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제1부 80년대 한국현대사진의 토대들
한국사진에 모더니즘은 있었는가. 모던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사진사적 구현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누가 우리 사진을 향해 “한국사진에 모더니즘, 모던에 대한 사진사적 구현이 있었는가?”를 물었다면 자신 있게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사진이다”라고 제시할 작가도, 이론가도 없을 것 같다.
글 | 진동선 (사진평론가·현대사진연구소장 sabids@hanmail.net)
시작에 앞서...
2003년은 사진이 이 땅에 도래한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최인진이 쓴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1883년 여름 이 땅에 처음으로 김용원이 서울 묘동에 촬영국을 설치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1863년 3월 18일 동지사은사 이의익(李宜翼)이 중국 북경 러시아인 사진관을 방문해 초상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조선인이 사진에 찍힌지 1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진이 이 땅에 근대의 상징으로, 그리고 서구문명의 증표로서 수용되고 정착된지 120년. 사진은 그 동안 개화 백경, 식민지 풍경, 해방공간, 6.25, 개발독재, 군사독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아주 숨가쁘게, 종축으로 역사성을, 횡축으로 시대성을 부여안고 달려왔다. 지금 우리가 사진에 보내는 시선은 그래서 각별하다.
이 글은 한국현대사진, 즉 1980년부터 2000년까지 이 땅에서 전개됐던 “컨템퍼러리 포토(Contemporary Photography)”에 대한 주된 흐름을 밝혀 보려는 글이다. 총 20부작으로 구성될 이 글은 물론 한국현대사진의 정사(正史)는 아니다. 그것들은 사진사가들의 몫이며 이 글은 그 시대를 함께 했던, 그 시대를 지켜보았던 한 사진평론가의 개인적 관점의 글이다.
역사는 특히 정사는 풍부한 문헌에 의존한다. 역사는 매 시기, 역사적 전환기마다 시대를 관류했던 조망의 글과 통찰의 문헌들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기초로 정사가 만들어 진다. 지난 한국사진의 역사가 얼마나 기록에 무심했고, 기록적 가치를 간과했는지를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생각에서 쓰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부재
한국사진에 모더니즘은 있었는가. 모던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사진사적 구현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누가 우리 사진을 향해 “한국사진에 모더니즘, 모던에 대한 사진사적 구현이 있었는가?”를 물었다면 자신 있게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사진이다”라고 제시할 작가도, 이론가도 없을 것 같다.
이른바 임응식의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도, 현일영의 형식주의 사진도, 또한 신선회, 살롱아루스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계보의 사진도, 누구도 이들 사진의 정신성과 형식성을 두고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얼굴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징후는 있었다. 흔적도 있었고, 개별적, 개인적 사례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조로서, 경향으로서, 역사 속에서 굳건히 이론적 토대를 가졌던 이데올로기로서의 모습은 아니었다.
모더니즘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그에 따른 인간소외와 자아상실에 대한 철학적 다가섬이다. 모더니즘 사진이란 그런 점에서 사진적 자각이고 구현이다. 우리의 사진사에서 모더니즘은 국지적인 징후로서, 미미한 흔적으로서, 그리고 아주 파편적인 철학적, 이념적 텍스트로서만 자리한다. 하나의 이즘(ism)이 역사적으로 ‘징후’, ‘흔적’, ‘이론’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징후는 작가가 사상적, 철학적, 또는 미학적으로 체감한 이념적 산물이고, 흔적은 징후를 알아챈 작가가 표현으로 성취시킨 업적(작품)이며, 이론은 징후와 흔적들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텍스트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에게 모더니즘 사진이 있었다고 한다면 역사적 맥락에서 징후, 흔적, 이론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에 부합한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요동친 7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들
한국사진은 모더니즘을 우회(by-pass)했다. 즉 모더니즘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시대적 정황에 급작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했다. 모더니즘 끝자락에 있었지만 모던 사진(Modern Photo)의 개념조차 헤아리지 못한 채 컨템퍼러리 사진(Contemporary Photo)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대혼란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스트레이트 포토와 메이킹 포토의 논쟁, 이른바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의 시비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차이는 무엇인가. 80년대를 현대사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80년대의 사진이 70년대의 사진과 명백하게 구별된다면 과연 그것들이 3가지(징후, 흔적, 이론) 역사적 맥락에 부합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80년대 사진이 우리의 현대사진이라면 형식적, 내용적으로도 완벽한가. 이에 대한 물증이 확고해야 우리는 한국에서의 컨템퍼러리 사진, 즉 한국은 80년대에 현대사진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논의할 내용은 8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이지만 그러나 7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70년대 한국사진은 5.16 군사정변 최대 수혜자인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 적지 않은 힘을 가진 동아일보사진동우회(동아콘테스트 출신들로 구성된 단체), 그리고 재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보인 포토 저널리스트 그룹이 있었다.
정황들로서는 1971년 한국사진작가협회와 한국창작사진협회가 통합, “한국사진협회”로 출범한 사협이 한국사진의 중심으로서 국전, 한사전을 최대 관심분야로 키워 왔다. 동아일보사진동우회는 이명동, 임응식이 주도하여 사협에 근접한 세력으로서 리얼리즘 사진을 표방했으나 상당수가 임응식이 주도한 창작사진협회 회원이었기 때문에 창작사진협회가 사진작가협회와 통합됨으로써 양쪽에 어중간하게 다리를 걸치게 되었다.
반면, 70년대 비주류 혹은 재야로 불렸던 포토 저널리스트 출신의 그룹은 조직력은 없었으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다른 세력이었다. 70년대는 또 대학 사진서클이 왕성해서 고대 호영회, 연대 연영회, 숙대 숙미회와 같은 새로운 시각의 젊은 대학생들과, 공모전에 물들지 않은 젊은 신진 세력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계한 세력이 포토저널리스트 그룹이다.
70년대는 이렇듯 공모전 위주의 사협이 한국사진의 주류로 자리하고, 바로 옆에 견제 세력으로서 동아일보사진동우회 그룹이 자리했으며, 그 주변부에 시대의식을 차별화했던 비주류 사진그룹이 자리한 형국이었다. 당시에도 저널이 있었다. 70년대의 저널로는 1966년에 창간한 <월간사진>, 1975년에 창간한 <영상>, 그리고 1977년에 창간한 <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잡지들은 시대에 조응하는 사진이론, 시대를 반영하는 사진적 방법론, 그리고 작가들의 잘못된 창작 행태를 비판하는 비평적 기능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모더니즘 끝자락에 있었으나 근대의 징후, 흔적, 이론에 대해 저널로서 기능을 펼쳐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8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과 현대성의 토대
현대사진을 말할 때 상당수 사람들은 1988년 5월 18일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새시좌전>을 신호탄으로, 그리고 1991년 11월 16일 경기도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사진의 수평전>을 분수령으로 이야기한다. 사진사 맥락에서 볼 때 분명 두 개의 전시는 한국사진을 바야흐로 꽃피우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전부라는 생각은 옳지 못하다. 역사와 문화가 단 몇 차례의 이벤트에 의해 바뀌지 않듯이, 사상과 이념이 한 순간 천지개벽처럼 뒤바뀌지 않듯이, 한국현대사진도 파종은 70년대이고, 발아는 80년대이며, 성장은 90년대이다.
한국현대사진의 토양은 여러 관점과 여러 각도에서 관찰된다. 80년대 현대사진은 우선 1985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1985년은 한국현대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잠시 존 자코우스키(John Szarkowski)가 미국현대사진의 토대를 언급했던 3가지 사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존 자코우스키는 미국현대사진의 출발점을 1950년대로 규정한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1952년 <어퍼추어(Aperture)> 창간, 1955년 <인간가족전(The Family of Man)> 개최, 1959년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The Americans)> 출간을 든다. 세 가지 사안은 명료한 역사성과 시대사적인 이론의 토대가 된다.
요컨대 징후의 사례로서 <인간가족전>, 흔적의 사례로서 <미국인>, 이론의 사례로서 <어퍼추어>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존 자코우스키의 진단이 매우 객관적인 물증이라면 우리도 80년대 한국사진에서 유사한 사례를 대입시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80년대 한국사진은 아주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현대의 토양으로서 사진전문 갤러리가 출현한다. 1981년 종로2가에 <파인힐갤러리>, 1983년 마포 성산동에 <TS Gallery>, 1984년 종로 중학동에 <한마당 화랑>, 1985년 혜화동 대학로에 <여백>이 나타난다. 사진전문잡지도 출현한다. 1984년에 사진무크지 <시각(Camera Work)>, 1987년에 월간지 <IMAGE>, 1988년에 <포토 291>, 1988년에 사진논총 <밝은방>, 1989년에 월간 <사진예술>이 창간된다. 사진전문이론서도 출판된다. 1985년에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 1986년에 <열화당사진문고>, 1987년에 육명심의 <세계사진가론>이 출판된다. 그리고 또, 보다 중요한 현대성을 반영한 전시들이 쏟아져 나온다.
1985년 <구본창사진전>과 그의 <긴 오후의 미행>, 1985년 김영임의 <여의도>, 1986년 최영돈의 <뉴컬러>, 1986년 김영수의 <현존>, 1987년 김남진의 <이태원의 밤>, 그룹전으로서는 1987년 구본창, 배병우, 최영돈의 <다른 컬러 이미지 셋>, 1987년 <제3그룹전> 등등, 1988년 <사진, 새시좌전>까지 한국사진은 80년대 들어 비옥한 토양에서 여러 현대의 싹을 틔운다. 현대성을 드러낼 토양은 중요하다.
<파인힐갤러리>, <한마당화랑>에서는 현대성을 반영한 작품들을 전시했고, 사진 아카데미를 겸한 갤러리 <여백>과 <타임스페이스갤러리>에서는 외국사진작가의 작품을 전시했다. 무크지 <시각>과 사진논총 <밝은방>은 정기, 부정기적으로 의식 있는 한국사진가들의 작품을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출간했으며, 사진전문지 <Image>, <포토 291>, <사진예술>은 국내외 수준 높은 사진과 세계사진의 최근 조류를 제공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모더니즘의 상황도 아니었고, 서구에서 몰아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현대성의 발화, 현대성의 이행
한국현대사진은 그 같은 토양 위에서 이제 누가 어느 시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대에 부합한 새로운 사진의 모습을 발화시킬 것인가만 남았다. 그를 위해서는 세 가지 사안이 요구되었다. 먼저 불을 지속적으로 태울 수 있는 장작, 순간적으로 불길을 키울 수 있는 기름, 그리고 불씨를 던질 점화자가 필요했다. 1985년을 기점으로 이것들이 나타난다.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이론)가 장작, 19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새시좌전>(흔적)이 기름, 그리고 유학파 구본창이 점화자였다. 1985년을 한국현대사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컨템퍼러리 사진의 이론을 제공했던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 현대사진의 불씨를 지핀 구본창 모두 1985년에 출현한다. 물론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그 시대 보이지 않는 장작, 기름, 불씨가 되었던 현대사진의 발화점들도 상당하다.
예컨대 중학동 주명덕의 작업실, 그리고 그가 간행한 무크지 <시각>, 동교동 김장섭 작업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만든 무크지 <사진마루>, 또한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대학로에 사진 아카데미 <여백>을 오픈한 김민숙, 전시 기획을 통해 도도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진평론가 김승곤의 <타임스페이스>와 <TS Gallery>,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운 시각과 사진적 방법론을 강단에서 펼친 젊은 강사들, 이들 역시 무시 못할 동인(動因)들이다.
그러나 80년대 현대사진의 장작은 현대사진이라는 국제적 사조와 경향을 광범위하게 알린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였다. 미국현대사진에서 <Aperture>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광범위한 이론적 확산, 즉 텍스트를 통해 시대인식을 고양시킨 점이다.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는 독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세계적인 컨템퍼러리 사진의 모습과 그 경향을 알게 했던 유일한 텍스트였다. 아마도 이 시기를 거쳐왔던 젊은 세대(특히 지금의 40대)에게는 현대사진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사진대학 및 사진아카데미에 있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에 밝았던 교수로부터 강의실에서, 대학의 사진서클의 경우 자체 스터디를 통해서 현대사진의 제 사조를 알게 되었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던 일반 사진인에게는 <현대사진의 조류>가 유일한 교과서였다.
1985년 2월 독일에서 구본창이 귀국했다. 그의 출현은 한국사진의 새로운 판도, 즉 급작스러운 한국사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유학파들의 귀국이 있었으나 그가 한국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지금까지도 중심에 선 것은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한국현대사진의 장본인” 혹은 “사진, 새시좌전을 통해 한국현대사진을 발화시킨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은 한 개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다.
당시 그는 그럴 만큼 충분한 이론적인 토대를 갖고 있지도 못했고, 또한 그런 일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만큼 행동적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때 그는 단지 시대에 부합한 시계를 차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사진에 스타가 필요할 때 스타가 될 수 있었고, 사진의 위상이 높아져야 할 때 위상을 높일 수 있었고, 사진이 충무로를 벗어나야 할 때 벗어날 수 있었고, 학생들이 눈 높이에 맞는 선생을 요구할 때 눈 높이에 맞출 수 있었고, 한국사진이 국제교류가 필요할 때 가교가 될 수 있었고, 사진시장이 요구되었을 때 시장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절대적 능력보다는 시대에 부합한 시계 혹은 코드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한국사진에 있었다. 근대를 건너뛴 우리사진, 즉 한국사진이 모더니즘을 건너뜀으로써 있어야 할 인프라, 정상적인 궤도축 그리고 시대에 부합할 현대성의 메뉴판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현대라는 시대의 격랑이 사진으로 넘쳐왔을 때 우리는 컨템퍼러리라는 시간축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진이 만약 미술, 음악, 문학, 영화처럼 정상적으로 모더니즘의 토대를 일궈왔다면 구본창이라는 한 개인의 힘은 절대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못했기에 시대의 격변기 앞에서 한 개인의 능력과 감각과 순발력에 이끌린 경우이다. 구본창은 한국사진의 무 계보였다. 따라서 주종관계도, 수직적 위계도 없었다. 거기에다 외국에서 막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과 시대의 감각이 일치했다. 그도 처음에 무 계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사진의 시계와 맞지 않아 고전했다. 그러나 시대는, 우리는 점점 그에게 시간을 물었다.
돌이켜 보면 한국사진은 다양한 분야에서 장작이 되고, 기름이 되고, 불씨가 됐던 모습들이 있다. 개인적이고, 국지적으로, 그리고 아주 작은 일부이지만 작품, 이론, 정신, 이념 하나로 현대성을 구현했던 작가, 이론가, 선생님들이 있었다. 이 글은 이제부터 그들이 어떻게 한국현대사진의 장작이, 기름이, 불씨가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물론 반대로 그들이 시대에 역행한 행동들 그리고 비역사적이었던 정황들과 풍경들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선, 비평적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한국현대사진의 발화점이라고 말해지는 1988년 <사진, 새시좌전>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
주1) Jonathan Green, <A Critical History American Photography>, Harry N. Abrams, Inc.,1983, P. 69
한국 현대사진의 궤적
한국사진은 지난 30여 년 동안 빠르게 새로운 지형을 형성했다. 우리나라에 사진술이 전래 된 것은 개화기인 19세기 후반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한국사진사는 120 여년을 조금 지나고 있다. 그 중에서 예술사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20년대 후반이다. 이때 이미 초기 예술사진가인 정해창과 서삼순은 개인전을 개최 할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이 시기의 한국사진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사진경향을 직접적으로 영향 받았다. 살롱사진이라고 일컬어지는 회화주의 사진이 주된 흐름이었다. 또한 신문사나 사진단체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이 주된 작품 활동이었다. 서울의 이해선, 대구의 최계복, 회령의 정도선 등이 공모전 입상으로 전국적으로 사진가들이다.
공모전이 신인 사진가를 발굴하는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당시의 생활풍속이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탐미적인 시선으로 재현하는 것이 당시의 사진가들이 추구한 작품세계였다. 이러한 사진경향은 서양의 회화주의 사진을 수용한 일본사진에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결과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독일의 뉴 비전 사진이나 미국의 스트레이트 포토가 사진의 경향을 주도하여 인상주의 회화의 그늘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사진미학을 모색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이러한 사진경향은 1945년 해방이후에도 큰 변동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서양의 초기 다큐멘터리 사진과 유사한 사진작업을 한 사진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미군정하에서 발생한 식량문제를 다룬 임석제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진가 단체에서 활동했었다. 그는 공산당이 불법화되자 사회적인 현실을 기록한 사진에서 탈피하여 산악회에 가입하여 산 사진을 찍는데 몰입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사진의 족적은 한국사진의 소중한 자산이다. 미국의 자콥리스(jacod riis, 1890~1976)와 루이스 위그 하인(Lewis Wickes Hine, 1874 ~ 1940)의 포토캠페인 사진과 비견할만한 사진사적 업적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경향은 여전히 사회적인 의식이 결여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탐미적인 살롱사진 이였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서양에서 종군한 마가렛트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데이비드 더글러스던컨((David Douglas Duncan)등과 서양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영향과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인간가족展’이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이후 한국사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당시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원로 사진가로서 여러 공모전에서 심사를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한 이해선, 현일영, 최계복 등과 같은 1세대 예술사진가들 보다는 젊은 세대인 임응식, 이명동, 구왕삼 등은 각기 내용적인 측면에서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기록하는 것이 사진이 나아갈 올바른 방향이자 새로운 사진의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중에서 임응식은 ‘생활주의 사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서 사진의 리얼리티(reality)에 대한 자신의 사진미학을 구축해나간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사 사진부 부장이었든 이명동과 뜻을 같이하여 동아일보에 국전의 사진경향과 반하는 리얼리즘 사진을 수용한 동아사진콘테스트를 신설하여 자신의 세를 확장했다. 이 동아사진콘테스틀 통하여 데뷔한 사진가 중에는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 차용부 같은 사진교육자도 있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사진가, 사진이론가, 사진교육자로서 활동하면서 사진아카데미와 아마추어 사진계를 넘나들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또 다른 리얼리즘 사진운동가인 구왕삼은 대구에서 사진가와 평론가로서 활동하면서 일간지에 사진비평문과 무용에 대한 비평문을 기고했다. 그는 대구에서 열리는 사진동호회 전시회 비평문을 일간지에 기고했는데 회화주의적인 살롱사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단순하게 회화를 모방한 낡은 사진이라고 비판하면서 리얼리즘 사진을 옹호했다.
1960년대 리얼리즘 사진을 주장한 사진가들은 서양의 저널리즘 사진, ‘인간가족展’, 일본에서 도몽 겐이 주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서양사진사를 정교하게 이해하지 못하여 20세기 모더니즘 사진의 주된 경향인 형식주의 조형사진, 다큐멘터리사진, 저널리즘사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들 사진경향을 단순하게 회화주의 사진에 반하여 발생한 스트레이트 포토 혹은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예술사진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미 서양사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주관적인 사진이 새롭게 형성도기 시작했는데 한국을 비롯한 제 3세계 사진가들은 ‘인간가족展’에 출품된 작품을 새로운 사진미학으로 오해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진가들이 리얼리즘적인 사진을 추종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최민식의 ‘인간’시리즈다. 그는 일본에서 인간가족전 작품집을 접하고서 큰 감동을 받고 스냅촬영형식으로 대중들의 삶을 50 여 년 동안 찍었다. 특히 2004년도에 일민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한국다큐멘터리사진 1세대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사진을 시작한 1950년대 후반 한국사진문화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사회적인 의식을 갖고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 했다기보다는 감동적인 예술사진을 찍기 위해서 피사체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좀 더 진실에 가깝고 판단된다.
1960년대에 임응식을 비롯한 일부사진가들이 주창한 리얼리즘 사진 혹은 생활주의사진은 서양의 다큐멘터리사진이나 저널리즘사진과는 내용적으로나 외형적으로 aksag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서양사진가들은 사회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사진작업을 하였고 개인 작품집 발간이나 개인전 혹은 화보잡지를 통하여 작품을 발표했다.
그와는 다르게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예술사진제도로서 작동했던 낡고 정형화된 시스템인 공모전사진으로 수용하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그 결과 사회적인 의식이 결여된 채로 정형화되어 변모하는 시대를 반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한국의 초기예술사진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주도하였고 정형화된 공모전 제도로 인하여 한계지점을 드러냈다.
그런데 1960년대 한국사진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 의해서 주도된 미국 스트레이트 포토 운동 당시의 상황과 유사한 현실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임응식이 주창한 생활주의 사진은 이형록이 조직한 신선회에서 실천적으로 가시화된다. 신선회는 창립전시회를 ‘시장의 생태’라는 주제로 현실을 기록한 사진을 연작사진형식으로 전시하여 주목 받았다. 단사진이 주된 표현방식이었던 당시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형식의 전시였다.
이 단체는 1957년에 조직된 이 단체는 1960년도에 ‘싸롱아루스’로 재조직된다. 또 현대사진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차세대 사진가를 양성하기도 했다. 이 모임의 회원 중에는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과 같은 사진가도 있다. 또 이 시기에 주명덕, 강운구 등과 같은 사진가도 사진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이들 사진가중 전몽각을 제외하고서는 그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게 사진을 찍는 것이 직업인 기자로서 사진을 시작하여 다큐멘터리 사진가 혹은 예술사진가로서 작가적인 의식으로 무장하여 사진작업을 했다. 이들을 작가주의 사진가 1세대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수사와 관계없이 사진사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세대로 평가 할만 요소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있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한국사진은 1960년대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시기이다. 5.16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기존의 사회단체가 해체되고 새로운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사진가단체를 비롯한 예술가단체도 예외는 아니다. 관변단체인 한국예술인단체 총연합회 산하에 사진기자들과 영업사진관 사진사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한국사진협회(현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전신)가 발족하면서 공모전사진이 오랫동안 한국사진의 경향을 주도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1964년도에 서라벌 예술대학 사진학과가 개설되어 본격적으로 사진전문가들이 양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는 이론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사진교육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촬영, 현상, 인화 등 기술적인 과정에 대한 실기 중심의 교육이 주된 내용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상사진기법과 사진을 수작업으로 수정하는 기술에 대한 전수와 일제강점기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살롱사진미학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 졌다.
사진재료학이나 광학과 관련된 과목도 있었다. 하지만 교수진들이 사진을 체계적으로 전공한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문적인 내용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론이 겸비된 교육이 아니라 기술 중심적인 교육이었고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진교육이었다.
이러한 사진교육내용은 1980년대까지 큰 변화 없이 이루어 졌다. 심지어는 대학원 과정에서 조차도 학문적이지 못하고 아마추어리즘의 연장선상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사진은 1970년대부터 사진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 등 그이전의 세대들과는 다르게 인문학과 외국어에 대한 소양이 있는 사진가들이 대학교육 현장에서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이론교육이 미약하게나마 시작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제도권에서 체계적인 사진교육을 받은 집단은 아니지만 숙명여대의 숙미회, 연세대의 연영회, 고려대의 호영회 등 각 대학교의 사진동아리가 자체적으로 이론교육을 실시하여 기존의 아마추어사진과는 다른 사진작품을 정기전시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학사진문화의 태동은 ‘사롱아루스’가 중심이 되어 젊은 세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직한 현대사진연구회의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대학사진동아리 출신중에는 후일에 사진을 전공하여 사진가로서 활동하거나 사진교육자가 된 이도 있다. 그 외에도 전시기획자 또는 사진미술관을 운영하는 인사도 있다. 또 신문사 사진기자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숙, 송영숙, 김영신, 김남진 등이다.
1980년대 한국사진은 또 다른 변화의 징후가 보였다. T S 갤러리, 파인힐 갤러리,한마당 화랑 등 사진전문 갤러리가 개관하기도 하고, 구본창, 김대수, 이주용, 임영균, 한옥란, 최광호 등 외국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들이 돌아와 활동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 느껴지는 작품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또 사진을 아카데미에서 전공하지 않았지만 한국사진의 아마추어리즘에 한계지점을 인식한 당시의 30대, 40대 사진가들이 중심이 되어 단체전을 통하여 새로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제3 그룹동인전, 8인의 시각 등이다. 이와 같은 전시에 참여한 사진가들이 현재의 원로 사진가들인 홍순태, 한정식, 고 김영수, 김민숙, 김복남, 이종만, 고 이창남, 양성철 등이다. 이러한 노력 외에도 한정식의 사진예술개론, 임응식의 사진사상, 육명심의 세계사진가론,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 등과 이론서가 출판되어 이론에 목말라하는 젊은 사진전공자들과 사진입문자들에게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였고 세계사진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해주었다. 또 최초의 사진이론 전공자인 김승곤, 1세대 사진유학파인 김민식, 사진기자출신인 사진가 강운구 등이 미술세계에 서구의 사진경향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여 젊은 세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는데, 1950년대에 출생한 사진유학파들이 참여한 ‘사진. 새 시좌’전이 당시의 20대, 30대 사진전공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새로운 흐름의 기폭제가 되었다. 또 사진전문가 집단을 독자층으로 삼은 ‘포토 291’, ‘월간 사진예술’이 창간되어 한국사진의 현대화에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그 후 ‘사진. 새 시좌’전의 성과에 고무되어 평론가 김승곤과 배병우, 김장섭, 구본창, 김대수 등이 중심이 되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서울과 경기도 장흥에서 열린 ‘한국사진의 수평’전은 한국사진문화의 지형을 바꾸는 혁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또 1992년에 금호미술관 큐레이터 박영택이 기획하여 당시의 30대 사진가들과 젊은 개념미술가들이 참여한 ‘혼합매체’展은 한국사진의 새로운 변화와 성장을 예고했다.
한국사진의 현대화, 국제화는 한국사진계 자체의 자구적인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기존 미술제도의 사진에 대한 관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1995년도에 시작된 광주비엔날레와 경주에 소재한 선재미술관 큐레이터 김선정이 기획한 ‘사진. 오늘의 위상’展이다.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이 사진을 표현매체로 사용한 것은 현대미술에서의 사진의 비중을 한국미술계가 인식한 계기가 되었다.
또 ‘사진. 오늘의 위상’展은 신디셔먼, 샌디스코글런드, 낸 골딘, 마이크 & 더그 스탄 , 에멧 고윈 등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의 작품을 젊은 사진전공자들과 젊은 사진가 등이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 전시가 당시에 한국사진을 대표하는 사진가들인 한정식, 황규태, 주명덕, 강운구, 구본창, 김장섭, 김대수, 민병헌, 이정진 등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어 국내 작가들의 작품세계와 직접적으로 비교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한국사진의 수평’전의 영향으로 한국사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전시의 내용과 형태의 변화다. 해방이후 수 십 년 동안 한국사진은 아마추어 사진동호회의 연례전시, 공모전 입상작 전시 등이 사진전시문화의 주된 경향이었다. 하지만 ‘수평’展 이후 기획전과 사진전공자들의 개인전이 사진전시문화를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수평전의 여파로 소위 만드는 사진이 유행하자 그에 반하여 스트레이트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들이 주로 참여한 ‘관점과 중계’展이 기획된 것이다.
수평전이 40대 이하 사진가로 참여 작가들의 연령대를 제한한 것과는 다르게 이 전시는 연령을 제한하지 않고 전통적인 스트레이트 사진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을 전시 참여 작가로 선정하였다. 또 사진사를 전공한 박주석이 기획자로 참여하여 전문 기획자들이 전시를 기획하는 전시문화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전시에는 기존의 사진가들인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 등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여 전시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전시이후 꾸준히 의미 있는 기획전이 꾸준히 기획되어 한국사진은 국제, 현대화, 탈 아마추어리즘의 토대를 마련한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공적인 제도와 한국미술이 한국사진에 관심을 갖게 하는 사회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2000년대 한국사진은 좀 더 확장되고 세계사진의 경향과 리얼타임으로 호흡하게 되는데 그것의 기본적인 기반은 공적인 예술제도가 아닌 대형 상업화랑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업화랑 중에 하나인 가나아트가 2001년도부터 2007년까지 기획한 사진영상페스티벌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특히 1970년대에 출생한 지금의 40대 초,중반 사진가들은 독일 유형학적 사진가들의 초대형사진을 직접 접함으로써 사진프린트의 질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1990년대에 대학에 다니면서 작품집이나 슬라이드로서만 접한 1990년대 현대사진의 주도적인 경향이었던 독일의 유형학적 사진을 비롯한 동시대 현대사진의 최전선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되었다. 가나아트의 사진영상페스티벌에서 소개된 독일의 유형학사진을 비롯한 1990년대 현대사진의 경향의 영향력은 2000년대 후반까지 지속됐다.
2006년부터 2008년 전반까지 세계미술시장과 한국미술시장은 엄청난 호황기를 겪는데 이에 힘입어서 한국사진도 미약하게나마 국내외 미술시장에 진입하게 된다.
70대 원로사진가인 황규태를 비롯하여 1950년대에 출생한 권부문, 구본창, 김아타, 민병헌, 이상현, 1960년대에 출생한 이정진 등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주목 받았다. 또 1970년대에 출생한 작가들인 구성수, 구성연, 김상길, 한성필, 박형근, 이정록, 이원철, 윤정미 등이 국내 상업화랑 및 아트페어 등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들 외에도 백승우, 김도균, 이윤진, 이정, 임상빈 등도 국내 상업화랑에서 주목하는 작가들이다. 또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과는 새로운 감각의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이들은 사회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주제에 대한 사전조사를 미리하고서 면밀히 검토를 한 이후에 사진작업을 한다. 그들이 김옥선, 박진영, 방병상, 이선민 등이다. 이들의 작품은 예술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2000년 한국사진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가 사진학과 출신이 아닌 미술대학을 졸업한 작가들이 사진을 매체로 선택하여 작품을 발표해서 많은 관심을 받은 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강우, 정연두 등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데비한, 유현미, 원성원, 안세권 노세환, 주도양, 난다 등이 사진전공자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과 태도로 사진을 다루어서 새로운 사진의 지형을 펼쳐보였다.
이들 외에도 예술과 관련된 전공을 하지 않았지만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출발해서 예술제도로부터 인정받은 사타, 최중원, 이득영 등과 같은 작가도 있다.
또 노순택은 매체사진으로 출발하였지만 다른 저널리즘 작가들과는 다르게 미학적으로 포장된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국내외에서 주목 받았다. 한국사진의 외형이 2000년대 초반부터 확장되면서 발생한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다. 이들 외에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노정하도 국내와 미국에 있는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그 이전에 선배작가들이 발표한 작품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주제 및 형식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사진은 지난 30 여 년 동안 외형적으로나 내적으로 많은 발전과 변화를 거듭했다. 특히 40대 중반 이하 젊은 작가들은 과거 선배 사진가들과는 다르게 직관적인 작업이 아닌 개념적인 작업을 하거나 사회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주제와 관련된 사전조사를 하고서 사진작업을 한다. 작업을 개념을 먼저 수립한 이후에 작업을 맨 마지막 단계에 진행한다. 또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의 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탈장르적이고 매체 복합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많이 있다.
또 이들은 활동공간이 확장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려고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사진계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제도 전반에 걸쳐서 활동하고 있다. 상업화랑, 미술관, 미술관이나 상업 화랑이 운영하는 창작 공간 등 주된 활동무대를 넓혀나가고 있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의 예술지형도 변모하여 여러 미술관과 화랑들이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국제성을 표방한 사진행사가 늘어난 것도 2000년대 한국사진의 새로운 모습 중에 한다. 2002년도에 ‘제1회동강국제사진제(구 동강사진축제)’, ‘2002 하남국제사진페스티발’ 등을 출발점으로 해서 2006도에 ‘2006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2006 대구사진비엔날레 등이 개최되어 국내외에 한국사진을 알리는 사진행사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서울, 영월, 대구 외에도 울산과 전주에서도 국제사진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이중에서도 동강축제사진제는 10회가 넘어서면 행사가 안정적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고, 2006년도부터 열리고 있는 대구사진비엔날레는 동시대 사진의 최전선을 탐구하는 행사로서 정체성을 정립해나고 있다. 특히 사진행사로서는 예산이 가장 많은 10억 이상을 확보하여 좀 더 다채롭게 행사를 기획하여 대중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
또 ‘2002 하남국제사진페스티발(운영위원장 김장섭)’은 행사가 지속되지 못하고 1회에 그쳤지만 국내 해외의 24명의 작가가 참여하였고,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담론을 생산하려고 노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진뿐만 아니라 시각예술전반에 걸쳐서 테크놀로지가 여러 형태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중에서 사진은 디지털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사진의 제작방식 및 제작과정, 존재형태, 기본적인 개념 및 미학 등이 계속해서 변모하고 있다. 또 다른 매체를 사용하는 작가들도 손쉽게 사진을 사용 할 수 있게 되어 중요한 미술의 재료로 자리매김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와 융합되어 새로운 개념과 형태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사진은 기술 및 예술의 지형변화, 변모하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환경 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변형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환경과 매체환경으로 인하여 한국사진도 또 다른 지형을 펼쳐 보이고 있다.
[출처]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작성자 ohyh45
첫댓글 모던 사진(Modern Photo)의 개념조차 헤아리지 못한 채
컨템퍼러리 사진(Contemporary 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