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재를 주장하는 24가지 근거
1. 편찬 기록이 분명한 유일한 자료다.
세계에는 수많은 역사서가 있다.
지나(중국)에도 <중국25사>가 있지만 편찬날짜가 기록된 것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려사>권17에서 인종 23년 12월 임술일에 <삼국사>를 바쳤다고 했다.
<동문수東文粹>에 ‘진삼국사표’가 실려 있으나 동문선에는 ‘진삼국사기표’가 실려 있다.
정덕본도 표지와 판심어미는 ‘삼국사’로 각권 처음과 말미에는 ‘삼국사기’로 기재되어 있어
언제 ‘삼국사’가 ‘삼국사기’로 바꿨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각권의 서두와 말미에선 ‘삼국사기’로 통용되고 있다.
인종 23년(1145년) 6월 을해삭에 일식이 있는데 한보식이 편집하고
영남대학교출판부(1987년)가 펴낸 <한국년역대전韓國年曆大典>에서 양력 6월 22일에 일식이 있었고
12월 임술은 양력으로 1146년 2월 4일이 된다.
그러므로 왕에게 진상한 날자가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가 유일한 자료이다.
2. 세계사에서 천 년간 기록한 유일한 사서다
<삼국사기>는 연표와 삼국본기가
한나라 오봉원년(BC 57년)부터 후당청태後唐淸泰원년(AD934년)까지 991년간의 기록이다.
<삼국사기> 고구리본기高句麗本紀 보장왕 26년 2월조에
高句麗 역사가 구백년이라 하고 <당서> 220권 동이 고려 항목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高句麗는 구백년에서 천년을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高句麗 해모수 천제에서 시작해 경순왕 9년(935)에 패망하므로
<삼국사기>는 천년의 역사 기록인 것이다.
세계에서 천년을 기록한 사서는 없다.
왜냐하면 천년의 왕조를 지킨 나라가 없으니 천년의 기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高句麗와 신라가 천년을 이어왔기 때문에 기록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세계 어느 사서도 <삼국사기>를 대체할 수 없으므로 귀중한 자료이다.
3. 삼국시대는 아시아 전역이 삼국무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본문내용은 추후 보완 예정
4. 태수 낙랑과 왕의 낙랑을 구별하는 자료가 있는 유일한 자료다.
<지나18사>는 한의 4군이라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 있는데
이들 4군은 ‘군’인 만큼 모두 태수가 통치를 했다.
그런데 <후한서>동이전에서 高句麗의 남쪽에 예濊가 있는데 濊의 서쪽에 낙랑(군)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高句麗 동쪽에는 옥저가 있다고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는 낙랑태수가 있는 낙랑군만을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본기는 태수의 낙랑과 왕의 낙랑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다.
최리崔理 왕의 낙랑국과 같은 시대에 태수가 다스리는 낙랑군은
왕조王調 유헌劉憲 왕준王遵로 교체가 있었으니 낙랑군과 낙랑국은 전혀 다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낙랑군은 濊의 서쪽에 있고,
예와 高句麗 동쪽에 있던 옥저와 같이 있었던 낙랑국의 위치가 확연히 다르다는 기록은
오직 <삼국사기> 밖에 없고 이를 대체할 사서가 없다는 것이다.
5. 최치원의 <제왕년대력> 신라와 김부식이 논한 거서간-마립간의 신라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편에서 김부식은 <제왕년대력>에는 신라통치자를 모두 왕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거서간-마립간에서 신라왕이 됐음을 분명히 구분해
왕이라고 부른 신라와 간干으로 부르다가 왕이라고 한 신라가 각각 있었다고 김부식은 기록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서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선덕여왕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다른 항목인 오대산의 오만진신에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보천과 효명이라는 두 왕자를 둔 정신대왕이 있다고 하여 두 신라가 있다고 한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편이다.
또한 2005년 KBS가 이집트박물관에서 찾아낸 고 지도에서
신라가 둘인 지도를 규명할 사서도 <삼국사기> 밖에 없다.
즉 이를 규명하고 대체할 사서가 <삼국사기> 외는 없다.
또 신라본기는 진흥왕 비문에 등장하는 거칠부의 <국사>를 인용하였다고 하므로
이는 한반도 쪽의 신라기록이고, 당唐영호징의 <신라국기>는
당연히 당나라에서 가까이 본 신라의 기록으로 낙랑군 대방군을 병합한 신라의 기록이라는
<삼국사기>를 <지나18사> 동이전이 입증하고 있는 사로신라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제·로와 오·월사이의 사로신라와 만주와 한반도를 통치한 신라를 기록하고 있는 사서가 <삼국사기>다.
6. 간干(汗, 韓)은 고구리대왕高句麗大王의 신하이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신라에 거서간-마립간이란 직책이 있는데
이는 高句麗대왕과 동등한 자격으로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 高句麗本紀 양원왕 13년 환도성干의 모반 사건이 있다.
환도성은 高句麗 초기 수도였다.
그 곳을 다스리던 干이 모반을 했다.
여기서 환도성干이나 마립간麻立干이나 거서간居西干은 다 같은 干이므로
마립간麻立干에서 신라왕新羅王으로 변경한 신라는 高句麗에서 독립한 신라로 볼 수 있는 자료이며
진흥왕비문에 거칠부가 있으니 한반도 쪽 신라왕이다.
특히 호태왕비문에서 한韓으로 나타나는데
豆比鴨岑韓 永底韓 舍蔦城韓穢 客賢韓 巴奴城韓 百殘南居韓 大山韓城
두비압잠한 영저한 사조성한예 객현한 파노성한 백잔남거한 대산한성
으로 기록되고,
<신당서> 권220에 동이고리東夷高麗에 가한신可汗神이고,
<구당서>권199上 東夷高麗에서 가한신可汗神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干, 韓, 汗은 같은 발음으로 보아야 하며 모두 高句麗의 지역통치자를 말하는 것이다.
즉 干을 사용한 高句麗 지역은 직할지가 아닌 자치지역이라는 것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삼국사기>에 있다.
7. 삼국을 苗裔(묘예)로 나타내는 것은 구리九黎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이 살았던 구리의 백성 묘민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則三國祖先豈其古聖人之苗裔耶)”
(칙삼국조선기기고성인지묘예야)”
라 표기한 것은 삼국이 묘苗 즉 구리九黎의 백성 후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묘예苗裔로 표기한 신라는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말한
최치원의 신라 지역에서 가능한 기록이다.
<예기>권55에서 ‘구리지후묘민九黎之後苗民’이라는 기록이 있다.
8. 삼국에서 전통계승을 한 나라는 高句麗(고구리)이며 다물이라 표기하다.
고리高麗는 요의 소손령과 서희의 담판에서 보면
서희는 高句麗를 계승하여 국호를 高麗로 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高句麗의 말에 구토회복舊土回復을 다물多勿이라고 했다고 말한다.
주몽이 건국했다고 하는데 구토舊土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전전국가 구리九黎의 땅을 회복한다는 말인 것이다.
백제본기에 ‘삼국이 묘예가 아닐까’라는 표현이 있다.
<삼국유사>와 <신, 구당서>에서 신라는 苗裔로 표기한 것이 있으므로
신라는 九黎의 백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백성은 다수이므로 하나의 전통계승이라는 목표에는 미달한다.
그런데 백제는 <삼국사기>에는 수도를 한성漢城이라고 하는데
북사에서 백제 수도 명칭을 거발성居拔城이라고 했는데
거발居拔의 발음은 구리九黎를 건국한 거발한居發桓에서 따온 것으로 보면
거발과 한을 나누어 거발성 또는 한성으로 표기한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高句麗 백제 신라중에서
전전국가 국호 구리九黎의 음을 계승한 고구리高句麗의 다물多勿은
전전국가를 계승한 전통성에서 우선한다는 말로 보아야 한다.
9. <삼국사기>는 특산물을 통하여 통치지역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첫째 김유신 때 나침반을 생산하여 당에 바친 신라.
‘문무왕 9년(669) 정월 당나라의 僧(승) 法安(법안)이 와서 당제唐帝의 명령을 전하고 자석(磁石)을 구하였다.’
(唐僧法安來天子命救磁石)
(당승법안래천자명구자석)
‘五月 及飡 祗珍山(지진산)등을 唐나라로 파견하여 자석 두상자를 바쳤다.’
(入唐獻磁石二霜)
(입당헌자석이상)
‘문무왕 12년 급손及飡 원천原川과 내마奈麻 변산邊山 및 낭장朗將 감이대후와
래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와 본열주本烈冑 장사長史 왕익王益과 웅주도독熊州都督 사마司馬 예군과
증산曾山 사마司馬 법총法聰 등 170인을 당에 보내면서
동삼십만삼천분銅三十萬三千分, 침사백針四百, 금백이십분金百二十分, 승포 육십필 등을 보냈다.’고 했다.
자석과 침은 신라침반 즉 나침반의 재료인데
나침반이 한반도 쪽으로 온 것은 신라 패망이후 高麗시대이고 자석 생산지가 제齊·로魯지역의 자磁이다.
나침반을 생산한 신라는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표시한
최치원의 신라 지역 특산물일 때 가능한 기록이다.
두 번째 김유신 때 신라에서 목화를 高句麗에 주었다.
문익점이 高麗 때 목화씨를 가져와 면을 생산하게 됐음을 고려사에 전한다.
그런데 김유신 때 목화를 高句麗에 주었다.
문무왕 12년(672년) 9월 수미산을 高句麗에 보내 안승을 왕으로 책봉하고
갱미粳米 갑구마甲具馬 능직綾織 견세포絹細布 면綿15칭稱을 보냈다.
또한 <삼국지>와 <후한서>의 예濊과 한韓에서 작면作綿, 작면포作綿布라 하여 목화를 사용했다.
삼한三韓을 이은 신라는 당연히 목화를 사용하였으니 문익점의 高麗 지역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써 김유신 때 목화를 생산한 신라는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표시한
최치원의 신라 지역 특산물일 때 가능한 기록이다.
셋째 조선 때부터 시작한 양잠 비단의 생산지가 사로신라다.
혁거세 17년(BC41년)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한껏 토지의 이익을 얻게 하였다.
(勸督農桑以盡地利)
(권독농상이진지리)
파사 3년(82) 마땅히 유사를 시켜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군비를 조련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토록 하라
(宜令有司勸農桑練兵草(革)以備不虞)
(宜令有司勸農桑練兵草(革)이비불우)
눌지 7년(423) 남당(南堂)에서 늙은이를 대접했는데
왕이 친히 음식을 나눠주고 차등하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었다.
(養老於南堂王親執食賜穀帛有差)
(양노어남당왕친집식사곡백유차)
소지炤知 22년(500) 왕이 날이군(捺已郡)을 순행했는데
그곳 사람 파로의 딸이 벽화碧花이고 나이는 16세인데 얼굴이 참으로 국색國色이었다.
그 아버지는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 채색 비단으로 덮어 씌워 왕에게 바쳤다.
(王幸捺已郡郡人波路有女子名曰碧花年十六歲眞國色也其父衣之以錦繡置與冪以色絹獻王)
(왕행날이군군인파로유녀자명왈벽화년십육세진국색야기부의지이금수치여멱이색견헌왕)
고 했다.
문무王 5년(665) 왕은 唐의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후히 주었다.
(王贈唐使者金帛尤厚)
(왕증당사자금백우후)
그런데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에서 동이는 기자 때부터 잠상蠶桑이라 했다.
한韓·예濊·왜倭에서 비단을 짯고 신라에서도 비단을 주었는데
조선 말기에 비단장사는 왕서방이라고 할 만큼 명明·청淸의 비단이 좋은 것은
바로 신라의 존재 지역을 말하며 신라新羅(silla)의 금錦(Keum)의 준말이 Slik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단을 생산하여 나누었던 신라는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표시한 최치원의 신라 지역 특산물일 때 가능한 기록이다.
넷째 고구리高句麗 백제百濟 신라가 지나 땅의 여러 왕조들과 조공이라는 형식의 무역을 하였는데
高句麗·백제·신라와 장안 국가에 출발과 도착이 모두 같은 달에 이루어지므로써
1개월 이내로 왕래하는 지역이라 는 것이다.
이것은 유·연·제·로, 오·월 지역에서 보면
장안은 가능하지만 거리상 韓朝(한반도)에서 장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개월 이내에 무역일수를 맞출 수 있는 신라는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표시한 최치원의 신라 지역 특산물일 때 가능한 기록이다.
10. 인구로 본 삼국
백제는 유·연·제·로-오·월 지역에 일치된다.
<삼국사기>에는 高句麗는 69만戶이고, 백제는 76만호라 하였다.
高句麗 백제가 패망한 이후 (한)조선 세종 8년(1426년)은
경기, 충청, 전라도 총 호수가 69125호로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중종 14년(1519) 조선총인구가 75만4천146호였다(한국통계발달사.92년 통계청)
그런데
백제가 패망하고 830여 년이 지난 1491년 명나라 산동성 인구는 77만호이다.
백제의 戶숫자와 비슷하다.
<삼국사기> 권46에서 高句麗 百濟가 유·연·제·로-오·월을 통치했다고 하였는데
1491년 산동성 인구가 77만호라는 것은 인구로 본 백제지역은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통치했다는 高句麗 백제의 지역 인구일 때 가능한 기록이다.
11.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의 홍수와 가뭄 기록은 유·연·제·로-오·월 지역에서만 가능한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 홍수가 시작되면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다르게 기록될 수 있는 확률이 높지 않다.
그런데 신라와 백제가 같은 해의 홍수를 당하는 기록이 없고 같은 달 홍수 기록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가뭄이 신라가 55회, 高句麗가 10회, 백제가 30회가 있었는데
신라와 백제가 같은 해 같은 달에 가뭄의 기록이 없다.
한편 백제와 신라에서 각각 다르게 홍수와 가뭄으로 다르게 기록되기도 했다.
이것은 高句麗 백제가 강성할 때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로를 점유하여 장안의 두통거리가 됐다고 하는데
제·로-오·월 사이에는 최치원의 신라가 있었다.
홍수와 가뭄의 기록은 유·연·제·로-오·월에서는 가능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唐영호징이 기록한 사로신라의 신라국기에서 기록했을 수 있다.
12. 명절로 본 두 신라 : 제齊·로魯와 오吳·월越 사이가 더 활발하다.
<삼국사기>에서 8월15일을 가배절이라고 했다.
원인圓仁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8월15일은 당나라와 일본에 없는 신라 고유명절이라고 했다.
또 신라기록에서 9월9일이 명절이라고 했다.
현재 유·연·제·로-오·월에는 8월15일, 9월9일은 신라 고유명절이라고 했는데
아시아에서 한국만 이 명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에서는 두 명절이 다 성황하게 지내는데 한국에서는 8월15일에만 풍성하다.
당나라 이후에 두 명절을 지내게 됐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가라 高句麗 백제에서 광복한 유·연·제·로-오·월사이의 사로신라와
高句麗에서 독립한 만선滿鮮의 신라에 각각 대입하면 가능성은 齊·魯와 吳·越 사이의 신라에 가능성이 높다.
13. 삼국의 지진 기록으로 본 연구 :
<삼국사기>에 高句麗 백제 신라의 지진 기록이 있으나 그 자체로 각 국가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지나18사> 동이전의 배열에 각각나라의 지명을 삽입하고 그 위치를 찾으면 삼국사기 권46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곳에 다시 지진 기록을 삽입하여 연구하면 지진지역을 찾을 수 있다.
예로 환도성의 지진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환도성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이 있는
高句麗 위치를 찾아서 연구했다면 당산 지진도 예측했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 지진으로 제·로와 오·월 사이 양즈판의 지각운동도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천년의 지진 기록으로 지각활동을 연구한다면 많은 연구가 될 것이다.
14. 백제가 패망하고 그 땅을 발해와 신라가 나누었다.
<삼국사기><구당서><신당서><삼국유사>는 분명하게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을 발해와 신라가 통치했다.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百濟之種遂絶)’
(기지자차위신라급발해말갈소분백제지종수절)’
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충청도에서 지역에서 패망했다는 현재의 논리로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 권46에 의하여 高句麗 백제가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점유하고 있을 때는 가능성이 있다.
즉 발해만을 발해가 둘러싸고 있었다면 가능한 것이다.
<남제서>에 의하면 광양군, 청하군, 낙랑군, 대방군, 성양군, 광릉군은 유·연·제·로 상에 있다.
즉 발해만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 패망 기록은 유·연·제·로-오·월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삼국사기> 권46을 <지나18사> 동이전이 입증하고 있으니 반드시 검증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발해와 신라가 나누어 가진 기록을 해석할 수가 있을 것이다.
15. 산업비밀의 선구자 쇠뇌의 기술자 구진천
진평 10년(558) 신득身得이 노弩와 포砲를 성위에 설치했다.
문무왕 9년(669) 겨울 당의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달하고 弩의 기술자 사찬 구진천과 함께 돌아갔다.
구진천이 唐에 도착하니 당제는 목노木弩를 만들게하여 쏘아본 바 30보 밖에 벗어나지 못했다.
당제는 묻되 ‘듣자니 너의 나라에서 弩를 만들어 쏘면 1천보를 간다던데
지금 겨우 30보밖에 나아가지 못하니 웬일이냐?’고 하자
구진천이 대답하되 ‘재료가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당제는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아 본즉 60보 밖에 더 못나가므로
그 이유를 물은 바 대답하기를 ‘신도 역시 무슨 까닭으로 그러는지를 알지 못하겠사오니
아마도 그 목재가 海를 거쳐올 때 습기를 머금었던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하였다.
끝끝내 그의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쇠뇌는 기계장치에 의하여 여러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게하는 활을 말하며
백과사전에서 ‘동양의 쇠뇌는 중국에서 남방 민족의 영향을 받아 BC4세기 전국시대부터 사용됐고
진秦·한漢시대에는 매우 성행했으나 당 이후에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쇠뇌의 기술이 유·연·제·로-오·월과 한반도의 어느 쪽에 발전할 가능성은 제·로-오·월 사이가 더 가능성이 높다.
16. 백제 한성의 조건
<지나18사>에 없고
<삼국사기> 개로왕 20년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於是盡發國人烝土築城卽於其內作宮樓閣臺榭無不壯麗又取大石於郁里河作槨以葬父骨緣河樹堰自蛇城之東至崇山之北)’
(어시진발국인증토축성즉어기내작궁루각대사무불장려우취대석어욱리하작곽이장부골연하수언자사성지동지숭산지북)’
고 하였다.
또한 위치는 개로왕 十八年,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다.(立國東極)라고 하였다.
명칭으로 河는 하수, 사성에서 숭산까지 제방, 욱리하, 동쪽 끝이 있는데 욱리를 생산하는 지역이 개봉지역이다.
근처에 숭산의 북쪽 황하가 하수인데 동쪽으로 제방이 있는데 이곳은 동쪽 끝이다.
유·연·제·로-오·월 지역은 증토축성 즉 벽돌로 성을 마련한다.
그래서 백제의 한성은 유·연·제·로-오·월 지역과 한조(한반도)에 한성조건을 대입하여 보면 제·로 지역에 일치한다.
17. 백제의 웅진
<삼국사기> 의자왕 20년에 웅진에 대한 조건이 있다.
Ⓐ <삼국사기>를 보면 웅진에는 이런 유적이 있어야 한다.
① 동성왕22년(500)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
(기임류각어궁동, 고오장, 우천지양기금. 간신항소불보, 공유복간자, 폐궁문)
--이러한 유적지가 있어야 한다.
② 무왕 35년(634)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 낸 섬을 쌓았다.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천지어궁남, 인수이십여리 사안식이양류 수중축도서 의방장선산)
-- 이러한 유적지가 있어야 한다.
Ⓑ 사비에는 이런 자연이 있었다.
무왕 37년(636) 3월 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서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沘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 如畫圖.)
(삼월, 왕솔좌우신료, 유연어사비하북포. 량안기암괴석착립, 간이기화이초, 여화도.)
Ⓒ 웅진은 아래와 같은 자연조건이 맞는 백강을 가진 지역이 돼야 한다.
의자왕 20년(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5월 폭풍우가 몰아쳤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7월 나당연합군이 백강으로 침투했다.
분명히 백강은 3개월 이상 강물이 변동이 적은 자연조건이 있는 지역이다.
공주의 금강은 홍수가 있었어도 보름 이전에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즉 홍수와 같은 물이라도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齊·魯지역은 호수가 있어 홍수로 물이 불으면 그것은 오랜 동안 유지한다.
(당 용삭) 2년(662)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다.
이때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경우가 매우 빈번했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했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二年七月仁願仁軌等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衆仍令
分兵以鎭守之福信等以眞峴城臨江高嶮當衝要加兵守之)
(이년칠월인원인궤등대파복신여중어웅진지동발지라성급윤성대산사정등책살획심중잉령
분병이진수지복신등이진현성임강고험당충요가병수지)
라 했는데 대산 즉 태산의 서쪽에서 웅진을 찾아야 한다.
18. <삼국사기>와 호태왕비문
호태왕비문은 高句麗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것이고
<삼국사기>는 731년이 지난 후의 기록인데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으로부터 호태왕까지는 13세손이다.
대수로는 19대이다.
그런데 호태왕 비에는 17세손이라고 되어 있으니
<삼국사기>에서 해모수 천제로부터 주몽 이전까지 4세가 삭제된 것이다.
시조 해모수(1대) 2세 모수리(2대) 3세 고해사(3대), 고두막(5대), 4세 고우루(4대), 고무서(6대)를
찾을 수 있는 자료가 호태왕비문 17세손이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9백년 역사라 했으니
해모수에서 주몽 사이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또 광개토대왕때 백제정벌은 <삼국사기> 권46에 의해서 유·연·제·로-오·월 지역으로 대입해야 한다는 것을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다.
즉 진秦·한간漢間이 숨겨지게 된 것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신라보다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이 용납이 안됐을 것이고
또 한나라보다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고 숨기게 된 부분을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 김유신과 족보와 역사적 계승관계
<지나18사>는 우리역사가 치우의 九黎 다음 단군의 朝鮮
다음 기후의 번조선에서 기준의 삼한으로 이어지고 <삼국사기>도 苗 다음 鮮人
다음 변한 그리고 김유신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소호금천 씨의 후예로 김수로왕이 있고 그 후예에 김유신이 있다.
그런데 치우와 기자, 소호도 유·연·제·로-오·월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 지역에는 수로왕과 관계된 지명이 <환자기寰字記> 구명구자산舊名九子山이 있는데
이백李白 이후 구화산으로 변경됐다.
또 허촌이 있고, 신안강이 있고, 묘수廟首에 潰池(궤지)가 있는데 潰는 상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김유신의 활동지명으로는 덕안, 동명, 동성, 잠산, 서성, 황산, 항성, 침구, 주류자 등이 산재해 있다.
역사적 맥으로 보나 <삼국사기> 열전으로 보나
김유신 때 특산물 목화, 신라침반, 비단, 쇠뇌 등으로 보아도
김유신과 그 선조는 유·연·제·로-오·월 사이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더 이상 숨길 수는 없다.
20. 高句麗장성 그리고 高句麗평양성
高句麗장성 기록은 <삼국사기>와 <신, 구당서>에 있다.
<삼국사기>는 東北自夫餘城 東南至海有里(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유리)이라 기록됐다.
<구당서>는 東北自夫餘城 西南至海有里(동북자부여성 서남지해유리)라 하고,
<당서>는 東北首夫餘城 西南屬海久(동북수부여성 서남속해구)라 했다.
지명으로 보이는 부여성과 해는 같다.
<구당서>와 <당서>는 서남쪽 으로 한 것은 같으나 東北自와 東北首가 틀리는데
自-至의 개념을 首-至로 변경한 것은 현 평양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동북에서 동남이라고 했다.
서남쪽에서 본 기록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것은 평양성이 <삼국사기> 권46의 高句麗 위치에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당나라와 高句麗전쟁 지명과
한과 高句麗 전쟁 지명(북평, 어양, 상곡, 태원, 은산, 요주, 용도 등)이 이를 입증한다.
21. 장보고와 을지문덕의 전적도 유·연·제·로-오·월이 유력하다.
<삼국사기>권43 열전 김유신전에 의하면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어도 송나라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할 수 없을 것이다.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卽泯滅而無聞)’라고 했다.
(수유을지문덕지지략장보고지의용미중국지서즉민멸이무문)
김부식 외 11인은 高麗 땅에 소문도 기록도 없어서 송나라 서적이 없었다면 기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을지문덕전은 <수서> 권60과 권61에서 인용한 것이다.
장보고전은 <당서> 권220에서 인용했다고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보고 내용은 <지나18사> 동이전에는 없다.
이것은 <삼국사기> 권46에 말한 남으로 오·월과 북으로 유·연·제·로 사이의
최치원 신라지역을 기록한 唐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 인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실도 삼국사기가 있었기에 풀이할 수가 있는 것이다.
22. 낙랑왕 최리와 자명고각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32)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 때 낙랑왕 최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아들이지 않겠다.”
옛날부터 낙랑국에는 북(自鳴鼓角) 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 때 최 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은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국을 병합하게 했다.
최리는 자명고각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이 찢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했다.
(夏四月王子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因見之問曰觀君顔色非常人豈非北國神王之子乎遂同歸以女妻之後好童還國
潛遣人告崔氏女曰若能入而國武庫割破鼓角則我以禮迎不然則否先是樂浪有鼓角若有敵兵則自鳴故令破之於是崔女將利刀
潛入庫中割鼓面․角口以報好童好童勸王襲樂浪崔理以鼓角不鳴不備我兵掩至城下然後知鼓角皆破遂殺女子出降.)
(하사월왕자호동유어옥저락랑왕최리출행인견지문왈관군안색비상인기비북국신왕지자호수동귀이여처지후호동환국
잠견인고최씨여왈약능입이국무고할파고각칙아이례영불연칙부선시락랑유고각약유적병칙자명고령파지어시최여장리도
潛入庫中割鼓面․각구이보호동호동권왕습락랑최리이고각불명불비아병엄지성하연후지고각개파수살녀자출강.)
자명고각은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러 방비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왕의 물건이다.
이처럼 옥저 쪽에 있던 낙랑국이 패망하여 高句麗에 병합되므로서
32년부터 503년 동안 干들의 통치가 됐다는 것을 증명할뿐 아니라 우리역사에서 만선을 찾아줄 유일한 자료이다.
23. 거칠부 국사
거칠부의 <국사>는 간에서 왕이라 변경한 신라의 기록이다.
거칠부라는 글자는 진흥왕비문에 등장하고 그가 살았던 기간의 역사,
즉 지증왕에서 진지왕까지가 그 내용으로 볼 수 있다.
24. 자연현상 기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삼국일식집중관측지연구)
-1994. 4.15 세종문화회관 박창범 교수 발표문
高麗시대에 집필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는
삼국시대에 일어난 일식日蝕이 67회, 행성行星운동의 이상 현상이 40회, 혜성彗星의 출현이 63회,
유성流星과 운석隕石의 낙하가 42회, 기타 14회 등 총 226회의 많은 천제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사서에도 나타나는 이러한 천문현상 기록들은
각국 고대과학의 수준과 역사를 가늠하는 척도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천문현상에 대한 우리의 고대 기록들은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다.
그런데 이 천문현상 기록들은 순수과학적인 그리고 과학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학에도 그 응용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천체에 대한 기록을 당시 주변 국가들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써 과학 문물의 흐름을 알 수 있고,
또한 특정 국가가 남긴 천체 관측 기록을 분석하여 정세변화, 강역의 위치 등을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천문현상 기록뿐만 아니라,
지진地震, 홍수洪水, 태풍颱風 등의 기상학적, 지질학적 기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자연현상 기록은 다양한 가치를 갖는다.
이 기록들을 이용하여 본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천체 관측 기록으로부터 관측을 수행한 나라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은
일식과 같은 현상의 경우 달 그림자가 지구상의 모든 곳에 드리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만 식蝕의 진행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또한 여러 해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식들을 관측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에 나타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관측자의 위치, 곧 그 국가의 위치가 되리라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일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는,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들에 대응하는, 천체역학적으로 계산한 실제 일식들의 진행상황을
동아시아 전역에서 조사하여, 그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를 찾는 방법이다.
다음 쪽에 나오는 세 도표의 평균 식분도는
신라(24회)와 백제(19)와 고구려(8회)에서 기록한 일식중
동아시아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일식들의 평균 식분을 보여준다.
윤곽선 안쪽 지역으로 갈수록 평균 식분이 크며,
이것은 곧 그 기록을 남긴 국가의 위치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삼국의 일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곳이,
세 경우 모두 한반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식 기록 횟수가 적은 고구려의 경우에는 최적 관측지가 확실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백제나 신라의 경우보다 북쪽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적 관측지가 확실히 보이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각국의 관측자가 발해만과 양자강 유역에 각각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삼국의 위치를 찾기 위한 두번째 방법으로는
앞의 방법과 정반대로 개개의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을 모두 볼 수 있는 지역을 바로 그 국가의 위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 쪽의 세 도표에서 잔 점들을 찍은 곳이 바로 이런 지역이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1개, 2개 또는 그 이상의 일식들은 기록이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 수 없는 지역이다.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
기록된 일식을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 앞에서 보인 최적 관측지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관측자가 경주에 있다면, 동아시아에서 관측 가능한 24개 일식 중 2개를 전혀 볼 수 없다.
백제와 신라가 현재 중국의 동쪽 지방에 있었다는 생각은 최근 일부 재야 사학가들에게서 제기 되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그들의 주장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천체 관측만을 이용한 본 연구 내용에서만 생각하면,
왜 기존 역사관과 달리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중국대륙에 있다는 결과가 나왔는가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에 실린 일식기록이 중국기록을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다.
삼국의 천체관측 기록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연구되어 왔다.
천체역학적 계산과 사료 비교를 통해
그들은 적어도 5세기까지의 삼국사기 천문현상 기록들은 중국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191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과학사 서적들에도 이런 주장이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구미에서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에는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같은 문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백제와 신라가 실제로 중국대륙 동부에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일식기록도 삼국의 독자적인 천체 관측 기록들일 가능성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 연구의 결과는 삼국의 위치가 분명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는 심하게 왜곡된 것이고, 바로잡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진실에서 벗어나 異민족이 보고 싶은 대로 왜곡시켜 후손에게 전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완)
* 위치 배열도
* 유연제노오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