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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난 인사동 거리의 원중이. 혹시 잃어버릴까봐 명찰을 달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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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둘레둘레 살펴본다.
주말 오후의 인사동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종로, 광화문과 인접해 있어서 교통도 편리하다. 종로2가에서 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이 700m의 길에는 그림, 도자기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한편에는 떡과 다과를 비롯한 한국음식에서 사찰음식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맛이 사람들을 기다린다. 거리는 아이를 목말 태운 가족부터 카메라를 들고 추억을 남기는 연인까지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단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시조각보 작품을 눈여겨 본다. 촬영해 놓으라고 해서 촬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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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모시조각보 작품에 관심이 있는 단미 때문에 작품에 연신 셔터가 눌러진다.
인사동의 한낮
인사동 문화거리를 지나 역시 인사동에 있는 운현궁에 든다.
운현궁, 한국 근세사에 있어 폭풍의 장소이다. 풍운아 흥선대원군이 정치활동을 펼쳤던 역사의 장소이다.
조선 역사에서 흥선대원군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남긴 사람도 없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재미있고 반전이 강했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운현궁의 배치도이다.
대원군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계속된다.
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에게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조세의 운반 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하여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민생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고 원납전(願納錢)을 강제로 징수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천주교도 박해를 비롯한 쇄국정책을 고집함으로써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초래하는 등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왕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종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물러날 대원군이 아니었다. 반전은 또 다시 시작된다.
대원군은 1882년 구식병사들의 반란이었던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손 준용(埈鎔)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모의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암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그는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그야말로 조선근세사의 풍운아였던 것이다.
뒷정원에서 앞정원으로 나가는 문에서 원중이를 기다리는 단미.
사적 257호인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高宗)이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저택이다.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하자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 민씨는 여흥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 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운현궁에서 중국 청(淸)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다.
운현궁은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我在堂)은 없어지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다. 또한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사당(祠堂)도 있었으며,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나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노락당이다.
노안당과 노락당은 가운데에 큰 대청(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데, 노안당은 초익공 양식을 이루고 노락당은 칠량집으로 우물천장이다. 운현궁의 양관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는데,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 아들 이우가 이어 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 일부로 쓰인다.
운현궁에서 나와 그 옛날 흥선대원군이 드나들었던 궁궐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한다. 궁궐,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 선정전, 소덕전, 빈경당, 여일전, 정월전, 옥화당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좀 기다려야 한다. 가이드가 시간을 정해서 나오므로 그때까지 모인 사람들을 가이드가 한꺼번에 데려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 20분간 기다렸다가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원중이는 기다리기가 지루한지 몸을 비튼다.
위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이다.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13년(1413) 문에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기사가 있다. 문에 종을 걸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문은 다시 세운 것이므로 실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이제 창덕궁에 들어왔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다니면서 설명을 듣고 관람을 한다.
인정문을 지나..............
우리가 영화에서 자주 보던 인정전으로 들어간다. 소위 임금님이 백관 대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정치를 하던 곳이다.
이 마당에서 백관 대신들이 줄줄이 엎드려 나라의 정사를 임금과 함께 의논했을 것이다.
국보 225호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이제 대조전으로 들어간다.
보물 816호인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 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이곳에 옮겨짓고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실의 동, 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궁궐의 중심에서 좀 벗어나 외원으로 나와서 장락문을 들어서면...............
낙선재(樂善齋)가 나온다.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고종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4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여기서 사망했다.
사람들은 유별나게 낙선재에 관심이 많다. 아마 비운의 공주 덕혜옹주 때문이리라.
이제 본 궁궐에서 낮은 언덕을 넘어 창덕궁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궐의 후원, 일명 비원으로 간다. 우측의 담장 너머가 창경궁이다. 대궐의 정원을 후원(後苑), 북원(北苑)이라고도 하는데 처음 이곳에 금원(후원)이 생긴 것은 1406년(태종 6) 4월의 일로서, 창덕궁에 많은 전각(殿閣)을 창건한 후에 대궐 후원에다 화려한 선온정(鮮溫亭)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향(宴享)과 관등놀이 등의 유연(遊宴)을 베풀어 오늘의 금원을 이루었다.
또한 지형과 산록(山麓)의 지세에 따라 각양각색의 집을 짓고, 연못을 파서 금수(禽獻)를 놓아 길러 정취를 더하게 하였다. 건물도 평면을 4각에서 6각의 다각(多角)으로 하고 지붕도 기와지붕, 초가지붕, 수피(樹皮)지붕 등 형태나 수법이 다양하여 순한국식 건축양식과 조경(造景)양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봄이 되어 꽃이 피면 정말로 아름다운 정원이 되는 후원이다. 우리들은 보통 비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자연친화적인 정원이 있다는 것은 과거와 현대의 묘한 대조의 미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잘 배치된 건물과 풍경
주합루와 부용지 옆에 선 단미와 원중이. 비원에 들어오면 정조왕의 자취를 많이 느낄 수 있는데, 주로 유흥의 장소를 공부하는 장소로 바꾸었다는 내용들이 많다. 위에 보이는 주합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정조대왕이라는 명칭과 함께 여느 왕들과는 다른 비범한 왕으로 기억되는 모양이다.
애련지 앞 비원의 저택들.
이제 다시 언덕을 넘어 궁궐 쪽으로 나오고 있다.
오후에는 원래 예정했던대로 옛친구 김용국을 만나러 강서구 방화동으로 갔다. 원래 예정은 계룡산 타고 성남에서 친구들 만나고 서울로 입성하여 김용국을 만나서 하루밤 거하는 것이었다. 워낙 옛친구라 언제라도 집에 들러 거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용국이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횟집으로 가서 한잔한다.
김용국이는 나의 중학교 시절 지금은 유명을 달리 한 김기명과 함께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는 서울 경희고, 중앙대를 나와 서울 환일중 국어교사로 있는 중견시인이다. 그는 여느 사람들과는 좀 다른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는 친구이다. 그는 무척 자상하고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젊은 시절 다작 시인이었으나 최근에 창작활동에 주춤하고 있다. 그는 설악산 오색지역에 큰 토지를 구하고 틈만 나면 그곳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즐기는데 아마 은퇴 뒤의 창작 활동을 위하여 그런 계획을 했지 싶다. 이번 우리의 여행계획에는 없지만 우리도 남설악산 오색에 내려가 며칠 보낼 작정이다. 따라서 김용국이 집에서 하루밤 거할 계획을 바꾸어 일단 상암의 단미오빠집에 가서 하루밤 보내고 내일 바로 설악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큼직하게 썰어나온 농어가 유난히 맛이 있다. 저걸 배스(Bass)라고 하지? 우리가 말하는 생태계 파괴 민물고기 배스는 정확히 말하자면 큰입배스라고 알고 있다. Big mouth bass....................아주 나쁜 놈이다. 하지만 위의 저 바다 배스는 비싼 고급 횟거리이다.
상암으로 가서 단미오빠 집에서 하루밤을 거한 후에 다음날 낮에 남대문시장으로 나왔다. 나로서는 남대문시장에서 전문등산장비를 구할 생각이었고 다른 이들은 의류라든가 다른 생필품을 사려고 했다.
남대문시장은 옛날부터 유명한 시장이다. 일명 도깨비시장이라는 것도 이 남대문 시장 안에 있다. 시장 곳곳을 뒤져도 도깨비시장이 없더라고? ㅋㅋㅋ 도깨비시장이란 남대문시장이 밤 12시가 되면 의류를 위시하여 모든 물품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업자들에게 반값으로 팔고 해가 뜨면 다시 원위치 된다는 데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무리 찾아봐라! 도깨비시장이 있는지...............
남대문시장은 대지면적 42,225㎡, 총 58개동, 9,265개의 점포가 있다. 하루 이용객은 평균 45~50만 명에 이르는 재래식 시장이다. 그 기원은 1414년(태종 14) 정부임대전(政府賃貸廛)으로 개시되었는데, 1608년(선조 41) 대동미(大同米), 포(布), 전(錢)의 출납을 맡아보기 위해 선혜청(宣惠廳)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됨에 따라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데서 유래한다. 이후 시전(市廛)이 들어서게 되면서 본격적인 상업활동이 시작되었다. 1911년 3월 친일 이완용내각의 내부대신(內部大臣)이었던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영업행위를 하였고 한때 일본인들이 한국인 점포를 염천교쪽으로 쫓아버려 몇몇 한국인 점포만 존재하다가 8 ·15광복을 맞았다. 8 ·15광복 이후에는 남대문상인연합회가 관리 운영하였으나 6 ·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주로 이북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았고, 미군의 군용 원조물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그 당시의 건물은 노점의 형태였다.
1968년 대화재(내가 서울무학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할 때이다.)로 시장의 중심부가 전소되었으며, 1975년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시장 일부를 태웠다. 이를 계기로 지하 3층 지상 25층의 남대문시장 현대화계획을 세웠다.
현재에는 각종 의류를 비롯하여 섬유제품·주방용품·가전제품·민예품·토산품·농수산물·각종 식품·일용잡화 및 수입상품 등을 취급하고 있으며, 그 중 주요품목은 상권이 전국에 퍼져 있는 의류이다. 특히 각종 숙녀의류가 가장 많이 취급되는데, 고객은 국내 소매상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에까지 퍼져 있다. 또한 아동복은 전국 아동복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음식점 골목. 남대문시장에는 먹거리도 없는 것이 없다. 예전 여기서 잡탕 먹던 생각이 난다. 너무나 맛이 있었던 잡탕. 지금 생각해 보면 요즘 해물탕 비슷한 것이었다.
남대문시장의 유명한 갈치조림을 먹으러 골목골목을 찾아 뒤진다.
한 곳을 찾아서 들어간다.
자! 갈치조림. 보기에는 저래도 맛이 있다.
평일 낮이라 사람들이 덜 붐빈다. 단미는 원중이를 잃어버릴까 조바심을 낸다.
남대문시장의 각 점포는 소규모이지만 각각 상품을 직접 생산·판매하는 독립적인 기업체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통비용만큼 가격이 저렴하며, 또한 도매와 소매를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에서 모이는 중간도매상 및 소매상뿐만 아니라 일반 이용객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도깨비시장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른바 밤 12시가 되면 의류의 가격이 반값으로 갑자기 돌변한다는 것이다. 세계에 유래 없는 재미있는 시장이다.
가래떡을 사서 먹어본다. 재래식 맛이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원중이. 물론 관심은 먹을 거리 겠지? ㅋ
어느 건물의 지하에 주차를 했는데 그 지하 주차장의 시설이 대단히 열악하다. 곧 무너질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완전히 누벨버그의 <지하실의 멜로디> 이다. 빨리 탈출하자.
남대문시장에서 단미오빠 내외와 헤어져 이제 김용국의 별장이 있는 강원도 양양군 남설악 오색으로 향한다. 우선은 남산터널을 지나야 서울 탈출이 용이해 지겠지?
요즘 서울에서 설악까지는 도로가 잘 뚫려 빠르게 간다. 예전 마장동에서 하루밤 새우 잠자고 새벽 버스 타고 한계령 넘어 설악에 들어갈 때가 생각난다. 요즘은 경춘고속도로-인제 양양 도로를 달려 단숨에 한계령에 선다. 그러나 밤이다. 그 아름다운 한계령도 밤이 되면 아무런 경치가 없다. 그리고 오색약수 지나 송어리로 들어온다. 첩첩산중이다.
캄캄한 밤중에 백두대간 바로 아래 첩첩산중으로 들어와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온 천지가 눈 세상이다. 여기가 강원도 양양군 서면 송어리 마을이다.
송어리는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지역으로 남쪽으로는 오색천이 흐른다. 마을 앞 계천에 송어, 연어, 자라가 많았으므로 마을 이름이 송어리로 불리워졌다. 옛날에는 마을 가구수가 수십호 되었으나 점차 줄어서 행정구역 개편시 송천리에 편입되었다. 일명 “송어골”이라고도 한다.
송어리는 정확하게 백두대간이 오대산-구룡령 지나 산줄기가 설악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북암령-단목령-점봉산-한계령-대청봉-미시령...............으로 나아갈 때 북암령-단목령 사이 북편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첩첩산중 마을에 들어온 원중이. 그래도 도로는 닦여 있다. 위에서는 막히지만...........
송어리 마을 입구에는 북암령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닦여 있다. 요즘 참 세상도 좋아졌다. 북암령(925m)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선에 있는데 이른바 백두대간 산줄기 상에 있다.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한계령을 기준으로 할 때 북쪽)과 마주보고 서 있는 점봉산(1424m)의 동쪽 산줄기에 해당하는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로 알려진 곳이다. 백두대간상에 위치해 있어 대간 종주인들이 점봉산을 앞두고 꼭 거쳐가야 할 고개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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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국을 마을에 두고 우리는 오색약수터로 올라온다. 설악에 왔으니 설악을 조금이라도 맛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중이를 데리고 남설악 주전골에 들어가 보려고 한다. 오색약수터에서 약수도 좀 마시고................
오색약수터는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 있다. 한마디로 남설악 주전골 계곡에 있다. 주전골을 오르면서 왼편으로 골짜기와 상가 건물들을 본다. 식당이 있는 저 자리에는 예전에 뱀사탕집이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던 지역이다. 이제는 혐오식품이라 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초창기 설악에 왔을 때 저기에서 칠성장어를 구워 먹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나방이 사람 얼굴 두배만 했었다.
새로 건립된 오색교를 지나..............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오색약수터다. 얼마전 대 홍수로 이 일대가 완전히 파손되어 약수터도 사라졌었는데 이제 새로 찾아서 다시 꾸며 놓았다.
왼편이 진짜인데 물이 잘 안 나오자 오른쪽 구멍에서 약수를 퍼 마신다. 그 맛이 많이 떫은 것이 경주의 사방 검단 약수물과 맛이 비슷하다.
오색약수터는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과 그 남쪽 점봉산(일명 남설악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 오색천(양양 남대천의 지류) 개울가의 한 너럭바위 암반에서 약수가 솟는다. 여러개의 구멍에서 솟는데, 위쪽의 약수는 철분이 많고 아래쪽의 구멍은 탄산질이 많다. 하루 용출량은 1,500ℓ 정도이고, 물맛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며, 위방병, 신경통, 피부병, 빈혈 등에 효력이 있고 특히 메밀꽃 피는 가을철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약수터에서 위쪽에는 한국 4대 온천 중의 하나인 오색온천이 있다.
이제 주전골로 올라가 본다. 가벼운 산책길 정도이니 원중이도 갈 수 있지 싶어 같이 간다.
주전골은 설악산 남쪽에 있는 오색약수터에서 선녀탕을 거쳐 점봉산(1,424m) 서쪽 비탈에 이르는 계곡이다. 남설악의 큰 골 가운데 가장 수려한 계곡으로 계곡미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골이 깊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며 고래바위·상투바위·새눈바위·여심바위·부부바위·오색석사·선녀탕·십이폭포·용소폭포 등 곳곳에 기암괴석과 폭포가 이어져 풍광이 빼어나다. 주전골이란 이름은 용소폭포 입구에 있는 시루떡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이 계곡에서 승려를 가장한 도둑 무리들이 위조 엽전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30분 정도 걸어가니 성국사가 나온다. 수년전 태풍으로 계곡이 전부 망가져 이렇게 다리를 놓아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다.
성국사는 주전골에 위치한 사찰로 옛이름이 五色石寺인데 옛날에 五色꽃이 피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성국사 지나니 경치가 조금씩 수려해진다.
이제 제법 계곡다운 모습을 보이고..............앞에 드러난 봉이 독주봉이다.
걸어 걸어 주전골로 자꾸 들어간다.
망가진 골짜기를 석축을 쌓아 다시 복원한 흔적도 보인다.
원중이는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계속 들어가 보자.
2시간 가까이 걸어들어 오니 다소 힘이 드는지 땀을 흘린다. 그러고 보니 원중이도 많이 컸네.
계곡은 자꾸 험해지고 남설악 바위지대가 조금씩 나타난다. 하지만 저 능선이 백두대간은 아니다. 저 곳이 만물상 지대이고 그 뒤가 칠형제봉, 또 그 뒤가 백두대간이며 그 대간이 한계령에 닿는 것이다.
남설악 만물상이 더 크게 나타난다. 산을 쳐다보는 女心.
설악의 바위들
흘림골 용소폭이다. 십이폭포와 여러개의 폭포가 난 점봉으로 올라 갈 수도 있었지만 시간 상 우리는 흘림골로 들어가 바로 한계령도로로 탈출하려고 한다.
용소폭포 위 부분이다. 여기서는 좀 위험해 원중이를 붙잡았다. 설악에서 사망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이런 곳에서 실수로 미끄러져 폭포로 떨어져서 죽는다. 선견자 엄흥석과 그 손현주도 십이선녀탕 폭포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러자 그 친구 송준호가 천화대에 바위길을 개척한 뒤, 그 두 남녀의 이름자를 따서 '석주길'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뒤에서 단미가 원중이의 옷을 들고 흘림골로 따라 들어오고 있다.
이제 흘림골에서 한계령도로로 탈출하기 위한 마지막 계단이다.
흘림골 한계령 도로로 이제 막 나온다. 주전골 탈출 성공!
우리가 지나 온 코스가 주전골 자연관찰로로 명명되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원중이와 다녀 가기에 딱 알맞다. 탐방 시간도 약 3시간 걸리고..........
이제는 도로를 걸어 오색약수터까지 걸어내려 가야한다. 용국이보고 차를 가지고 오라 할 수도 있지만 그냥 걸어내려 가자. 이게 여행 아닌가?
오후 1시가 넘어 용국이와 만나서 양양군 변두리에 있는 송월 메밀국수집에 간다. 이 지역에서는 꽤 유명하다던데.............설마 춘천 유포리 막국수만 하겠냐?
드디어 메밀국수가 나왔다. 한번 먹어보자. 맛이 어떤지? 내가 바로 미식가 아닌가? 음식에 대하여 불평은 절대 하지 않지만 그 음식의 맛은 정확하게 파악한다.
메밀은 추운 지방,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기에 옛날부터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메밀국수는 끓는 물에 삶아서 찬 물에 헹구어 소쿠리에 건져서 물기를 뺀 다음 뜨거운 장국에 말거나 비비거나 또는 냉면으로 해 먹는다. 메밀은 영양가 높은 우수한 식품으로, 단백질이 다른 곡류보다 많아서 12∼14% 포함되어 있다. 또 이 단백질에는 필수 아미노산인 리신의 함유량도 많아서 영양가가 아주 뛰어나다. 또한, 모세혈관의 저항성을 강하게 하고, 고혈압증으로 인한 뇌출혈 등의 혈관 손상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루틴의 함유량도 많다. 루틴은 메밀국수를 삶을 때, 삶은 물에 상당량이 녹아 나온다. 메밀국수의 국수물을 마시는 것은 유효성분이 용출(溶出)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메밀국수는 요즘 웰빙식품으로 인기가 높은 식품이다. 하지만 면발이 거칠고 맛이 없기에 메밀국수의 관건은 육수물인 것 같다. 한번 먹어볼까?
뭐! 괜찮네. 유명한 것은 다 이유가 있겠지. 국물의 맛이 제법 괜찮았다. 김가루를 뿌려대어 국물을 구수하게 만든 것도 특이했고..........최고는 아니지만 제법 괜찮은 메밀국수였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대명리조트 솔비치 호텔로 가 본다.
야외 스파에서 벌거벗은 청춘들이 있어 몰래 찍어 본다.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는 솔비치는 호텔과 리조트를 다 갖추고 있다. 리조트는 이른바 별장식인데 건축 양식이 지중해식이어서 운치가 있었다.
솔비치 리조트이다. 가격이 제법 비싸고 멤버쉽으로 이용할 수가 있어 고급 시설임을 바로 알 수가 있다.
우리같은 상민들은 그 주변 바닷가에만 있으면 된다. 우리 원중이에게 필요한 것은 저 고급 시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다와 모래사장과 파도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찾아 간 인근의 하조대.
하조대는 해변에 기암절벽이 우뚝 솟고 노송이 그에 어울려서 경승을 이루고 있는데, 절벽 위에 '하조대'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육각정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청유(淸遊)하였던 데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고 하나, 양양 현지에는 또 다른 별개의 전설도 남아 있다.
하륜.....이라면 유방의 한나라 개국의 일등공신으로 개국 즉시 사라진 장자방 장량같이, 조선 개국과 함께 사라진 조선개국 공신이 아니더냐? 권력을 취하고 나면 그 조력자들을 없애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첩첩산중 장가계로 사라진 장량같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일등 공신인 하륜이 개국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덕분에, 모두 거세 당했지만 사라진 하륜은 그 화를 면했던 것을 보면 그는 역시 현명했던 것이다. 떠나지 않고 권력에 집착한 한나라의 한신과 조선의 정도전, 이숙번, 조영무는 모두 제거되지 않았던가!
하조대 옆 봉우리에 서 있는 등대.
원중이도 저 넓은 해원을 향하여 외쳐 본다. 그래, 아들아! 그 말 못하는 답답함을 고함이라도 질러서 풀어 보렴.
하조대의 바다 풍경
송어리로 돌아오는 길에 구룡령 방향으로 나아가 유명한 송천 민속떡마을을 들른다.
마을에 떡공장은 버젓이 있지만 휴일인 모양이다. 아무도 없다. 결국 떡을 못 먹고 만다.
오색에 도착해 오색온천에 든다.
온천탕으로 들어가는 일행들. 오색온천은 남설악 지역의 해발고도 800 m 지점에 있다. 한계령에서 동남쪽으로 4.8 km 떨어져 있으며 남쪽 약 30 km 지점에 오색약수터가 있다. 조선시대 중기인 1500년경에 성국사(城國寺)의 승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며,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이 고려온천이라 하여 온천장을 운영하였다. 수온은 30 ℃로 비교적 낮은 편이며, 알칼리성 다눈천으로 유황성분이 많다. 위장병, 빈혈증, 신경통, 신경쇠약, 기생충 구제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밤이 되어 다시 송어리로 돌아온다. 첩첩산중에 거하려니 답답하기는 하지만 이만하면 괜찮다. 조용함도 그렇지만 일단 경비가 하나도 안 들지 않는가? 집 내부도 기본은 꾸며져 있다. 용국은 우리를 위하여 닭백숙을 해 놓았다. 별 것 없다. 맹물에 닭을 넣어 끓인 것이다. 그리고 꺼 내어 소금 찍어 먹는 것이다.
송어리 용국의 집 안 내부. 옆방이 하나 더 있어 우리는 잠을 거기서 잔다.
이것 저것 차려내니 그런대로 식사가 된다.
이틀을 자고 일어난 송어리 용국의 별장 집. 집 뒤로 조금 높은 터가 밭이다. 모두 합해서 1,000평 정도라는데 가격이 1억 3천만원 정도에 구입했다고 한다.
우리가 떠나기 앞서 우리에게 줄 고로쇠물을 직접 뽑아주는 용국이. 낭떠러지에 있어 조금 위험하지만 그래도 깨끗한 고로쇠물이 아닌가?
고로쇠물은 뼈에 좋다고 해서 이름이 골리수라고 불렸다하는데 아무리 먹어도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몇 개의 말통에 담아와서 밤새도록 이야기 하며 마른 오징어에 고추장 발라서 마신다고 하는데.......마시고 오줌 싸고, 마시고 오줌 싸고....를 밤새도록 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 저녁에 9리터 이상을 먹기도 한단다.
위장이 불편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많이 마시게되면 배가 편해질 것이다. 또 간이 좋지않은 사람들에겐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는데 이 고로쇠 물이 좋을 것이다. 이 고로쇠물이 이뇨작용을 해서 소변으로 많은 것을 배출해주니 간에 부담이 적어지겠지. 어떤 지인은 복수가 찬 어머니를 위하여 고로쇠물을 찾기도 했고, 변비에도 효과를 본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마루에 나와 먼산을 쳐다보는 원중이. 원중이에게는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이제 이번 여행의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시간이다. 더 여행하고 싶지만 조금은 지친다. 한달 전 호남지방의 6일여행에서 많이 지쳤던 우리다. 우리는 남으로 달려 단숨에 명주 동해휴게소에 도착한다. 명사십리가 있는 강릉 바로 밑 명주 말이다.
그리고 바로 경북으로 들어와 영덕 병곡의 칠보산 휴게소에 도착한다.
원중이가 조금 시장기를 느끼기에.............
간단한 먹거리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오후에 도착한 포항 북부해수욕장에 있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물회국수집 환여횟집.
유명한 물회국수..................국물이 너무나 맛이 있다.
물회국수를 먹고 배를 두드리며 밖에 나오니 영일만에 바로 포항제철이 보인다. 여기까지만 오면 집에 다 온 것이 아닌가! 포항도 일종의 고향이다. 그리고 30분 뒤 경주 집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