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I)
김명도 교수 / 튤립 선교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 중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방언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 은사로 인하여 교만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쓰다가 말고 13장에서 어떤 은사를 받건 그것으로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랑에 대하여 교훈한 후에 다시 방언에 대하여 깊이 설명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이 바로 그 방언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다.
요즘 방언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 성도 간에 불화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방언 문제는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혹은 방언을 못하면 덜 신령한 사람으로 3등 크리스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 사람들은 고린도교회에 주어졌던 방언을 인위적으로 배워서 교회 집회 때 방언함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일등 크리스챤” 층에 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방언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고 있고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주눅이 들어 방언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과연 방언을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인가? 방언은 배워서라도 곧 습득하여야 “일등 크리스챤”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이 진리라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방언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현상이 진리가 아니라면 단연 이런 사이비 운동과 맞서 싸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현대의 방언은 성경적인가? 아니면,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방언을 하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분명 오늘의 방언의 성격을 잘 살펴서 진리를 알 필요가 있다.
I. 방언의 의미
방언은 헬라어 원어로 “glossolalia”인데 이는 두 단어가 합해서 구성된 복합명사 인데 “glossa”란 “혀, 언어” 등의 의미이고, “lalia”란 “말한다”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말, 즉 언어로 말한다”라는 의미이다. 언어학 (linguistics)에서 glossology라고 하면, 이는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의 분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glossa”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50번 이상 나온다. 야고보 3:5에서는 사람의 몸의 일부인 혀에 쓰이고, 사도행전 2:3 에서는 불의 혀에서 “혀”라는 말로 사용되고, 그 외에는 모두 “말” 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행전 2:4에서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고 했는데, “다른 방언”이란 그들이 일상 사용하는 말이 아닌 다른 언어를 말한다(뜻을 모르는 말이 아니라, 뜻을 아는 말 즉 known language이다). 독일어가 존재하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독일어를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으며 또한 그 말에 익숙해 있지 않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서 갑자기 독일어로 말한다면, 이야말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가 배우지 아니한 다른 나라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들었다는 말이며, 전혀 아무도 모르는(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Sola 주: 사도들이 다른 나라 언어로 계시의 말을 전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였으므로 이해하고 들었다는 뜻)] 계시록에서 다음 성경구절을 보라 : 계5:9; 7:9; 10:11; 11:9; 13:7; 14:6; 17:15 등 구절을 보라. 이 모든 성경구절에는 “방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방언은 아무도 모르는 오늘날의 방언이 아니고 세상 나라 사람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인가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한다.
II. 방언의 현 좌표
오늘 교계에서는 방언은 어느 한 교단에서만 유행하는 현상이 아니고, 전 세계 어느 곳이나 교회가 있는 곳에는 이런 방언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옛날 고린도교회에서 방언 문제가 복잡해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전적으로 방언을 다루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방언으로 인하여 성도간에 분열(分裂)이 생기고 교회 성도들 간에도 온갖 문제를 유발하는 현상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던 미국 정통장로교단(OPC)도 요즘에 와서는 방언하는 목사를 파면하는 등 수난기를 당하고 있고, 한국 교단은 예외 없이 어느 교단이고 대부분 좀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면 모두 방언을 말한다. 한국의 교인들은 크게 자유파와 보수파로 분류되는데, 자유파는 성경을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서 믿을 것은 믿고 믿기 어려운 부분을 불신 하지만 문제는 소위 “보수파”라는 교회들에 있다. 한국 사람으로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신령한 체험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고, 방언을 하는 성도라야 보수파 신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자로 매도한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치지 못하고, 방언을 못하고, 환상이나 계시를 못 보면 그는 자유주의 신자라는 것이고 반면에 이런 일들을 하면 그는 보수파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남미, 특히 미국 Arizona 주 Phoenix 근처에 있는 New Age본부가 있는 Sedona라는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른바 “영적 체험”을 하고 “방언”을 말하며, 심지어 “영겁전(永劫前)에 살다가 죽은 사람과 영적으로 교통한다”고 한다.
(Edmond Gruss. Ouija Board: Doorway to Satan. (P&R) 참고).
방언 문제는 아주 심각하여 비단 교회만이 아니라, 신학생들에게도 상당히 파고 들어가게 되어 드디어 Westminster 신학교 교수 Richard Gaffin, Jr. 박사는 일 년간 특별 휴가를 받아서 방언을 연구하도록 학교 당국에서 배려했는데, 그 연구결과가 바로 그가 쓴 “The Perspectives on Pentecost”(은사론)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O Palmer Robertson 교수의 The Final Word라는 책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데, 방언 연구에서 으뜸가는 성경적 평가서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 일은 미국 정통장로교단(OPC)에서 방언하는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한 직후에 이루어졌으며, 1974년도부터는 그 교단 헌법을 수정하여 “Any minister who speaks in tongues shall be divested”(방언하는 목사는 직위에서 해제한다)라고 못 박고 있는데, 지금은 그 교단 안에 방언 문제만 아니라 복음성가 문제, 아동 성찬식 참여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방언과 복음성가는 세계 모든 교단에 파급되어 있어서 이미 걷잡을 수 없게 사태가 악화되어 버렸다. 얼마 전 Scotland의 1636년 언약파(National Covenanters)들의 후손인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ARPC)는 복음성가 문제로 파가 갈라져서 NAPARC(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현재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7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고는 하나, 1976년 당초의 설립 목적과는 달리 회원 교단 중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RCUS)와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RPCNA) 등 두 교단을 제외한 다른 교단들은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는 방언을 못하면 자유주의자로 오인되고 방언을 하면 신령한 보수주의자로 환영을 받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처럼 되어 버렸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놀라운 것은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혹자는 산에 있는 “신령한”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배우기도 한다. 성경 어디에 방언을 배워서 하라고 가르치는가? 미 육군 군목출신의 Martin R. Carothers라는 분이 쓴 Prison to Praise라는 책(pp.33-37)에서 그가 방언을 배우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방언을 배워서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III. 방언의 성격
고린도교회에 방언이 있었던 것은 부인하지 못하다. 문제는 고린도에 있었던 방언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는 방언 현상과 같은 성격인가 여부에 달려 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분명히 성서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환상, 계시, 방언, 꿈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주셔서 그것들을 성경에 기록되도록 하셨고, 그런 방법으로 성경을 완성하도록 역사하셨다(히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10 참고). 다시 말하면 방언은 성경이 아직 완성 되기 전에 하나님이 그의 계시를 주시는 방법중 한 가지였다.
옛날 장님 여섯 명이 코끼리를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앞을 못 보는 장님들은 각자 나름대로 코끼리를 손으로 만져 보면서 설명할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첫 번째 장님은 코끼리는 벽처럼 편편하다고 말했다. 둘 째 장님은 창과 같다고 했고, 셋째 장님은 뱀과 같다고 했고, 넷째는 나무 같다고, 다섯째는 부채 같다고, 그리고 여섯째 장님은 밧줄 같다고 했다. 여섯 장님들은 촉각을 통해서 모두 자기 나름대로 깊이 연구한 끝에 각자가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니 저마다 자기 의견이 옳다고 갑론을박하며 싸우는 것이었다. 종일 토론해도 어느 장님도 코끼리를 알지 못했으니 장님 여섯 명은 모두 맞고 동시에 모두 틀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 카리스마 운동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체험에 그들의 의견의 근거를 둔다. 모두 “내가 경험했으니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논리이다.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사람의 체험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A라는 사람이 체험한 것을 B라는 사람이 반드시 체험한다는 보장은 없다. 코끼리를 알려면 코끼리를 설명한 책을 보아야 한다. 손으로 만져서 어찌 코끼리를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직접 코끼리를 보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오늘의 은사파의 생각이 마치 이런 코끼리와 장님과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방언하는 사람은 모두 체험을 내세우지만 체험은 위험하며 체험은 진리를 판가름 할 잣대가 되지 못한다. 신앙이란 체험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람마다 체험을 내세우면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할 방법이 없다. 사탄이 좋아하는 말씀의 혼란이 올 뿐이다. 사탄의 작전은 성도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가거나 아니면 성경말씀의 진리를 혼란하게 하여 어느 것이 진리인지 분간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IV.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성격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성격을 보자
첫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을 보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몇 날이 안 되어 그의 성령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였고, 또 그 말씀을 전파할 때도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셨는데, 주로 이적, 기사, 환상, 방언 등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이야기는 당시 여기저기 16개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모두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들었다고 했다(행 2:8). 어떻게 그랬을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2:9 이하에 기록 된 대로 그야말로 전 유럽에서 모여들었는데,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겠기에 서로 각자의 방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이 세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말이 아니라 각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알아듣게 역사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목적이었다.
또 한 가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의 의의는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어서 전도하게 하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70인을 택해서 저들에게 하나님이 사역할 영을 부어주어 활동하게 하였지만(민 11:16-17), 이제 신약 교회가 시작되는 오순절에는 70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서 전도하게 하신 의의가 있다. 전도는 목사만의 사역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사역이다. 분명히 알 것은 방언은 아무도 모르는 언어의 문법이 없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로 내가 아직 배우지 않고 사용하지 않은 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한 소리와는 아주 다른 성격이다. 방언의 성격을 바로 알자.
이제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보자.
사도행전 2장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이르는 어간에 가끔 방언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방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다. 특히 14장은 “방언장”이라고 할 만큼 방언을 자세히 다룬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보았듯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방언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이 그의 계시의 말씀을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쓰신 방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방언은 의미를 모르는 방언이 아니고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서(항상 같은 한 사람) 그를 통해서 의미를 알 수 있는 방언이었으며 방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계속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날에는 그런 계시를 주시지 않으시는가? 실제로 계시를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여기서 알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전, 성경이 아직 계속해서 기록되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특별 계시 전달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며 오늘날의 방언은 하나님이 계시의 수단으로 주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은 하실 말씀을 모두 하셨으므로 새로운 계시가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 옛날의 방언, 계시 환상, 꿈같은 방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에 말하기를 “옛날 옛적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하시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고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완성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모든 말씀이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던 수단인 방언, 환상, 꿈 등이 이제는 필요 없으며 끝났다는 뜻이다.
개혁주의자는 “계시의 종결”을 믿는다. “Canon is closed for good”(정경은 영원히 끝났다). 성경을 바로 믿는 사람,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의 완성을 믿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계시의 종결”(啓示의 終結)을 믿는다.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마지막 22장 18-19절에 분명히 가르쳐 주는데, “이 예언의 말씀에 더 보태지도 말고 제하지도 말라”는 말씀과 함께 또한 히브리서 1:1-2에서 잘 나타난다. 성경에 더 보태면, 즉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더할 것이고, 만일 반대로 삭제하면 하늘나라에서 생명나무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은 끝났으니 가감할 수 없으며 이 66권만 성경이라는 것이다. 방언을 받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니(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그런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계시록 22:19의 위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개인이 말하는 방언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방언은 개인용이 아니라 항상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 즉 교우들 모두를 신앙으로 인도 할 하나님의 목적이 있던 것이며 개인의 용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개인 방언이 얼마나 성경에서 먼 방언인가를 알자.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자기 뜻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언, 꿈, 환상 등을 동원하여 사용했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로고스>로 오신 다음엔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으니, 즉 성경이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더 이상 역사하지 않으시고 “기록된 말씀 Written Word"를 통해서만 역사하신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Sola Scriptura>라고 외쳤던 것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계시를 주셨는데, 하나는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계시”이다.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은 어떤지,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이지 등은 자연계시를 통해서 해답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특별계시인 성경말씀만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주신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은 무엇인가?
저들의 말을 빌리면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계시를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일 터이니 그 계시의 말씀과 지금 받은 계시를 합하여 해석한다면, 사람마다 받는 계시가 다르니 어느 말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혼동이 온다는 말이다. 혹자는 묻기를, “방언하는 것이 어떻게
성경에 보태는 것이 되는가?”라고 항의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완성된 말씀(성경)만 인정하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오늘날의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일 터이니 하나님이 자기의 성경 이외에 보여 준다는 것은 성경 자체의 증언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성경자체가 성경은 완성되었다고 증거하지 않는가?(계 22:18-19)
(생략)
방언은 개인의 자랑거리가 결코 아니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도구였는데(계시가 아직도 완성되기 전이므로), 오늘날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다. 계시가 완성된 오늘날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계시의 수단이 아니다. 계시할 것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방언을 수단으로 등장하여 사용하겠는가? 그러므로 방언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종결성을 믿지 않는 소치이다. 성경이 완성된 것을 믿지 않는 소치이다. 성경은 완성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계시하실 것이 없으시고 이미 계시하신 말씀, 즉 성경만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3:8에 보면, “방언도 그친다”란 말이 있다. 좀 더 정확히 인용하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했는데, 원어인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방언이 예언과 지식이 폐하기 전에 “스스로 없어질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방언도 그치고” 의 “그친다”라는 말은 원어에서 “파운손타이”(pausontai)인데 이는 문법적으로 “pauw”의 중간태(middle voice)이므로 문법적으로 보면, “방언은 스스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란 의미가 분명하다. 그 문장의 ”pausontai”는 문법적으로 “indicative mood, middle voice, future tense, 3rd person plural”( 직설법 중간태 삼인칭 복수 미래)이니 방언이 저절로 없어진다는 말이다.
한편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한 대목은 원어에서 “katargeitheisetai”인데 이는 “katargew” 동사의 직설법 삼인칭 단수 미래 수동태이므로 “예언과 지식이 하나님에 의하여 폐함을 당하여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 다음 구절 고전 13:9에 보면, “지식과 예언”은 나오지만 “방언”은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서 방언은 예언과 지식이 폐하기 전에 “스스로 끝난, 즉 임시로 주었던 은사”이다. 이런 은사를 성경의 “계시은사”(revelatory gift)라고 하기도 하고 “임시은사”(extraordinary gift)라고 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전도할 때 고넬료가 방언을 말한 것이나(행 10:46),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사람 12명에게 바울이 전도할 때 그들이 방언한 것(행 19:7)들은 베드로나 바울이 전도한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틀림이 없는 진리의 말씀임을 그들로 인쳐서 믿게 하려는 복음 전파 초창기의 하나님의 임시적인 특별사역으로 설명된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방언에 관한 언급이 없다. 바울의 다른 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서신에도 방언 언급이 전혀 없다. (생략)
방언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여러 가지 이적 기사처럼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수단과 또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는 수단으로 기독교 초기,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 교회도 자립하기 전에 임시로 주셨던 하나님의 “임시 은사”(臨時恩賜, extraordinary gift of God)로 다른 말로는 “revelatory gift”이며 영속성(永續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의 사건도 유일회(唯一回)적 사건이다. 반복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요엘 2:28의 성취이며 모세 시대에 모세가 택한 70인에게 하나님이 그의 신(神)을 부어 주어 사역하게 했던 것을, 이제 신약 교회가 출발하면서 모든 성도들에게 그런 사역을 감당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 선지의 예언을 언급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반복 안 되듯, 십자가가 반복 안 되듯, 오순절은 단회적인 사건(單回的事件, once for all)이며 방언도 임시로 주셨던 은사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이며, 칼빈의 입장이며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이다. 그 외에 이런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William Hendriksen, Robert L. Dabney, Louis Berkof, Charles Hodge, Archibald
Alexander, Ned. B. Stonehouse, Geerhardus Vos, J. Gresham Machen, Richard Gaffin, Jr., W.G.T. Shedd, Abraham Kuyper, R.B.Kuiper, John Knox (일부 생략) 그리고 교부에 올라가서는 Augustine, Crysostom, Origen, Cyril of Alexandria, Clement of Alexandria, Eusebius, Tertullian, Irenaeus 등 많은 쟁쟁한 학자들이 계시의 종결, 오순절의 단회성, 성령의 임시 은사들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지금은 그런 방법이 필요 없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흔히 히브리서 13:8에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란 말씀을 인용하여 임시은사의 영속성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의 인격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이전과 지금은 다르다. 이전에는 십자가 사건 전이며 제자들과 직접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영광 중에 계시며, 그의 영과 말씀으로 역사하여 구원할 자를 구원하며, 동시에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고,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고 계시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신다. 그의 사역 방법 까지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역(救贖使役)을 제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히 13:8 말씀은 방언 지속의 증거구절로 이용할 수 없다.
구약 말라기가 끝난 후 400년간 침묵을 지켰다. 선지자를 보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모두 하셨기 때문에 선지자를 보낼 필요가 없어서 안 보내신 것이다. 이제 옛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세례요한을 통해서 기름 부어 세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400여 년간 침묵이 흘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전제주권을 갖고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그의 계획대로 그의 목적을 위하여 역사하신다.
방언은 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존속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던 임시 은사였다. 고린도전서 13;8에 “방언은 스스로 사라진다”라는 말은 방언이 그 목적인 성경을 완성한 다음에는 그쳤다는 말이다. 지식과 예언이 끝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katargew”(카타르게오) 라는 동사의 “직설법 수동태 미래형”을 쓰고, 방언이 그친다는 말은 이와 전혀 다른 동사인 “pauw”(파우오)란 동사의 “중간태 미래형”을 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헬라어의 중간태(middle voice)는 “스스로 무엇 무엇이 어찌어찌 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방언이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라”라고 번역하면 정확한 번역이다.
어떤 분들은 고린도전서 13:12을 들어서,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임시 은사가 계속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이 잘못된 것은 만일 주님이 재림까지 지속한다고 하면 왜 “parousia”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의 특유한 단어 “parousia”(파루시아)란 단어를 썼다. 가령 예를 들어 바울은 주의 재림을 말하는 대목에서 “parousia”를 쓴 증거를 고전 15장이나 살전 4장과 5장에서 보면 모두 한결같이 “parousia”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러하다면 만일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이런 방언 같은 임시 은사가 주님 재림할 때까지 지속한다는 뜻을 나타내려 했다면, 왜 “parousia”란 단어를 여기에서만 피했겠는가? 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오는 고전 14장을 통해서 방언의 원칙 6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6가지 원칙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현대 방언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오늘날의 방언은 어디서 오는지 몰라도 성경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으니 분명 성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이 아니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인고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도 입증된다. 오늘날의 방언은 계시록 22장 18-19절의 위반이다. Lehman Strauss 박사는 그의 저서, “Speaking in Tongues”(방언 말하기, p.19)에서 현대방언의 출처에 관하여 3가지 가능성을 말한다. “첫째는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둘째, 군중심리로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하등의 의미 없는 소리이거나, 셋째, 사단에게서 오는 것이다”라고 Strauss 박사는 말한다. Chicago Moody Bible Institute 의 Merrill Unger 박사도 같은 생각이며(Merrill Unger. 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 방언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참고), 또한 Master Theological Seminary 의 John MacArthur 박사도 그의 저서 “Charismatic Chaos”(혼란스런 은사주의 운동)에서 필자와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100퍼센트 이적과 기적을 좋아하고 지금도 성경에서 읽어보는 그런 기적, 이적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사람이 물위를 걸어 다닐 수 있고, 집 쌀독에 쌀이 없을 때 목사에게 음식을 잘 대접하면 그 쌀독에 쌀이 가득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목사를 우상처럼 대한다. 잘못된 신앙이다. 이들은 또한 방언과 구원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현대 방언은 성경에서 벗어난 행위이기 때문에 방언을 멀리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도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거듭난 성도는 “기록된 말씀”만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Sola Scriptura). 성경은 말하기를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고 가르치며 “anathema”(저주)가 임한다고 갈라디아 1:8-9에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면서 가르친다. 또한 마태복음 7:22 이하에는 잘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비성경적인 사역으로 남을 속이며 악행을 행한 "자칭 주의 종" 들이 심판날에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갈라디아 본문의 '저주"란 말은 원문인 헬라어에서 "아나세마" (anathema) 인데 이 말은 "위에 놓여졌다" 즉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다" 라는 말이고 이 말을 설명하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놓여진바되었으니 만일 그가 잘못 사역한 것이 판명되면 그는 영락없이 저주를 받을수 밖에 다른 피할 길이 없다" 는 의미이고 "저주" 를 받는다는 말은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요란하게 인기리에 사람의 각광을 받으며 대형교회를 목회하고 신학교에서 벼라별 신기한 학설을 주장하며 멋진 강의와 설교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혹은 교인들에게 인기를 얻어도, 나중 대심판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도무지 안 적이 없다. 택한 적도 없고, 안수한 적도 없고, 너에게 사역을 맡긴 적도 없는데 너는 너의 멋대로 남에게 인기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참다운 주의 종을 능멸하면서 이단을 가르쳤으니 이 불법을 행한 자야, 내게서 영원히 떠나라" 라고 한다면, 그 모든 세상에서의 영화가 무슨 소용일까?
목회자들이여, 바로 사역하자, 성도들이여, 사이비 사역자에게 속지 말자.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신앙 생활해야 할 때이다.
참고서적:
Calvin, John.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Mich.: Baker
Gromacki, Robert. Modern Tongues Movement. Phillipsburg, N.J. P&R.
MacArthur, John. Charismatic Chaos. Grand Rapids, Mich.: Baker
Strauss, Lehman. Speaking in Tongues. Phillipsburg, N.J. P&R.
Robertson, O Palmer. The Final Word. Edinburg: Banner of Truth Trust.
Unger, Merrill. 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 Chicago: Moody Press
-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상) 끝-
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II)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음 세 가지 근거로 현대 방언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첫째, 성경에서 “방언 말함을 금하지 말라”고 하고 (고전 14:39 ) “예언을 소멸치 말라”고 살전 5:20) 하지 않는가?
둘째,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하시는 사역을 제한할 수 있는가?
셋쩨, 방언을 경험한 사람이 현재 우리들 주위에 많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들의 방언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이제 그들의 이 <세 가지 근거> 를 성경적으로 검토해서 과연 이런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알아보자.
첫째, 성경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39) 라고 말하고 있고, 또 “예언을 소멸치 말라” (살전 5:20)에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방언을 금하는가?
물론 성경 고린도전서 14:39 에서는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20에서는 “예언을 소멸치 말라” 고 한 것이 사실이다. 이 말씀을 바로 연구하기위해서 우리는 바울의 초기 전도사역과 후기 전도사역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설교할 때 주님의 재림을 많이 설교했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 당대에 주님이 재림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주님의 재림 소식은 없고 하여 교인들이 동요하자 바울이 그의 13개 편지 중 제일 먼저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했으니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초기 전도사역 때의 편지이다. 고린도전서도 바울의 사역의 초기의 편지이다. 이 당시는 구약만 있을 뿐 아직 신약성경은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속 환상, 계시, 방언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던 때이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며 더욱 방언 말하기를 사모하라고 했고 또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편지하면서 예언을 소멸치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으라고 명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아직도 하나님이 계속 계시의 말씀을 주시던 때이다. 그러므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바울의 후기 전도사역을 보자.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은 바울의 후기의 사역중에 기록한 편지들이다. 여기 어디에도 방언 언급이 없다. 그리고 그 후에 나오는 일반 서신 8개에도 방언 언급은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자.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는데 (행 1:8), 사도행정 2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이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전에는 모세와 그를 돕는 자 70인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신약 교회의 시작과 함께 이제는 유대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 하셨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에 빌립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집행되었다. 물론 8장에서는 방언했다는 말이 없지만 문맥을 보아서 방언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넬료에게 전도하여 방언을 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승천할 때 말씀하신 “유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이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세상 끝“에서 이제 ”세상 끝“ 에 전도하는 것만 남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에베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 ”세상 끝“ 인줄 알았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복음전파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데 그곳의 장로 12명이 성령을 받고 방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이제 주님이 승천하실 때 사도행전 1:8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성취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에서,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세상 끝인 (당시의 생각으로는) 에베소에서 까지 성령이 강림하여 전도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었고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인치도록 방언을 주었다.
그후에는 방언에 대해서 성경은 잠잠하고 일체 언급이 없다. 왜? 더 말해 보아도 그것은 “세상 끝” 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의 연속일 뿐이겠기 때문이다.(생략) 만일 방언이 성도의 구원에 필수라면 방언은 복음서에도 기록되었을 것이고, 바울서신 13개에 모두, 그리고 일반서신에서도 반드시 언급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중요한 방언이라면 겨우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에서만 언급하고 말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 후에 우리는 성경에서 방언에 관해서 읽어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끝났고, 계시가 끝났으니 그 계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주셨던 방언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에 방언의 언급이 없는 것이다. 목적이 달성되었는데 수단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고로 하나님의 목적과 수단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목적은 성경기록, 수단은 방언과 환상, 꿈, 천사의 내방, 꿈 해몽 등이었다.
만일 오늘의 방언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방언과 같은 성격과 같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수단이라면 방언을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되며 방언으로 계속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오늘날 방언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주시는가? 아니다. 오늘의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수단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것은 성경자체가 증언한다. 계시록 22장 18-19절이 이를 증명하며 히브리 1:1 이 이를 증명한다. “옛적에 여러 선지자로 말씀하시던 계시가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 것이다.”하나님의 계시는 종결되었다. 이는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또한 역사적 신앙고백서들이 그렇게 증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제1절이 그렇게 증언한다.
둘째,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가? 라는 말을 살펴보자.
인간은 하나님의 전제주권을 침범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막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제주권을 가지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표와 계획대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방언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사역을 제한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항상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항상 같은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항상 동일한가? 흔히 말하기를 히브리 13:8 에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라고 하는 성경구절을 방언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한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이 과거행하신 모든 일을 지금도 하신다는 말인가?
이 땅에서 제자들과 같이 육신으로 거닐면서 병자를 고치고 이적 기적을 행하시던 일을 지금도 행하신다는 말인가? 주님이 지금도 십자가에 달리시는가? 주님이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피를 흘리시는가? 주님은 지금 영광중에 계신다. 그 분은 옛날 행하시던 그런 방법으로 지금 역사하지 않으신다. 십자가 사건은 다시없다. 반복되지 않는다. 오순절 사건도 다시 없다. 마치 구약의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 (救贖史, Redemptive History)에서 유일회적 (唯一回的事件, unique events in God's Redemptive History) 일뿐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이다. 한국의 박윤선 목사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본문 히 13:8 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역 면에서 지금은 그의 영이신 성령과 말씀으로 전 세계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지만 그의 인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생략)
구약 때는 의식법에 따라서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의식적으로 부정하여 먹지 말아야했고 비늘이 없는 생선도 먹어서는 안 되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의식법에 속하므로 그림자가 아니고 실물인 그리스도가 모든 의식법을 완성했으므로 이제 그런 의식법은 철폐되었고 따라서 그런 의식법에 얽매어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골로새 2:15-17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왜 서로 앞뒤가 다른가? (생략)
셋째, “내가 방언하는 경험이 있으니 이는 성경적이다” 라고 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무엇이든 내가 경험하기만 하면 그것이 진리 이고 성경적인가? 그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 이다. 그럴 수는 없다. 저마다 어떤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터득했다고 주장하면 성경의 권위는 설 자리가 없다. 개혁주의 성경해석 방법의 근간은 성경이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무려 1,400 년간에 걸쳐서 기록한 말씀, 완성된 그 말씀, 그 “기록된 성경말씀만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 (NORM) 이라고 개혁주의 신앙은 주장한다. 우리의 신앙은 경험 중심이 아니다. 이는 모든 경험은 주관적(subjective) 이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주장은 개인의 특권이고 개인의 생각일 뿐 개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객관성이 결여된 것은 무엇이든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진리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는 바로 정경(正經) 인 성경뿐이다. 그래서 성경을 정경 (canon) 이라고 한다. “canon' 이란 원래가 “잣대”(ruler) 라는 의미이다. 모든 신앙문제는 성경이 그 잣대 이어야 한다. 이유는 성경만이 틀림이 없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계시로 기록했으므로 틀림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정확 무오” 하다고 한다 (infallible and inerrant).
오늘 교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것은 소위 “경험”이다. 옛날 18세기 19세기 합리주의자들의 생각이 바로 이런 경험위주의 위험한 철학이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 이를테면, Voltaire나, Jean-Jacques Roussau, Montesquieu 등은 모두 기존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서 합리적이 아니면 아무 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상은 미국에 들어와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장수(長壽)를 누리며 살았던 뉴욕 콜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친 John Dewey의 실용주의 (Pragmatism) 로 연결된다. John Dewey의 철학은 오늘 성행하고 있는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의 기수중의 한 사람인 Jacques Derrida에게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Postmodernism의 비조(鼻祖)인 Michel Foucault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이 사회를 결단내고 신학계에 큰 해악을 끼쳐 오늘의 emergent church 운동 같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철학사조를 낳게 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경험” 에 호소하는 신앙행위이다. “내가 경험했으니 그것은 ‘절대적 진리’이고 그런 경험을 못한 사람은 아직 ‘진리’ 에 이르지 못했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런 주장의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개혁주의가 가장 배척하는 것은 성경은 접어 둔 채 “경험” 만 고집하는 비정상적 신앙태도이다. 한 사람이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이 진리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A 라는 사람의 경험과 B 라는 사람의 경험이 서로 다를 경우 어느 사람의 경험이 진리인가? 이런 경우 두 사람의 주장 모두 비진리이거나 한 사람이 맞거나 할 수 밖에 없으며 두 사람 모두 진리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는 두 사람 모두 오류를 범한다. 한 사람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문제가 아니다.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 성경이고 이 말씀만이 진리이다. 개혁주의는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배격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도 성경의 권위 밑에 있는 것이며 절대로 이단 집단처럼 신조가 성경위에 있거나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진리 여부는 성경에 비추어 판가름 난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경험”을 했다고 떠들어도 성경에 위배되는 ‘경험“ 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며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완성 이후에는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계시를 통해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을 외치고 “성경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 이라고 믿는 것이다.
“경험했다‘ 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는 만족할지 몰라도 그런 경험이 객관성 있게 진리라고 입증될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 한 사람의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경험은 믿을 것이 못되며 더욱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성경과 같은 차원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방언 문제는 심각하다. 지금 방언에 관한 몰이해(沒理解)나 오해(誤解)로 인하여 한국이나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 교계가 손상을 입고 있다. 교회도 분열되고, 가정도 파탄되고 복음을 바로 전하는 목회자는 설 땅이 좁아지고 있고 사이비 목사들이 온통 교계를 주름 잡으며 ‘다른 복음 (to heteron euanggelion, 토 헤테론 유앙겔리온, another gospel) 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무서운 흑암의 세력에 붙들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거짓 복음인 것을 모르거나 혹은 일부러 사람의 인기에 영합 하고 저 바른 복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양심의 가책 없이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평신도는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에 백지(白紙)이므로 그들의 잘 못된 가르침이 진리인줄 알고 속아 넘어간다.
꿑으로 꼭 짚고 넘어갈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요즘 Wayne Crudem 을 많이 인용한다. 한국 목사들 중에는 그가 쓴 “조직신학” 을 애용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조직신학 책은 Louis Berkhof 나 프린스톤 신학의 거장 Charles Hodge 의 조직신학 (세권) 이나 RTS 의 교수로 있는 R. Reymond 교수의 것이 Crudem 의 조직 신학 보다 훨씬 좋다. 이 글을 읽는 분들로서 기독교의 교리를 바로 알고저 하는 자는 반드시 다음 개혁주의 학자들이 쓴 책을 읽기 바란다. 즉:
루이스 벌콥 (Louis Berkhof) 저. 조직신학, 기독교 교리 요강, 기독교 교리사
찰스 핫지 (Charles Hodge) 저. 조직신학 (3권)
로버트 레이몬드 (Robert Reymond) 저. 기독교 조직신학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reckenridge Warfield) 저. 기독교 교리, 거짓 기적, 영감론,
그래셤 매천 (John Gresham Machen) 저. 바울종교의 기원
허만 바빙크 (Herman Bavinck) 저 개혁주의 교의학 (4권)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 저. 기독교 변증개요 (3권)
존 칼빈 (John Calvin) 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영문은 McNeill 이 편집한)
이상 열거한 책들만 읽어도 이단이나 거짓 가르침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개혁주의자라고 하면서도 방언이나 계시를 인정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그의 다른 학자로서의 업적은 언급할 필요가 없고, 그의 성령의 임시은사 지속론에서만 비평한다면 그는 고린도전서 14:29말씀에서 “분변한다는 말” 의 헬라어 원어 동사인 “diakrino 디아크리노” 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Crudem 은 본문 고전 14:29에서 “방언은 두세 사람이 할 것이고 나머지는 분변하라” 는 말을 해석할 때 원어의 의미와는 영 다른 말로 이해 했다. 그의 고전 14:29을 해석함에 있어서 Crudem 은 그 “분변할 것이요” 란 말을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예언을 하면 그 말이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여부를 분별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면 받아 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나 받아서는 안 된다“ 고 해석한다. 과연 그 구절이 그런 의미 인가?
문제의 고전 14:29의 “분변할 것이요” 의 “분변하다‘라는 헬라어인 ”디아크린노 diakrino" 란 단어는 반드시 “사람을 분별할 때, 즉 사람을 구별할 때 사람에 대해서만" 사용되며 절대로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철학 사상들을 구별하는데 쓰이는 단어가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고전 14:29의 말씀은 “두 세 사람이 예언할 때 차서를 따라서,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사람이 하고, 또 그 다음 사람이 말하도록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라” 는 말이며 Crudem이 말하는 것처럼 예언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분별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원어공부가 필요하고, 그래서 신학을 바로 공부하는 유명 신학교 학생들은 밤을 새워 코피 (coffee) 를 마시며 코피(nose-bleeding)를 쏟으며 그 어려운 헬라어와 히브리어, 래틴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상으로 두 번에 걸쳐서 현대 방언의 성격을 연구해 보았다. 할 말이 많지만 미흡한 점은 차차 보완하고자 한다. 필자의 목적은 사도시대의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는 방편이었던데 반하여 오늘의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수단 방법이 아니라 임의로 주관적으로 발성하고 문법이 없는 소리로, 사도시대의 방언이 교회에 덕을 끼쳤던 방언이라면 오늘의 방언은 교회에 덕을 끼치기는커녕 교회를 분열시키는 비정상적인 신앙행위라는 것을 지적하고저 함이다. 성도들의 각성이 필요한 때이다.
예레미야 5:30-31을 읽어보라,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제사장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고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은 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순교했다. 하나님은 오늘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서 700년 전에 유다 백성에게 하셨던 바로 그 경고의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경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하), 끝-
현대방언, 성경적인가?
조영엽 교수
방언이란 외국어(foreign language) 또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가리킨다. 방언은 방언 하는 사람이 과거에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 그리고 초자연적 역사(God’s direct and supernatural act)이다.
현대방언은 과연 성경적인가? 다수의 개혁주의 계통의 보수주의자들은 현대방언을 하지 않으면서도 방언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저들의 현실적 상황은 방언을 묵인하며, 일부에서는 찬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들은 사도행전 5:38-39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변명하고 있다. 즉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라는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오용한다.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다수의 목회자들은 현대방언을 찬동도 반대도 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방언이 성경적이면 가르치며 방언을 하도록 권면해야 하며, 반면에 현대방언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성경적이 아니라고 가르치며 현대방언을 하지 말도록 권면해야 할 것이다.
어떤 진리 문제에 관하여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든지, 속으로는 찬성 또는 반대하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같이 행동한다든지, 또는 찬성과 반대를 다 수용한다면 그것은 모순이요, 이율배반이요, 일치의 원리에 어긋난다. 우리는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적 지식의 유익을 위하여 아니면 “아니요”(no), 예면 “예”(yes)라고 분명히 밝혀야 한다.
마태복음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1. 어원적 고찰(Etymology)
방언(Speaking in Tongues)이란 헬라어로 “글로사”(
)로서 이 단어는 몇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글로사는 우리 몸의 지체 중 하나인 “혀, 언어의 기관”(tongue, an organ of speech)를 가리키며(막 7:33, 35; 눅 1:64; 행 2:26; 롬 3:13; 14:11; 고전 14:9; 빌 2:11; 약 1:26; 3:5, 6, 8; 벧전 3:10; 계 16:10), 16회 사용되었다.
(2) 글로사는 민족 또는 부족의 “말 또는 언어”(word or language)를 가리키며(행 2:11; 계 5:9; 7:9; 10:11; 11:9; 13:7; 14:6; 17:15) 7회 사용되었다. 언어와 방언은 동일한 의미로 상호 교대적으로 사용되었다.
(3) 글로사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사투리”(dialect)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디아렉토스(
)에서 인출되었으며(행 1:19; 2:6, 8; 21:40; 22:2; 26:14), 6회 사용되었다.
(4) 글로사는 “외국어”(foreign language)를 가리킨다. 방언은 빈번히 방언들(글로싸이,
)이라는 복수형으로도 사용되었다. 그것은 방언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방언의 실제적 현상이 25번 기록되어 있다(막 16:17; 행 2:4, 6, 8, 11; 10:46; 19:6; 고전 12:10, 28, 30; 13:1, 8; 14:2, 4, 5, 6, 13, 14, 18, 19, 22, 23, 26, 27, 29).
이상과 같이 글로사는 몇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모두 언어의 기본적 요소들과 관계되어 있다. 반스, 헨리, 아이론사이드, 랑게, 렌스키, 라이스(Barnes, Henry, Ironside, Lange, Lenski, Rice) 등은 성경에서 교훈 하는 방언은 외국어를 말한다고 하였다.
①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방언은 알지 못하는 또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들(외국어)이었다(행 2:1-11). 그러므로 인근 여러 나라들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많은 외국인들(방문객들)이 방언을 자기 나라 말들로 듣고 잘 이해하였다. 사도행전 2: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은 외국어였으므로 통역이 필요 없었다.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 새신자들이 한 방언도, 에베소에서 세례 요한의 12제자들이 한 방언도 모두 듣는 자들이 이해한 외국어였다(행 10:46; 19:6).
②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에는 일시적이나마 분명히 방언의 은사가 있었다. 그 방언은 사람들이 아는 언어들(known languages) 곧 외국어들(foreign languages)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외국어였다(2:4, 6, 8). 그러므로 이 방언에 관하여는 여하한 규정, 규제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었으므로 규정과 규제가 주어졌다.
③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0, 11에서도 방언은 외국어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세상에 소리(음성; voice)의 종류가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이 되리라.”
“소리”(voice)는 헬라어로 “포네”(
)로서 언어(language)를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언어들은 다 언어의 뜻이 있다. 뜻(의미) 없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수없이 많아도 뜻 없는 소리는 없다. 뜻이 있는 외국어도 내가 알지 못하면 나는 야만인 취급을 받게 되거든 하물며 뜻이 전연 없는 저질적인 잡다한 소리를 말하는 것이야 두 말할 것 있으랴?
④ 사도행전에서나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라는 새로운 재정의(redefinition)가 성경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방언파에서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소리를 방언이라고 하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방언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위 현대방언이 결코 아니다.
(5) 글로사는 “알지 못하는(이해할 수 없는)말”(unknown and not understandable language)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과 동일한 단어(
)이지만 이 방언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었다(고전 14:2, 13, 14, 19).
방언이라는 단어가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 및 현대 방언 문제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에는 무아지경의 황홀하고도 모호한(ecstatic), 영문모를, 계속적이고도 반복적인, 이상야릇한,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 같은, 횡설수설의 중언부언의 알아들을 수 없는, 뜻이 없는 소리들(고전 14:2, 9, 11, 15, 16)을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이성과 양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 말, 일방적 감정에 치우친 말, 내용이 없는 말, 말과 말 사이의 연결이 없는 말, 전연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말, 엉망진창의 말을 말한다.
도날드 벌딕(Donald W. Burdick)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 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 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일명 천국 말(heavenly language)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빗대고 하는 말이다. 소위 천국 말이란 “이상한 말”(헤테로글로소스,
; strange language)을 가리킨다. 이상한(헤테로,
; different kind)은 성질상 다른 종류를 가리킨다. 이상한 말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정상적인 말(언어)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는 말, 뜻이 없는 말,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 같은 말, 중언부언하는 말, 저질적인 말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한 방언이란 바로 이 방언을 가리킨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방언도 바로 이 방언을 가리킨다. 반면에 성경이 교훈하는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의사가 전달되는 말, 외국어를 가리킨다.
2.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들(행 2장; 10장; 19장)
사도행전에는 방언이 3곳(2:1-13; 10:44-48; 19:1-7)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그 방언들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누가 방언하였는가? 그들이 방언할 때 영적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방언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1) 예루살렘에서의 방언(Tongues at Jerusalem<행 2:1-13>)
① 언제(When) 방언이 있었는가?
오순절 날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다(2:1). 오순절은 교회 역사상 가장 뜻 깊은 날들 중의 한 날이다.
• 오순절은 유월절, 장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대 명절들 중의 하나이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 후 첫날(주일 = 일요일)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 23:15-17; 신 16:9, 10). 그러므로 오순절을 “펜테코스토스”(
; fiftieth; 50)라고 부른다(행 2:1; 20:16; 고전 16:8).
• 오순절은 유월절 지난 후 첫날부터 7주가 지난날이라 하여 칠칠절이라고도 하며(출 34:22; 신 16:10).
• 이 날은 추수한 첫 곡식단(first harvested sheaf)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므로 첫 열매의 날 곧 맥추절이라고도 한다(출 23:16; 민 28:26).
• 이 날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50일째 되는 날, 승천하신 지 1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 오순절 날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으므로 이 날을 성령강림절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② 어디에서(Where) 방언이 일어났는가?
오순절 명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12사도들이 예루살렘 성 어느 한 곳에 모였다. 그러면 사도들이 모였던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었을까? 어떤 개인의 집이었을까? 성전 뜰이었을까? 넓은 장소였을까? 성전 뜰이나 넓은 장소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때에 3,000명 이상이 복음을 받은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의 어느 한 넓은 곳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명절을 축하하기 위하여 원근각처에서 수많은 유대인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고 또 원근각처의 여러 나라 사람들도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그 현장에서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방언이 마가의 다락방이나 또는 어느 개인의 집에서 일어났다면 본문(행 2:8-11)에 맞지 않는다.
③ 누가(Who) 방언을 하였는가?
일부사도들? 120성도들? 모든 신자들? 누가는 방언하는 사람들을 “그들”이라고만 하였다(행 2:1-4).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알포드는 말하기를 그들(they)은 사도들만도 아니고, 120성도들만도 아니라 예루살렘에 유월절 때 모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주석가들은 12사도들과 120성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들이 방언을 하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주장이다. 그 이유는
• 2:1에 “그들(they)”은 사도들을 가리킨다(1:26).
• “각각 자기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행 2:6-8)라고 하였는데 본 절에서 “제자들”은 12제자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120성도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foreign language) 으로 말하였다(행 2:4).
• 그 현상(방언)을 목격한 자들은 서로 말하기를 “보라 이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는가?”(행 2:7)라고 하였다. 천사들도 사도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행 1:11). 120성도나 모든 성도들을 다 갈릴리 사람들이었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 사도행전 2장에 120성도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사도들만 언급되어 있다(행 2:14, 37).
그러므로 오순절 날 방언은 사도들만이 하였다고 생각된다. 사도들은 성령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나라 언어들(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행 2:2, 4, 6) 성령충만(The Filling of the Holy Spirit)이란 성령 하나님의 감화·인도·통치를 충만히 받음을 뜻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흥미·관심·매력을 가지고 모여서 사도들로부터 일어난 일들을 듣고자 하였으나 큰 언어의 장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사도들은 다른 나라 언어들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때에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다.
④ 사도 베드로의 방언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소위 현대방언과 같은 것이었는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다른”(헤테로스,
; another of a different kind)은 다른 종류를, 따라서 다른 방언이란 종류가 상이한 외국어를 가리킨다. 헤테로스와 유사한 단어 “알로스”(
; another of the same or similar kind)는 같은 또는 유사한 종류의 다른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 다른 방언이란 전자를 가리킨다. 헤테로스(
)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갈라디아서 1:6-7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된 복음에서 그렇게 속히 떠나 “다른”(헤테로스,
; different) 복음 좇는 것에 대하여 깜짝 놀랐다. 그들이 좇는 다른 복음은 동질의 복음이 아니다. 또 다른 한 경우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기로 약속하셨을 때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는데(요 14:16), 여기서 다른(알로스,
; another of the same nature)이란 단어는 “같은 성질의 다른”이라는 뜻이요, 다른 종류가 아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청취한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방언)들(글로싸이,
; languages; 언어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여러개의 방언이 외국어들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또한 마가복음 16:17에 “그들이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 방언이란 새로운 언어들(new languages)을 가리킨다. 새로운 언어들은 자기들의 언어가 아닌, 과거에 배운 바 없는, 전혀 생소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언어들(외국어)을 가리킨다(행 2:4, 6, 8, 10; 4:12; 고전 14:21).
사도행전 2:8-11에는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부르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아, 로마, 그레데인, 아라비아인들을 위시한 14개 이상의 부족, 민족의 사람들이 그 각기 자기 방언들로 들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 나라들은 모두 그 당시에 존재하였던 실제적인 나라들이었으며, 언어들도 그들이 사용하는 실제적인 언어들(외국어들)이었다.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있었던 방언들은 성령의 이적적 역사였다.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사도가 외국어로 설교하고, 듣는 사람들은 14개 이상의 각기 자기 방언들로 동시에 들었으니, 그것이 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가 아닌가?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방언(외국어)으로 설교하였는가? 이 문제도 의견이 각기 상이하다.
㉮ 한 견해는 베드로는 자기나라 말(히브리어)로 설교하였으며 듣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나라 말들로 듣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주장.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사도행전 2:8-11에 의하면 14개 이상의 부족 또는 나라 사람들이 다 각기 자기나라 말들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한 사람이 어떻게 한 입으로 14개 이상의 말들을 동시에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엄격히 들음의 이적(a miracle of hearing)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또 다른 한 견해는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은 원근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었다는 주장.
유대인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군집하였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모국어(native tongue)인 히브리어로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본문의 사실 내용(2:8-11)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방언의 의미와도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본문의 사실 내용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 말로 들었으며,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 있었던 방언이 자국어였는가, 아니면 외국어였는가를 막론하고 듣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말들로 들은 것이 사실이다. 자기 나라 말들이란 방언인 외국어였다.
⑤ 사도 베드로의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적 처녀 탄생, 독특한 생애, 특이한 말씀들, 행하신 이적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대리적 속죄의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다시 육체로 부활하신 사실들을 전파하였다(2:21-24, 31-36). 그리고 허다한 무리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고 회개하였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는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로 일어난 대부흥 사건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위대한 오순절 설교를 능력 있게 전파하였다. 베드로의 설교에 3,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예루살렘에서 각기 자기 곳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체험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과 받은바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였다.
(2) 가이사랴에서의 방언 (Tongues at Caesarea<행 10:1-48>)
가이사랴에서(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Gentiles)이 방언하였다. 이방인들이란 유대인 이외의 모든 다른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오순절 날 방언의 역사가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의 회심(conversion)의 역사가 일어났다(행 2:47; 4:4; 5:14; 8:5-8). 그리고 오랜 세월 후에 고넬료와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에게 방언의 역사가 다시 일어났다(행 10:46). 이들 이방인들에게 방언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 예루살렘 교회에는 약 10년 동안 유대인들뿐이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서 구원의 복음을 듣게 되리라는 계시를 천사로부터 받았으므로(11:14) 그의 일가들(kinsmen)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베드로를 기다렸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종들과 함께 욥바에서 떠나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가이샤라(Caesarea)는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로 욥바 북쪽 48km,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10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놀랍고도 새로운 진리를 전했다(10:34-35). 베드로의 메시지는 복음의 핵심 곧 그리스도의 생애(10:38), 죽음(10:39), 부활(10:40), 믿음으로 구원받음(10:43) 등이었다.
베드로가 말씀을 증거하는 동안 구원의 역사가 고넬료와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이 그들 속에서 또한 나타났다(10:44-45). 그리고 그들은 다른 나라 방언(언어)으로 말했으며 하나님을 높이었다(10:46). 사도행전 2장에서는 유대인 사도들이 히브리어가 아닌 이방 외국어들로 방언한 반면에, 고넬료의 집에서 방언한 사람들은 새로운 이방 신자들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인 유대인들은 듣는 자들이었다. 고넬료의 집에 모였던 새로운 신자들의 방언은 유대인 청중들이 듣고 알았으니 히브리어였을 것이다. 방언의 내용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다만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들음이러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10장의 방언의 목적과 주요 교훈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다.
(3) 에베소에서의 방언(Tongues at Ephesus<행 19:1-7>)
에베소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을 때에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최대 무역항이었으며(실제는 해안에서 3마일 내륙에 위치), 아시아 주의 수도였고, 소아시아 전체의 중심지였으며, 로마에서 동방과 남쪽 애굽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문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였으며, 에베소 극장과 아테미(Artemis)라는 이방 여신을 섬기는 큰 세계적 사원(temple)이 있었다(행 19:27). 사도 바울은 제3차전도 여행시에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최후 능력의 선지자로 들어 쓰셨다. 수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청종하였으며(막 1:1-8), 말씀에 확신을 갖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오실 메시야(coming Messiah)를 대망하였다. 세리들과 군인들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약대 털옷을 입은 광야의 선지자 세례 요한의 능력 있는 설교 말씀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그 땅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되었다(요 3:23-26).
따라서 에베소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약시대에 살았던 최후의 구약 성도들로서 세례 요한이 로마의 헤롯왕에 의하여 순교 당한 후(마 14:1-12)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독교 세례를 베풀었다. 그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행 19:4-7). 그들은 과거에 배우지 않은 방언들(외국어들)을 말하였으니 오순절의 방언의 역사가 다시 일어난 것이다.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의 12제자들의 방언의 내용도 무엇이었는지 기록된 바가 없으므로 알 수 없다.
고넬료의 집에서 사도 베드로가 방언하지 않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방언한 것과 같이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방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방언하였다. 그들의 방언도 사람들이 듣고 이해하는 외국어(foreign language)였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자도 없었고 외부에서 미쳤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없었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은 고린도전서에서 문제가 된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행 2장), 가이사랴에서 고넬료의 집 이방 사람들이(10장), 에베소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19장) 한 외국어였다.
1) Vine’s Expositary Dictionary of Biblical Words, Thomas Nelson Pub. Nashville, U. S. A. 1985. p. 636; Abbott-smitt, Manual Greek-Lexicon of the N. T. T&T Clark LTD, Edinburgh, 1994, p. 93.
2) Donald W. Burdick, Tongues: To Speak or Not to Speak, p. 65.
3) Henry Alford, The Greek Testament, London: Logmans, Green and Co, 1894. Ⅱ. 13.
4)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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