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같이 온다니
기다림은 설렘을 수반합니다. 소설 ‘어린왕자’에서 사막여우는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행복해지고 4시가 되면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하겠지. 그러나 네가 무턱대고 아무 때나 찾아오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래도 오는 시간은 정해 달라는, 그래야 나의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마냥 사랑에만 집중할 수 없는 현대인의 내면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12월 대부분을 대림절, 즉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며 보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재림의 날은 ‘도둑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사막여우의 관점에선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베드로는 도둑같이 오는 주님의 재림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벧후 3:11) 거룩한 행실이나 경건은 수도 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건은 우리 안에 스며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주님을 기다립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마른 빵 조각을 먹으며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 기둥에 있는 글귀입니다. 최고의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라는 얘기지요. 추사는 평생 얼마나 맛난 요리를 많이 먹어봤을까요. 그런데 소박한 푸성귀 반찬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그 옆 기둥에 있는 글귀입니다. 최고의 모임은 부부와 자녀와 손자라는 말입니다. 두 글귀를 함께 읽으면 가족과 함께 나누는 밥상이 최고라는 말이 되겠네요.
솔로몬은 엄청난 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하루 먹거리로 밀가루 아흔 섬에 소 서른 마리와 양 백 마리에다가 노루와 사슴과 살진 새도 썼답니다. 말 그대로 산해진미요 진수성찬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 17:1, 새번역) 무슨 말일까요. 음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보다 더 맛나고 행복한 밥상은 없습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가장 좋은 것
미국의 더글러스 말록(Douglas Mallocke)이라는 시인은 말했습니다.
“그대 만일 큰 길이 되지 못하겠거든 아주 작은 오솔길이 되어라. 그대 만일 태양이 될 수 없으면 큰 별이 되어라. 실패와 성공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이 되더라도 가장 좋은 것이 되어라.”
가장 좋은 것이 된다는 것은 가장 좋은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좋은 인생을 위해서는 삶의 재료인 시간 물질 건강 꿈과 비전을 가장 존귀한 분, 하나님께 드릴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영광의 무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활동들, 심지어 가장 비천한 활동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면 그분이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 힘만 의지하면 나만의 바벨탑을 쌓거나 결국 터진 웅덩이(렘 2:13)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십시오. 무엇을 하든 가장 좋은 것을 하시고 가장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 남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가시길 소망합니다.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사람의 우연은 하나님의 섭리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룻 2:3) 룻은 신앙을 따라 힘든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우면서 생활해야 하는 극빈층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룻기를 보면 룻의 인생 뒤편으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섭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우연은 언제나 하나님의 필연이며 섭리이며 계획하심입니다. 룻기는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의 대화와 행동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모든 인간의 대화와 행동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내 인생 뒤편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지루한 또 하루의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신 우연들로 가득 차 있는 신비한 오늘이 펼쳐집니다.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찾고 찾는 믿음의 신비
주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사는 길을 알려줬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이 주시는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상’을 주신다는 것은 보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상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주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찾는다는 말은 찾을 때까지 찾고 또 찾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을 모른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고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쉬지 않고 주님을 찾고 찾는 것입니다.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그 나라를 사모하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선생이 작사하고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고향의 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가사가 이원수 선생이 10대 때 지었다는 점입니다. 노랫말은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쯤 된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담은 것처럼 보입니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세우실 나라를 사무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사무치는 마음을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으로 그 나라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어떨까요.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시므온이 불렀던 노래 첫 부분이 생각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그의 노래가 감동적인 것은 그가 예수님을 평생 사무치게 기다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향한 우리의 사무침이 약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최고의 성탄준비
라틴어에는 미래를 뜻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현재의 시간 뒤에 놓여있는 다음 시간으로서의 미래,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미래입니다. 우리가 애쓰며 만들어가는 미래, 이것을 라틴어로 ‘푸투룸(futurum)’이라고 하는데, 영어 ‘퓨처(future)’의 어원이 됩니다. 기독교인은 다른 차원의 미래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만드신 미래입니다. 이 미래를 라틴어로 ‘애드벤투스(Adventus)’라고 합니다. 대림절의 영어표현 애드벤트(Advent)의 어원입니다.
성탄절 앞 4주간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이 기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를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캐럴도 부르고 성탄 트리도 장식하고 촛불도 켭니다. 가장 중요한 대림절의 준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탄절에 천사들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찬송했습니다. 전쟁과 갈등을 멈추고 사랑으로 이웃의 손을 맞잡는 것이 최고의 성탄 준비입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자기를 비워서
어느새 겨울바람이 제법 매서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두툼한 옷을 꺼내 입고 옷깃을 여밉니다. 그러나 나무들은 화사했던 잎을 다 떨어뜨리고 맨몸으로 칼바람에 맞섭니다. 뿌리는 물을 빨아들이지 않고 나뭇가지를 바싹 말리지요. 그래야 혹한에도 얼어 터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무들은 멈추고 비워서 겨울을 견디어 냅니다. 겨울은 멈추고 비우는 자연의 순리를 배우는 계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6~7, 새번역) 빌립보서가 찬미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까요.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자기를 낮추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채우고 자기를 높여서 스스로 신이라고 선포한 카이저에게 영광을 돌렸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 그리스도를 찬미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 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비워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숟가락 다이아몬드의 교훈
튀르키예 이스탄불에는 진귀한 보물들을 볼 수 있는 톱카프 궁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무려 86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숟가락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다이아몬드를 우연히 발견한 어부가 보석상에게 숟가락 몇 개를 받고 팔았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명품의 진가(眞價)를 알지 못한 어부의 무지함과 최소의 지출로 막대한 이득을 취했던 보석상의 욕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의 죄성은 그런 무지와 악함을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영광을 무가치한 것으로 바꾸도록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죄는 이처럼 우리를 속여 소중한 것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죄 가운데 살던 비천한 우리를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숟가락 같은 우리를 오히려 다이아몬드처럼 여겨주시고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복된 계절 되시길 축복합니다.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신다
세상 속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지만 때로는 그 질서가 잘못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악인이 성공하고 의인이 패망하는 경우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팀 켈러는 그의 저서 ‘오늘을 사는 잠언’을 통해 이런 어려운 시대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질서가 세상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그 질서대로 이뤄지지 않고 세상이 왜곡됐다고 폭로합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질서가 왜곡돼 보이고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그 뒤에 여전히 하나님의 질서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부조리해 보이는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는 그 역사 뒤편에 흐르는 하나님의 질서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전도서처럼 부조리해 보이는 세상 속에 있지만, 욥기처럼 하나님의 질서는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의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보내셨는지요? 11월 2일 목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혹시, 독신남과 기혼남의 수명 차이가 14년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는지요? 그러니까, ‘아내가 있으면 14년을 더 산다.’는 말입니다. 글쎄, 오래 사는 것이 꼭 축복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내가 없더라도 아내가 있는 것처럼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수명 차이가 ‘식습관에 따른 결과’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혼자 살아야 더 오래 산다.’고 하니, 이 모순을 어찌해야 좋을까요?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노년의 삶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고독사(孤獨死)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꼭 외로움뿐일까요? 혼자이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외로워서 인생이 불행해지는 게 아닙니다. 혼자 있는 게 두렵고 외로움이 무섭다면, 외롭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외면한 채 ‘나는 왜 외로울까? 인생을 헛살았나?’하면서,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노후대비로 젊었을 때 보험이나 연금을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로움에 대비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적응’입니다. 살다보면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가 꼭 옵니다. 그 상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는 법은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경제적 준비를 잘해서 연금이 많이 나온다 해도, 그 연금을 쓸 능력이 없으면, 그것 또한 고통입니다. 단지 ‘저축을 많이 하고 돈 쓰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너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관념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은 ‘궁금증과 관심’에서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궁금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도 능력입니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길러집니다.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나이 먹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고, 그가 나에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점점 더 외로워질 뿐입니다.(출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 / 이대명예교수)
100세가 넘으신 김형석 교수님도 ‘노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고독’이라고 했습니다. 천성적으로 ‘혼자’ 있지 못하는 성격이 있는 가하면, 또 어떤 이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저는 거의 쉴 틈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작성합니다. 글이란, 주로 매일 발송하는 ‘아침편지’입니다. 그리고 세끼 식사 후에는 공원으로 산책 갔다 오는 것도 저의 일과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저에게는 ‘책을 읽는 즐거움’과 ‘아침편지 독자와의 교류를 통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은퇴 후에 저에게 이런 즐거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친구 하나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장로인 한 친구는, 교회봉사와 손주 보는 일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친구는, 공공근로를 다니면서 용돈을 벌어 쓰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무튼,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무엇이든지 찾아내어 일을 해야 합니다. 옛날의 어느 노인목사님은 노끈을 꼬아서 팔아가지고 선교사 후원하는 일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물맷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구나! 짝이 없이는 바로 설 수도 없을 테니, 저 사람의 짝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저 사람이 바로 살아갈 수 있겠지!”하고 말씀하셨다.(창2:18,현대어)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행18:3,쉬운성경)]
“마음의 짐은 두고 내리시길 바랍니다. 그 짐은 제가 갖고 가겠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11월 1일 수요일 아침입니다. 이번 한 달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 여섯 번째는,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통제’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이때, 자기통제는 ‘무조건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갈등 속에서, 아무 통제 없이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이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안녕하세요? 2호선 2079열차 승무원 ‘이상헌’입니다. 모두, 행복 가득한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매일, 안내방송으로 승객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제가 운행하는 열차승객들에게 작은 미소를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016년 입사 후, 처음으로 지하철을 운전한 날이었습니다. 기대에 부푼 저와는 달리, 승객들은 모두 피곤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니, 저 역시 굳은 표정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승객들을 위로해주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지친 하루에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곧 ‘안부를 묻는 안내방송’으로 바뀌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방송이 아닌, 소소한 감동이 실린 방송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게 맞는지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해보기로 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누군가는 기분 좋은, 또 누군가는 좋지 않은,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평범한 날을 보냈을 겁니다. 하지만, 열차를 이용하는 동안은 모두 평안하시길 바라며, 마음의 짐은 두고 내리시길 바랍니다. 그 짐은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다행히 저의 마음은 승객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민원창구에 ‘친절한 안내방송 감사합니다.’ ‘기관사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와 같은 응원메시지가 들어올 때면, 눈물이 날만큼 행복했습니다.
떨림을 안고 마이크를 잡은 지 7년입니다. 그동안 스쳐 간 승객은 700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 모두가 저의 응원을 듣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도 마이크를 잡습니다. 승객들이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그리고 안전하게 귀가하기를 바라면서.(출처; 좋은생각, 이상헌 / 서울교통공사차장)
혹시, ‘제빵 왕 김탁구’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KBS2에서 방영된 드라마입니다. 보신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빵을 만들어 팔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야말로 소비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스승 팔봉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주인공 김탁구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였습니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이야말로 ‘기관사로서 프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직종에서 일하든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소비자 입장을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일터에서 손님에게 최선을 다할 때, 그 자신도 손님으로 어떤 업종을 찾아갔을 때에 기분 좋은 서비스를 받음으로써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물맷돌)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더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하고 말하였다.(마25:23,현대어)]
행복한 사람은 신(神)을 찾지 않습니다.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10월 31일 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 다섯 번째는, ‘삶의 고통에 대한 이해’입니다. ‘정서적 성숙을 이룬 사람들’은 ‘인생에 풍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행복뿐만 아니라 슬픔을 느끼게 하는 상황’에서도 교훈을 얻습니다. 긍정적인 경험이 완전히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듯, 부정적 경험 역시 완전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회피하지 않는 것이 정서적 성숙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신(神)을 찾지 않습니다.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현세에 충실하며 지금을 즐기면 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신보다 ‘보이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진정 신을 찾는 순간은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입니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 신은 어째서 나를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는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사람은 ‘운명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고, 그제서야 신의 존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위인들의 삶이 지나치게 불행해서 얄궂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거나, 비참한 말년을 보냈거나, 경제적인 고난에 허덕였거나,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거나,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거나,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거나,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고통이 거대한 섭리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때로는 어떤 고통이 가혹하리만치 무정합니다.
그들에게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을 와인처럼 발효시키고, 어떤 사람은 식초처럼, 또 어떤 사람은 된장처럼 발효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숙성에 이르지 못하고 부패되는 삶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의 검증을 거쳐서 밝혀지게 될 진실들. 어떤 시간을 보낼 것이며, 어떻게 삶을 숙성시킬 것이며, 어떤 결과로 만들어낼 것인가?
때로는, ‘고통이 인생을 명작으로 숙성시키기 위한 과정’이라는 진리를 겸허하게 깨우치게 됩니다.(출처; 그린에세이, 반승아 / 수필가)
일단, ‘삶은 고통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인간성숙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잘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그 고통이 너무 심할 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낙심도 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사실, 저 자신도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질곡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난 후에는, 심히 후회가 되는 허무감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내가 그토록 수고하고 애쓴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기간이 바로 제가 ‘좀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시련과 질곡의 기간, 어쩌면 허무하다고 느껴졌던 그 ‘고난의 계절’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최종적인 결론은 ‘허무한 시간’이 아닌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물맷돌)
[하늘에서 여호와 인간들을 굽어 살펴보시며 ‘혹시나 깨달음 있는 이 있을까? 하나님을 찾는 이 있을까?’하여 찾아보시나, 모두 다 딴 길로만 걸어가 하나같이 썩어버렸구나! 착한 일 하는 이 찾을 수 없구나! 도무지 없구나!(시14:2-3,현대어) 시련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고, 인내는 강인함을 길러주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롬5:3하-4,현대어)]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먹고살 수 없다!’
샬롬! 어제 주일은 은혜로이 잘 보내셨는지요? 10월 30일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 네 번째는, ‘넓은 시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나 가족 내에서 겪고 있는 감정적인 측면에만 크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신체, 정신, 창조, 이성, 성취, 고통 등 우리 삶의 다양한 차원을 넓은 시각으로 아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이제는 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의 그 비율은 낮지만, 그러나 얼마든지 있습니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서 계속 일하느라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단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일하다보면, 거기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하고 싶은 일을 찾지도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을 방법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는 스물한 살 무렵부터 작가 겸 번역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걸로 먹고살 수 있겠어?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먹고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삶이 과연 즐거울까요? 사실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이유로 하는 일이 과연 즐거울까요?
소크라테스는 “살기 위해서 먹어라, 먹기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먹기 위해서 사는 인생’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저는 서른네 살에 작가 겸 번역가로 데뷔한 이래, 번역 이외에도 저서집필, 강연, 칼럼연재와 같은 다양한 의뢰를 받았습니다. 출간한 책이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TV와 라디오 출연 등 활동반경이 더욱 넓어지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좋아하는 일만 했을 때, 수입이 부족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먹고살 길’은 있습니다. 이것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출처; 시간 연금술사, 미야자키 신지 지음 / 박수현 옮김)
아시다시피, ‘먹고사는 일’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밥은 먹고 살아야, 자신이 원하는 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글쓴이도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요컨대, ‘먹고사는 일’이 변할 수 없는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정해놓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그래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단지, 먹고살고자 마지못해서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돈을 버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한 결과,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돈이어야 합니다.(물맷돌)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마6:33-34,현대어)]
남편은 남편대로 저는 저대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10월 28일 토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 세 번째는, ‘현실 인지’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합니다. 반대로, 원하는 대로 현실을 보거나, 과도하게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정서적 미성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한다.’고 해서, 환상이나 꿈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의 잘못도 큽니다. 시부모님과 시동생까지 함께 살면서 두 아이까지 키우다보니,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하건만, 저는 ‘너무 괜찮은’ 척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저는, 남편이 설마 ‘제가 힘들어하는 것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저는 남편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의 눈에는 ‘남편이 지독한 일중독자로서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가족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남편도 외롭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생활에 쫓기면서 너무 지친 나머지, 집에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쉬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남편대로 저는 저대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정신분석전문의’로 일하면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 으레 집에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다른 사람 이야기는 다 들어주는데, 남편만큼은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줬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도 밖에서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제가 먼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볼 때, 우리는 서로 상대방 말을 들어주는 대신, 일방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 정신분석전문의)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정신’은 어디에서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이기심 때문에 ‘죄와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죄와 사망의 길’에서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자,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겁니다. ‘십자가(十字架)’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사랑의 징표(徵標)’입니다. ‘당신이 죽어야 한다.’가 아니라, ‘너보다 먼저, 아니면 너 대신에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십자가의 정신’과는 너무나 먼 삶을 살고 있잖나 싶습니다. 특히, 십자가가 ‘믿는 자에게 구원의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이 십자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세상 이곳저곳에서 목숨을 내놓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십자가의 길에서 떠난 이들을 보고 비난하면서 자신도 그 길로 갈 게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본받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물맷돌)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16:24,표준)]
어떻게 해야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가 있을까요?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10월 27일 금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유익하고 보람찬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 그 두 번째는, ‘안정성’을 추구합니다. 이때 안정성은, 무조건 안정적인 생활 자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일관성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이곳저곳 배낭여행을 다니면서도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관적이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작했으나 제대로 끝을 보지도 않고, 금방 싫증을 내거나 또 다른 일을 시작하곤 합니다.
과거는 흔히 ‘간직하고 싶은 것’으로 통합니다. 기억하고 싶고, 보관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지냈던 시간보다 예쁘게 추억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과거가 그럭저럭 봐줄만 할 때의 일입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좌충우돌 실수했어도 적당히 귀여운 수준에 머물러야 현재에 다시 돌이켜볼 만합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일은 마음 같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쁜 추억만 쌓고 싶고, 뒤를 돌아볼 때마다 우아하게 미소 짓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우리는 수시로 실수하고, 뒤를 흘끔거리면서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흘러간 시간이라고 해서 모두 귀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돌아보는 이에게 지난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시원한 탈주로’가 필요합니다.
최근에, 저는 이별했습니다. 느닷없는 고백을 한 이유는, 뜬구름 잡는 말만 늘어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글은 거짓입니다. 짐짓 대단한 척 ‘과거’에 대한 철학을 주절거린 이유는, 결국 제가 요즘 이별을 계기로 뒤를 자주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막 이별한 사람만큼, 과거를 열심히 회고하는 이도 드물 겁니다. 그 과거 안에는, ‘외면하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묻어두고 싶고, 흘려보내고 싶은 시간들입니다.
비단, 연애뿐이겠습니까?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과거로부터 도망칩니다. 필요해서, 혹은 원해서 그렇습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자꾸만 잊고 싶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과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전한 대피소’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그곳에 이를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해야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지난 시간을 포용하고, 자신의 흉함도 받아들이라’는 말은, 제가 좀 더 성숙해졌을 때에라야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도망쳐 숨 쉴 구석’이 필요합니다. 연애든, 우정이든, 일이든, 어떤 측면에서든, 그런 순간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출처; 월간에세이, 홍수정 / 칼럼니스트)
두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다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머리에 자주 떠오르는 것은 안 좋은 추억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다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리는 과거사가 있습니다. 글쓴이는 ‘그런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글은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살면, 오늘을 건실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일 때문에 후회하거나 억울해하고 있으면, 오늘의 일이 미래에는 다시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되고 말 겁니다. 그러니, 과거와는 이제 이별해야 합니다. 물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붙잡혀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훗날에 후회가 없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오늘은 ‘뒤돌아볼 것 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물맷돌)
[“너희는 도망하여 목숨을 구하라. 뒤돌아보거나 도중에 멈추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창19:17,26, 현대인) 과거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니, 생활로 그것을 증명해보여야 합니다.(엡5:8,현대어)]
“지금 일어나야 네가 살아!”
샬롬!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10월 26일 목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내내 즐겁고 기분 좋은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부터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첫째는, ‘자기 인식이 잘 되는 사람’입니다. 자기인식은 ‘스스로를 관찰하여 자신이 가진 특징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데, 자기인식이 잘 되는 사람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을 맞닥뜨려도, 그 속에서의 자신의 행동과 성격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응급실 당직 의사가 말했습니다. “아드님의 목이 꺾여 완전히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의식이 돌아와야 수술을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전신이 마비될 겁니다.”
어머니는 ‘우리 위(이름)는 그럴 일이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고 계셨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제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저는 생사(生死)의 갈림길, 그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11시간 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내내 수혈을 받았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숨이 지금 멎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깨어나야 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마취를 하면 의식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어서, 그리고 수술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저의 이름을 아무리 부르고 제 몸을 흔들어 봐도, 저는 미동조차 없었습니다. 응급실에 온 많은 사람들과 목사님이 저를 위해서 오랜 시간 기도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수술 골든타임이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의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시간을 놓치면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예후는 절망적입니다.” ※예후 ; 의사가 병자를 진찰한 다음, 앞으로의 경과를 전망함. 또는, 그런 병의 증세.
의사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갑자기 저를 향하여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위야, 지금 일어나야 돼!”
“지금 일어나야 네가 살아!”
“눈 떠, 인마.”
“눈 떠, 위야 … 일어나! 제발!”
아버지는 절규하듯 소리치셨습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제가 눈을 떴다고 합니다. 응급실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모두 놀랐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MRI촬영을 하고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은 어둠을 헤매고 있던 저의 영혼을 붙들었습니다.(출처; 위라클, 박 위 / 유튜브 ‘위라클’ 운영자)
글쓴이는 건물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고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고개가 90도로 꺾였다고 하니,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듯이, 살아난다고 해도 ‘전신마비’가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운전도 할 수 있어서 멀리 여행을 가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글쓴이가 그런 사고를 당해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습니다만, 글쓴이가 그 엄청난 고통을 극복했다는 사실이 그와 비슷한 사고를 겪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시면, 유튜브 영상 ‘위라클’을 시청해보시기 바랍니다. ‘위라클’은 그의 이름 ‘위’와 기적을 뜻하는 영어단어 ‘미라클’의 합성어입니다.(물맷돌)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습니까? 그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다.(요9:2-3,현대어)]
내가 쓸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샬롬! 지난밤 좋은 꿈 꾸셨는지요? 10월 25일 수요일 아침입니다. 오늘하루도 유익하고 아름다운 일이 있길 기원합니다. 저의 가까운 지인 중, 주로 조연(助演)으로 활약하고 있는 TV탤런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무려 12시간을 기다렸다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출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다 쉽지 않지만, 장장 1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고 하니, 저는 그에게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문자를 발송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생활이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책임도 의무도 줄어듭니다. 시간이 늘어나고, 인내심이 많아지고, 감정이 섬세해집니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불어난 시간에 하나씩 해 보는 재미를 누리는 것도 좋습니다. 여행을 한다든지, 글을 쓰거나 악기를 배워도 좋을 겁니다. 진도가 더디 나가더라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칭찬해주지 않겠나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 긴 시간이 드는 일을 찾아 제대로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잘 안 되어도, 그리고 서툴러도, 시간이 넉넉하니 ‘나 자신’을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신기해합니다. 저의 주변사람들 중에는, 밤에 잠을 자던 중에 세상을 떠난 동창이나 선후배가 많습니다. 저 또한, 내일이 반드시 예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와! 눈떴구나! 하하하’하고 쾌재가 터져 나옵니다. 그 순간의 찰나적인 신비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이런 신비감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는 아침마다 기계적으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에게 남은 ‘생물학적 여명(餘命남은목숨)’이 적다는 데서 오는, 하루하루의 희열감에 매일 아침이 행복합니다. 이것도 ‘나이 든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일 겁니다. 어느 일본 시인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 물리다니!”라고 노래했는데, 제가 딱 그 심정입니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간다.’고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살지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나이 들었다.’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살았고 일했고 즐겼습니다. 지금 제 나이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 더 급합니다. 제가 쓸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출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 / 이대명예교수)
이 박사님은 위의 글에서 “시간이 넉넉하니 ‘나 자신’을 기다려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격 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70고개를 넘어 현직에서도 물러났으니, 그리고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니, 그냥 대충대충 해도 그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건만, 저는 여유 있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촌음(寸陰)을 아껴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해야 할 일들이 빈틈없이 정해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돈과는 상관없이 하는 일이라서, 더더욱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가 많습니다. ‘아침편지’ 발송하는데도 겹치거나 빼먹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휴대폰 하나를 통째로 빼먹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혹시 실수하거나 잘못이 있더라도 깊은 이해와 용서가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제가 이 나이에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물맷돌)
[인생살이 기껏해야 한 70년, 건강하게 살아도 80년인데, 그 인생살이 고통과 슬픔뿐, 덧없이 지나가고 쏜살같이 빠르게 날아갑니다.(시90:10,현대어) 시간(세월)을 아끼십시오. 때(시대)가 악합니다.(엡5:16,현대인)]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불안하고 우울해요!”
샬롬! 어젯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10월 24일 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이미 뉴스를 통하여 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중국의 한 맥주공장에서 ‘한 남자가 맥주원료에 소변을 보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입이 심심할 때 먹으려고 인터넷으로 생강젤리를 한 봉지 샀는데, 살펴보니 중국제였습니다. 그냥 먹자니 찜찜하고, 버리자니 아깝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 ‘멕 에럴’은 수많은 내담자로부터 공통된 고민을 들었습니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불안하고 우울해요! 우울증은 아닌 것 같은데….” 에럴은 오랜 연구 끝에 그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스몰 트라우마’였습니다. ‘스몰 트라우마’란, 누구나 고통스러워할 만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정서적 충격’입니다. 친구의 짓궂은 농담이나, “언제 취업하고 결혼할래?” 같은 가족의 잔소리, 말실수처럼 사소한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스몰 트라우마를 장기간 방치하면, 우울증은 물론, 무기력 만성피로 불면증 등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벗어나려면, 먼저 ‘내면에 잠식한 스몰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에럴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굳이 언급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여긴 경험이나 사건’을 하나씩 기록해 볼 것을 권합니다. 이때,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스몰 트라우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체를 알아냈다면, 이제는 ‘걸으면서 대화하기’를 해보길 제안합니다. 가까운 사람을 불러내어 함께 산책하면서 ‘스몰 트라우마’를 털어놓으라는 겁니다.
에럴의 내담자였던 ‘노아’는 어린시절부터 들어온 “남자답게 굴어!”라는 말에 사로잡혀서 ‘감정표현이 미숙한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사실을 친구에게 털어놓자, 그는 별것도 아니라면서 놀리는 한편 공감해줬습니다. 그런 반응에, 노아는 ‘이게 뭐라고, 나를 힘들게 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일을 고백한 것만으로도, 불안과 우울증이 사라질 수 있다니, 당장 누군가를 불러내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출처; 좋은생각, 남도연 / 기자)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언젠가 읽어본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90%이상이 우울증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자신이 ‘어쩐지 불안하고 우울하다면’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친한 친구를 불러내어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답답하거나 우울하다면, 정신과를 찾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저의 아내가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정신과를 찾아가 상담했더니, 우울증약 복용을 권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울증을 복용한 결과, 불면증이 아주 많이 해소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정신과를 찾아가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마시고 정신과를 찾아갈 것을 권합니다.(물맷돌)
[악한 영이 사울에게 덮칠 때마다, 다윗은 수금을 탔다. 그러면, 사울의 답답한 마음이 가벼워지고, 악한 영도 그에게서 떠나갔다.(삼상16:23,현대어)]
“난, 김치 하나면 돼!”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10월 23일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몸이 오작동할 때 일어나는 병’, 그 네 번째는 ‘제1형 당뇨병’입니다. 제1형 당뇨병은 어린이나 10대에 시작되는 청소년 유형의 당뇨병이랍니다. 신체가 음식을 에너지로 바꾸는 데 필요한 인슐린을 생성하는 세포가 공격받을 때 발생한답니다. 제1형 당뇨병에 걸렸을 경우, 혈당수치를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네요.
하루는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께서 방을 보러 오셨습니다. 손에는 주민등록증과 검은 봉지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장 싼 방을 달라며 덧붙였습니다. “아직 을지로에서 일도 하고 정정해요!”
‘할아버지께서 지내시는 동안 혹여나 잘못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방을 내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가 괴롭히고, 아들이 도망치듯 이사 가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람을 외면할 순 없었습니다. 원장님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고시원의 ‘가장 작고 구석진 방’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주방에 갔다가 저녁식사 중인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식탁 위에는 고시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밥과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난, 김치 하나면 돼!” 그 말씀에, 저는 용수철처럼 주방을 튀어나갔습니다. 저의 방 냉장고에 있는 마른 반찬 몇 가지와 마늘쫑, 그리고 동치미를 정성스레 담아 할아버지 밥공기 옆에 살며시 놓아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제 반찬인데 드셔보세요.” “어휴, 진수성찬이네! 아들한테도 반찬 좀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를 버린 아들이 반찬을 가져올 리 만무했습니다. 저는 마음 한편이 아려와 재빨리 제 방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방문 앞에 도시락용 김과 간식이 쪽지와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학생이 준 반찬 잘 먹었어요. 김이랑 군것질거리 몇 가지 두고 갑니다. 30호 할아버지가’ 호박엿, 포도 맛 사탕, 계피 맛 사탕, 흑사탕 그리고 눈깔사탕까지 …. 모두 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아껴 먹어 온 것들인 것 같았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며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은 방에서 저마다 꿈을 키우고 아픔을 녹이며 살아가는 고시원 사람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저의 가족입니다.(출처; 좋은생각, 신혜정 / 경기도 성남시)
오늘의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빚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하고 안타까운 모습들’ 중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사람 타고난 팔자가 그래서 그렇다’고 치부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앞날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어둡고 그늘진 구석을 유심히 잘 살펴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물맷돌)
[굶주린 사람에게는 네 음식을 나누어주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고, 입을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옷을 입혀주고, 어려운 처지의 동족을 보고서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아니냐?(사58:7,현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