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55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내몽고자치구에 들어설 무렵.
대평원에는 어디나 식목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내몽고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어디에선가 식목을 하고 있을 터이다. 언젠가 상해의 푸동공항에서 만난 일본의 남녀 사막탐사팀의 모습도 얼핏 떠오른다. 황사(黃砂)의 재앙은 잠시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모양이다.
아래 사진은 울란차뿌에서 방향을 바꾸어 호화호특으로 가는 길.
내몽고 교통의 대동맥--, 고속도로와 잘 정비된 국도, 그리고 건설중인 고속전철이 한 눈에 보인다.
북경에서 내몽고를 거치는 이 6번 고속도로는 신강과 티베트에 이르는,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호화호특(呼和浩特, 후허하오터), ‘푸른 성(靑色的城)’이란 뜻인데 1581년 청색의 벽돌로 성을 쌓은 데서 유래한다.
내몽고의 수부(首府)로서, 줄여서 ‘호시(呼市)’라고 부른다.
북경에서 불과 524㎞, 현재 중국에서 가장 활력 있는 도시의 하나로 꼽힌다. 만주에 가까워서인지 조선족이 3천명에 이른단다.
버스에서 너무 급하게 찍은 사진.
내몽고자치구박물관, 세 번쯤 놀랐다기보다 의외로 느낀 점.
첫째는 웅장한 건물, 다음으로는 외관에 비해 빈약(?)한 전시물, 마지막으로 그런데도 차량과 사람으로 북적이는 점이랄까.
흉노, 동호, 선비, 돌궐, 거란, 여진, 몽고 등 대부분 사라진 북방소수민족의 문물이라 특색은 있다 해도 엉성해 보인다? 나의 무식함을 탓해야 할까 보다.
우선 눈에 띄는 볼거리는 거대한 공룡화석, 높이 12m 신장 26m로 진짜는 70%쯤 된단다. 한때 공룡과 맘모스의 낙원이었다니 그 화석도 많을 법하다.
박물관 단골멤버 한 가지만 찍었다.
흉노귀족여성 머리장식은 한(漢)나라, 유리 목걸이는 전국시대 것이니 2천년은 훨씬 넘었다.
오르도스(鄂爾多斯, 내몽고자치구 내의 황하유역)에서 출토하여 오르도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적었으니 모조품이란 얘기다.
그러나 모조기술도 기술이다. 이 방면에선 중국이 가장 앞서지 않았을까.
서한(西漢, 前漢과 같음)시대 지도다. 몇 군데서 같은 걸 봤으니 검정본인 모양이다.
한무제 시절인 것 같은데, 우선 흉노의 판도가 넓다. 한나라에 당해 서역 땅을 뺏기고도 몽고 전역과 바이칼 호를 넘었다. 중국에 녹아버린, 이젠 없어진 민족이니 윈윈을 해서 손해날 것 없으니까. 큰 전시장의 이름조차 아예 ‘흉노와 중원(匈奴與中原)’.
외몽고의 독립은 중국으로서는 뼈아픈 일이고 구소련의 입장에서는 20세기 최고의 외교적 성과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 눈길이 간다. 삼한 땅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데 한사군(漢四郡)이 저렇게 넓었나. 중국인들이 이 지도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인간정신이 진보해도 역사분쟁, 영토분쟁은 어려운 숙제다.
춘추전국시대 북방민족인 산융(山戎), 동호(東胡)족의 연회 그림.
2,3천년 전 소위 오랑캐들의 술자리인데, 벌판에서 그야말로 호방하게 마신다. 세월과 인종은 달라도 왠지 통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술잔을 비우고 속을 보이는 모션이 원래는 오랑캐 풍습이었다는 얘기인가.
저녁 무렵, 난데없는 폭죽소리가 요란하다.
이 사람들은 무슨 기공식이라든지 개인의 결혼식이나 환갑연에도 시도 때도 없이 폭죽을 터뜨려댄다나. 하늘에 연기가 자욱하고 귀를 막는 사람도 있다.
정도가 지나쳐 환경오염 수준이란 말까지 듣는 모양이다. 하지만 머잖아 없어질 미풍양속(?)이 될 지도 모른다.
8월 6일 아침, 출근 길의 호시(呼市).
사람 사는 곳은 어차피 비슷한 모양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빠르게 비슷해지는 중이고 비슷해 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몽고어는 별로 눈에 안 뜨이고 정말 양념으로 쓰일 정도랄까. 자치구의 생색을 낼 정도도 안 되지 않나.
하긴 호시의 인구 350만 명 중 몽고족은 20만에 불과하고, 그들은 학교도 중국어학교에 다니는 형편이란다.
칭기즈칸 시절에 세계의 80%를 정복할 당시, 몽고족의 인구가 100만, 전사(戰士)는 10만이었다는데….
가로조경은 스케일이 크다. 저런 곳에 돈을 쓰나 싶다. 대구, 아니 우리나라 대도시에서 이 정도 하는 곳은 드물지 않을까.
호시 안에도 이런 괜찮은 강이 있나. 예상밖의 풍광이다.
알아보니, 호시에는 북쪽 음산산맥(陰山山脈)에서 흘러내린 대흑하(大黑河) 소흑하(小黑河) 두 물길이 있다.
대흑하는 외곽을, 소흑하는 도심을 흐르는데, 이 소흑하의 물빛이 검어보이지도 신비해보이지도 않는다. 하기야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들이 아닌가. 수로와 하상의 정비 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오늘의 일정은 휘텅시러 초원, 그리고 몽고의 마지막 밤이다.
초원 입구에 ‘황화구’라는 골짜기가 있다.
‘남유구채구(南有九寨溝) 북유황화구(北有黃花溝)’. ‘남쪽에 구채구, 북쪽에 황화구’라고 선전하면, 사천성의 구채구가 좋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 우선 스케일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황량한 고원에서 이만하면 별천지라고 할 만하다. 왼쪽에 리프트 아랫역이 보인다.
노란 꽃이 만발하여 붙인 이름이라는데 여행객들 때문에 씨가 말랐단다. 타이틀 롤을 하는 이 노란 꽃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없다. 억울해서, 꽃 대신 '비류직하 유아독존(飛流直下 唯我獨存)' 사진 한 장을 남기기로 했다. 나로서는 천하제일 명당이라 생각하면서.
우리의 성황당을 연상시키는 ‘오보산(ovoo山)’. ‘돌무더기의 산’이란 뜻으로 중국어로는 ‘아오빠오(敖包)’로 읽고 표기한다.
많이 없어졌다지만, 지금도 기복(祈福)과 제사의 기능을 하는 모양이다. 삭막한 환경에서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인공물이라고 할까.
원래는 칭기즈칸 때 만들어 방위와 경계를 표시하는 군사적 용도였다고 한다.
오보산에서 바라본 건너편 언덕은 황화구의 한 쪽 절벽을 이루는 셈이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시멘트 쓰레기통, 바람에 견딜 만하다.
드디어 게르(ger)에 왔다. 중국어로는 파오(包, 정확한 발음은 빠오).
원래 유목민들의 이동식 주택이니까 당연히 천막이다. 천막 한가운데로 자연채광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이 날 잔 게르는 21세기형 시멘트제였다.
일행 전부가 처음인 말타기 체험.
견마(牽馬)잡이를 따라 조심조심, 여행이니까 이런 스릴도 맛보는 것 아닌가.
왕복코스에 300원, 이번 여행의 유일한 옵션이다. 한 철 여행객만을 위해 마장(馬場)을 운영해야 하니 그네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될 것이다.
한 사람 빠지고 다 탔나, 돈도 아깝기는 하나 이 푸른 초원에서 다른 할 일도 마땅찮으니.
백마를 탄 가이드 아가씨, 아니지 열 살 먹은 아이가 있다니, 그렇다고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하여튼 세미프로다. 대열을 벗어나 혼자 달리기도 하고. 이런 멋으로 이곳 가이드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내친김에 견마잡이 없이 달려보는 추가옵션이 30원, 나도 손을 들었다.
근래 대구에서도 말타기 레저가 인기를 끈다고 한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고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운동효과가 있다는 점, 나도 체험으로 감은 잡았다.
초원 속 게르가 그림 같다. 그리고 그 속에 몽골족들의 생활이 있다.
휘텅시러(輝騰錫勒)는 몽고어로 ‘추운 고원’이란 뜻. 호시에서 135㎞, 내몽고의 교통요충지 울란차뿌(烏蘭察布)시 관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여름에는 시원하여 초원 피서의 명승지로 개발되어 있지만, 그런 만큼 한 철 장사로 먹고 살아야 한다.
사방에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음산산맥 북록(北麓)의 평균 해발 2,100m, 면적 600㎢(동서 100㎞, 남북 6㎞)의 이 광대한 고원초지에는 양질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아시아 최대의 풍력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땅 밑에는 무궁무진한 지하자원, 땅 위에는 신재생에너지 바람….
고원인데도 습지가 많다. 5월부터 9월까지 여름에는 야생화가 장관을 이룬다. 그야말로 ‘꽃의 바다(花的海洋)’을 연출한다.
어쩌다 보이는 자갈돌 사이에도 앙증맞게 핀 빨간꽃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말도 타보고 오보산에도 올랐으니 전통씨름 구경이 빠질 수 없다.
물론 모래는 깔 필요가 없는 초원 무대에서. 흉내만 내는 게(그럴 수밖에 없지만) 싱거워서 우리 선수들도 나선다.
난데없는 한몽친선 씨름대결이 펼쳐지는데…. 결승전은 예상을 뒤엎고 우리 선수 한 판 승.
1976년 몽골공화국의 오이도프가 양정모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신식씨름 레슬링, 갑자기 그 질긴 인연을 떠올린다.
기다리던 몽고초원의 밤이 왔다. 최후의 만찬이기도 하고.
캠프파이어가 대형 게르 안으로 장소가 변경된 모양이다. 하긴 나무를 아껴야지.
전통환영식에 나온 멤버들이 전통가무쇼를 선보인다. 전통은 신선하고 언제나 매력을 준다. 또 우리는 그것을 보러 온 것이다.
공선생의 삼국지 본토노래는 늘 분위기를 띄우는 메뉴다. 천하제일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아마 제일일 것이다. 장소가 몽골초원이라서 좀은 어색헸지만.
예쁘게 단장한 양 한 마리가 등장하는 순간이 클라이맥스랄까.
미치도록 즐거운 잔치, '광환연(狂歡宴)'의 플래카드 아래서 초원의 밤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날 밤 오랜만에 비몽사몽 무아의 경지에 들었다.
내가 잔 게르의 내부.
보기는 그럴싸한 2인용인데 습기 때문에 바닥이 축축하고 세숫물도 찍어 발라야 할 정도로 물이 쫄쫄 나온다. 기특하게도 불평하기 전에 전지구적 차원에서 환경을 걱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튿날 8월 7일 다시 호시(呼市)로 나와서 점심을 먹은 곳, ‘대한문(大韓門)’.
한식당 네 곳 중 동포가 운영하는 유일한 식당이다. 반찬이 너무 많다, 이래도 남을까, 괜한 걱정까지 해본다.
처음 몇 년간 장사가 안 되어 머리칼이 다 빠질 정도였다가 ‘대장금’ 때문에 대박이 났고 그 후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호시 시내의 대소사(大召寺) 앞 광장.
‘불조청성(佛照靑城)’을 내건 높은 문이 내몽고 최대의 성지를 상징하고 있다. 청성(靑城)은 ‘푸른 도시’로 호시를 뜻한다.
광장을 지키는 듯한 청동상은 알라탄칸(阿拉坦汗).
칭기즈칸의 17세손으로 16세기에 이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크게 발전시키면서 호시를 건설한 뛰어난 지도자, 그러니까 호시의 얼굴로 내세울 만하다.
라마교 사원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내몽고에서 가장 큰 대소사(大召寺). 호시가 건설될 당시인 1580년에 세워졌다니 최고최고(最古最高)이긴 하다. 티베트를 포함한 중국 전체에선 세 번째.
그런데 ‘대소사’가 아니라 별명인 ‘무량사(無量寺)’란 현판을 달고 있다. 이상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말을 바꾸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얘기다.
이 불전 안인가. 좌고 2.5m의 순은(純銀) 석가모니상, 청나라 강희제가 앉았던 자리가 볼만했는데 모든 실내 공간에서 촬영은 절대 불가, 다 뺏긴다니까 엄두를 못 낼 수밖에. 황제가 앉았던 자리라 해서 수백년 동안 아무도 못 앉는 것도 이상하고.
이것저것 뭐가뭔지 이상한 것도 참 많았다.
기사와 가이드는 내몽고 팀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몽고족 기사 빠샤오뚱(巴曉東)과 그의 철마(鐵馬) 앞에서. 듬직한 체구에 비싼 40원짜리 ‘중화(中華)’담배를 즐겨 피운다. 간밤에 의전상 그의 담배를 두어대 얻어피워 주었더니 입이 귀까지 올라갔다. 내가 가끔 칭기즈칸의 후예냐고 물어주면 그의 기분이 더더욱 좋아진다.
이번 여행의 유일한 여성 가이드 채(蔡)양. 도전적인 외모에 명랑하여 나이를 모르겠다. 열 살 먹은 아이가 있다는데, 그런 걸 거짓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럴 때 하는 말,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
흉노에게 시집간 한나라 미인 왕소군(王昭君).
그녀의 묘가 있는 소군박물원(昭君博物院)이 호시 남쪽 대흑하 강가에 있는데, 면적은 4만평에 이른다.
전한 원제(元帝)때인 기원전 33년, 18세의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65세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에게 시집가서 60년간 평화를 이끌어낸다는 줄거리인데….
무엇이 한 여자의 행적을 이렇게 큰 박물관으로 남아있게 한 것일까.
중국박물관은 대체로 매우 실감나는 인형이 많다. 이 곳 사람들은 가장 좋은 것에 무조건 ‘소군’이란 이름을 붙이는데, 게다가 소군은 중국 4대 미인이 아닌가. 그냥 미인도 아니다. 후세의 평가가 너무 좋아 ‘선녀(仙女)’의 화신으로 올라 있는 판이다.
누군가 이 인형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첫눈에 ‘아, 미인이구나!’를 중얼거려 주어야 한다.
소군의 무덤은 작은 산이다. 높이 33m, 바닥면적 약 3천평에 이르니, 몸이 안 좋은 사람은 등산이라고 생각하고 올라가야 한다. 늘 방초(芳草)가 덮여 푸르다고 하여 ‘청총(靑塚)’이라고도 부른다.
무덤 가운데 정자가 서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아서라 말아라 잡동사니 좌판까지 벌여놓았다.
하기야 소군이 흉노 땅에서 방직과 농사기술을 전파하여 민생을 보살핀 이력이 있으니 싫어할 리는 없겠지만.
정자 안 석비에 새겨진 채 오늘의 세상을 내다보는 왕소군. 1997년 세워진 이 석비는 그다지 품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아름답고 슬픈 사연은 후세에 빛나는 문인재사들의 시부(詩賦)로 이어진다. 이백, 백거이, 소동파, 노조린, 양만리….
특히 당대(唐代)의 동방규(東方虯)는 ‘소군원’ 다섯 수로 대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할까.
인구에 회자되는 제5수를 보자.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라
자연의대완(自然衣帶緩) / 저절로 옷의 띠가 느슨해졌는데
비시위요신(非是爲腰身) / 몸맵시 다듬은 것은 아니라오
이 중에서 왕소군이 직접 읊었다는 구절,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은 오늘날까지도 인생사의 고비와 좌절을 어루만져주는 천고의 절창으로 사랑받고 있다.
태풍 때문에 이틀 밤을 묵게 된 상해의 가일호텔(假日酒店).
8월 8일 아침 대구로 출발해야 하는데, 태풍이 상해와 절강성 일대를 통과한단다. 막판에 또 날씨가 재 뿌리려나.
꼬박 하루 붙들렸고, 1박과 3끼 해결에 50달러씩 더 들었다. 천재지변이라 여행사측 책임은 물을 수 없단다.
그 정도로 고비를 넘기게 해준 운영진, 가이드에게, 다들 고마워한다. 그리고 호텔에도 고마워해야지.
영문 이름이 얼핏 눈에 들어오는데, Holiday Inn?
그렇지, 마지막 날 하루 휴일을 잘 보냈지. 아니다, 보름 동안 정말 휴일 같은 휴일을 보낸 것이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건물 유리에 부서지고 있다.
♣ 이 글은 대구향교 청년유도회(靑年儒道會) 주관 제5기 중국탐방 프로그램(2012.7.25~8.8)의 일원으로 참여한 데 따른 개인의 기행문입니다.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사진을 조합한 가벼운 읽을거리로 써본 것입니다. 제목을 ‘스케치’로 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여행에 조금이나마 흥미를 갖게 된다면 만행으로 생각하며, 그동안 변변찮은 글을 읽어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제가 대학에서 몽골인 유학생을 가르쳐 봤는데, 그는(내몽고 자치구에 사는 몽골족이 중국화 되어서) 민족 동질성을 못 느낀다고 하더군요. 민족 정체성이 변했다고 하더군요.
유목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몽골족 통일은 무망한 것 같습니다...
대장정의 글...수고하셨고 감사드립니다.
110편같은 11편의 대 서사시...굉장하셨어요.
어설피 읽었지만 어느날엔가 아하 그때 그 내용
하고 떠올릴 수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그러기를 바라면서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6월의 시와 노래가 늘 가득한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꿀잠 이루소서~
카페 불 밝히는 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할까요...
托你的福,上完了。
太感谢。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라"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온 유명한 구절을 보니 반갑네요..
중국종단 스케치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잡동사니 짧은 지식을 총동원했습니다.ㅎ
4번 문화탐방 가서 기행수필(山水遊記?)은 이것 1번만 성공했지요...
연재물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진 속 모습이 무척 젊어 보이시네요.
다음 속편도 있으려나..하고 기대하게 되네요.
응원 덕분에 끝냈습니다.^^
다른 단품들로 가끔 불 밝힐까 합니다...
가끔 읽다가
흥미가 생겨 처음부터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간혹 제가 업무차 다녔던 지명이 나올 땐 반갑기도 했구요~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요~
감사합니다~
중국에서 사업...
업무를 떠나 낭만적인 느낌이 듭니다.
중국어를 배우면서 막연하게 중국 근무를 꿈꾸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