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밤새 뛰었을까?
두려움, 정복해야 할 장애물
오랜 옛날 어느 나라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따라 유랑걸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무리를 이룬 유랑민들이 바라신이라는 산을
지나던 때의 일입니다.
그 산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을 잡아먹는 아주 못된 귀신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굶주린 터에 까딱 하다가는 귀신에게 잡혀
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람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팽팽한 긴장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추운 하룻밤을 지내야 했던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둘레에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졸기 시작했고, 그러다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추위 때문에 잠들지 못하자 장난기가 발동
했습니다. 주위의 누더기들을 모아서 이리저리 몸에 걸쳤습니다.
그의 모습은 얼핏 보면 영락없는 귀신이었습니다.
그런 차림으로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마침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얼핏 잠이 깨어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귀신이다!”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불가에 귀신처럼
쪼그리고 앉은 자기 동료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는 귀신이라고 소리치며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이 놀라서 깨어났고 그들은 주변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앞서의 남자를 따라서 덩달아 내달렸습니다.
모두가 도망치자 귀신 흉내를 내며 불가에 앉아 있던
그 남자도 냅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남아 있다가 정말 귀신에게 잡혀 먹히면 안 되었으니까요.
대상보다 감정에 얽매여서 본질 놓쳐
‘어떻게 하면 겁먹지 않을까’ 큰 과제
정신없이 달리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귀신이 열심히 자기들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죽을힘을 다해서 달아났습니다.
그렇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깊은 구덩이를 발견한 그들은 서둘러 그곳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가시가 온몸을 찌르고 돌부리에 채이고 넘어져 뒹굴어 상처투성이가 된 채
깊은 구덩이에서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운 채
환하게 동녘이 밝아오고서야 자신들이 무엇에 속아서
그리 난리를 피웠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백유경> 63번째 이야기)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두려움이란 시각이 예리해서 땅 속에 숨은 것을 볼 줄 알고
하늘에 뜬 것은 더 잘 찾아낸다.”라고 말하였다지요.
두려울 때는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대처법일 텐데
이상하게도 온몸의 감각기관은 파릇하게 날이 선 것처럼
예민해집니다. 무심코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도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도망치느라
온몸을 다치고 맙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두려움을 안겨주는 대상보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더 얽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 대상이 나를 해치기 이전에 두려움에 먼저
다치고 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 뭘 그래?”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숨을 곳을 찾아 도망치느라 몸을 다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표에서 멀어지고, 까닭 없이 위축되고
그리고 몸마저도 다치게 하기 때문에 두려움이란 느낌은
반드시 정복되어야 할 장애물입니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나를 보호할 수가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하면 겁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당시의 모든 수행자에게도
큰 숙제였던 것 같습니다.
한적한 숲속에서 수행을 하려면 맹수와 산적들로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두려움은 왜 생겨나는 걸까요?
<맛지마 니까야>에 실려 있는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에서
그에 대한 아주 친절한 부처님의 설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미령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