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의 일상신행생활 속에서의 수행과
포교
대한불교 조계종 법회와 설법지 자료(관음정사 법상)
거룩한 삼보에 귀의하옵니다.
엊그제 비에 얼룩진 상처로 그리워하던 태양 빛은 어느새 지겨운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
인간이 환경에 순응하여 조화를 이루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실천하여 자기수양을 함과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어 모두 열반의 안온한 삶을 유지하여 일상생활이 그대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되도록 하는 인내가
필요하지요. 이것이 불자의 막중한 임무이자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를 실천하려고 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현대처럼
다양한 문화 속에 다양한 취미를 어떻게 이끌어 들이어 만족하게 하면서 만족시키느냐는 어려운 것이죠.
요즘 여러 사찰에서는 여러 가지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도를 해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못한 실정입니다. 그러면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결국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교육
프로그램이나 통과 의례인 재(齋)의식을 통해서 많은 접근을 시도해봤습니다. 이것도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일반인의 교육 프로그램은 정법이
아닌 사법을 요구하고, 재(齋)의식은 금전이 많이 든다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요. 또 호스피스를 통한 수행과 포교가 가장 적합한
방법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도 불교의 궁극적 입장에서 보면 배치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이고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주 쉬운 일대일 수행과 포교방법입니다.
이것은 이미 부처님께서 실행하셨던 방법이고 여전히 장래가 있어 보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자에 대한 확고한 자기
갖춤이 요청되고 적극적인 동참의식이 요청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재가불자의 일상신행생활 속에서의 수행과 포교"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재가불자
그러면 재가불자란 불교에서 어떤 사람을 말하느냐 입니다. 즉, 우바새와 우바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무어라고 하셨는지, 먼저 경전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과 갖은 종족이며 재가제자인 마하남이 부처님께, "어떤 것을 우바새(優婆塞)라고
말합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세속에 살고 있으면서 청정하게 닦아 익히고 깨끗하게 머물러, 남자의 모양을 원만하게 이루고서
'나는 지금부터 목숨을 마칠 때까지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비구스님들께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사오니, 저를 증명하여 알아주소서'라고
이렇게 말하는 이를 우바새라고 하느니라."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차례로 믿음과 들음, 평등과 지혜에 대해 마하남에 질문함에 부처님께서
차례로 답하셨습니다.
"우바새는 여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아서, 어떤
사문·바라문·하늘·악마·범(梵)과 그 밖의 다른 세간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으면,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가 믿음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하느니라.
우바새는 살생·도둑질·삿된 음행·거짓말·음주(飮酒)를 여의고 그것을 즐겨 행하지 않나니,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가
계(戒)를 원만하게 갖추었다 하느니라.
우바새가 들음을 원만하게 갖춤이란 들으면 곧 지니고 들은 것을 잘 기억해서 쌓아두는 것이다.
즉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으며, 의미도 좋으며 순일(純一)하게 원만청정하며 범행(梵行)이 청정한 부처님의 말씀을 다 받아 가진
것이니,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가 들음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하느니라.
우바새가 평등을 원만하게 갖춤이란 인색하고 더러운
번뇌[垢]에 얽매였으면 마음에서 인색함의 번뇌를 여의고 집 아닌 데에 머물며, 해탈시(解脫施, 자유롭게 버리는 것)·근시(勤施, 부지런히
보시하는 것)·상시(常施, 항상 보시하는 것)를 닦아, 즐거이 재물을 버려 평등하게 보시하는 것이니,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가 평등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하느니라.
우바새가 지혜를 원만하게 갖춤이란 이른바 이것은 괴로움[苦]이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苦集]이라고 사실 그대로 알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苦滅]이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라고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니,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가 지혜를 원만하게 갖추었다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재가불자는 늘 이와 같이
삼보를 공경하고 오계를 지키며, 부지런히 많이 설법을 듣고 기억하여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사제(四諦)를 알아 지혜를 닦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가불자나 출가제자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출가제자는 수행에 전념하고 재가제자는 일상생활을 겸해서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러면 재가불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2. 재가불자인 우바새가 살아가야 할 길과 포교
재가불자의 수행에 대해서도 경전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경전은 {잡아함}의 {일체사경(一切事經)}이란 내용입니다. 여기의 질문자도 역시 마하남입니다. 마하남이,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모든 우바새의 일을 원만히 갖춘 것이라고 합니까?"하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만일 우바새로서
믿음이 있고 계가 없으면 그것은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열심히 방편을 써서 깨끗한 계를 원만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믿음과
계를 원만하게 갖추었을지라도 보시하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니,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방편을 써서
보시를 닦아 익혀 그러한 것들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하느니라.
믿음과 계와 보시를 원만하게 갖추었을지라도 수시로 스님에게 나아가 바른
법을 듣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다.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방편을 써서 수시로 절[塔寺]에 나아가 여러
스님을 뵙고서도, 일심으로 바른 법을 듣고 받지 않으면, 그것도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계·보시·들음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듣고도 지니지 않으면 그것도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다.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방편을 써서 수시로
스님에게 나아가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듣고 나서는 잘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하지 못하면 그것도 또한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다.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방편을 써서 믿음·계·보시·들음을 닦아야 한다. 듣고 나서는 지녀야 하고
지니고 나서는 매우 깊고 묘한 뜻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해 수순(隨順)할 줄을 알지 못하면 그것도 또한 원만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다.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방편을 써서 믿음·계·보시·들음을 닦고 받아 지녀 관찰하여 깊은 이치를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 법을 따르고 법으로 향해 수순하여 행해야 한다. 마하남아, 이것을 모든 우바새의 일을 원만히 갖춘 것이니라."
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하남이 다시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가 제 자신은 편안하게 하나, 다른 사람은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마하남에게 답하십니다.
"어떤 우바새는 제 자신은 계를 확고히 하지만, 다른
사람은 바른 계를 확고하게 하지 못한다. 제 자신은 청정한 계를 지니지만 다른 사람은 계를 원만하게 지니게 하지 못한다. 제 자신은 보시를
행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시하게 하지는 못한다. 제 자신은 절에 나아가 여러 스님을 뵙지만, 다른 사람을 권하여 절에 나아가 스님을
뵙도록 하지는 못한다. 제 자신은 전일(專一)하게 법을 듣지만 다른 사람을 권해서 바른 법을 즐겨 듣게 하지는 못한다. 제 자신은 법을 듣고
지니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법을 받아 지니게 하지는 못한다. 제 자신은 매우 깊고 묘한 이치를 관찰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권해서 심오한
이치를 관찰하게 하지는 못한다. 제 자신은 깊은 법을 알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隨順)하여 행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권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행하게 하지는 못한다. 마하남아, 이러한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이것을 우바새가 제 자신은 편안하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자기도 평안하고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하남이
다시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우바새가 몇 가지 법을 성취해야 자기 자신도 편안하고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합니까?"하고 여쭙자. 부처님께서
마하남에게 답하셨습니다.
"만일 우바새가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이것을 우바새가 제 자신도 편안하고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그 열 여섯 가지인가? 마하남아, 어떤 우바새는 바른 믿음을 원만하게 갖추고 그것을 다른 사람도 건립하게 한다. 제 자신도
깨끗한 계를 가지고 또 깨끗한 계를 다른 사람에게도 건립하게 한다. 제 자신도 보시를 행하고 다른 사람도 보시를 행하게 한다. 제 자신도 절에
나아가 모든 스님을 뵙고 다른 사람도 절에 가서 스님을 뵙게 한다. 제 자신도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다른 사람도 또한 듣게 한다. 제
자신도 법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도 받아 지니게 한다. 제 자신도 이치를 관찰하고 다른 사람도 관찰하게 한다. 제 자신도 깊은 뜻을 깨달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닦아 행하고, 다른 사람도 깊은 뜻을 깨달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닦아 행하게 한다. 마하남아, 이와
같은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그것을 우바새가 제 자신도 편안하고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마하남아, 만일 우바새가
이와 같은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저 대중들, 즉 바라문(성직자)·찰리(刹利, 정치가, 군인)·장자(長者, 상인이나 일반인)·스님 대중들이
다 그에게 모일 것이요, 그 대중 가운데서 위엄과 덕망이 환하게 빛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태양은 처음 떠오를 때나 중간이나 마지막에 질 때도
그 광명이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바새가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그 사람도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까지 위엄과 덕망이 밝게 빛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모든 일이 우리의 일상의 신행생활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바른 믿음을 가지고 깨끗한 계를
지키며, 보시를 행하고 절에 가서 스님을 뵙고 온전하게 집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받아가져 그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기고 이치를 관찰하고
깨닫도록 하는데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 불법의 벗이 되는 것은 의무인 셈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수행의 과덕(果德)은 어떨까요?
3. 재가불자의 수행의
과덕(果德)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흔히 막연하게 신행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을 일소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경전을 인용해서 말씀드리니 조금 지루하시겠지만 적어도 불자라면
부처님 말씀 듣는 것을 기뻐하고 즐겨야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절에 가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받아 가지라고 하셨지요. 여기서도 마하남의 질의에
답하신 설법입니다. 석씨 마하남은 500명의 우바새와 함께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가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를 올리고 물러나
부처님께, "어떤 것을 우바새의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이라고 합니까?"하고 차례로 여쭈자.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우바새의 수다원이란 세 가지 결박[三結]을 끊는 것이다. 이른바 신견(身見, 자기의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계취(戒取, 그릇된 금기사항에 얽매이는 것)·의(疑, 부처님 가르침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 등의 그 결박이 끊어진 줄 아는 것이다.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의 수다원이라고 하느니라.
우바새가 세 가지 결박을 끊고, 그 결박이 끊어진 줄을 알아,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진 것이니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 사다함이라고 하느니라.
우바새의 아나함이란 5하분결(下分結)을 끊는
것이다. 이른바 유신견(有身見)·계금취(戒禁取)·의심(疑)·탐욕(貪欲)·진에(瞋 ) 등을 끊은 줄 아는 것이다. 마하남아, 이것을 우바새
아나함이라고 하느니라."
경의 내용을 보면 신기하지 않습니까? 일상생활을 하면서 근본번뇌를 버리고 청정하게 살아가면 이와 같은 깊고
오묘한 공덕을 얻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우리는 오온(五蘊)의 집착을 벗어나 자기 중심적이고 경험적 지식이란 삶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으면 수다원을 이루고, 삼결(三結)과 삼독(三毒)을 벗어나면 사다함이며,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벗어나면 아나함입니다. 그런데 위의
모든 수행의 계위에서 출가수행인의 계위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즉, 수행의 최종 계위인 아라한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극복한 불교가 대승불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입니다. 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삶의 형태를 바꾸어 자기를 없앤 상태에서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대승불자의 마음가짐과
삶의 궁극적인 목적
대승불교의 주인은 바로 보살 또는 보살마하살입니다. 그러면 과연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보살과
보살마하살은 어떤 존재일까요? 이에 대해서 먼저 {대품반야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말의 의미가 없는 이것이 보살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아누다라삼먁삼보디에는 의미가 있는 곳이 없고 또한 나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의미가 없는 이것을 보살이라는 말의 의미라 한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꿈속에서 본 곳이 없는 것처럼, 보살이란
말의 의미가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새가 허공을 날아가도 흔적이 없는 것처럼, 보살이란 말의 의미가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위의 부처님께서 설하신 보살이란 의미의 내용을 보면 아누다라삼먁삼보디를 발하여 수행을 하되 일체 모든 것이 집착이 없는 큰
마음을 내어 수행하지만 그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는 존재가 보살이라는 의미가 없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래서 보살의 경계는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는 모든 집착을 떠난 존재로 공(空)의 실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살마하살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대지도론}에서
정의하길,
천축의 어법은 글자를 합하여 말을 만들고, 말을 합하여 문장을 만든다. 보(菩)가 한 글자이고 디(提)가 한 글자인데,
이 두 글자를 합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고, 합하면 보디(菩提)가 된다. 진(秦)나라 말로는 무상지혜(無上智慧)라고 한다. 살타(薩 )는
중생(衆生)이라고도 하고 대심(大心)이리고도 한다. 무상(無上)의 지혜를 위하여 대심(大心)을 내는 것을 보리살타(菩提薩陀)라고 한다. 중생들로
하여금 무상도(無上道)를 행하도록 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디사뜨바라고 한다.
무엇을 마하살이라고 마하는 대(大), 살타는 중생 혹은
용기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마음은 능히 큰 일을 위하여 큰 용기가 있는 마음인 대용심(大勇心)에서 물러나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마하살타라고 한다. 또 마하살타란 많은 중생 중에서 가장 상수(上首)가 되기 때문에 마하살타라고 하고, 또 많은 중생 중에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일으켜 대승(大乘)을 성립하고, 능히 대도(大道)를 행하여 가장 큰 곳을 얻기 때문에 마하살타라고 하며, 또한
대인(大人)의 형상(形相)을 성취하기 때문에 마하살타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마하살은 마하살타의 줄임말로 보살 중에서 위없는 지혜인
불도(佛道)를 성취하려고 하는 자로 위대하고 큰 용기가 있는 마음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첫째, 큰 일을 위하여 용기 있는
마음에서 물러나지 않고, 둘째, 중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도자가 되고, 셋째, 대자대비(大慈大悲)을 일으켜 대승(大乘)을 성립하고, 넷째,
대도(大道)를 행하여 큰 과보를 얻고, 다섯째, 대인(大人)의 상(相)을 성취하는 사람을 마하살타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상(無上) 대도(大道)인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위대한 마음을 발하여 물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용기가 있는 대중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소양을 갖추고 개인적 만족감에 사는 소승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즉 열반이 목적이 아니라
성불(成佛)이 목적이면서 대중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
종족을 보존하려 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특히 인간은 의식주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지요.
거기에 인간은 의식주가 충족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끊임없이 최고선을 추구하고, 나아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철학적인 사고에 의해서 궁극의 진리를 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요. 이러한 것들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행복감은 언제나 남아 있는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욕구가 적멸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해탈 또는 혜해탈과 구해탈을
얻은 열반의 상태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생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행이 이미 서고, 해야할 일을 다해 마쳐 다시는 후생을 받지 않고, 진리
그대로 알고 있는 존재인 아라한, 이것이 이른바 부파불교까지의 최상의 개인적 자기성취의 목표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부합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승불자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을 텅 비우고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동체대비라는
전제 아래 반드시 부처가 되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서원을 세우고 스스로 지은 공덕을 부처님과 일체중생과 깨달음으로 회향하는 아름다운 정신이
요구되는 것이 대승불교도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을 닮아 가는 생활의 지침이고 연기의 다른 표현인 공(空)의 실현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재가불자의 신행지침에서 문(聞), 사(思), 수(修)라는 기본적인 수행과 아울러 초기불교의 최상의 목표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는 열반을
증득함과 동시에 개인의 삶을 완전히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지향한 성자이기에 재가불자가 이러한 의식의 전환이 없이는 최상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보살이란 이상적인 인간상은 요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보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불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보살이란 삶의 형태가 완전히 이타적인 사람입니다. 즉,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이지요. 그리고 부처가 되고자 노력하는
불자입니다. 초기 또는 부파불교에서는 해탈열반이 개인적으로 성취되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승의 불자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일체중생의 깨달음과 열반을 위해서, 일체중생이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자기의 삶은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웃으면 웃고, 중생이 울면 같이 울고, 중생이 병들면 같이 아파하고, 중생이 즐거우면 같이 즐거운
것이고, 중생이 행복해하면 함께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불자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가지고 육바라밀(六波羅密) 또는 십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사섭법(四攝法)으로 일체중생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어진 공덕과 지혜도 또한 집착하거나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향해서, 일체중생을 향해서, 법계를 향해서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존재가 행복할 때에,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때에 함께
행복하고 완전한 무분별지의 반야의 세계에 동고동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보살이고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대승의 원대한 포부가
실현되는 것이고 동체대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지금 여기 사는 존재들의 환경도 함께 청정한 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국정토라고 하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삼승(성문, 연각, 보살)이란 중생을 성불(成佛) 즉
완전한 부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유인하는 방편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는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일승(一乘) 또는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의 의도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의 습관을 이타행으로 승화시키는 데 의식의
전환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일상생활이 그대로 이타행이요, 이타행이 일상생활인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늘
이타행자의 마음과 습관을 가지는 것, 대승불자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지요. 늘 맑고 밝고 텅 빈 마음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 겸허한
마음으로 이웃과 나라와 우주가 하나임을 자각하여 봉사하고 유익함을 주도록 노력하면서 늘 일불승(一佛乘)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대품반야경}에서,
"모든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디의 마음을 일으킨다. 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세간의 돌아갈 곳이 되기 위하여, 세간의 의지처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피난처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훌륭한
인도자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구경도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나아갈 곳이 되기 위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디의 마음을 일으킨다."
이것이
보살이 타고 가는 위대한 수레인 대승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불자들의 성스러운 삶입니다.
여기서 주의하실 일은 이상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량없는 자비(慈悲)심과 희사(喜捨)심을 가지고 늘 베풀고 예의바르게 끝까지
견디어 참고 끊임없이 정성스럽게 노력하면서 평정의 마음으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다짐과 그 역량을 발휘한 확고한 지혜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면서 이끌되 부드럽고 고운말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도 좋은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면서 무엇을 하든 세상에
이익을 주면서 같이 기뻐하고 같이 고달파하면서 함께 더불어 어울리면서 허공 같은 중생을 위해서 최상의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 내가 존재하는 이곳이 바로 부처님의 본래의 도량이고 본래부처님임을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앞에서 살펴 본
내용들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어느 문화 콘텐츠나 의식에 부합해서 일회성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끊임없이 우리가 지향해 가야할 길이며
부처님께서 이미 일대일의 개인 전법의 방법으로 쓰셨던 내용으로 매우 고무적인 포교와 개인의 수행에 필수요건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모두 이 국토
이 지구와 우주가 모두 불국토되고 본래의 부처임을 확인하여 너와 나, 우리 누구나가 함께 더불어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남이 되도록 해
보심이 어떨까요.
첫댓글 저희 카페로 옮겨 마음의 양식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