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년 2월, 여진이 정주성을 침공했을때, 전면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막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있었는데 총사령관 임간에게 직접 말 한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듣보잡이 사령관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매우 건방진 행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혼자서 무쌍난무를 펼치며,
적장 2명을 죽이고 여진군을 몰아내 버렸다. 적장! 물리쳤다!
그런데, 이 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옥에 갇혀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 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서,
여진족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무공을 세우게 된다. 최초로
고려사에서 나타나는 장면은, 윤관이 진격을 하던 중 여진족이 성을 쌓고 농성을 하고 있자 시일이 지체되면서 윤관이
준경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초조해하자
알겠심더 마 한 번 해보입시더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사실상, 단독으로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성을 함락시켜버린다.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해서 적장을 잡고 인질 2명을 구출, 고작
칼 한 자루와
방패 하나만 들고 적진으로 무조건 닥돌해서 진형을 무너뜨리고 적장 2~3명 잡기, 성벽을 타고
혼자서 넘어가서 문 열기, 10명의 부하들과 특공으로
1000명의 여진족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기고 윤관 구출 등. 실로 엄청난 기록들이 많다. 한마디로, 남들 다 토탈워 할 때, 혼자서
무협지랑
진 삼국무쌍 찍었던 비범한 사람이었다!
이 중에서, 적진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적장을 잡는 것이 연의에서 나오는 장수들의 활약 때문에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단기접전의 사례가 실제 정사(正史)에는 잘 나오지도 않듯이, 연의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용맹해도 단신으로 보병 떼거리 한가운데로 뛰어 들면 순식간에 창에 찔려서 꼬치구이가 되는것이 정상이다. 게다가 장군을 주변에서 호위하는 소수정예 엘리트 병사들도 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기병이 혼자서 보병 대열을 돌파하는 것은 순전히 말의 돌진력에 의존하는 것인데, 돌진력을 상실하는 시점에서 보병 한가운데 갇히게 된다면 제아무리 잘난 기병이라도 당연히 보병에게 붙잡혀서 죽게 된다. 그래서
중장보병으로 진형을 만들고 싸우는 방식이 오랫동안 고대
로마에서 유지됐던 것이다. 따라서, 혼자 적 진영을 무너뜨리려면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치고 빠지거나 아예 접근도 못할 정도의 무위를 보여야한다. 즉,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장면을 실제로 해야 된다. 까놓고 말해서 무기를 든 한 명과 맨손의 다수가 붙어서 맨손의 다수가 죽기를 각오하고 무작정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 맨손의 다수가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현실은 진 삼국무쌍이 아니다. 제아무리 용맹한 자라도 창칼을 맞으면 체력이 약간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전투수행능력 자체가 엄청나게 떨어지며, 당장 스친 상처급인 손가락만 살짝 잘못 다쳐도 무기를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라 전투수행능력이 곤두박질 치게 된다. 물론 진 삼국무쌍처럼 스플래쉬 어택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 기폭발 한다고 등 뒤의 적까지 저 멀리 날아가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제갈건담처럼 손에서 레이저빔도 안 나온다! 그런데 관우나 이 양반은, 실제로 했다는 점에서 이미 사람이 아니다!
거기다 윤관이 위기에 빠졌을 때 부하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며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윤관 구출에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척준경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망 플래그를 분쇄하며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살아돌아왔다. 이 때 윤관은 눈물을 흘리며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라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공이 대단했기에, 어떤 사람들은 척준경이 없었다면 여진 정벌이 엄청난 참사로 실패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실제 여진정벌 당시의 전투상황을 보면 지형을 잘 아는 여진족에 의해
윤관 등의 지휘부마저 괴멸당할 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윤관이 척준경을 아들로 삼다시피 했을까. 이때 세운 전공을 보면
《삼국지연의》의 장수들 정도는 그냥 뺨치는 수준.실로 무시무시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기록들은 죄다 야사가 아니라 엄연한 정사인
《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 나온 내용이라는 것이다. 흠좀무. 게다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 초기 때 쓰여진 역사서이다. 조선의 건국 이념(숭유억불)과 고려의 국교(불교)의 관계로 보나, 조선이 그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일어선 나라라는 것을 보나, 조선이 고려의 역사를 기술할 때 이성계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면 필요 이상으로 호의를 보였을 거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척준경 열전은 반역열전에 올랐다. 전 왕조긴 하지만 척준경은 이성계와는 무관하므로 고려사 편찬자에게 척준경은 왕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였으며, 충의 도리를 어긴 자이기에 미화를 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정사에서 다른 사람 사극 찍을 때, 혼자서 진 삼국무쌍이나 무협지를 쓰고 있는 능력이 비범한 사람이다. 이성계도 상당히 무협지스럽지만 이성계는 조선을 창건했고, 사서가 조선시대에 기록되었으므로 해당 부분은 상황상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분명히 과장이 있을법 해서(...)
물론 전공을 중앙정부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과장이 들어갔을 수도 있으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런 과장을 했을리는 전혀 없다. 그러니까 저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저런 말이 나올 만한 비범한 활약을 했다는 것 만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오히려 폄하당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축소된 기록이 있었다면, 어딘가에는 진짜가 실려있는 사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덤으로, 여진정벌에서 척준경에게 호되게 당한 여진족의 장수들은 정작
북송과의 전쟁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올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나라는 척준경에게 장수들이 호되게 시달린 여파였는지 고려와의 국경분쟁에서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성을 그냥 고려에게 넘겨야만 했고, 장강이북의 송나라 영토를 대부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침공은 끝끝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실제 금 건국기에 국경을 넘어간 여진족 사냥꾼들이 고려 수비병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금나라 장수들은 고려 침공을 주장했으나 금 태종은 오히려 이를 만류하고 국경 침범을 엄금시켰으며 이후로도 절대 국경을 먼저 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척준경이 여진과의 전투를 치르던 시기는 금의 국력이 개국 이래로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북송 멸망에 참가한 금의 장수들 대부분은 금의 성장 초기부터 활약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 시기에 척준경 및 고려군에게 한번씩 크게 패한 경험이 있었다.
이로 인해 금은 고려의 군사력에 대해서 필요이상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던데다가, 고려에게 강탈당한 여진족의 영역을 외교교섭을 통해서 회복했다는 경험까지 겹치면서 금은 중원을 장악한 이후에도 고려와 관계된 문제는 외교적 타협으로
만 해결한다는 자세를 일관하게 된다. 말 그대로 고려와 금의 관계는
중국역사속의 정복왕조로서는 유일무이하게 무력이 아니라 외교로 근린국가와의 문제를 처리한 사례가 된다. 물론 고려측에서도 금나라에게 굽혀줌으로서(稱臣上表) 금나라가 고려를 칠 명분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한다. 이때 대금사대를 이자겸과 척준경이 주도했다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도리어 여진과 직접 싸워본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다.
역시 입싸움을 안해본 사람이... 금나라도 고려까지 전선을 확대할 수 있는 여력까지는 많지 않았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상대로 요충지 연운16주를 통한 군사적 압박과 세폐 등으로 실리를 챙기는 정책을 통해서 힘을 아낀 덕분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던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나라는 연운16주보다 훨씬 넓은 화북지방을 다스려야 했고, 요나라가 했던 유목민족 통제까지 대신해야 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고려 사이에 벌어졌던 여요전쟁과 같은 대규모 고려 침공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여요전쟁 또한 요나라가 급성장기를 지나 어느 정도 전력을 재정비한 뒤에야 발발했던 것이었다.
훗날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때, 수세에 몰린
조위총이 자비령 이북의 40성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려고 부하인 서언을 파견했지만…정작 금나라에서는 오히려 '역적 놈 잘왔구나' 하며 냉큼 서언을 체포해 고려로 압송하고는 '아 우리가 니네 역적놈 잡아왔음 잘했지?'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문관들은 망했어요
과거
신동우 프로덕션의 국사만화 시리즈에 "
척, 척 베어버리는 척준경이가!!"라고 여진족이 두려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약하자면,
리얼 무쌍난무. 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에 돌격해서 순식간에 적장 목을 몇 번씩 따오는
소드마스터.
첫댓글 이런 분이 있으리라고는..
조선의 여포이시군요
@choice 예 감사합니다. 종종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