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0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3 - 베트남의 군인, 정치가 보 응웬 지압(武元甲, Vo Nguyen Giap) 사망 보 응웬 지압 [武元甲, Vo Nguyen Giap, 1911.8.25 ~2013.10.4] 베트남 전설적인 장군 보응웬지압 사망 항불, 항미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전설적인 장군 보응웬지압(102)이 사망했다고 현지 관리들이 4일 밝혔다.
- 김만중의 '구운몽'
2011 - `원조 한류’ 구운몽, 중국판 필사본 발견 양승민 교수 “19세기 개작 ‘구운루’ 옮긴 책 찾아” <구운몽>은 한류의 원조였다. 조선시대 한글소설 걸작인 김만중(1637~1692)의 <구운몽>이 19세기 초 중국에서 백화문(일상적인 중국어 입말)으로 개작돼 출판됐음을 입증하는 필사본(손으로 직접 쓴 책)이 발견됐다.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의 양승민 연구교수는 19세기 중국에서 <구운몽>을 개작한 소설 <구운루>의 필사본을 최근 인천 미추홀도서관에서 찾아냈다고 4일 밝혔다. <구운루>는 조선시대 말 시인 김진수(1797~1865)가 당시 청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을 돌아보고 와서 낸 시집 <연경잡영>(1832)을 통해 당시 연경에서 <구운몽>을 개작해 유통된 소설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그동안 실물은 전하지 않았다. 1970년대 영남대 도서관에서 <구운기> 9권9책이 발견됐으나, 원본이 10권10책이었다는 기록과 다르고, 백화문과 문어체가 뒤섞여 <구운루> 정본인지를 놓고 논란이 이어져왔다. 이번에 발견된 <구운루>는 10권10책 가운데 4책이 빠진 6권6책이다. 책마다 일제강점기 인천부립도서관의 정사각형 인장이 찍혀 있고, 표지 안쪽엔 일왕 연호인 쇼와 15년(1940) 등록했다는 타원형 청색인도 보인다. 중국 수입지에 한쪽당 10행 18자로 원래 내용을 일일이 옮겨 적은 뒤 4차례 끈으로 묶어 장정한, 옛 중국본 형식이다. 양 교수는 “필사한 목판본 괘지(글자가 들어갈 칸을 넣은 옛 책 종이)와 표지 장정에 각각 장식용으로 찍힌 두잎·황색마름모 무늬 등은 조선 책의 특징으로, 19세기 중반 조선에서 필사돼 민간에 전하다가 1940년 도서관에 반입된 것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구운루>는 35회, 18만자가 넘는 장편 소설로 <구운몽>의 세배 분량이다. 긴 이야기를 잘게 회, 장으로 나눠 풀어내는 옛 중국 통속 소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선계에서 속세로 내려온 양소유의 영웅적 일생을 다룬 줄거리는 같지만 세부는 다르게 바꿨다. 중국학계는 <구운루>를 1994년 기존 영남대본 <구운기>를 바탕으로 새롭게 출간한 바 있다. 양 교수는 “책의 크기나 제본은 물론 회·장의 차수 표시, 균일한 글자 수 등이 중국 원본 목판본을 보고 옮겼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밝혔다. 또 군데군데 붓으로 꺼멓게 지우거나 오려낸 뒤 새로 써넣은 흔적들로 보아, 원본을 단순히 베껴 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 판본을 수입해 조선에서 번각본(한 번 새긴 책 목판을 그대로 다시 새겨 찍은 책)을 유통시키기 위해 작업한 교감본(원본의 틀린 글자를 바로잡은 책)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번 발견으로 <구운몽> 중국어 개작본의 전모가 밝혀졌다”고 평가하면서 “이미 공개된 영남대본은 미추홀도서관본을 바탕으로 내용을 깁고 더한 필사본이며, 이런 첨삭 과정에서 원작의 내용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이런 연구 결과를 8일 경기도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리는 한국한문학회 가을 학술대회에 발표할 예정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 20111004 20:34
2007 - 남북정상회담 (2~4일) 남북정상, 종전선언 추진 등 8개항 ‘평화번영선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4일 한반도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등을 포함한 3∼4개국 정상들이 한반도에서 종전선언을 하는 문제를 적극 추진키로 했다. 두 정상은 또 민족경제 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협력사업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해 서해안 지역에 `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추진키로 했다. 두 정상은 이날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숙소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10개 항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했다고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전했다. 백 실장은 "이 선언의 서명 주체는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로 돼있다"면서 "이 선언을 `2007 남북 정상선언'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선언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남북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키로 해 사실상 남북정상회담 정례화에 합의했으며 선언의 구체적인 이행을 위해 내달 중 서울에서 제 1차 남북총리회담을 개최키로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관계가 국가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례화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북측 입장을 받아들여 수시로 만나자는 용어로 합의했지만 이는 사실상 정상회담의 정례화에 합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평화수역화'하는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내달 중 평양에서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열기로 했다. 두 정상은 또 한반도의 전쟁반대와 함께 남북간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키로 합의하고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는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 노력하기로 했으며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통일방안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언급 없이 남북의 통일방안을 혼용한 `6.15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나간다고만 표현했다. 특히 두 정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남북은 해주와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설정,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또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착수와 문산∼봉동간 철도화물 수송, 통행ㆍ통신ㆍ통관 등 `3통(通)'에 대한 제도적 보장조치 완비,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이용을 위한 개보수 문제 등을 조속히 협의키로 했다. 이와 함께 북한의 남포와 안변지역에 개성공단식 형태의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고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에 대한 협력사업도 진행해나가기로 했다. 두 정상은 이 같은 남북경협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문화.예술.스포츠 협력과 관련, 남북은 기존 금강산 관광 이외 백두산 관광을 실시키로 하고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는 한편 2008년 베이징 올림픽경기에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타고 참가하기로 했다. 이밖에 이산가족상봉 확대를 위해 `영상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고 금강산면회소가 완공되는 대로 쌍방 대표를 상주시켜 상시 상봉을 추진키로 했다. (평양=공동취재단) /한겨레 2007-10-04 오후 12:20:48
-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4일 오후 7시 부산시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개막해 9일 동안 영화 축제에 들어갔다. 올해는 역대 최다인 64개국 275편의 영화가 선보이며, 66편이 세계적으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개막식에는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참석했고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씨가 이끄는 밴드가 모리코네의 대표작품 〈미션〉 〈시네마천국〉 등의 주제곡을 연주했다. 강수연, 박중훈, 한석규, 고현정 등 한국 배우들과 일본의 가토 마사야, 미국의 제이슨 스캇 리, 대만의 양궈이메 등 150명이 개막식 레드카펫을 밟았다. 개막작인 중국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 〈집결호〉의 감독 펑 샤오강, 주연 장 한위 등도 참석했다. 올해에도 유명 감독들이 신작을 들고 참가하며 영화 강의도 한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정부〉의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이 새 영화 〈야경〉과 함께 방한하며, 〈양철북〉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독일의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이 신작 〈울잔〉을, 〈남과 녀〉로 이름을 알린 프랑스 감독 클로드 를루슈가 새 영화 〈역의 로망〉을 선보인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마니아의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도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 부산에 온다. 이밖에 기무라 다쿠야, 전도연, 강동원 등 스타들도 영화제 기간 방문한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거장들의 신작이나 화제작을 모아 선보이는 ‘갈라 프리젠테이션’ 섹션을 새로 만들었다. 강동원 주연 이명세 감독의 〈엠〉, 줄리엣 비노쉬 주연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빨간 풍선〉 등을 이 섹션에서 튼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 ‘플래시 포워드’ 섹션도 올해 첫선을 보인다. 특별전인 ‘뉴 말레이시안 시네마의 세 가지 색깔’도 눈여겨 볼만하다.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는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말레이시아에서 새로운 기운을 품은 영화들이 최근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밖에 에드워드 양의 전작 8편을 만나 볼 수 있는 ‘타이베이의 기억’ 특별전, 〈로맨스 빠빠〉 등으로 아시아 영화제에서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탄 배우 김승호(1917~1968) 회고전 등도 마련돼 있다. 김소민 기자 /한겨레 2007-10-04 오후 09:09:48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240714.html
2004 - ‘1000만달러짜리 비행’…美스페이스십원 또 우주진입 미국의 민간 유인우주선 ‘스페이스십원’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에 이어 5일만인 4일 우주공간에 다시 도달해 우주연구 후원단체인 안사리 X 프라이즈 재단이 내건 상금 1000만달러(약 115억원)를 차지했다.
- TU-154
러시아 여객기 미사일 피격 2001년 오늘 승객과 승무원 등 78명을 태우고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을 출발해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로 향하던 러시아 시베리아 항공 소속 투폴레프(Tu)-154 여객기가 공중폭발 후 흑해로 추락했다.
- 'Institute de France and Pont des Arts' - 'Portrait'
뷔페 [Buffet, Bernard, 1928.7.10~1999.10.4]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71)가 1999년 10월 4일 프랑스 투르투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비닐봉지를 얼굴에 덮어쓰고 질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파킨슨씨병을 앓아 왔고 "삶에 지쳤다"는 말로 자살을 예고했다고 측근이 전했다. 국립미술학교(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수학한 뷔페는 1946년 화단에 등단하면서부터 주목받아, 이듬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50여년 활동기간 중 8000점 이상의 작품을 그려 '다산작가' '재벌 화백'으로 불렸고, 그의 그림은 한 점당 50만프랑에 팔릴 정도로 고가였다. 외국, 특히 일본ㆍ러시아ㆍ이탈리아에선 '프랑스 현대예술의 교주'로 추앙받았지만, 막상 국내에선 대접받지 못했다. 파리 퐁피두 센터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하나도 사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음울한 잿빛과 날카로운 선. 그의 작품은 주로 비극적인 내용이 화폭에 가득했다. /조선
- 1991, Election of Yeltsin, 1st President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3년 10월 4일 러시아 최고회의 의사당에서 농성중인 보수파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 대규모 유혈사태까지 빚으면서 2주간에 걸쳐 벌였던 보수파 투쟁에서 승리했다. 보수파 지도자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과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은 체포됐다. 러시아 정부군은 이날 탱크와 장갑차를 세우고 보수파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는 의사당 건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 의회 지지파와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의사당 건물을 장악했으며 보수파 의원들은 투항했다. 정부군이 오전 7시부터 10여대의 탱크와 30여대의 장갑차로 의사당 건물을 포위한 뒤 로켓포 등을 발사하며 공격에 나서자 오후 5시경 수백명의 보수파 의원과 지지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조선
1991 - 한국-부룬디 국교 수립 부룬디는 한국과는1991년 수교하였고, 1992년 외무장관 시프리엔 음본임파(Cyprien Mbonimpa)가 방한하였다. 북한과는 1967년 3월에 수교하였다. 수교 후 한국은 자동차, 의료기자재, 의약품 등을 무상원조하고 있다. 2000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 90만 8000달러이며 주요 수입품은 폴리에스텔 섬유, 타이어, 튜브, 자동차 등이다. 2001년 3월 현재 한국인 체류자 5명이 있다. /naver
1989 -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막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한 세계성체대회가 1989년 10월 4일부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막됐다. 세계 108개국의 가톨릭 고위 성직자와 국내외 신자 65만명이 참석한 대회는 8일까지 5일간 열렸다. 폐막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참석, 장엄미사를 집전했다.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이 방탄차에 탑승하고 미사장에 입장하자 신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사회자의 선도로 '교황 만세' '비바 일 파파'를 합창했다. 교황은 미사 개회를 알리는 성호경을 또렷한 우리말로 시작, 강론을 뺀 전례일체를 우리말로 진행했다. 미사는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잔치답게 독서와 기도, 봉헌부문에 외국인들이 다수 참여, 독서는 중국인 여대생과 일본인 수사가 각기 자국어로 했고, 신자들의 기도는 불어-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고유어인 카갈로그어로도 올려졌다. 세계성체대회는 성체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성찬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행사로 4년마다 열려 '가톨릭의 올림픽'이라고 불린다. 이 행사는 본래 신심 운동으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 1881년 프랑스의 릴에서 처음 열렸다. /조선
한국과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의 첫 방한은 전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이목을 한국으로 쏠리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에 앞선 1983년 9월 바티칸의 교황청 비밀 회의장에서 한국 순교 복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가톨릭 2천 년 사상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성인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성인이 되려면 기적의 사례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조차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면제된 것이다. 3개월 뒤인 11일 25일에는 더욱 놀라운 소식이 전세계에 전해졌다. 교황이 직접한국을 방문해 한국 순교 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시성식은 줄곧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됐었다. 한국의 신자들은 즉위 후 5년 동안 27만 ㎞나 되는 거리를 누비며 36개국을 돌아다닌 교황이 시성식을 위해 몸소 한국땅을 밟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교황은 1984년 5월 3일 비행기에서 내려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순교자의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땅에 입을 맞췄다. 교황은 방한사에서도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말해 한국인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교황은 4박 5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땅을 떠날 때까지 신학생과 수도자, 주교단, 문화.예술인, 외교관 등 많은 이들을 만나는 한편 국립 소록도 병원을 찾아나환자들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1989년 10월 4∼8일에는 교황의 두 번째 방한이 이뤄졌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성체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됐기 때문. 교황은 이 기간에도 행사를 진행하면서 대부분 한국어를 사용해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교황은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젊은이 성찬제'에 참석해 약 1만 4천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는데, 미사가 끝난 뒤 젊은이들과 손을 잡고 '아리랑'을 합창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5-04-02 오후 04:56:00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3332.html
1983 - 한국-아일랜드 국교 수립 1961년 8월 한국의 유럽 친선사절단이 아일랜드를 방문함으로써 양국은 첫 외교 접촉을 가졌다. 그 뒤 1967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아일랜드 정부가 재한(在韓) 아일랜드 국민의 이익보호를 위한 영사 보호업무를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대행하도록 요청한 데 대하여 동의하였다. 아일랜드는 1955년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입한 이후 국제무대에서 서구 진영, 특히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회원국들과의 공동보조 하에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군사적으로는 중립주의 노선을 취하며 68개 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naver
1981 - 일본 TV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한국에서 첫 방영 원작 마츠모토 레이지 감독 니시자와 노부타카 제작사 도에이 애니메이션 방송사 MBCEBS 방영시기 1981년10월 4일~1983년1월 16일 (일요일 아침시간 방영) 화수 113화(요약편 제외) 《은하철도 999》(일본어:銀河鉄道999 긴가테쓰도 스리나인)는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가 창작한 만화 또는 이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의 숫자 '999'는 원작에서는 '쓰리 나인'(Three-Nine), 한국판에서는 '구구구'라고 읽는다. 만화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소년화보사의 소년 만화잡지 《소년 킹》 에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은 후지 TV를 통해 1978년9월 14일 부터 1981년 4월 9일까지 2년 6개월에 걸쳐 요약편을 포함하여 모두 113화가 방영되었다. 1979년과 1981년에는 린 타로가 감독한 극장판이 제작, 상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1년10월 4일부터 1983년1월 16일까지 문화방송에서 일요일 아침시간대에 방영되었다. 개요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은하철도의 밤(銀河鉄道の夜)》에 등장하는 은하철도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열차의 운행 체계의 세부 사항은 일본의 옛 철도를 본땄다. 원작자 스스로 은하철도의 밤과 증기기관차에 타고 동경에 갔던 젊은 시절의 체험이 기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宇宙海賊キャプテンハーロック)》과 함께 애니메이션화가 될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않다가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戦艦ヤマト)》가 갑자기 인기가 높아져 두 작품 모두 애니메이션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우주전함 야마토, 새로운 여행》도 TV로 방영되었다. 만화판은 1977년부터 만화 잡지 《소년킹(少年キング)》'에 연재되어 잡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1981년에 연재가 종료되어, 당시에는 이것으로 완전히 완결되어 속편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6년부터 소학관(小学館)의 잡지에 속편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해당 잡지를 거쳐 웹상에 불규칙하게 연재하여 999화까지 그리기로 하였다. 신작은 41화까지 그려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는 극장판 2편의 설정이 들어가 있어 만화판으로부터의 속편은 아니다. 하지만 단행본으로는 만화판 연재로부터 계속되는 번호가 붙여져 간행되고 있다. 신작에서는 세계관이 확대되고 설정이 적극 변경되어 다른 작품인 《우주해적 캡틴 하록》, 《퀸 에메랄다스》, 《천년여왕》, 《니벨룽겐의 반지》와 이야기가 복잡하게 이어졌고, 메텔과 에메랄다스의 관계도 이전의 라이벌에서 자매로 바뀌었다. 줄거리 배경은 은하계의 각 행성이 은하철도라 불리는 우주공간을 달리는 열차로 연결된 미래 세계(TV 애니메이션에는 서기 2221년으로 설정)이다. 우주의 부유한 사람들은 '기계의 몸체'에 정신을 옮겨 기계화 인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기계의 몸을 얻을 수 없는 데다가, 기계화 인간에게 박해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료로 기계의 몸을 준다는 안드로메다의 별을 목표로 주인공인 호시노 데츠로(星野鉄郎,한국명 철이)가 신비의 여인 메텔(メーテル)과 은하초특급 999호에 탑승하게 된다. 각 편은 기차가 머무르는 역(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마무리되며, 별도로 전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위키백과
1979 - 김영삼, 국회의원직 제명파동 [역사속의 오늘] 국회, 김영삼 의원 제명 1979년 10월 4일,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그해 9월16일자 ‘뉴욕타임스’지에 실린 김영삼 총재의 회견기사가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원조제공을 중단하고 정부에 대해 민주화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하고 사대주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여론에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이에대해 여당은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제명한 것이다. 그러자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며 반발한다. 더욱이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게된다. 이후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부터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고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결국,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하나의 계기가 됐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10월 0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433&yy=2008
1966 - 바수톨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레소토로 개칭 1868년에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1871년에는 케이프 식민지에 병합되었으나, 바소토족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에 1884년에는 영국 보호령 바수톨란드(Basutoland)로서 영국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의 지배를 받았다. 1910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한 후로는 남아프리카 정부가 여러 차례 병합을 요구하였으나 주민들이 이에 반대하였으며, 영국도 바수톨란드의 자치를 강화하여 1959년에는 헌법으로 의회를 창설하였고, 국민당을 비롯하여 몇 개의 정당도 결성되었다. 1964년에는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을 폐지하고, 1965년에는 국민의회가 설치되었으며, 총선거 결과 레아부아 조나단의 국민당이 국왕 모셰셰 2세(Moshoeshoe II)가 지지하는 회의당을 근소한 차로 이겼다.
1963 - 이준 열사 유해, 서울 수유리에 안장 유해 봉환 국민장 이 준 열사의 유해 56년만에 환국 이 준열사의 유해 봉환 직전에 네덜란드 여왕이 보낸 화환을 백선엽 대사가 헤이그 묘소 앞에 놓고 있다. 1963년 9월 26일 아침 9시 30분 백선엽 주불대사(화란대사 겸임)와 한국전 참전 용사 그리고 화란군 장교 4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준열사 헤이그 묘소의 발굴 작업이 시작 되었다. 열사의 유해가 비행기편으로 네덜란드를 떠나 황제의 특사로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구국의 장도에 올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에서 순국한지 반세기를 지난 후 백골이 되어 조국의 땅으로 돌아오다. [일성 이준열사 유해봉환 및 국민장 공고] 장소: 김포국제공항 장소 : 서울운동장 /사단법인 일성 이준열사기념사업회 http://www.leejun.org/bbs/view.php?id=data&page=1&sn1=&divpage=1&sn= 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
1959 - 소련 '루나 3호' 발사, 세계 최초로 달 뒷면 촬영 1959년 10월 4일 소련이 우주선 '루나3호(Luna-3)'를 우주에 쏘아올려 달 표면 관측에 성공했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촬영하기 위한 기구를 탑재한 루나3호는 10월 6일부터 달상공 7천km 궤도상에서 사진촬영을 시작했다.
1958 - 제트여객기 '코메트 4', 런던-뉴욕간 대서양 정기항공에 첫 취항 [제트여객기 코메트(Comet) 연혁] 1949-07-27 - 첫 비행에 성공 1952-05-02 - 최초의 정기항공 런던-요하네스버그 노선에 첫 취항 1952-07-08 - 런던 토쿄 노선에 첫 취항 1954-01-10 - 코메트(G-ALYP), 동체피로로 공중폭발 사고 1954-04-08 - 코메트(G-ALYY), 공중폭발 사고로 운항정지 1958-04-29 - 코메트 4(Comet-4) 처녀비행 1958-10-04 - 코메트 4(Comet-4) 런던~뉴욕간 대서양 정기항공에 첫 취항
1957 -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스푸트니크1호 발사 1957년 10월 4일 밤. 소련의 모스크바 방송이 긴급뉴스를 전했다. 인류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Sputnik-1)'를 발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미·소간 우주경쟁에서 비로소 우위를 차지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인류에게는 우주탐사를 향한 대장정의 첫걸음이었다. 러시아 말로 ‘동반자’를 뜻하는 스푸트니크호는 지름 58cm, 무게 83.6kg에 불과하고 단순히 전파만을 발사하는 수준이었지만 미국에는 충격이었다. 미국 NBC방송이 스푸트니크가 쏘는 전파를 받아 TV와 라디오로 생중계하고 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은 구겨진 자존심에 분을 삭이고 있었다. 만약 그 쇳덩이가 수소폭탄이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끔찍했다. 추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쫓아갈라치면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련은 저만큼 앞서갔다. 소련이 11월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하고 나서야 미국은 이듬해 1월 말, 겨우 8kg짜리 익스플로러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1959년 5월 원숭이를 태운 로켓을 발사했을 때는 소련이 이미 그해 초 달까지 날아간 첫 인공위성 루나1호를 쏘아올린 뒤였다. 인류최초의 우주인과 여성 우주인을 하늘로 날려보낸 것도 소련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미소는 그때까지였다. 1969년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우주는 미국의 영역이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 1957년 첫 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1957년 10월 4일 금요일 밤. 미국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저에서는 국제지구물리의 해를 맞아 세계 각국에서 모인 과학자들이 만찬을 벌이고 있었다. 냉전시대에 동서 진영의 과학자들이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소련의 한 과학자가 술에 취해 "우리는 1주일 아니면 한달 안에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1주일이라고? 도무지 믿기자 않았던 것이다. 그때 자리에 있던 뉴욕타임스 기자가 신문사에서 긴급 연락을 받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게 정말로 올라갔어!” 이기우 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3-10-03 18:35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31003/7988096/1
1955 -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졸업식
1947 -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Planck, Max) 사망 독일의 물리학자. 킬 출생. 뮌헨대학교를 나온 뒤 베를린대학교에서 헬름홀츠, 키르히호프의 강의를 듣고, 클라우지우스의 저서에 심취하였다. 학위논문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하여〉 이후 열역학을 연구 주제로, 엔트로피·열전현상(熱電現象)·전해질용해 등을 연구하는 등 열역학의 체계화에 공헌하였다. 그 총정리인 《열역학강의》(1897)가 있다. 1880년 뮌헨대학교 강사, 1885년 킬대학교 교수를 거쳐 1889년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교로 옮기고 1892년 정교수가 되었다. 베를린으로 옮긴 뒤부터 당시 학계의 화젯거리였던 열복사(熱輻射) 문제에 몰두, 처음 선형진동자(線型振動子)로부터의 복사의 사출흡수법칙(射出吸收法則)을 문제로 다루었으나, 이것이 벽에 부닥치자 뒤에 열역학적 방법으로 바꾸어 엔트로피와 에너지 관계를 추적, 빈의 법칙을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루머, 프링스하임, 루벤스, 쿠를바움 등에 의해 제시된 실험과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남에 따라 빈 분포식의 개량으로 나아갔고, 1910년 마침내 실험과의 일치를 보게 된 ‘플랑크의 복사식(輻射式)’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그 물리적 해석을 둘러싸고 독창적인 에너지양자(量子)에 대한 생각에 도달, 보편상수 h(플랑크상수)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생각으로서 마침내 양자론의 전개를 초래하였고 물리학에 커다란 전기(轉期)를 가져왔으며, 이 공로로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상대성이론에도 관심을 가져 1914년 아인슈타인을 베를린대학교에 초빙하였다. 1913년부터 베를린대학교 총장으로 근무하다가 1928년 물러나 그 후는 프로이센학사원의 종신 이사로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처음 에너지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는 볼츠만의 생각을 지지하고, 마흐의 감각론(感覺論), 사유경제설(思惟經濟說)에 반대하였다. 물리학적 인식론에 관한 많은 에세이가 있다. /naver
1935 -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오늘속으로<920>(10월4일)] 영화 '춘향전' 1935년 10월4일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이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각본은 이기세가 썼고, 감독은 이명우였다. 두 주인공 성춘향과 이몽룡 역은 문예봉과 박제행이 각각 맡았다. 발성 영화답게 우리 영화 사상 처음으로 주제가를 삽입했는데, 작곡을 맡은 이는 홍난파였다. 춘향전이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1922년이다. 이 최초의 ‘춘향전’ 영화는 일본인 하야카와(早川孤舟)가 감독을 맡은 무성 영화였다. 배우들은 춘향 역의 한룡, 몽룡 역의 김조성 등 조선인들이었다. 첫 발성 영화 ‘춘향전’이 나온 이듬해인 1936년에는 이규환 감독이 ‘그 이도령’이라는 제목으로 두 젊은이의 사랑을 영화에 담아 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규환 감독은 해방 뒤인 1955년에도 이몽룡 역에 이민, 성춘향 역에 조미령, 변학도 역에 이예춘을 내세워 ‘춘향전’을 선보였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연애는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러브스토리였던 터라, ‘춘향전’은 그 이후에도 수많은 영화인들을 유혹했다. 김향, 안종화, 이경춘, 홍성기, 신상옥, 이동훈, 김수용, 이성구, 박태원, 한상훈, 임권택 등의 감독이 이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고, 최은희, 홍세미, 장미희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춘향 역을 맡았다. 당초 판소리로 생성돼 소설로 정착한 ‘춘향전’은 당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던 속담이나 생생한 관용 표현들의 전시장이었다. 예컨대 ‘사위는 백년지객이라’, ‘쏘아놓은 살이요, 엎지른 물이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심은 나무 꺾어지고 공든 탑이 무너졌네’, ‘짝 잃은 원앙’, ‘죽은 중 매질하기’ ‘개구멍 서방’, ‘죽으러 가는 양의 걸음’, ‘대한(大旱) 칠년(七年) 비 바라듯’, ‘구년지수(九年之水) 해 바라듯’.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310/h2003100319100225340.htm
1931 - 미국의 클라이드 팡본과 휴 헌던, 태평양 무착륙 횡단 비행에 도전 1931년 10월 4일~5일 클라이드 팡본과 휴 헌던, 단발단엽기 미스 비돌로 일본 아오모리 현의 사비시로에서 미국 서해안의 웨낫치까지의 북태평양황단비행에 성공(미국) /항공발달연대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tw12&logNo= 100110502331&viewDate=¤tPage=1&listtype=0
아오모리 스토리-미사와 항공과학박물관 박물관 앞엔 길쭉하게 뻗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기념비의 주인공은 1931년 10월 4일 미사와를 출발해 미국 서해안의 웨낫치까지 인류 최초로 태평양 무착륙 횡단 비행에 성공한 미스 비들호와 조종사 클라이드 팡본, 휴 헌던입니다. 기념비의 높이는 19.31m로 횡단 비행에 성공한 연도에 맞췄다고 하네요. 미사와 항공과학박물관은 아오모리가 일본의 항공 과학과 얼마나 많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으로, 야와 테마 파크, 실내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3년에 개관을 했습니다. 奇星 /Design Republic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ksstudio&logNo= 3010256673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Trans-Pacific flight Pangborn and Herndon finally took off on October 4, 1931 from Sabishiro Beach, Misawa, Aomori, Japan. Their destination was Seattle, Washington, just under 5500 miles (8500 km) away, a distance exceeding Charles Lindbergh's flight from New York to Paris by 2000 miles. Immediately after take-off, a problem arose: the device intended to jettison the landing gear partially failed. The gear was ejected, but the two root struts remained. Pangborn was forced to climb out on the wing supports barefoot at 14,000 feet in the air to remove the struts. Due to fog in both Seattle and Spokane, Washington, Pangborn and Herndon landed in Fancher Field in East Wenatchee, Washington on October 5, 1931, after 41 hours and 15 minutes of flying. A memorial to the historic flight is located near the landing site, and a propeller damaged from the landing is on display in a Wenatchee museum. The regional airport, Pangborn Memorial (EAT) in East Wenatchee, also honors his accomplishment.
1924 - 미국의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Heston, Charlton) 출생 헤스턴 [Heston, Charlton, 1924.10.4~2008.4.5] 미국 영화배우. 본명은 존 찰턴 카터. 1959년 〈벤 허 Ben-Hur〉에서 유다 벤 허 역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헤스턴은 〈벤 허〉에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로마 제국의 불의와 싸워 이기는 노예 역을 맡아 아카데미상을 탔다. 그러나 처음부터 헤스턴이 벤 허 역으로 지목되었던 것은 아니다. 헤스턴 이전에 록 허드슨, 버트 랭커스터, 말론 브랜도 등이 거론되었다. 사실 헤스턴이 처음 제안받았던 역은 벤 허의 로마인 경쟁자 메살라 역이었다. 그러나 이미 〈영부인 The President's Lady〉(1953)과 〈십계 The Ten Commandments〉(1956) 같은 대하 역사극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던 헤스턴은 주연을 원했다. 결국 헤스턴은 위엄 있고 인간적인 벤 허의 모습을 살려냈다. 그는 이 역을 비롯해 다른 대규모 영화에서도 권위 있는 역을 맡음으로써 용감하고 심지 굳은 영웅적 이미지를 가진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헤스턴은 이런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작은 영화들(예를 들어 오슨 웰스의 1958년작 〈악의 손길 Touch of Evil〉)에서 복합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고, 영화 제작기술의 발달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브리태니커
1918 - 일본의 화학자 후쿠이 겐이치[福井謙一, Fukui Kenichi] 출생 후쿠이 겐이치 [福井謙一, Fukui Kenichi, 1918.10.4~1998.1.9] 일본 화학자. 1918년 나라현에서 공장장이었던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Rouget de Lisle, by Frederic A. Bartholdi
1904 - 프랑스의 조각가 프레데릭 바르톨디(Bartholdi, Frédéric) 사망 바르톨디 [Bartholdi, Frédéric Auguste, 1834.8.2(4.2)~1904.10.4] 프랑스의 조각가. 뉴욕 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했다. 1886년 헌납된 이 여신상의 원래 제목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였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벨포르의 사자 Lion of Belfort〉(프랑스 벨포르 소재)로, 이 작품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수많은 애국적인 조각품들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903 - 미국의 물리학자 존 V. 애터너소프(Atanasoff, John V.) 출생 아타나소프 [Atanasoff, John Vincent, 1903.10.4~1995.6.15] 미국의 물리학자. 최초의 전자 디지털 컴퓨터 발명자이지만 1973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애터너소프는 클리퍼드 베리와 함께 아이오와주립대학교에서 엉성하기는 하지만 컴퓨터의 원형인 애터너소프-베리 컴퓨터(Atanasoff-Berry Computer/ABC)를 개발했다(1937~42). 기능이 한정된 진공관 튜브 장치였던 이 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가 없는 데다 프로그램 작성도 할 수 없었지만 2진법을 사용해 미분방정식을 풀 수 있었다. ABC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이 기계의 구성요소가 훗날 현대 컴퓨터의 기본구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소송으로까지 비화된 컴퓨터 논쟁은 J. W. 모클리가 1941년에 애터너소프를 찾아가 ABC의 디자인에 대해 토론을 벌인 데서 비롯되었다. 애터너소프는 컴퓨터 연구를 중단하고 워싱턴 D.C.에 있는 해군 군수품연구소의 음향 연구부서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 후에는 두 군데의 기술회사를 이끌었다. 그가 뒤늦게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자로 인정받은 것은, 최초의 전자 디지털 컴퓨터로 인정받은 발명품 에니악(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ENIAC)에 대한 소송에서 법원이 스페리랜드회사 소유의 특허권을 무효라고 판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로써 애터너소프는 법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았지만, 여러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에니악의 발명자인 J. P. 에커트와 모클리를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로 인정했다. 컴퓨터에 대한 그의 공헌은 1988년 간행된 〈최초의 전자 컴퓨터:애터너소프 이야기 The First Electronic Computer:The Atanasoff Story〉와 〈애터너소프:잊혀진 컴퓨터의 시조 Atanasoff:Forgotten Father of the Computer〉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는 1981년 컴퓨터 선구자 메달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국가 공학 메달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 'The General' - Buster Keaton
1895 - 미국의 희극배우, 감독 버스터 키턴(Keaton, Buster) 출생 키턴(키튼) [Keaton, Buster, 1895.10.4~1966.2.1] 키턴은 1920년대 걸작 무성영화를 남긴 미국의 희극 배우이자 감독이다. 찰리 채플린의 연기가 인물의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코미디였던 반면, 키턴은 ‘위대한 무표정’(Great Stone Face)이라고 불릴 만큼 인물과 상황의 충돌이 일으키는 효과에 집중했다. 그가 처음 출현한 영화는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1917)이었으며 희극의 스타 로스코(뚱보) 아버클과 함께 수많은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셜록 홈스 이야기를 이용해 영화 장치를 탐구한 <셜록 2세>(1924)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한 <장군 The General>(1926) 등은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꼽힌다. 영화에서 대사가 팬터마임을 대신하게 되어 한동안 인기가 떨어졌으나 1940년대말부터 이전에 그가 출연했던 영화가 재상연되면서 명성을 되찾았다. /브리태니커
장군 [The General] 1862년에 일어난 J.A.앤드루스의 장군호 탈취사건을 모델로 한 코미디 무성영화. 슬랩스틱 코미디의 전형으로, 무표정과 백치 같은 행동의 배우 버스터 키턴의 대표작이다. 1862년에 발생한 J.A.앤드루스의 '장군(The General) 호' 탈취 사건을 모델로 하였다. 남부 철도회사 기관사 조니(버스터 키턴)는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지원한다. 징집관은 기관사로 근무하라고 하며 조니의 지원을 거절한다. 북군의 첩자들이 조니의 애인 아나벨(마리온 맥)이 탄 기관차 '장군호'를 납치한다. 조니 혼자서 기차를 찾으러 나선다. 이 과정에서 조니는 북군의 계략을 알게 된다. 아나벨을 구한 조니는 '장군호'를 타고 탈출한다. 조니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를 얻은 남군은 그를 장교에 임명한다. 이 작품이 영화사에서 중시되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한 현대적인 기법에 있다. 특정 위치의 카메라가 빚어내는 시각적 효과가 그 중의 하나로,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그리고 철저하게 무관한 위치에서 곤경에 빠진 주인공을 관찰하게 하며, 때로는 그 곤경을 즐기게 한다. 여기에 키턴 특유의 백치 같은 냉철한 무표정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미국영화의 모범 답안으로 불린다. '소시민인 주인공과 그 애인, 애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우연히 얽히게 되는 엄청난 사건, 이를 훌륭히 수행해 내면서 엿보이는 애국심, 다시 얻게 되는 사랑'의 구조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원형이다. /네이버
"너저분한 신발에 납작한 모자나 눌러쓴 나를 어떻게 천재라고 할 수가 있소? "
- 버스터 키턴
1895 - 소련의 정보원 조르게(Sorge, Richard) 출생 조르게 [Sorge, Richard, 1895.10.4~1944.11.7] 리하르트 조르게 (Richard Sorge, 1895년 10월 4일 ~ 1944년11월 7일) 는 일본을 주무대로 활약한 소비에트 연방 간첩이다. 그는 신문 기자로 가장하여 독일 신문의 일본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추축국의 주요 정보를 빼내 소비에트 연방에 넘겨 연합국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44년 일본측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생애 /위키백과
1894 - 스웨덴의 시인, 전기작가, 소설가 벵트손(Bengtsson, Frans Gunnar) 출생 벵트손 [Bengtsson, Frans Gunnar, 1894.10.4~1954.12.19] 스웨덴의 시인·전기작가·소설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많은 구어체 수필을 썼는데 사실상 이 장르를 처음 스웨덴 문학에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룬드대학교 시절 공부에 게으름을 피웠으나 결국 해박한 지식을 쌓아 시와 산문을 쓸 때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방대한 산문 작품으로는 찰스 12세의 전기(2권, 1935~36)와 소설 〈긴 배 Rode Orm〉(2권, 1941·1945)가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매우 수사적이고 화려한 낭만주의 문체로 씌어졌다.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풍부하고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산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능력은 수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되었으며, 이 수필들은 1929~55년에 5권으로 출판되었다. 문학과 역사의 진기한 것에 대한 별난 탐구는 수필집 〈개미총으로의 산책 외(外) Sall-skap for en eremit〉(1938)에 잘 나타나 있다. /브리태니커
1892 - 오스트리아의 총리 돌푸스(Dollfuss, Engelbert) 출생 돌푸스 [Dollfuss, Engelbert, 1892.10.4~1934.7.25] [오늘<1228>(10월4일)] 돌푸스 나치당원들의 이 쿠데타 기도는 이내 진압됐고 돌푸스의 후임으로 법무장관 겸 교육장관 쿠르트 폰 슈슈니크가 취임했으나, 히틀러가 지배하는 나치 독일 바로 옆에서 오스트리아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돌푸스와 히틀러 사이의 불화는 이념적 불화가 아니라, 국가 주권 차원의 불화였다.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 소속으로 총리가 된 뒤 다른 우익 정파ㆍ민병대와 함께 조국전선을 꾸려 정부를 이끌던 돌푸스는 히틀러와 여러 모로 닮은 데가 있었다. 돌푸스는 파시스트 독재자였고, 좌파 정당 사회민주당을 불법화했다. 그는 아예 의회를 해산하고 포고령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히틀러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돌푸스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총통 히틀러가 바라는 대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 나라의 합병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불법화해 히틀러의 비위를 건드렸다. 돌푸스가 바란 것은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식의 파시스트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 긴밀히 협력했다. 돌푸스의 죽음을 초래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 기도는 그 직전 사회주의자들의 실패한 봉기로 오스트리아 정정이 어수선한 틈을 탄 것이었다. 돌푸스의 후임 슈슈니크는 전임자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탈리아의 지원으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히틀러의 눈치를 본 이탈리아가 딴청을 부림으로써 오스트리아의 고립은 점점 심화되었다. 돌푸스가 죽은 지 네 해 만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요청으로 독일군이 오스트리아에 진주하면서 두 나라의 합방(안슐루스)이 선언됐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0/03 18:03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0/h2004100318013525340.htm&ver=v002
1883 - 오리엔트 특급열차 첫 운행 [어제의 오늘]1883년 오리엔트 특급 열차 첫 운행 ㆍ파리~이스탄불 연결한 영욕의 철길 1883년 10월4일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프랑스 파리 동역을 출발했다.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터키 이스탄불까지 달리는 세계 첫 대륙 횡단 열차의 첫 운행이었다. 열차는 뮌헨과 빈을 거쳐 베오그라드, 사라예보, 트리에스테와 같은 이국의 지명들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달렸다. 그때만 해도 다뉴브강을 페리로 건넌 뒤 열차를 갈아타야 했지만, 6년 뒤인 1889년부터는 파리와 이스탄불이 논스톱으로 연결됐다. 2000㎞를 사흘 만에 주파하는 특급 열차였다. 오리엔트 특급은 세계 첫 호화 열차이기도 했다. 개인 세면기가 달린 침대차의 객실에는 오리엔탈풍의 카펫을 깔고 마호가니 나무로 장식한 뒤 스페인 가죽으로 장정한 안락의자를 비치했다. 유럽 대륙 횡단 여행을 감행할 만큼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던 왕족, 귀족, 군인과 부자들이 객실을 차지했다. 최명애 기자 glauku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0-03 22:06:1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032206145&code=100100&s_code=ap005
1881 - 핀란드 출신 러시아 정치가 쿠시넨(Kuusinen, Otto) 출생 시넨 [Kuusinen, Otto Vil'gel'movich, 1881.10.4~1964.5.17] 핀란드 공산당의 창설자이자 제3인터내셔널의 서기관. 소련공산당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1905년에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그는 당의 여러 요직들을 맡았고, 1918년초에는 단명한 핀란드 사회주의 정부에서 문교부장관직을 맡았다. 같은 해 핀란드 독립전쟁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자 러시아로 피신하여 핀란드 공산당의 조직가로 활동했다. 그는 제1·2차 세계대전 동안에 계속 망명상태에 있으면서 코민테른의 서기관이라는 막강한 지위를 차지했다. 1939년 8월의 독일-소련 협정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할당된 핀란드가 1939년 소련과의 '겨울전쟁'을 시작하자 그는 핀란드 사회주의 괴뢰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0년초 소련이 핀란드와 협정을 체결하게 되자 그의 정부는 조용히 해체되었다. 1940~56년 카렐리아-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는데, 이 공화국은 1940년에 종전이 되면서 소비에트 연방 동부의 카렐리아와 핀란드 서부의 카렐리아가 합쳐져서 세워진 것이다. 그는 1946~53년과 1957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회의 위원 겸 당서기를 지냈다. /브리태니커
1870 - 일본의 천문학자 키무라 히사시[木村栄, Kimura Hisashi] 출생 키무라 히사시 [木村栄, Kimura Hisashi, 1870.10.4~1943.9.26] 한글 이름 : 키무라 히사시 원어 이름 : Kimura Hisashi(木村栄) 생년월일 : 1870년 10월 4일~1943년 9월 26일 국적 / 지역 : 일본 출생지 : 이시카와 현 카나자와 구분 : 천문학자 연구분야 : 위치천문학 저서 : 위도관측소에 관하여'緯度観測所に就て', 위도변화에 관하여'緯度変化に就て' 공적 : 1902년에 위도변화의 Z항을 발견(자전축 기울기에 관한 방정식으로 종전까지의 식에 Z를 추가함으로써 올바른 식이 되었다(⊿φ = Xcosλ + Ycosλ + Z ) 인물 소개 : 1899년 현재의 국립천문대 미즈사와 VERA관측소 소장으로 취임하고 1941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1911년 일본 박사원의 은사상을 수상하고 1937년 제1회 문화훈장을 받음. /천문학습관 http://astro.kasi.re.kr/Main/ContentViewForm.aspx?MenuID=2082
Hisashi Kimura (木村 栄, Kimura Hisashi, October 4, 1870 – September 26, 1943) was a Japanese astronomer originally from Kanazawa, Ishikawa. He devoted his career to the study and measurement of variation in latitude, building upon the work of Seth Carlo Chandler, who discovered the Chandler wobble. He was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Latitude Observatory at Mizusawa, Japan. He won the Gold Medal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 in 1936. He was one of the first people to be awarded the Order of Culture when it was established in 1937. The crater Kimura on the Moon is named after him, the same for the asteroid 6233 Kimura. http://en.wikipedia.org/wiki/Hisashi_Kimura
- Frederic Remington
- 'The Smoke Signal'
- 'Coming through the Rye' - 'A Dash for the Timber'
1861 - 미국의 화가, 삽화가, 조각가 프레더릭 레밍턴(Remington, Frederic) 출생 레밍턴 [Remington, Frederic, 1861.10.4~1909.12.26] 미국의 화가·삽화가·조각가. 미국 서부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일대학 미술학부와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으며, 그후 주로 삽화를 그렸다. 그는 여러 곳을 두루 여행했는데, 특히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인디언과 카우보이, 군인, 말, 그리고 초원 생활의 다양한 측면 등을 묘사하는 것을 전문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책과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런 저술은 주로 삽화를 발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미국이 스페인과 싸우는 동안 그는 종군기자 겸 화가로 참전했다. 레밍턴은 주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충실히 묘사한 기록자였다. 그의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빠른 동작의 묘사와 정확한 세부 묘사이다. 뉴욕 주 오그던스버그에 있는 레밍턴 미술 기념관에는 그의 그림과 삽화 및 청동상 등 중요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1858 -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푸핀(Pupin, Michael) 출생 푸핀 [Pupin, Michael Idvorsky, 1858.10.4~1935.3.12] 미국의 전기물리학자. 헝가리 이드보르 출생. 1874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 다시 케임브리지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892년 컬럼비아대학교 조교수,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 전신 전화 및 무선 등 연구범위가 넓으며, 1896년 2차 X선 방사를 발견하였다. 업적은 1899년 푸핀 코일이라는 유선통신의 장하방식(裝荷方式)을 발명한 것이다. 이것은 적당한 간격으로 장하 코일을 끼우는 방법인데, 이로써 통신 에너지의 감쇠손실을 경감시켜 장거리 전신의 기술적 기초가 확립되었다. 자서전 《이민자(移民者)에서 발명가로 From Immigrant to Inventor》(1923)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naver
- Centenary of the defence of Sevastopol during the Crimean War
1853 - 투르크, 러시아에 선전포고, 크림전쟁(크리미아전쟁) 발발 크림 전쟁[ ─ 戰爭, Crimean War ]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1853. 10~1856. 2). 1855년 1월부터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이 전쟁은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나,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 되어 일어났다. 한편 팔레스타인의 성지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권한을 놓고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분쟁 또한 주요요인으로 작용했다. 1853년 7월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과의 경계에 있는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지금의 루마니아)을 점령하자 투르크 제국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강경하게 맞섰다. 1853년 9월 23일 영국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향했다. 10월 4일 투르크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같은 달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투르크 쪽 흑해 해안에 있는 시노페 앞바다에서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1854년 1월 3일 투르크의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흑해로 들어왔다. 3월 28일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만족시켜 참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에서 철수했지만 1854년 8월 오스트리아가 이곳을 점령했다. 1854년 9월 연합군이 흑해의 북쪽 해안에 있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에 상륙해 1년에 걸친 세바스토폴 포위가 시작되었다. 주요전투는 9월 20일 알마 강에서, 10월 25일 발라클라바에서, 11월 5일 인케르만에서 벌어졌다. 1855년 1월 26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도 전쟁에 가담해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주요거점인 말라호프를 공격한 지 3일이 지난 1855년 9월 11일, 러시아군은 요새를 폭파하고 함선들을 침몰시킨 뒤 마침내 세바스토폴에서 철수했다. 전쟁의 제2단계는 카프카스와 발트 해에서 전개되었다. (발췌) /브리태니커
헤이스 [Hayes, Rutherford Birchard, 1822.10.4~1893.1.17] 미국의 제19대 대통령. 오하이오주(州) 출생. 변호사 출신으로 공화당 하원의원, 오하이오 주지사를 거쳐 1876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재임 중 그때까지 군정(軍政)을 펴고 있던 남부 여러 주에서 연방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재건(再建)을 완결지었으며, 관리임용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정계의 부패가 끊이지 않아 충분한 정치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naver
- 'The Greaners' - 'The Winnower'
- 'The Sower' - 'Dasies in Vase'
- 'Spinning' - 'Threshing' - 'Flax Pulling
밀레 [Millet, Jean-François, 1814.10.4~1875.1.20] [오늘의 역사 10월 4일] 화가 밀레 태어남 프랑스의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14년 오늘 노르망디 지방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 생활 모습과 주변의 자연 풍경을 그렸다. http://kids.hankooki.com/lpage/news/200810/kd2008100315225277150.htm
1813 - Attack of the Leib Guard Cossacks near Leipzig RUSSIA - CIRCA 2013: A stamp printed in Russia shows 200th Anniversary of the Allied Armies' Victory over Napoleon in the Battle of Leipzig, picture by Karl Rechlin "Attack of the Leib Guard Cossacks near Leipzig on 4 October 1813", circa 2013
1797 - 스위스의 소설가 고트헬프(Gotthelf, Jeremias) 출생 고트헬프 [Gotthelf, Jeremias, 1797.10.4~1854.10.22] 스위스의 소설가. 본명 비치우스(Albert Bitzius). 베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자가 되었다. 1831년에 베른주(州) 에멘탈의 한촌(寒村)에 거처를 정하고 1932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틈틈이 소설을 썼다.
1720 - 이탈리아의 판화가, 건축가 피라네시(Piranesi, Giovanni Battista) 출생 피라네시 [Piranesi, Giovanni Battista, 1720.10.4~1778.11.9] 이탈리아의 판화가이며 건축가. 메스트레 출생. 고대 로마의 폐허와 유적에 정열을 쏟아 명암(明暗)을 대비시켜 극적인 효과를 동판(銅版)에 새겼으며, 자유분방한 구상력에 따른 건축물은 신비한 몽환적(夢幻的)인 세계를 재현하였다. C.로랑(1600∼1682)의 풍경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의 낭만적인 풍경화의 패턴이 되었다. 작품은 고대 로마예술로의 단순한 복고(復古)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해석을 전개시켜 유럽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의 건축 ·장식예술, 그리고 낭만주의 문학에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카르체리 Carceri》와 《로마의 경관 Vedute di Roma》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며, 건축가로서는 몰타 여자수도원의 설계 등이 있다. /naver
- 'Self-portrait' - 'Saskia van Uylenbruch'
- 'Old Blind Tobias' - 'Self-portrait of 1639'
- Self-portrait', 'Danae, Birth Anniversary, 1636'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Christ at Emmaus' - 'The Anatomy Lesson'
- 'Artaxerxes, Esther and Haman'
- Booklet (2006)
- 'Self-portrait with Saskia'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06.7.15~1669.10.4] [오늘의 경제소사/10월4일]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출생부터 인생 중반까지 풍요 속에서 지냈던 인물. 1606년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덴대학 입학 직후 학업을 접고 화가로 나서 처음부터 성공을 거뒀다. 최초의 집단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교실’을 그렸을 즈음에는 귀족들이 그의 초상화를 얻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26세에는 명문가의 딸과 결혼해 명예는 물론 막대한 지참금도 챙겼다. 문제는 과용. 화구와 고서적, 소도구, 이탈리아 골동품을 구입하는 데 거액을 지출했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5층짜리 저택도 은행 대출로 사들였다. 불행은 가정과 금전, 두 측면에서 찾아왔다. 아이 넷 중 셋이 생후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표작 '야경'을 완성한 1642년 아내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사별 이후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은행 빚을 못 갚아 1658년에는 저택도 경매에 부쳐졌다. 가난 속에서도 대작을 그려냈지만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이 27세로 사망(1665년)한 뒤 4년 후 영욕의 생을 마감했다. 향년 63세. 굴곡진 삶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미술품 거래회사를 설립하고 경매시장을 활성화시켜 귀족계층의 전유물이던 예술을 대중화한 선구자라는 분석과 철저한 반(反)시장주의자였다는 해석이 상존한다. 깊은 신앙심을 지닌 성서화가였다는 평가의 이면에 결혼을 요구하는 동거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냉혈한이라는 분석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그를 ‘빚의 화가’ ‘비즈(사업) 화가’보다는 ‘빛의 화가’로 기억한다는 점. 렘브란트의 화폭에 새겨진 영롱한 빛의 가격도 갈수록 비싸진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0/03 17:13 http://economy.hankooki.com/lpage/news/200710/e2007100317130370290.htm
1535 - 윌리엄 틴들, 영어로 성경 완역 [책갈피 속의 오늘]1535년 틴들, 영어로 성경 완역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04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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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