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를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졈그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쉽게 풀기 : 달하 노피곰 도다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어느 행상인의 처 (<악학궤범>권 5 무고) 시조 형식의 원형을 가진 노래
이 작품과 유사한 주제를 가진 작품으로 기한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부역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노래인 백제의 부전가요 '선운산가'와 박제상의 아내가 치술령에 오라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부른 노래인 신라의 부전가요 '치술령곡'을 들 수 있다. 특히, '치술령곡'은 정읍사와 마찬가지로 배경 설화에 망부석(望夫石)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모티프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에 이어지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惡地)에 보면 '정읍(井邑)'은 전주의 속현(屬縣)이었는데, 그 고을 사람이 행상을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산 위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이 노래를 불렀으며, 그 등점산에는 이 망부석이 남아 있다고 하다. 이 노래의 해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위에 전하는 배경 설화의 문맥에서 보면,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순박한 마음을 달에 의탁하여 나타낸 노래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후렴구를 제외하면 모두 여섯줄이 되고, 이를 다시 두 줄씩 합쳐 보면 네 토막 석 줄 형식이 되어 시조의 형식과 닮아 있다. 이런 형식은 우리 노래의 기본형의 하나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사 본문 중 '全져재'의 '全'자를 전주(全州)의 지명으로 보고, 백제 시대의 완산주(完山州)를 신라 경덕왕 115년에 전주로 개명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동국여지승람 권 32 전주부), 경덕왕 때 이후 내지는 고려 시대 구백제지방의 민요로 보기도 한다. 또 한편에서는 <고려사> 권71 악지(樂志) 2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의 <정읍사>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같은 책의 고려속악조에 무고정재(舞鼓呈才) 때 <정읍사>를 가창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하여 <무고>와 <정읍사>를 동일시하고, <무고>를 만든 사람인 이혼(李混)의 생존 연대와 관련하여 <정읍사>를 고려 충렬왕 때 전후에 개성 주변에서 작사, 작곡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악지와 <고려사>의 악지가 다 같이 재래 속악에 대한 편찬 방식이 같은 점으로 보더라도, 삼국속악조에 백제 속악으로 기록된 <정읍사>는 고려 속악과 구별하여 기록한 것으로 편찬자의 잘못이 아니라 백제 속악으로 인정함이 옳을 것이다. 또 고려속악정재조에 신라때 원효(元曉)가 지은 <무애>가 들어있는 것처럼 고려속악조에 들어 있다하여 모두가 고려시대의 가요로 볼 수는 없듯이, 무공정재때 <정읍사>를 불렀다하여 <정읍사>의 제작연대가 무고를 지은 이곤의 생존연대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는 재래속악, 곧 유전악(遺傳樂)인 <정읍사>를 소려속악정재 때 이곤이 지은 무고라는 악곡에 얹어 불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악학궤범>에 채록되어 악장(樂章)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 하여 궁중에서는 폐지되고 새로 만든 악장인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용하였다(중종실록 13년 4월조). 형식은 전강(前腔)·후강(後腔)·과편(過篇)의 3연체(聯體)로 되어 있으며, 후렴을 뺀 기본 시행(詩行)만으로 본다면 3연 6구의 형식이 되고, 또 각 연의 음절수가 3음 또는 4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여 시조의 3장6구 형식의 근원을 <정읍사>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그리하여 후강이라는 악조명 다음에 '전(全)'자를 붙여 후강에는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없는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후강전(後腔全)이라 표시하였다는 설은 있으나 아직은 어느 문헌에도 '후강전'이라는 악조명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후가에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 된다. 특히 시가 형태면에서 보더라도 <정읍사>가 백제 가요로 인정되기는 하나, 오랜 세월 고려속요와 함께 불려 오는 동안 다분히 고려적인 성격으로 변모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바, 후렴을 지니는 모든 고려속요가 예외 없이 각 연마다 꼭같은 후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후렴이란 언제나 꼭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므로 고려 속악과 함께 가창된 <정읍사>도 각 연마다 동일한 후렴을 지녀야만 형태상으로도 온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후강에서 소엽 '아으 다롱디리'는 구전되는 동안 탈락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전'자의 처리는 자동적으로 가사본문인 '져재' 앞에 놓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곧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안타까운 불안한 마음을 달에 의탁하여 노래하되, 단순한 서정의 표출이 아니라 광명한 달에게 남편의 안녕까지 도모해 주기를 바라는 고대인의 소박한 발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제2연에서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행방도 소식도 몰라 애태우며, 불안과 의념(疑念)에 사로잡히려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자 '(혹시 지금쯤)전주 저자에나 가 계시는지요'라는 가정의 의문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희구하는 가냘픈 여심(女心)의 발로로써 시작된다. 이와 같이 자위적(自慰的)인 마음의 안정을 애써 도모해 보기도 하나 남편에 대한 불안과 초조는 더욱 걷잡을 수 없어 이윽고는 '어긔야 즌데를 드디욜셰라'하고 마음 속 깊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을 실토하고 만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안과 의구심일 수밖에 없다. 제 2연의 어절 풀이에서 첫음절을 '져재' 또는 '全져재'로 보는 두 갈래의 학설이 양립되어 있으나, '후강전(後腔全)'까지를 악조명으로 보고 가사 본문을 '져재'로만 보기에는 음악적인 또는 시가 형태적인 면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고, 또한 '全져재'로 보는 쪽에서도 종전에는 그 뜻을 '전주저자에'로만 해석하였으나 '온 저자에'라고 보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 '녀러신고요'의 해석은 그 본래의 뜻 또는 원형을 '녀러이신고요'로 풀이함이 일반적이나, '다녀신고요' 즉 '다니시는 가요'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또 한편에서는 '녀더신고요'의 변형으로 보아 '녀더시던고요→녀시던고요→가시던가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드디욜셰라'는 '디디올세라' 곧 '다다면 어쩔까나'하는 근심 걱정이 쌓인 의구형으로 이루어져 표면상으로는 진데 곧 더러운 수렁물을 디디면 어쩌나 하는 표현이지만, 사실은 '(수렁과 같은) 주색에 빠지면 어쩌나(빠질까 두렵소이다그려)' 하는 속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악지에 "그 지아비가 밤에 다니다가 해를 범할까(저지를까) 두려워하여(恐其未夜行犯害) 수렁물의 더러움에 기탁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직설적이 아닌 비유로써 지어진 노래이며, 또 '수렁물의 더러움에 기탁하여'라는 말이 바로 이 '즌 데를 드디욜셰라' 또는 '내가논데 졈그랄셰라'를 지적한 말인 듯하다. '그 지아비가 밤에 다니다가 해를 범할까 두려워하여'라는 기록을 종전에는 '밤길을 다니다가 도둑의 침해나 입지 않을까 두려워하여'라고 풀이하여 피동적인 사실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마땅히 남편의 능동적인 행위로 보아야만 <고려사>의 기록과 가사의 내용이 일치하게 된다. 만약, '야행범해(夜行犯害)'를 도둑의 침해로 본다면 수렁의 더러움에 기탁한 상징적인 비유도 성립되기 어려우며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니 않는 사실에 대한 의구심이 이유로써 성립되지 않는다. 행상인의 오랜 객지살이에서 염려되는 것은 주색잡기에 빠지는 일이니 남편의 범해는 이것을 가리킴이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구심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전체를 종교적 서원 형식의 노래로 보고, 제 2연도 남편에게 반문하는 동시에 대상인 달을 향하여 기원하는 것으로 보아 '즌곳을 디디지 말아지라', '행여나 디딜셰라'의 남편에 대한 의구는 달에게 '제발 즌 곳일란 디디지 않게 하여 주소서'하는 처절한 호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즌데'를 인체 내의 국부를 상징하는 은어로 보고, '드디다'는 육축(六畜)의 교미(交尾)를 뜻하는 '드딘다'라는 방언과 상관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제 3연에서는 남편의 신변에 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의구심이 절정에 이르고 보니 행상을 해서 버는 돈도 재물도 아랑곳없이 한시바삐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어느 것이나(무엇이나) 다 놓아두고 한시바삐 집으로(나에게로) 돌아와 주소서'하고 절박한 하소연을 부르짖고는, 제 2구에서 다시 한숨을 돌이켜 '어긔야(이라다가 자칫 잘못하면) 내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 어두워질까(변할까) 두렵소이다그려(변하면 어쩔거나)' 하는 걱정과 자탄과 애원의 말로써 끝을 맺고 있다. 결연은 가장 이설이 많은 대목으로, 먼저 '어느이다'를 '어늬다'로 보고 '어느 곳에다가' 또는 '어디에나(어느 곳에나)'로 해석하는가 하면, '어이다' 또는 '어쩌다(자칫하면)'로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누구에다' 혹은 '어느 것에다'로 해석하기도 하나 '어느 것이나 다(무엇이나 다)'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다'로 보는 중에서도 '어느 것'을 행상인의 짐이나 재물이 아닌 '남편의 불안스러운 일'인 동시에 아내인 작자 자신을 휘감고 있는 '어느 것', 곧 불안·의구·고뇌 등으로 보는 이설도 있다. '노코시라'의 해석도 '(마음을)놓으시리라' 또는 '놓고 계신가요'로 보기도 하며 '놓으시라, 놓으십시오' 또는 '놓고 계셔지라(놓고 계셨으면 좋겠다, 놓고 계십시오)', 심지어는 '놀고 계신가요'로 보는 견해도 있는가 하면, 또 '놓고시라→노호시라→놓오시라→놓오지라→놓아지라→놓여지라'의 소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처절한 아내의 비원(悲願)이라고 생각한다면 '놓고 오시라'로 보는 것이 가장 순리적이다. 그러나 '내 가논데'는 어디까지나 내가 가는 곳(또는 나의 가는 곳)이어야 하나 그것이 오가는 길이 아닌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내사랑 가는 곳' 즉 '사랑하는 님, 남편의 마음'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졈글셰라'와는 달리 '졈그랄셰라'는 '저물게 할세라', 곧 사실상 '저물게 될세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나 다만 저물게 되는 것이 '날[日]'이라고 할 때에는 제 1연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와 서로 어긋나며 또 저물게 되는 것이 '달[月]'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은 '날이 저물다'라는 말은 있어도 '달이 저물다'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물게(곧 어둡게) 되는 것은 '나의 님' 곧 '남편의 마음'이라고 보아야만 모든 어려움이 없어진다. 또한 '내 가논데'를 '내가 살아가는 곳, 즉 인생의 전도(前途)'로 보고 '졈그랄셰라'는 '저무는 일이(심상 또는 생활에 어둠이) 없게 하여 주소서'와 같이 이것 또한 종교적 서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제 2연의 '즌데를 드디욜세라'와 함께 어법상의 의구형(ㄹ셔+라)은 의구형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 구백제(舊百濟) 지방의 노래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내용은 정읍현(井邑縣)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危害)를 입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나타낸 노래이다.
월하이저역 서방염정거사리견 무량수불전내 뇌질고음다가지백견사립 서음심사은존의희앙지 양수집도화호백량 원왕생원왕생 모인유여백견사립 아사차신유야치견 사십팔대원성견사거 - 양주동 해독
달이 어째서 - 현대어 풀이1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까지 가셔서 무량수불 앞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불존에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 두고 사십팔대원 이루실까 - 현대어 풀이2 달님이시여 서방정토까지 가시려는가 무량수 부처님 앞에 일러 사뢰옵소서 맹세 깊으신 부처님에게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왕생을 원하여 왕생을 원하여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옵소서 아아, 이 몸 남겨두고 마흔 여덟 가지 큰 소원을 이루실까. 요점 정리
지은이 : 광덕 연대 : 문무왕(661-681) 구성 : 1- 8행에는 화자와 달의 대화가 나타나 있음 1 - 4행 : 달님에 대한 당부 - 달님에게 기원(간접 청원) 5 - 8행 : 극락왕생에 대한 간절한 염원 - 극락왕생 염원(직접 청원) 9-10행 : 소원미성취에 대한 염려 - 소원 성취에 대한 염려(청원의 심화 확대) 제재 :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달 내용 연구
달님[서방정토의 사자로 여김]이시여 서방정토까지 가시려는가 (가시거든) 무량수불 앞에 일러 사뢰옵소서 맹세 깊으신 불전에 우러러 두 손을 모아[기도하는 자세로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말함] 왕생을 원하여 왕생을 원하여[시적 화자의 간절한 소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시어]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 버려두고[남겨두고] 마흔 여덟 가지 큰 소원을 이루실까.[설의법을 통해 시적 화자의 강한 내면적 의지를 드러내고, 시상을 마무리지으면서 시적 화자의 기원이 심화, 확대되고 있고, 시적 화자는 아미타불의 중생 구원에 대한 약속을 환기시켜 간접 위협과 명령을 행하고 있다] 무량수불은 서방정토에 있는 아미타불로서, 이 부처에게 염하면 극락 세계에 간다고 했다. 원왕생가의 화자는 '달'로 하여금 서방의 극락 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도록 청원을 하고 있다. 따라서 '무량수불'은 화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이다. 사십 팔대원(四十八願) :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 아미타불이 과거세(過去世)에서 수행할 때에 법장 비구(法藏比丘)가 되어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앞에서 48가지의 원을 세우고, 그것이 실현될 때라야 성불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무한한 노력 끝에 복덕(福德)을 쌓아 그가 목표한 극락세계를 완성하였다. 이 서원(誓願)의 하나하나는 모두가 남을 위하는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는데, 곧 대승 보살행(大乘菩薩行)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 48원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정토(淨土)사상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부처와 또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거주한다는 청정한 국토. 중생이 사는 번뇌로 가득 찬 고해(苦海)인 현실세계를 예토(穢土)라고 부른 데 대한 상대어이다. 시방(十方)세계에 제불(諸佛)의 정토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1세계에 2불(佛)이 병립해서는 안 되므로 제불이 나타날 국토가 현실세계 외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논리인데, 특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 극락세계, 약사불(藥師佛)의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를 정토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선종(禪宗)에서는 “오직 마음이 정토요, 자신의 마음이 미타(彌陀)”라고 하여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일심(一心) 외에 정토는 없다고 말한다. 이해와 감상
달에 관련된 문학 작품은 많다. 예를 들면 고대시가인 '정읍사'에서는 남편의 안위를 돌봐주는 달로 나타나고, 향가인 '원왕생가'에서 달은 기원의 대상이며, '찬기파랑가'에서는 우러름의 대상으로, 기파랑의 인품을 '달'에 비유했으며, 이조년의 시조에서의 '달'은 봄밤의 애상적 정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호우의 시조에서의 '달'은 서정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달이며, 장만영에서의 '달·포도·잎사귀'에서는 생명력과 미적이고 애수어린 낭만적인 달이고, 나도향 '그믐달'에서의 달은 화자의 심정을 토로하는 달이며, 윤오영의 '달밤'은 고요한 밤의 정경으로서 그리고 자연과 합일하는 존재로서의 달로 나타난다. 달은 이처럼 작품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고 중국의 시성 '이태백'은 '달'을 건지려다가 죽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달이 얼마나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적 소재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달은 어두운 밤에 등장하고 그 달은 어두움을 밝혀 주는 광명의 달이며, 신적인 달이다. 이 달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고뇌의 바다를 밝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여기 '원왕생가'에서 광덕은 아미타불에게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을 달에게 의탁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서정적 자아가 그리는 대상은 아미타불이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의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을 희구하고 있다. 그런데 달은 차안과 피안을 오고 갈 수 있는 불법(佛法)의 사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가슴 깊은 신앙심이 아미타불에게 전하여 지기를 달에게 기원하고 있다. 즉 달을 통해 서정적 자아의 불교적 신앙심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해와 감상1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광덕(廣德:?~?)이 지은 10구체 향가로 광덕은 짚신을 삼아서 살았는데 아내는 분황사 종이었고 광덕의 친구 엄장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광덕이 죽어 서방정토로 가자, 엄장은 광덕의 아내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자 광덕의 아내는 광덕이 평소 정좌하고 불도를 닦으며 한번도 동침하지 않았다 하며 엄장을 꾸짖었다. 엄장은 크게 뉘우치고 원효(元曉)에게서 쟁관법(錚觀法)을 배우고 마침내 서방정토로 갔다고 한다. 이 노래는 일찍이 광덕이 부른 노래로 되어 있는데 귀족불교를 넘어서서 평민에 이르는 화엄사상이 흐르고 있다. "달이 어째서 서방까지 가시겠습니까?/무량수전 전에 보고의 말씀 없이 사뢰소서"로 시작된다. 서방정토사상을 읊은 축도의 노래로, 달을 서방정토의 사자(使者)에 비유하여 불교의 신심을 노래했다. 〈삼국유사〉 권5 광덕 엄장조에 실려 전한다. 이해와 감상2 신라 문무왕 때 광덕(廣德)이 지었다는 10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5 ‘광덕엄장조(廣德嚴莊條)’에 노래의 유래에 관한 배경설화와 향찰로 표기된 원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작자에 대해서는 광덕으로 보는 견해가 정설이나 광덕의 처, 원효, 민간 전승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수록문헌에 따르면 문무왕대에 사문(沙門)인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라는 두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생활에만 전념하던 광덕이 먼저 죽자,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이 노래의 원문과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심화 자료
달 숭배(崇拜) moon worship 달 속에 있는 신이나 달의 상징 또는 인격화한 형태를 숭배하거나 공경하는 것으로 달의 성스러움은 삶과 우주의 기본 리듬과 연결되어 있다. 여러 시대와 문화에 걸쳐 두루 퍼져 있는 달 숭배 현상은 풍부한 상징과 신화를 낳았다. 사람들은 달을 우주의 율동적인 생명과 관련하여 생각했고 모든 생명의 변화를 다스리는 것으로 믿었다. 달이 차고 기우는 순환과정을 보고 많은 이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올라가는 죽은 자의 땅이나 재생의 힘을 달과 연관지었다. 달이 생명의 순환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달과 운명을 연관지어 생각하도록 했다. 달의 신화는 특히 달이 사라지는 시기를 강조한다. 달의 순환에서 3일간의 어둠과 일식은 달을 집어삼키거나 잡아먹은 다음 결국 다시 토하거나 다시 살려놓는 괴물들간의 싸움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 보통 해석된다. 그믐은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활동(특히 식목이나 성교)에 대해 엄격한 금기가 필요한 유해한 기간으로 해석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의례 행위의 일부로 달을 공격하는 자를 겁주어 쫓기 위해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도 한다. 달과 달의 순환을 인격화한 신들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다. 원시 수렵문화에서 달은 지극히 남성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여성들은 달을 아주 악하고 위험한 존재로 생각한 반면 농경사회의 전통 속에서의 달은 일반적으로 여성이며 식물 생장과정의 자비로운 주재자로 여겨졌다.(출처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박목월의 '달' 첫번째 개인 시집 《산도화》에 실린 3연 10행의 자유시로 그리움의 서정을 표현하였다. 제1연의 하얀 달밤에 핀 배꽃 사이로 비치는 달은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을 담은 색깔이다. 제2연의 ‘불국사 언저리’ 역시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공간적인 배경이다. 다시 제3연의 ‘반쯤 가리고 가는 달’은 체념과 그리움의 서정을 재확인하는 신화적인 공간이다. 배꽃 가지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배꽃 가지 박목월의 '달'은 배꽃과 달의 만남을 그린 작품이다. 천상의 꽃인 달과 만난 지상의 배꽃은 얼굴을 반쯤 가리고 함께 길을 간다. 잔잔한 슬픔과 밝은 생명력이 교감하는 공간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소재로 전통적인 정서를 민요조의 운율에 담아, 서정으로 일관하는 그의 시가 여기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배경설화 문무왕때에 불도에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이 있어 퍽 친근하였다. 그들은 평소에 누구든지 먼저 극락정토에 갈때는 서로 알리기로 약속했었다. 광덕은 분황사의 서쪽(혹은 황룡사의 서거방(西去方)에 있었다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은거하며 신을 삼아 생활하였는데, 아내가 있었다. 엄장은 남악(南岳)의 암자에서 화전을 경작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노을이 붉고 솔 그늘이 고요히 어둠에 잠기는 저녁때였다. 엄장의 집 창밖에서 '광덕은 지금 서방정토에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라.'는 소리가 났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하늘의 풍악 소리가 들리고 땅에는 광명이 드리워 있었다. 이튿날 엄장이 광덕의 집에 가보니 그는 과연 죽어 있었다.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의(葬儀)를 마친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합의하에 동거하게 되었는데, 저녁에 같이 자며 관계하려 하니 여자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스님이 정토(淨土)에 가기를 바란다는 것은 마치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또 말하기를 "광덕은 나와 10여 년을 같이 살았으나 한 번도 동침한 적이 없었고, 저녁마다 단정히 앉아 염불을 하고, 혹은 16관(十六觀- 중생이 죽어서 극락에 가기 위해 닦는 16가지 방법)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16관에 숙달하자 달빛이 문에 들면, 그 빛을 타고 올라 앉았습니다. 정성이 이 같았으니 어찌 극락에 가지 않겠습니까? 무릇 천 리를 갈 사람은 그 첫걸음이 규범이 된다는데, 이제 스님의 관을 보니, 동쪽으로 간다 할지언정 극락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엄장은 부끄러워 물러나 원효법사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간청하였다. 법사는 정관법(淨觀法- 이미 생각의 더러움을 깨끗한 몸으로 번뇌의 유혹을 끊는 것)으로 그를 유도하였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관을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다. [출전{삼국유사} 권5, '광덕 엄장조(廣德嚴莊條)' ] |
출처: 살아가면서 원문보기 글쓴이: 魔怠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