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육의 여명 2>
경기고, 경기여고와 서울고
김붕래
<경기고교 1회 졸업사진. 1904. 7. 1>
배재학당, 이화학당 같은 사립학교에 이어 1900년에 4년제 ‘관립(국립)한성중학교’가 탄생했습니다. 개천절이기도 한 10월 3일에 개교했습니다. 이는 광복 후 중등학교 평준화가 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처음 세워진 위치는 지금 ‘정독도서관’이 있는 종로구 화동 2번지입니다. 정독도서관 입구에는 ‘성삼문 선생 살던 곳’ ‘김옥균 집터’ ‘장원서(掌苑署) 터’ 등의 표지석이 있어 경기고등학교의 풍수 또한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장원서는 왕실에 소용되는 꽃과 과일을 관리하던 관청입니다. 배, 밤 은행 같은 생과를 수확하면 종묘에 천신하고 궁중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꽃을 진상했습니다. 9월9일 중양절이 되면 만개한 국화를 궁중이나 의정부에 올리는 일도 했습니다. 꽃이 항상 만발한 마을이라하여 화개동(花開洞)이라 했는데 이게 줄어서 현재의 화동이 되었습니다. 이 화동 2번지, ‘관립한성중학교’가 들어선 자리는 600년 전에는 성삼문의 집터였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후에는 김옥균의 집터였는데 두 분의 공통점은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 했던 수재였다는 것, 불의에 눈 감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문명을 떨친 성삼문 김옥균의 정기를 이어 받았는지 광복 후 경기고는 최고의 수재 양성기관이 되었으니 지맥에도 DNA란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보빙사(報聘使)라 하여 미국 대통령을 예방합니다. 이 자리에서 사신 일행이 미 대통령에게 갓 쓰고 도포 입은 채 큰 절을 올려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된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서구 문물에 눈 뜬 정부는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1883년 ‘동문학(同文學)란 관립 통역관 양성소를 설치하고 1886년에는 ’육영공원(育英公院)‘이 문을 엽니다. 육영공원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교육기관이었는데 교사는 미국에서 초빙해 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헐버트 선교사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순 한글 세계 지리 역사 문화 교과서를 집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한문으로 다시 번역하여 선비들이 읽을 만큼 그 책의 인기는 높았습니다. 이런 신교육의 연장선상에서 1900년 ’관립한성중학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1900년 ‘관립한성중학교’의 탄생은 1899년 4월 공포된 「중학교관제」에 근거합니다. 심상과(尋常科) 4년, 고등과 3년으로 학제가 나뉘었지만 고등과는 설치되지 못했으므로 실제 수업연한은 4이었습니다. 1906년 학제개편으로 ‘한성고등학교’라 부르다가, 1911년 국권 상실 이후 ‘경성고등보통학교’라고 불리게 됩니다.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고, ‘고등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변해버린 학교 이름 하나로도 나라 잃은 민족의 비극이 얼마나 큰지 , 일제의 민족혼 말살이 어떻게 교육계까지 점령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처음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서울로 천도하면서 한양에 한성부를 설치하고 나라의 수도로 삼았는데,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찬탈하면서 조선 500년 동안 사용하던 ‘한성’이란 용어를 버리고 ‘경성’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즉 나라의 수도에서 경기도의 중심도시라는 뜻으로 격하된 것입니다.
또 ‘고등학교’를 ‘보통학교’라 부른 것도 치욕적인 일입니다. 보통학교란 현재의 초등학교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초등교육기관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뀜니다. 처음에는 ‘소학교’라 불렀는데 1894년 개교한 교동소학교가 그 시작입니다. 1906년 일본 통감부정치가 시작되면서 ‘소학교’는 ‘보통학교’가 되었다가 1938년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심상소학교’(심상은 특별하지 않은 예사스러운의 뜻)로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시점인 1941년 충용한 황국신민을 기른다 하여 ‘국민학교’라 하던 것이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쓰이다가 1996년 현재의 초등학교가 된 것입니다.
대한제국에서 최초로 세운 중등교육기관이 일제에 의해 ‘경성고등보통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으로 전락할만큼 학교 이름 하나에서 조차 얼룩진 식민정치하의 수난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한 일제 점령 36년 동안 경기고교 교장은 모두 일본인이었다는 것도 국권상실의 아픈 기억으로 남습니다.
광복 이후 1946년 미군정 시절에 6년제 ‘경기중학교’가 되었다가 1951년에 학제 개편에 따라 3년제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로 나뉘어졌습니다. 1968년 중학교 평준화가 되고 1971년 세칭 명문이란 꼬리표가 붙었던 30여개의 중학교는 문을 닫게 되는데 이 때 경기중학교도 폐교되어 경기고등학교만 남게 되었습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는 종로구 화동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고 남겨진 교사는 정독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도서관 앞의 ‘서울교육사료관’은 1921(1927?)년에 지어진 경기고교 옛 교사로 담벽에 <화동 구 경기고교.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호>라는 표찰이 새겨져 있습니다.
<경기여고 재동, 현 헌법재판소 터 교사 1922년>
중등여성교육기관은 1908년에 탄생했습니다. ‘관립한성고등여학교’란 이름으로 경기여고의 전신이 공조(工曹) 뒤뜰(현재 도렴동,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세워졌습니다. 국권이 상실된 1911년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란 보통학교의 명칭으 격하되어 불 리가 1922년 지금 재동 헌법 재판소 자리에 신축교사를 짓고 이주했는데 학교명칭도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1938년에는 경기공립고등여학교로 바뀌어 ‘고녀’란 용어가 식민지시절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45년까지 20여 년간 경기여고가 터 잡았던 종로구 재동 83번지,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는 사연이 많습니다.
그곳은 구한말 고종을 양아들로 들인 조대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박규수, 홍영식의 집터였다가 알렌 미국 선교사의 ‘제중원’이 세워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 이후 보성중학교 교장 최린이 살았고,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 선생도 이곳에 살다가 별세한 장소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면서 개화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박규수, 최초의 우정국(체신부)을 세웠던 홍영식 집터에 있던 백송이 아직도 헌법재판소에 정원에 남아 있습니다.
1922년 이곳으로 이전한 경기여고는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정동 1번지, 선원전 터로 이전하게 되는데 경기여고가 떠난 빈자리에는 다시 창덕여고가 들어왔습니다. 일제시대 창덕여고는 ‘경성제3공립고등여학교’라 했고,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이 섞여서 공부했습니다. 1989년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했습니다.
1945년 경기여고가 옮겨간 정동 1번지 교사는 일본제국시절 일본인 자녀가 다니던 ‘경성제1공립고등여학교’ 자리입니다. 일제가 물러나면서 폐교가 된 자리에 경기여고가 옮겨와 1988년 강남구 개포동으 옮기기까지 이 자리에서 많은 수재들을 길러냈습니다. 현재 덕수초등학교 옆입니다.
경기여고 출신의 유명 인사 이름 앞에는 ‘최초’란 호칭이 많이 붙습니다. 춘원 이광수의 아내인 허영숙(3회) 여사는 한국 최초의 개업의사, 이각경(3회)은 최초의 여기자, 마현경(16회)은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 또 경기여고 63회 3인방도 유명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강금실 법무장관,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김영란 대법관, 조배숙 국회의원은 경기여고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가수 양희은도 경기여고 출신입니다.
<서울고교 교정에 세워진 삼일탑과 포충탑(褒忠塔)>
중등교육 평준화 이전 경기고등학교와 자웅을 겨루던 서울고등학교는 1946년 3월 5일 개교했습니다. 경희궁이 있던 자리에 1910년 5월 일본 거류민들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경성중학교’를 세웠는데, 일본 패망 후 폐교가 된 자리에 공립 서울중고등학교가 세워진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5개의 궁전이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태종이 창덕궁을 지었습니다. 세종이 상왕이 된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경궁(수강궁)을 지었고, 광해군 때 경희궁이 지어졌습니다. 덕수궁은 원래 월산대군 사저였는데 임진왜란 시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머물며 경덕궁으로 불리다가 마지막 황제 순조가 아버지 고종의 만수무강을 빈다하여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올렸습니다. 아관파천에서 덕수궁으로 돌아간 고종은 경희궁과 덕수궁을 잇는 홍교를 설치하기도 했을 만큼 덕수궁과 경희궁은 인접해 있었습니다.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 경희궁에서 승하했으며, 영조 정조는 경희궁에서 오랜 기간 집무했지만 그 이후 임금은 주로 창덕궁을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궁궐이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는 전각들을 헐어 경복궁 건축의 자제로 쓰는 바람에 정전인 숭전전, 정문인 홍화문 등 5개 건물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일제는 이 터에 ‘경성중학교’를 세워 일본 거류민 자제를 교육하고 남은 전각들은 매각하면서 경희궁은 그 흔적마저 없어져 버렸습니다. 광복 후 경희궁 대신 이 궁궐터를 지키던 서울고등학교가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1987년 정문인 홍화문이, 1991년에는 정전인 숭전전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자리에는 서울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 하면 초대 교장 김원규 선생님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짧은 학교의 연륜을 무릅쓰고 일약 최고의 명문으로 만든 데는 김원규 교장님의 교육철학이 깊게 작용했습니다. 학교장 훈화 시간이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 여기 있는 제군 300명이, 앞으로 대한민국 3천만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향학열을 북돋았습니다.
평균 60점이 못 되는 학생은 유급시켰고, 한 과목이라도 40점 나오면 부모를 소환해 채근했습니다. 학생들 입에서는 ‘신문로 감옥소’란 말까지 유행했습니다. 1회 졸업생 135명 중 132명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데는 이런 채찍 못지않게 당근도 풍부했습니다. 유능한 교사진은 어느 학교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자칭 국보라던 양주동 박사를 비롯하여 시인 조병화, 철학자 안병욱 , 국어학자 남광우, 소설가 황순원 등 거물급 교사진의 한마디 한마디, 한걸음 한 걸음은 바로 모든 학생들의 보약이 되고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공부만 일등을 한 것은 아닙니다. 6.25 전쟁 발발 다음 날, 김원규 교장님은 영국 학생들의 나라 사랑의 예를 들며 구국의 이념과 반공정신을 고취시킨 탓도 있겠지만 어느 학교보다 많은 학생이 전선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서울고교 학생 457명이 학도병으로 참전, 35명은 산화했습니다. 특히 3회 졸업생 169명 중 118명이 학도병으로 자원하였으니 세계사에서 이런 예는 드물다 합니다. 지금도 서울고 교정에는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휘호가 쓰인 6.25 학도병 전사자를 위한 포충탑이 세워져 있으며, 6.25 60주년 서울고 동문 참전 기념비에는 ‘자유 민주주위의 수호’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기념비가 있습니다.
황동규 시인이 서울고교 3학년 때 쓴 <즐거운 편지>는 현재까지 많은 사람이 애송하고 있습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 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 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 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 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 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姿勢)를 생각하는 것뿐 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落葉)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1970년대 5대 공립이라 하여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이 유명했는데, 1969년 중학교,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가 되면서 이런 전통이 사라진지도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 대신 강남개발과 함께 ‘8학군’이란 용어가 생겼습니다. 교육 환경이 좋아진 강남구, 서초구에 있는 학교를 지칭하는 8학군의 뜨거운 교육열은 이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상향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첫댓글 말씀만 들어도 추억을 소환하네요
그렇게 가고 싶었던 경기고등학교,,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친구들은 늘 갈 줄 알았다는 말을 해줘서
위안을 삼았었지요
어려서 천재들은 젊어서 시인이 된다는데
추암 선생은 만능선수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이런 지면을 제공하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니듯.
금년에는 새로운 기획으로 추암 선생이 더욱 능력 발휘하시길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