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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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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퍼온글/스크랩 스크랩 키리스탄 다이묘(大名)小西行長
SABINUS 추천 0 조회 175 05.09.02 14: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SABINUS님의 궁금증에 관해 제 나름대로 조사하며 정리 하여 본 글입니다.

 

이글은 한국인의 입장에서가 아닌, 크리스천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간 코니시의 입장에서 기술 한 것이며 될 수 있는한 역사적 문헌에 근거 하였습니다. 가능한한 억측은 배제하려 노력 하였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멜론

 

 

 

SABINUS님의 질문:

 

그런데 어제 종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보면 고니시군의 문장이 십자가로 되어 있네요...가톨릭 신자인건 알고 있었는데...정말로 십자가를 문장으로 썼을까요???궁금해 지네요 ^^

 

최초의 한국인 순교자인 마리아도...아마 성인품에 오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임진왜란때 한국에서 잡혀 고니시군 누군가의 양녀로 들어가서 거톨린신자로 순교한것으로 기억하는데요...자료가 빈약하다보니... ^^

 

 

 

 

小西行長의 家紋

 

"中結祇園守紋(나카무스비 기온 마모루 문)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가문입니다. 쿄오토·야사카 신사의 부적인 통수를 본뜬 것으로, 기온신숭배에 근거하는 문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가운데의 십자가를 보면 그가 크리스찬으로서 일본 고유의 가문을 응용한 십자가문양 久留守(くるす)紋, 즉 cross紋이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명백합니다.

 

 

그외에도 코니시는 「花久留守(쿠루스)紋」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그 모양은 오른쪽과 같습니다.     →

이 문장은 일본 크리스크교의 자료로부터 수집하었습니다.

 

 

아래는 戰國무장으로 토요토미군이었던 小西行長군의 군기와 그 표식 입니다.

 

 

 

旗印 小西行長

 

 

 

 

 

小西行長의 印影

 

 

 

小西行長의 花押

 

 

 



 

키리스탄 (포루투갈어가 그대로 남아 사용됨) 다이묘들이 사용했단 여러가지 쿠르스(久留守)紋

 

 

 



 

 

 

임진왜란중 일군의사령관의 한명이었으며 동시에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코니시유키나가는 어떤인물인가

 

  크리스찬 다이묘(大名-무장)로서 유명한 小西行長(코니시 유키나가   아명:미쿠로오)는 1558년경, 쿄오토(사카이시라는 설도 있음)에서 무사의 집안이 아닌 상인(商人)집안의 차남으로서 태어났다.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영세명은 각각 죠아틴,마드레이누라고 전해진다.유키나가 본인이 영세를 받은 것은 그가 26세경.

 

  그는 비젠오카야마(備前岡山)의 상인(商人)집안 양자로 들어 갔는데, 그때마침 전국 다이묘중에서도 지략의 명장으로 유명한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화친을 위하여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使者보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키타의 직계의 가신(家臣)중에는 단 한명도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던중, 지혜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출중한 청년이 그가 다스리던 영지내의 商人중에 있었으니 그가바로 小西行長이다.
 

  상인이었던 小西行長가 머리도 좋으려니와 무예에도 출중했던이유는 당시 상인들은 먼 곳으로 부터 상품을 구매하면 그 물건들을 이송하여야 했는데, 중도에 해적이나 산적들이 길을 지키고 이 물건들을 노리고 있었던 탓에 자위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므로 스스로 자위집단을 통솔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小西行長는 우키타 가문의 사자로서 豊臣秀吉에게 가 교섭을 성공시켰으며, 豊臣秀吉의 눈에들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豊臣秀吉의 가신으로서 그는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아케치 미쯔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서 죽었고,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후 小西行長에게 豊臣秀吉로부터 새롭게 주어진 일은 화물선의 운항 감독의 일 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본래 무사 출신이 아니고 상인출신이었음을 높이 샀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일로 코니시는 그의 역량을 맘껏발휘하여 히데요시의 신망을 얻는다.

 

  그즈음, 小西行長는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라는 인물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1584년 우콘은 크리스찬 다이묘로서 타카츠키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의 무사나 백성으로부터 많은 신뢰를 얻고 있었은데 小西行長는 다카야마 우콘과의 만남으로 다시금 성서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되고 그로부터 小西行長는 크리스천 다이묘로서 그의 새로운 인생을 걷기 시작하게 되었다.

 

 

 

● 小西行長(코니시 유키나가)는 왜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일 수 밖에 없었나

 

 

  1592년, 마침내 小西行長는 조선 땅을 향하여 출병하게 되었다. 조선출병을 내켜하지 않았던 小西行長였지만 그는 그의 주군 豊臣秀吉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저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것은 하루라도 빨리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무장이 아닌 상인 출신이었던 까닭에, 조선이나 명과 싸우기 보다는 우호를 유지하며 서로 교역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의 장군 이순신의 맹활약으로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군량은 바닥이 났고, 추운 겨울은 다가오니 그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명과의 강화 교섭에 노력, 明측의 강화 담당자인 沈維敬등과 공모해,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에 항복하기로했다고 속이고 강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그당시 일본측의 사자로서 명의 수도 북경으로 향한 사람은 小西行長의家臣인 内藤如安(명측의史料에는小西飛라고 남나있음 )이었다. 그 결과 명의 사자가 豊臣秀吉를 일본왕에게 봉하는 취지를 기록한 서류과 금표를 가지고 가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서류를 豊臣秀吉에게 보고할 단계에서 小西行長는 서류의 내용을 적당히 둘려쳐 줄것을 통역인 西笑承兌에게 부탁 했음에도 불구하고  西笑承兌 서류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豊臣秀吉에게 전했다.

 

  이로인하여 小西行長가 그토록 염원하던 강화는 파탄, 豊臣秀吉는 분노에 떨며 이 강화교섭의 주도자였던 小西行長를 죽이라고 명하지만 西笑承兌의 중재로 목숨을 부여할 수 있었다. 강화 교섭에 있어서의 주군을 기만한 벌로小西行長는 라이벌인 加藤清正(가토오키요마사)와 함께 선봉을 명령받아 또 다시 조선으로 출병하게된다. 

 

이 사건은 小西行長가 豊臣秀吉를 기만했다고 하여 오늘날 일본에서의 그의 평가는 그리 좋은 것은 못되나, 키리스탄 다이묘로서의 죽는 날까지 신앙을 지켰던 그의 일 충직함과 자애로움은 입에서 입으로 일본 교회사에 전하여 진다.

 

  豊臣秀吉의 사후, 세키가하라의 대 결전에서 石田三成(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의 지휘관으로서 참전하였으나  徳川家康(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패배.크리스트교도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 패장들이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키기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할복자결은 하지 못하고, 이부키야마로 피했지만 결국은 잡혀 참수 당한다. 자살을 금지한 크리스트교의 교의에 따른 선택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 小西집안의 자녀들
 

 

쥴리아 오타아

 

 1592년, 小西行長를 지휘자로삼은  제1군, 加藤清正(카토오키 요마사)의 제2군은 연달아 조선을 침공했다. 이 원정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함락 시키고 평양 부근까지 진군한다. 그러나 머지안아 명·조선 연합군의 반격을 받게되고, 조선의 명장 이순신의 수군에 의하여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일단은 일본으로 철퇴해야 했다.

 

 이 평양성 전투로 조선의  무장이 전사를 했으며 그의 부인마저도 자결을 하여 불과 5살전후의 딸 만이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크리스찬이기도 한 小西行長는 전쟁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현실이 가슴아팟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여자아이를 가엾이 여겨 일본에 데리고 간다.
 

  小西行長은 일본으로 데려온 아이를 양녀로 삼아 소중히 키웠다. 小西行長의 아내도  당연히 크리스찬이었는데 쥬리아는 양어머니의 권고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일본명을 "오타아" 세례명을 "쥴리아"라고 했다.  小西行長의 아내는 약초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지식을 양녀인 쥴리아에게 가르쳤다.

 

  小西行長의 사후 쥴리아 오타아는 徳川家康의 궁녀로 발탁된다. 추측하건데 그녀는 미모와 물론이려니와 교양도 뛰어난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녀는, 徳川家康의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녀가 몹시 마음에 들어 측실로 맞고 싶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거절했다. 당시 궁중안의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차지하고 싶어했던 측실의 지위를 그녀는 크리스찬 신앙 때문에 거부했던 것이다.

 

  진노한  이에야스는 쥴리아를 이즈오오시마에 유배로 했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푸념 하나 하지않고, 오히려 자신의 약초에 대한 지식을 살려, 섬사람들을 위하여 힘썼다고 한다.그리하여 오오시마에는 크리스찬이 점점 늘어났으며  그로인하여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하치죠지마로 유형을 당하고 거기에서도 크리스찬이 점점 증가하여 마침내는 코즈시마까지 보내어 졌다.

 

  의사도 없는 멀고 먼  작은 섬에서, 그녀는 섬의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대했다. 몸이 썩어 가는 병으로 가족마저도외면한 할머니도 헌신적으로 간호하고, 해적질로 몇번이나 잡혀 사형을 받을뻔한 젊은이를 인수 하가도 했다. 오타아는, 여기 코즈시마에서 그 생애를 마쳤는데, 그녀의 유배생활은 40년이나 된다.

 

 


쥴리아의 유형지에 관한 자료


 

 

코니시 마리아 (小西マリア) 

 

  크리스찬 다이묘 고니시유키나가의 딸이다. 쓰시마번(対馬藩)이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 외교교섭으로 분주하던 1590년, 19대 쓰시마 영주인 宗義智와 결혼.

   

  이 결혼은 당시의 무계 집안의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정략결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하여 진다.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한 전략으로서 신망이 두터운 코니시유키나가를 최전선의 지휘관으로 배치하기에 즈음해 조선의 사정과 지리를 잘 아는 쓰시마 영주 宗義智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유키나가의 딸를 지목한 것이다. 정략결혼의 희생자 였던 마리아는 당시15세, 부모형제와 멀리 떨어져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이국의 땅으로 가야만 하는 운명이었으나, 아버지 유키나가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해주는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경건한 크리스찬인 마리아는 대마도에서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경건고 후덕하기 그지 없었다. 宗義智도 그런 부인에 따라 세례를 받아 "대마도의 전하 다리오" 라고 불리기도 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은 끝이나,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 한 것도 잠시, 마리아 의 진짜 비극은 여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로부터 이에야스로 권력자는 바뀌고 대마도의 안전을 위협받고 있던 宗義智는 크리스찬인 마리아를 내어 쫒은 것이다. 그 이유는 말할 나위도 없이 마리아의 아버지 유키나가가 이시다 미쓰나리와  서편의 무장으로 세키가하라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한 것에 연유한 것이다.  宗義智는 이에야스가 두려워 아내 마리아를 내 쫒고 신앙도 버렸다.아이를 남겨둔 채 쫒겨난 마리아는 유키나가가 살아생전 후원을 했던 나가사키의 수도원에 숨어 운둔생활을 하였던것으로 전하여 지는데 그녀는 일생 하느님께 충직했다. 

 

그후 宗義智는 이에야스 초기, 조선과의 외교정상화에 일익을 담당한다.

 

 

 

권 빈첸시오

 

權- 1581∼1626 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 복자(福者).

쥴리아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당시 전화에 말려 부모를 잃는 소년으로 小西行長가 일본으로 데려가 그의 딸이자 쓰시마(對馬島)도주(島主) 소오(宗)의 부인인 마리아에게 맞겼다.마리아의 후원으로 예수회 학교를 졸업하였다. 1603년 세례를 받고 수련수사(修鍊修士)가 되었으나, 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금교령(禁敎令)을 내리는 등 가톨릭 박해가 심해지자 조선으로 돌아와 전교하려 하였다. 14년 예수회 파체코신부의 명으로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입국하려 하였으나, 철저한 쇄국정책과 중국에서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5년간 졸라신부와 시마바라[島原]반도에 숨어서 일본인과 그들에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에게 전도하다가 25년 체포되어, 다음해에 파체코·졸라·토레 신부들과 나가사키[長崎]에서 화형당하였다. 사형 전 감옥에서 파체코신부로부터 수도자 서원식(誓願式)을 받아 수도자로 순교하게 되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위하여 활약한 숨은 공도 크다.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205명의 일본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식(諡福式)을 통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당시의 일본은 어떤 상황이었나 간략한 설명을 덧 부칩니다.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활발히 진출할 무렵 일본의 분열은 종식되어 갔다. 15∼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뒤 17세기 유렵에는 민족국가와 부르조아 계급이 대두했다. 이런 변화는 동아시아 세게에도 영향을 주게되었다.

 

  예수회의 선교사인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가 1549년 일본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일반 백성뿐 아니라 다이묘 가운에에서도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 교황청으로 사절을 보낼 정도로 교류가 활발해졌다. 흑선(黑船)이라고 불린 포르투갈 선박과의 무역이 왕성해진 이 때 분열을 종식시킬 패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통일 삼걸(三傑)이라고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그들이다.

 

  노부나가는 1573년 명목뿐이던 무로마치 바쿠후를 멸망시키고 비대해진 사원세력을 공격하여 대부분을 굴복시켰다. 중부 일본을 거의 굴복시킨 그는 통일의 기반을 어느 정도 조성하였다. 그러나 모반으로 인해 그의 야망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통일사업은 히데요시가 이어받았다.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 집단들을 제거하거나 복속시켜 1590년 일본은 정치적으로 다시 재통일되게 되었다. 그는 노부나가로부터 물려받은 지배 방법을 확대시키고 체계화하였다. 역대의 군사적 지도자와는 달리 그는 쇼군의 칭호를 취하지 않았다.(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전확한 펴현 이겠지만...)  그러나 조정의 권위와 정통성을 이용하였고 조정에의 원조를 통해 그는 후지와라씨의 후손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실제로 후지와라가문의 양자로 입적해 섭정할 때에 사용된 며슬인 간파쿠(関白)이라는 직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실제적 권위는 그의 군사력과 다이묘들의 주종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의 지배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었고 압도적인 군사력의 압제 위협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런 통일 일본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경제적인 개혁 조치도 시행되었다. 우선 주요 경제 도시와 금·은광을 장악하고 정복된 영지를 직할지로 편입했으며 '다이코 겐치(太閤檢地)'라는 토지조사 사업을 행했다. 겐치는 경지의 크기·등급·소유관계까지 포함하는 통일된 정부를 위한 대규모의 기초 자료 조사사업이었다.

 

  또 허가된 무사 외에는 무기 휴대를 금지하는 '가타나 가리(刀狩; 칼 사냥)'령을 내리고 병(兵)·농(農) 간의 신분을 분리하고 사(士; 무사)·농·공·상 간의 신분이동을 금지시키는 사회 재편성 조처를 단행했다. 이들 사업은 모두 이전 시대의 마무리임과 동시에 근세 봉건 사회의 기초가 되는 사업이었지만 엄청난 재원이 소요되었다.

 

  이런 경제적 욕구와 통일후 할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불만, 즉 남아도는 에네르기의 분출구로서 히데요시가 생각해낸 해결책이 조선침략이었다. 1592, 1597년 일본은 2차례에 걸쳐 십수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1598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종식된 전쟁은 명·조선·일본 3국의 국제전이었지만 조선에 파괴적인 피해를 주었을 뿐 일본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왜란으로 조선에서 봉건사회의 재편과 동요가 일어나고 명이 왜란의 부담으로 약 반세기 뒤에 만주에서 일어난 청(淸)으로 대치된 것에 반해 명분상 패배한 일본은 오히려 문화적인 이득을 보았다.

 

  조선에서 데려간 도공(陶工)·화가 등 기술자들은 일본에 기술적·예술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각종 전적(典籍)의 약탈과 피납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일본의 학문 부흥에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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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마쿠라역(北鎌倉駅)에서 가마쿠라 가도를 큰 배 방면으로 500 m 정도 걸어, 코사카 우체국앞의 T자로를 좌회전 하면, 오른손 가까운 곳에 光照寺가 있습니다. 이 절의 山門(東渓院으로부터의 이축)에는, 크리스트교의 십자의 紋(문양)이 있는데 에도시대 카마쿠라에 숨어사는 크리스찬들이 모여서 미사를 들였던 곳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光照寺山門

山門(くるす紋)

本堂(北鎌倉駅方向を望む)

 

절이나 사찰에서 박해 받는 천주교도들을 숨겨준 예도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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