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範英
⊙ 80세. 평남 중화 출생.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27기, 육군대학 수석졸업.
⊙ 제11사단 9연대 3대대 9중대 1소대장으로 6·25전쟁 중 금성지구 전투 참전.
십자성부대 1군수지원단 부단장,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으로 베트남전 참전.
⊙ 육본 작전참모부 전쟁계획 장교, 3군단 정보·작전참모, 1군사령부 정보처 기획과장,
2사단 17연대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력처 과장 역임. 육군 대령 예편.
⊙ 서훈: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베트남 대통령 훈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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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 시절의 이범영 대령. |
1964년 9월 전군에서 선발된 중령 61명, 소령 39명 등 총 100명이 육군대학 1965년도 정규 과정에 입학했다. 이는 향후 승진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을 의미했고, 실제로 졸업하면 주요 보직에 배치되고 진급도 보장됐다.
장모님과 아내(이봉월) 그리고 두 돌이 된 아들(태일)과 함께 열차를 타고 육군대학이 있는 경남 진해시로 갔다. 방을 하나 얻어 네 식구가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육군대학에 들어가 군 생활 중 처음으로 관사를 배정받았다. 방 두 칸에 거실과 목욕탕이 있는 집, 지금껏 전전하던 단칸방, 사글셋방과 비교하면 ‘대궐’이었다.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관사에는 지성한(池聖漢) 소령이 살았다. 지 소령은 미국에 유학 가서 우리나라 최초로 거짓말 탐지기에 대한 자격을 취득했고, 귀국 후에는 육군의 헌병과 보안부대, 경찰과 검찰 수사관들에게 거짓말 탐지 기술을 가르친 우리나라 거짓말 탐지 기술의 개척자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장교였던 그는 탤런트 심은하(沈銀河)씨의 시아버지로, 현재 한성실업 회장과 서울마주협회 회장으로 있다.
육군대학 교육 기간 중 생활비가 모자라 부득불 초등군사반 졸업 때 우등상 부상으로 받은 금메달을 팔아야만 했다. 그 후 금메달은 똑같은 것으로 다시 복원해 갖고 있다. 그러나 그때 팔았던 아내의 결혼반지는 다시 해주지 못했다.
우리는 입교 후 핵무기학과 참모학을 먼저 배웠다. 나는 첫 핵무기 시험을 잘 치러 A학점을 받았다. 우리 정규 과정 동기생 중에는 육사 11기생 중 최초로 선발돼 입교한 소령이 17명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김복동(金復東) 전 육사교장, 이기백(李基百) 전 국방부장관, 이상훈(李相薰) 전 국방부장관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성적은 거의 B학점 이하였고 C, D학점인 장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육사 출신 학생 주동으로 재시험을 건의했다. 꿈을 갖고 입교한 그들이기에 낮은 성적에 실망했고, 재시험을 통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얻고자 했다. 교수단장 백문오(白文梧) 대령(육사 특별8기·초대 1공수특전단장 역임)은 “똑같은 조건하에서 치른 결과에 대해 재시험을 치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일축했다.
車圭憲 장군, 월남에 갈 것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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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일 파월 청룡부대가 베트남 쾅트리 지역에서 작전 중에 있다. |
그러나 교수단의 건의를 무시하고 육군대학 측은 전원 재시험을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우리는 골치 아픈 핵무기 시험을 다시 한 번 치렀다. 시험 성적은 1, 2차 시험을 합산해서 평균 점수로 결정했다. 다행히 나는 재시험에서도 A학점을 받아 핵무기학 1등의 성적을 얻었다.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야전군 전술, 군단 공격과 방어 등에서 1등을 해 육군대학 수석 졸업자로 확정됐다. 졸업식 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제71호 우등상과 부상으로 ‘대통령상’이란 글씨가 음각된 금시계를 받았다. 1961년부터 앓고 있던 폐결핵이 완치되지 않아 오후 교육시간에 들면 미열이 났으나 결핵약을 먹어가며 악전고투를 한 결과였다.
그 기간에 식단이란 밥 한 그릇에 마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몽고 간장을 비벼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이 식단의 전부였다. 형편이 좋아지면 계란을 넣어서 먹는 것이 유일한 영양식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교육에 시달려 체중이 줄어든다 야단이었지만, 나는 입교할 때 체중(53kg)보다 6kg이나 불었고 폐결핵도 완치됐다. 졸업식에서 내가 대통령상을 받았고, 김복동 소령은 5등상인 육군대학 총장상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1965년 6월 19일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2년여 육군대학 교관으로 근무한 후 육본 인사담당 장교로 전속이 됐다. 모든 장교가 희망하는 자리였다. 차규헌(車圭憲) 준장(대장 예편·교통부장관 역임)은 지금껏 인사와 군수 등 이권과 관련한 업무를 취급해 보지 않은 장교 중에서 담당 장교를 선발하라고 했다.
나는 인사담당 장교로 가기를 원치 않았다. 개인적인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인사 장교의 자리는 육군 장교 운영 방침에 따라 전후방 장교들의 보직을 결정하는 자리다. 많은 희망자 중 한 사람만 보직을 받고, 탈락한 사람들은 인사 담당자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1968년 파월 장교를 선발했다. 그 무렵 동기생들이 베트남 파병을 요청하고자 찾아왔다. 베트남에 파병되면 국내의 봉급과 미군(美軍)이 지급하는 급료를 이중으로 받는 혜택이 있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휴대 물건을 장만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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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19일 육군대학 수석 졸업 때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한 육군대학 김익권 총장으로부터 대통령상을 받고 있다. |
내가 베트남에 파병되기 1개월쯤 전이었다. 그 무렵 맹호부대장(수도사단장)으로는 윤필용(尹必鏞, 육사8기) 장군(수경사령관 역임)이, 십자성부대장으로는 차규헌 장군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교보직처장 차규헌 장군이 나를 불러 “주월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제1지원단 부단장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군수 업무 분야는 경험이 없어 곤란하다”고 말했다. 차 장군은 “인사 업무도 경험이 없이 잘했으니, 군수 업무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차 장군은 1년간 열심히 일한 나에게 보상의 성격으로 군수부대 부단장 자리를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려면 군수부대보다는 전투부대 대대장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차 장군은 내게 “대대장은 베트남을 다녀와서 해도 늦지 않으니 부단장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나는 차규헌 장군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성부대 부단장으로 가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육군 중령으로 십자성부대 부단장의 직위는 경제적으로 얻을 것이 많아 요직(要職) 중의 요직으로 평가받는 보직이었다. 차 장군으로서는 모두 가고자 하는 그런 자리를 마다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68년 10월 28일 십자성부대 제1지원단 부단장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나는 육본에 근무하는 동안 집이 없었다. 돈암동 처가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베트남으로 출국할 때는 처갓집 신세를 더 이상 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세금 20만원을 차용해 6·25 때 납북된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선생(돈암동 소재) 집 작은방에 전세로 입주해 가족을 독립시켜 놓고 떠났다. 그 방은 안재홍 선생 댁 본채 뒤에 방을 들인 ‘곁방’이어서 낮에도 전깃불을 켜야 했다. 아내와 아들, 딸 셋이 몸을 누일 여유도 없는 좁은 단칸방이었다.
항공편으로 사이공 공항에 도착했다. 퀴논에 있는 부대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에 하룻밤을 장교 숙소에서 잤다. 그곳에서 장교들에게 여비로 지급한 미화 30달러를 군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해서 1대 1로 바꾸었다
첫댓글 안넝하세요.
혹시 크로바님이 월남에 다녀오신분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