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0 민주항쟁이란?
1. 의미
6·10 민주 항쟁, 간단히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이다.
2. 사건배경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3.. 사건 과정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며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강경 탄압했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거리시위가 이어지자, 같은 해 4월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장기집권을 밀어붙이려 했다. 이에 시민들이 반대하며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그 결과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며 혼란했던 정국은 수습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4. 경과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경찰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군대의 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 과연 군대가 전두환의 뜻대로 움직일지가 미지수였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
5. 결과
* 6.29 선언 발표
*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
*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6. 항쟁의 의의
6월 항쟁은 군사적 독재 정치가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노태우 정권의 출범으로 귀결돼 군사주의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 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노조를 통해 조직화되어 나타난 7월과 8월,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되었다.
※ 1987년 6.10민주항쟁 동영상
https://youtu.be/ARMmE-VT8-o?si=vwjVNE7R6VBrCq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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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시간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