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오릉과 배동 삼릉(박씨 發祥地 음택을 풍수로 풀어 본다)
1. 박씨
* 박씨는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를 도시조(都始祖, 박씨들은 원시조라고 부른다)로 하고 56개 본관(2000년 조사, 보통70여개 본관으로 알려져 있다)으로 나누어져 있다. 순수 토착 성씨이고 중국에 있는 박씨들도 조선족으로 분류된다. 인구420만명(인구순위3위)이고 그중 밀양박씨가 320만명으로 본관별로는 김해김씨 다음으로 2위이다.
* 박혁거세의 35세손 경명왕의 여듧 아들 후손이 번성함에 따라 여러본관(시조의 고향을 본관이라 한다)으로 분적하였는데 그중 인구가 많은 밀양, 반남, 함양, 순천, 무안, 죽산, 고령, 충주를 8박이라 한다. 경명왕의 큰아들 밀성대원군 언침을 본관시조로 하는 밀양박씨가 대성이고 반남박씨는 언침을 원시조로 알려져있으나 8왕자설을 부인하고 고려호장 박응주를 본관시조로 한다.
* 박씨분파도---한국의 성씨에서 인용
2. 오릉
* 박혁거세는 BC69년 나정(탑동700-1)이란 우물에서 건져올린 알에서 태어나 BC57년 6촌장의 추대로 신라1대 왕으로 옹립되었다. 동시에 알영정(오릉내에 있다)이란 우물에서 알로 태어난 알령부인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낳았다. 60년간 재위하고 서기4년에 졸하였다.
삼국사기는 박혁거세를 사릉에 장사지냈다고 함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유체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8일만에 떨어졌는데 뱀의 방해로 사체를 5지로 나누어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야사적(野史的) 성격이 짔다. 이 묘역에는 1대 박혁거세, 알령부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5기의 왕릉이 있으므로 오릉으로 부르고 있으나 원래의 이름은 사릉이다.(4대왕은 석탈해, 昔씨는 인구1만2천)
* 오릉의 모습---맨 앞에 있는 제일 큰 왕릉이 박혁거세 부부묘로 추측되고 나머지 왕릉의 주인을 가릴 수 없다.
* 숭덕전을 거쳐서 왕릉으로 들어가는 용맥은 눈에 뚜렷하지만 묘지에 이르러 바람에 흩어지고 생기가 모여있지 못하다. 남산의 끝자락이 형산강에 이르러 멈춘 곳으로 허허 들판에 내려앉은 연화부수형이다.장풍이 안되니 후손 발복처가 아니고 개국을 한 왕의 무덤으로 신성시되는 곳이다. 신라왕들이 즉위시에는 이곳에 먼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3. 배동 3릉
* 신라는 박.석,김의 3성이 992년 총56대왕까지 교대로 차지하였는데 박씨들은 1~3, 5~8, 53~55대 합계10왕을 차지하였다. 박씨들은 54대 경명왕의 여듧 아들의 후손들이 본관을 나누면서 번성하였는데 그 발복처는 어디인가? 8왕자의 발복처는 먼저 부모 경명왕, 조부 신덕왕, 증조부 박예금의 음택에서 찾아보고 없으면 그 윗대를 추급해야 된다. 다만 신덕왕의 아버지 박예금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신덕왕의 의부라고 하는데다가 묘소도 알 수 없으므로 답사를 하지 못했다.
* 가계를보면, 53대 신덕왕(神德王,?~917)은 52대 효공왕(김씨)의 매부인데 효공왕이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박씨의 신라 전기 마지막왕인 제8대 아달라이사금으로부터 728년만에 다시 박씨왕이 탄생한 것이다. 신덕왕의 큰 아들이 경명왕이 되고 둘째가 경애왕이 되었는데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체포되어 자결하였고 56대 경순왕은 경애왕의 이종사촌형 김부로서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 박씨들의 주장인 즉,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이사금의 후손이라 주장하면서 신덕왕까지 연결되는 가계(신덕왕은 박혁거세의 34세손)를 내세우고 있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달라이사금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할 뿐만아니라 주장하는 중간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 탓으로 학계는 의문을 표시한다. 학계의 다수설은 제8대 아달라에게 아들이 없어서 제9대왕으로 석벌휴가 왕위를 승계하였다. 다만 아달라에게 서자는 있었으나 당시 서자는 자식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신덕왕은 서자계열이라는 것이다
* 신라중기의 기록은 전란으로 소실되어 확정이 어렵고 왕릉발굴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박씨들의 주장을 명백히 반박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 묘소를 보면, ①아달라이사금의 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이 없다. ②신덕왕에 관하여 삼국사기는 죽성에 장사지냈다고 함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화장하여 뼈를 잠현에 묻었다고 하고 ③경명왕에 관하여 삼국사기는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함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경명왕은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상등잉산서쪽에 산골하였다고 한다. 학자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삼릉이 장소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점, 삼릉의 형태도 신라 전기의 왕릉과 맞지 않는 점등 여러사정을 고려하면 삼릉의 주인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전(傳)삼릉이라 부른다. 또한 유의건(1687~1760)의 화계집에 의하면 영조6년(1730년) 경주부윤 김시현이 김씨문중 박씨문중과 협의하여 전승(傳承)을 잃어버린 왕릉을 찾는 작업을 하였는데 양문중은 남산동쪽은 김씨들의 왕릉으로 하고 남산서쪽은 박씨들의 왕릉으로 할 것을 정하였다. 이 때 정한 왕릉 주인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신라왕릉 권위자 이근직 교수는 삼릉은 귀족무덤이라 한다.(강릉김씨서울종친회 카페)
4. 풍수적 고찰
* 삼릉사진---삼릉중 맨 아래 묘가 아달라이사금의 묘라는 사람이 있으나 안내판에는 서쪽 묘가 경명왕의 묘라고 하는데 삼릉은 서향이므로 맨 아래 묘는 경명왕릉이 된다. 위의 안내판이 잘못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중간 묘에 대하여 모두들 신덕왕릉이라고 하는데 1936년, 1963년에 도굴당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발굴하였던 바 유골이나 부장품은 없었고 부부 묘로서 공간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나머지 두 왕릉도 같은 구조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 전순---아달라왕릉으로 알려진 맨 아래 묘의 전순--
* 중국---
* 멀리 건천읍 단석산에서 출발한 용은 마석산을 거쳐 남산을 만들고 금오봉에서 형상강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낙맥하였다. 중국(中局)이 산태극 수태극하고 당국이 생동감 있다. 금오(金鰲, 자라는 민물거북이다. 머리와 목이 가늘고 길다)하산(下山)형이다. 유연한 기복이 있는 장유로 혈은 맨 위와 맨 아래에 맺혔고 중간은 약간 꺼져있다. 풍수적으로 볼 때 맨 위의 묘가 자라목에 자리잡고 전순에 있는 자라맨 아래묘를 자기안으로 한 상등초급 대명당이고 맨 아래가 차혈이다.
* 자라모습---
* 박씨1대왕부터 3대왕 및 5대왕까지는 오릉에 있고(통설이다, 4대왕은 석탈해이다) 6대 지마왕은 아들없이 사망하여 7대 일성왕이 승계하였고 그의 아들 아달라가 제8대 왕인데 적자가 없다. 지마왕릉은 배동산30에 있는데 평범하고 일성왕릉은 탑동산23에 있는데 백호에 돌이 많아 거칠고 양명치 못하다. 일성왕과 아달라왕은 700여년간 이름난 후손이 없었고 아달라왕때 적자도 끊겼으므로 명당에 묻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박씨는 53대 신덕왕때 부활하였다고 볼 수있는데 그의 아들 둘은 경명왕과 경애왕이 되었고 경명왕의 8왕자는 박씨들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신덕왕과 경명왕은 명당에 묻혔다고 볼 수 있다.
* 풍수적 관점과 상리에 맞추어 사견을 정리해 보면, ①아달라왕릉을 만들 때(184년) 풍수에 맞추어 결혈지를 찾아서 재혈하지 않았을 것이니 장유의 중간에 조성하기 십상이다. ②신덕왕릉을 조성할 때(917년)에는 아들인 경명왕과 경애왕이 아버지를 묘역의 앞자리에 모시고 제사를 봉행하였을 것이니 왕릉을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③경명왕때에는 달리 묘쓸 공간이 없었으므로 맨 윗자리로 갔을 것이다.
* 결국 제일 뒤에 쓴 윗묘가 자라목에 자리잡은 상등초급 대명당으로 8왕자의 번성을 주도하였고 아달라왕릉은 평범한 중간자리를 차지하였고 맨 아래묘가 신덕왕릉으로 보조적(경애왕후손도 독립된 계파로 살아 남았다) 발복지로 보아야 되지 않을가? (2024.1)
첫댓글 감사합니다.
생각하는 간산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