挽裵君吉亨遠
배형원을 애도하다.
(註)君吉은 정곡공 裵亨遠의 字. 호는 汀谷.
白首朋知散
흰머리의 벗들 흩어지니,
悽然使我傷
서글퍼 가슴 아프네.
相從期永久
서로 영원하자고 기약했는데,
忽此異存亡
홀연히 이렇게 삶과 죽음을 달리하네.
生死渾如夢
삶과 죽음이 덧 없는 꿈이려니,
凄風獨斷膓
처량한 바람에 홀로 마음이 끊어지는듯하네.
新阡違白馬
새로운 무덤가 백마가 배회하니,
病淚自盈眶
병든 이내 눈물 눈가에 가득하네.
-鄭仁濬(1551-1625)龜潭先生實記-
배형원(裵亨遠) 1552~1620
자는 군길(君吉), 호는 정곡(汀谷).
분성군의 12세.이조참의 배맹후의 현손이다. 조부는 생원 배언창이며 아버지는 서생포 만호,증 좌승지 덕수(德秀)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창원박씨 박구(朴球)의 따님이며
성주목사 월정 배명원(裵明遠)의 아우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명성이 있었다.1572년 형 배명원(裵明遠)과 남명 선생을 병문안하였으며, 1589년 수우당 최영경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자 동문들과 신구 상소를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왜적을 방어하였으며, 1593년 2월 형 월정 배명원(字君晦)이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합천으로 모시어 장사 지냈다.
(註)배명원(裵明遠)1542-1593
자는 군회(君晦). 호는 월정(月汀).
성격이 강정(剛正)하여 과거를 일삼지 않고 의리(義理)를 강구(講究)하였으며, 기축옥사 때 제현들과 더불어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다.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우 형원(亨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와 호응하였다. 후에 초유사 김성일이 조정에 아뢰어 성주목사에 특배되었고, 성주진영 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1593년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 명곡서원(明谷書院)에 배향되었다.
(註)孤臺日錄 1593년 2월29일.
裵君晦 以染疾 而卒云憾矣讀了不覺病淚雙下也嗚呼君晦性質 剛直樂於爲善竟 至於斯天道難諶有如是耶
배군회(裵君晦)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도 알려 주었다. 슬픈 일이다. 편지를 읽고서 병중임에도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군회(君晦)는 성질이 강직하고 선(善)을 행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끝내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천도(天道)를 믿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가.
1595년 11월 역양 문경호와 내암 정인홍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이 평정되자 유일로 김해교수에 천거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거 하여 독서와 자제 교육에 힘썼다.
1608년 역양 문경호와 성주의 한강 정구를 찾아뵙고 이틀을 머물고 돌아왔으며 1610년 조카 배성립(裵誠立:형 명원의 子)과 김해 신산서원 남명 조식의 위패봉안식에 참여 하였다.
내암 정인홍,한강 정구, 모헌 하혼, 구담 정인준,역양 문경호, 고대 정경운, 모계 문위, 남계 이중무, 심원당 이육등과 교류하였으며,
형 월정 배명원과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사우들의 존경을 받았다.
-합천 명곡사 전경-
호조정랑에 증직되었으며 명곡서원(明谷書院:현 明谷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남 합천군 야로면 덕암리 지문동에 있다. 배위는 공인 남평문씨 습독관 문인복(文仁福)의 따님이다.아들은 장남 배효건(裵孝建) 차남 동지중추부사 배순립(裵順立)이다.
鄭仁濬(1551-1625)
정인준의 자는 德淵, 호는 龜潭, 본관은 瑞山이며, 부친은 사헌부지평을 지낸 鄭俔이다. 鄭仁弘이 그의 再從兄이다.
정인준은 157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후에도 과거준비에 전념하였으나, 광해군 대에 이르러 과거를 단념하고 존양 공부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忘憂堂 郭再祐와 함께 창의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계축옥사 때는 북인 정권의 핵심이자 재종형인 정인홍과 반목하였고, 결국 백형 鄭仁洽과 함께 거창 靑林으로 물러나 살았다. 정인홍이 招隱詩를 보내 회유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한 채 학문연마와 강학에 힘썼다.
桐溪 鄭蘊이 全恩說을 주장하다 耽羅로 귀양 가자, 시를 보내 위로하였다. 1617년에는 李大期·洪純慤과 함께 동갑계를 만들어 매년 봄·가을에 회합을 가졌다. 이 동갑회는 이후 지속되었는데, 1622년 이대기가 甲會圖에 쓴 서문이 전한다. 이 시기 蘆坡 李屹·无悶堂 朴絪·龍湖 金相南과 교유하였다.
栗津의 龜湖 가에 정사를 짓고는 ‘龜潭’이라 자호하였다. 주위에 소나무 수십 그루를 심어 놓아 松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625년 鄭謇·林眞怤 등과 가야산을 유람하였는데, 함께 한 이들은 모두 계축년 옥사 때 뜻을 같이 한 사람이었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1740년 합천 雲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