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 Back in Anger 2_강재구
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사진의 시원이자 근원을 이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끊임없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 사회의 담론을 만들어 왔다.
는 일찍이 영국 극작가 오즈번이 기성 사회의 위선과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 부재와 상호소통의 단절을 지적했듯이, 시대의 목격자로서, 기록자로서 인간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면서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작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강재구론
: ‘전형’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비평가)
미국의 사진가 스티글리츠는 구름과 같은 피사체를 찍은 이미지를 바라보면, 이미지가 표상하는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어떤 또 다른 의미 혹은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진은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는 이미지라서 그렇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찍어 보여주는 사람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두 가지 방향의 상호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지시하는 것 그대로 의미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방향일 테고, 또 하나는 느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의미까지도 보는 사람 마음껏 자유롭게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방향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소위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은 이 두 가지의 방향성을 모두 갖는다. 작업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외면만 지시하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기록적 측면을 강조하는 자료의 성격이 강할 것이고, 외면적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 표상을 통해 거기에서 보는 사람 개인의 내면에 작용하게 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성격이 강해질 것이다. 그 둘의 사이에서 스티글리츠의 등가성(equivalents) 의미는 단순한 사적이고 개별적인 감정이나 의미 부여를 넘어 공적이고 대(對) 사회적인 목소리로 연결됨으로써 다큐멘터리 작업의 지평이 넓어진다.
사진 초창기에는 여러 가지로 촬영 기술이 부족해 정지된 장면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기술이 발전하면서 움직이는 장면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사진가들은 점차 정지한 장면을 찍은 사진을 살롱 사진이라 평가절하하고 소위 다큐멘터리라는 사진의 장르를 계발해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대체로 움직이는 행위의 기록을 더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고, 그러면서 전쟁 기록에 크게 주목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현장에 더욱 가까이 밀착하여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접근 방법으로 삼았고, 그 움직이는 동작은 그 자체로 ‘사실’로 간주 되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까르띠에-브레송이 크게 의미를 부여한 ‘결정적 순간’에 환호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그 ‘결정적 순간’이 역사적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결정적 순간이 그 앞뒤 맥락의 의미를 충실하게 지시하는 것이 된다면 솔직한(candid) 사진으로,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 즉 역사적 행위의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된다는 담론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더군다나, 피사체가 어떤 결정적 순간에 포착된 자신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담는 것을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면, 그 장면 사진은 사진가의 폭력이 된다. 사진이 대상을 전유하는 것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상기한다면, 어떤 결정적 순간으로 재현된 피사체의 이미지는 사진가에 의해 얼마든지 본래의 맥락과 관계없이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큐멘터리 기록은 움직이는 동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정지된 장면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동작 대신 정지하는 대상을 재현하는 사진을 예술 가치가 풍부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졌다. 이제, 정지된 대상을 찍는다면, 연출의 행위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이 그 결과를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어떤 장면을 기록하는 것은, 이제 역으로 정지된 장면을 연출을 통해 촬영하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될 수 있게 된다. 상황의 역전이다.
강재구의 군인 연작은 사진사적으로 바로 이 흐름 위에서 위치한, 충실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사진가 강재구는 20년 동안 군인, 그것도 의무 복무를 수행하는 대한민국 징병제 군인 이등병을 중심으로 작업해왔다. 그가 간부 후보생이나 장교 혹은 여군과 같이 스스로 직업인의 길을 택한 군인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국민의 의무로 복무해야 하는 군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의 작업이 군인이 무엇이고 어떠한가, 즉 그 정체성과 문화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징병제하에서 군인으로 강제로 끌려가야 하는 대한민국의 청년 문화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 청년 문화 안에 서식하는 집단성과 몰개체성 그리고 반(反)휴머니즘에 사육된 무기력함이다.
사진가 강재구의 20년 군인 포트레이트 작업은 군대로 끌려가는 입영 전야의 ‘민간인’에서 12mm로 머리카락을 깎은 이등병 ‘군바리’가 된 이들을 촬영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의 여러 에피소드를 엮어 하나의 메시지를 무겁게 오랫동안 끌고 온 작업이다. 여기에서 ‘이등병’이란 의무 복무를 마친 후에도 흉터처럼 남아 있는 ‘예비역’이라는 민간인이 되지 못한 여전한 ‘군바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20년의 그 시리즈 작업 가운데 약간은 성격이 다른 것도 있다. 군대 사진관 사진의 사병 증명사진으로 작품을 만든 2009년의 ‘사병증명’도 있다. 군의 실용적 필요에 따라 사진의 얼굴을 도려내 버리고 남은 그러면서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기억할 수 없게 되어버린 어떤 군대 내 증명사진들을 통해 군대라는 몰(沒)인간성의 의미를 은유로 다룬 작품이다.
이런 사진가의 태도에서 나는 그 이등병 군인을 통해 평론가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을 읽는다. 루카치에 따르면, 세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유형이 비슷한 것들을 객관적인 세계와 개별적인 주체와의 관련 속에서 성찰하게 하는 존재가 ‘전형’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시대 인간의 상(像)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예술가는 그 전형을 통해 휴머니즘과 인간 소외에 저항하는 인간 중심의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데, 사진가 강재구는 20년 동안 이등병이라는 전형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을 전하고자 한다. 개체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전혀 담보하지 못한 채 그래도 멈추지 않는 ‘국방부의 시계’ 속에서만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기록, 폭력의 거대한 메커니즘의 적시다. 그 메커니즘 안에서 주체를 부인당하면서 존재 자체를 부인당하는 군대 밖 이 사회의 여러 무기력한 존재를 넌지시 말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으로도 읽힌다. 사실 적시에서 출발해 은유의 세계로 인식의 지평이 확장된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 그가 그 전형을 어떻게 재현하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강재구의 다큐멘터리 재현의 가장 중요한 방편은 순간 동작이 아닌 연출로 만들어진 행위를 촬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진가가 미리 대상을 섭외하고, 기획하여 짠 각본에 따라 촬영한다. 그러니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동작과 사실의 관계에 대한 담론이 생긴다. 스튜디오 포트레이트의 동작은 포즈다. 포즈란, 피사체가 사진가의 카메라를 통해 대중에게 말하는 그만의 언어인데, 그 언어를 사진가가 통제하고 강제해버린다. 피사체는 사진 바깥의 세계에서 그가 처한 군인이라는 위치에서 똑같이 철저하게 강제당함으로써 행위자 피사체로서는 죽은 존재와 다름없이 전락해버린다. 강재구 사진의 탁월성이 여기에서 나온다. 사진가는 강제로 연출 당하면서 모든 언로를 차단당한 채 무기력하게 존재하는 그 박제된 이등병과 그 주변인들을 통해 몰개성과 획일성을 비판한다. 독을 제거하려면 깨끗한 물이 아닌 또 다른 독으로 해야 한다는 힌두교 밀교의 세계관이다.
강재구의 강제를 통한 강제의 메시지는 그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마저 그에 의해 철저하게 강제당하는 구조 안으로 처한다. 독자들이 사진가의 의도에 따라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이란 게, 앞에서 말했듯, 보는 사람의 느낌마저 완벽하게 통제하지는 못한다. 사진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강한 메시지를 독자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나 애인이나 가족과 입영 하루 전에 찍은 사진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그들을 강제하여 누드로 만들어놓고, 작은 스툴이나 의자에 강제로 앉혀 찍은 스튜디오 사진조차도 사진가의 강한 메시지 그 하나만으로 획일화할 수는 없다. 사진의 맥락이란 존재하지 않은 채 오로지 사진가가 설정한 스튜디오 안의 상황만 존재한 역사적 맥락이 철저하게 거세된 채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그 사진을 보는 독자는 자신만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한 증명사진일지라도 보는 이에 따라 개별적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이 사진의 속성이고 바로 운명이다.
사진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사진가 강재구가 앞으로 가야 할 작업의 길은 어떻게 확장되는 것이 좋을까? 메시지는 같고, 소재도 같을지라도, 재현과 제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 ‘어떻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예술 다큐멘터리를 하는 프로 사진가의 의무다. 작품이란 작업을 열심히 하고, 진지하게 하는 태도와 자세의 동의어는 아니다. 군인이 되어보는 경험을 다 겪어본 대한민국의 남성에게 무서울 정도로 변화하는 무서운 이 나라의 사회 현실에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한 채 계속해서 강제와 획일성의 반(反)휴머니즘만을 말하면, 누구나 물릴 수밖에 없다. 루카치 미학에서 예술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가장 주요한 잣대는 카타르시스다. 그 카타르시스를 개체에서 보편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예술이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란 예술로부터 연유하여 삶 속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비롯되어 예술로 들어온 것이라서, 그것을 어떻게 사진으로 형상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머리나 아이디어가 아닌, 몸과 삶 속에서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고민의 뿌리가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란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끝없이 변화해야 하고, 그 변화에 대한 인식은 삶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에 뿌리를 둬야 한다. 예술 하는 프로 다큐멘터리스트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등병_예비역2002-2004
Portrait Shot_2009
12mm_2011
첫댓글 Look Back in Anger은 갤러리 브레송의 기획시리즈 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