 원시적인 운구 방법인 지게 상여로부터 개량된 운구 형태인 목도 행상으로의 이행이 늦은 데 원인이 있다.

죽장지게상여놀이는 1980년대 중반 놀이의 복원 당시 죽장면 내 4H클럽 회원들을 중심으로 기능보유자인 입암리 정만희(상여소리), 두마리 이무용(어사령), 가사리 최상대(지게목발노래)의 지도를 받아 전승을 해 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 죽장고등학교에서 포항시의 지원을 받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승노력을 해 왔는데, 이 때부터 짱치기나 지게목발노래, 어사령이 빠진 순수 지게상여놀이만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능을 익힌 상당수 학생들이 졸업으로 학교를 떠나는 문제가 있어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죽장면 농업경영인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죽장지게상여놀이보존회에서 전승노력을 펼치고 있는데, 놀이 방법은 이렇다.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다가 다시 따분함을 느끼면 무리 중 연장자에 해당하는 이가 "지게행상 하고 가자." 하면, 일제히 "예" 하고는, 지게를 벗고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시늉을 한다. 사람이 죽었다는 표시이기도 하고, 이웃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에는 신을 벗어 쥐거나 막대기를 들고 땅을 치며 애통해 하는 시늉을 한다.

한참 이러다가는 일어서서 지게를 모아 상여를 만든다. 지게상여를 만드는 데는 10개 정도가 필요하다. 우선 8개를 2개씩 지게뿔이 서로 어긋나게 세운 다음 윗세장과 지게뿔을 끈으로 단단히 묶는다.

이렇게 묶은 지게를 최대한 벌린 다음 (150°정도) 4쌍을 나란히 놓고 지게 작대기를 지게뿔이 연결된 부분 위아래에 가로로 대고 다시 묶고, 목발은 목발끼리 묶는다. 이렇게 한 다음, 연결된 지게를 땅에 놓고 윗부분 중앙이 나머지 지게 2개를 종으로 마주 보게 엎어놓고 묶는다. 이 두 개의 지게는 관을 상징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관을 상징하는 지게 중 앞쪽에 있는 지게의 고다리에 흰 수건을 하나 묶어 단다. 흰 수건은 행상보를 상징한다.

상여가 완성되면 상두꾼 8명이 지게 다리 사이에 들어가 목발을 손으로 잡는다. 그리고는 이미 정해진 앞소리꾼이 "너화"하면 상여를 들어 어깨에 둘러멘다. 앞소리꾼은 상여를 메지는 않으나 지게상여의 앞부분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는 막대기로 상여의 앞부분을 일정한 박자에 맞춰 두들기면서 상여소리를 시작한다.

상두꾼과 앞소리꾼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주가 된다. 지게 작대기를 지팡이로 삼아 고개를 숙인 채 곡을 하며 상여 행렬을 따르는 것이다. 상두꾼과 상주의 복장은 칡넝쿨을 머리에 두른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것은 과거 이 지역의 장례 의식 때 상주와 상두꾼이 칡넝쿨을 넣은 굴건을 썼던 데에 유래한다고 한다.

지게상여놀이는 죽장고로쇠축제나 일월문화제 행사 때 볼 수 있다.


명품 '가시내솥'의 산지, 가사리


가사리는 가사령(佳士嶺)에서 시작된 가사천(佳士川)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가사(佳士), 웃각단, 갈밭, 독골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가사리(佳士里)라 하였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솥, 그릇 등을 만들던, 지금으로 치면 공업단지가 있던 마을이다.

‘가사’라는 지명은 옛날 이 마을에서 생산하던 ‘가시내솥’에서 연유한다. 이 마을은 예부터 솥의 명산지로 이 마을에서 생산되던 솥을 특별히 ‘가시내솥’이라 불렀다. ‘가시내솥’은 가시내, 즉 여자들이 좋아하는 솥이란 뜻이다. 얼핏 ‘아름다운 선비가 사는 마을’이란 뜻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리(佳士里)란 이름은 근세 이후 한자의 음을 빌려서 지은 것이다. 큰가매골, 작은가매골과 같은 지명이 있어 옛날 가마[窯]가 있었던 곳임을 말해 준다.

독골[陶谷]이란 지명도 있다. 가사에서 남쪽 기북면 오덕리 넘어가는 벼슬재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독(항아리)을 굽던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 마을 곳곳에 자기 파편이 흩어져 있다.

처음 이 마을에서 솥을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능성구씨(陵城具氏)였으며, 후에 월성손씨(月城孫氏)와 경주배씨(慶州裵氏)가 만들어 오다가, 지금은 명맥이 끊어졌다. 이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찰흙으로 '떡띵이'라 하는 형을 뜨고, 이것이 마르면 소나무의 표피인 솔틉을 구워 가루로 만들어 형의 안팎에 문지르고, 다시 일정한 공간을 두고서 형을 짜 맞추어 움직이지 않도록 흙을 바른 후, 20개 가량을 가마에 넣어 줄지어 모로 세우고, 24시간가량 장작불을 때면 형이 벌겋게 달게 되는데, 이 때 형을 엎어놓고 배꼽 부분에 미리 내어놓은 구멍으로 도가니에서 끓인 쇳물을 붓는 방식으로 솥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수한 품질만큼이나 값도 비싸서 솥 한 쟁기가 소 한 마리 또는 논 두 마지기 값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시내솥은 크기에 따라 서말찌, 두말찌, 한말찌반 등 세 가지가 있는데, 잘 깨어지지 않고, 특히 밥맛과 숭늉맛이 뛰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가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 몇 가구의 부엌에서나 겨우 찾아 볼 수 있는 가시내솥은, 이미 광복 전에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아직 옛 가시내솥의 명성을 대변해 주는 속담 한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서울 기생이 참나무 장작불로 가시내 서말찌솥에 밥해 먹고, 고방정자에서 노래 한번 해 봤으면 한다.” 서울 사는 기생도 가시내솥을 좋아해서 참나무 장작불을 때서 밥해 먹고, 이 마을 앞에 있는 고방정자에서 노래 한 번 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마을 80대 노인들에게서 과거 쇠를 녹여 솥을 구울 때 불렀다는 노동요 <불미소리(풀무노래)>를 들을 수 있다.


호호 불미야

      호호 불미야

이 불미가 누 불미고

      호호 불미야

경상도 도불미라

      호호 불미야

이 쇠가 어디 쇠고

      호호 불미야

전라도 자랑쇠

      호호 불미야

이 불 노가 뭐가 되노

      호호 불미야

서말찌 두말찌 되는 쇠라

      호호 불미야


이 노래는 솥을 만들 때 불미꾼(풀무꾼)들이 불미(풀무 :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를 당기면서 불렀다. 대불미는 8명, 소불미는 4명이 당겼는데, 대불미는 길이가 30자, 폭이 1자 2치 규모다. 솥의 원료인 쇠는 전라도에서 가져왔다 한다.

가사리엔 예부터 흔히 ‘고방정자’라 부르는 명소가 있었다. 고반정(高槃亭)은 마을 앞 세 갈래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삼합소(三合沼) 위쪽 길가에 있던 둘레 6m 가량 되는 거대한 느티나무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개울 건너편에 있는 다른 느티나무 한 그루와 가지가 이어져 아이들은 다람쥐처럼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놀았던 추억 속의 나무다.

고방정자가 이루는 그늘은 그 서늘함과 풍광이 가히 일품이어서 남녀노소의 휴식처가 되어 왔으며, 동네 사람들은 여기서 여러 가지 놀이문화를 꽃피웠다. 지금도 옛 고방정자의 풍류를 말해 주는 속담 둘이 있다. “고방정자 3년이면 벙어리도 말 배운다.” “고방정자 3년이면 장승도 걸음 걷는다.”

이 마을 사람들은 풍류를 즐겼지만, 다른 어느 마을사람보다도 힘이 세고 일도 잘 했기에 “가시내 초군 일초군, 가시내 초군 몰초군(가시내 초군은 일등 초군이며, 가시내 사람들은 모두가 다 초군이라는 뜻)”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포항시민의 휴식처


죽장은 포항 시민의 휴식처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곳곳에 수려한 계곡이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인 곳이 자호천 계곡과 하옥 계곡이다.

자호천은 죽장면 가사령에서 발원한 물과 두마리 면봉산에서 발원된 오염되지 않은 1급수가 합류대에서 만나 제법 큰 계류를 이루면서 일광리, 지동리를 거쳐 영천댐으로 흘러든다. 10여㎞나 되는 이 구간은 수직 암벽과 소(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는데, 피서철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옥(下玉)은 포항시에 속하지만 포항서 울진 가는 시간만큼이나 걸리는 오지 중의 오지다. 이곳은 적어도 아직은 산업화니, 개발이니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논과 밭이 펼쳐지는 여느 농촌과도 다르다. 오직 높고 푸른 산과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있을 뿐이다. 좁고 비포장 상태인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름철엔 인파로 붐빈다.

성법령(性法嶺)에서 발원하여 상옥리(上玉里)를 거쳐 내려오는 물과 삿갓봉에서 발원된 물이 합쳐져 흐르다가 둔세동(遁世洞) 협곡에서 한 번 소용돌이친 후, 덕골에서 내려오는 물과 마두교(馬頭橋)에서 만나 이루는 계곡이 하옥계곡이다. 둔세동은 이름 그대로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곳’이란 뜻이데, 계곡물이 기암괴석 사이로 폭포를 이루면서 용트림하듯 흘러내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예로부터 경주 사람들이 경승지(景勝地)를 꼽을 때 ‘남반구 북옥계(南盤龜北玉溪 : 남쪽은 울산 반구요, 북쪽은 옥계)’라 했다는데, 여기서 영덕군 달산면 옥산리(玉山里)까지의 계곡이 바로 옥계(玉溪)다.

죽장이 자랑하는 또 다른 휴식공간은 경상북도수목원이다. 요즘 포항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경상북도수목원은 아주 높은 지대에 위치한 특이한 식물원이다. 수목원이 들어서 있는 죽장면 상옥리 1번지 일대 속칭 쑥밭은 매봉(810m), 삿갓봉(716m) 등에 둘러싸인 평균 해발고도 630m의 고산지대다. 경상북도에서 운영하는 수목원으로 미래 산업의 자산이 될 산림식물종의 다양성 확보 및 산림유전자원의 수집?보존?증식을 위한 연구시설과 산림 및 식물 체험 학습장으로 조성됐다.

경상북도수목원은 1996년 55ha의 면적으로 처음에는 내연산수목원이란 이름으로 출발하였으나, 2005년 6월에 재개원을 하면서 경상북도수목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3,222ha로 면적을 대폭 확대하였다. 멸종위기의 희귀식물, 특산식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야생화 등 1,522종 18만1천여 본을 식재, 보유하고 있으며, 관찰이 용이하도록 침엽수원, 활엽수원, 화목류원, 야생초원 등 24개의 주제로 구성 자연체험 학습과 학술연구 및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참살이의 이상향


참살이 또는 웰빙이란 말이 시대의 화두가 돼 있는 요즘, 과거 산간오지로 무시받던 죽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평지가 적어 벼 재배가 어려운 관계로 옛날부터 산에서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한다든지 밭에서 과수나 약초 재배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죽장 사람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은 생활에서 건강을 우선시한다. ‘유기농’과 ‘친환경’이란 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죽장 같은 청정 환경에서 생산되는 임산물, 농산물을 찾게 된 것이다. 죽장고로쇠축제나 '상옥슬로우시티'도 그러한 개념에서 나왔다.

먼저 고로쇠 이야기부터 해 보자. 아직 산봉우리에 듬성듬성 잔설이 남아 있는 3월초, 포항의 두메산골 죽장면이 시끄럽다. 바로 봄기운을 부르는 죽장 고로쇠 축제 때문이다. 현지에서 채취한 고로쇠물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로쇠 시음회, 특산품 판매, 먹거리 장터, 민속놀이 체험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죽장에는 면봉산(1,113m)을 중심으로 63ha에 걸쳐 5천여 그루의 고로쇠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죽장의 대표적인 산골인 두마리, 봉계리, 가사리, 상사리 등 8개 마을 90여 농가에서 고로쇠를 직접 채취한다. 매년 2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 고로쇠 수액을 받는데, 추위가 왔다가 날이 따뜻해질 때 수액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장 고로쇠는 특히 '달달하고' 깨끗한 맛을 자랑한다. 고로쇠 수액은 뼈를 위한 물이라고 할 정도로 마그네슘, 칼슘, 인 등의 뼈에 좋은 물질의 함유가 높고 미네랄이 풍부하다. 또한 피로회복과 신경통, 위장병, 관절염, 성인병 치료 예방에 효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요즘 ‘슬로우시티(slow city)’로 불리는 상옥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197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농업 생산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보다 빨리, 보다 많이 생산하기 위해 논밭에서 기르는 농작물엔 맹독성 농약이 필수가 됐다. 대규모 사육시설에서 기르는 가축에겐 인공사료를 먹인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사료를 먹인 게 원인이 되어 가축에게 희한한 병이 생기고, 그 병이 사람에게 옮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됐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모두가 그 쪽을 향해 달음질치는 판국인데, 역발상이랄까, 반대로 해서 성공해 보자는 움직임이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슬로우시티’ 운동이 그것이다.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그 지역의 문화를 공유하며 자유로운 과거의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1986년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우 푸드(slow food) 운동을 확대하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7년 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의 시장으로 있던 파울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가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부터 유럽 곳곳에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전 세계 아흔 개가 넘는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2007년 2월 22일, 상옥1리 농산물집하장에서는 '상옥슬로우시티 선포식'이 있었다. 단국대 유기농업연구소와 자매결연도 맺었다. 이후 상옥은 아직 공인받은 건 아니지만, 포항을 대표하여 슬로우시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강원도 산골을 연상케 하는 오지인데다가 사방이 높은 산들에 둘러싸이고, 주변에 오염원이 없으며, 해발고도 500m가량 되는 고원분지인 특성상 여름에 고랭지 채소 재배가 가능할 만큼 서늘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포항시에서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 간 슬로우시티 지원사업을 펼쳐 전국에서 으뜸 가는 친환경농업관광 명소로 육성할 계획이다.

상옥리는 2007년 정부로부터 정보화마을로 지정되었는데, 행정안전부에서 제작, 지원하는 홈페이지 '포항 상옥참느리마을(http://slow.invil.org)'이 있다. 참느리마을은 청정지역 상옥의 친환경 브랜드로 느리고 여유로운 삶을 위해 100%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친환경농산물을 의미한다. 이 마을에서 생산하여 판매하는 친환경농산물에는 사과, 토마토, 적채, 상추, 호박, 고구마, 감자, 풋고추, 가지 등이 있는데, 인터넷으로도 주문이 가능하다.

/포항문학32호(2009.12)/포항 속의 포항-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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